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수많은 이론가 중에서 특히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을 거론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 사회의 현란한 지적 속도전을 감안한다면 스피박은 더 이상 ‘신선한’ 이론가는 아니다. 물론 ‘신선하다’는 판단 자체가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호미 바바Homi K. Bhabha와 마찬가지로 지식 시장에서 조금은 철지난 포스트식민 이론가 중 한 사람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그녀의 이론을 거론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더구나 『다른 세상에서In Other Worlds』,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Outside in the Teaching Machine』,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A Critique of Postcolonial Reason』, 『스피박의 대담』, 『경계선 넘기Death of a Discipline』, 『다른 여러 아시아Other Asias』 등 스피박의 저술 대부분이 국내에 이미 번역된 데다, 그녀를 거론한 메타이론서들인 릴라 간디Leela Gandhi의 『포스트식민주의란 무엇인가』, 로버트 영Robert J. C. Young의 『백색신화』뿐만 아니라 간략한 해설서인 『스피박 넘기』까지 번역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녀의 이론을 이해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직접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해설은 정확한 해석으로 지식 생산자와 지식 소비자 사이를 매개하는 데 그 미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매개자의 역할은 난해한 이론을 쉽게 풀이하고 정확한 해석을 덧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해석은 아무리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할지라도 또 다른 해석을 낳는다. 해석자의 해석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말마따나 “모든 해석은 결국 메타해석”1일 수밖에 없다. 스피박의 해석에 대한 필자의 해석은 서너 겹의 메타-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기존의 해설서, ‘스피박 읽기’ 등이 나와 있는 마당에 이 해설서가 어떤 변별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고민이었다.
Gayatri Chakravorty Spivak(1942~) |
우선 가야트리 스피박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그녀의 텍스트 중에서 독자로서 필자가 처음 접했던 것이 「페미니즘과 비평 이론Feminism and Critical Theory」2이라는 짧은 글이었다. 1985년이었고 대학원 시절이었다.
그 시절 대학을 함께 다녔던 친구들 중에는 위장취업을 하거나 감방행을 택하거나 강제로 징집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캠퍼스에는 봄철이면 어김없이 최루가스가 살포되던 시절이었다. 친구들이 도서관 바깥에서 ‘독재 타도, 미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와중에 도서관에 앉아 영어 텍스트를 펼쳐놓고 있는 자신이 민망했다. 그런 만큼 대학원 진학을 택한 자신의 행위에 변명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접했던 영문학자이자 페미니즘 이론가가 스피박이었다. 그렇게 민주화 쟁취가 시대적 요청이던 상황 속에서 필자는 스피박의 글을 읽었고, ‘그’ 글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1980년대 ‘서울의 봄’을 살고 있던 필자에게 그녀의 글은 무척 인상적이면서도 참담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났다. 지금은 한국 사회에서 영어 텍스트를 펼쳐놓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부끄럽다고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해설서를 쓰기 위해 우선적으로 「페미니즘과 비평 이론」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 글은 요즘의 스피박이 보여주는 난삽한 글쓰기와는 달리 논지가 선명하고 입장도 분명했다. 짧은 글이지만 그 이후 스피박이 전개한 논지의 많은 부분이 담겨 있기도 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 글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비판한 다음, 1세계 백인 페미니즘 또한 비판한다. 1세계 여성작가이자 옥스브리지(옥스퍼드 . 케임브리지 대학) 영문학과 우등생인 마거릿 드래블Margaret Drabble의 소설 『폭포Waterfall』를 분석하면서, 1인칭 화자인 제인의 계급적·인종적·젠더적 한계를 지적한 뒤, 마지막으로 1세계 백인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이 ‘3’세계 한국 여성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데 1세계 기업들과 어떻게 공모했는지를 분석한다. 영국 여성 작가인 마거릿 드래블의 소설과 한국 여성 노동자의 착취가 어떻게 맞물려 있다는 것일까? 지금 다시 읽어보면 마거릿 드래블로서는 자기 소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한국 여성 노동자의 착취 문제까지 소설가인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니 억울할 것도 같았다3. 스피박은 이 논문에서 텍스트를 읽어내는 새로운 독법을 제시해주었다. 영문학 텍스트를 읽어내는 그녀의 독법은 당시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거릿 드래블의 소설과 한국 여성 노동자의 상황을 병치시켜 읽어낸다는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독법이었을 것이다. 특히 신비평류4의 꼼꼼한 읽기close reading는 텍스트 바깥을 참조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신비평의 관점에서 보자면 스피박의 읽기는 논리적인 비약을 무릅쓰면서까지 텍스트를 정치화함으로써 오독했다고 비판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신비평이 권장한 꼼꼼한 읽기는 텍스트가 생산된 사회적 맥락과 텍스트를 철저히 단절시켜놓았다. 신비평주의자들에게 문학 텍스트는 자족적인 하나의 우주이고 완전한 전체였다. 신비평은 사회적인 맥락을 잘라내고 문학공화국에 안에서 자족하고자 했다. 텍스트 바깥에서 무슨 소란이 일어나더라도 문학 작품은 문학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그들에게 문학 텍스트 바깥을 참조하는 것은 문학을 오염시키는 불순한 행위였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는 순수문학/참여문학 논쟁이 있었다. 