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아름다운 남도에서 움튼 시대정신
몇 해 전 여름, 천운당天運堂 상원대종사尙遠大宗師의 다비식이 치러진 두륜산 대흥사에 다녀왔다. 연화대는 일주문 곁에 마련되었고 영결식은 절마당에서 엄수됐다. 영결식장에서 연화대까지는 겨우 300미터 남짓한 거리여서 식이 끝나자마자 만장 행렬이 이어진 듯 만 듯, 순식간에 연화대는 불길에 휩싸였다. 해거름이 가까워오자 불길이 사그라지는 연화대 주위에는 대여섯 스님들의 독송 소리만 텅 빈 하늘에 울려 퍼졌다. 모든 생각을 그친 채 망연히 연화대 주변을 오가던 나는 퍼뜩 놀라 걸음을 멈췄다. 일주문에서 부도전浮屠殿으로 이어지는 길섶에 듬성듬성 치자꽃이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폐사가 된 원주 거돈사에 머물며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했던 원공국사圓空國師 지종(930~1018)은 수행할 당시 담복 향기 말고는 맡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을 떠올리며 나 또한 치자꽃 향기를 흠씬 들이마시려고 이 꽃 저 꽃 옮겨다니며 코를 들이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 시간 남짓, 짙은 치자꽃 향기에 취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공부방으로 돌아왔다. 먼 길이었지만 꽃향기 덕분인지 몸은 가벼웠고 마음마저 경쾌해질 만큼 행복했다.
전라남도에 다녀올 때면 몸과 마음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행복한 순간들로 충만해지곤 했다. 걸음을 나눴던 장소가 온전한 절집이거나 피폐한 폐사지여도 상관없는 일이다. 드문 경우지만 그 장소가 아름답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깃들어 살았던 사람들조차 아름답지 않았던 곳은 없다. 이 책에 실린 아홉 군데의 폐사지들 거의가 그렇다. 스스로 빼어난 풍광을 뽐내는 곳이 있었는가 하면 가슴 아플 정도로 피폐한 모습인 곳들도 있다. 하지만 그 어디라도 그곳에 깃들었던 스님들까지 아름답지 않은 곳은 없다. 그들이 남긴 말 한마디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가 지극히 아름다워 되뇌며 흉내 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더구나 자연이 아름다운 곳에 그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스님들까지 함께 머문 곳들도 있었으니, 그런 곳에 다녀온 날이면 벅찬 가슴을 달래기가 만만찮았다.
그중 선종禪宗을 태동시킨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사찰들이 폐사지로 남지 않고 온전한 절집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은 인상적이다. 가지산문迦智山門인 장흥 보림사와 동리산문桐裡山門인 곡성 태안사가 전라남도에 소재한 구산선문 사찰이다. 두 곳 모두 1980년대와 1990년대 들어 중창불사를 일으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이는 강원도나 충청도의 구산선문 사찰들이 폐사지가 되어버린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전라남도는 나말여초에 구산선문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친 지역으로 이곳의 완도 청해진을 통해 선종불교가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또한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선종과 교종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회통하려는 결사結社운동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 오대사의 수정결사水精結社와 널리 알려진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의 정혜결사定慧結社, 그리고 강진 만덕산의 백련결사白蓮結社가 그것이다. 물론 세 곳 모두 같은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그중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혜결사는 선종과 교종을 아우르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주창한 시대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사운동이 모두 전라남도 땅에서 이루어졌거나 꽃을 피웠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때 유불을 가리지 않고 결사에 참가한 고려의 유자儒者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선비이자 정치가들이었다. 이들은 수선사나 백련사에 입사하기는 했으나 개경과는 멀리 떨어진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실제로 사찰에서 수행을 하는 적극적인 참여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태동된 또 하나의 흐름이 고려 전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거사불교居士佛敎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두륜산 대흥사를 중심으로 불유동원佛儒同原의 사상들이 확산되기 시작하는 독특한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전라남도가 중앙정부와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가능했던 일로 유자들의 유배가 잦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대흥사를 중심으로 수행을 하던 스님들은 선종보다는 교종에 뜻을 두고 있었다. 