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그 순간, 역사가 움직였다
소금을 만들러 가자
간디의 인생은 ‘조국 인도의 독립에 모든 것을 바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그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첫머리에서 언급했던 ‘소금 행진’입니다.
때마침 그 시절 인도에서는 자와할랄 네루Javaharlal Nehru, 1889~1964와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 1897~1945 같은 젊은 리더들이 등장하고 독립을 향한 기운이 높아가고 있었습니다.
1929년 말에 인도 국민회의파Indian National Congress의 전국대회가 열렸고, 완전 독립을 쟁취하자는 결의안이 제출되었습니다. 모두들 “자, 이젠 승부다. 드디어 영국과 투쟁을 개시하자!”라며 전례 없던 독립 의지가 고조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간디가 “나는 해안까지 걸어가서 소금을 만들어야겠다”는 말을 꺼냈던 것입니다.
‘도대체 소금과 독립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하고 어쩌면 뜬금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네루를 비롯한 인도의 독립 지도자들도 간디의 느닷없는 엇박자에 맥이 쭉 빠지고 말았습니다. “저기 간디 씨, 잠깐만요. 그런 거 말고도 더 할 게 많이 있어요”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야말로 간디만이 할 수 있는 고도의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독립, 독립” 하고 다들 말은 쉽게 하지만, 그렇다면 식민지 지배의 어느 부분에 문제가 있으며 독립을 쟁취하는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등의 문제는, 민중들로서는 그리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소금’이었던 것입니다.
소금은 없으면 살 수 없는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게다가 소금은 자연이 내리는 혜택이고 어느 누구의 독점적인 소유물일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사람들은 그 소금을 영국인에게 독점당하는 바람에 비싼 돈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구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모순되고 억울한 일입니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다소 까다롭고 어려운 이론은 모를지라도, 이렇게 소금이라면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금을 내 손으로 만든다’는 것은 식민지 지배의 부조리함을 민중들에게 호소하기 위한, 일반 민중들에게는 아주 이해하기 쉬운 ‘상징’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수십만 명의 민중들이 참가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인도의 독립운동은 일부 엘리트만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까지 참여해서 싸우는 거대한 운동movement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금 행진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걷기’라는 행위입니다. 간디가 최소한의 물건만 지닌 채, 초라한 모습으로 홀로 걸어서 소금을 만들러 떠나는 광경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간디는 행동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민중의 가슴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신앙심에 호소하여 엄청난 지지를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인도 독립을 향한 발걸음은 1885년에 인도 국민회의파가 탄생했을 즈음에 시작해서 1947년까지 길고 긴 여정을 걸어왔는데, 인도의 독립운동에 항상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자국 내 종교 간의 대립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독립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하고 정체되기도 하는 등 몇 번이나 실패를 반복하게 됩니다.
광대한 인도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고 또 여러 언어가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말도 못하고 감정도 없는 한낱 바위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대립이었습니다. 힌두교 내부만 보더라도 지역이나 신분 등에 따라 다양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영국은 그런 인도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인도의 내부 분열을 부채질해서 독립을 이룰 수 없도록 교묘한 전략을 취해왔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분할 통치’입니다.
실제로 인도 내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첨예해졌습니다. 근대 이전의 인도 사회에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모두에게 성자숭배 등 서로 연결 고리가 있었고 이슬람 의례 속에서도 힌두적 요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지금도 일상생활 차원에서는 그러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융합적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사회 내에서도 힌두적인 카스트의 요소가 존재해서 양자가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국세國勢를 조사할 때 사람들에게 스스로 직접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를 하나씩 선택하도록 해서, 분리되지 않는 양자의 애매모호한 영역을 배제해나갔습니다. 이는 서양적 ‘종교’ 개념이 비非서양 세계에 도입될 즈음에 일어난 현상으로, 일본에서도 신도神道와 불교 사이에 유사한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많은 인도 사람들은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를 하나씩 고르라는 선택 행위에서 당혹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대체로 ‘힌두’라는 용어가 인더스 강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무슬림들이 붙인 타칭他稱이며, 당시에는 자기 자신이 ‘힌두’라는 자의식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힌두’를 ‘힌두이즘Hinduism’이라는 하나의 종교로 체계화한 것은, 사실 영국의 오리엔탈리스트Orientalist, 동양학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인도의 각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 실천보다는 《베다Veda》 같은 옛 전적에 힌두의 본질이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고전들을 열심히 수집하고 그 고전들의 체계를 세워서 ‘힌두교’라는 종교를 구축해나갔습니다.
