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신 없는 사회에 대하여
요즘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종교적인 것 같다.
광적인 형태의 이슬람교가 중동 전역에서 점점 인기를 얻으면서 정치적으로도 더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레바논이나 이란처럼 40년 전에 어느 정도 세속화되었던 이슬람 국가들도 지금은 근본주의로 가득하다. 터키와 이집트에서는 종교적인 헌신을 새로이 다짐하며 자신의 뜻을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다시 베일을 쓰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종교가 번성하는 것은 이슬람 국가만의 현상이 아니다. 브라질에서 엘살바도르에 이르기까지, 개신교 복음주의가 성공적으로 전파되면서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활기차고 거룩한 종교적 열정을 심고 있다. 오순절교회도 활발히 세력을 넓히는 중이다. 라틴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는 물론, 심지어 중국까지 진출할 정도다. 필리핀에서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경제적 번영을 중시하는 교리를 지닌 엘샤다이 같은 새로운 종교운동에 투신하고 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무신론을 강요받았던 구소련의 많은 나라들은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신앙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강하고 생생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종교적인 활기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캐나다조차도 영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에서 르네상스를 겪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저명한 종교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의 말을 빌리자면, “세계 대부분의 지역이 종교적 열정으로 들끓고 있다.”
미국에서 종교는 틀림없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사실 미국에서 종교는 하느님·예수·성경에 대한 믿음, 교회 출석률 등을 기준으로 할 때 대부분의 선진 민주국가들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하고 활기차다.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 남부 일대를 차로 돌아다녀만 봐도, 예수나 하느님, 성경을 찬양하는 범퍼 스티커를 붙인 차가 세 대에 한 대꼴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의 종교적 열정은 범퍼 스티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최근 애리조나 주 투손에 갔다가 시내 전역에 주님에 대한 예배와 기도를 권하는 광고판들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오늘날 미국에서 종교는 이처럼 수많은 범퍼 스티커와 광고판을 낳고 있을 뿐만 아니라,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으로 종교 프로그램들이 꾸준히 방송되고 있다. 정치가들 또한 공화당이나 민주당을 막론하고 공개적으로 종교적인 발언을 할 때가 그 어느 때보다 많으며, 자신의 신앙을 강조하는 데 특히 노력을 기울인다. 미국 국민도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사실 2004년에, 조지 W. 부시가 기도로 하느님께 조언을 구한 끝에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했다고 말했을 때, 아무도 그 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발언은 오히려 국민들 사이에서 부시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효과를 거뒀다.
요약하자면, 네브래스카 주에서 네팔에 이르기까지, 조지아 주에서 과테말라에 이르기까지, 유타 주에서 우간다에 이르기까지 세계 전역의 인간들은 현재 다양한 신들을 열심히 찬양하고 있으며, 교회나 절이나 사원의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경전을 꾸준히 공부하고, 신성한 의식을 착실히 수행하고 영적인 의식을 활기차게 실천하며, 죄악으로부터 세상을 지키려고 진지하게 애쓰고 경건한 마음으로 단식하고, 열정적으로 점점 더 많은 기도를 하고 노래와 찬양을 하고 이런저런 구세주나 예언자나 신을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곳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세상에는 눈에 띄게 비종교적인 곳이 몇 군데 존재한다. 비록 드문드문 흩어져 있기는 해도, 오늘날 세상에는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열정과 교회 출석률이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곳들이 분명히 있다. 세상의 대세와는 동떨어져 있지만 의미심장한 현상이다. 이처럼 이례적이고 예외적인 곳들은 그 어느 때보다 종교적인 다른 곳들과 반대로 그 어느 때보다 덜 종교적이다. 아니, 애당초 종교적인 열정이 그다지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지금 특별히 두 나라를 염두에 두고 있다.
덴마크와 스웨덴, 이 두 나라는 십중팔구 세계에서 가장 덜 종교적인 국가일 것이다. 어쩌면 역사를 통틀어서도 같은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전 세계에서 신앙이 생생하게 활기를 띠고 신성함이 파도처럼 거대하게 부풀어가는 와중에, 덴마크와 스웨덴은 작지만, 행복하고 튼튼한 세속주의의 배처럼 떠 있다.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예수나 비슈누에게 예배를 드리지도 않고, 경전을 애지중지하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위대한 종교들의 기본적인 교리를 그다지 믿지도 않는다.
