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우리는 왜
자유주의를
경계해야
하는가?
한국에는 자유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나쁘지만 자유주의는 좋은 것이란 식의 인식이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 거죠. 이른바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분들은 자신들이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자유주의 혹은 합리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이종태 이제 2012년으로 ‘전 국민 성공 시대’를 구호로 내걸고 집권했던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끝납니다. 저는 요즘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지지 연설에 나왔던 어떤 청년이 자꾸 떠오릅니다. 그 청년, 집안이 어려운데 몇 년째 취업도 못하고 구직 활동만 하고 있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죠. “살려 주이소.” 정말 가슴이 찡했습니다.
저는 요즘 궁금해집니다. 그 청년은 지난 4년 동안의 이명박 정부와 한국 사회, 그리고 자신의 당시 선택을 지금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청년 실업 문제 역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동안 경제 성장률이 3퍼센트 남짓한 것을 보면 이른바 파이도 그렇게 커진 게 아니죠. 말하자면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병폐들을 전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장하준, 정승일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두 분은 지난 2005년 『쾌도난마 한국경제』라는 대담집을 냈죠. 그 책에서 노무현 정부를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규정하고, 다각도로 비판했습니다. 한국 민주화 운동 세력의 전통적 교리였던 ‘재벌 해체’에 대해서도 ‘국제 투기 자본의 논리에 놀아나 우리 경제를 점점 더 수렁에 빠뜨릴 것’이라고 주장했고요. 심지어 극악한 독재자인 데다가 한국 경제를 망쳤고 지금도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받아들여지는 박정희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평가를 요구했습니다. 또 당시 분위기에서는 뜬금없어 보였던 복지국가를 한국 경제의 대안으로 제시했죠. 이는 어떻게 보면 지난 민주 정부와 민주화 세력의 사회관 역사관 경제관에 대한 총체적 비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컨대 이명박 정부는 이른바 우파 시장주의 정책으로 우리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는데 지난 4년이 어땠나요? 지금도 예전과 동일하게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폈다고 평가하시나요? 사실 ‘안티 이명박’으로 뭉친 야권에서는 요즘 ‘노무현 복고주의’라 일컬어도 무리가 아닌, 상당히 강력한 흐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요즘 여야에서 발표하고 있는 경제 정책은 어떻게 판단하시는지요? 오늘은 이런 문제들을 논의하면서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 자리를 만들고자 합니다. 각 주제들에 대해서는 세부적으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테니 여기서는 개괄적인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인 소회도 좋고요.
장하준 2005년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우리는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대로 가다 보면 양극화와 경제 기반의 와해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부분은 2007년 말 이명박 정부의 집권으로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고 생각해요. 빈부 격차와 실업을 견디지 못한 국민이 결국 이명박 후보에게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2002년과 정반대의 선택을 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원조 신자유주의자’였어요. 대규모 감세와 공기업 민영화 등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변혁을 감행하려 했거나 감행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2008년 가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분위기가 급속히 바뀌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해 온 시장주의 개혁에 대해 국민이 문제점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고, 그게 2010년 6월 지방 선거에서 야권의 압승으로 폭발한 것 같아요. 그해 10월 서울에 왔다가 복지가 다음 대선의 화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2005년에 복지국가를 거론할 때만 해도 ‘미친 거 아니야?’란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정승일 2005년 당시 우리는 노무현 정부는 진보가 아니라고 비판했습니다. 당시 보수 쪽에서는 노무현 정부를 ‘좌파’이자 ‘종북 빨갱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노무현 정부의 재벌 및 금융 시장 개혁 등은 좌파는커녕 신자유주의적인 보수 개혁에 가까웠습니다. 예컨대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추진되어 온 재벌 개혁은 돈 많고 권력 가진 자들을 때린다는 측면에서 민주화 운동 같은 외양을 띠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노동자와 국민을 위한 게 아니라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 자본의 장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시장주의다
