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노자도덕경』과 영화 「황후화」
첫 번째 청춘의 고전
『노자도덕경』(BC 3세기~BC 2세기)
『노자(老子)』 혹은 『도덕경(道德經)』이라 불리는 문헌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널리 번역되고 읽히는 중요한 고전 가운데 하나이다. 지은이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사마천의 『사기』 「노자열전」에서는 주(周)나라의 관리였다고 하는 인물로서, 당시 공자(孔子)가 그에게 와서 예(禮)를 물었다고 한다. 1973년에 마왕뚜이(馬王堆)에서 두 가지 판본이 발견됨으로써 최근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1993년에는 『노자』의 일부 문장을 담은 ‘죽간(竹簡)’에 쓰인 문헌이 발견되었다. 『도덕경』은 ‘도(道)’와 ‘덕(德)’에 관한 격언들을 모아놓은 문헌으로서, ‘도경’ 부분은 사색적이고 추상적인 철학시로 이루어져 있고, ‘덕경’ 부분은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처세훈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마왕뚜이의 두 판본은 ‘덕도경(德道經)’으로 그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우주론적인 사색과 형이상학적인 논의가 중심인 ‘도경’보다 실천적이고 정치적 성격이 강한 ‘덕경’이 앞에 있는 『덕도경』은, 이 문헌이 상당히 정치 지향적인 성격의 처세훈으로 읽혔음을 보여준다. 한대(漢代) 이후 도교(道敎)가 성립한 이후 『도덕경』에 관한 다양한 주석서가 나옴에 따라, 『노자』는 정치와 사회, 종교와 신앙은 물론 예술과 전통 과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친 고전이 되었다.
함께 읽는 영화
「황후화」(2006)
중국 영화감독 장예모의 2006년작이다. 당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황실에서 황제와 황후, 왕자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음모와 반란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중양절 축제를 앞두고, 황금 빛의 국화 화분이 황궁에 채워진다. 그리고 이날 행사를 위해 황제(주윤발 분)는 북쪽 국경을 수비하기 위해 떠났던 둘째 아들 원걸 왕자(주걸륜 분)를 데리고 돌아온다. 하지만 이들 황실의 주인공들의 관계는 매우 불편하다. 전처 소생인 태자와 후처인 황후는 정인(情人)이고, 이 사실을 알고 황제는 황후를 독살하려 한다. 그리고 둘째 왕자는 아버지인 황제에 대한 반란에 가담한다. 중양절 밤에 반란이 일어나지만, 결국 태자가 이를 황제에게 알림으로써 반란군은 모두 죽고 둘째 왕자만 살아남는다. 이 영화는 전통 중국의 황실이 어떤 세계인가를 잘 보여주지만, 한편 장예모 감독의 중화주의적 시각이 드러난 영화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청춘의 고전’을 시작하며
반갑습니다. 김시천이라고 합니다. ‘청춘의 고전’ 프로그램 중에, 첫 번째 강의가 하필이면 ‘노자’군요. 오늘 제가 드릴 이야기는 어려운 철학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저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노자, 장자 등의 고전을 재밌고 색다르게 읽어볼 수 없을까 하는 게 제 고민입니다.
자, 오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자나 장자, 이런 텍스트를 이야기하면 떠올리는 게 ‘고전’이고, 고전이면 전통, 따라서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자』라는 텍스트로 박사학위를 했지만, 이 책이 좋은 책이라고 저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책으로서의 『노자』에는 좋은 이야기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흔히 하는 얘기로, 서양의 과도한 물질문명에 대한 처방으로써 자연주의를 주창했고, 또 무위, 이런 이야기들을 하죠. 그런데 저는 십몇 년 동안 노자를 공부했지만, 무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무위란 “하는 게 없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과연 그렇게 될까 싶습니다. 생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제곱 평방킬로미터당 1.5명이 넘어가면 자연 파괴가 일어난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문명사회에 진입한 이후에는, 가만히 빈둥빈둥 놀고만 있어도 ‘무위’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무위자연이라고 흔히 이야기를 하는데, 그걸 다시 따져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너무 진지하게 들으시는데, 그러실 거 없습니다. 재밌게 웃으면서 들으시면 돼요.