환경을 중시하는, 깨끗한 스칸디나비아 지역에는 하느님을 말하는 사람도 신학적인 문제에 많은 시간을 쏟는 사람도 거의 없다. 최근 들어 그곳의 대중매체들도 종교에 대해 이례적으로 보도를 많이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조차 세상 여기저기에서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는 이상하고 낯선 현상, 즉 종교적 열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이 종교적 열정은 모든 사람에게 불길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지만,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에게만은 예외다. 만약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위한 지상 천국이 존재한다면, 현재의 덴마크와 스웨덴이 바로 그곳일 가능성이 높다. 이 두 나라에는 색다른 모습의 마을들, 사람의 마음을 끄는 도시들, 아름다운 숲, 인적 드문 해변, 건강한 민주주의 체제,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하는 범죄율과 부정부패, 뛰어난 교육제도, 혁신적인 건축, 강한 경제, 탄탄한 지원을 받는 예술, 성공적으로 발현되는 기업가 정신, 깨끗한 병원, 맛있는 맥주, 무상 의료, 개성이 강한 영화들, 평등한 사회정책, 멋진 디자인, 편안한 자전거 도로 등이 있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별로 없다.
나는 2005년 5월부터 2006년 7월까지 14개월 동안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살았다. 아내와 두 딸도 함께였는데, 그곳에 있는 동안 아이가 하나 더 태어났다. 우리가 살던 곳은 덴마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오르후스였다. 그곳에 사는 동안 나는 덴마크 사회를 최대한 많이 관찰하면서 연구하고, 스칸디나비아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글도 최대한 많이 읽고, 덴마크 전역을 최대한 많이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비종교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물었다. 그들 개인의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사실은 그런 믿음이 아예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 어떤 자리에서든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카페테리아에서 줄을 서서 기다릴 때도, 이웃집 디너파티에서 과자를 씹고 있을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비공식적인 대화 외에도, 나는 미리 준비된 정식 심층 인터뷰를 150건 가까이 시행했다. 녹음기와 메모지와 펜을 손에 들고 앉아서, 나이와 학력을 불문하고 많은 덴마크인, 스웨덴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개중에는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7학년이나 8학년이 학력의 전부인 사람도 많았다. 대도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나 중소 도시 출신도 있었다. 직업도 다양해서 요리사, 간호사, 컴퓨터 기술자, 교수, 예술가, 변호사, 도축장 직원, 유치원 교사, 심장외과 전문의, 농부, 경찰관, 언론인, 고등학교 교사, 잠수함에서 근무하는 군인, 정신과 의사, 사회복지사, 그래픽디자이너, 전업주부, 식품점 점원, 공학자, 상점 관리자, 소기업 사장, 물리치료사, 세금 컨설턴트, 캐스팅 담당자, 비서, 우체국 직원, 학생, 수위, 실업자 등이 인터뷰에 응했다. 심지어 베이스 연주자도 한 명 있었다.
이처럼 많은 덴마크인, 스웨덴인과 나눈 심층 대화를 통해 나는 상대적으로 비종교적인 사람들의 삶을 깊이 파악할 수 있었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미미하고 주변적인 사회에서 삶의 본질이 어떤 모습인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분석할 기회를 얻었다. 따라서 이 책은 개인적인 성찰의 결과물이자, 내가 지상에서 가장 덜 종교적인 지역에 살면서 발견하고 경험하고 새로이 배운 것들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책은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 즉 비종교적이거나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들(대단히 중요하지만 거의 연구되지 않은 인구 집단에 속하는, 비교적 세속주의적인 사람들)을 사회학적인 렌즈로 바라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중요한 문제들도 다루고 있다.
