작가의 말
나의 스승 낌 런의 가르침
2000년은 잊을 수 없는 특별한 해였습니다. 그해 봄 나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한여름인 7월엔 역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서울의 거리와 뉴욕의 거리에서 본 사람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했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낯설고 믿을 수 없던지요. 젊은 시절 내가 맞닥뜨렸던 미국인과 한국인은 전쟁터에서 손에 총을 들고 내게 총을 쏘아 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비행기가 김포 공항에 내릴 때 나는 혼란스럽고 주저하는 마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꺼림칙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청룡 여단 해병대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전쟁 당시 북베트남 군대는 그들을 일컬어 박정희 군대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한국군을 미군이나 남베트남군보다 훨씬 두려운 적군이라 생각했습니다.
공항의 입국 심사대 앞에서 나는 순식간에 인산인해의 한국인 무리 속에 파묻혔습니다. 그러면서 전쟁의 기억 역시 내 마음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주변에는 한국의 청춘 남녀, 아저씨, 아줌마, 어린이들이 하노이의 내 친구, 내 자식, 내 아내, 내 부모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옷차림과 친숙한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단지 사용하는 언어만 다를 뿐 나머지는 똑같았습니다. 심지어 언어의 차이조차 거리감을 만들어 내진 않았습니다. 내가 인파에 파묻혀 어찌할 바를 몰라서 헤매고 있을 때 아주 매력적인 아가씨가 눈치를 채고 나를 입국장 출구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습니다. 출구에는 소설가 김남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통역이 없어서 김남일은 한국어로 인사를 하고, 나는 베트남어로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악수한 다음 서로의 어깨를 껴안았습니다. 눈물이 핑 돌 만큼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밤 방현석, 김남일, 김정환, 이성아 등 서울의 소설가, 시인, 《한겨레21》의 기자들이 시내까지 안내해 주고 식사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통역이 없어서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함께 그 시간을 즐겼습니다. 통역이 없다는 것이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 친구들이 인사동 거리를 구경시켜 주고 아름다운 전통 주점으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한국 친구들은 한국어를 하고 나는 베트남어를 했기에 서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또한 서로를 아주 잘 이해했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마치 하노이에 있는 듯한, 하노이의 시인들 곁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안동 소주와 전주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얘기 내용과 낭송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속에 어려 있는 깊은 정감과 울림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 만났던 소설가와 시인 중 젊은 사람들 대부분은 1980년대 군사 독재에 저항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또래의 몇몇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전엔 서로에게 총을 쏘던 사이였는데 그날은 그렇게 가까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습니다. 우리가 정녕 서로의 ‘원수’인지, 아니면 몇십 년 만에 만난 ‘절친’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몇 년 후에 나는 세 차례 더 한국을 방문해서 여러 곳을 가 보았습니다. 부산, 포항, 경주, 제주도, 남이섬, 휴전선…. 방문이 거듭될수록 나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더욱더 친밀하고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어를 할 줄 모르지만 미국을 세 차례 방문해서 그 넓은 나라 곳곳을 가 보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미국인들을 친구로 사귀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나와 친구가 된 미국인들은 모두 베트남전 참전 군인 출신이었습니다.
내게 전쟁은 인생에서 접한 가장 커다란 비극이었습니다. 전쟁은 내게 결코 바래지 않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나날이 더욱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끈질긴 고통 중 한 가지는 이런 것입니다. 나와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났던 이들이 본래는 서로를 존중하고 애정을 나누고 친구로 사귈 수 있는 존재들이건만 서로를 죽이려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베트남, 한국, 미국의 수십만 젊은이들이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이 서로를 죽이면서 흐르는 핏물로 강물을 만들었습니다. 어찌 이렇게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부조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내 생각에 그 광기 어린 살육 행위의 원인은 서로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이해가 없고 공감이 없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특히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젊은이들이 정치권력에 속아서 서로를 적개시하고 살육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1992년이 되어서 베트남과 한국은 외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그 이후로 두 나라의 협력 관계는 나날이 강력하고 견고하게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경제 협력 위주로 관계가 진행되었습니다. 문화 관계, 특히 문학 교류 분야는 여전히 초보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2년이 되어서야 한국 문학 작품 『춘향전』과 『한국 현대시 5인 시선집:고은, 신경림, 김지하, 김광규, 박제천』이 베트남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 방현석의 『랍스터를 먹는 시간』이 출간되었고, 2010년에 『고은 시선집』이 출간된 정도입니다.
