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자들에게
지난 2008년 중국 홍콩에서 출판된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될 수 있게 되어 나는 너무 감격스럽고 기쁘다. 이 책에서 다루고자 했던 역사는 중국에서도 은폐된 부분이긴 하지만, 한국 독자들에게는 더욱더 생소한 것이기에 배경에 대한 약간의 소개가 필요하리라 본다.
1957년은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예사롭지 않은 한 해였다. 중국은 그 이전에, 1949~53년 국민경제 회복기와 1954~56년 사회주의 개조기를 겪었고 또 그 사이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이미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 골격을 갖추었지만, 수많은 모순들이 드러나 중국 사회에 쌓이게 되었다. 게다가 소련공산당 20차 대표대회의 스탈린주의 비판에서 시작된 국제적 규모의 사회주의 개혁운동, 특히 1956년 폴란드·헝가리 사건[반소련 민중운동]은 모두 중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첨예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정권을 잡고 있던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민주당파, 지식인, 청년학생들은 모두 이에 대해서 각자의 반응을 내보이게 되었다.
소련공산당 20차 대표대회 개최에 대해서, 마오쩌둥은 이것이 소련의 영향을 벗어나 국제 공산주의의 영도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였다. 때문에 그는 중국 내에서 자신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경제발전의 길을 가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였고, 아울러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이라는 과학 및 문화 발전 방침[쌍백 방침]을 제기하는 한편, “반反관료주의, 반종파주의, 반주관주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풍운동을 전개시켜, 각 민주당파와 지식인들이 당의 기풍을 정돈하는 것을 돕도록 하였다.
이후의 역사 발전은 마오쩌둥이 정풍운동을 발동시킨 목적이 중국공산당 집정 지위와 자신의 절대적 영도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음을 드러내 주게 된다. 마오쩌둥은 당과 그 자신의 통치를 위협하는 것이 민주당파와 ‘우파’ 지식인, 당내 반대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풍운동을 빌려 당내 관료와 반대파에게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우파를 폭로함으로써, 그의 웅대한 포부를 실현시키는 데 있어 장애물들을 한꺼번에 제거하는 데 용이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마오쩌둥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민주당파와 지식인들은 오히려, 마오쩌둥 본인을 포함한 중국공산당의 거듭되는 동원하에서 ‘자신의 견해를 맘껏 표명하자는 주장’大鳴大放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장기간 축적된 사회모순이 폭발한 것으로서, 정당에 대한 감독권과 언론의 자유, 비평 및 건의의 권리를 행사한 군중성을 띤 민주운동이라 할 수 있었다. 제기된 주된 요구사항은 헌법이 부여한 민주권리를 전적으로 이행하여, ‘헌법에 따른 통치’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과 공산당 지도하에서 각 민주당파의 연합집정을 전적으로 실행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주당파와 지식인이 자신의 주장에 소리를 높인 것과 동시에,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한 대학 캠퍼스에서도 학생민주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957년 5월 19일 베이징대학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민주의 벽’(즉 학교 담장에 의견서를 붙여 민주에 관한 자신의 요구를 제기하였다)을 만들게 된 것을 발단으로 신속하게 전국의 수많은 대학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이를 칭하여 ‘5·19민주운동’이라 하였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의의가 있었다. 하나는 “청년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사상해방을 쟁취한” 계몽운동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의 사회주의 민주정치운동을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사상운동이자 정치운동으로서, 이 두 방면은 모두 40년 전 베이징대학을 발원지로 한 ‘5·4’신문화운동과 학생운동의 ‘계몽’과 ‘민주’ 정신의 자각적 발양인 것이었다.
그러나 1957년 중국 대학생들 역시 시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받았던 교육 덕분에 당시 중국 대학생 대부분은 사회주의의 신봉자라고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스탈린주의를 비판한 소련공산당의 영향으로 인해, 대학생들의 관심과 사고는 온통 사회주의 자체의 개조와 변혁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5·19운동을 ‘사회주의 민주운동’이라고도 칭한다. 1957년 학생운동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 운동의 대표자인 린시링林希翎이 그 유명한 베이징대학 강연에서 제기했던 “진정한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라는 구호이다.
