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사랑하며 살고 싶다.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사는 삶터, 우리 함께 사는 세상을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고 싶다. 이 잿빛 도시에서는 그게 잘 안 된다. 아무리 잘 보려 해도 좋아 보이는 게 별로 없고,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예쁜 구석이 별로 없다. 투덜대며 불평할 거리 천지다.
도시가 문제다. 무정하고 무례하고 무리한 도시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더 문제다. 무도한 도시를 방관하고 방조한다. 방관자로 보려 할 뿐이다. 방조자로 봐주려 할 뿐이다. 주체자로 잘살고자 몸부림치지 않는다. 구경꾼에 들러리다.
삶의 어엿한 주체를 삶으로부터 분리하고 관리하는 근대적 장치가 관객·고객이다. 본래 주인이었던 사람을 눈만 살아있는 구경꾼, 돈만 내는 들러리로 낮잡는 장치다. 주는 대로 짐을 싣는 낙타에게는 사막이 보이고, 거칠지만 주인으로 살아가는 늑대에게는 넓은 들판이 있다. 잘 보고 잘 봐주려고 하는 세상을 잘 살려고 몸부림치는 세상으로 바꿔야 제대로 살 수 있다. 보는 세상을 사는 세상으로 바꿔야 들러리 아닌 주인으로 살 수 있다.
이번에는 도시 안으로 파고들었다. 냉소적이고 수동적인 시선으로 배돌았던 아웃복싱을 접고 인파이팅으로 작심하고 대들었다.
시속 5킬로미터로 동네 구석구석을 걸었다. 시속 10킬로미터로 강변을 내달렸다. 시속 19킬로미터 한도의 자전거로 도시 곳곳을 훑었다. 때로는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을 따라 했고, 때로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폼 잡았다. 밀란 쿤데라의 <느림>을 방패 삼아 에둘러가고 느리게 가는 모든 것을 옹호하면서 도시에서 개개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 <그 꽃>)
‘사는 도시’는 ‘보는 도시’에서 접하지 못한 많은 것으로 잘살게 해주었다. 좋은 것만 가져다주었다는 말이 아니다. ‘사는 도시’에서는 내가 도시의 주인이고 도시 삶의 주연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내 요량대로 내가 간수할 수 있어 전혀 다른 도시를 사는 것 같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누리고 안 좋은 것은 좋게 고치려 간수하니, 세상 살면서 만나는 모든 것이 삶의 ‘의미’요, ‘재미’요, ‘선미善美’다. 걷고 타고 뛰었더니, 도시를 ‘3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살아났다.
결국은 아름다움이다. 도시를 열심히 탐람하며 찾고자 한 것, 삶으로 열심히 살고자 한 것, 모두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아름다운 세상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상상하는 것, 아름답지 못한 세상을 만날 때 저항하고 치유하는 것, 모두 아름다움을 통해 가능하다. 키츠가 ‘아름다움이 진리!’라고 선언했고, 니체가 ‘살기 위해 예술과 함께 산다’고 했다. 참된 아름다움은 세상을 제대로 살게 한다.
그래서 이 넓은 도시를 건너는 징검다리로 공공예술을 선택했다. ‘생산의 도시’를 ‘생활의 도시’로, ‘체계 중심의 도시’를 ‘사람 중심의 도시’로 바꾸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요즘 도시들이 경쟁적으로 공공미술과 공공디자인을 끌어들여 ‘살만함Livability’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
삶이 머무는 풍경Life-Scape과 거처Place-Making, 더불어 사는 공동체Community-Building, ‘지금 여기’를 향유하는 참여Participatory Design 등을 새롭게 창의하는 공공예술의 궤적을 따라가니 개체와 기능의 근대를 넘어 더불어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새로운 시대를 만날 수 있었다. 비로소 도시에 아름다움이 살기 시작했다.