한국에 번역 출간된 베트남 문학 작품의 수는 더욱 적습니다. 실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에 알려진 베트남 문학 작품의 수는 극히 적습니다.
1975년 이전에 베트남은 프랑스, 미국과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30여 년간의 기나긴 베트남 전쟁 기간 세계는 아주 거칠고 사납게 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한쪽은 사회주의 체제에 속해 있었고 다른 한쪽은 자본주의 체제에 속해 있었습니다. 베트남 현대 문학 작품이 건너편의 세상 속에 소개될 기회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 30여 년 동안 베트남 문학 작품의 대부분은 단지 프랑스, 미국과의 전쟁을 그리면서 동시에 적개심 가득한 냉전 체제와 세계를 에워싸고 있는 반문화적 대결을 묘사하는 데 치중했습니다. 당시의 베트남 소설가, 시인, 독자들은 오로지 스탈린 시대의 소련 문학과 모택동 시대의 중국 문학만 접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한국, 일본, 영국, 미국, 스페인, 독일 등의 문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수십 년간 계속된 냉전 시대 속에서 반공 국가들의 시와 소설은 자본주의의 추악한 독극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세계인들의 눈에 비친 베트남은 단지 전쟁터로만 보일 뿐 문화와 전통이 있는 나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베트남 문학 작품이 세계 각 나라의 독자들에게 소개된 것은 20년 전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이후부터입니다. 수십 년간의 전쟁 이후 세계를 향한 베트남 민족의 첫 번째 평화 사절단은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 작품들을 통해서 세계는 베트남이 전쟁과 공산 혁명의 나라가 아니라 수천 년의 문화 전통이 이어져 오는 민족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베트남의 대작가이자 나의 스승인 낌 런은 내게 이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자네처럼 전쟁을 겪은 작가는 말이야, 전쟁 속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른 잔인한 폭력과 끔찍한 적개심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네. 물론 전쟁에 대해서 글을 쓸 때는 반드시 적개심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야 해. 왜냐하면 전쟁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곧 사랑과 인도적인 성품과 관용에 대해 쓰는 것이고, 전쟁에 관한 글은 곧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니까 말이야.”
2012년 4월
바오 닌
전쟁의 슬픔
1
B3전선의 후방 기지인 깐 박 지역에 전쟁 이후 첫 건기가 고요하게 그러나 때늦게 찾아왔다. 9월과 10월, 11월이 지났는데도 야 끄롱 뽀꼬 강변을 따라 우기의 짙푸른 강물이 계속 범람했다.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낮은 뜨거웠고 밤에는 비가 내렸다. 가는 빗발이었지만, 비… 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산은 흐릿했고 멀리 길들은 안개 속에 잠겼다. 나무들은 흠씬 젖었고 숲은 고요했다. 대지가 밤낮으로 김을 물씬 뿜어 대어 온통 초록의 바다에 나뭇잎 썩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섣달 초순에 들어서도 숲의 모든 길은 여전히 질척이는 진창이었고, 평화 속에 버려진 길들은 사람이 거의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져 있었다. 