사회적인 맥락을 참조하는 비평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으로 매도당하는 분위기였으므로 신비평적인 독법이야말로 당시 한국 사회에는 적격이었다. 이처럼 신비평이 한국의 강단비평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 자체가 한국적인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신비평은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었던 참여문학/순수문학 논쟁에서 순수문학 진영에게는 안전한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해주었다. 그런 시대적 맥락에서 보자면 스피박의 포스트식민주의 독법은 그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스피박이 언급한 ‘그’ 사건은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컨트롤데이터 사의 한국 지사 소속 여성 노동자들이 벌인 파업이었다.5 스피박이 자신의 텍스트에서 참조했던 컨트롤데이터 사건은 1982년 한국에서 일어났던 여성 노동자 투쟁이었지만, 당시에 필자는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전혀 몰랐다. 컨트롤데이터 사 소속 여성 노동자들과 필자는 동시대를 살고 있었지만 스피박의 글을 통해 오히려 한국에서 일어난 그 사건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 사건을 영어 텍스트로 읽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야말로, 스피박이 말하는 식민화된 의식 탓이었을 것이다. 스피박을 읽으면서 참담했던 기억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1980년대 당시 한국적 상황에서 스피박과의 만남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3’세계 여성 노동자 문제가 영문학 비평 텍스트에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영문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론과 실천이 엄격하게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론 자체가 하나의 실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그녀의 독법이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영문학의 고전들이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불후의 명작이 아니라, 제국의 발명에 이바지하고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처럼 1980년대 당시로서는 새로운 독법과 새로운 이론실천인, 포스트식민주의적인 관점에서 영문학 텍스트를 ‘불온하게’ 읽어내는 스피박의 글을 대하면서 독자로서 필자는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흘렀다. 2008년 전 지구적 금융위기가 또 한 차례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다. 전 지구적 금융자본주의의 위기는 예외적인 위기 상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조상 주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는 위기다.6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구 공산권이 몰락하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역사의 종말을 공언했다. 그는 이제 자유민주주의가 인류 역사의 최종 목적지이므로,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종말이라고 주장했다.7 후쿠야마가 보지 못했던 점은 그 이후에 진행된 전 지구적 금융자본주의가 몰고 온 위기였다. 2008년 금융자본주의의 붕괴 위기를 경험하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스피박 이론이 필자에게는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마이클 무어의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2009), 찰스 퍼거슨의 <인사이드 잡>(2010) 등의 다큐멘터리와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의 『블랙 스완』 등 무수한 저서들이 보여주다시피, 세계의 자본을 휩쓸어갔던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들은 2008년 그야말로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자 미국 의회는 황급히 공적자금을 투자해 미국 경제를 망쳐놓은 금융기업들을 되살려놓았다. 그 와중에 구제금융의 혜택을 받은 골드만삭스 같은 회사는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가 기사회생했으면서도 구제금융으로 얻어낸 돈으로 직원들의 상여금을 주는 도덕적 해이를 다시 한 번 드러냈다. 구제금융이라고 하면 마치 하늘에서 돈벼락이라도 떨어져서 위기상황을 구제해주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구제금융은 국민의 자산을 거덜 낸 바로 그 금융기업들에게 공적자금이라는 명목으로 국민의 세금을 퍼부어주는 것이다. 골드만삭스는 구제금융으로 회생했지만 리먼브러더스는 파산했다. 스피박이 「가치 문제에 관한 단상들」(1985)에서 거론한 바 있는, 158년 전통을 자랑하던 세계적인 금융기업이자 미국의 4대 투자회사의 하나인 리먼브러더스는 결국 파산했다. 글로벌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화폐의 전자적인 충동이 전 세계를 광속으로 움직일무렵, 리먼브러더스는 “15분 일하고…… 2백만 달러를 벌었다. 스리랑카 여성들은 티셔츠 하나를 사기 위해 2,287분 일해야 한다”8고 스피박이 지적했던 바로 그 회사다. ‘3’세계 여성들의 등골을 휘게 만들면서 축적한 부가 장기 지속될 수 없다는 스피박의 진단은 단지 윤리적인 판단만이 아니다. 오로지 이윤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금융자본주의9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녀가 사반세기 전부터 언급했던 일들의 결과가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스피박의 현재성을 새롭게 조명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체론적 유물론자이자 페미니스트로서 스피박은 신자유주의 경제가 초래한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3, 4세계 하위 여성 주체의 노동 착취와 빈곤의 양극화라는 화두를 놓친 적이 없다. 이런 그녀의 입장은 『다른 여러 아시아』(2011)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이 저서에서 그녀는 더 이상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욕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상상력을 통한 ‘욕망의 재배치’야말로 인문학 교육이 절실히 수행해야 할 일이라고 그녀는 주장한다.