강연 중에 린시링은 자신이 이해하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언급하였다. 첫째는 ‘사회주의 공유제’를 지켜 내는 것이고 둘째는 ‘사회주의 민주’를 지켜 내는 것으로 이러한 주장은 캠퍼스 내 ‘우파’들의 공통된 인식에 다름없었다. 그들은 당시 중국에 생산수단 점유, 분배 및 인간 관계에 있어 특권이 만들어 낸 불평등이 나타났고, 새로운 특권계급이 형성될 가능성이 있거나 혹은 이미 형성되어서 사회주의 공유제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던 민주·법제·인권을 위반하는 현상은 중국 사회주의가 “봉건 기초에서 만들어진 사회주의로서, 비전형적인 사회주의”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고 보았다. 때문에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베이징대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대자보에서 그들은 “‘사회주의 공업화’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 민주화’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민주광장 자유연단 위에 출현한 것은 바로 지속적으로 형성되어 발전해 온 이러한 민주로서, 끼워 맞추기 식의 소련 형식도 아니고, 서구에서 사들여 온 형식은 더더욱 아닌, 오늘날 중국 사회주의 토양에서 자라난 민주제도이며, 우리는 그것을 공고히 하여 점차적으로 전국 규모로 확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요구이자 우리의 목적이다”라고 분명히 제기하였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민주를 요구하고 특권계급을 반대하는 일들은 마오쩌둥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영도집단에게 있어 모두 다 일당 전제체제와 통치 지위에 대한 위협이자 도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들은 소위 “우파가 미쳐 날뛰며 공격한다”라고 하면서 “반당·반사회주의”라는 죄명을 덮어씌웠다. 그러고는 바로 돌변해서 “말하는 자는 죄가 없다”라고 했던 자신들의 약속을 저버리고는 반反우파운동을 발동하여 이를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앞서 언급한 사회주의 변혁 요구를 제기한 모든 민주인사와 지식인, 학생청년들은 모두 체포되고, 급기야 총살되었으며, 이들의 호소에 응하여 의견을 제기하였던 노동자·농민·중고등학생을 포함한 훨씬 더 많은 보통 사람들도 모두 ‘우파’, ‘중간 또는 우파분자’, ‘반사회주의분자’가 되어 각기 다른 정도의 박해를 받았다. 1980년대 관방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57년에 ‘우파’는 55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10만 명에 달하는 각종 우파와 60만 명의 반사회주의분자, ‘우파언론’이 만들어 낸 10만에 달하는 각종 ‘분자’”들을 합하여 180만 명의 우파분자들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모자’를 쓰지 않고서(정식 죄명이 가해지지 않은 채) 처벌을 받은 자들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딩수丁抒, 『반우파운동 중에 백팔십만 개의 ‘딱지’[낙인]가』). 모든 ‘우파’ 또는 ‘반사회주의자’는 1979년을 전후로 모두 “잘못이 바로잡아졌지만”, 덩샤오핑이 여전히 반우파운동의 필요성을 긍정하고 이를 고수하는 바람에 린시링을 포함한 십여 명의 ‘우파’의 경우 ‘개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으로써 반우파운동의 정당성을 보여 주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러한 박대와 조롱은 지금까지도 중국 대륙에서 여전히 반우파운동을 연구 및 담론의 금기구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책이 ‘망각을 거부하라’라는 제목으로 홍콩에서만 출판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1957년, 마오쩌둥은 먼저 정풍운동을 이용해 민주당파와 지식인들을 연합시켜 당내 관료에 타격을 입혔고, 또 반우파운동을 빌려 당내 관료를 연합시킴으로써 민주당파와 지식인, 청년학생 가운데 ‘우파’를 타도하였다. 1958년 초에 이르러서는, 다시 반우파운동의 여세를 몰아 역으로 소위 ‘당내 우경보수세력’에 타격을 가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절대적 권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권력은 국가와 사회에 대해 그 어떠한 제한과 감독을 받지 않는 중국공산당의 절대 권력일 뿐 아니라, 당과 국가에 대해서도 제한과 감독을 전혀 받지 않는 개인으로서의 절대 권력이다. 이로써 그는 고도로 집중된 일당독재의 ‘사회주의 강권체제’를 건립하게 된다.