이종태 두 분은 재벌 혹은 그룹이라 하는 기업집단을 두고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예컨대 한국에서 기업집단의 대표 사례는 삼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건희라는 재벌 총수가 ‘삼성’이라는 이름 아래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물산 같은 개별 기업들을 통제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이런 기업들은 금융 지원이나 기술 개발 등을 통해 서로 도우며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요. 그런데 이건희 가문은 삼성그룹의 실소유주가 아니에요. 그룹 산하 기업들의 주식을 모두 모았을 때 그중 이건희 가문의 소유는 3퍼센트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재산인 것처럼 계열사 전체를 지배합니다. 이른바 소유와 지배의 불일치라는 건데, 이런 특권을 지키기 위해 저지른 불법 행위도 수없이 폭로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민주화 운동 세력이 주장하는 ‘재벌 개혁’ 또는 ‘재벌 해체’는 결국 기업집단에서 개별 기업들을 떼어 내자는 겁니다. 개별 기업들 간의 상호 협력도 금지하고요. 그런데 두 분은 재벌, 즉 기업집단에서 분리된 기업은 월스트리트 금융 자본의 노리개로 전락해 노동자와 국민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거라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정승일 김대중 정부가 이른바 4대 개혁이라 해서 금융 개혁, 재벌 개혁, 공공 부문 개혁, 노동 시장 개혁을 추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가 집권하면서 공기업 민영화와 노동 시장 유연화는 약간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나 금융 개혁과 재벌 개혁은 그대로 추진했죠. 노동 운동 쪽은 노동 시장 유연화나 공기업 민영화는 그간 신자유주의라고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만 재벌이나 금융 문제 등에는 제대로 된 관점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재벌 개혁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노동자 시민들에게 이로운 개혁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테니 여기서는 일단 접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정책들을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하니까 경제학계의 민주화 운동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분들로부터 비판이 적지 않았습니다. 재벌의 앞잡이는 물론이고 심지어 국가사회주의자, 즉 ‘나치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농담 비슷하게 아주 재미있는 발언을 했습니다. 북한 지원이나 양극화, 사회적 약자 배려를 말하면 ‘좌파’라 하고, 파병과 FTA 등을 말하면 진보 진영에서 ‘신자유주의’라 하니, 그럼 우리는 ‘좌파 신자유주의’란 말이냐고 한 겁니다. 물론 자신이 처한 모순적인 상황을 농반진반으로 비꼬아 말한 거지만 어쨌거나 굉장히 정확한 규정이라고 봅니다.
장하준 저는 농담이 아니었다고 봐요. 노 전 대통령이 학자는 아니었지만 사물을 통찰하는 직관력은 보통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딱 잘라 정리할 수 있는 거죠.
정승일 한국에는 자유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나쁘지만 자유주의는 좋은 것이란 식의 인식이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 거죠. 앞으로 많이 거론하겠지만, 이른바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분들은 자신들이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자유주의 혹은 합리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자, 사회적 자유주의자라는 말도 하더군요. 그러나 우리가 볼 때 그분들의 주장은 대부분 한국의 노동자, 시민이 아니라 국내외 금융 자본을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민주화 세력이 집권하더라도 이런 정책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고 그 경우 우리의 미래는 암울해질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런 점이 이 책을 내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장하준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시장주의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을 둘러싸고 혼선이 빚어지는 이유는 미국 지식인 사회와 정계의 어법 때문이에요. 유럽에서 사민주의, 즉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정책들을 미국인들은 ‘리버럴(liberal)’이라고 해요. 자유주의란 뜻이죠. 미국은 사회주의(socialism)라는 용어의 이미지가 워낙 좋지 않아 사회민주주의 정책마저도 그냥 애매하게 리버럴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 때문에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는 한국에서도 자유주의와 진보를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 사용하는 어법은 좀 더 정확해요. 리버럴은 18~19세기 지주나 봉건 귀족 같은 특권 계급이 지배하던 이른바 앙시앵 레짐을 깨고 시장주의 질서를 형성하자고 했던 흐름을 가리키는 겁니다. 진보, 즉 사회주의 또는 사민주의는 이런 리버럴들이 만든 질서마저 바꾸자고 주장하는 세력이고요.