길들은 무성한 수풀 속에 가라앉아 조금씩 흔적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런 얄궂은 날씨에 이 같은 진창길을 지나는 여정은 말할 수 없이 고되고 힘들었다. 사 터이 지방 동쪽에 있는 ‘악어 호수 계곡’에서 67현을 지나 뽀꼬 강변 서쪽의 ‘십자가 언덕 삼거리’까지는 50킬로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인데 덩치 크고 튼튼한 질(Zil) 트럭의 성능 좋은 3기통 엔진으로 종일 쉬지 않고 사력을 다해 달렸어도 제시간에 닿지 못했다. 밤이 늦어서야 고이 혼 덤불숲 어귀에 겨우 다다랐다. 시냇가에 차를 세웠다. 냇물에는 썩은 나뭇가지가 가득 떠다녔다. 운전사는 운전석 안에서 자고 끼엔은 짐칸으로 올라가 해먹을 걸고 혼자 누웠다. 한밤중에 비가 내렸다. 대부분 소리가 되지 못하고 고요히 떨어져 내리는, 안개처럼 감미로우며 얇고 가는 빗발이었다. 낡고 오래된 트럭 덮개 천막에 빗물이 스며들어 얼룩이 졌다. 트럭 바닥에 가지런히 깔아 놓은, 전사자의 유골들이 담긴 나일론 자루 위로 빗물이 천천히 방울져 떨어졌다. 습한 공기는 더욱 끈끈해지고 축축해져서, 마치 냉기가 도는 기다란 손가락들이 해먹의 안쪽을 시나브로 쓸어 대는 것만 같았다. 비는 부슬부슬 구슬프게 내렸다. 비몽사몽 중에 시간이 소리가 되어 흐르는 것 같은 지루한 빗소리를 들었다. 깨어 있을 때는 물론이고 꿈속에서조차 밤은 칠흑같이 깜깜했고 축축한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젖은 바람이 길게 숨을 토했다. 갑자기 트럭이 엔진도 운전사도 없이 저 홀로 천천히 바퀴를 굴리며 고독한 숲길을 꿈결 속에서 떠도는 듯했다. 시냇물 소리에는 멀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깊은 숲의 한숨 소리가 은밀히 섞여 있었다. 그것은 과거 어느 한 시대로부터 울려오는 메아리 같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풀밭 위로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낙엽 소리 같은 지극히 몽상적인 것이었다.
이곳은 끼엔도 잘 알고 있는 지역이다. 바로 이곳은 1969년 건기의 끝 무렵, B3전선 전역을 참혹한 절망으로 몰아갔던 그 건기에 불운의 제27 독립 대대가 적들의 포위공격으로 전멸당해 그 이름조차 완전히 사라져 버린 곳이다. 끼엔은 그곳에서 살아남은 열 명의 행운아 중 하나였다. 전투는 끔찍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이었다. 그해 건기에 햇볕은 타는 듯이 뜨거웠고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휘발유에 흠뻑 젖은 숲은 지옥 불에 휘감겼다. 괴멸당한 중대들을 재편성하면 이내 또 괴멸당했다. 네이팜탄에 맞아 참호를 뛰쳐나온 이들은 병사건 지휘관이건 할 것 없이 모두가 이성을 잃고 빗발치는 총탄 속으로 우르르 뛰어들거나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차례로 쓰러져 갔다. 머리 위로는 나무 꼭대기 바로 위까지 내려온 헬리콥터들이 중기관총의 총구를 한 사람 한 사람의 목덜미를 겨냥해 쏘아 대는 듯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콸콸 쏟아져 땅을 흥건히 적셨다. 덤불숲 사이에 있는 마름모꼴의 이 불모지에는 나무와 풀이 지금까지도 넋이 돌아오지 않아 싹을 틔우지 못한다고 한다. 갈가리 찢기고 부서지고 깨진 나뭇조각들만이 어지러이 널린 채 헐떡거리며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다.
“항복하느니 죽는 게…. 동지들, 차라리 죽어 버리자!” 대대장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는 권총을 마구 휘두르다가 바로 끼엔의 눈앞에서 자기 머리에 총구를 들이댔다. 그의 귀에서 뇌의 수액이 쏟아져 나왔다. 끼엔은 혀가 굳어 어… 어… 신음 소리만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미군들이 옆구리에 자동 소총을 끼고 돌진해 왔다. 총알이 벌 떼처럼 날아들었다. 끼엔이 크게 딸꾹질을 하며 총을 떨어뜨리고 옆구리를 움켜쥔 채 꼬꾸라졌다. 그는 뱅글뱅글 원을 그리며 물이 말라 버린 시내로 천천히 굴러 떨어졌다. 그의 뜨거운 피가 완만하게 비탈진 냇가를 흠뻑 적셨다.