이러한 강권체제의 건립은 물론 하나의 과정으로서, 1957년 이후에 주로 반우파운동을 통해서 결국 완전한 체제를 확립, 형성시키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또 이를 ‘5·7체제’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러한 체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일원화된 당 영도체제로서 마오쩌둥의 말을 빌리면 바로 “하나의 핵심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전국은 당을 핵심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각급, 각 부문의 당 제1서기를 핵심으로서 드러내지만, 결국엔 당 중앙 주석 즉 마오쩌둥 본인을 핵심으로 하는 것으로 집중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군대와 여론에 대한 당의 절대적 통제가 이뤄졌는데, 이것은 강권통치의 양대 기둥이었다. ‘당지휘창’黨指揮槍[당이 군대를 지휘한다]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또 ‘여론일률’與論一律의 원칙을 제기하였는데, 이는 군사독재를 고수하면서, 인민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사상과 문화를 전면적으로 통제하며 독재를 행하는 것이었다. 셋째, 강권체제를 사회 최기층으로까지 구체화시켜 모든 사람을 고정된 ‘단위’ 속에 편입시키고, 농민조차도 인민공사·생산대에 포함시켜 당과 국가를 대표하는 단위조직이 그 구성원에 대해 삶에서부터 사상·행동에 이르기까지 전면적 통제를 가하는 동시에, 또 모든 단위는 가정 출신과 정치적 표현(관건이 되는 것은 당의 절대 영도에 복종하는가 여부)에 따라서 군중들을 ‘좌파’와 ‘중간파’, ‘우파’로 구분하여 사실상 새로운 등급제도를 건립하였다. 바로 이러한 등급사회의 구조 속에서 이익집단을 만들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었던 그 시대를 그리워하는 중요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장기간 체제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은 또 반우파운동을 치국治國의 모델로까지 발전시킨다. 즉 쉼 없이 대규모 군중운동을 발동시키고, 계급투쟁과 국가 건설을 진행시키며, 군중독재를 실행하였다. 그리하여, 바로 1958년 대약진, 인민공사운동, 1959년 반우경기회주의자 운동이 생겨났고, 또 이로 인해 1959년부터 1961년까지 대기근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1962년에 또다시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계급투쟁을 이야기하자”階級鬪爭月月講, 天天講를 시작으로 1964~65년 사청운동[四淸; 정치, 경제, 조직, 이념을 개끗이 하자]과 문화비판운동으로까지 발전시켜 1966년 시작된 문화혁명에 이르러는 “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정치 조건하에서 부단한 혁명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계급 전면 독재정치”를 실행하려 하였다.
이상 간략한 역사회고를 보면, 중화인민공화국 역사발전의 고리 속에서 1957년 반우파운동이 중요한 환절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반우파운동은 앞으로는 1949년 이래 일련의 정치·사상·문화운동을 계승한다. 여기에는 가오라오高饒사건을 비롯하여 반후펑反胡風과 반혁명분자 숙청운동이 포함된다. 뒤로는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 동안의 대기근, 1966년부터 1976년까지의 문화대혁명, 1989년 6·4대살육[톈안먼사건]이 모두 역사적으로 관계가 있다. 또한 반우파운동의 영향은 심원하고도 광범위해서 정치·경제·사회·법률·사상·문화·과학·기술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이러하기 때문에 반우파운동과 3년 대기근, 문화대혁명과 6·4대살육이 중국 대륙에서는 모두 잊기를 강요당하는 역사의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반우파운동이 바로 매듭을 풀고 단추를 푸는 결정적 지점이기에 역사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1957년이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는 “어떤 일을 할 때는 핵심을 틀어쥐어야 한다”綱擧而目張라는 말이 있는데, 1957년이라는 벼리를 틀어쥐면, 중화인민공화국 전 역사가 한꺼번에 들려질 것이다.
