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서문
이 작은 책에서 제안하는 정원의 이야기는 보다시피 길지 않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전 세계에서 정원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라면 두꺼운 책 여러 권에 수많은 이미지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독자는 하나의 글로 이루어진 제안을 바탕으로 몇몇 공간을 상상하는 데 만족해야 할 테다. 그런데 대체로 보이는 것을 다룬 어떤 주제를 논할 때 최소한의 삽화를 제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이런 질문에 답한다. 공간에서의 표현을 넘어서― 몸으로 여러 장소를 누비고 그 넓은 땅을 스쳐가며 다른 모든 감각을 통해 그 풍요로움을 지각하기를 권유하며― 정원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 이야기는 말들로 옮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정원들의 ‘역사’를 말하기위해서도 이 책에 포함된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페이지가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관건이 되며, 나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독자를 대상으로 할 때, 따로 설명해둬야 할 점도 있다. 이 책에서 아시아, 적어도 그 북부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풍요로운 문화를 통해 화려한 건축과 훌륭한 정원을 낳은 지역에서 왜 이런 누전漏電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다. 나는 정원사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것―땅에 대한 실험―만을 이해하려는 이런 고집 때문에 나는 이 실험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이고, 여행은 이 실험의 일부를 이룬다. 하지만 중국과 한국에서의 체류는 너무도 짧았고,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곳저곳 움직이다 보니 중단되기 일쑤였다. 그런 탓에 나는 궁궐과 사원, 그리고 이곳을 둘러싼 정원의 건축, 때로는 자연의 손길로 빚어지거나, 왕릉을 이루는 저 웅장한 봉분들처럼 기묘한 인공의 손길로 만들어진 놀라운 풍경을 지배하던 저 엄청난 깊이의 사유와 세련미를 그저 멀리서만 감지했을 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절대적인 평온을 추구하며 몸과 마음 모두를 위해 마련된 이 장소에서 하루쯤 시간을 내서 명상에 나 자신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1998년 가을의 그 날 저녁, 경복궁 정원의 장엄하고도 간결한 건축은 마치 모든 것이 안개로 이루어진 듯 창백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기묘한 분위기는 단풍이 빛깔을 담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정원과, 이제 그 누구도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도 ‘삶의 기술’이라고 일컬을 만한 그 무엇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뒤얽힘에서 비롯되는 듯했다. 나는 유럽에서는 낯설기만 할 어떤 물건들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대신, 마루 아래 설치된 저 놀라운 난방 장치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말하지 않고서도 편안함을 창시하는 우아한 방식이었다. 거기서 내게, 동물들이 그 어떤 행복감으로 그렇게 하듯 바닥에 웅크리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그곳에 다시 돌아가야 하리라.
2012년 3월
질 클레망
1장
아프리카, 유목에서 정착까지
방랑을 그만두기로 하다
젱[Dzeng, 카메룬 중부 지역의 마을] 숲의 늪 지대는 가시 달린 종려나무들로 뒤덮여 있다. 이 종려나무들은 키 큰 나무들의 보호 아래 서로 뒤엉키며 자라난다. 젱의 주민들은 통나무배를 타고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그때마다 배가 지나간 자국이 미동조차 없던 물 위에 천천히 그려졌다가 사라진다. 어린아이, 노인, 어부, 혹은 마약을 운반하는 자들은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아주 여유 있게 자기가 맡은 일에 몰두한다. 먹처럼 새까만 혈맥이 무늬처럼 갈라지며 온통 푸른색인 몸체를 관통하는 대형 나비 살모식스가 어슴푸레함 속에서 반짝 어른거리며 얼핏 우리 눈에 들어온다. 그러곤 튼튼해 보이는 날개로 힘차게 날아간다.
드넓은 숲이 아직 여기저기 남아 있는 이 아프리카 고장에서는 살모식스를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이 나비는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 서편, 그러니까 드야 강변을 지나 콩고 국경으로 이어지는 일대에 산다.
우리는 북쪽의 건조한 대초원을 뒤로한 채 나무가 우거진 카메룬의 습지대를 통과했다. 숲 가장자리의 외진 장소에 광선 덫을 설치하고 야행성 종들을 유인해 그 행태를 연구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 간단한 매뉴얼만 있으면 날이 어두워질 때부터 해가 뜰 때까지 30분 간격으로 어떤 종이 나타나는지 관찰할 수 있다.