이종태 그런 사민주의 정책의 핵심이 복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두 분은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이미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대안 차원에서 복지국가를 내세운 바 있어요. 아주 이른 시기에 말이죠.
장하준 그때 우리가 말한 복지는 단순히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 생계나 잇게 해 주자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물론 그런 기초생활 보장도 포함하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기업의 혁신과 산업 구조 고도화를 위해서도 복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맥락에서 제시한 것이죠. 그런데도 당시에는 ‘미쳤다’는 소리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최근 거의 모든 분야의 지식인과 정치인이 복지를 말하는 걸 보면 정말 놀라워요.
정승일 사실 한국의 복지국가 담론을 본격화했다고 할 수 있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결성에도 『쾌도난마 한국경제』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 책을 읽은 사회복지 운동가들이 경제학 쪽에서 복지국가로 접근했던 우리 같은 일군의 연구자들을 찾아와 뭔가 만들자고 해서 결성된 것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거든요.
각설하고 아무튼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뚱맞게 뭔 복지국가냐’ 했어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이후 분위기가 달라지더군요. 이명박 정부, 사실 처음에는 ‘100퍼센트 신자유주의 광고 모델’ 같았잖아요.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한 노무현 정부도 감세를 하긴 했지만 그 규모가 크진 않았어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미국 공화당의 레이건이나 영국 보수당의 대처를 흉내라도 내듯이 그들의 정책을 그대로 수용했고 엄청난 규모의 감세도 단행했습니다. 그 반동으로 복지국가 논의가 시민 사회에 확산된 감이 있어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의 민주주의 혁명이 본격화된 것처럼 말이에요.
장하준 이명박 정부가 전선을 명확하게 해 준 거죠.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시민들의 생활을 그리 윤택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게 극명하게 드러난 겁니다.
(…중략…)
이제는 정말
불판을 갈아야 할 때다
이종태 다시 주제를 바꾸겠습니다. 2012년은 대선 등 권력 구조 개편이 이루어지는 해입니다. 또 현재 야권은 ‘안티 이명박’으로 뭉치는 중이고 정권 교체의 가능성도 상당히 크다고 봅니다. 그런데 어떨까요? 만약 야권이 집권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경제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정승일 이명박 정부에 시민들이 잔뜩 분노한 상태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대립도 격렬하게 진행 중입니다. 이런 시기에는 분노와 대립의 본질이 묻힐 위험이 커요. 제가 보기에는 지금의 여야가 내놓는 대안들도 사실은 상당 부분 신자유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하준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지만 이명박 정부는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기본적으로 모두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진해 온 게 사실이에요. 시민들이 이런 측면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안티 이명박’이 노무현 시대로 회귀함을 의미한다면 정말 허무한 일 아닐까요? 더욱이 안티 이명박 진영이 죽은 박정희에 매달려 있는 것도 문제예요. 최근 그분들이 쓴 책을 보니까 ‘모든 문제는 박정희 때문’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다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박정희는 30년 전에 죽었고 그동안 세상이 몇 차례나 바뀌었습니다. 그런데도 책임을 죽은 박정희에게 계속 전가한다면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물론 그 나름의 시대적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보를 양보해도 그때가 태평성대는 아니었어요. 국민이 이명박 대통령을 뽑은 이유가 뭡니까? 지금 와서 그 시대를 미화하는 건 곤란합니다. 심지어 ‘노무현 FTA는 좋은 FTA이고, 이명박 FTA는 나쁜 FTA’라고 하는 분까지 있더군요. 노 전 대통령의 정책으로 다시 돌아가 예전에 확실히 하지 못했던 종부세나 재벌 개혁을 완수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환상을 조장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진보 정권을 창출했다 하더라도 다시 실망해 그다음에는 또 우파 신자유주의에 표를 던지는 악순환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아요. 이런 악순환을 반드시 끊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주장이고 이 책의 목적입니다.