며칠 후 까마귀 떼가 하늘을 뒤덮었고, 미군이 물러가자마자 우기가 들이닥쳐 숲에 홍수가 졌다. 전장은 늪지로 변했고 짙은 갈색 수면 위로 새빨간 피가 막을 이루며 떠올랐다. 물 위에는 퉁퉁 불어 엎어지거나 뒤집힌 시신들, 시커멓게 타 버린 들짐승의 시체들이 폭탄에 잘게 부서진 나뭇가지나 나뭇잎들과 뒤엉켜 떠다녔다. 홍수가 지나가자 그것들은 하나같이 살 썩는 냄새를 풍기며 진흙투성이의 모습을 햇빛 아래 드러냈다. 끼엔은 냇가를 기어 올라갔다. 그의 입과 상처에서는 시체에서 흐르는 피와 같은 차갑고 끈끈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뱀과 전갈이 그의 몸을 기어 지나갔다. 저승사자가 그의 몸을 더듬는 듯했다.
그때부터 아무도 27대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패배가 낳은 수많은 혼령과 귀신은 여전히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거부하고 밀림 근처, 잡목 숲 모퉁이, 강물 위를 배회했다. 그 후 사람들은 독기를 뿜어내는 이 희뿌연 무명의 골짜기에 듣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한 ‘고이 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따금, 아마도 혼령들의 축제가 열리는 날이면, 이 불모지에 대대의 전 부대원이 점호를 하듯 모여든다고 한다.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산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는 바로 병사들의 황폐한 영혼이 내는 목소리인 것이다. 이승에 사는 우리들은 수시로 그 소리를 듣게 되고 때로는 소리의 의미까지 이해한다.
끼엔이 전해 듣기로는, 밤에 이곳을 지날 때면 새가 사람처럼 탄식하며 흐느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결코 나는 법이 없고 한결같이 울음만 울 뿐이어서 아직껏 본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실제로 그런 종류의 새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곳의 죽순은 마치 피가 뚝뚝 흐르는 살점과도 같이 소름 끼치도록 붉었다. 그 같은 죽순은 서부 고원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반딧불이는 두려울 정도로 컸다. 철모만큼이나 큰, 때로는 그보다 더 큰 반딧불이를 본 사람도 있다.
이곳에서는 해 질 녘 나무들이 바람결에 내는 신음 소리가 마치 귀신의 노랫소리와도 같았다. 그리고 숲의 어느 구석도 다른 어떤 구석과 같지 않고, 그 어느 밤도 여느 밤과 같지 않아서 누구도 이곳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방금 지나간 전쟁에 대한 가장 원시적이고도 야만적인 전설들, 온몸을 부들부들 떨게 하는 허구적인 이야기들도 이 지역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아마도 산이 낳고 숲이 낳았을 것이다. 대체로 기가 약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살기 어려웠다. 여기에서 산다면 두려움에 미쳐 버리거나 말라비틀어져 죽고 말 것이다. 그래서 1974년 우기에 연대가 이 지역에 은신했을 때, 제단을 세우고 숲 속을 여전히 떠돌고 있는 27대대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끼엔의 정찰대는 비밀리에 진혼제를 올렸다. 향불이 밤낮으로 깜빡였다.
숲에 있는 이곳 원주민의 혼령들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한다. 이 밤 질 트럭이 서 있는 곳 아주 가까이에는 나환자 마을로 들어가는 오솔길의 자취가 남아 있다. 3연대가 여기에 들어왔을 때 마을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끔찍한 질병과 끝없는 굶주림이 이곳의 모든 생명을 완전히 궤멸시킨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으스러진 육신을 끌고 다니는 귀신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고들 했다. 모두의 상상 속에서 악취는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연대에서는 병균을 없애고 소독을 하기 위해 마을에 휘발유를 부어 깡그리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병사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었고 귀신과 나병이 무서워 그 근처에는 감히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제1대대의 ‘작은’ 틴이 위험을 무릅쓰고 더듬더듬 이곳을 찾아왔다. 마을의 잿더미 속에서 그는 아주 큰 고릴라 한 마리를 쏘아 죽였다. 네 명이 매달려서야 간신히 그놈을 정찰대의 오두막집까지 메고 올 수 있었다. 그런데, 하느님 맙소사, 그놈을 땅에 눕혀 놓고 털을 벗겨 내니 어이구, 습진으로 희뜩희뜩한 피부에 살이 축 늘어진 퉁퉁한 할머니가 두 눈을 까뒤집고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끼엔과 대원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냄비와 그릇, 도마와 칼까지 모두 내던지고 잽싸게 달아났다. 연대에서는 아무도 이 이야기를 믿지 않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끼엔 일행이 정성껏 ‘그 사람’의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지만, 할머니의 복수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얼마 후 ‘작은’ 틴이 죽었다. 그리고 차례로 거의 모든 소대원이 희생되었다. 끼엔만이 홀로 이렇게 살아남았다.