현재, 한국의 많은 연구자들이 중국의 1949년 이후 역사에 흥미를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1957년 이 시기 역사가 깊이 파고들 가장 좋은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1957년 역사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중국 현실에 대한 수많은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상술했듯이, 지금 중국 사회체제의 기본 구조는 바로 1957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 연구자들은 1957년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에 보다 더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는 내가 기대하는 바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1957년 중국 대학생의 사고와 활동은 중국 학생운동사와 현대사상문화사에 있어 중요한 한 페이지일 뿐 아니라, 중국 사회주의 사상사·운동사에 있어서는 더욱더 중요한 한 페이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몇몇 나의 한국 친구들은 중국 사회주의 경험에 관심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도 중국은 사회주의 경험과 교훈에 대해 과학적으로 총괄해 봐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 내가 강조한 것은 중국 사회주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단순히 사회주의 국가이론과 실천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마땅히 1957년 베이징대학 학생들이 일으켰던 ‘사회주의 민주운동’과 같은 민간 사회주의 사조와 실천까지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보다 중요한 문제로서, 그것은 바로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에 대한 역사적 관찰과 연구가 비단 관방적·주류적·정통적 ‘정사’에만 국한되어, 민간적·비주류적·비정통적 ‘야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의에서 이 책의 진정한 의도는 1957년 캠퍼스 민주운동과 그 전후시말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1956년부터 1966년 사이 중국 민간사조사를 쓰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민간사조는 대체로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사조의 이단성이고, 둘째는 그 전파 방식의 민간성이다. 셋째는 그 작가들이 모두 서로 다른 정도로 박해를 받았고, 더구나 생명까지 잃었다는 것이다. 넷째는 그 사상의 성과가 강제로 잊혀졌다는 것이다. 이 또한 그것이 지닌 가치로서, 여기에는 진정한 중국 민족의 심장과 영혼이 담겨져 있다. 루쉰魯迅은 일찍이 “중국인을 논하려면 겉치장에 속지 말고, 그의 근골과 중추를 보아야 한다”, “예부터 우리에겐 전심전력을 다하는 사람, 죽기살기로 밀어붙이는 사람, 백성을 위해 탄원하는 사람, 진리를 구하려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있었다”, 다만 그들은 “늘 박해받고 말살되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근골과 중추”는 지금의 중국 사회에도 똑같이 존재한다. 그들도 똑같이 “박해받고 말살된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수많은 중국 관찰자의 시야 속에는 들어오지 못한 듯하다. 때문에, 루쉰의 또 다른 깨우침도 매우 중요해진다. 루쉰은 중국 사회를 관찰하려면, “장원壯元 재상宰相의 문장”만 보아서는 안 되고, “아래를 내려다보아야 한다”, 밑바닥층, 민간사회에서 묵묵히 분투하는 자, 희생자를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중국인은 자신감을 잃어버렸는가?」). 나는 이러한 깨우침이 중국에 관심을 갖는 한국 친구들에게도 적용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이 한국 친구들이 중국의 역사와 현실, 특히 중국의 민간사상을 이해하고, 그로 인해 한·중 양국 지식계와 사상계, 학술계 더 나아가 일반인들 간의 심적 교류를 촉진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 이 책의 역자들과 이 책을 위한 글을 써준 백승욱 선생과 유세종 선생께 충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베이징에서, 첸리췬
