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서문
이 책 《이해의 에세이 1930~1954》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뉴스쿨The New School 재직 당시 제자였으며 현재 뉴스쿨의 한나 아렌트 연구소 소장인 제롬 콘Jerome Kohn이 주로 아렌트의 초기 글들을 모아 편집한 《Essays in Understanding 1930~1954》(Harcourt Brace & Company) 제2판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1994년에 출간된 초판과 2005년 출간된 재판 사이에 내용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 단 몇 편의 에세이에서 일부 단락을 삭제하거나 수정한 정도일 뿐이다.
이 책에는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이란 대작을 출간하기에 앞서 다양한 방식으로 출판한 40편의 에세이와 1편의 대담 자료가 담겨 있다. 제롬 콘은 이 책을 편집하면서 여기에 어떠한 에세이를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한 에피소드를 밝히고 있다. 편집자도 강조하고 있듯이, 초기 에세이에 담긴 아렌트의 사유 편린들은 후기 저작에서 구체화되고 그 윤곽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단편적인 이 글들은 1954년 이후 아렌트의 저작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된다.
제1장 〈무엇이 남는가: 언어가 남는다〉는 1964년 아렌트와 귄터 가우스Gunter Gaus의 TV 대담을 실고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아렌트는 자서전적 성격을 띤 저서와 에세이를 출간했으나 자서전을 남기지 않았다. 그녀는 대담 자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삶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제롬 콘은 이를 통해 아렌트가 왜 철학적, 신학적 사유에서 정치적 사유에 관심을 옮기게 됐는가를 이 글에 소개했다.
제롬 콘은 1930년에서 1954년 사이에 발표된 40편의 에세이들을 연대기 순으로 편집했다. 책의 전반부에 소개된 에세이 6편은 아렌트가 1933년 파리로 망명하기 전까지 독일에서 출간한 에세이들이다. 그리고 1944년에 발표한 〈프란츠 카프카에 대한 재평가〉와 〈히틀러의 식탁 좌담에 대한 고찰〉이란 에세이까지 22편의 에세이는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전체주의의 기원》을 출간하기 직전까지 집필한 원고들이다. 그리고 이후 게재된 12편의 에세이는 아렌트가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이후 집필한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들은 아렌트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각기 다른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서 직접적인 연계성이 없는 것같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가 《과거와 미래 사이Between Past and Future》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음악의 모음곡같이 책에서 총체성보다는 통일성을 드러낼 수 있는 에세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제별로 넓게 분류하면 몇 개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즉 전체주의와 그 유산, 정치와 종교의 관계, 철학의 흐름에 대한 해석, 문학과 정치의 관계, 미국의 대외 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아울러 11편의 서평이 실려 있다.
이렇듯 외형적으로 주제의 일관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의 에세이들을 연결시키는 외올실은 바로 ‘정치적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역자들은 아렌트가 이 에세이들에서 정치 행위에 대한 관심 또는 정치적 사유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이후의 저작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이 책을 공동으로 번역했다.
한나아렌트학회 회원들은 2007년 초반부터 매달 정기 강독회를 가지면서 아렌트의 초기 저작인 《이해의 에세이》에 담긴 내용을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때늦은 감이 있으나 이 방대한 분량의 책이 4인 공동 번역으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역자들은 《이해의 에세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용어 표기와 표현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보니 번역 작업을 기획한대로 진행하지 못했고 마무리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공동 번역의 결점을 최소화하고자 홍원표 교수가 원고를 전체적으로 검토하기는 하였으나 혹시 있을 번역상의 오류나 부주의는 물론 4인의 공동 책임이다. 아무쪼록 독자 여러분들의 아낌없는 질정과 격려를 바랄 뿐이다.