정승일 노회찬 통합진보당 공동 대변인이 예전에 ‘이제 불판을 갈자’라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어요. 저도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우파 신자유주의가 마음에 안 든다고 좌파 신자유주의로 가면서 이를 경제 민주화로 포장하는 일은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이젠 정말 불판을 갈아야 합니다.
이종태 저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어느 정도 공감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전에는 그야말로 신자유주의가 지구적 대세였어요. 그러니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통령으로서는 그런 대세를 거스르긴 힘들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노 전 대통령의 한미 FTA 추진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는 상황이 많이 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승일 맞아요. 『쾌도난마 한국경제』가 나왔던 2005년 즈음에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한국 혼자 신자유주의를 안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세계가 신자유주의 시스템으로 들어갔고, 또 잘 굴러가고 있는데….’ 그러나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는 실제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판갈이가 필요한 시기가 온 거죠.
이종태 더욱이 금융 위기가 터진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최근 들어서는 오히려 금융 불안이 더 심화되는 것 같은 국면입니다.
정승일 지금이 전 세계가 새로운 시스템을 모색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환기라는 게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 상황이라는 거죠. 지금부터 계속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화하다 보면 나치 같은 정치 세력이 나타날 수도 있어요.
장하준 유럽에서도 나치까지는 아니지만 극우 민족주의 정당들이 득세해 시민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더군요.
10년 앞을 내다보고
99퍼센트가 나서자!
이종태 그런 면에서 보자면 ‘월스트리트 점령’이나 ‘런던 증권거래소 점령’ 운동처럼 신자유주의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대중 운동이 일어나고 있어 다행입니다.
장하준 금융 위기가 터졌을 때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심각했던 곳이 미국과 영국이었어요. 그런데 시민들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대공황 때보다 피해 규모가 훨씬 컸지만 당시와 달리 현재는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도 최소한의 복지 제도는 실시하고 있으니 당장 굶어야 하는 상황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금융 위기 초기에는 각국 정부가 나름대로 신속하게 대처했습니다. 그동안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케인스 책을 꺼내 먼지를 털어 내고 경기 부양을 하다 보니 2009~2010년쯤에는 다행히 회복기로 들어가나 싶을 정도였죠. 그런데 다시 경제 위기가 불거지면서 시민들이 시스템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겁니다.
정승일 이번 금융 위기의 주범은 일반 시민이 아니라 미국 월스트리트 등에 있는 탐욕스러운 금융 자본이었어요. 이런 금융 자본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어떤 비리를 저질러 금융 위기를 촉발했는지도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상세히 알려졌고요. 그럼에도 각국 정부는 국민의 세금을 퍼부어 금융 기관들을 구해 주었고, 심지어 책임자들에게 법률적 제재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정부 지원금을 받은 금융 기관들이 CEO와 직원들에게 무려 수십억 달러를 보너스로 지급해 시민들을 격분하게 만들었죠.
장하준 게다가 금융 기관들은 자기네가 받은 구제 금융 때문에 재정 적자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정부에 국가 신용 등급을 떨어뜨리겠다고 위협하며 복지 지출을 깎으라고 했어요. 시민들이 이런 부당한 시스템의 심장부에 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묻기로 한 것이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아큐파이(occupy)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최근에 ‘런던증권거래소 점령’ 시위대에게 강연을 했어요. 어떤 분들은 점령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반(反)자본주의자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대다수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이념적으로 상당히 느슨한 집단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나키스트들부터 시작해서 ‘나도 금융인이지만 바꿔야 할 게 많다’는 사람까지 구성원들이 다양하더군요. 시위대가 점거하고 있는 런던 외곽의 세인트폴 성당 앞에서 강연을 했는데, 질문을 30개 정도 받았어요. 그러다 보면 질문자들 성향을 대충 알 수 있잖아요. 제가 보기에 참석자 중 20~30퍼센트는 반자본주의적이지만 나머지는 개혁론자들이었어요.