이윤 추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문학의 위기가 거론되는 마당에 그녀는 오히려 인문학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인문학의 윤리적·정치적 과제는 창조적 상상력을 통해 전 지구적 자본이 충동질하는 욕망을 재배치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역설한다. 이때 인문학은 상상력을 훈련시키는 것이고 그런 상상력은 무(혹은 부재한 것)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사고 능력과 다르지 않다. 그런 상상력을 통해 욕망의 ‘비강제적’ 재배치를 훈련시키는 것이 인문학이 해야 할 역할10이라고 그녀는 주장한다. 그 와중에 그녀는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공모한다는 점에 일침을 가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이런 비판은 아마도 그녀 자신은 주류에 진입한 주변인 혹은 ‘교육기계 안의 바깥’으로 남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주류 부르주아 백인 페미니즘과는 다르다는 자신감의 한 표현일 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유토피아가 세계인들의 환상을 지배하고 문화 담론이 지식시장의 유행 현상이 되었을 때도 그녀는 3, 4세계 하위 여성들의 빈곤과 착취의 문제를 끊임없이 거론했다. 수많은 ‘포스트’ 이론들이 문화 담론으로 전회했을 때도 그녀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경제를 부인하는 문화주의는 문화의 가면 뒤에 가려진 야만적인 얼굴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해왔다. 문화와 취향이 코드화된 시대에 이런 주장들은 오래된 마르크스주의자를 연상시킨다. 얼핏 보면 이런 주장은 현란한 금융자본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경제적 범주에 매달리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처럼 비쳐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여성) 노동력은 더이상 일정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생존회로를 따라서 지구지역적glocal으로 이동한다. 생존회로의 밑바닥에는 값싼 노동과 가난과 인내가, 상층회로에서는 금융상품이라는 우연적이고 신나는 주사위 놀이가 진행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최근의 국제적 노동 분업에서 가장 열악한 희생자들은 여성이다. 여성들은 현재 진정한 산업예비군으로 남아 있다. 나이키 미국 본사에는 생산 공장이 없다. 따라서 본사에서 직접 신발을 생산하지 않는다. 모든 나이키 신발은 동남아시아와 베트남에 있는 익명의 하청업자들이 도맡아 생산한다. 나이키 회사가 말레이시아 나이키 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여성 노동자의 1년 임금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마이클 조던에게 CF 계약금으로 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노트북을 사용하는 여성은 그것을 실제로 만드는 중국, 한국 등지의 전자회사 여성 노동자의 착취를 애써 잊어야만 자유로운 주체가 된다. 전자통신 분야에서 실질적으로 노트북, 핸드폰, 스마트폰을 만드는 사람들은 주로 ‘3’세계 여성들이다. 그런 제품들이 해당 소비자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안겨주는 것처럼 포장됨으로써 ‘3’세계 여성 노동자들의 어깨에 지워진 무거운 짐은 감춰진다.
이처럼 전 지구적 금융자본주의가 몰고 온 위기를 보면서 스피박의 현재성을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피박의 방대하고 난해한 텍스트 중에서 주저라고 할 수 있는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 사라지는 현재의 역사A Critique of Postcolonial Reason: Toward A History of the Vanishing Present』와 ‘제대로’ 대면하고 싶어졌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양이 어떻게 발명되었는가를 보여주었다면, 스피박의 이 저서는 서구가 어떻게 발명되었는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저서는 서구의 근대가 가능하도록 해준 범汎인문학적 장치들, 즉 철학, 문학, 역사, 문화에 대한 비판서다. 서구의 근대적 유산을 비판하는 포스트식민 이론가로서 스피박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저서라고도 볼 수 있다.
A Critique of Postcolonial Reason: Toward a History of the Vanishing Present(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
그런데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은 제목부터 아리송하다. 칸트를 연상시키는 이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칸트를 제외하고 서구 근대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구 근대의 중핵은 종교로부터의 단절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이행하는데 이성의 발명만큼 핵심적인 사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천상에 머물던 신이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의 내면에 설치된 것이 이성이기 때문이다. 칸트 철학의 근간인 (근대적) 이성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인간의 척도가 되었다. 신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것이 이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근대적 이성이 아니라 ‘포스트식민 이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근대적인 이성과 포스트식민 이성은 어떤 차별성을 갖는 것인가? 포스트식민화된 후기 근대에 이르러 이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국가 이성이 국가의 존재이유raison d’État라는 뜻이라면, 포스트식민 이성은 포스트식민주의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는 뜻인가? 부제인 ‘사라지는 현재의 역사’는 무슨 뜻일까?