하지만, 전통이라는 건 참 무섭습니다. 이것을 버릴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이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서, 삶을 살아가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저는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과거 전통으로의 회귀라는 현상이 아주 끔찍할 정도로 무섭다고 느끼는 사람 중에 하나예요.
먼저 여러분이 『노자』라는 책의 성격에 대해서 기본적인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자』라는 책은 앞부분과 뒷부분, 두 개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부분을 도경, 뒷부분을 덕경이라고 해서 ‘도덕경’이라고 부르죠. 중국 고전 가운데서도 실제로 경전의 지위로까지 올라간 것은 이 『도덕경』이 처음이 아닐까, 아마 고대 중국의 한 나라 때의 문제나 경제 사이에 경전이 된 게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는 노자 『도덕경』 하면 어떤 말이 떠오르시나요? (“무위자연이요.”) 예,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고전을 대하는 세 가지 낡은 방식
우리는 지난 백년 동안 서양을 배워 왔습니다. 서양의 것을 흡수하고 배우는 데에 골몰해 온 거죠. 그중에 책을 읽을 때에 강요받았던 태도나 관점 중에, 중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태도는, 고전을 객관적으로 읽으라는 겁니다. 고전, 아~ 오래된책이죠. 그런데 객관적으로 읽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저는 이것을 거부합니다.
노자가 함곡관을 나서며 윤희에게 『도덕경』을 전해 주는 장면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무위자연의 사상을 가장 잘 보여 준다.(겸재 정선의 「청우출관」) |
두 번째, 제대로 읽으려면 번역본을 읽지 말고 원문을 ‘정확하게’ 읽으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읽으려고 많이 노력하죠. 그런데 제가 읽은 책 중에 객관적으로 읽은 책은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원문으로 읽은 분들은 많이 봤지만 누가 정확하게 읽었다고 말하는 것 또한 말하기 어렵습니다. 왜 그런가요? 『노자』를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딴 분이 꽤 많은데, 그 가운데 『노자』에 대한 해석이 동일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 다르게 해석해 놓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학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남과 다르게 읽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또 전통 시대에 『노자』에 대한 주석서가 삼백여 개가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에 동일하게 해석된 텍스트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도대체 객관적으로 고전을 읽는다? 그게 무슨 말인지, 또 정확하게 읽으면 객관적이 돼야 하는데, 이 ‘정확하게 읽는다’가 무슨 말인지 상당히 애매해집니다.
세 번째, 고전을 읽으면 그 내용을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2006년에 펴낸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에서, 『논어』를 읽으면서 과연 군자가 되려고 결심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하고 물었어요. 저는 『논어』 속에서 공자라는 인물의 생각, 사상 그리고 그가 하는 말들의 개념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지, 군자가 되려는 마음으로 『논어』를 대해본 적은 없었거든요. 즉 옛날과 지금의 관심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논어』를 읽으면서 군자가 되고 싶은 결심을 해본 적이 있나요? 아마 별로 없으시죠?
시험에 다음 중 『논어』에서 가장 권장했던 인간형은? 하고 문제가 나옵니다. 1) 군자 2) 소인, 뭐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연히 1번이라고 찍지 않습니까? 그게 우리가 고전을 읽는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과거에는 고전을 삶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읽었다면 우리는 그게 아니라, 다음 중 이에 해당하는 것, 맞는 것, 옳은 것, 틀린 것, 이런 것 저런 것을 고르기 위해서 공부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공부가 아니죠. 그러면 귀로 들어갔다 귀로 나오고, 시험 기간이 지나면 언제 읽었냐는 듯이 새까맣게 까먹게 되죠.
저는 이 세 가지 방식을 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불가능한 얘기거든요.
“원수를 은혜로 갚으라”고 한다면?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보원이덕!’ (“보원이덕”) 따라 읽으라고 한 게 아닙니다. (웃음) 그냥 속으로 읽으세요. 보원이덕. 뜻을 풀면,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즉 원수에게 덕을 베푸는 방식으로 보답하라, 갚으라는 뜻이죠. 이게 『노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또 『논어』에도 비슷하게 나오는 말입니다.