당시… 당시라고는 해도 실은 겨우 작년 우기 때의 일이다. 깐 남 지역으로 내려가 부온 마 투엇으로 진군하기 위한 작전을 앞두고 끼엔의 3연대는 2개월 가까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때와 비교해 경치는 그다지 달라진 게 없었다. 숲에 있는 나무들의 수가 적어지거나 많아지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잡초들도 그들이 매일 지나다니던 오솔길을 남김없이 집어삼킬 만큼 자라지는 않았다. 당시 정찰대는 오두막집을 지을 장소로 바로 이 냇가를 골랐다. 그러나 저편 숲 속으로 10분 정도 더 들어가니 시냇물이 산줄기에 부딪혀서 둘로 갈라져 좁은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곳이 있었다. 시냇물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의 억새밭 사이에 있던, 낮고 초라한 초가지붕을 얹은 우리들의 ‘암자’가 지금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에 연대는 전방의 병사들을 후방 기지에 모아놓고 정훈 교육을 실시했다. 정치 교육만 계속 이어졌다. 아침에도 정치, 오후에도 정치, 밤에도 정치 …. 우리는 승리하고 적은 패배할 것이다, 북베트남에 풍작이 들었다, 세계는 세 진영으로 분명하게 나뉘었다…. 물론 귀염둥이 우리 정찰병들은 언제나 열외였고 거의 구속당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전선으로 불려 갈 때까지 음탕한 놀이에 열중하거나 빈둥거릴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사냥을 가거나 덫을 놓거나 독을 풀어 물고기를 잡고 밤이 되면 카드놀이를 했다. 끼엔이 그때처럼 도박에 푹 빠진 적은 없었다. 닥치는 대로 판을 벌였다. 보통은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곧바로 자리를 깔았다. 눅눅한 데다 땀 냄새와 모깃불 연기로 숨이 막힐 듯한 공기 속에서도 도박꾼들은 밑천이 몽땅 털릴 때까지 카드짝에 들러붙어 있었다.
판돈은 대체로 ‘동포’들의 지독한 냄새가 나는 잎담배였다. 그러다가 열을 받으면 물 담배, 부싯돌 또는 마리화나의 원료인 홍마초 줄기, 비상식량에다 사진까지 다 나왔다. 서양 여자, 베트남 여자, 예쁜 여자, 못생긴 여자, 애인에다 모르는 여자까지 온갖 여자 사진을 닥치는 대로 끄집어내어 한판 내기를 걸었다. 더는 승패를 가르고 자시고 할 게 없어지면 얼굴에 수염을 그리거나 검댕 칠을 하며 놀았다. 도박꾼이든 구경꾼이든 하나같이 시끌벅적 흥겹게 어우러져 숱한 밤을 지새우며 놀았다.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해 우기가 다 가도록 전투는 한 번도 없었고 소대원 열세 명이 모두 살아 있었다. ‘작은’ 틴도 죽기 전 이곳에서 한 달 넘게 함께 살았다. 깐도 아직 탈영하기 전이었다. 빈과 ‘큰’ 틴, 끄, 오안, ‘코끼리’ 따오까지 전부 살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죽은 자들의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꾸깃꾸깃 구겨지고 색이 바랜 카드 말고는 소대원들의 어떤 유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인, 텐, 잭!”
“여기, 퀸, 킹, 에이스!”
아직도 끼엔은 가끔씩 꿈속에서 그들을 만나고 카드짝들을 본다. “하트 하나, 다이아몬드 하나, 클로버 하나….” 혼자서 중얼중얼 카드놀이를 한다. 병사들은 연대 행진곡의 가사를 이렇게 바꾸어 불렀다. “어차피 죽을 것이다. 우리 힘차게 힘차게 내려치자. 모든 걸 잊고 마음껏 놀아나 보자….” 끼엔은 마지막 카드판을 떠올렸다. 소대에는 뜨, 탄, 번, 끼엔까지 단지 네 명만이 남아 있었다.