스피박의 『다른 세상에서』,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 그리고 이들 저서를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비판을 염두에 둔다면, 포스트식민 이성은 스피박 자신처럼 ‘3’세계 출신으로서 1세계에 자리 잡고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활용하는 ‘이성’이라는 뜻일까? 1세계 학계의 지식시장에서 ‘3’세계의 경제적·문화적 식민화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스스로를 ‘3’세계의 하위주체와 동일시하거나 대변인 노릇을 함으로써, ‘3’세계의 하위주체를 지식의 대상으로 동원하는 ‘이성의 간지奸智’를 말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이 책의 핵심 내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1990년대부터 9·11 테러 이전까지 포스트식민주의는 미국 학계에서 유행하는 담론이었다. 포스트식민주의에 입각한 다문화 연구야말로 인기 프로젝트였고 연구기금을 확보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주제였다. 이 말은 전 세계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미국의 이해관계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비판은 하되 그렇다고 위험하지는 않은 이론이 말하자면 포스트식민 이론이었는지도 모른다.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피츠버그 대학에 자리 잡고 있던 스피박 자신도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을 비롯한 여러 저서의 후광으로 동부의 명문 대학인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녀 또한 ‘외형상으로는’ 자신이 통렬하게 비판했던 메트로폴리탄 페미니스트11가 되었다.
이론 자체도 하나의 유행 현상인 데다 그 주기도 짧아, 제기한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잊히는 지식 시장에서 그녀의 저서는 일시적인 유행 현상으로서의 ‘포스트’ 이론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스피박은 폴 드 만Paul de Man,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등의 해체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주체의 죽음, 혹은 탈중심화된 주체12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적이 없다. 그녀가 끝까지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 (글로컬한) 주체 개념이다. 포스트식민 담론의 장에서 그녀를 스타 이론가로 부상시킨 논문인「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Can the Subaltern speak?」라는 글에서 보다시피 그녀가 상정하는 주체는 막연하고 느슨하다. 그럼에도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에게서 차용한 그녀의 하위주체subaltern 개념은 이제 포스트식민 이론에서는 핵심 개념으로 제도화되었다. 하위주체13라는 범주가 1980년대 한국 사회구성체 이론들이 말한 ‘기층민중’ 개념처럼 모호하다고 비판하면 스피박은 바로 그 때문에 하위주체 개념을 선호한다고 응수한다. 그녀가 말하는 하위주체는 교육받지 못한 가난한 ‘3세계’ 토착 기층민중(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하위주체는 자신의 목소리를 갖기 힘든 사람들이다. 스피박 같은 지식인들이 그들을 대변하고 재현해준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지식의 대상이지 지식 생산의 주체는 아니다.14 그러므로 정작 하위주체 여성들이 스피박의 난해한 글을 직접 읽을 기회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녀는 1세계 백인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할 때는 타자의 입장 혹은 ‘3’세계 하위주체의 입장을 보지 못한다고 끊임없이 비판하면서 페미니즘 내부의 이론적 편차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녀 또한 ‘3’세계 하위 여성 주체 혹은 토착 정보원들을 지식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위주체를 거론하지만 그녀의 난해한 글쓰기 전략은 결코 하위 여성 주체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피박은 과연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고 이처럼 난해한 글을 전략적으로 쓰고 있는 것일까? 스피박이 말하는 손쉬운 글쓰기는 정답을 제시함으로써 성급한 행동을 촉구하는 글쓰기를 의미한다.