이 귀중한 책을 번역하는 동안 많은 분들의 비판적 지원과 격려가 있었다. 번역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한나 아렌트학회 동료들의 애정 어린 조언과 격려는 무엇보다도 가장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이 책이 성공적으로 출판될 수 있도록 연구 활동비와 토론을 위한 장소 제공 등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은 가산불교문화연구원과 고옥 스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아울러 어려운 출판 사정에도 불구하고 아렌트 사상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이 책의 출판을 추진해 주신 텍스트의 김용필 사장님께 고마움을 표한다. 또한 이 책의 출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박선화 전임 편집장, 그리고 거친 원고를 꼼꼼하게 검토하여 좋은 책이 되도록 세심하게 편집을 진행한 김경미 편집장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아무쪼록 이 책이 한나 아렌트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여러 독자들에 게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
2012년 2월 공동 역자 씀
서론
제롬 콘Jerome Kohn
중요한 것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글쓰기란 이해를 추구하는 방법이며,
이해 과정의 일부분입니다.
―<무엇이 남는가? 언어가 남는다What Remains? The Language Remains> 중에서
“흥미로운 시대에 산다는 것은 저주이다”. 이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너무나 짧았던 생애 가운데 마지막 8년여 동안 당시의 국내 재앙이나 국제 위기를 논할 때 자주 인용하던 고대 중국의 속담이다. 마치 그 속담의 아이러니한 의미가 명백하다는 듯이, 그녀는 어떤 설명을 요구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빈정대는 투로 혹은 생각에 잠겨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인간사human affairs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담 자체에서뿐만 아니라 그 속담에 대한 그녀의 설명을 들으면 역설적인 그 무엇에 어렵지 않게 감동하게 되었다. 그녀는 여러 해 동안 학자, 예술가, 작가, 지성인, 저명인사,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읽는 다른 많은 독자들을 고무시켜 왔던 열정으로 “이 무시무시한 세기”의 사건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녀의 작품은 “가장 어두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이 결코 아름답지 않은 세계”의 고통에 대해 감정적이지 않고 얼버무리지도 않으며 당당히 맞선다. 앞에서 인용한 문구는 그녀의 것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중국 속담은 매우 사려 깊고 개인적인 한 여성을 떠올리게 하며, 심지어 그녀를 상징하는 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한나 아렌트(1906~1975년)는 정치 철학의 주장과 근거를 연구하면서도 정치 철학자라는 직함을 대부분 거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정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하기란 쉽지 않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녀 저작의 사회학적, 역사적 측면을 강조했고, 또 다른 평론가들은 문학적이고 시적인 특징을 강조했으며, 그녀를 정치학자라고 불렀다. 정치학자는 그녀가 수년 동안 받아들였던 직함이다. 이후에 그녀가 명성을 얻고 자신의 행보에 대한 설명을 요청받았을 때, 그녀는 넓은 의미로 그것을 정치 “이론” 혹은 정치적 “사고”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변화를 원하는 자유주의자이자 안정을 원하는 보수주의자로서 정당하게 환영받았고, 과거에 대한 비현실적인 열망을 품은 사람 혹은 유토피아적 혁명가라고 혹평을 받았다. 사람들은 아렌트에게 이러한 식으로 특징을 부여하고 있지만, 이러한 다양한 특성들은 (그리고 훨씬 더 미묘한 예들을 제시할 수 있지만) 이들의 다양한 관심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특성들은 전통적 학문 분야나 정치적 범주를 바탕으로 아렌트의 판단을 이해하려는 불편부당한 독자의 진심 어린 당혹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원래 아렌트가 개인적으로 정치 영역에 끌리지는 않았다는 것, 초기에는 물론 아마도 지금도 아닐 것이라는 점을 깨달으면 당혹스러울 수 있다. 그녀는 정치 행위에 대한 뛰어나고 성숙한 자신의 이해는 정치 행위를 “외부에서 살펴보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녀는 이해의 활동, 끝없고 순환적인 정신 활동에 저항하지 못한 채 이끌렸고, 그녀에게 그 활동의 원칙적 중요성은 결과보다는 오히려 그 활동 자체에 있음을 의심할 수는 없다. 확실히 그녀는 풍부한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새로운 분류를 시도했고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으며 전통적 정치사상의 낡은 범주를 변화시켰다. 그러한 것들은 결과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하다고 입증됐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은 한 사상가를 발견한다는 게 뜻밖이라고 하더라도, 이해에 있어서 아렌트의 부단한 모험은 자신에게는 삶 자체와 마찬가지로 다만 “도구적”일 뿐이었다. 이해의 활동이 아렌트가 살았던 세계와의 화해의 척도를 그녀 자신에게 제공했음을 파악하기는 더 어렵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이해의 문제를 아렌트적인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녀는 고마워하고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해한 것을 양도하기를 원했다거나 양도할 수 있다고 믿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렌트에게 순전히 난센스였을 것이다. 