우선 나는 신이 없는 사회가 단순히 가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점잖고 쾌적한 곳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발언이라는 건 알지만, 내가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없는 사회는 지상의 지옥이 될 거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입에 담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하느님이 없는 사회는 부도덕이 판치고, 사악함이 가득하고, 타락이 들끓는 곳이 될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고, 안전하고, 건전하고, 도덕적이고, 번영하는 나라다. 사실 이 두 나라가, 적어도 사회학의 표준적인 기준에 따르면, 세계 ‘최고’의 국가에 속한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도 있다. 다른 나라들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종교적 근본주의가 점점 세력을 얻고, 종교와 정치가 더욱 강하게 결속하는 시대에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종교적인 믿음이 사라져도 여전히 훌륭하게 제 기능을 발휘하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믿음이 없어도 사람들은 건실한 법을 만들어 지킬 수 있고, 도덕과 윤리로 이루어진 합리적인 제도를 잘 따를 수 있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열정이 사그라지고, 기도를 포기하고, 성경을 공부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예의 바르게 대할 수 있다. 학교와 병원도 여전히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범죄율도 여전히 미미하고, 아기와 노인도 여전히 필요한 보살핌을 받고, 경제도 여전히 번영하고, 공해도 여전히 잘 억제되고, 사람들이 속도위반 범칙금도 여전히 잘 내고, 아이들도 여전히 따뜻하고 안전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랄 수 있다. 하느님이 일상생활의 핵심 요소로 존재하지 않아도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책의 두 번째 목적은 종교적 성향이 그리 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독특한 세계관을 살피고 분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사람들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며 대처하고 있을까? 자신도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처할 방법이 사람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에 종교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이론에 따르면 그렇다), 종교에서 위안을 얻으며 심리적 안정을 구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옳은 주장이기는 해도 이 이론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특히 수많은 덴마크인과 스웨덴인에게는 틀림없이 적용되지 않는다. 스칸디나비아에는 무시무시한 사신死神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잘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 중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죽음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가깝거나 먼 미래에 자기들의 존재 또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거나, 또는 불편해하면서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오르후스에서 호스피스 간호사로 일하는 마흔세 살의 안네가 무척 흥미로웠다. 오랫동안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면서, 무신론자들이 대개 임박한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안네가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안네는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걱정과 불안으로 마음이 망가져서 죽음을 가장 힘들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은 죽음의 공포가 인간에게 불가피한 현실이며, 따라서 이 ‘보편적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에 커다란 의문을 제기한다.
죽음의 공포 외에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왜 이곳에 살고 있으며 인생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냐는 무겁고 거창한 의문에 답변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을 때 종교에 기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에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다.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 중에는 궁극적으로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믿는다고 단호하게 주장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여전히 도덕을 지키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데도, 그들의 삶에는 사랑이 있고 경제적 번영도 있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세속주의적인 사회에서 세속주의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론들, 즉 종교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거나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라는 주장을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어쩌면 의미심장한 도전을 제기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목적은 지극히 종교적으로 변해가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유난히 비종교적인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탐구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덴마크와 스웨덴이 비종교적인 나라들의 선봉에 서 있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 중에도 영국이나 네덜란드처럼 종교적 열정이 유난히 낮다고 평가되는 곳이 여럿 있다. 이 나라들(대부분 서유럽에 집중되어 있다)이 하느님이나 예수나 내세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 나라의 어떤 점 때문에 종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주변적 존재가 된 걸까? 나는 여러 훌륭한 사회학 이론과 내가 덴마크에 살면서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런 의문들의 답을 찾아보려고 애쓸 것이다. 덴마크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가 가장 먼저 관찰했던 것들을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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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대부분의 덴마크인과 스웨덴인은 온 세상에 죄악이 퍼져 있다거나,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아니, 아예 종교적인 ‘죄악’이라는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덴마크와 스웨덴에는 성경이 신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북유럽 국가들의 교회 출석률 또한 지상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덴마크와 스웨덴 인구 중 상당수가 신을 믿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신은 자기들이 나름대로 해석해서 만들어낸 모호한 개념이다. 인간에게 벌을 내리거나, 분노하거나,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성경 속의 하느님과는 다르다. 게다가 북유럽인들은 이 모호하고 막연한 신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에 최소한의 의미만을 부여하고 있다. 덴마크의 사회학자인 올레 리스가 지적했듯이, “살아가면서 신에게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스칸디나비아인은 소수에 불과하다. 미적지근하고 다소 회의적인 것이 스칸디나비아인의 전형적인 태도다.”
