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싸움은 생명의 문제다
돈
돈이나 경제라는 단어는 나에게 먼 이야기 같았다. 멋 부리듯, 돈이란 그저 내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따라오는 것쯤으로 여겨 왔다. 돈 이야기를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은 신사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주식이나 대출 같은 것도 잘 몰라서 내가 하고 있는 금융활동이란 돈이 생겼을 때 이 돈을 보관하는 통장 두 개가 전부다. 그나마 나보다 돈 사정에 조금 더 밝은 아내가 이자를 더 주는 곳에 돈을 옮기자고 해서 그렇게 한 적은 있다. 그때도“거기에서 우리한테 이자를 더 주고, 그 대신 받아 가는 게 뭐냐?”고 했다가 가정경제에 무심한 남편으로 찍혀서 빈축만 샀다. (처제와 장인어른에게는 소문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이 있고부터 삼성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삼성의 영향력이 그렇게 큰지 잘 몰랐다. 다만 저 기업은 무슨 이유로 텔레비전에 나와서 국민들에게 으름장을 놓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나는 삼성이란 기업으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은 적이 없는데……. 게다가 나 같은 사람들은 삼성 제품이 마음에 들면 돈을 주고 사는 소비자인데, 장사꾼이 손님한테‘우리 가게 망하면 당신들한테도 좋지 않아.’하고 말하는 거 아닌가? 흔히들 손님은 왕이라고 하는데, 손님한테 협박하는 장사꾼도 있나?
지금도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말라는 외침이 귀에 쟁쟁하다. 삼성이 아무리 엄청난 재벌 기업이라 해도 장사하는 주체일 뿐이지 누구를 지배할 수 있는 주체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모르는 소리 그만 하라고요?
삼성에서 딸을 잃은 아버지, 황상기 씨 이야기
삼성이 대한민국의 위기를 말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이 운전하는 택시 뒷좌석에서 딸이 죽는 걸 봐야 했던 아버지, 황상기 씨 이야기가 들려왔다. 황상기 씨의 딸 유미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 아버지의 목소리는 삼성의 목소리보다 너무 작아서일까, 우리에게 잘 들리지 않는다. 삼성은 황유미가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얻은 ‘직업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고 개인적인 질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7년부터 시작된 황상기 씨와 삼성의 싸움은 삼성의 경제 지배력에 묻혀 사람들에게 관심받지 못하고 있다. 혹은, 알고는 있지만 삼성이 가진 영향력 때문에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돈이 문제다. 그러나 황상기 씨의 싸움은‘돈’문제 때문이 아님을 알리고자 한다. 이 싸움은 현장 노동자들이 위협받고 있는‘생명’의 문제다.
황유미는 2003년에 삼성반도체에 입사해, 2005년에 백혈병을 진단받았고, 병과 싸우다 2007년 사망했다. 그리고 삼성반도체에서 이렇게 죽은 사람은 황유미 한 사람만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한편으로 삼성이 우리 나라를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 그 과정을 추적했다. 회사에서 일하다 얻은 질병으로 직원들이 죽어 가는 동안 삼성은 무엇을 외면하고,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삼성은 우리 나라에서 중요한 기업이다. 하지만 그네들이 만든 제품을‘사람’에게 팔고 있다면, ‘사람’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더는 성장할 수 없다. 삼성이 올바른 경쟁력을 가져서, 기꺼이 좋아할 수 있는 기업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여기, 눈 앞에서 딸의 죽음을 지켜 보고, 삼성과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던 한 아버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길 바란다.
2012년 4월
김수박
(작가의 말, 본문 일부)
이제 이들의 죽음을 알아야 할 때
『사람 냄새』는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를 세상에 처음 알린 택시 기사 황상기 씨의 이야기이다. 그는 딸 유미 씨가 자신이 몰던 택시 뒷좌석에서 눈감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유미 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2년 동안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했다. 『먼지 없는 방』에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11년 동안 일했던 정애정 씨의 이야기가 담겼다. 그는 삼성맨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일했고 일터에서 남편 황민웅 씨도 만났다. 하지만 그는 삼성으로 인해 결국 남편을 잃었다. 민웅 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둘째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채 보지 못하고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이번 작업에는 『내가 살던 용산』과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도 참여한 바 있는 김수박, 김성희 작가가 참여했다. 김성희 작가는 반도체 공장의 노동자들이 어떤 환경에 속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해 상세히 그려냈으며, 김수박 작가는 삼성공화국이라 불리는 한국사회의 모순까지 담아냈다. 지금까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 제보된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는 155명에 달하며, 이 중 62명이 사망했다. 이중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SDI 등 삼성 직업병 피해제보는 137명으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삼성 직업병 피해 제보자 중에서는 54명이 사망한 상태다. 불과 하루 전인 7일에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 진단을 받고 투병해 온 이윤정 씨가 유명을 달리 했다. 한편 지난 4월 10일에는 근로복지공단이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재생불량성빈혈을 앓게 된 김지숙 씨에 대해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이는 삼성반도체와 관련한 첫 산재 인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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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수박
만화가 김수박은 1974년 대구에서 태어나 건축공학을 전공했다. 대학 신문에 시사만화를 연재하면서 만화 활동을 시작했다. 그린 책으로 《사람의 곳으로부터》《아날로그맨》《오늘까지만 사랑해》《만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모두 2권)《빨간 풍선》이 있고, 만화집 《내가 살던 용산》《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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