과연 삶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불구대천의 원수, 내 부모를 죽인 그 사람까지도 은혜로써 갚으라는 행동을 요구한다면,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그러면 나한테 불가능한 일들이 과거의 지식인들에게, 유학자들에게는 가능했을까, 이런 의구심으로 한번 보죠.
이 문장이 나오는 대목은 『노자』 63장입니다. 거기 보면, 그동안에는 앞의 구절만 많이 인용이 되었죠? “위무위”, 즉 무위를 행하고, “사무사”, 즉 일삼음이 없음을 일삼아라. 그리고 “보원이덕”,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분, 손들어 보세요. 이렇게는 못하죠. 이것은 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논어』에도 이런 비슷한 얘기가 나옵니다. ‘보원이덕’이 ‘이덕보원’으로 글자 순서만 바뀌어 있죠. 차이가 있다면 공자가 한 말이 아니라 어느 누군가가 공자에게 묻는 말로 나옵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은혜로써 원한을 갚으면 어떻겠습니까?”
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성인이라고 추앙하는 공자는 어떻게 답을 했을까요? 잠시 시간을 드릴 테니까, 생각해 보세요.
공자와 제자들의 말
공자의 초상. |
자, 덕으로써, 은혜로써 원수를 갚는다면 어떻겠습니까에 대해 생각해 보셨나요? 공자의 말을 들어보죠. 공자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은혜를 갚겠는가?” 먼저 당신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어떻게 갚겠는가? 당연히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은혜로 갚는 것이 맞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은혜로 갚는다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갚느냐는 거죠. 공자의 답은 이렇습니다, “곧음으로 원한을 갚고 은혜로 은혜를 갚아야 한다.” 아주 단순한 말이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제가 충분히 따라서 행동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작은 차이지만, 어떤 문제를 제기했을 때 공자가 내린 답변들은 심오하다고 할까요? 그리고 인간이라면 행할 수 있는 처방들을 제시합니다. 공자의 의 개념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딪히는 이런저런 상황 속에서 공자의 말을 비교하면서 볼 때, 공자는 분명 하나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 같아요. 자, 이번에는 공자의 제자들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문제를 바꾸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보다 넓은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시외전』이란 책에는 공자의 제자 세 사람, 즉 자로, 자공, 안회라는 수제자들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 사이에 토론이 붙었어요. “당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 있고 당신에게 잘 대해 주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당신들은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대하겠느냐?” 하니까, 자로가 먼저 대답을 합니다.
자로는 공자와 나이 차가 많이 나지 않았던 사람이죠. 추측건대,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상당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죠. 나중에 위나라에서 반란에 연루되어 죽게 되었을 때, 죽어가면서까지 자기의 갓끈을 다시 묶고 앉은 채로 죽어갑니다. 영화 「공자」에 나오는데, 그것은 실화였던 것 같아요. 자로는 그 물음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했다고 합니다.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으면 나도 잘 대해 주지 않을 것이다.” 자, 여러분이 생각하는 답변과 같은가요? 대체로 이렇게 하죠. 저라고 뭐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비교해 보니까, 자로랑 저랑 딱 비슷한 것 같아요.
자공이라는 인물, 이 사람은 조금 다른 사람이지요. 자공은 현실적인 수완이 뛰어났고, 공자 학단의 재정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했던, 아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되죠. 그 사람의 답은 이렇습니다.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으면 나는 그와 함께 상황에 따라서 잘해 줄 만하면 잘해 주고 잘해 줄 만하지 못하면 나도 잘해 주지 못한다.” 아마도 우리는 자공하고 자로 사이를 왔다 갔다 할 겁니다.
자, 안회는 어떨까요? 공자의 수제자였다고 하는 안회의 답변을 들어보겠습니다. 안회가 말하기를,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아도 나는 잘 대해 줄 것이다.” 자, 공자의 수제자답죠.
그런데 이 말은 일단 해석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말은,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살겠느냐를 묻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논어』의 어떤 구절이 나온다고 할 때에, 그 말의 객관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를 당신은 어떤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서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를 포함한 물음들입니다. 이것이 전통 사회에서 고전을 읽었던 방법이죠.
