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그림은 작품 전체가 동시에 존재한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다. 소설이나 교향곡, 영화는 단어나 음, 장면의 연속으로서만 의미를 갖지만, 그림은 시간이 흐른다고 더해지거나 잃는 것이 없다. 그림에는 시작도, 중간도, 끝도 없다. 나는 그림이 변함없는 정적 속에서 다른 어떤 예술 장르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시간 바깥에 존재하는 것 같아서 그림을 사랑한다. 아마 더 나이가 들수록 지금 이 순간이 다음 순간에 밀려 과거가 되기 전에 세상을 정지시켜 현재를 붙잡고 싶은 마음도 강해질 것이다. 그림은 영원한 현재의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마법에 걸려서 시계가 째깍거리기를 멈춘 듯 내 눈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림의 역사는 대개의 경우 탁자 상판만큼이나 평평한 물건을 둘러싼 이야기다. 재현적인 그림은 실제 세계에서 알아볼 수 있는 사물이나 인물(여기에는 가상의 존재, 괴물, 요정 등도 포함된다)을 3차원이 아닌 2차원의 시각적 기호로 옮겨놓는다. 한편 추상 작품은 그림 속의 사물이나 인물을 알아보는 문제를 놓고 유희를 벌이거나, 그림은 평평하다는 진실을 숨기지 않으며 그림 속 사물이나 인물을 알아보는 일을 완전히 포기한다. 그림은 조각과 달리 뒷면이나 뒷모습이 중요하지 않다. 그림을 볼 때는 캔버스 둘레를 걸어 다니지 않으며, 대체로 사각형인 그것 앞에 서서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을 응시한다.
테두리는 그림의 경계와 규모를 결정하기 때문에 그 안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우리는 아주 작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거대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림 속 인물들이 나만큼 큰가 아니면 축소되었는가? 아주 작은 그림은 거대한 그림과는 전혀 다른 자극을 준다. 또한 그림의 테두리는 일상적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의 시야를 제한한다. 거리를 걸어갈 때 나는 결코 모든 것을 보지 않는다. 나의 시야는 필요에 따라 걸러져서 어떤 이미지들은 무시하고 다른 이미지들은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다양한 감각이 뒤섞여 있어서 시각적인 부분만 골라내기가 쉽지 않은 한 덩어리의 자극들 중 한 부분에 불과하다. 회색 티셔츠와 파란 바지를 입은 남자가 내 앞에서 길을 건널 때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쓰레기 냄새와 빵 굽는 냄새가 뒤섞여서 나는 식이다. 반면에 그림은 절대적인 경계선으로 둘레가 정해진 어떤 공간에 내 눈이 집중해서 정지된 채 고요하고 냄새 없는 그 이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몹시 제한적인 관조적 응시의 한 형태이며,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무수히 많은 광경을 받아들이는 일보다 여러모로 훨씬 더 쉽다.
그런데 그림의 구성요소가 변하거나 시간에 따라 달라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그림을 경험할 때는 그런 동시성이 작용한 적이 없다. 내가 어떤 그림과 특별하게 만나는 일은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났고, 나는 좀처럼 하나의 이미지가 갖는 다양한 측면을 모두 단번에 완전히 흡수할 수 없었다. 가끔은 미술관에서 내가 ‘짤막한 농담’ 같은 작품이라고 부르는 캔버스 무리를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단순히 두 작품을 나란히 배치한 상황이나 깜짝 놀라게 만드는 순간에만 의존하는 작품들, 농담에 모든 힘을 쏟아버려서 곧바로 내 관심 밖으로 벗어나는 작품들이다. 농담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깨닫고 나면 더 이상 그 말을 돌아볼 필요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이와 달리, 이 책에서 다루는 그림과 판화들은 내가 바라보았던 긴 시간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떤 이미지는 그 모든 측면을 검토하려면 오랜 시간 바라보아야 하고, 그 이미지가 마음에 정착할 수 있도록 휴식 시간까지 주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도 탁월한 미술작품들은 계속해서 분명한 정의를 피해 간다.