그녀에게 사유thinking―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해understanding―란 고독하고 사적인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었다.1 아렌트는 지금까지 언급되었고 앞으로도 언급될 모범적인 삶을 이끌었다. 아렌트가 세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세계에 밝힌 빛은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20 세기 초반에 안정적이고 비종교적인 독일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매우 총명했고, 풍부한 교육을 받았으며, 자신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현한 유서 깊은 귀중한 문화의 상속인이었다. 1920 년대에 발생한 근본적으로 정반대의 성격을 띠는 다음 두 사건은 그녀의 사고와 성격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첫 번째 사건은 학생 시절 그녀의 초기 교제였다. 그것은 실존 철학의 선봉에 있는 두 명의 위대한 사상가, 즉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와의 평생 애착 관계로 발전한다. 두 번째 사건은 독일에서 국가 사회주의 운동이 강화된 것이었다.
아렌트에게 철학적 혁명은 내적 전환이었다. 그것은 내성적이고 심리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녀의 사유 능력이 이전 세기로부터 물려받은,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세계의 체계적인 합리화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녀는 소위 “철학적 충격”, 즉 단순한 호기심과는 매우 구분되는 실존에 대한 순수한 경이감을 경험한 바 있다. 강렬한 자기반성, 다시 말해 자기 자신과의 사유는 그러한 충격에서 나타났다. 그녀에게 이것은 진정한 철학하기의 보증서가 되었다. 이처럼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사고 내용에 덧붙여, 비가시적이고 무형적인 내적 정신 영역이 아렌트에게 열렸다. 그녀는 사실상 고독하게 이 영역에 머무를 수 있었다.
사유 활동과 대비되는 운동은 식별 가능한 외부 세계에서 발생했다. 그런데 이 운동의 근본적인 의도는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 온 시민 결사civil association의 구조와 제도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정치적 혁명 운동의 성장을 “현실의 충격”이라고 언급했다.
아렌트는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세계로부터 ‘빠져나와’2 사유하면서도 동시에 국가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녀는 아직 젊었고, 독일을 떠나 예전처럼 자유주의 국가에서 자신들의 학문 분야를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던 ‘전문’ 지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렌트는 지성인 공동체의 일부 사람들이 나치의 팽창주의적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거나, 혹은 그러한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 하지 않는 안이한 태도에 질겁했다. 아렌트는 정치적 흐름에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든 휩쓸리도록 내버려 두는 지성인들의 성향을 불신했고, 이러한 불신은 평생 유지되었다.
아렌트는 한때 자신은 “타고난” 작가가 아니라고 말했다.3 이는 그녀가 “인생 초기, 즉 유년기부터 작가나 예술가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이 세기의 특별한 사건들”인 재난으로 “우연히” 작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의 문제와 무관하게 전체주의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달리 말해서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대격변 중에 있던 인류a world는 현상 세계the world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이루어진 아렌트의 정신 활동에 불가피하게 영향 을 미쳤다.4
아렌트가 훗날 말했듯이, 그녀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실제로 권력을 잡기 이전에도 세계에서 “독일 유대주의의 비운”, 자신에게 속한 역사와 문화(《라헬 파른하겐Rahel Varnhagen》, 제17장 참조), 즉 그 “독특한 현상”의 종말을 인식했다. 따라서 그녀는 수 세기 동안 유대 민족을 괴롭혔던 여러 형태의 반유대주의와는 다른 중요한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유대 민족은 이 반유대주의를 견뎌내며 생존해 왔다. (이후에 아렌트는 유럽 유대인의 엄청난 파멸이 나치 전체주의와 더 오래된 박해 형태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요소라는 사실과 반유대주의가 단지 포괄적인 인종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렌트 정치사상의 독창성은 그녀가 새롭고 전례가 없는 예외적인 현상으로 부각시켰던 것이 이전의 그녀의 성찰적 삶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그러한 일상 세계에서 현재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정치적인 것은 정치인이 통치하고, 권력을 이용하며, 목표를 결정하고, 목표의 성취 수단을 형성하고 이행하는 과업을 진행시키는 “정치” 영역으로서 실재reality가 되었을 뿐 아니라, 좋건 나쁘건 새로움이 발생할 수 있고, 생각할 자유를 포함한 인간적 자유의 조건들과 비자유의 조건들이 형성될 수 있는 영역으로서 실재가 되었다. 이러저러한 면에서 정치적 실재는 이후, 특히 그녀가 그러한 이해의 조건으로서 반성적 정신 활동에 관심을 돌린 만년에도 이해를 위한 모든 시도를 인도했다.