우리는 기온을 거의 2분의 1도까지 꼼꼼하게 기록하고 달의 상태와 풍속風速도 적었다. 우리에겐 밤에 빛이 없고 그다음 날 비가 내리는 상태가 유리했다. 그런 조건에서 부화와 다산多産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곤충들은 환히 밝혀진 수은등에 유혹당해 두 개의 말뚝 사이에 씌워놓은 사냥용 천에 내려앉는다. 부속장치가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은 수은등의 전구는 세로가 가로보다 길고 깨지기 쉽기 때문에 야영지를 옮길 때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텐트가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바람에 잠잘 곳이 없어져버린 이후로 우리는 오두막집에서 기거했다. 이동 중에 제공받은 원주민들 소유의 이 초가집은 연기에 그을려 검게 변색됐고 바닥에는 짚을 넣은 우툴두툴한 매트가 깔려 있었다.
앙투안 르두알라는 협상과 통역을 맡은, 우리의 해결사다. 4리터 휘발유로 100킬로미터를 가는 우리의 자동차는 발전장치와 비축용 휘발유, 식량을 잔뜩 싣고 있어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주변의 대형 자동차들은 진창에 빠져 꼼짝도 못하고 있는 데 반해, 우리 자동차는 불편한 비포장도로를 가볍게 통과했다. 마치 홍토와 범람지대 위를 떠다니기라도 하듯 말이다. 차에 탄 우리 세 사람은 다른 차들을 보며 놀랐다. 1974년만 해도 사륜구동 자동차는 거래 자체가 잘 되지 않았다. 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랜드로버’ 자동차들을 바큇자국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윈치를 밧줄로 나무에 매어 고정시켜 놓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자동차들을 추월하면 이 자동차들이 다시 우리를 따라잡고… …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오지奧地 경주를 벌였다. 그러고는 경기 결과를 결산해 보기 위해 자동차를 멈춰 세우곤 했다. 이번에도 또 한계를 넘어섰다. 드야 강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탐험가라는 핑계를 댔다. 아프리카 낮나방들 중에서 가장 큰 파필리오 안티마쿠스 암컷에게 접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파필리오 안티마쿠스의 암컷 표본 하나는 파리 박물관의 귀중한 소장품 중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런던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에 수컷은 자진해서 길 옆에 모습을 드러낸다. 글라이더나 장난감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는 수컷은 열대의 대기 속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암컷은 나무 꼭대기에 몸을 감춘 채 결코 내려오지 않는다. 오직 피그미족들만 이 나비의 유충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고 암컷도 찾아낼 수 있다.
우리의 목표는 피그미족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피그미족은 여전히 광활한 숲이 펼쳐져 있는 아프리카 연안에 살고 있다. 가봉의 넓은 지역과 카메룬 남부를 포괄하는 이곳에는 체구가 작은 숲코끼리와 물사슴, 고릴라, 초록원숭이, 심지어 에볼라 바이러스도 서식한다. 이 바이러스는 가봉의 나무숲 최상층에서만 제한적으로 활동하는 절지동물문(곤충을 포함해서)에 기생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에는 초록원숭이가 옮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여행을 하던 당시만 해도 이 바이러스가 지금처럼 엄청난 피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우리는 줄라보 제2구역에서 원숭이의 최상급 부위인 엉덩이를 대접받았다. 우리는 손님들을 위해 준비된 이 요리를 거부감 없이 먹어치웠다. 훌륭한 요리였다. 이 고기를 나눠 먹는 것은 하나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죽음의 의식이 돼버렸다. 1998년 라도데심 탐사단Mission Radeau des Cimes이 머물던 마칸데 야영지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가봉의 숲 한가운데서 마을 주민 전체가 에볼라 바이러스라는 오직 하나의 원인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졌다.
국경을 따라 흐르는 드야 강에 도달하기 전의 마지막 야영지인 줄라보 제2구역에는 아프리카 오지의 숲 속 공터라면 으레 그렇듯 식민지 건축물 건축 기준에 따라 처마와 함석지붕을 얹어 얼기설기 지은 무료보건소가 있고 그 주변으로 간이주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정부뿐만 아니라 과세課稅의 신께서도 역시 임무를 주어 파견한 것이 틀림없는 네덜란드 수녀들은 인구조사를 하고 세금을 매기는 등 이곳에 피그미족들을 정주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역사적 기록들에 따르면 피그미족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족과 사헬 지대의 뵐족, 호주의 애버리지니족, 북극의 이누이트족 그리고 다른 몇몇 부족과 함께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유목민 사회라고 한다.
유목민들은 정원을 만들지 않는다.