뭔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엄청나게 복잡한 일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받아들이려면 그것이 무엇이든 따로 고립시키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만일 내가 구상회화를 보고 있다면, 나는 캔버스 중앙에 서 있는 여자를 먼저 알아본 후에 왼편 구석에 떨어져 서 있는 남자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나 그녀가 입은 드레스 단의 얇은 레이스를 알아보는 것은 그 남자를 본 이후가 될 것이다. 만일 여러 가지 색과 형체로 이루어진 추상회화를 본다면, 황토색보다 빨간색을 먼저 볼 것이고, 크고 육중한 형체를 그 근처의 자잘한 물감 자국들보다 먼저 볼 것이다. 우리는 이런 구별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사실 그렇게 구별하는 능력은 경험의 생리학에 뿌리를 둔다. 앞을 못 보던 사람이 갑자기 시력을 회복한들,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갖고 있던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똑같이 볼 수는 없다. 그들의 시각은 조직화되지 않아서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흐릿한 형체를 이해하는 데 몇 년이 걸리거나, 심지어 끝까지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샌디에이고의 캘리포니아대학 언어연구소 소장 엘리자베스 베이츠는 ‘언어 경험이 성숙한 뇌의 형태와 구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아의 뇌가 성인의 뇌와 구조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앞을 보지 못하다가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은 가장 초보적인 시각의 세계에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들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적인 시각 표상과 연상들을 획득하지 못했다. 이런 획득 과정에는 언어를 습득하고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언어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포함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그리고 언어와 함께 도달하는 인간 경험의 상징성을 통해 ‘저쪽에 있는 것’을 지각한다. 여기서 인간 경험의 상징성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기대하거나 알아보거나 기억하게 하는, 오랜 기간 형성된 문화적 위계와 회화의 코드를 가리킨다. 맹시盲視(blindsight. 사물을 보되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현상. 시야의 자극을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광원이나 자극의 존재 자체는 정확하게 느낀다―옮긴이)라는 이상한 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모두 시신경에서 흥분을 받아들이는 후두엽의 시각피질에 손상을 입었다. 이런 환자들은 뇌의 손상되지 않은 부분에서 여전히 시각 정보를 처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보고 있다는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마크 솜즈와 올리버 턴불이 공저 《뇌와 내적 세계》에 썼듯이, 맹시를 겪는 사람들의 뇌는 ‘시각적으로 계산할 줄은 알지만 시각적 자각은 갖지 못한다’. 이런 자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앞에 놓인 시각적 정보를 ‘추측’해보라고 요구받으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높은 수준의 정확성을 보이면서도 사실상 앞을 보지 못한다. 우리 모두 시신경이 망막으로 들어가는 지점에 맹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를 볼 때 그런 공백을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게 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들로 그 틈을 메우기 때문이다. 경험에서 생겨난 기대가 틈을 메운다.
이런 설명이 미술작품을 바라보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 같은 내용은 뇌의 시각 능력이 기계적이지 않음을 확인시켜준다.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작은 카메라를 머릿속에 갖고 있지 않으며, 우리의 기억은 과거에 보았던 것과 동일한 복사본을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는 컴퓨터 파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각은 역동적이고 고정되지 않는 기억, 우리가 본 것을 이해하게 해주는 기억에 의존하는 극도로 복잡한 신경세포의 작용이다.
미술작품을 보자마자 잊어버린다면 맹인이 되는 것만큼이나 불편하리라. 우리가 관심을 갖는 미술은 기억 속에 오래 살아남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러나 평범한 시각 능력으로는 아무리 몇 시간씩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해도 나중에 그 그림을 고스란히 떠올리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림을 기억할 때 세부 사항을 놓치거나 배경을 흐릿하게 기억하거나 색을 바꿔놓는다. 나는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감상하면서 인물 한 명을 완전히 빠뜨렸다. 등장인물이 세 명밖에 없는 그림인데 말이다. 그 그림을 다룬 에세이에서 설명했듯이, 남자 등장인물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행방불명되었다. 때때로 지각의 오류가 그림의 내적 논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본다는 것은 항상 해석을 동반한다. 그리고 기억의 왜곡은 단순한 실수 그 이상의 것을 드러낸다. 그때까지 어떤 작품에서 눈에 띄지 않고 넘어갔거나 무심결에 ‘보고’ 지나친 측면을 보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특성이 그렇지만, 시각 능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러시아의 유명한 신경학자 알렉산더 루리아의 환자 중에는 자기가 본 것을 모조리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가 있었다. 마치 카메라처럼, 그의 마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이미지들을 찍어내는 것 같았다. 동물학자이자 자신의 자폐증에 대해 글을 쓴 템플 그랜딘도 사진기 같은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는 일에 비유했다. 그녀의 특출한 시각 능력은 그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고 모든 기억을 그대로 떠올릴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이 내면의 그림들에 어떠한 감정적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다.