대단히 헌신적인 근본주의자들이 여기저기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잘 찾아보면 심지어 신도가 많은 오순절교회도 하나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진정한 신자들을 찾기란 다른 나라에 비해 힘든 일이다. 사회의 주변부에 극소수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덴마크 전문가인 앤드루 벅서는 “분명하게 정의된 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천명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종교보다는 과학에 기대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스웨덴인 학자 에바 함베리에 따르면, 인격체의 특징을 갖춘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스웨덴인은 2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아직 신을 믿는 그 스웨덴인들 중에도 믿음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따라서 덴마크나 스웨덴에서는 사람들이 신을 그다지 믿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살인을 그다지 저지르지 않는다. 덴마크인이나 스웨덴인은 원래 뚱하고 우울한 사람들이 아닌가? 미국인들 중에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주님과 그토록 뚜렷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면 절망이 널리 퍼져 나갈 거라고 짐작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기도도 안 하고, 성경에는 뽀얀 먼지가 앉게 내버려두고, 일상적으로 예수를 찬양하지도 않고, 전능하신 주님에게 대체로 무관심한 편이다. 이처럼 종교에 무지한 북유럽인들은 영혼 깊숙한 곳에서 공허를 느끼지 않을까? 불행하지 않을까? 하지만 에라스무스 대학의 루트 벤호벤 박사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벤호벤 박사는 나라별 행복도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다. 그는 최근, 전 세계에서 실시된 수많은 조사들로 축적된 점수를 분석한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91개국의 행복도 순위를 정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국민의 전체적인 행복도 면에서 전 세계에 우뚝 선 나라는 작고 평화롭고, 신의 존재가 비교적 미미한 덴마크다.
미국인인 나는 그 나라에 살면서 스칸디나비아에 종교의 존재가 미미한 것에 매혹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때로는 안도감까지 느끼기도 했다. 나 같은 비非신자 겸 불가지론자가 종교적 성향이 강한 미국에서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한다. 종교가 공동체를 제공해주고, 희망을 심어주고, 가족 간의 유대를 강화해주고,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고, 중요한 의식과 통과의례로 삶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등 좋은 역할을 아주 많이 한다는 점은 분명히 인정할 수 있지만, 미국처럼 종교적인 나라에서 사는 것이 항상 편안하지만은 않다. 미국에서 기도는 다이어트만큼이나 널리 퍼져 있고, 주요 도시의 경찰 국장들은 자기 관할구역에서 범죄율이 증가하는 것을 사탄의 탓이라고 말하고, 주지사들은 자연재해가 났을 때 주민들에게 기도로 가장 먼저 대처하라고 호소하고, 학교 이사회에서는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인간의 진화 과정을 가르치는 것에 끈질기게 이의를 제기한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내게는 덴마크에 산 것이 1년여 동안 세속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것과 같았다.
물론 덴마크나 스웨덴 문화에서 종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다. 내가 이 책에 『종교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Religion』 대신 『신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God』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 중 하나는, 루터교의 많은 요소들이 지금도 덴마크와 스웨덴 문화에 깊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 대다수는 지금도 각각 자국 국교회에 소속되어 교회세를 내며, 교회에서 올리는 결혼식을 선호한다. 목사 앞에서 아이가 세례를 받게 하는 사람도 대다수를 차지한다.(참고로 요즘은 여자 목사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덴마크인들은 자식들이 사춘기 초입에 이르면 교회에서 견진성사를 받게 한다. 하지만 이처럼 분명하게 남아 있는 루터교의 흔적들조차 믿음이나 영적인 확신 때문에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보다는 문화적 전통이라는 의미에서 기독교 의식을 지키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들은 거의 모두, 국교회의 재정을 위해 1년 수입의 1퍼센트를 교회세로 낸다고 말했지만, 그건 순전히 “다들 하는 일이기” 때문에 지키는 규칙일 뿐이었다. 하느님이나 예수, 종교적 확신이나 믿음 때문에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한 인터뷰 대상자 중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사람들 역시 순전히 ‘전통’이나 ‘낭만’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경우가 거의 전부였다. 시청에서 무미건조한 식을 치르는 것보다는 교회에서 아름다운 예식을 치르는 편이 더 좋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덴마크에서 사는 동안 나는 덴마크 루터파 국교회 소속인 서른아홉 살의 목사 미켈과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미켈은 오르후스에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조용한 마을에서 소수의 신도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집전한 결혼식은 200건에 이른다. 미켈은 항상 결혼식을 집전하기 전에 예비부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시청이 아니라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비부부들이 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 같겠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200쌍 중에서 하느님을 언급한 사람들은 대략 열 쌍쯤 되는 것 같아요. 그중에 두세 쌍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라고 말했는지도 모르죠. 어쨌든 하느님을 언급한 사람들은 열 쌍, 그러니까 대략 5퍼센트예요. 나머지는 마치 “그런 걸 왜 물어요? 당연히 전통이니까 하는 거죠”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군요. 내가 그런 걸 물어봤다는 사실 자체를 농담으로 생각할 거예요. “이건 전통이에요. 오래된 교회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진짜 결혼식을 치러야죠. 아시잖아요”라면서 말이죠.