1부 반우파운동의 전조
1. 1956~57년 중국의 농촌, 공장, 학교
여기에서 토론하려는 것은 상당히 큰 주제이다. 그러나 1957년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구하는 데 토대가 될 것이다. 중국 사회의 기층인 공장·농촌학교, 그 속에서 생활하는 노동자·농민·청년학생·지식인들의 동향은 모든 중국문제를 관찰·연구하는 데 기초가 된다. 여기서 하려는 토론은 그 의미가 매우 클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방법론적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사회학적 과제이다. 문학연구자인 내가 이를 심화 연구하는 데에는 분명 어려움이 있다. 거기에다가 1차 조사 자료도 부족하고, 가지고 있는 제한된 텍스트로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과 진일보한 연구를 끌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1) 농촌
“우리나라 농민은 너무너무 힘들다”
1956년 하반기와 1957년 초, 중국 기자 두 명이 당시 중국의 농촌마을과 몇 개의 공장에 대해 세밀한 조사를 했다. 그들은 조사 중에 드러났던 문제들을 중국공산당 중앙에 상소했지만, 오히려 이것으로 인해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우파분자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당시의 역사를 논할 때 사람들은 그들이 주목했던 중국 농촌·공장 상황과 그들의 생각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시대의 격막膈膜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잊지 않았고 신중하게 회고록에 써넣었다.
1956년 7월, 신화사新華社 기자 다이황戴煌이 혹서酷暑를 무릅쓰고 그를 낳고 길러 준 고향 쑤베이蘇北 푸닝현阜寧縣 남쪽 30리 밖의 거우둔진溝墩을 찾았다. 1948년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 잠시 지나쳤던 고향을 7년이 지나서야 ‘해방 전사’의 신분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흥분하였고, 한껏 기대를 했다. 하지만 장거리 버스를 내려, 어린 시절 알았던 거리와 골목들을 돌아보고 나서는 낙담하고 말았다.
“집들은 쇠락해 온전치 않았고, 길들은 울퉁불퉁했다. 1947년 5월, 우리는 국민당 군대가 불법으로 점거했던 그 시기에 보았던 허물어진 돌 보루와 녹슨 철근을 제거했다. 어떤 것은 마치도 ‘진귀한 역사문물’처럼 아직도 그대로 강가와 다리 위에 놓여 있었다. …… 온갖 고초를 당한 이 작은 마을의 모습은 정월대보름날 집에서 빚은 원소元宵도 먹지 못하고 허둥지둥 떠날 때의 나처럼 이렇다 할 변모가 거의 없었다. 중·고등학교와 사범대학은 부서진 채로 있었고, 쓸 만한 상점이나 음식점도 거의 없었다.”
“고향 마을 친지들의 삶을 보면서 마음은 더 떨려 왔다. 손목시계, 자전거, 라디오 등 자신의 피땀이 가득 찬 많은 물건들을 조금도 향유하질 못했다. 물론 ‘능력의 부족함을 개탄’하면서. 닭을 기르는 사람이 계란을 먹지 못하고 돼지를 사육하는 사람이 돼지고기를 못 먹는 것처럼, 면화를 심은 농부가 일 년에 몇 폭도 안 되는 천을 살 표가 없는 것처럼, 또 땅콩과 콩을 심은 사람이 매월 겨우 몇 량의 기름밖에 얻지 못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했고 몸을 가릴 의복조차 없었으며 불치의 병이 아니면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많은 고향 사람들이 그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해방 후 짧은 몇 년 사이에, 이곳의 일부 공산당원 간부들이 ‘신 악덕 지주’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마을을 통제하는 사람은 바로 다이황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는 버스와 항구를 장악하고는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협박해 억지로 타게 했다. 그의 동생과 함께 여러 차례 다른 민간 배를 탄 승객들에게 행패를 부려 기슭에 내리게 하거나 선주를 물속에 처넣었다. 1954년 그는 세 칸의 큰 집을 지었는데, 모든 기와와 벽돌은 다른 집에서 가져왔고 사람들을 무노임으로 부려먹었다. 일을 하던 농민이 점심을 먹고 일을 하자고 요구했다가 사람들 앞에서 두드려 맞아 정신을 잃었다. 그의 장인과 손아래 처남까지 합세해 무고한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는 권력의 힘으로 끊임없이 “여자를 찾아다녔고”, 현역 군인의 아내와 여성 간부까지 그의 ‘탐문’ 대상이 되었으며, 어느 누구도 감히 이것을 고발하지 못했다.