당시 스님들은 하안거와 동안거 시기에도 참선에 들지 않고 안거를 하며 화엄 강의를 90일 동안 이어가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화엄 수행에 매진하던 스님들과 유배 온 유자들은 서로 사상을 교섭하는가 하면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스님들이 유가의 경전에 매료되는가 하면 유자들 중 불가에 귀의하는 이들도 생겨나곤 했다. 이는 당시 지식사회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전라남도 특히 해남을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변화는 전라남도가 한반도에 새로운 사상을 전개하는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말여초에 완도를 중심으로 선종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기존의 교종과는 다른 새로운 사상을 진작시켰는가 하면, 고려시대에는 불교 자체로서 선교 양종兩宗의 회통을 꾀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또 조선 후기에는 대흥사를 중심으로 선종과 교종을 구분하지 않고 둘 다를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유교와의 교류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기존 사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신선한 계기가 되었다. 전라남도의 폐사지를 거닐며 되새겨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신선한 시대정신이다.
남도가 이렇듯 긴 세월 동안 시대정신이 움튼 특별한 곳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지역민들의 호방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리적인 조건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남도는 불교문화가 활발히 꽃을 피우던 통일신라시대부터 중앙정부인 경주와는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고려의 개경, 조선의 한양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 사정거리 안에 단 한 차례도 있지 않았다. 물론 그 때문에 경제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낙후되었지만 오히려 사상은 분방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불교사상은 물론 불교미술 또한 여타 지역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기존 질서와는 다른 불교문화는 우리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단비와도 같은 존재다. 그렇기에 남도는 아름답다.
2012년 봄,
무빙재無憑齋에서 이지누
1장
진도 금골산 토굴터
│
귀양살이 선비의 쓸쓸한 암자순례
새벽 하늘에 피어난 하얀 꽃
사람들이 입을 모아 남도로 가는 길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남도는 ‘공사중’이었다. 뻥 뚫린 고속도로 덕분에 진도에 다다르는 물리적인 시간은 분명 줄어들었다. 하지만 마음의 시간만큼은 줄지 않았다. 여전히 멀기만 한 그곳, 진도의 금골산에 오르기 위해 겨울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던 적이 있다.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이 빼곡하게 쏟아지던 눈을 맞으며 진도의 겨울을 걸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황홀한 노을에 취해 짙은 구름이 노을의 끝자락을 삼킬 때까지 한덩이 바위라도 된 양 자리를 지켰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들썩이는 엉덩이와 드잡이라도 하듯 실랑이를 벌이며 봄을 기다렸다. 논틀밭틀에 가득 피었을 보랏빛 자운영이 빚어내는 황홀한 정경을 떠올리며 말이다. 막 배동 선 청보리가 일렁거리는 모습도 눈에 밟혔다. 결국 아지랑이가 남기嵐氣처럼 대지를 뒤덮은 날, 목포를 지나 강진 언저리로 달려갔다.
길섶부터 산기슭까지 보리밭은 흔해 빠졌다. 때마침 한더미의 바람이 배동이 서기 시작한 보리를 희롱하며 지나가자 묘한 소리가 뒤따랐다. 귀 기울여 들으니 저희들끼리 서로 몸을 부딪는 소리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몸짓이나 동작을 머금고 있지 않던가. 보리밭도 마찬가지다. 보리밭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신기루가 펼쳐지는 것같이 황홀했다. 청보리가 은빛 물결을 이루었다가 금세 푸른 물결이 되곤 했다. 그 아름다운 정경은 나 자신이 수년 동안 두타행을 이어오는 순례자라는 사실도 잊게 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보리밭에 취한 것도 잠시, 넋을 잃은 돌장승이 된 것처럼 논틀에 우뚝 서버렸다. 발걸음이 돌덩이처럼 천근만근이 되어 도무지 뗄 수가 없었다. 그 까닭은 청보리와 바람의 유희가 자아내는 고혹적인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보리밭을 거니는 내 앞의 논두둑에 지천으로 피어난 보랏빛 자운영 때문이다.