아기에게 세례를 주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는 것 역시 아기의 영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전통 때문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내가 인터뷰를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하느님이 아니라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아기의 세례식을 치렀다고 말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철저히 비종교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아기가 세례를 받게 하는 스칸디나비아인의 사례를 보고 싶다면, 오르후스에서 컴퓨터 기술자로 일하는 스물네 살의 리세를 살펴보면 된다. 리세는 유틀란트 중부의 작은 마을 출신으로, 부모님 역시 하느님도 믿지 않고 교회에도 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어렸을 때 리세의 친구들 중에도 하느님을 믿는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사실 하느님은 리세의 주위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에 오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리세도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예수도, 악마도, 천국도, 지옥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덴마크인들이 그렇듯이 리세 역시 “하늘과 땅 사이에는 뭔가가 있다”라고 말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도 한다. 리세는 현재 약혼한 상태인데, 나는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아기를 키울 생각인지 궁금했다.
아뇨.
견진성사를 받게 할 건가요? 네. 세례도요.
이유가……? 그게 일반적이잖아요. 다들 그렇게 해요.
그게 전부였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의는 믿지도 않으면서 왜 아기가 세례를 받게 하겠다는 거냐고 계속 물어보자, 리세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그건 원래 덴마크인들이 다 하는 일이라는 말을 다시 했다. 내가 인터뷰한 기테라는 덴마크 여성도 마찬가지다. 오르후스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마흔 살의 기테는 조부모 대부터 신을 믿지 않는 집안에서 자랐다. 기테도 조부모나 부모와 마찬가지로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두 아이에게는 세례를 받게 했다. 나는 예수나 하느님을 전혀 믿지 않는다면서, 자기 아이들에게 세례라는 신성한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교회에 앉아 목사가 하느님이나 예수에 관한 온갖 종교적인 말을 하는 걸 어떻게 가만히 들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기테는 목사의 말들은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지만, 세례식은 좋은 경험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자신은 세례식 자체를 “문화적 행사 중 하나”로 보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견진성사에 대해서도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 대부분이 순전히 “다들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열네 살짜리 아이라면 거절하기 힘든 파티와 선물, 돈 등이 그 행사에 따라오기 때문에 치렀을 뿐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이름만 남은 다양한 종교의식과 기독교 예식에 참가하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그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세례식에서 헌금에 이르기까지, 견진성사에서 교회 결혼식에 이르기까지, 스칸디나비아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루터교의 요소들은 종교적인 색채가 가미된 세속적인 전통에 불과하다고 보는 편이 가장 타당한 것 같다.
덴마크인과 스웨덴인은 대부분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덴마크인 중 82퍼센트가 인간의 진화에 관한 다윈 이론의 증거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이는 서구 세계에서 진화론을 믿는 인구 비율로 가장 높은 편에 속하는 숫자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대부분의 덴마크인과 스웨덴인은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생각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성경의 신성함을 거부하고, 예수를 믿지 않고, 죄악이나 구원이나 부활도 믿지 않고, 심지어 하느님도 믿지 않으면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다니. 나는 1년간의 연구에서 이 의문을 반복적으로 파고들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문화적 전통이나 역사적인 의미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거의 한결같이 같은 것들을 강조했다.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돌보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 기독교인의 의미를 설명할 때 하느님이나 예수, 성경을 언급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거나 메시아였다고 믿느냐고 구체적으로 물어보자, 그들은 거의 모두 아니라고 대답했다. 주저 없이. 그럼 예수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거나 무덤에서 일어났다는 건?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대개 진심으로 우습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걸 묻는 게 바보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르후스 출신의 40대 중반 남자로 자그마한 가게를 소유한 안데르스를 예로 들어보자. 안데르스는 자신이 하느님을 믿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고, 예수의 신성은 믿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도 믿지 않고, 성경은 순전히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도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인간의 좋은 점들을 믿는다. 그 좋은 점들이야말로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이다. 다른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것, 노인을 보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것 등등. 이런 것들이야말로 살아가면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다.