그때는 아직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새벽, 사이공 진격 개시를 알리는 포격이 있기 30분 전이었다. 황폐한 들판 저편으로는 풀을 가득 뒤집어쓴 미군들이 구찌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괴뢰군들은 펑펑 박격포를 쏘아 대거나 무턱대고 중기관총을 갈겨 대며 몸을 풀고 있었다. 보병들은 아직 도랑이나 개인 참호 속에서 잠의 마지막 한 자락까지 부여잡고 있었다. 그러나 곧 선봉에 서서 돌격대를 이끌게 될 정찰병 네 명은 “전진!”을 외치며 여전히 카드놀이에 몰두해 있었다.
“천천히 치자고.” 끼엔이 말했다. “만약 이 판을 다 끝내지 못한다면, 하늘이 우리 네 놈 모두 이번 전투에서 살아 돌아와 이 게임을 마저 끝내도록 해 줄 거야.”
“차암 영악도 하셔라.” 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느님이 속아 넘어갈 정도로 그렇게 멍청할 것 같아? 만약 우리가 일부러 판을 오래 끈다면 보나 마나 그 영감탱이가 우리 네 놈 모두를 지옥으로 떨어뜨려 서로 쥐어뜯게 만들걸.”
“네 명씩이나 내려갈 필요가 어딨어.” 뜨가 말했다. “나 혼자 이 카드만 움켜쥐고 가면 돼. 불가마를 지키는 저승사자들하고 포커를 치거나 카드점이나 쳐 주지, 뭐. 좋아서 환장할걸!”
갑자기 안개가 산산이 흩어졌다. 공격 신호탄이 솟아올랐다. 보병들이 와글와글 깨어났다. 탱크가 포탑을 좌우로 흔들며 전선으로 나아갔다. 탱크 체인이 땅을 갈아 대는 소리가 아침 바람을 흔들었다.
“그만 정리할까?” 끼엔이 카드를 던지며 투덜댔다. “내가 그렇게 천천히 패를 돌렸는데도 짜아식들이 모두 승부에만 안달이 나 가지고 말이야.”
“그건 그렇고,” 말라깽이 번이 흥분한 기색으로 허벅지를 치며 소리쳤다. “포커며 블랙잭이며 이 재밌는 것들을 어쩌자고 이제야 알게 되었냔 말이야. 좀 더 잘 치려면 연습을 해야겠어. 내가 죽으면 있지, 땅 구덩이 속으로 이 카드를 던져 줘. 알았지?”
“딱 한 벌밖에 없는데 저놈이 다 가져가겠다네. 징허게 약아 빠진 녀석 아니냐고?” 그 순간 발사된 수십 발의 대포 소리에 탄의 고함 소리가 묻혔다.
그러고 나서 30분쯤 후에 선두에 섰던 T54 탱크와 함께 번이 불에 타 죽었다. 그의 육신은 시커먼 재가 되어 무덤조차 필요 없었다. 탄은 봉 다리에서 죽었다. 그 역시 장갑차 안에서 운전병과 함께 불에 타 죽었다. 단지 뜨만이 떤 선 逑 공항 5번 출입문에서 끼엔과 함께 싸우다가 희생되었다.
29일 밤에서 30일 새벽까지 따우 바이 퍼 집 옥상에서 둘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끄가 배낭 밑바닥에서 카드를 꺼내더니 끼엔에게 주었다.
“어찌 되었든 난 이번 전투에서 뒈질 거야. 그러니 네가 가져가. 살아서 돌아가거든 이것으로 네 인생과 도박을 벌여 봐. 여기 2번, 3번, 4번 카드에 우리 소대원들의 신성한 혼이 깃들어 있어. 네가 백전백승하도록 우리들이 지켜 줄 거야.”
끼엔은 말없이 회상에 잠겼다.
이 밤 어떤 영혼이 누구의 영혼을 부르는 걸까. 깊고 음침한 숲 어디에선가 구슬픈 울음소리가 고이 혼의 쓸쓸한 산모퉁이를 타고 울려왔다. 외로이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이었다.
산도 여전했고, 숲도 여전했고, 개울 또한 변함이 없었다. 일 년이란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닌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라곤,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지금은 평화가 찾아왔다는 것뿐이다. 한 번 뿐인 생에 두 개의 세상, 두 개의 시대를 살게 되었다….
(작가의 말, 본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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