대체로 회의적인 데다 행동으로 옮기는 데 느린 것이 지식인의 속성이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책에 고개를 파묻고 현실도피를 할 것이 아니라 행동하라는 소리를 종종 듣게 된다. 철학적 인식knowing이 정치적 실천doing으로 곧장 연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행동하라는 명령에 생각이 많은 지식인들은 아직 행동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변명할 수 있다. 무언가를 읽어야 할 시간은 그런 읽기를 그만두고 행동할 시간이기도 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반대로 철학적 성찰이 필요한 순간과 대면하는 것이 두려워 성급한 행동주의로 빠져들 수도 있다. 스피박은 끊임없이 지적인 성찰과 경계를 해야 할 곳에서 상투적인 해답을 내리고 그에 따라 조급하게 행동하는 것은 기계론적인 정치적 실천에 봉사할 확률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성급한 행동주의로 인해 ‘내가 과연 무슨 짓을 했던가?’라는 사후적인 반성과 마주칠 수도 있다. 스피박의 말을 뒤집어 생각한다면 지식인들은 본인이 직접 행동하는 데는 느리고 남들을 행동하도록 만드는 데 훨씬 더 익숙한 사람들이다. 물론 지식인들이 선동적인 정치가는 아니지만 자신들의 지식 생산이 궁극적으로는 타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반反/계몽하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난해한 글쓰기에 대한 스피박의 변명은 지식인들의 무기력증을 옹호하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난해한 글쓰기는 바로 그 난해성 때문에 끊임없이 리더reader와 해제들을 생산한다. 난해한 이론을 풀어서 평이하게 삼킬 수 있도록 해주는 작업이 줄기차게 반복되지 않을 수 없다. 쉬운 글쓰기에 수많은 리더가 나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해제 또한 스피박의 이론을 재생산하는 데 가담하고 있는 셈이다. 이름 앞에 수식어가 많이 붙어 다니는 이른바 ‘하이픈’ 이론가답게 스피박은 철학적 일관성, 순수성을 포기하면 오히려 생산적인 이야기들이 풍부해질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녀는 필요에 따라 해체론,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 등을 오가면서 자기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치경제학과 가치의 경우 해체론을 가지고 옴으로써 경제결정론을 해체하고 그 대신 그것의 대리 보충supplement으로서 차연différance을 주장한다. 페미니즘을 언급할 때는 여성들 내부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전 지구적 입장에서 하위주체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철학을 정신분석함으로써 철학이 완강하게 고집했던 진리의 독점을 또한 해체한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이론을 문학화함으로써 자기 이론의 진리가치를 독점하려고 하지 않는다. 포스트이론가인 그녀가 자기 이론의 확실성, 진리치를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사료의 객관성과 진실성을 주장하지만, 역사와 문학이 얼마나 지척에 있는지를 스피박은 심문한다. 이런 혼란스런 방식을 통해 그녀는 오독의 생산성을 적극적으로 역설한다.
1 Fredric Jameson, “Metacommentary,” PMLA 86, 1971년 1월.
2 스피박의 이 논문은 그녀의 저서 『다른 세상에서』, 태혜숙 옮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3, 164~96쪽에 수록되어 있다.
3 이 소설에서 드래블은 3인칭 시점을 비판하면서 화자인 제인의 1인칭 시점을 옹호한다. 3인칭 시점이야말로 ‘정신분열적’이라는 제인의 발언은 3인칭 시점을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기존의 입장을 전복시킨 것이다. 그런데 스피박은 그런 제인의 입장을 부르주아 지식인 여성의 한계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스피박은 세계로부터 미학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1인칭 시점의 깊은 물속에 빠지지 않으려면 3인칭이라는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문학 장치의 문제와 한국 여성 노동자 문제를 결부시킨다.
4 신비평은 문학 텍스트가 ‘완전한 전체’임을 강조한 비평 이론이었다. 신비평주의자들은 문학 텍스트를 흔히 무결점의 잘 빚어진 항아리에 비유했다. 신비평은 동일한 텍스트를 읽으면서도 각기 달라질 수 있는 독자의 반응은 ‘감성적 오류’라는 이유로 배제했다. 텍스트에서 저자의 의도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의도의 오류’라는 이름으로 배제했다. 계급, 성차, 인종, 민족 등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는 개인들의 독서 경험은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데 걸림돌이기 때문에 괄호 속에 묶어두었다.
5 컨트롤데이터 사 사건과 관련한 상세한 내용은 임옥희,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0, 1장 참조.
6 스피박은 자본의 전 지구화 과정에서 민족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초국가적 자본에 주목하면서 계급, 젠더, 인종의 그 어떤 범주보다도 자본을 상위에 두고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7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이상훈 옮김, 한마음사, 2007 참조.
8 스피박, 『다른 세상에서』, 태혜숙 옮김, 여성문화연구소, 2008, 350쪽.
9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stsky는, 20세기 초 자유방임의 고전자본주의 시대(자본주의 1.0)를 지나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케인스가 내세운 수정자본주의(자본주의 2.0), 1970년대 이후의 자유시장자본주의(신자유주의·자본주의 3.0)에 이어 이윤 추구 자본주의는 더이상 지속할 수 없으므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적 기업 시대라는 자본주의 4.0을 주장하고 있다. 아나톨 칼레츠키, 『자본주의 4.0Capitalism 4.0: The Birth of New Economy in the Aftermath of Crisis』, 위선주 옮김, 컬처앤스토리, 2011, 참조.
10 스피박, 『다른 여러 아시아』, 태혜숙 옮김, 울력, 2011, 13쪽 참조.
11 ‘메트로폴리탄 페미니즘’은 한때 제국의 종주국이었던 나라에 속한 페미니즘을 일컫는 말로 스피박이 사용한 개념이기도 하다. 특히 1세계 학계의 중심부에 있는 페미니스트(크리스테바 같은 프랑스 페미니스트를 위시하여)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12 주체의 해체, 탈중심화를 무비판적으로 칭송하는 포스트모던 이론들은 결국은 포스트포디즘적인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위한 길 닦기 이론이었다는 신랄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사카이 다카시, 『통치성과 ‘자유’: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 오나하 옮김, 그린비, 2011, 54쪽 참조.