참 아름다웠다. 그것 말고 눈앞에 펼쳐졌던 정경을 달리 표현할 문장력이 내게는 없다. 더구나 그 정경은 다른 미사여구로 치장할 필요조차 없이 빼어났다. 이미 지나칠 만큼 아름다운데 그 이상 형용할 무엇이 더 필요할까. 군더더기 같은 감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 또한 무슨 소용일까. 무량한 햇살은 산하대지에 맑게 부서지고 투박한 자태로 유혹하는 자운영 그리고 갖은 몸짓으로 일렁대는 청보리가 펼쳐지지 않았는가. 그때 알았다. 옛사람들이 툭하면 ‘풍경에 취한다’고 했던 까닭을 말이다. 그토록 흠씬 남도의 봄에 젖어버렸는데 어찌 절터로 향하는 걸음을 서붓서붓 뗄 수 있었겠는가. 그저 논두둑을 미친 듯이 쏘다녔을 뿐, 흥에 겨운 걸음을 절터가 있는 진도를 향해 성큼 옮기지 못했다.
미필적 고의의 냄새가 진하게 풍겼지만 기어코 진도를 코앞에 두고 하룻밤을 묵고 말았으니, 만행卍行이 더디고 더딘 만행漫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만행卍行이 만행漫行이며, 만행漫行 또한 만행卍行이다. 내 안의 부처를 찾아가는 길에 서두를 일이 무엇이겠는가. 운이 따라 내가 부처를 이루어 법어를 한다면, 오늘 마주한 아름다운 남도의 봄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불보살들과 신장들까지 전각에서 걸어 나오지는 않을까. 꽃길을 걷다가 저마다 마음에 맞는 양지뜸에 우뚝 서거나 큰 바위로 들어가 머물면서, 산하대지와 들판을 바라보는 석불상이나 마애불상이 되지는 않을까. 터무니없는 허튼 생각이 끝모르고 이어질 만큼 아름다운 남도가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튿날, 머뭇거린 만큼 서둘렀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헤치고 금골산 정상에 오르자 굼뜬 태양이 그때서야 먼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바다에서 불어온 거친 바람이 하늘의 먼지를 씻어내고 있었던 것인가. 하늘이 맑아질수록 새벽노을은 더욱 붉게 타올랐다가 일순간에 스러졌다. 그날 모질게 불어대던 바람을 정상에서 돌계단을 따라 내려간 굴속에서 피했다. 산 정상부는 온통 바위투성이었고 군데군데 움푹하게 파여서 크고 작은 자연굴을 만들어놓은 기묘한 모습이다. 내가 머물렀던 굴은 깊숙하지 않고 움푹하게 파인 정도일 뿐이어서 굴이라고 하기에도 마땅찮고, 또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곳에도 바위에 잇대어 전각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흔적이라고는 겨우 바닥에 뚫린 둥근 구멍 하나가 전부다. 짐작컨대 흔히 생각하는 금당金堂과 같이 버젓한 전각이 아니라 비바람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의 움막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옹색한 그곳에는 나만 바람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처님 한 분이 바위에 덩그마니 새겨진 채, 바다에서 곧추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해풍은 거칠었지만 차갑지는 않았다.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 벽에 부딪치고 그 아래 웅크리고 있는 내게로 다가올 때쯤에는 오히려 훈훈하기까지 했다. 그 바람을 맞으며 무작정 앉아 있었다. 비록 야트막한 산이지만 수직에 가까운 경사여서 저 아래는 까마득하게 보이고 고개를 돌리면 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왔으니, 그 어느 곳에 또 이런 자리가 있을까 싶어 쉽사리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렇게 하루를 노닐다가 떠나온 그곳으로 다시 가는 지금은 늦가을이다. 여전히 새벽이슬조차 마르지 않은 시간, 진도 읍내는 짙은 안개에 잠겨 있고 밤새 차창에 내려앉은 안개는 호된 추위에 시달려 꽁꽁 얼어 있었다. 날씨 때문일까, 아니면 어제 치러진 진도씻김굿의 탁월한 전승자였던 무형문화재 제72호 고故 박병천 선생의 장례식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때문일까. 내 마음 또한 차창처럼 얼어붙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박 선생의 구성지면서도 기품 넘치던 소리와 북춤은 이제 더 이상 듣고 볼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컸다. 종일 장례 행렬을 뒤따르며 처연해졌던 마음은 밤이 지났음에도 추슬러지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해장국 국물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으며 김밥 두 줄까지 챙겨서 산으로 향했다.
