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저는 아주 특별한 이 책이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에 대해 얘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역사는 역동적인 무대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 나가기 위해, 더더욱 공정한 세상에서 살기 위해 싸웠습니다.
많은 선각자, 정치 사상가, 활동가 들이 싸움에 큰 영향을 주고 적극적으로 동참했죠. 이런 정치가와 활동가 들 중에는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모든 걸 다 뒤집어엎으려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런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무대는 때로는 시로, 때로는 소설로, 때로는 정치적 회합으로, 때로는 저항으로, 때로는 노래로, 때로는 모두가 꾸는 꿈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아니에요.
이런 역사적 무대는 이른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언론 매체, 미래 없는 정치가, 모든 사람들을 이익만을 추구하게끔 몰아가는 세계 경제 시스템에 의해 망쳐졌습니다. 지금 세상은 쇼핑센터로 가득 찼잖아요.
하지만 역사는 이어지고 있고 싸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이 사실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떤 한 사회의 몸뚱이를 보여 주는 책이에요. 그 몸뚱이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고, 현재의 여러 목소리를 담고 있고, 또 미래를 내다보고 있어요. 이 책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 몸뚱이 속으로 들어가 핏줄도 보고 신체 기관들도 볼 수 있어요.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보는 거죠.
이제 더 이상 역사적 무대는 없어요.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도 않을 거예요. 이목을 끄는 사람도 없어요. 대신에 세대를 뛰어넘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함께 공감하고 인내하는 생생한 소통의 경험이 시장보다 오래 살아남길 바랄 따름이에요.
모든 세상이 이와 같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죠. 이 책이 바로 그런 이야기예요.
이 이야기가 나오게 힘쓴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로 해요.
2010년 7월 26일
프랑스 타냉주에서
존 버거
추천의 글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혹은 보지 못했던 모든 차별에 저항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독특하고도 이름다운 인도의 그림책 『버려진 자들의 영웅』을 처음 대하는 독자들이 받는 첫인상은 아마도 ‘낯설음’일 것입니다. 세계사 시간을 통해 간디나 네루의 이름 정도만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 책의 주인공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라는 인물의 잘 외워지지 않는 이름부터가 낯설 것이고, 게다가 서양의 그림책이나 만화책만 보아 온 탓에 아무런 구획도 없이 펼쳐진 특이하고 이국적인 그림 역시 우리들 눈에 잘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이 책과 멀어지려는 여러분께, 그럼에도 저는 잠시 이 책에서 30분만 눈을 떼지 말고 일단 읽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장담하건대 그리한다면, 여러분은 필시 마술처럼 한걸음씩 활짝 열린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차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일생을 이 차별에 맞서 싸웠던 한 위대한 인간에 관한 서사입니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게 이어져 온 것이지만, 인간사의 비극은 어쩌면 모두가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차별은 한마디로 인간성에 가해지는 공격이자 모욕입니다. 어떤 개인 또는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 다르다고 하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러한 차이에 대한 인식이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든 무언가를 독점하려는 소유욕에서 비롯된 것이든, 거기서 생겨난 차별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당하는 사람의 삶에 상처를 입힐 뿐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인간성도 망가뜨린다는 데 있습니다. 법이나 제도에 의한 차별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차별의식입니다. 사회 환경이 바뀌고 시간이 흘러도 그것은 모습을 바꾸어 가며 지속되는 법이지요.
우리와 다른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에 눈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살아 있는 몸뚱이와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그 속에 아로새겨진 상처와 만나는 것일 수도 있기에 저는 늘 습관처럼 낯선 여행 앞에서 주저하곤 합니다. ‘카스트’라는 인도의 고약한 신분 제도에서 최하층에 속하여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달리트’ 사람들의 이야기는 표현하기 힘든 아픔을 느끼게 합니다. 다가와서도 안 되고 다가가서도 안 되는, 손을 내서도 안 되고 손을 건네서도 안 되는 ‘불가촉(Untouchable)’의 존재가 무서운 맹수나 더러운 무엇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 첫 장 ‘물’에 나오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목이 말라도 우물에 갈 수 없는 달리트 아이 이야기 때문만이 아니라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심한 갈증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 목마름의 이유는, 생각해 보건대 이것이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예비’나 ‘잉여’로 구분되고, 커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언제라도 쓰다 버려질 수 있는 한국사회 이야기 말이지요. 우연히 읽게 된 이 낯선 선물이 지금 무척 고맙습니다.
홍세화
(서문, 추천의 글, 본문 ‘얼마전’ 편 전문)
---------------------------
작가 소개
그림 · 두르가바이 브얌, 수바시 브얌
인도의 전설적인 예술가 장가르 싱 시얌의 제자로, 곤드족 전통 예술인 파르단 곤드 예술을 이어 가고 있다. 두르가바이는 어린이 그림책 『나무들의 밤 생활The Night of the Trees』로 2008년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수바시는 빼어난 조각가이며 여러 매체와 그림 작업을 했다. 『버려진 자들의 영웅』은 이 부부가 함께 작업한 첫 책이다. 기존 만화의 박스를 거부하고 ‘디그나’라는 구불구불한 경계선을 활용한 독창적인 그림으로 세계적으로 호평받았다.
글 · 스리비드야 나타라잔
인도 첸나이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캐나다의 킹스유니버시티칼리지에서 영어와 글쓰기를 가르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는 인도의 사회 문제를 다룬 『양파도 마늘도 아닌 것No Onions Nor Garlic』과 『춤 안 추기Undoing Dance』가 있다.
글 · S. 아난드
언론사 기자 생활을 하다 2003년 나바야나 출판사를 설립하고 인문·학술서, 시집을 출판하고 있다. 첫 책으로 암베드카르의 자서전 출판했을 만큼 암베드카르의 반(反) 카스트 정책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 『버려진 자들의 영웅』의 글을 쓰고 디자인을 맡았다.
---------------------------
역자 소개
정성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어린이, 소설, 인문 기획 편집 번역 일을 하면서 즐겁게 책을 만들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아기양 울리의 저녁 산책』『피터의 안경』 『백다섯 명의 오케스트라』 『지렁이가 맛있어!』 『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공역) 등이 있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