지각 능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더 평범한 사례도 있다. 내 딸 소피가 다섯 살이었을 때 딸애가 다니던 유치원의 교사는, 20년간 교사 생활을 했지만 사람을 그릴 때 뒷모습을 그리는 아이는 처음 보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딸이 사물을 색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도 시각적인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물론 그 기억이 편집과 착오를 거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어떤 그림을 볼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전면적’으로 파악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술작품을 다룬 책을 읽다가 내가 그 작품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부분, 심지어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경우를 종종 경험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나는 지독한 근시여서 안경을 끼지 않으면 세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시각적 애매함을 견디지 못하는 편이다. 남편에게는 쾌적하게 느껴지는 어둑하고 깜깜한 방이 나에게는 좌절감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나는 편두통과 거기에 동반되는 전조증상에 시달려왔다. 편두통이 오려고 하면 눈앞에서 빛이 깜빡이고, 검은 형체들이 떠다니며, 아주 작은 구멍들이 반짝거린다. 뿐만 아니라 단 한 차례이지만 ‘왜소 환각Lilliputian hallucination’이라 불리는 증상도 경험했다. 내 침실 바닥 위에 분홍색의 아주 작은 인간이 두 명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아마도 그런 경험들 때문에, 나는 그런 시각적 장애를 전혀 겪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욱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미심쩍게 여기게 된 것 같다. 의심하는 마음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
오랫동안, 열심히, 그림의 모든 부분을 살펴보면서 나는 미술사학자들이나 비평가들이 과거에 한 번도 논의하지 않은 부분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나는 베르메르의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의 창틀에서 계란 모양의 세부 장식을 발견했다. 나는 이 부분이 전체 퍼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조각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 전체가 수태고지를 나타낸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또 고야의 ‘로스 카프리초스’에서는 숨겨진 자화상을 여러 점 발견했고, <5월 3일의 처형>에서도 자화상을 발견했다. 이런 발견 덕분에 나는 직업적으로 미술작품을 분석하는 사람들에게도 맹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주 오래된 그림, 아주 유명한 그림에서 새로운 뭔가를 발견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견의 순간은 온다. 르네상스 화가들이 거울을 흔히 이용했다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이론은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호크니의 주장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의 통찰이 현직 미술가로서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개별 캔버스들을 꼼꼼하게 연구한 결과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놀라운 것은 그의 아이디어를 둘러싼 논란이 아니라 호크니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런 가능성을 점친 적조차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시각예술은 오직 보이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바라보는 ‘나’와 대상인 ‘그것’의 소리 없는 만남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인간의 의식이 남긴 물질적 자취이기도 하다. 화가 자신은 작품 속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는 우리에게 작품을 남겨주었다. 그것은 어떠한 실용적인 목적도 갖지 않는, 순수한 의지의 행위다. 그림에는 어떤 ‘나’ 혹은 어떤 ‘너’의 흔적이 담겨 있다. 미술에서 바라보는 자와 사물의 만남은 상호주관성을 전제로 한다. 아마도 그림이 실제로 말을 건다면 나는 질겁하고 도망치겠지만, 인간 존재가 그림의 일부라는 사실은 의식한다. ‘그림이 정말로 내게 말을 걸었다’는 화랑가의 상투적인 표현처럼,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술을 그렇게 느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술작품을 바라보는 데 상호주관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말은 그것이 개인적인 행위이지 몰개성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그림이 유령이라고, 살아 있는 몸의 망령이라고 곧잘 생각해왔다. 그림 속에서 우리는 생각의 엄격한 적용만 보는 것이 아니라 붓놀림과 물감의 흩뿌림, 얼룩 등 한 인간의 육체적 행위가 남긴 흔적들을 느끼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림은 인간의 움직임에 대한 고요한 기억이며, 그에 대한 우리 개개인의 반응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즉 우리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에 달렸다. 이 말은 누구도 그림을 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벗어던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조안 미첼의 그림을 접한 경험은 추상표현주의의 낭만적인 성격에 대한 혐오감이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련이 있는 주황색에 대한 오랜 끌림,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 심지어 계속되는 복통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나는 미술에 대해 글을 쓸 때 결코 내가 쓰는 문장에서 나 자신이 사라진 것처럼, 다시 말해서 나의 기억이나 감정, 나의 특수성이 어떤 그림에 대한 나의 반응을 형성하지 않은 것처럼 굴지 않는다. 글로 쓴 작품에서는 항상 누군가가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나’를 제거하는 것은 잘못된 일처럼 느껴진다. 마치 말하는 사람이 객관적인 어조, 편견 없는 어조를 대변할 의도로 아무도 아닌 자의 가면 뒤로 숨는 것 같다.