즉 자로가, 남이 내게 잘 해주면 나도 잘 해주고, 못해 주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살겠다는 말입니다. 자공도 마찬가지죠. 안회는 남이 잘 해주든 못되게 굴든 상관없이 잘 하겠다는, 자신의 삶의 원칙을 천명하는 것이거든요. 쉽지 않은 삶의 방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논어』를 읽고 군자나 성인이 되겠다고 결심하고는, 목숨을 바쳐가며 유학의 원리에 따라 살았던 조선조의 선비들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공자의 평가, 그리고 노자와의 갈림길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객관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동아시아에는 없는 전통이었습니다. 도대체 자기 자신이 실천하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고 맘속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그 이야기를, 객관적인 의미라고 해석하고 글로 쓰는 관행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공부인가라는 생각이 전통 지식인들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죠? 『논어』를 읽으면서 군자가 될 마음, 그걸 받아들인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군자가 바람직한 인격이라고 하면서 『논어』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과연 우리가 『논어』를 읽는다는 것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보면 『논어』를 읽는 것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는 것이 낫겠어요. 합리적으로 보면, 『논어』 열 번 읽는 것보다 『사회계약론』을 한 번 읽겠습니다. 왜 그렇지요? 『사회계약론』을 읽으면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제도, 법, 이런 것들이 만들어지게 된 기본적인 사상들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논어』를 읽어서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많은 사회의 명사 분들이 TV에 나와서 『논어』가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하면서 추천하지만, 이것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중요성이 있는지도 모르고, 공감도 안 되는데,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 쉽게 수긍이 가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면, 공자는 이 세 사람의 대답을 듣고서 어떻게 말했을까요? 공자의 물음이 어떤 것인지 한번 확인해 보죠. “자로의 주장은 야만인들의 주장이다.” 자로는 졸지에 야만인이 됐군요. (웃음) “자공의 말은 친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말이고, 안회의 말은 가족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말이다.” 기가 막히죠? 공자의 말을 들으니, 딱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공자가 뛰어나다는 느낌이 이제 조금 분명해지시죠? 이 가운데 객관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동일한 두 눈이 분명히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 일들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눈의 깊이가 다를 뿐이죠. 그러니까 공자를 위대한 인격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그런데, 노자를 가지고 강의한다고 해놓고 공자만 얘기했네요. 다시 노자로 돌아가겠습니다. 보원이덕.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공자의 말씀은, 특별히 그렇게 하는 거는 불가능하다, 쉽지 않으니, 직, 다시 말해 내 마음이 원하는 바대로 가라, 그런 뜻입니다. 직이라고 하는 말, 즉 정직하다는 말은 ‘자기의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자기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행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개인적인 감정에 따르라는 말은 아닙니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노자의 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요. 제대로 이해하려면, 주석서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런 주석서들 가운데 왕필과 전설의 인물 하상공의 주석서가 두 가지 전통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특히 왕필은 예전에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노자와 21세기’라는 강좌에서 많이 소개됐던 사람이죠. 하상공 주석은 한나라 초기의 주석이다, 혹은 후한 시대에 성립된 주석이다, 여러 가지 이설이 있지만, 저는 한나라 초기에 해석되던 내용을 상당히 많이 담고 있는 문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거기에 대해 얘기하면 이렇게 해석되어 있습니다. “수도행선.” 즉, “도를 닦고 선을 행하라.” “절화어미생야.” 번역하면 “재앙이 생겨나기 전에 미리 싹수부터 끊어 놓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죠? 쉽게 이해가 안 되시죠?