근대 이전의 힌두교는 체계로 존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장(공간)’으로 존재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데, 광대한 인도에서는 각지의 의례 체계도 달랐고 신앙하는 신들도 다양했습니다. 또한 시대에 따라서도 그 신앙 양식은 크게 변화하고 있어서 지극히 다양한 신앙들이 느슨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전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동양학자들은 힌두를 시간적·공간적으로 모두 하나의 고정된 종교 체계로 통합하고, 그런 관념에서 인도 사회를 연역적으로 파악하려 했습니다. 요컨대 이론적으로만 따지는 책상물림이었던 셈입니다. 사회 실태에 입각해서 힌두를 인식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힌두라는 관념을 고전을 통해서 체계화하고 난 뒤에 그 체계를 현실에 투영시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양한 장면에서 ‘진정한 힌두의 전통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놓고 인도 사회 내부에서 갈등과 대립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도에서는 어느 한 인간이 체계가 잡힌 하나의 종교를 신앙하는 형태 그 자체가 새로운 현상이었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신앙의 차이를 둘러싸고 폭력적인 대립을 일으키는 사태는 별로 없었습니다. 물론 양자의 대립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특정한 사회 환경 내에서 집단적 문제가 발생했던 그런 성질의 것이었고 ‘힌두교’ 대 ‘이슬람교’와 같은 큰 종교적인 대립은 없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이 ‘힌두교’ 대 ‘이슬람교’라는 대립이 확대된 것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고 난 이후로, 이것이 차츰 인도의 분단이라는 심각한 사태로까지 발전해나갔습니다. 이는 실제로 1947년에 인도가 독립할 때에는 이슬람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파키스탄과의 분리 독립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지금도 이 두 나라는 대립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종교를 중시하는 간디에게 이러한 양자의 대립은 인도가 떠안은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종교 대립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그러나 종교적 행위를 통해 사람들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소금 행진에 대한 간디의 안목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소금을 만들기 위해서 한결같이 ‘길을 걷는’ 행위에는 힌두교이든 이슬람교도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특정 종교의 교의나 심벌을 사용하지 않고, 모두가 지지할 수 있는 종교 행위야말로 ‘길을 걷는다’는 ‘행行’이었던 것입니다. 종교적 대립을 초월해서 종교 행위를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간디가 목표로 했던 보편적 경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에 머물지 않고, 식민지 지배의 착취 구조를 겉으로 드러내어 정치적으로 민중을 자각시키는 것에도 성공했습니다. 간디는 탁월한 종교가였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정치가였던 것입니다. 이는 21세기의 정치를 고찰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레를 돌려라
간디의 특징적인 모습을 또 하나 든다면, ‘차르카charkha’라는 실 잣는 물레를 돌리는 사회적 운동을 시작했던 일일 것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여러 사진 중에서도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차르카를 돌리는 사진이 특히 유명한데, ‘간디’ 하면 바로 이 모습을 연상하는 분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본래 인도에서 제면製綿업은 중요한 산업이었고, 18세기까지 영국은 인도에서 수제手製 면포를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국 직물 공업이 활발해지자, 원료인 면사만 인도에서 싼값에 구입해 들여와서는 기계로 직조해 완성된 면 제품을 인도에 강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도의 제면 산업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간디는 영국산 면 제품 불매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영국산 양복이며 직물들을 불태우며 “우리 모두 함께 물레를 돌리고 손으로 직접 천을 짜자”고 호소하면서 스스로도 물레를 돌렸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면화를 기른다. 그런데도 왜 굳이 영국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천을 구입해서 나라의 부富를 유출시키는가? 내가 입을 옷은 내가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논리입니다. 이 면포 자급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21년이었습니다.
그는 근대를 역행하는 ‘기계에서 손으로’라는 이치를 역설했습니다. 그가 비판했던 것은 영국의 산업계뿐만 아니라, 기계에 의존하는 근대 사회 그 자체였습니다. 기계에 의존하고 점점 더 욕망을 자극하는 사회는, 인간이 욕망의 노예가 되는 사회라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우리(인도의 조상)는 치명적인 경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직업을 계속 이어왔습니다. 관행에 따라 대가를 받습니다. 우리가 기계 같은 물건을 발명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계와 같은 번거로운 것에 휘말리게 되면 인간은 노예로 변하고, 자신의 도덕을 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조상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은 깊이 고민했고 우리는 내 손과 발로 가능한 일들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손과 발을 쓰는 일이야말로 참된 행복이며, 바로 그것에 건강이 있는 뜻입니다.