스웨덴 남부 출신으로 쉰여섯 살의 인적 자원 컨설턴트인 엘사의 경우도 살펴보자. 엘사 역시 하느님과 예수, 천국, 지옥, 성경을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내가 그 말의 의미를 묻자 엘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의 바른 인간이 되는 것,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 그리고, 그래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기독교인이라는 말에 대한 미국인들의 전형적인 생각과는 다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미국의 자유주의적인 주류 기독교인 중에도 물론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있지만,17 안데르스와 엘사는 세속적인 인본주의라고 규정해도 무리가 없을 생각들을 상당히 솔직 담백하게 표현했다.
따라서 스칸디나비아와 미국의 차이점, 적어도 종교와 관련해서 찾아볼 수 있는 차이점은 상당히 눈에 띌 뿐만 아니라 다양하다. 나는 덴마크에 머무르는 동안 일종의 경외감에 휩싸여 지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애너하임 같은 곳과 오르후스가 얼마나 다른지가 항상 눈에 띄었다. 미국에서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 채널을 이리저리 바꿀 때마다 중간중간 설교자들이 죄악이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끼어들고, 미식축구나 야구 경기를 시작할 때도 먼저 예수에게 기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미국인들 중 75퍼센트는 지옥이 존재한다는 걸 믿는다고 주장한다.18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신학적인 것과 관련된 문제보다는 자신들의 가족, 가정, 자전거, 지역 정치, 직업, 날씨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영국이나 브라질의 인기 축구 선수들조차도 종교보다 더 관심을 받는다. 게다가 지옥의 존재를 믿는 덴마크인과 스웨덴인은 겨우 1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치다.19 사랑스러운 모습의 유서 깊은 교회들이 덴마크와 스웨덴의 풍경 속에 점점이 흩어져 있고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 기독교에 대해 배우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 종교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아주 조용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점을 더욱 잘 보여주는 사례를 두 가지 더 들어보겠다. 정치와 학교 운동장이 그것이다.
첫째, 정치와 종교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미국에서 성공을 거두고 싶은 정치가는 성실하게 교회에 나가고 ‘믿음’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자주 공개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주지사나 상원 의원이나 대통령이 하느님을 믿고 찬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의논한 결과를 토대로 결정을 내리는 편을 좋아한다. 따라서 미국에서 무신론자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확률은 알카에다 조직원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확률과 얼추 비슷하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에서는 정반대다. 이 두 나라에서 정치가들은 무슨 종교를 믿든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신앙이 전혀 없다면, 그편이 훨씬 더 좋다. 정치가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믿음을 이야기하거나, 기도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거나, 대중 연설에서 가끔 하느님을 언급하기만 해도 금방 공직에서 쫓겨난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공직에 앉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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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스칸디나비아가 종교에 관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두 번째 사례로 학교 운동장을 생각해보자. 미국 전역의 초등학교에서는 아이가 하느님이나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밝히면, 어느 정도 곤란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그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내 딸이 여섯 살 때, 쉬는 시간에 학교 운동장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데 한 친구가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었다. 딸이 안 믿는다고 대답하자, 그 친구는 즉시 그네 타기를 그만두고 내 딸에게 지옥에나 가버리라고 말한 뒤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는 내 딸과 함께 그네를 타지 않았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의 상황은 거의 정반대다. 하느님이나 예수를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비정상적인 사람, 괴짜로 낙인찍힌다. 유틀란트의 작은 마을 출신으로 식품점에서 일하는 스무 살의 사라는 내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젊은이들에게 종교는 일종의 금기예요. 젊은 사람들은 “나는 기독교인이고 그것이 자랑스럽다”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런 말을 했다가는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거든요.
