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똥이 밥이다
수세식 화장실과 푸세식 뒷간
수세식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뒤 레버를 누르면 곧바로 내가 눈 배설물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물이 나의 배설물을 씻어 내린다. 그리고 그 배설물은 금방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후 그 오줌과 똥은 정화조에 담겼다가 더 멀리 흘러가 분뇨 처리장에 모여 처리된다. 수세식 화장실에서 누는 오줌과 똥은 내 몸과 분리되는 순간 나와는 관계없는 그 머나먼 곳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이 수세식 화장실은 배설물을 많은 양의 물로 깨끗하게 처리하기 때문에 방이나 거실, 부엌과 나란히 붙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푸세식 화장실은 다르다. 왠지 우리는 푸세식은 뒷간, 수세식은 화장실로 표현해야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사는 공간과는 좀 떨어져 집의 뒤뜰이나 한쪽 구석에 있기 때문에 이름도 뒷간이다. 이 뒷간의 오줌과 똥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삭아 밭으로 보내져 거름이 된다. 우리는 밭에서 나는 채소를 먹지만 이 채소는 우리가 눈 오줌과 똥을 먹고 자란다. 우리의 오줌과 똥이 바람과 물과 태양과 흙의 큰 에너지를 모아 입으로 다시 들어오는 순환이 반복된다.
푸세식 뒷간은 돌고 도는 우주 ‘순환의 세계관’과 자연의 원리에 순응한다. 그러나 반대로 수세식 화장실은 내 몸에서 분리된 오줌과 똥을 나와 관계없이 그대로 버려 어디론가 사라지게 한다. 그래서 수세식 화장실은 곧 ‘직선적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암사 해우소 |
수세식과 푸세식의 세계관
직선적인 세계관은 시간이 직선적으로 흘러가며 사회와 역사의 변화 또한 직선적으로 성장 발전한다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흐름을 거꾸로 되돌릴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불가역적(不可逆的)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선적 세계관은 현재는 과거보다 좋고 미래는 현재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이것을 진보라고 여긴다. 그리고 모든 나라를 가장 앞선 나라와 가장 뒤에 있는 나라를 양끝으로 줄을 세운다. 나라는 GNP로 서열이 매겨지며, 내 나라가 세계 몇 번째 순위인가가 중요하다. 국가의 개발과 발전의 목표는 바로 이 서열의 앞줄에 서는 것이다. 서열의 앞에 선 나라는 이른바 ‘선(先)’진국으로 불리고 뒤에 있는 나라는 ‘후(後)’진국으로 불린다. 선진국의 모든 것은 앞서 있고 우수하며 후진국의 모든 것은 뒤떨어져 미개하고 야만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 선진국의 거룩한 사명은 미개한 후진국에게 그들의 발전된 문명을 자비롭게 전도하고 이식시키는 것이며, 후진국의 미덕은 하루빨리 앞선 나라의 발전을 수용하여 그들의 발자국을 뒤따라가는 것이다. 오로지 물질적 발전, 경제성장이 절대적으로 유일한 가치척도가 되며 그 외의 모든 것은 무시된다. 이러한 서열의 선두에 서기 위해서는 국가, 집단 그리고 개인 사이의 경쟁이 필연적이며 또한 이 경쟁은 결국 대립과 분쟁, 전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직선적 세계관에서는 경제성장을 위해 자연을 개조하고 변형시키거나 정복,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곧 발전이며 성장의 척도가 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전통과 자연 친화적인 생활양식을 갖고 있는 것은 미개한 것, 혹은 야만으로 치부되며 열등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문화마저도 경제적 우열에 의해 규정되어 발전된 국가의 모든 문화만이 수준이 높고 그렇지 못한 나라의 문화는 수준이 낮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어느 나라의 문화든 문화는 동등한 시간의 축적 속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문화의 우열이란 있을 수 없다. 우열의 문화 인식은 결국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고이다.
