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려운 숙제> -
이제 곧 국어 시간입니다. 흥덕이는 가슴이 콩닥콩닥 뜁니다.
‘어쩌지? 아무래도 오늘 나 읽으라고 시킬 것 같은데…….’
이상하게 이런 불길한 예감은 더 잘 맞습니다. 지난번 국어 시간에도 이런 생각을 하던 흥덕이에게 선생님은 아이들 앞에서 책을 읽도록 시켰습니다.
수업이 시작되자 선생님은 오늘 새로 진도를 나가는 단원의 제목을 칠판에 크게 썼습니다.
“자, 여러분. 오늘은 먼저 소리 내서 읽기를 해 보겠어요. 누가 먼저 읽을까? 그래, 태민이!”
“네.”
“처음부터 읽어 봐. 선생님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태민이는 교과서를 앞으로 쭉 내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말의 느낌을 살려 이야기를 읽어 보는 단원의 「설문대 할망」이라는 재미난 이야기였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야. 어디선가 큰 할머니가 바닷물을 철렁철렁 일으키며 남쪽 제주도에 건너왔어. 키가 얼마나 큰지, 남해 바다 깊은 물도 겨우 무릎에 닿았대. 이 할머니가 바로 설문대 할망이야.”
태민이가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자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 듣다가 한두 군데 발음을 교정해 주었습니다.
“태민아, ‘치마폭에 흐글 가득 퍼 담아’가 아니고 ‘흘글 가득’이라고 읽어야 해. 알았지?”
“네.”
“자, ‘흘글’ 따라 해 보세요, 여러분.”
아이들은 모두 선생님의 발음에 따라 ‘흘글’이라고 두어 번 외쳤습니다.
“그래, 태민아. 나머지 계속 읽을까.”
다시 또 태민이는 몇 줄을 더 읽었습니다.
“이제 그만. 태민이는 됐고, 이번에는 민정이.”
민정이도 책을 들고 일어나 또박또박 열심히 책을 읽었습니다.
“산을 만들고 보니 산꼭대기가 뾰족하여 앉기가 불편하였어. 할망은 손으로 산꼭대기 흙을 퍽퍽 퍼내서 앉기 좋게 만들었지. 그것이 바로 백록담이야.”
아나운서가 꿈인 민정이는 이렇게 읽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민정이와 달리 국어 시간을 너무도 싫어했던 흥덕이는 책 속에 고개를 파묻고 선생님이 자기 쪽을 보지 않기만을 바랐습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오늘도 어김없이 적중했습니다.
“좋아, 그만 읽고. 나머지는, 어디…… 그렇지, 흥덕이! 고개 숙이지 말고 잘 읽어 봐.”
선생님이 검은 머리에서 새치 뽑아내듯 흥덕이를 콕 집어냈습니다. 흥덕이는 마지못해 일어났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남 앞에서 부끄러움을 잘 타는 흥덕이는 책을 소리 내어 읽거나 앞에 나가 발표를 하는 것이 가장 괴로웠습니다.
“내가…… 이, 입을 오, 옷을…… 한 벌…… 지어 주, 주면…… 저 멀리 육지까지…… 쭉쭉…… 다, 다리를…… 노, 놓아 주지.”
더듬대며 한 글자 한 글자 읽다 보니 더더욱 떨렸습니다. 숨이 콱 막혀 왔습니다. 아이들이 킥킥대며 웃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흥덕이가 일어서면서부터 말썽꾸러기 몇몇은 재미나다는 듯이 흥덕이를 힐끔힐끔 쳐다보았습니다.
“흥덕아, 심호흡을 크게 하고, 계속 읽어 보자.”
하지만 아무리 선생님 말씀대로 심호흡을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서, 설문대 하, 할망이…… 마, 마음만…….”
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책을 읽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1학년 때는 이렇게까지 못 읽지는 않았는데, 2학년이 되자 교과서의 글자도 좀 작아지고 읽는 양도 많아져, 어느 순간 흥덕이는 책을 잘 못 읽는 아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마 읽기에 서툴다는 생각 때문에 책 내용보다는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것 같았습니다. 흥덕이 얼굴은 이미 울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흥덕아, 그만. 잘했어요. 다음 사람 계속 읽으세요, 그래. 현지가 읽어 보자.”
어떻게 국어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흥덕이는 눈앞이 아득했습니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나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선생님은 흥덕이를 불렀습니다.
“흥덕아, 선생님 좀 잠시 보자.”
보나마나 또 책 못 읽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게 뻔했습니다. 빈 교실에는 선생님과 흥덕이만 남았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아이에게 지적할 일이 있으면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대놓고 아이들 앞에서 지적을 하면 상처를 받을까 봐 그러는 것 같았습니다.
“흥덕아, 책 읽는 게 아직도 많이 미숙하구나.”
“죄, 죄송해요, 선생님.”
“죄송할 건 없어. 미숙한 건 열심히 훈련하면 되지. 너 책은 좋아하잖아? 아버지가 동화 작가시니까 집에 책도 많을 거고.”
“네.”
흥덕이 아빠는 동화 작가입니다. 몇 권의 책을 내긴 했지만, 딱히 잘 팔린 것이 없어서 집안 살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흥덕이가 사는 곳은 가난한 산동네 빌라의 반지하방입니다. 대낮에도 동네에 쥐가 돌아다니는 곳입니다. 낮에 엄마가 동네 마트에 계산원으로 나가 근근이 살림을 이어 나갔습니다. 물론 아빠도 가끔 원고료를 받긴 하지만, 그걸로는 한 가정을 꾸리는 데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도 흥덕이는 아빠가 재미난 동화를 써서 언젠가는 학교 도서관에 아빠의 책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동화 작가인 아빠의 영향 때문인지 흥덕이도 책을 좋아했습니다.
“집에 아빠 동화책들이 많이 있으면 소리 내서 읽어봐. 그래도 눈으로는 잘 읽잖아.”
“……네. 그건 그래요.”
하지만 이상하게 소리 내서 책을 읽으려 하면 흥덕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비웃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할까 봐 겁이 났습니다.
“흥덕아, 그러면 선생님이 특별히 흥덕이가 글을 잘 읽을 수 있도록 숙제를 하나 내 줄게.”
“네?”
그건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집에서건 어디서건, 꼭 동화책을 큰 소리로, 음…… 하루에 몇 쪽을 읽으라 그럴까. 그래, 열 쪽만 읽어 와.”
“여, 열 쪽이나요?”
“그래.”
“하지만 너무 많아요.”
“열 쪽 읽는 게 뭐가 많아. 눈으로는 책 한 권도 금세 읽잖아.”
“……네. 읽을게요.”
생각해 보니 선생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힘없이 대답하고 나니 큰일이었습니다. 소리 내어 읽으면 가족들 이외의 다른 누군가가 들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흥덕이네가 사는 반지하에도 집이 두 채가 있습니다. 마주 보고 벽이 붙어 있기 때문에 옆집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도 다 들립니다. 그래서 흥덕이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어떡하지? 나 몰래 누군가가 내 목소리를 듣고 웃으면 어떡하지?’
흥덕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알았지? 내일 꼭 읽어 와. 선생님이 무슨 책 읽었나 물어볼 거야.”
“네, 알았어요.”
선생님이 자신을 걱정해서 이런 숙제를 내 주었다는 사실을 흥덕이는 잘 압니다. 하지만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흥덕이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숙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