다이황이 주변 마을에 이런 ‘신 악덕 지주’가 얼마나 되냐고 물으니,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이웃 마을 간부들은 이삼 년 전만 해도 늘 이리 빌리고 저리 빌려 생활하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는데, 농업합작사農業合作社[중국의 지역협동조합] 이후 갑자기 마치 마술을 부린 것처럼 ‘금산 은산’을 파내어 비단 옷을 두르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서 크고 화려한 집들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뒤에서 몰래 쥐새끼들! 니들이 매월 받는 돈이 20여 위안인데 이렇게 흥청망청 쓰는 돈이 어디에서 난 것이냐, 우리 백성들에게서 뜯어 가는 게 아니고 뭐냐고 욕했고, 고발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아져 갔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백리가 넘는 마을에서 왔는데 그 고발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뿌리가 뒤얽혀, 서로 뒤를 봐주는 이런 악질 간부들은 어디에나 있고, 또 절대로 ‘개별’적이지 않다”고 했다. 또 이런 악인은 모두 상부의 보호를 받았는데, 어떤 농민은 이것을 콩나물 잔새우 볶음요리, 썰매꼬챙이가 서로 뒤얽혀서 풀 수 없는 형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방에서는 “공산당 상층은 민주를 말하고, 중간은 반半민주를 말하고, 아래는 비민주를 말한다”, “마오 주석은 위대하지만, 하층은 너무 어둡다!”, “중앙정부의 법이 미치지 못하니, 언제나 머리를 들 수 있을까!”, “과거 선통宣統 황제, 베이양 군벌北洋軍閥, 국민당, 일제 강도와 매국노의 통제 아래에서 소와 말이 되어 몇십 년을 살았는데, 지금은 그저 공산당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할 수밖에!”, “이 개자식들이 어디 공산당이란 말이냐? 그야말로 국민당이 부활한 것이지!!!”……라는 원망의 소리가 일었다.
하층 농민들의 이런 소리들을 들은 다이황의 마음은 매우 복잡했다. 1956년 중국 농민은 마오쩌둥과 공산당을 신임하고 있었고, 또 공산당 영도에 여전히 희망을 걸면서 “국민당이 부활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농민과 기층 간부 사이의 모순이 이미 아주 첨예한 지경에 이르렀고, 중국 농민 고유의 억압에 대한 참을성 때문에 잠시 동안은 폭발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배태하고 있는 위기는 이 충성스런 공산당원을 아주 초조하게 하였다.
특히 그는 한 농민이 막다른 길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불안해졌다. 그는 급히 이 상황을 구區위원회 서기와 구장區長에게 알렸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그 사람이 자살한 것은 부부 싸움 때문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쥐새끼가 그의 새 솜두루마기를 물어뜯어 놓아서 자살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하고 얼마 안 되어 또 한 명의 농민이 자살하게 되었다. 다이황은 현縣위원회와 지역위원회에 알릴 수밖에 없었다. 현과 지역에서 공작조工作組가 파견되어 왔다. 대량의 사실 앞에서, 향鄕과 구區 단위가 그 ‘신 악덕 지주’의 당적을 박탈하기로 결정했지만, 현縣에서는 오히려 기일을 늦추고 비준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역 부자들과 한패가 되어 지방의 우수한 간부와 당원을 공격한다”면서 다이황을 고발하는 익명의 편지(나중에 이 익명의 편지가 구장의 지시로 그 ‘신 악덕 지주’가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를 신화사로 보냈다. 신화사 상층간부 또한 의심하지 않고, 역으로 다이황을 조사하였으며, 지역위원회 공작조는 심지어 그의 활동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신 악덕 지주’는 곧바로 자신을 고발한 당원과 열성분자에게 보복을 가했다. 군중을 지지한 구위원회 위원이자 공안특파원이었던 사람 역시 전출되어 갔다. 고향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이황에게 편지를 써서, “권세 있는 공산당원이 설마 정말 일반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단 말인가? 만약에 우리가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면 바로 체포되었을 거야. 부도덕한 간부들이 죄를 저질렀는데도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다니, 저렇게 계속 권세를 부려도 되는 건가”라고 분개하며 되물었다.