사냥을 하고 고기를 잡고 채취를 하는 피그미족은 야영지를 정하면서 숲 속에 빈터를 만든다. 갖고 있는 연장이 조악한 탓에 그들은 잘린 면이 들쑥날쑥한 채로 밑동만 남기고 나무를 대충 잘라낸다. 낮고 둥근 오두막집을 지을 때는, 쓰러뜨린 나무에 붙어 있는 나뭇가지들에서 적당히 가늘고 낭창낭창하며 긴 것들만 골라서 사용한다. 임시로 살 집을 만드는 것이다. 피그미족들은 허리를 숙이고 터널 모양의 유일한 출입구를 통해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간다.
야영지는 걸어서 왕복 하루 걸리는 거리의 반경 내에 정해지고 이 유목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더 이상 제공할 수 없게 되면 버려진다. 그 뒤에는 숲이 다시 자신의 권리를 찾는다. 유기물遺棄物로 이루어진 야영지는 부식토로 되돌아가고, ‘제2의’ 식물이 숲 속 빈터를 차지하고 그곳을 무성하게 뒤덮으면 원래 있던 큰 나무들이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이다.
최초의 숲들이 유목민의 영향을 받아 2차화되는 것은 현대에 이루어진 대규모 개발의 여파일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된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세기 이전에는 2차화의 영향으로 아프리카의 대규모 삼림들이 최초의 체계(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를 위협받는 일은 결코 없었다.
줄라보 제2구역 근처에 있는 피그미족의 야영지로 접근하던 우리는 숲 속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난 줄 알았다. 나무들이 꼭 싸움터에서 치명상을 입고 죽음의 고통을 참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땅바닥에는 마른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으며, 뜨거운 태양에 달구어진 빈터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눈부신 햇빛이 그 불안정한 땅에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어떤 힘이 작용했던 것일까? 전쟁이 일어났던 것일까? 숲을 그렇게 만들어놓을 정도의 격렬한 감정이 왜 들었던 것일까? 피그미족들은 늘 이런 식으로 격렬하고 난폭하게 행동했던 것일까?
드야 강가의 피그미족 야영지는 진짜 야영지가 아니었다. 사라질 운명에 처한 야영지가 아니라 사실은 일종의 전진기지로서 처음으로 정착을 시도한 마을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 침투한 정착수단들을 알고 있다. 알코올과 마약, 슈퍼마켓 말이다. 원주민 거주지역이라는 자의적인 이름이 붙여지기에는 자못 광대한 영토 안에 이 모든 것이 있다. 그리고 이 거주지역에서 원주민 부족은 정착수단의 원조를 받아 정체성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숲으로 뒤덮인 카메룬과 가봉 국경에 있는 줄라보 제2구역 너머, 그러니까 드야 강가에 사는 정착 피그미족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1974년 7월(이곳의 짧은 우기는 부화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오두막집과 같은 자재로 지었지만 형태는 전통적인 열대지방 가옥인 어느 주택 앞의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우리는 이 난쟁이 인간들에게 파필리오 안티마쿠스의 암컷을 보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얘기했다. 빗방울이 이중으로 경사가 진 지붕을 흘러내리더니 차곡차곡 쌓아놓은 판다누스 잎사귀 위로 떨어졌다. 그들은 주저주저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우리를 쳐다보다가 자기들이 주의를 기울여 듣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의 통역 겸 안내인 겸 조수인 앙투안은 그들의 언어를 알지 못했다. 피그미족이 아닌 그 지역 사람 하나가 우리를 도우러 왔다. 우리는 나비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걸 보자마자 그들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우리 존재를 잊어버린 듯했다. 한 사람은 줄을 팽팽하게 당겨서 만든 악기를, 또 한 사람은 작은 실로폰을 가지러 갔다. 우리가 나비 얘기를 했으니 음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약간의 음악이. 당신들은 그 대가로 우리에게 뭘 줄 거요? 당신들은 세계를 약탈하러 왔으면서 왜 거의 항상 빈손으로 나타난단 말이오?
드야의 피그미족들은 우리에게 파필리오 안티마쿠스 암컷을 보여주지 않을 태세였다. 우리가 때를 잘못 맞춰 왔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과감해 보이는 피그미족이 내 손을 잡았다. 그는 우리를 오두막집 너머로 데려가더니 울타리가 쳐진 땅 앞에 멈춰섰다. 네모진 화단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고 감탄해야 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들이 온몸으로 그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잔뜩 긴장하고 있는 그들의 몸에서는 극도의 불안감이 풍겼다). 그것은 현대적이며 위태로운 체험이자 광적이며 기묘한 체험, 우리를 땅으로 불러들이는 체험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를 정원으로 불러들이는 체험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정원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가장 초기적인 형태의 정원이었다. 동시에 가장 인상적인 정원이기도 했다.