이렇게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만큼 노선이 불명확하고 조직도 느슨합니다. 그래서 아큐파이 운동에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분들도 있어요. 맞아요. 아큐파이 운동만으로 뭔가를 이루기는 힘들겠지요. 그러나 주류 언론이 복지 때문에 금융 위기가 터졌다며 여론을 호도하고, 그게 대중에게 먹히는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뛰쳐나와 ‘꼭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라고 하는 분위기를 계속 살리고 있다는 점은 높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종태 저도 ‘아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을 취재한 적이 있는데, 참 재미있는 게 이 친구들의 목적 자체가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거예요. 심지어는 인터넷 투표로 목표를 정하더군요. 그 목록을 보고 저는 조금 실망했을 정도로 반자본주의 성향이 별로 강하지 않아요. 표가 많이 나온 목표를 보면 ‘그램 리치 블라일리법 폐지’, 금융 범죄자 처벌, 기업의 선거 자금 지원 금지, 공정 과세, 로비 규제 등이었는데 정말 온건하지 않습니까? 이색적인 주장으로는 대마초 단속 중단이 있더군요. (모두 웃음)
정승일 지금까지 장하준 교수나 스티글리츠 등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학자들이 학문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의 문제점과 대안적 경제 질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나 대중적인 차원에서는 큰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죠. 그런데 아큐파이 운동을 보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문제를 실감하고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하는 것 같아 매우 반갑습니다.
이 신자유주의라는 시스템은 1970년대에 싹을 틔웠고 1980년대에 만개해 무려 30년 동안 세계를 강고하게 지배해 왔습니다. 심지어 이 시스템은 한국에서 보듯이 정신적으로 보수파뿐 아니라 개혁적 지식인들까지 포섭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지진 않을 거예요. 따라서 한국에 바람직한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이후 10년을 보고 새로운 힘을 결집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종태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지금은 세계적인 과도기다. 과도기의 역사는 어느 쪽으로 진행될지 모른다. 그러나 바람직한 변화를 일으키려면 신자유주의의 피해자인 99퍼센트의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 99퍼센트를 위해 지금부터 이야기를 풀어 보겠다.’ 그러면 이미 화제가 런던과 뉴욕의 아큐파이 운동으로 흘러갔으니, 세계 경제에서 시작해 한국 경제로 논의를 좁혀 가는 식으로 분석하고, 그다음 두 분의 대안을 듣는 순서로 진행하겠습니다.
(시작하며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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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하준
경제학과를 나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 이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3년 신고전파 경제학의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뮈르달 상을, 2005년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예프 상을 최연소로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경제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주요 저서로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사다리 걷어차기』 『쾌도난마 한국경제』(공저) 『국가의 역할』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공저) 『개혁의 덫』 등이 있다.
정승일
대학에서 물리학과를 다니다 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1991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 훔볼트 대학 사회과학부에서 석사 학위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정치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베를린사회과학연구소와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금융경제연구소,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등에 근무했으며, 현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 및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Crisis and Restructuring in East Asia』 『쾌도난마 한국경제』(공저) 『역동적 복지국가의 길』(공저) 등이 있다.
이종태
영문학과를 나온 뒤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매일신문』에 입사, 경제부와 사회부를 거쳤으며, 2001년엔 ‘한국전 직후 민간인 학살’ 관련 기사로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2000년 3월 진보적 시사 종합지인 월간 『말』로 직장을 옮겨 편집장을 지내고,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현재 『시사IN』에서 경제?국제팀장을 맡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쾌도난마 한국경제』(공저) 『국가의 역할』(공역)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공역)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공저) 『역동적 복지국가의 길』(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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