마을 사람들의 질문에 다이황은 더 깊이 사유하며, 마오쩌둥과 당 중앙에 직접 상소해 앞에서 말한 상황을 알리기로 결정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을 하게 되었다.
“이 편지에서 제가 중요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관료통치와 특권계급의 유무’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과거 몇 가지 현상이 이런 의문을 갖게 했고, 올 여름 여러 도시와 농촌을 다니면서 이 문제에 대한 제 생각이 확연하고 명확해졌습니다. 즉 특권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전국적인 통일계급이 되진 않았지만, 이 계급의 태아가 지금 현재 전국 각지에서 만들어지고 확대되고 있습니다.”
다이황은 편지에서 또 이렇게 제기한다.
“국가 간부(특히 중급 이상의 국가 간부)의 생활수준 재고와 함께 반드시 농민들의 생활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농민은 너무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농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열쇠는 당연히 생산력의 발전입니다. 농업생산의 발전의 토대하에서 국가 공무원과 노동자·농민계급의 생활상에서의 이런 차별은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맑스·레닌주의 정치경제학은 늘 국민 수입의 물질적 분배를 정확하게 분석해 왔습니다. 몇 년 전, 사람들은 인구의 몇 퍼센트가 지주이고 부농이며, 그들이 매년 농업 수확량의 몇십 퍼센트를 강점했다고 했습니다. 농업 인구의 90% 이상이 토지가 없거나 아주 소량의 땅을 가지고 있는 빈농들이며 매년 평균 ‘몇 알’의 양식을 얻어 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감히 매년 전국에서 얼마의 쌀과 과일, 어육과 닭오리를 생산하는지, 전국 인구의 5%도 안 되는 공산당원 국가 간부가 그 중 얼마를 소비하는지, 또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수많은 농민들이 또 얼마나 그것을 소비하는지 통계분석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현실은 우리가 산해진미를 음미하고 있을 때 수천 수만의 이재민들이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건설사업을 하면서, 어떤 사람은 개인의 명예와 상급기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인민의 피땀을 먼지처럼 대합니다. 많은 건설 일정이 분명 단기간에 완성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그들은 그 모든 것을 감안하지 않고 기간 내에 완성하라고 명령합니다. 사고가 백출하고, 끊임없이 재공사를 하는데도 완공된 후의 품질은 오히려 떨어집니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다치게 했는지, 얼마나 많은 국가 재산을 낭비했는지 모릅니다!”
그의 결론은 이러했다.