땅콩 세 그루와 카사바 다섯 그루, 바나나나무, 토란들, 그리고 너무 어려서 무슨 나무인지 구분이 안 되는 나무 한 그루 등에서 나오는 약간의 소출을 보호하기 위해 대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땅이 아프리카의 숲 한가운데 외딴 곳의 폐허로 변한 빈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 미래가, 사유의 조직체가, 최초의 정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중에 여행을 하면서 나는 정착한 모든 유목민족들이 정원을 만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정원이 지구상 어느 곳인가의 유목민족들 중 하나가 정착하면서 생겼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역사상 최초의 정원은 역사책에 나오는 최초의 정원이 아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유목 활동을 그만두고 그들의 영토 어느 한 지점에 정착한 민족들의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정원, 바로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정원이다.
아주 잘 꾸며놓은 사막의 오아시스는 유목민의 노정 위에 위치하는 숙영지로서 여행자들을 위한 지표 겸 정원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오아시스의 정원사들은 결코 길을 떠나지 않고 정원에서 산다. 정주사회가 거기 멈춰선 유목사회와 관계를 맺고 유지해 나가던 오아시스의 원형으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알제리의 가르다이아와 리비아의 가다메스다.
나는 드야에서 겪은 경험으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최초의 정원은 방랑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던 인간의 것이었다. 어떤 인간이나 어떤 사회의 삶에, 이 단계를 위한 시대는 없다.
최초의 정원은 식량 생산을 위해 만들어졌다. 채소밭이 최초의 정원이다. 채소밭 정원은 시간을 초월한다. 채소밭으로부터 정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원의 역사를 관통하는 모든 시대마다 깊은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최초의 정원은 울타리 쳐진 땅1이다. 울타리를 두른 땅은 채소와 과일, 그리고 꽃과 동물, 생계수단 등 정원의 소중한 재산들을 보호하는 데 적합했다. 어느 시대든 그런 것들을 잘 지켜내야 가장 좋은 정원이었다.
문화적 규범에 따라 최고의 정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고 또한 정원의 유형이 결정되었다. 가장 좋은 것, 매우 소중한 것의 개념이 시대마다 변화되어 왔다. 가장 좋은 정원의 가치를 고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원설계술은 정원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 변화할 때마다 그에 발맞춰야 했다. 그러나 정원의 원칙은 언제나 같았다. 즉 낙원2에 최대한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다.
1 정원이라는 단어는 울타리 쳐진 땅(라틴어 Hortus conclusus)을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 Garten에서 파생되었다.
2 낙원(paradis)은 라틴어 paradisus와 그리스어 paradeisos에서 파생되었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페르시아어 pairidaeza(울타리를 두른 땅)와 pairi(‘주변’을 뜻하며 그리스어 peri를 탄생시킴), daeza(성채)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낙원 혹은 정원은 무엇보다도 성채이자 보호구역이다.
(서문,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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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질 클레망 Gilles Clément
1943년 프랑스 앵드르 출생. 원예가이자 조경 디자이너이며 식물학자 및 곤충학자이다. 소설 몇 편을 발표한 작가이기도 하다. 베르사유 국립조경학교에서 수학했고 오랫동안 교수로 가르쳤다. 2011년 말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교수다. 유년시절 정원에서 아버지를 돕다 농약에 중독되어 이틀간 혼수상태에 빠진 경험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정원의 대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85년 공모전을 통해 설계에 참여한 앙드레 시트로엥 공원은 예술적이며 생태적인 정원 디자인으로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프랑스와 유럽은 물론 칠레, 뉴칼레도니아, 발리 등 세계 각지에 공공정원을 조성하며 독창적인 생태주의 정원 철학인 ‘움직이는 정원’, ‘제3의 풍경’, ‘지구 정원’을 실현해 보이고 있다. 『움직이는 정원』(1991), 『토마와 여행자』(1997), 『행성의 정원』(2007), 『아홉 개의 정원: 지구 정원에 대한 접근』(2008), 『계곡에서: 생물학적 다양성과 예술, 그리고 풍경』(2009) 등 많은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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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재형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상명대, 강원대, 한국외국어대에서 강사로 일했다. 현재는 프랑스에 머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레이스 뜨는 여자』, 『황새』, 『레제르 만화 컬렉션 2』, 『카트린 드 메디치』, 『프로이트 평전』, 『사막의 정원사 무싸』, 『이중설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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