2
이 책은 공공예술, 도시담론, 마을지도 세 가지로 엮였다. 아름다움의 표상인 작품을 찾아 도시를 유람한다. 공짜로 누리는 안복眼福에 운동까지 덤으로 해결하니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왜 작품만 아름답고 도시는 그렇지 못할까? 정작 아름다워야 할 게 삶인데. 그래서 도시를 작품으로 사는 조건을 상상하고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도시담론을 엮는다. 담론은 현장을 부를 수밖에 없다. 해서 아름다움의 로컬Local, 콘크리트Concrete 버전으로 동네 예술지도를 짠다. 이렇게 하다 보니 도시 작품 유람하기, 인간적인 도시담론 짜기, 마을 예술지도 그리기 세 가지가 하나로 버무려졌다.
먼저 작품 유람은 ‘걷는 만큼 보인다!’를 모토로 길 위의 작품 50개를 탐람한다. 이 유람길은 몸으로 밀고 나가는 완보緩步의 길이자, 도피 안으로 가는 완상玩賞의 길이다. 길에서 길道을 묻는 강력한 현장성과 상징성 덕분에 이 길은 걷는 길이자 아름다움을 만나는 길, 세상 사는 길을 겸했다. 이 길의 여정은 7개다.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다’, 더불어 사는 도시 서사를 모색하는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물화된 시대를 반조하는 ‘소유냐, 존재냐’, 호돌로지Hodologie의 미학을 찾는 ‘길에서 길을 묻다’, 더불어 아름답고자 하는 ‘관계한다. 고로 존재한다’, 사랑을 삶의 뼈대로 제안하는 ‘일상과 이상, 그 사이’, 관자觀者의 풍경을 행자行者의 풍경으로 바꾸는 ‘풍경이 되는 도시’ 등을 거쳐 갈 것이다.
길에 놓이는 작품은 성격에 따라 공간적으로 영구 설치되거나 시간상으로 잠시 전시되다 사라진다. 작품 유람 중에는 사라진 작품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있는 작품은 도시의 풍경City-Scape·People-Scape으로 즐기고, 없어진 것은 기억의 풍경Memoir-Scape·Story-Scape으로 간직하고자 있고 없음보다 좋고 나쁨을 기준으로 작품을 골랐다.
두 번째 도시담론은 ‘아는 만큼 보인다!’를 기치로 몸과 예술로 밀고 나간 길을 머리와 사유로 뒤따르고 성찰한다. 몸으로 비비고 나아갈 때 너무 가까이 붙어 있거나 현장의 높은 열기에 치여 제대로 조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도시담론은 몸의 걷기를 머리의 걷기, 신체적 사실성Corporeality을 사유의 사실성Reality으로 보완하는 작업이다.
사람과 도시의 상생적/상극적 관계를 살피는 ‘시골쥐와 도시쥐’, 제대로 살기 위해서 도시의 구조와 기능, 내용을 작품의 그것처럼 바꾸자고 하는 ‘제품, 작품을 밀어내고 도시를 점령하다’, 더불어 숲이 되자 하는 ‘관계한다, 고로 존재한다’, 미학의 일상화를 꿈꾸는 ‘미의 일상화, 일상의 미화’ 등의 가설을 펼칠 것이다. 작품 보는 것 따로, 도시를 사는 것 따로 될 것을 우려해 작품 탐험 7개의 주제에 맞춰 도시담론을 나눠 배치했다.
‘걷는 만큼 보인다’의 부록이자 실험판으로 동네예술지도를 덧붙였다. 제아무리 아름답고 제아무리 논리적이더라도 그것이 내가 사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면, 허깨비일 뿐이다. 미의 부재다. 그래서 생활의 현장단위인 동네에서 예술길을 긋는 실험을 시도한다. 정동길, 광화문거리, 서촌길, 인사동길, 삼청동길, 청계천길, 을지로, 대학로, 잠실 올림픽로와 강남 테헤란로 등 9개의 동네길을 대상으로 삶과 예술의 동행을 실험한다. 명소 중심으로 짰다거나 작품으로만 길을 냈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이 실험은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들을 주민이 주인이 되어 찾고 이어 동네마다 아름다움의 지도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주된 의도임을 이해하고 동네지도의 허점을 혜량해주시기 바란다.