―《힌두 스와라지》 중에서
그가 기계 자체를 부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애당초 ‘물레’도 기계이고, 모든 기계를 부정한다는 것은 근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간디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기계에 대해서 전부 다 비판적이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기계가 아니라 기계에 대한 광신에 반대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컨대 모든 것을 기계에 의존하고 모든 욕망을 기계의 발전을 통해 실현하려는 ‘광신’에 대해서, 간디는 날카로운 비판의 창끝을 겨누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물레 돌리는 작업을 중시했습니다.
물레를 돌리는 것은 원래 여성의 작업이지만, 남성인 간디가 솔선해서 나섰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본받아 마침내 수많은 가정에서 ‘탈카닥 탈카닥’ 물레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도 역시 종교적인 ‘수행’의 의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물레를 돌리는 것은 단순한 작업이지만, 그 단순 작업에 열중하는 동안에 못된 사념邪念이 걷히고 마음은 무심無心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간디는 물레 돌리기를 매일 빠뜨릴 수 없는 하루 일과로 삼았습니다. 그는 원탁회의에 출석하기 위해서 런던을 방문했을 때에도 빠듯한 일정에 수면 시간도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물레를 돌렸습니다. 간디에게 물레는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수행’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물론 수작업과 기계 작업은 효율과 속도 면에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대등하게 맞설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숙연한 행위가 근대 산업구조에 반격을 가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소금 행진’과 마찬가지로 서양의 지배에 저항하는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간디가 품고 있던 의문 가운데 ‘근대의 속도’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그는 “철도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라는 말을 꺼내기도 했고 “선한 것은 달팽이처럼 나아가는 것입니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간디는 근대 산업사회에 의문을 표시했고, 전통적인 농촌 사회의 이상적 모습에서 가치를 찾아냈습니다. 그중에서 그가 주목했던 것은 1년에 약 넉 달이나 되는 ‘농한기’입니다.
나 역시 인도 생활을 경험했지만, 인도의 더운 계절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더워서, 한낮에는 나무 그늘에서 한가롭게 쉬거나 방 안 통풍이 잘 되는 곳(내 경우에는 천장에 달린 선풍기 밑)에서 수다를 떨거나 책을 읽는 것이 일상입니다. 이런 여유 있고 느긋한 시간은, 가혹한 자연 조건이 인간에게 부여한 일종의 은혜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분망한 생활을 보내고 있노라면, 그 시절 한가로웠던 시간이 그립게 느껴지는 동시에 허둥지둥 지내는 지금의 일상이 얼마나 초라하고 궁상맞은 생활인지를 느끼게 합니다.
간디는 이런 ‘농한기’에 조용히 물레를 돌릴 것을 권했습니다.
“처마 밑이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탈카닥 탈카닥’ 물레를 돌리면서 차츰 무심 속으로 빠져듭니다.”
간디는 ‘근대의 속도’에서 떨어져나오는 시간의 흐름을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간 속에서 진정한 ‘아힘사不殺生, Ahimsa’이며 ‘샨티Santih, 평화, 마음의 평온’의 움이 싹튼다고 말했습니다.
나아가 물레를 돌리는 행위는 빈곤에 허덕이는 계층에게는 경제적인 수입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특히 농촌 여성들에게 물레는 매우 중요한 현금 수입을 확보해주는 수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차르카’라는 존재는,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운동의 상징인 동시에 수단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간디는 이처럼 친숙하면서도 누구나 다 실천할 수 있는 행위 속에서 현실적인 정치?경제적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고 더 나아가서는 심원한 사상을 온 세상으로 넓혀서 사람들에게 진리에 눈을 뜰 것을 호소하려 했습니다.
(제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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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나카지마 다케시 中島岳志
1975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 외국어대학교와 교토 대학 대학원 아시아?아프리카 지역 연구 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홋카이도 대학 공공정책대학원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남아시아 지역 연구, 근대 정치사상사를 주요 전공으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매년 아사히신문이 정치?경제?국제관계 분야에서 수준 높은 저서에 수여하는 오사라기지로상과 마이니치신문이 주관하여 인문학 서적으로서 작품성 있는 도서에 수여하는 아시아태평양상을 함께 수상한 《나카무라야의 보스》와 《힌두 내셔널리즘》 《인도의 시대》 《내셔널리즘과 종교》 《아사히 헤이고의 울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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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목
동서양의 고전, 근현대사 등 주로 문학, 역사,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소년의 눈물》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청춘을 읽는다》 《국가와 희생》 《교양, 모든 것의 시작》 《선이란 무엇인가》 《미녀란 무엇인가》 《국경을 넘는 방법》 《수집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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