안개 자욱한 길을 달려 금골산 아래에 다다르자 곧추 선 바위 벽이 앞에 있어야 하건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 아래는 안개가 더욱 짙어 아예 산을 삼켜버린 것 같았다. 더구나 먹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짙은 어둠마저 더하니 어디가 어디인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다. 저어하며 선뜻 산으로 들어서기를 머뭇거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마주 보이는 첨찰산의 능선이 벌건 새벽노을로 달아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산길에 들어섰다. 길은 온통 감장 물감을 풀어놓은 듯, 멀고 가까운 것은 물론 높고 낮은 것조차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엉금엉금, 10분이나 걸었을까. 큰 굽이를 돌아서다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삼키며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순간 가슴은 헐떡거리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벅차오르는 가슴에 환하게 열려버린 동공은 닫히지 않았고 마치 상고대를 뒤집어쓴 한 그루 깡마른 나무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꼼짝도 하지 못했다. 푸른 기운 짙은 새벽하늘에 붉다 못해 하얗게 타버린 한 송이 꽃이 피어 있었던 것이다. 탐스러운 백련白蓮이나 덩치 큰 모란보다도 더 큰 송이로 피어 있는 그것은, 보름달이었다.
등 뒤로는 붉은 새벽노을이 타오르고 눈앞에는 둥근 보름달이 하얗게 비추고 있으니, 수미산의 새벽이 이랬을까, 무릉도원의 새벽이 이럴까. 난데없이 맞닥뜨린 환희로운 정경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자, 그 누구이겠는가. 절로 마음이 흔연해 나도 모르게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순간 감사하다는 마음이 불끈 치솟았다. 부처님, 그가 아니었다면 어찌 순례자의 발길이 이 시간, 이곳에 닿았을까 싶었다. 그러나 빤히 바라보지는 못했다. 하얀 달을 바라보고 있자면 등 뒤의 새벽노을이 궁금하고, 그곳으로 고개 돌리면 하얀 함박꽃처럼 피어 있는 달이 이내 기울고 말 것 같아서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
(들어가는 글,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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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지누
한국 문화를 섬세한 눈으로 톺아보며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하며 불교문화를 익히기 시작했으며, 1992년에 발간된 《나말여초의 선종사상사 연구》(이론과 실천, 추만호)에 사진작업을 했다. 그리고 퇴옹 성철스님 다비식을 시작으로 지금껏 큰 스님들의 다비식을 기록해 오고 있다. 2001년에는 한국 문화를 깊이 있게 다룬 계간지인 《디새집》(열림원)의 편집인으로써 창간을 주도했다. 그 후 〈불교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지금은 나라 안 폐사지에 대한 기록은 물론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산재한 마애불의 기록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불교문화 외에 민통선 지역이나 비무장지대 그리고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조사와 사진기록을 하고 있으며, 이 땅의 순정한 민초들에 대한 작업도 이어 오고 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샘터),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호미), 《잃어버린 풍경 1.2》(호미), 《이지누의 집 이야기》(삼인), 《관독일기》(호미)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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