만드는 문화와 버리는 문화
수세식 화장실은 똥은 ‘더럽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수세식 화장실의 똥은 아무 가치가 없고 더럽기 때문에 없어지거나 사라져야 할 것인 반면에 푸세식 뒷간에서의 똥은 채소의 양분이 되는 거름으로 더없이 소중한 자원인 것이다. 예전에 시골에서 아이들이 남의 집에서 똥을 누고 오면 야단을 맞았던 것도 똥은 밭에서 거름으로 사용되는 소중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음식 문화는 바로 ‘먹는 것’에 대한 문화이고 인류는 역사 속에서 먹는 문화를 풍성하게 개발해왔다. 각 민족의 수많은 조리 재료와 요리법, 서로 다른 식사 방법이나 예절, 다양한 형태의 음식점이나 그릇 모양은 모두 먹는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 몸을 하나의 파이프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요란하고 호화로운 음식이 바로 입이라는 파이프 입구에 모아져 미각에 즐거움을 주고는, 파이프 중간을 통과하면서 흡수되어 온갖 에너지원으로 분산된 뒤 파이프의 끝에서 밖으로 배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파이프의 앞 문화(음식 문화)는 다채롭게 발전되어 있지만, 파이프의 끝 문화(똥의 문화)는 소홀히 처리되거나 무시되고 있으며 파이프 앞의 문화에 비해 홀대받고 있다. 어느 건물이든 화장실(변소)을 보면 그 건물을 설계한 사람과 소유주, 살고 있는 사람의 기본 면모를 알 수 있다. 실제 자연계의 되먹임 순환 사슬에서 보면 들어오고 나감이라는 것을 따로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직선적 세계관에서는 똥을 나와 상관없는 아주 먼 곳으로 격리시킨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똥이 다시 내게 돌아온다는 이치를 망각한 것이 인류의 어리석음이다. 생태계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쓰레기 문제도 이와 같다. 현대 문명은 생산하는 방식은 많이 개발하였지만 폐기하는 이치를 개발하지 않았다. 먹는 방법은 알지만 싸는 방법은 모르는 변비 문화인 것이다. 자연계에 버려야 할 쓰레기란 본래 없다. 어느 것이라도 단 1g이라도 에너지를 갖고 있으면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것이 유용하고 사용 가능해도 쓰레기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당장에 소용이 없으면 미련 없이 버려진다. 버려지고 매립되면 다시 자연 속에서 소생되어 사용될 가능성이 없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음을 깨우는 새로운 각성, 생태적 세계관
환경주의를 넘어 생태주의나 생명운동을 굳이 말하려는 사람들은 바로 잘못된 자연관, 잘못된 역사 인식과 세계관이 어리석음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문제 삼는다. 생태적 각성이란 모든 것은 순환하고 윤회하며 돌고 돌아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생산자-소비자-분해자로의 흐름이 다시 생산자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돌고 도는 순환의 구조가 바로 자연이며 역사라는 것을 각성하는 것이다. 생태적 각성은 미망과 무지에서 비롯된 근대적 세계관의 치명적인 오류를 깨닫고, 새로운 눈뜸,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이러한 근대적 세계관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강제하는 메시지다. 무한한 성장이란 결국 무한한 자원의 채굴과 이용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하나뿐인 지구’는 ‘무한’의 세계관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유한’한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만약 모든 나라가 세계 최대 소비국인 미국처럼 산다면 그것은 발전이 아니라 멸망으로 치닫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과 똥의 자원 순환형 생태계 |
우리가 먹는 밥은 바로 내가 싼 똥, 건강한 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 똥은 바로 내가 만든 것이다. 똥이 밥이고, 밥이 똥인 것이다. 더럽고 깨끗하다는 인식은 문명이 만들어낸 선입견이다. 이러한 인류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바로 생명운동과 환경운동의 진정한 메시지다. 생태적 관점에서 볼 때 ‘진보’가 앞과 뒤를 전제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제는 그러한 직선적인 진보가 아니라 ‘진화’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에코붓다의 생태공동체공부모임이 뒷간을 연구하고 조사한 목적은 현대사회에서 푸세식 뒷간을 다시 현대적으로 되살리자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순환적 세계관과 가치를 회복하여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며 올바른 삶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1장
밥, 똥 그리고 생태 공동체
1. 밥이 생명이다
우리에게는 먹고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밥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먹고사는 데 가장 중요한 “밥”이 곧 “생명”이라는 사실은 무시한 채 지내왔다. 그 결과 우리는 밥을 둘러싼 모든 관계를 간과하고, 오로지 우리가 먹는 식탁 위에 올라온 밥 한 공기로 배를 채우는 것에 강한 애착을 보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밥은 단순히 밥이 아니라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생명운동의 주장이다.
“지금 여기 이 밥과 한 몸이 되게 하소서.”(『구세공보』)
“이 공양에 깃든 이웃들의 공덕을 생각할 때 저의 덕행이 부끄럽습니다.”(「소심경」)
“너의 가득 찬 그릇을 보라. 나는 이 음식 속에서 나의 존재를 떠받치는 온 우주의 존재를 본다.”(틱낫한의 식사 기도)
“이 음식을 먹음으로써 나는 물질의 가슴에 들어가고 또한 나는 꿈을 현실로 바꾸는 복잡한 생명 활동에 참가하게 됩니다.”(에드워드 브라운의 시)
“밥 한 사발 먹는 것이 우주와 함께하는 것이다.”(장일순)
여기서 인용한 말은 밥에 대한 의미를 생명의 입장에서 강조하고 있다. 밥과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은 생명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타자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서는 나의 호흡이 우주의 호흡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어느 것도 나와 관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나의 생명이 소중하듯 다른 존재도 소중하다는 것이다.