아렌트는 한때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문학 형식으로 에세이는 정치적 사건이라는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사유의 훈련과 …… 자연적인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아렌트는 《과거와 미래 사이Between Past and Future》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의 통일성은 “전체의 통일성이 아니라 음악의 모음곡 에서 보이는 동일하거나 연관되는 어조로 기술되는 일련의 악장들의 통일성이다”. 이러한 말들은 부분적으로 아렌트의 다른 저서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Men in Dark Times》,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가 그러하다. 그리고 앞의 책들보다 정도가 덜한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혁명론On Revolution》, 《정신의 삶The Life of the Mind》5은 학술지에 출판되거나 공개 강의에서 소개한 초고의 에세이와 강연 원고로 구성한―엮어서 구성된―저서들이다. 이 책의 내용은 한 꼭지를 제외하고 아렌트가 1930년부터 1954년까지 집필한 에세이와 강연 원고 가운데 출판되지 않았거나 기존의 책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녀가 출판하기로 기획했던 것이 아니다. 글의 내용은 그녀의 것이지만 책의 구조를 그녀가 구상하지는 않았다. 이 책의 구성은 대부분 연대기적인 것이고, 그 일차적인 목적은 그녀 생애 가운데 24세부터 48세에 이르기까지 사고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아렌트의 전 세계적인 위상과 더불어, 실제로 그녀가 쓴 거의 모든 글들은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관심거리이다. 그녀는 20년 이상 학문적 관심의 중심이 되어 왔으며, 그녀 저작에 관해 비판적인 해설가들은―(기대되는) 그녀의 정확한 구분 및 판단뿐 아니라 그녀가 그것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조화하는가에 관한―확연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학자들이 저술해 왔던 것의 다양성과 양립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저작에 대한 관심은 계속 증대되고 있다. 아렌트를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주로 사상가로서 그녀의 독창성에 기인하고, 적게는 그녀가 현대의 독자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고전적이고 유럽적인 자료에서 자양분을 공급받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저작에서 풍기는 열정적이고 독립적이며 시적인 특징, 특히 우리 시대의 정치적 사건들이 어떤 역사적 선례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인식 덕택에 창조력이 가장 풍부하고 주목받지 않을 수 없는 20세기 사상가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영국의 정치 이론가 마거릿 캐노번Margaret Canovan은 《한나 아렌트: 아렌트 정치사상의 재해석Hannah Arendt: A Reinterpretation of Her Political Thought》에서 논쟁을 피하는 예리하고 차별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캐노번은 오해를 살 정도로 단순하게 자신의 연구 목적을 “아렌트의 정치사상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렌트가 생각했던 “전체주의의 요소들”―아주 자세하게 설명한 일련의 전반적인 현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그 근거로 드러날 때 그녀의 정치사상이 총괄적으로 두각을 나타낸다는 캐노번의 명제는 특별히 주목을 끈다. 캐노번은 아렌트의 구분과 판단이 필연적으로 동의를 요구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정부 형태로서 전체주의가 등장한 조건들에 대한 그녀의 분석과 관련하여 고찰할 때 그녀의 구분과 판단이 일관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들은 전체주의 정권의 원인이 아니며 전체주의 정권의 몰락과 함께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아렌트가 즐겨 표현했듯이) 아주 간결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 시대의 위기이다. 그것은 우리의 난관으로 구성된 우리의 위기이다. 이 때문에 아렌트 사상은 과거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하다.