영화 「황후화」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 이제부터 「황후화」라는 영화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간적 배경이 어디죠? 여기는 황궁입니다. 시간적 배경은 당나라 말기죠. 여기서 황제 역할을 맡은 배우는 주윤발이에요. 황제가 분노를 했습니다. 그가 왜 분노했는지, 그리고 우리 주제와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영화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중국에는 중양절이라는 굉장히 중요한 명절이 있습니다. 이때 되면 궁성을 멋지게 꾸며요. 전부 국화 화분을 갖다가 하나하나 꾸밉니다. 사방이 네모난 공간에 국화꽃들을 갖다 놔요. 이런 국화꽃들은 바로 만물을 상징하는 겁니다.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죠. 그리고 둥그런 방식으로 위로 솟은 곳은 인간의 공간이 아니라 천상의 공간이고, 용 혹은 천자 혹은 황제가 식사를 하는 곳이죠. 그러니까 천자(황제)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 드러나 있어요.
그날 밤 행사는 아주 화려하게 진행됩니다. 그런데 황제가 왜 화가 났는가? 자, 이 가족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세 명의 황자까지 해서 모두 다섯 명입니다. 그런데 황후는 본부인이 아니라, 나중에 후처로 들어왔습니다. 본래 황제는 막강한 세력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전 부인에게서 아들 하나가 있었어요. 그 아들은 태자로 들여왔지만, 전 부인은 버렸습니다. 권력을 쥐기 위해서 지금의 황후와 결혼했죠. 그리고 후처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첫째 태자와 황후가 불륜의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황후에게 아주 미량의 독약이 든 탕약을 꼬박꼬박 먹여서 죽이고 있습니다. 그걸 알게 된 황후는 이 국화 문양의 수를 놓고 있는데, 황제에게 반역을 하는 날, 목에 둘러서 같은 동지임을 알게 하기 위한 표식인 거죠. 황후는 반역하기 직전에 자신의 연인이었던 태자에게 찾아갑니다. “내가 황제에게 반역을 할 테니 도와다오.” 그리고 국화로 수를 놓은 머플러를 태자에게 건넵니다. 그 황제가 다름 아닌 자기 아버지 아닙니까? 태자는 자기 스스로 가슴을 찔러 죽으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죽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반역 사실을 고하죠.
변방을 지키던 둘째가 황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둘째에게 얘기합니다. “엄마가 반역을 할 거다, 도와다오.” 하니까, “어떻게 아들인 제가 아버지에게 반역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 황후가 피를 토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모든 사실을 눈치 챕니다. 엄마랑 아빠랑 아들들, 즉 한 가족 이야기인데, 범상치가 않죠. 드디어 둘째가 반란의 칼을 높이 듭니다. 중양절의 주요 행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막내가 첫 번째 왕자를 칼로 찔러서 죽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에게 얘기합니다. “도무지 이 집안 식구 가운데 나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하면서, “아버지, 저에게 황제의 자리를 내놓으시죠.” 하며 반역을 도모합니다. 황제가 화가 났습니다. 그러더니만 요대를 풀어서 자기 막내를 때려서 죽여버립니다. 태자는 이미 황후가 반역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황제는 이미 충분한 대비를 했었습니다.
국화꽃들은 바로 만물을 상징하는 겁니다.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죠. 그리고 둥그런 방식으로 위로 솟은 곳은 인간의 공간이 아니라, 천상의 공간이고 용 혹은 천자 혹은 황제가 식사를 하는 곳이죠. 그러니까 천자(황제)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 드러나 있어요. _사진 출처: 「황우화」 중에서 |
결국 둘째 왕자는 반역에 참여하여 싸우지만, 그만 살아남고, 반역에 참가했던 나머지 사람은 다 죽습니다. 이 장면은 참 재밌어요. 왜냐하면 둘째 왕자도 반역도인데 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죽일 수가 없었던 거죠. 첫째 왕자는 죽었고 이 둘째 왕자는 다음 왕위 계승 일순위입니다. 황제가 이 사람을 죽이라고 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죽일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아침 황후와 둘이서 황제가 식탁에 마주 앉게 되죠. 이게 「황후화」의 기본 줄거리입니다.
김시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양교육연구소 연구교수
숭실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서 「노자의 양생론적 해석과 의리론적 해석」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호서대학교 초빙교수,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양교육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전통 동아시아 고전을, 현대 한국 사회라는 공간의 삶과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연구와 저술, 강의 등을 하며 살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철학에서 이야기로』,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공저), 『풍우란자서전』(공역) 등이 있다.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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