성경과 밥
성경은 밥과 관련된 몇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요한복음」 2장 1-12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긴 일(「마태복음」 14장 13-21절) 등에 관한 이야기는 나와 타자 관계에 있어서 우선해야 할 일이 나눔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가복음」 14장 22-25절에 흔히 최후의 만찬이라고 불리는 성만찬의 이야기가 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느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성만찬을 개신교에서는 ‘성찬식’, 천주교에서는 ‘영성체’라고 한다. 이는 예수와 내가 하나가 되는 행위로 생명을 약속받는 것으로 이해된다.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 이러한 관계는 예수와 하나 됨을 의미한다. 한 장소에서 하나의 빵과 공동의 잔을 나누었다는 것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예수와 하나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만찬 의식은 예수에 대한 회상이기도 하며 감사의 식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와 예수가 하나 됨은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에 동참하는 행위로서 구원에 중요한 의미를 두는 것이다. 이것은 밥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밥상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만찬은 단순하고 소박한 음식을 가지고 대화와 교제가 동반되는 밥상 공동체다. 성만찬이 보여주는 밥상 공동체는 모두가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신을 알고 전체를 지각하는 신앙 행위이며 예배 행위이다. 즉 밥을 대할 때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자각하고 이해하며 더 나아가서는 종교적 행위와 같은 신성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굶주림에 처해 있는 이웃을 인식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성만찬은 관계의 형성에 기초한 밥상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축제와 같은 분위기로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그 속에서 자아를 실현할 뿐만 아니라 생명 문화 공동체를 복원해내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의 집사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 부분은 생명 문화와 생태 공동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며 「창세기」 1장 26-28절의 ‘다스리라’가 지배자, 소유자라는 인간중심주의적 해석에서 벗어나 관리자, 집사, 목자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것은 유대-기독교 사상이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취급받아왔던 오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기독교가 생태 중심주의적 견해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은 새로운 탄생에 대하여 감사하는 도덕적 책무와 희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성만찬은 위기적 상황에서의 문화적 감수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문화적 감수성은 생명 문화 윤리의 부여와 나눔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밥이 지니고 있는 기독교적 의미를 하느님의 계속되는 창조 행위의 열매로 해석하고 있는 윤형근(2002: 58~59)의 주장처럼 노동을 통하여 얻어지는 밥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동참하는 일로 그 자체가 거룩하며 하나의 예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우주의 움직임이 하느님의 창조로부터 시작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 것은 하느님과 자연과 인간이 만나게 되는 우주적 사건인 동시에 하느님의 창조 행위와 인간의 노동, 우주의 카오스적 질서가 하나로 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주론적 결과는 우리의 기운을 만들어낸다.
밥에 대해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운동적 의미는 인간중심주의적, 소비 지향적, 그리고 물질 지향적 자본주의사회 체계를 성찰함으로써 예수의 나눔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 메시지를 통하여 기독교의 진정한 복음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불교와 밥
불교의 식사 수행법으로는 발우 공양이 있다. 발우 공양은 내 몸을 이루는 음식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먹을 만큼만 먹는 생명 살림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발우는 수행자가 사용하는 밥그릇을 의미하며, 발우 공양은 불가의 식사법으로 대중들과 둘러앉아 일정한 법식에 따라 공양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우 공양을 할 때 「소심경」을 게송하게 되는데, 「소심경」 앞에 나오는 전발게에서는 보시하는 사람, 보시받는 사람, 보시 물건이 깨끗하기를 기원드리게 된다.
그리고 발우 공양은 먹을 만큼의 음식물을 자신의 발우에 담아서 먹은 뒤 뜨거운 숭늉과 남긴 김치나 무조각 등으로 발우를 깨끗이 닦아 마시고, 다시 맑은 물을 이용해 발우를 손으로 깨끗이 닦아낸 후 발우 수건으로 닦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식사는 대중과 함께하게 되는데, 찬이 모자라면 서로 공평하게 나눈다. 그리고 공양이 끝난 후 성원들 간에 의견을 나누고 알리는 대중 공사를 한다. 이러한 발우 공양은 수행 과정에서도 공동체를 이루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게 된다.
이와 같이 「소심경」은 불교의 발우 공양의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는데, 「소심경」에서는 물 한 방울, 쌀 한 톨, 바람 한 점이 밥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밥이 우주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결국 「소심경」은 현재 숨 쉬고 있는 수많은 자연과 사람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소심경」은 모든 중생의 노고와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일상의 삶과 수행에 대하여 반성하고 발원하는 마음을 점검하며 모든 중생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한 생활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소심경」의 일부인 ‘오관게’의 내용을 현대적으로 각색하면 다음과 같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깃들어 있고
한 톨의 밥에도 만민의 노고가 스며 있으며
한 올의 실타래에도 베 짜는 여인의 피땀이 서려 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음식을 먹고 이 옷을 입고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여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일체중생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성만찬이나 발우 공양 등 종교적 의례나 실천에서 보여주고 있는 밥은 일상을 통하여 밥의 의미를 되새기고, 밥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함께 나누는 삶을 강조한다. 특히 밥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문제의식은 모든 것이 더불어 존재한다는 전일론적 세계관으로서 생태 위기 시대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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