“과거 전쟁 시기, 우리는 인민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진심으로 자원했고, 기꺼이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 인민의 불만이 날마다 증가하고 널리 퍼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또 보편성을 가진 결함이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고, 경각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이황의 이 ‘만언서’萬言書(실제로는 미완성 원고로, 반우파운동 중 그는 이를 주동적으로 제출했다)는 50여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읽어도, 농촌의 초가집에서 자라 공화국 건립을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 싸운 노전사의 신념과 자신을 키워 준 인민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또 그가 했던 당시의, 혹은 이후의 중국문제에 대한 관찰과 우려(쌍백운동[백화제방, 백가쟁명] 시기 그는 이것을 한마디로 “전당과 전국에 가장 엄중하고 가장 위험한 폐해가 바로 ‘신화화와 특권’”이라고 개괄했었다)는 불행스럽게도 모두 사실이 되어 버렸다. 1957년 중국에서 그는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는 ‘우파’의 확증이 되어 버렸다. 「신화사는 반당분자 다이황의 반당 발언을 고발한다」는 전보에서는 “그가 말하는 ‘특권계층’은 중국공산당원과 국가기관 간부에 대한 모함”이라고 발표했으며, 그가 부르짖었던 “우리나라 농민은 너무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말은 “당과 국가에 대한 악독한 공격”이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장쑤江蘇 『신화일보』는 「‘다이칭톈’ 환향기」戴天還鄕記라는 글을 발표해, 거우둔진의 ‘신 악덕 지주’를 아주 좋은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다이황이 ‘적’이 되어 버린 이상, ‘적’이 반대하는 사람은 당연히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후 이 ‘아주 좋은 사람’의 폭위 아래에 있는 그 지역 농민들의 운명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국 사회의 모든 고난은 마지막에는 모두 농민들이 묵묵히 감당해 내었다.
지금은 아직 구체적인 통계수치가 없어 다이황의 판단을 증명하지 못한다. 다이황이 1957년 10월에 쓴 「자아비판」에 따르면, “특권계급의 태아”가 되었던 “농촌의 악덕 간부의 숫자는 대략 10% 내지 20%라고 했다. 대략 30만에서 60만이 넘는 숫자로, 그들은 살인방화 외에도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질렀다”고 한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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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첸리췬(錢理群)
1939년 중국 충칭 출생. 베이징대학에서 직접 반우파운동을 겪었고, 3년 대기근과 문화대혁명도 직접 경험하였다. 문화대혁명 때에는 구이저우 안순시에 하방되어 중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1978년 베이징으로 돌아와 베이징대학 중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26여 년 동안 교육·연구·학술활동을 하였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사건’으로 명예퇴직을 권고당한 이후 현재는 베이징 근교에서 집필과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세계적인 루쉰 전문가로도 유명한 그는 『영혼의 탐색』, 『루쉰과 만나다』, 『저우쭤런 전기』, 『풍부한 고통:돈키호테와 햄릿, 동으로 이동하다』, 『1948:천지현황』, 『정신 연옥:중국현대문학 ‘5·4’에서 항일전쟁의 역사』, 『마오쩌뚱시대와 포스트 마오저뚱시대:또 하나의 역사서사』 등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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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길정행
중문학과 중국현대문학 전공. 현재 전문번역에 종사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착한 사람, 예로센코』,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슬픔』, 『구린내 나는 아홉번째 놈』, 『매의 노래』(공역) 등이 있다.
신동순
중문학과 중국현대문학 전공. 현재 숙명여대 중문학부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국 문화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다. 지은 책으로 『在“說”與“不說”之間―上海淪陷區雜誌<萬象>硏究』(中國傳媒大學出版社), 옮긴 책으로 『숨겨진 서사』(공역), 『21세기 중국의 문화지도』(공역), 『중국현대통속문학사』(상?하, 공역)가 있고, 논문으로 「중국대중문화기호 ‘공을기’의 생산과 소비」, 「<웰컴투동막골>과 <鬼子來了> 속의 문화헤게모니 양상」 등이 있다.
안영은
중문학과 중국현대문학 전공. 현재 한국외대, 상지대에서 중국어와 현대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중국 대중문화의 경전화 현상 등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논문으로 「‘홍색경전’의 재조 의의 탐색」, 「‘훼이훼이주의’의 ‘반문화’ 경향 탐색」, 「두 가지 방식의 지청기억의 재현」, 「중국 팝아트의 생성과 발전」, 「추이지앤 록음악의 문화위치와 문화실천」, 「소수민족 민간전설 <劉三姐>, 대형 실경공연 <印象 劉三姐>로 부활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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