(…중략…)
여성 해방에 대하여1
여성 해방은 어느 정도는 현실화되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직업이 여성에게 개방되었고, 여성들은 투표할 권리와 공직에 출마한 권리를 포함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남성들과 같은 권리를 향유한다. 이러한 엄청난 진일보와 대조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된 제약들―특히, 생계를 꾸릴 권리와 재산을 취득할 권리는 여전히 남편의 동의에 달려있는 결혼 문제에 있어서―은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이전 시대의 “합당하지 않은” 잔재로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성 해방은 원칙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해도 형식적이다. 비록 오늘날 여성들이 남성들과 법적으로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여성들은 사회에서 동등하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여성들의 불평등은 많은 경우 여성들이 남성보다 상당히 낮은 임금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만일 여성들이―사회적 가치에 맞게―동일한 임금 수준으로 일한다면 직장을 잃을 뿐이다. 이것은 확실히 반동적인 현상인데, 여성의 독립은 최소한 당분간 남성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이기 때문이다. 소위 의료계나 법조계 종사자 같은 상층의 전문직 종사자들만이 평등을 위해 평등을 부분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이러한 역설적 상황으로부터 면제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이러한 전문직 종사자들이 여성 운동 덕분에 그 특권을 누린다고 해도, 이러한 전문직은 수 적으로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 일하는 여성은 경제적 현실이며, 이에 발맞추어 여성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앞으로 나아간다.
직업을 가진 여성의 평균적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 법적 평등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적은 보수를 받아들여야 할 뿐 아니라, 새로운 직업과 양립하지 않는 사회적이고 생물학적인 배경에서 주어진 일들을 계속해야만 한다. 이들은 직장 일에 더해 가족을 돌봐야 하고 아이들을 양육해야 한다. 따라서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의 자유는 가정에서 일종의 노예화나 가족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러한 “현대 여성의 문제”는 알리스 륄레-게르슈텔Alice Ruhle-Gerstel이 쓴 책의 출발점을 구성한다. 그녀는 여성들이 특유의 방식으로 그들의 상황을 다루고자 하는 여러 방식들을 기술한다. 모성이라는 생물학적 요소는 벌거벗은 사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에 의해 변형될 수 있다는 정확한 통찰에서 더 나아가, 그녀가 개인적 심리에 근거한 방법, 모든 인간의 성취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최초의 과잉 보상의 결과라는 포괄적 주장을 따르는 데에 이른다. 주어진 개인의 역사뿐 아니라 전체 계급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 이론은 전형적인 과잉 보상을 인식하고 심지어 그 모형을 식별하는 것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모형들―가정주부, 공주, 극악무도한 여자, 인정 많은 사람, 유치한 사람, 유능한 사람, 영리한 사람, 심한 압박을 받는 사람―에 대한 기술은 이 책의 최고의 장점이자 가장 독창적인 공헌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이중적 복합성으로 본다. 먼저, 그녀 자신의 사회적 계급과 별개로, 가정주부로서 여성은 남성 고용주의 재산 없는 고용인이 되는데, 특히 부르주아나 소부르주아 환경에 살 때 그러하다. 여성은 프롤레타리아조차 아니며 독립적인 유급 노동자도 아니다. 둘째, 일하는 여성으로서 여성은 대개 급여를 받는 노동자이다. 이러한 조건들의 모순은 정치적 관점에서 고려될 때 특히 명백하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여성들은 정치 영역으로 나아가지 않았는데, 그곳은 여전히 남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성 운동은 정치 영역으로 넘어갈 때마다 통합되고 획일적인 전체로서만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인도주의적 목표들을 제외하고) 구체적 목표를 표출하는 데 있어서 결코 성공한 적이 없다. 여성들의 정당을 창립하려는 헛된 시도는 운동의 문제를 매우 예리하게 드러낸다. 그 문제는 젊은이 운동의 문제와 유사한데, 이 운동은 오직 젊은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여성을 위한 여성 운동은 똑같이 추상적이다.
