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머리에 |
1930년대의 미국 남부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심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앨라배마 주에 살던 한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강간하려 했다고 누명을 쓴다. 그런데 흑인을 변호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분 나쁜 표정으로 쳐다본다는 이유만으로 흑인을 집단 폭행하던 게 당시의 분위기다 보니 그럴 만도 했다. 변론을 맡겠다는 변호사가 없자 법원에서는 한 백인 변호사에게 국선 변호를 의뢰한다.
사건을 맡은 백인 변호사의 아들딸은 아버지가 흑인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다. 혼란스러워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변호사라는 일의 성격으로 보아 모든 변호사는 말이다,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affects me perso-nally) 사건을 맡게 마련이란다. 내겐 지금 이 사건이 바로 그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무고한 흑인이 백인의 모함으로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는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돌이켜보면, 변호사 자신의 삶에까지 영향을 준 사건이 내게도 있었다. 변호사로서 처리한 일이라 자세하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한국인 아버지와 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둘러싼 사건이었다. 공간과 시간의 거리를 무색케 할 만큼 한눈에 알아본 혈육의 이끌림 그리고 부자의 정(情)을 비트는 인간의 셈속, 사건이 종결되기까지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그때가 십여 년 전인데 이 과정에서 ‘인디언’을 만났다.
사건이 끝나고 나서도 왜 그런지 계속해서 인디언이 내 곁을 맴돌았다. 무엇이 나를 글쓰기로 이끌었는지 그 이유를 단언하긴 어렵지만, 아마도 인디언에 관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위로요 치유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인디언 처녀와 한국인 청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을 썼다. 두 사람은 대학에서 인디언 역사 강의를 같이 들으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인디언 부족의 역사에 관해서도 제대로 알아야 했다. 그래서 잠시 소설쓰기를 미루고 인디언 부족이 걸어온 길을 좇았는데, 어쩌다 보니 소설의 진도는 안 나가고 계속해서 인디언 사회에만 매달리고 말았다.
‘세계평화의 전도사로 자처하는 미국이 인디언을 살육하고 그들의 땅을 강탈한 사실을 어떻게 합리화했는지’는 인디언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먼저 품었던 의문이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이런 궁금증도 생겼다. 인디언 부족들이 연합해서 미국 정부에 대항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인디언은 국가를 만들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안 만든 것일까? 여기에 대한 고민은 이 책 1장과 2장에 풀어놓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힘에서 밀린 인디언 부족들은 정든 고향에서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쫓겨나게 된다. 19세기에 자행된 강제 이주로 인해 인디언들은 보호구역에서 살아야 했다. 지금은 절반 이상의 인디언이 미국의 도시지역에 거주하는데, 이들을 도시 인디언(urban indian)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제 이주와 보호구역에 관해서는 3장에서 다루었다.
미국 전역에는 약 310개의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다. 관광지나 유적지 정도의 보호구역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규모가 크다. 100만 에이커가 넘는 보호구역만도 12개나 된다. 애리조나, 유타, 뉴멕시코 주에 걸쳐 있는 나바호(Navajo) 보호구역은 약 1500만 에이커로 가장 넓은데, 한국과 비교하면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합한 면적이고 유럽과 견주면 벨기에?덴마크?네덜란드보다 크다.
이들 보호구역에서 인디언 부족은 주(州)와는 별개의 의회, 행정부, 사법부 조직을 갖고 독립적으로 부족민들을 통치한다. 물론 인디언 부족도 미합중국의 구성원이므로 연방정부의 관여를 받는데, 둘 사이는 주와 연방정부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미국에는 연방 주권, 주 주권, 부족 주권(tribal sovereignty)이라는 세 가지 형태의 주권이 존재하는데, 여기에 관해서는 7장에서 설명했다.
사실 미국 정부는 인디언 부족이 부족 주권을 가지는 걸 원치 않았다.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19세기 후반 미국 정부는 인디언 부족을 말살하고 인디언을 미국인으로 바꾸려는 동화정책을 인디언 사회에 강요했다. 19세기 이래로 미국 정부가 부족사회에 실시한 교육?종교?토지 제도는 모두 동화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나왔다. 이 제도들은 4장, 5장, 6장에서 각각 다루었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인디언은 사라지지 않았다. 끝까지 살아남은 인디언이 지금은 보호구역과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부족사회와 미국은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는지, 맹목적인 이윤 추구의 산업사회와 국가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인디언 사회가 직면한 과제는 무엇인지 등 20세기 초반 이후의 인디언 역사는, 이다음에 별도의 단행본으로 다룰 예정이다.
이 책에서는 20세기 초반까지의 인디언 사회를 주로 살펴보았다. 그러다 보니 부족사회가 마치 원시 공산사회인 것처럼 비쳐질까 염려된다. 인디언 사회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변화는 논외로 하더라도, 생산력이라는 기준으로 사회의 발전 단계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서구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본래의 인디언 사회는 먹고살기에 급급한 생계경제가 아니었다. 구성원들이 고루 먹고살 만큼 일하면서 잉여생산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사회였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공적(公的)인 것에 바탕을 둔 한계선을 사회 곳곳에 설정하는 품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지금의 세상은 고삐 풀린 금융자본과 무한증식의 산업기술이 사실상 조종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약탈과 약자의 고통으로 돌아가는 이 세계를 어떻게 하면 구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해답이 인디언 사회에 존재할지 모른다. 연합?연방의 조직 원리와 결합한 소국 분할(小國分割)의 지혜를 인디언 사회에서 찾아야 한다. 국가가 아닌 사회이면서도 국가에 버금가는 주권을 가진 ‘인디언 마을 공화국’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 할 정치 사회다.