물론 미술비평가들이 특정 미술가들에 대한 비난이나 숭배를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일도 많다. 하지만 그럴 때는 전문지식, 그들의 더 훌륭한 지식을 앞세워서 그렇게 한다. 미술사학자들은 심지어 미술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혐오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실제로 이는 미술을 다루는 관련 학계에서 너무 많이 무시되어온 주제여서, 데이비드 프리드버그는 아예 책 한 권을 몽땅 할애해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저서 《이미지의 힘》 서문에서 ‘나는 미술사가 모든 계급의 사람들, 모든 문화권의 사람들이 이미지에 반응해온 방식을 보여주는 엄청나게 많은 증거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데 무엇보다 관심이 갔다.’고 밝혔다.
그동안 파노프스키, 아도르노, 곰브리치 같은 위대한 미술이론가들이 많이 등장했다. 앞으로도 더 낫든 못하든 대학 안팎에서 이론 중심의 미술 작가들이 계속 배출될 것이다. 또한 어떤 그림의 내력을 밝히느라 수고하는 학자들, 그림이 진품인지 확인하려고 안료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검사하거나 밑칠을 알아보려고 엑스선으로 촬영하여 검토하는 학자들, 화가의 전기와 역사적 시대상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다. 이런 연구 작업의 가치는 결코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런 작업만으로는 사람들이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물론 예외적인 사람들도 몇 명 있다. 마이어 샤피로, 프레드 리히트, 로버트 휴즈, 데이브 히키 같은 사람들은 모두 이미지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훌륭하게 글로 옮겼다.
내 흥미를 끄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왜 어떤 미술작품은, 심지어 아주 오래된 작품인데도 계속해서 미술이론이나 작품의 유래, 그 문화적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그다지 없는 관람자들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것일까? 미술관에서 나는 사람들이 어떤 그림 앞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그들 모두가 직업적인 미술비평가는 아닐 것이다. 디드로, 반 고흐, 프루스트, 보들레르 같은 다양한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베르메르, 샤르댕, 고야 같은 화가들에 대한 그들의 감정적 반응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떤 그림은 많은 관람자들에게서 유사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어떤 예술작품 앞에서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한 기억이 다른 종류의 기억보다 더 오래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읽은 소설의 줄거리는 잘 기억나지 않아도 그 소설을 읽을 때의 느낌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그림을 바라본 후 남는 것은, 내 마음속에 똑같이 새겨진 그림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것이 내게 불러일으킨 느낌이다. 몸으로 경험하는 감정들은 우리가 거기에 붙이는 이름보다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떤 때는 그 느낌에 분명한 이름을 붙이지 못해 고심하곤 한다. 하지만 이미지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들은 필연적으로 의미로 이끄는 길이다. 어떤 그림이 왜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항상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그 수수께끼를 추적하는 것만이 이에 대한 답을 발견하는 가장 성과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헨리 제임스는 ‘예술에서는 느낌이 의미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미술관의 세계는 전문지식에 대한 숭배와 위대함의 신화를 생산해왔고, 이런 것들이 미술작품을 바라보고 거기에 반응하는 평범한 즐거움을 무지에 대한 경고로 눌러버렸다. 때로 난해하고 대체로 따분한 ‘해설’이 여러 쪽씩 실려 있는 전시 카탈로그, 방문객들을 한 작품에서 다음 작품으로 옮겨가게 하는 유료 오디오 가이드, 전시실마다 각 그림 밑에 붙어 있는 긴 설명들, 이런 모든 것들이 관람객에게 혼자 힘으로 나아가려면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고,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그리고 아마도 최악의 경우가 될 텐데, 이끌어주는 존재 없이는 구경꾼들이 벽에 걸린 미술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고 되뇌인다. 카탈로그와 가이드, 온갖 종류의 정보들은 미술의 세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은 일단 작품을 보고 나서 참고할 때만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천재나 걸작, 가장 위대한 작품, 가장 좋은 작품 등등의 선입견이 대개는 우리 앞에 있는 사물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막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가련하게도 자기 명성에 포위되어 익사하는 작품도 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벽화, 반 고흐의 <해바라기>, 뭉크의 <절규>, 그리고 더 최근에는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같은 작품이 그 이름만으로도 일반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역할을 할 정도의 명성을 얻어서 엽서부터 샤워커튼에 이르는 갖가지 물건으로 재생산되었다. 그런 작품들은 점점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안개를 피우는 통념에 가려서 우리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나는 이 책이 미지의 것을 향한 정신적 방랑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때로 그림 한 점이 데려다놓은 알 수 없는 곳을 두루 거니는 한가로운 산책이었고, 또 때로는 어떤 전시장 전체의 풍경 속을 헤치고 다니는 산책이었다. 나는 보자마자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고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그림들이다. 나는 이미지를 글로 풀어쓸 마음도, 복잡한 그림을 이전에 형성된 이론적 틀 안에 밀어넣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를 매혹하는 것은 보는 것에서 시작해서 오직 바라보기만 하는 여행이다. 이를 위해 특별히 신비로운 직관력은 필요하지 않다. 그저 미술작품을 지각하는 일은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시각적 모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바로 그런 환상적이고 기묘하고 움직임이 없는 세계를 다녀온 나 자신의 여행기다. 그림 앞에 멈춰 서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려고 한동안 기다리는 고독한 경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이 글을 썼다.