륄레-게르슈텔에 따르면, 여성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명확히 이해한다면 그(노동) 영역에서의 평등을 위한 지속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노동 계급 대중과 연대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의 정치적 공동 작업은 위에서 약술된 사회적 상황에 근거를 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권고와 사회적 상황에 대한 분석은 모두 문제를 지니고 있다. 전형적인 가정주부는 그녀의 결혼이 파탄에 이르렀을 때만 재산 없는 고용인이 된다. 그녀는 그 시점에서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에 들어가게 된다(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처음으로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상황이 그녀에게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분석은 이혼의 경우를 포함해서, 대부분 여성은 그녀가 속하는 사회적 단위에 여전히 묶여 있다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을 고용주에 대한 고용인의 종속과 동일시함은 지나치게 개인에 맞추어진 프롤레타리아 정의로부터 계속 진행된다. 개인이 분석 단위가 되어서는 안 되고,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공주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경우건 부르주아 가정주부가 노예처럼 취급받는 경우건 상관없이, 프롤레타리아건 부르주아건 오히려 가족이 분석 단위가 되어야 한다.
장황한 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교훈적이고 고무적이다. 이 책의 결론 “여성성의 대차대조표”는 다소 무미건조한 파토스로 제출되었다. 게다가 단 155개의 대상을 포함한 연구 표본들이 전부인 그녀의 연구의 주요 논거는 저자가 끌어내려 한 광범위한 주제를 뒷받침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녀의 일반화를 정당화하기에는 흔히 통계학의 사회학적, 지리학적 범주의 폭이 협소하다.
(역자 서문, 서론 일부, 본문 ‘여성 해방에 대하여’ 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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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한나 아렌트는 흔히 정치 철학자로 불리지만, 그처럼 명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 스스로도 철학은 “단독자인 인간”에 관심을 갖는다며 그러한 호칭을 거부했고, 권력의 속성과 정치, 권위, 전체주의, 자유, 폭력, 악 등 다양한 개념에 대해 정치 철학은 물론, 사회학, 역사학에 근거해 연구하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학적, 시적 감수성마저 지녔다. 아렌트는 현대 정치사상계 나아가 현대 철학계의 거물, 자이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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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홍원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고전적 합리주의의 현대적 해석: 스트라우스, 보에글린, 아렌트를 중심으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현대 정치 철학의 지형: 언저리에서의 사유》와 《아렌트: 정치의 존재이유는 자유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아렌트의 《혁명론》, 《정신 의삶 1-사유》,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정치적 책임과 용서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이해〉, 〈칼 야스퍼스와 한나 아렌트의 대화〉 등이 있다.
임경석
한양대학교에서 철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2004년, <이론과 실천의 상보적 의미에서 본 마르크스의 해방적 비판Marx’ emanzipatorische Kritik im Sinne einer Komplementaritat von Theorie und Praxis>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과 《촛불,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공동 저술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남긴 지적 유산의 전승역사>, <세계화 시대의 정의>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김도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철학과 학사 과정을 마치고 동국대학교에서 <한나 아렌트에 있어서 정 치적 사고와 정치적 판단>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진정한 삶의 양식을 찾아서: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 《철학을 만나면 즐겁다》(공저) 등이 있으며 《한나 아렌트의 정치이론과 정치철학》을 번역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아렌트의 정치적 판단의 이론과 그 의의>, <현대성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과 그 극복방안의 모색> 등이 있다.
김희정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같은 대학 정치학과에서 <한나 아렌트의 ‘자유’ 개 념과 페미니즘>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발표 논문으로는 <한나 아렌트의 공적 영역과 페미니즘>이 있으며, 한국정치사상학회에서 <아렌트의 정치 행위와 페미니즘>, <여성과 관용: 배려와 확장된 사유를 중심으로>, <대중과 순응, 민주주의의 후퇴>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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