3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고 책을 내는데 도움을 주신 분께 잠깐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에둘러가고 비뚤게 가는 나의 인생길을 너그러이 지켜봐 준 부산과 분당 가족들, 친구 동료와 선후배, 지인 모든 분께 머리를 숙인다. 죄송해서, 감사해서. 광화문과 삼청동 선후배들, 미술판 인연들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나의 길이 얼마나 더 꼬였을까. 감사드린다.
이 책과 관련해서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한겨레신문에 특별히 감사를 표한다. 오 전 시장은 ‘무모하고 무용한’ 예술가들의 몽상을 포용하고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도시갤러리’를 함께 만들어 도시에 예술이 살 수 있는 토양을 가꾸었다. 한겨레신문은 2007년 10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박삼철의 도시디자인 탐험>이란 코너를 연재해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작품을 친근하게 만날 기틀을 만들었다. 도시 작품 탐험에 나온 작품은 대부분 그때의 연재를 재구성했다는 점도 함께 밝힌다.
친구 잘못 만난 죄로 혹독한 디자인 사역을 치른 디자이너 김선태, 새 친구로 책과 세상의 동반이 되어준 김삼권 나름북스 기획팀장. 두 분 아니었으면, 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우의와 후의로 참 행복했다. 마지막으로 예쁜 마누라 이진이 감사하고, 사랑하는 딸 박지윤 미쁘게 잘 자라주어 매우 고맙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분들께 이 잡설 졸필이 누가 될 것이나, 염치없게도 질책과 가르침을 기다리는 것으로 대속하고자 한다. 모두 아름다우시라.
1
사람이 제일 아름답다
돌로 쌓아 올린 희망
서울광장, 김석 <서울, 황금알을 품다>
변변찮지만 정말 괜찮은 작품이다. ‘작품’ 하면 진기한 재료와 대단한 작가, 웅대한 크기를 성공의 요건으로 따진다. 이 작품은 그 반대다. ‘변변찮은’ 돌멩이가 재료이고, 실력이 ‘어쭙잖은’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소시민들의 ‘하찮은’ 삶 얘기가 주제다.
그런데도, 아니 그래서 성공했다. 예술 저 홀로 취하는 작은 성공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삶을 동반하는 큰 아름다움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함께 만들고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의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 <서울, 황금알을 품다>는 세계금융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던 2009년 초봄 서울광장에서 만들어졌다. 시민의 소망을 새긴 돌멩이를 함께 쌓아 난관을 극복하는 실존적인 표상을 만들자는 취지로 태어났다.
왜 돌멩이였을까? 돌은 짱돌로서의 무기와 소망 돌로서의 의기儀器를 한 몸에 품는다. 쌓으면 사람들의 간절한 희구를 하늘에 전하는 의기이고, 던지면 불의와 부정을 타파하는 투석의 무기다. 서낭당이나 돌탑의 쌓음은 아련하고 먼 기억이다. 사사로운 기억이다. 반면, 갈등과 투쟁의 던짐은 근년의 일이었다. 공적인 역사다. 그래서 돌은 공공영역에서 경계되고 징계된다. 웬만한 곡절이 아니고서는 서울의 배꼽인 서울광장에 돌무더기를 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연이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매서운 경제 한파가 우리나라에도 몰아치자 작가는 돌덩어리를 모으자고 제안했다. IMF 구제금융 당시 외환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금덩어리를 모으고 똘똘 뭉쳤던 1997년의 일을 기억하고서다. 그에게는 세상을 구하는 것이 금보다 돌이었다. 금은 고예독왕孤詣獨往하는 욕망이고, 돌은 동고동락하는 희망이다. 금은 홀로 소유하고 돌은 함께 쌓을 때 제 물성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예부터 돌은 하늘에 소망을 전하는 통로였다.
더불어 사는 숲
우리는 삶의 어려움을 돈이나 물건이 부족한 탓으로 돌린다. 돈과 물건이 부족하면 어렵게 살지만, 희망이 없으면 사는 게 아니다. 희망으로 사는 게 삶이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정말 아름답다. 소망 돌을 쌓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희망의 초상肖像, 희망으로 사는 초인상超人像이다.