따라서 스칸디나비아의 학교 운동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아주 드문 기독교 신앙을 지닌 아이가 따돌림을 당하거나 조롱을 당하거나 그보다 심한 일을 당할 수 있다. 토르벤이 바로 그런 아이였다. 그가 하느님과 예수를 독실하게 믿는다는 사실이 알려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조롱과 괴롭힘은 일상이 되었다. 토르벤은 몇 번이나 전학을 다닌 끝에 결국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지금도 흉터가 남아 있어요.” 그는 인터뷰 중에 눈물을 비치며 탄식했다. 지금 토르벤은 스물다섯 살로 기혼자며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덴마크 루터파 국교회가 동성애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이유로 몇 년 전 교회에서 탈퇴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자유로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는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옮긴 책이며 아담과 이브는 실제로 존재했고,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으며 악마도 실제로 존재하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갈 거라고 믿는다. 나는 그에게 유대인들이 모두 지옥에 갈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믿고 있어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성경이 내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그럼 불교도와 힌두교도도? 네.
많은 미국인들은 토르벤을 보고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대부분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은 그의 신앙을 불편해하며 기괴한 것으로 볼 것이다. 심지어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서 그런 믿음을 갖게 됐다고 볼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에서는 토르벤과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이 상당히 흔한 반면,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지극히 희귀하다는 얘기다. 나는 오덴세에서 공립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서른세 살의 안드레아스에게 학생들 중에 토르벤처럼 신앙을 지닌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2~5퍼센트”라고 대답했다.
(중략)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이런 나라들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종교적인 신앙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미하고, 하느님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밀려난 사회라니. 오늘날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또 각각 어떤 모습일까? 삶에 대해 그들이 품은 (비종교적인) 생각은 어떤 것일까? 물론 어떤 사회에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한다. 아무리 근본주의적인 사회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앙이 없는 상태가 일반적이고 흔한 주류로 인식되는 곳은 스칸디나비아뿐이다. 따라서 단순히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신앙이 없는 상태를 아무렇지 않게 볼뿐더러 오히려 그것이 일상적이고 규범적인 상태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라르스가 바로 그 점을 보여주었다. 라르스가 ‘전형적인’ 스칸디나비아인인지 아닌지는 쉽게 결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전형적인 스칸디나비아인에 아주 근접한 모습인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그를 간단히 설명하는 것으로 들어가는 말을 끝맺고 싶다. 덴마크에 머무르면서 만나고 인터뷰했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라르스가 내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인생에 대한 강렬한 애정과 함께 만족감과 건강한 정신이 느껴졌다. 나는 라르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기뻤고, 2월 중순의 어느 춥고 눈 내리던 캄캄한 밤에 카테가트 해안가의 아늑한 집에서 한 시간 반 동안 함께 앉아 그의 인생과 믿음에 관해 물어볼 수 있었던 것도 기뻤다.
라르스는 일흔일곱 살이다. 지금도 아주 건강하며,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핀 섬에 살고 있다. 작은 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오랫동안 지내다 퇴직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중도 우파다. 딸이 둘 있고 50년 전에 결혼한 아내와 지금도 살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대단히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신도들 가운데 지도자급이었다. 하지만 라르스의 어머니는 무신론자였다. 외할아버지도 역시 무신론자였다. 라르스는 외할아버지가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승진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외할아버지가 살던 1800년대에는 무신론자라는 사실이 남들에게 알려지면 상당히 곤란한 입장이 되었다.
라르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엄청나게 큰…… 큰 기독교 단체의 우두머리였어요…….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도들을 가르치는 위치였죠. 그 사람들을 이끌었어요……. 신도들 말이에요. 어머니는 무신론자였어요. 두 분은 내가 네 살 때 이혼했습니다.
그래서 라르스는 두 형제와 함께 주로 어머니 손에 자랐지만, 가끔 아버지를 만나기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예배에 참석할 때도 있었다. 라르스는 자신이 무신론자라며 옛날부터 항상 그랬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견진성사까지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65년 전에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이유를 묻자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거야 장모님이 워낙 강경하셨으니까 그랬죠.
라르스의 어머니는 2003년에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가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무신론을 계속 유지했는지 궁금했다.
말년에 하느님에게 의지한 적은 없었나요? 아뇨……. 3개월만 더 살았으면 108세가 되셨을 겁니다.
그렇게 오래 사셨어요? 가서 어머니 묘비를 확인해봐요. 이 마을에 있으니까. 1895년부터 2003년이라고 돼 있을 테니.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군요……. 그래요.
그럼 줄곧 무신론자셨습니까? 언제나 그랬죠.