13 그람시가 「역사의 여백에서: 하위주체의 사회집단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개념을 음독하기보다 하위주체로 번역하고자 한다. 열등한 계층으로 계급의식을 갖지 못하고 지배당하는 한국의 1980년대 정서로 본다면 엄격한 사회학적 개념은 아니지만 기층민중에 해당한다. 하위주체에 관한 개념은 이 책 240쪽 용어 사전 참조.
14 스피박의 짧은 글로부터 이 해제의 서두를 시작한 데에는 또 다른 계기가 있었다. 이혜란 감독의 다큐 <우리는 정의파다We Are Not Defeated>(2005)의 제작일지가 준 감동 때문이다. 이 작품은 1970년대 말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여성 노동자들의 복직투쟁 집회를 기록한 것이다. 동일방직 복직투쟁자 중에는 컨트롤데이터 사에서 해고된 이영순 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27년 전 여성 노동자들이 뭉쳐 민주노조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회사는 남성 노동자 구사대를 시켜 노조 사무실에 오물을 투척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지금 그들은 학자, 기자, 면담자 들이 지겹도록 대상화하고 착취해간 자신들의 이야기에 반발하면서 자신들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벌써 사오십대가 된 그들 대다수는 아직도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패배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패배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다큐는 하위주체로서 여성 노동자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론 노동자들이 저지르는 ‘필연적인’ 실수는 기층 민중 운운하면서도 결국은 그들을 대상화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필연적인 실수라는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글을 쓰는 자기 성찰이 스피박이 주는 매력이기도 하다. 그녀는, 전 지구적인 인식의 지도를 그리고 싶어 하는, 혹은 하나의 이론으로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가들의 나르시시즘과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난해한 스피박의 이론, 어떻게 읽을 것인가
스피박은 자기 글쓰기를 평이하게 만들어 난해한 사고의 매듭을 풀어버림으로써 쉽게 소비하는 것에 저항하는 이론가다. 스피박의 이런 입장이 그녀에 관해 더 많은 글쓰기를 유도한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스피박 읽기의 고민이 시작되는 지점도 이 부분이다.
스피박은 포스트식민주의-해체주의-마르크스주의-페미니스트 이론가로 일컬어진다. 그만큼 하나의 이론으로 규정하기 힘든 이론가다. 스피박의 욕망은 자기 이름 앞에 붙어 다니는 하이픈 이론의 ‘변증법적인’ 종합이 아니라 불연속성에 노출되는 것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와 같은 ‘포스트’ 이론가들은 편집증적인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욕망이 ‘총체성’이라고 비판한다. 모든 것을 하나의 열쇠를 통해 총체적으로 설명하려는 욕망이야말로 그에게는 타도의 대상이었다.15 하지만 인식의 습관 자체가 시-중-종이라는 완결된 서사 구조를 요구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일관된 논리로 꿰어놓지 않은 파편화되고 분열증적인 이론은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미국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의 강박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를 꿸 수 있는 인식적 위치를 점하는 것이다. 허구라고 할지라도 제임슨의 이론에서 총체성(부재로서의 총체성)은 파편화되고 삽화적인 서사들을 하나로 꿸 수 있는 실타래로 기능한다.
이에 반해 “나는 브리콜뢰르bricoleur다. 나는 닥치는 대로 사용한다”16고 고백한 스피박은 다양한 이론들에 치밀하고 정연한 논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나의 입장을 고수하지 않으므로 때로는 어떤 관점에서 누구를 상대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호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해체론의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하기도 하고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해체론과 마르크스주의 둘 다 비판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간디와 같은 인도의 엘리트 민족주의를 공격하면서 하위 민중 여성 주체의 입장을 굳건하게 유지하기도 한다. 그녀는 포스트식민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페미니즘이 젠더 하나만으로 연대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연대하고 서로 자매애를 발휘해야 한다는 부르주아 페미니즘이 주장한 자매애sisterhood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 자매애야말로 1세계 페미니스트들이 인식의 대상으로서 ‘3’세계를 구성하기worlding 위해 ‘3’세계 여성을 동질적인 하나의 대상으로 고정시키는 인식적 폭력이라고 맹렬히 비판한다. 이처럼 그녀는 자기 이론을 고착화하고 평면적으로 소비하는 것에 저항한다. 하이픈으로 연결된 어느 하나의 이론에 자기 입장을 정초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 모든 입장 사이를 유연하게 떠돈다.
그녀는 온갖 이론, 문학 작품, 문화 담론, 영상 이미지 들을 가로지르면서 개입하고 ‘간섭’한다. 그녀는 영문학자이지만 영문학 텍스트 자체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녀는 자본주의 분업 체제에 바탕한 분과학문 체제를 넘어서려는 최근의 다학제 간 융합학문 혹은 학제 간 경계 넘기를 처음부터 실천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양한 이론을 오가면서도 동시에 해체하고 있으므로 그녀의 이론은 난해하고 문장은 난삽해진다.