1장
어리둥절한 기쁨
조르조네의 <폭풍우>와 나의 인연은 올해로 26년째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본 것이 열아홉 살 때이다. 원화는 아니었고, 미술사 수업 시간에 슬라이드 필름을 벽에 비춰 재생한 이미지였다. 그때까지 나는 조르조네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그림은 내게 육체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정말로 온몸이 다 떨릴 정도로 놀랐다. 그때 그곳에서, 교수가 다음 슬라이드 필름으로 넘기는 버튼을 누르기 전 40초 사이에, 나는 그 그림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왜?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특정 그림 앞에서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보고 싶어 하던 그림 한 점을 직접 보려고 엄청나게 먼 거리를 여행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물감으로 뒤덮인 납작한 사각형 캔버스 앞에 서서 자신에게 ‘소중한 경험’이 될 순간을 맞는다.
내가 <폭풍우> 앞에서 경험한 것과 비슷한 순간을 이해하려면, 어쩌면 시각과 뇌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나 자신의 심리도 더 잘 이해해야 할런지 모르겠다. 그때 교수가 그 그림에 대해 한 말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그림 자체는 기억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 그 이미지는 거의 충격적일 정도로 선명하게 내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강박적으로 그림을 그리곤 했고, 수채화와 유화에도 손을 댔다. 책 여기저기서 발견한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내 관심은 마구잡이였다. 나는 르누아르, 반 고흐, 마티스, 피카소 등 대중의 인기를 얻은 작가의 작품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림을 보는 게 좋았다. 하지만 미네소타의 대학 강의실에서 <폭풍우>의 복제 이미지를 보기 전까지는 내가 진정으로 ‘초월적인’ 순간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미술작품이 신비로움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조르조네의 이미지 앞에서 겪은 경험과 관련이 없는 현상이다. 2년 전 나는 딸과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가려고 1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하지만 그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잠시라도 바라보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작품이 두꺼운 유리로 덮여 있는 데다, 관람객들이 시야를 막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그림의 사진을 찍거나 그림 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들 잘 알고 있는 대로, 레오나르도가 그린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는 이제 더 이상 제대로 볼 수 없는 그림이 되어버렸다. 내가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이유들로 인해 그 그림은 위대함을 보여주는 물건이 아니라 위대함의 기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가르보나 먼로의 이미지처럼 문화적 유행이 되었고, 이제는 최상급의 것을 대변하는 아이콘, 즉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신비롭고 가장 가치 있는 그림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런 문화적 무게는 그림 속 귀부인에게 20세기의 콧수염을 다는 불운을 선사하기도 했다. <폭풍우>도 비슷한 일을 겪을 수 있었다. 이 그림은 수백 년 동안 미술사학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왔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폭풍우>는 그런 운명을 면했다.
(서문,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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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시리 허스트베트 Siri Hustvedt
시인이자 소설가로 문학과 미술 관련 에세이를 집필해온 시리 허스트베트는, 1955년 미국 미네소타 주 노스필드의 노르웨이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에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노르웨이어 교수로 재직하던 세인트 올래프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이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 영문학을 공부했고, 디킨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에 작은 시집 《Reading to You》를 출간했고, 1992년에 첫 소설 《눈가리개The Blindfold》를 발표한 이후 《릴리 달의 황홀The Enchantment of Lily Dahl》《내가 사랑한 것What I Loved》《미국인의 슬픔The Sorrows of an American》《남자 없는 여름The Summer without Man》등의 소설을 출간했다. 그녀의 소설들은 현재 29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1981년 시 낭송회에서 작가 폴 오스터를 만나 이듬해에 결혼하여, 현재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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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신성림
1969년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10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지은 책으로 《클림트, 황금빛 유혹》《여자의 몸》 《춤추는 여자는 위험하다》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반 고흐, 영혼의 편지》《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화가로 보는 서양미술사》《미술은 똑똑하다》《미완의 작품들》 《카요 부인의 재판》《품위 있는 사회》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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