우리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가 바랐던 대로, 기독교식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화장했다는 이야기. 나는 라르스를 바라보며(지금은 거의 여든 살이 되었을 것이다), 곧 다가올 그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물어보았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옛날에 우리 생물 선생님은 항상 우리 몸을 구성하는 화학물질들의 가치가 덴마크 돈으로 4크로네 정도라면서 최대한 빨리 그 돈을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곧장 화장장으로 가야 한다고.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죽은 뒤에도 삶이 있다는 걸 안 믿으시는……? 그래요…….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어. 내 경우에는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나는 게 확실해요.
하지만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이라면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인생의 의미가 뭐죠? 인생의 의미? 나는 지상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누렸어요. 그 시간을 최대한 잘 보내는 것이 내 의무죠.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했고……. 정말이지 훌륭한 세월을 보냈어요.
살다가 힘든 일이나 슬픈 일을 겪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시죠? 그럴 때 뭘 하세요? 뭐라고 해야 할까? ……난 슬픈 순간이 전혀 없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난 아주 행복하게 살았어요. 원하는 건 뭐든지 얻고, 직업도 원대로 다 해봤으니까. 아내도 얻고, 우리 두 딸은 아주 많이 배웠고, 네 손주들 넷도 머리가 좋아요.
그럼 행복하신 건가요? 그럼, 물론이오. 뭐…… 불만스럽고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그런 건 다 자기 잘못인 것 같아요. 그래요. 하지만 날 지탱해줄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우리는 그 밖에도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했을 때의 이야기, 최근 이슬람교도들이 덴마크로 이민을 오는 것, 그가 교장으로 있던 고등학교에서 그를 위해 기념 만찬을 열어주었던 것. 그날 500명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를 위해 건배를 해주었고, 그는 그날을 자기 인생의 “황금 같은 순간”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내 내가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라르스가 전체적으로 따뜻한 사람이며, 삶에 대한 만족감과 행복감이 전혀 꾸밈없는, 정직한 감정으로 보인다는 점이었다. 라르스는 정말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 같았다. 오랫동안 이어진 행복한 결혼 생활, 사랑스러운 딸들과 손녀들, 만족과 보람을 느꼈던 직장 생활, 덴마크에서도 가장 푸른 섬에 있는 아름다운 집, 건강. 다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만이 없을 뿐이었다.
라르스 같은 사람들을 알아보고 이해하고 싶다는 깊은 소망, 그리고 라르스 같은 사람들을 이토록 많이 만들어내는 문화를 살펴보고 설명하고 싶다는 소망이 이 책을 쓰게 된 근본적인 동기다.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지금 종교적인 열정으로 부글거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라르스 같은 사람들, 이 부글거리는 열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들을 알아보는 것이 더욱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일이 된다. 또한 덴마크나 스웨덴처럼 비교적 ‘신이 없는 사회’를 분석하는 일이 더욱 시급한 과제가 된다.
(들어가는 말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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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필 주커먼(Phil Zuckerman)
피처 대학 사회학과 교수. 오리건 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종교와 사회의 관계를 사회과학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세속성, 무신론 등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이 책 『신 없는 사회』에서는 몇몇 사회가 비종교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된 배경을 조사하며, 설득력 있는 사회학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적용한다. 그의 연구는 자신의 고향인 미국 사회뿐 아니라 연구 대상이었던 스칸디나비아 사회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뒤이어 출간된 저서 『신앙은 그만Faith No More』(2011)에서는 신앙을 버린 미국인들을 인터뷰하며, 전 세계 어느 곳보다 종교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이들이 종교와 멀어진 이유를 탐구하는 등 ‘신 없는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종교 사회학으로의 초대Invitation to the Sociology of Religion』(2003), 『성소 안의 투쟁Strife in the Sanctuary』(1999) 등을 출간했다. 『신 없는 사회』는 <포워드 매거진> 선정 ‘올해의 책’ 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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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승욱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했다.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를 지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신은 위대하지 않다』 『블랙 에코』 『시인』 『실종』 『밤의 의미』 『행복의 지도』 『분노의 포도』 『임기종료』 『망할 놈의 나라 압수르디스탄』 『도플갱어』 『살인자들의 섬』 『스티븐 호킹 과학의 일생』 『톨킨』 『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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