그러므로 그녀가 해석한 상황을 또다시 해석하는 메타해석은 어쩔 수 없이 해설자의 주관적 관점에서 읽어낸 또 다른 해석의 하나가 될 것이다.17 예를 들어프레드릭 제임슨이 알레고리로 해석한 상황에 대한 스피박의 비판을 또다시 해석해야 하는 해설 작업은 원본에서 몇 단계나 멀어지게 만든다. 플라톤 식 어휘를 동원하자면 원본이라는 이데아에서 서너 단계나 멀어질 수 있다. 해석에 대한 해석, 그 해석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사소한 편차와 오독으로 인해 무한한 자기 증식과 자기 복제를 가능케 한다.
스피박이 안이한 해석에 반대하면서 “평이한 글쓰기에 속임수가 있다”18고 주장한 것도 그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아직도 그녀의 이론이 어렵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그녀가 주는 대답이다. 도무지 명쾌한 대답이 나올 수 없는 맥락 속에서 시원한 대안을 내놓는 것은 사기이고 기만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 이론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간단하게 소비되는 것에 저항한다. 자기 이론이 소비시장의 회로에서 손쉽게 소비되고 망각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난해한 글쓰기를 고집한다. 그것이 난해한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변명이다.
스피박의 난해한 글쓰기에 대한 철학적 변명을 따져보면 대단히 아이러니컬하다. 그녀는 1세계 페미니스트들이 하위 여성 주체들을 토착 정보원으로 도구화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정작 그녀 자신도 난해한 글쓰기를 통해 하위 여성들을 배제시키고 있다. 대체로 문맹인 하위 여성 주체들은 스피박이 쓴 글들을 이해는커녕 접근할 기회조차 없다.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의 3장「역사」에서 스피박은 과거 히말라야 고산 지대 왕국의 여왕이었던 라니를 찾아가는 도중에 만난 여성들을 언급한다. 염소 떼를 몰고 가는 여성들이 스피박이 말한 하위 여성 주체겠지만 그녀들이 무슨 소용에 닿는다고 스피박의 텍스트를 읽겠는가. 종이를 좋아하는 염소의 먹잇감이 아니라면 스피박의 책이 그녀들에게 쓰일 용도는 없을 것이다.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에서 그녀는 ‘3’세계 하위주체를 배제하는 것은 제국주의적인 기획을 연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녀의 글쓰기가 난삽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연구가 연구라는 이름으로 ‘3’세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토착 정보원으로 기능하게 내버려두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일 수 있다. 1세계 이론을 해석하고 분석했다는 것만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스피박의 글에 대한 수많은 해제가 생산되는 것 또한 그런 난해함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난해한 글쓰기는 그녀가 그토록 비판한 1세계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것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그녀는 누구를 대상으로 자신의 글쓰기 철학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벨 훅스Bell Hooks의 경우 빈곤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하층(중산층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대중적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쓴다.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 하층 여성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자기계발 담론의 어법을 긍정적으로 차용하면서 벨 훅스는 자아실현을 통해 그들에게 자긍심을 북돋워주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훅스는 프랑스 페미니즘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정체성의 정치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기존 제도와 협상하고자 한다. 그녀는 일견 인종 차별로 보이지만 사실은 계급 갈등에서 비롯된 문제에 주목함으로써,19 자기 글쓰기의 대상을 어린 나이에 싱글맘이 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로 정하고 자신의 글이 그들의 삶을 위한 하나의 지침서가 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어렵게 쓰려야 쓸 수가 없다.
스피박은 계급보다는 전 지구적인 자본에 방점을 찍는다. 벨 훅스와 달리 스피박이 대상으로 삼는 청중은 결코 아프리카계-미국인 여성이 아니다. 그녀의 이론적인 토대는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하위여성 주체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추상화된 하위주체이며 스피박의 직접적인 청중은 아니다. 1세계 강단에서 한줌의 엘리트 학생들을 대상으로 메타비평을 하려면 쉬운 언어로 말할 수 없다. 페미니스트들 또한 자신이 처한 위치, 즉 인종, 계급, 민족, 종교, 국적에 따라서 글쓰기 방식, 세계의 해석,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론이 달라진다.