“한 그루 나무가 되지 말고 더불어 사는 숲이 되자.”(신영복) 독야청청하는 한 그루의 나무가 근대의 희망이었다면, 더불어 사는 숲이 앞으로의 희망이다. SNS, 소셜 커머스, 소셜 디자인 등의 열풍을 보라. 더불어 꿈꾸고 같이 잘사는 참여와 연대에 진짜 희망을 걸어야 한다. 삶의 문제에 관한 한 ‘저마다의 발밑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참여와 ‘그러한 나무들이 더불어 우람한 역사의 숲을 만드는’ 연대가 참희망이다. 해서 ‘얼마나 이루었느냐?’에 이어 ‘얼마나 통하였느냐?’, ‘얼마나 나누었느냐?’가 희망을 재는 새 잣대가 된다.
미학의 흐름도 그렇다. 지금껏 좋은 작품은 “손대지 마시오!”의 지시를 달고 다녔다. 성배처럼 범접하지 말고 그저 신앙하라는 지시였는데, 그 일방적 계몽주의는 수동적인 타자를 만들었다. 그걸 치유하기 위해 참여와 체험Hands-on은 핵심적인 미학의 단위가 되었다. 참여는 함께 꿈꾸고 나누는 아름다운 동반자를 만든다. 정말 아름다워야 할 것은 작품이 아니라 세상이다. 참여는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디자인의 첫 단추다.
작품에는 1천800여 명의 시민작가가 참여해 소망의 돌을 그리고 쌓아올렸다. 어린이, 학생,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 등 참여 주체는 초동급부, 갑남을녀, 장삼이사로 나이와 성별, 직업을 초월하는 공동창작자 그룹을 만들었고, ‘로또 대박’, ‘내신 1등급’, ‘가화만사성’, ‘??? 사랑해!’ 등 참여 주제 역시 세상만큼 넓고 다채로웠다.
참여가 있기 전에는 앙상한 골조와 속이 숭숭 뚫린 철망으로 된 사람이 버겁게 세상의 짐을 들고 있는 형상이었다. 참여가 하나하나 늘어나자 작품의 볼륨은 날마다 부풀어 올랐다. 달이 차오르듯. 참여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자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의지를 일으켜 세우는 과정이었다. 마침내는 고난의 짐을 황금알로 바꾸어 들고 삶을 축하하는 사람을 만난다.
참 아름다운 작품이다. 삶과 예술이 동행하고 시민과 예술가가 동시대의 동반으로 연대해 세상 고난의 파도를 아름답고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세상을 꿈꾸었다. 시민은 그런 세상을 구성하는 참여자, 창작자이고 작가는 그런 시민들을 아름다움으로 인도하는 멘토다.
“산사나 산에 가면 소망을 쌓은 돌탑을 어렵지 않게 만납니다. 접착제나 시멘트도 없는데, 그 소망들은 서로서로 단단히 붙들고 하늘을 향해 까치발을 하고 일어섭니다. 비바람이 와도, 시간이 수없이 흘러도 거뜬합니다. 혹 돌무더기가 쓰러지더라도 그만입니다. 누군가가 또다시 소망의 돌을 쌓아올립니다. 더불어 소망하는 돌무더기는 오래 삽니다.” _ 김석, <서울, 황금알을 품다>를 만들며
(머리말,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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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박삼철
스포츠조선 문화부에서 6년간 미술 분야 기자로 일했다. 이후 이주헌, 이섭, 김진하 등 큐레이터들과 함께 차린 미술기획사 ‘아트컨설팅서울’에서 미술관 바깥의 미술인 공공미술을 맡아 작업했다. 미술인회의 공공미술위원장, 서울시 도시갤러리 추진단장 등을 역임했고, 희망제작소 간판문화연구소, 행정중심복합도시 기획조정단 등에 객원위원으로 참여했다. 광주비엔날레2000 영상부문 <상처>, 제1회 서울국제도예비엔날레, 광복60주년기념 <시련과 전진>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에로스 바로보기』(이섭 공저, 심지출판사, 1997), 『미술, 공간, 도시』(역서, 학고재, 2000), 『미술전시기획자들의 12가지 이야기』(김홍희 등 공저, 한길아트, 2005), 『왜 공공미술인가_미술, 살만한 세상을 꿈꾸다』(학고재, 2006)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는 서울디자인재단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서비스디자인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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