페미니즘의 이질적 목소리를 옹호하는 스피박은 1세계 페미니스트들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보편적인 여성 주체로 등치되는 것에 부정적이다. 그런 입장은 ‘3’세계 여성들과의 연대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식민화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이 책의 2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녀가 영문학의 고전인 『제인 에어』를 분석한 데서 잘 드러난다. 제인이 사망한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고 마침내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순간, 그녀는 서구 제국주의의 노예제도와 공모하면서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3’세계 자매 위에 군림하는 백인 여성 주체가 된다. 그러므로 스피박은 정체성을 추구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 단일하고 단수적인 정체성의 정치학 대신 ‘다른’ 여성은 누구인가, 라는 복수의 주체성에 주목한다. 여성으로서 ‘우리’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우리는 몇 명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공통된 젠더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이므로 보편화할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서구 페미니즘의 오만은 보편적인 여성 주체를 설정하면서 타자인 여성들을 자신과 동일시, 동질화하는 나르시시즘을 되풀이하거나, 혹은 시혜적인 입장에서 우리처럼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면 여성해방이 될 것이라고 계몽하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드러난다는 것이다.
스피박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를 읽어내려면 초국적 독해능력transnational literacy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전 지구적 금융자본주의 시대는 한 국가 차원의 독해 능력만으로는 온갖 모순이 중첩된 사회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서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지구지역적으로 연결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독법이 필요한데 스피박은 그것을 초국적 독해 능력이라고 일컫는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초국적 독해 능력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전 지구적 인식 지도 그리기의 야심과 별반 다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다시피 스피박은 이질적인 문화, 역사를 통합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능력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전 지구적 관점은 지구를 들어 올릴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와 받침점을 필요로 한다. 우주비행사와 같은 거시적 관점으로 보아야만 지상의 빈곤한 자들의 삶이 포착될 수 있다. 그것은 지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여신의 관점과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보기 위해 소용돌이의 꼭대기로까지 비상해야 한다면 그런 아득한 높이에서 과연 생존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여성들의 삶이 보일까? 하위 여성 주체들을 전경화하려는 이론에의 욕망은 그들의 목소리를 재현함으로써 침묵시키는 아이러니에 빠질 수도 있고, 예이츠의 시 「재림」에서처럼 이론가라는 송골매가 너무 높이 나는 바람에 지상의 고단한 하위 여성 주체를 비가시화하는 맹목에 빠질 수도 있다.
스피박은 전 지구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는 관점을 묘하게도 인문학(최근 들어서는 비교문학 포함)20에서 찾는다. 스피박은 미래에 대한 녹색 비전과 원거리 생성시학(텔레오포이에시스teleopoiesis, 238쪽 용어 사전 참조)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비상하는 이론가의 이론이 아니라 추락하는 시인의 상상력일 수도 있다. 총체성이 아니라 불연속성에서,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원거리 생성시학을 통해 ‘남南’의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녀는 서구 철학에서부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칸트의 이성 비판이 어떻게 야만인들의 영혼을 발명했으며, 그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조망한 것이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 1장의 내용이다.
스피박이 전개하는 이론을 장악해서 필자의 관점에서 풀어쓴 해제를 여는 글에 담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론과의 거리 유지가 쉽지 않았다. 메타해석의 고충이 바로 이런 점이다. 어디까지가 필자의 주장이고 어디까지가 스피박의 이론인지가 불분명해지는 지점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난해한 스피박 이론을 가능한 한 평이하게 풀어쓰는 작업에 그치고 말았다. 평이하게 풀어쓰는 것이나마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해석은 해석자와 텍스트와의 고독한 씨름이 아니라 타자로서 독자의 목소리와 함께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위안으로 삼고자 한다.
15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유정완 옮김, 민음사, 1991 참조.
16 Angela McRobbie, “Strategies of Vigilance: An Interview with Gayatri Chakravorty Spivak,” Block 10, 1985, p. 8. 로버트 영, 『백색신화』, 김용규 옮김, 경성대학출판부, 2008, 389~400쪽에서 재인용. 브리콜뢰르는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대는 사람을 뜻한다.
17 프랑스의 철학자 사라 코프만Sarah Kofman은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00~399년 69세의 나이로 죽었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지 29년 뒤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태어나기 44년 전이었다”라는 전기적인 사실이자, 역사적이고 객관적 사실을 나열하는 헤겔의 문장에서도 해석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한다. 헤겔은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페리클레스의 죽음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탄생이라는 연대기를 통해 언급한 것은 이미 특정한 독서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순진한 독서가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변증법적인 위치에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헤겔이 선호한 영웅들 사이에 소크라테스를 위치시킴으로써 경험적인 죽음을 넘어서 그의 죽음을 지양하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해석에는 이미 해석자의 해석이 언제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18 스티브 모 튼 , 『스피박 넘기』, 이운경 옮김, 앨피, 2005, 20쪽에서 재인용.
19 벨 훅스, 『경계넘기를 가르치기』, 윤은진 옮김, 모티브북, 2008,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이경아 옮김, 모티브북, 2008 참조.
20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표현(정서의 구조)을 도용하자면 지역학(부상하는 학문emerging), 인문학(지배적인 학문dominant), 비교문학(잔여학문residual)이 서로 경합하는 가운데 그나마 비교문학의 위상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는 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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