몇 년 전, 미국 남부를 여행한 적이 있다. 그 여정에서 나바호족과 푸에블로족 할머니 몇 분을 만났는데 신기하게도 그 모습이 우리네 할머니들과 꼭 닮았다. 그 어르신들을 뵈면서 문득, 인디언의 길에 끌리는 이유를 알 듯했다.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은 아닐까?’라는 시구(詩句)에 마음이 가는 건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순례를 떠난다. 그 길에서 나는 인디언을 만났고, 때로는 인디언 사회라는 순막(巡幕)에서 머물기도 했다. 순례란 자기 혀를 다스리는 것이라고 했다. 씨앗처럼 말을 심고 침묵 속에서 씨앗이 자라나게 하라는 인디언 어르신의 가르침도 있다. 그렇게 바라보면서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인디언 이야기를 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에 그러질 못했다. 그 경솔함을 덜고자 나름으로 애를 썼지만, 여전히 부족함이 많아 보인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나온 책, 《인디언 마을 공화국》을 이제는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내려놓는다.
1장
최초의 아메리칸은
누구인가
인디언은 최초의 아메리칸일까
미국은 건국 당시에 국호(國號)를 정하는 문제로 고심했다. 미합중국이라는 이름으로는 편리한 형용사 형태를 만들지 못해서다. 기껏해야 United Statesian이나 American 정도인데, United Statesian은 왠지 어색하고 American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다른 나라를 생각하면 마땅찮다. 컬럼비아(Columbia), 애팔래치아(Appalachia), 프리도니아(Freedonia) 등의 명칭을 검토했지만 대부분 마뜩찮아서 결국엔 미합중국이라는 기존 이름을 유지했다. 미국이 아메리카라는 문구를 선점하자, 미국인과 ‘아메리칸’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로부터 ‘아메리칸’은 미국의 전유물로 변했다.
정치권력이 있는 사회 중에는 국가가 있는 사회도 있고, 국가가 없는 사회도 있다. 인디언 부족은 비강제적인 정치권력을 가진 ‘국가 없는 사회’다. 그러나 서구 열강에 의한 정복이 본격화되면서 정치권력이 있는 사회란 ‘국가 있는 사회’만을 가리키는 추세로 변했다. 국가 있는 사회를 전제로 한 정치적 개념이 모든 사회를 재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메리칸’이라는 용어 역시 인디언 부족과 같은 ??국가 없는 사회??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철저한 서구 중심의 개념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인디언(indian)이라는 단어 자체가 ‘국가 있는 사회’의 발명품이다. 북아메리카 선주민은 원래 라코타, 체로키, 나바호 부족과 같이 특정 부족의 부족민이었을 뿐, 인디언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인디언이라는 단어는 이들 부족 모두를 아우르는 명칭이 필요했던 유럽인이 고안해낸 용어였다. 인디언은 스페인어, indios의 영역(英譯)으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땅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인디아(India)로 오인하여 선주민을 indios라고 불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더 나아가 인디언이라는 용어는 선주민에 대한 멸칭(蔑稱)이며 이들을 인디언으로 부르는 건 실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디언이라는 단어 대신에 북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과장된 지적이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은 1960년대에 인디언 사무국(BIA, Bureau of Indian Affairs)이 즐겨 사용하면서 통용된 표현이다. 어떻게 보면 미국 연방정부의 정책적 필요에서 나온 단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상당수 부족민은 이 용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메리칸 인디언(American Indian)이라고 불리길 원한다. 나바호 부족의 어느 선지자는 자신들을 ‘하느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un gente que vive en dios)’으로 믿었던 선주민에게서 영향을 받은 콜럼버스가 en dios를 indios로 바꾸어 부른 데서 인디언이란 말이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지금도 선주민은 자신을 특정 부족의 부족민으로 먼저 인식한다. ‘인디언’으로 인식하는 건 그 다음 차례고, 미국 시민이라는 생각은 세 번째다. 체로키 부족이나 나바호 부족을 예로 들어보면, 사실 부족민은 체로키 부족이나 나바호 부족의 땅에서 그 주민으로 태어난 것이지, 유럽인이 만들어낸 인디언이라는 ‘상상 속 공동체’의 일원으로 출생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체로키 부족과 나바호 부족은 언어가 전혀 다르다. 공통의 혈연이나 조상을 갖는 것도 아니다. 사는 지역 역시 엄청 떨어져 있어 부족민 사이에 교류도 별로 없었다.
그렇긴 해도 어쨌든 이들 부족민은 자신을 인디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부족사회에서도 인디언이라는 단어가 북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는 여러 부족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로즈버드 수우 인디언 부족(Rosebud Sioux Indian Tribe)과 같이, 부족 명칭에 공식적으로 인디언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물론이고, 산타페 인디언 학교(Santa Fe Indian School)에서 보듯 생활 전반에서 인디언은 빈번하게 등장하는 용어가 되었다. 연방정부 역시 법령의 제목을 정할 때 인디언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인디언 시민권법(Indian Citizenship Act)이다.
이 대목에서 부족민이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디언이라는 단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물론이고 상당수 역사학자조차 인디언 부족을 최초의 아메리칸으로 여기지 않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인디언이라는 용어가 통용되던 20세기는 이미 미합중국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출현하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다시 말하자면, 최초의 아메리칸으로 불릴 만한 부족민이 살았던 18세기 이전에는 인디언이란 없었고 오로지 체로키 부족이나 나바호 부족과 같은 개별 부족의 부족민만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아메리칸이 누구인가라는 논의 역시 국가 중심의 세계질서라는 도그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때문에 국가 있는 사회나 국가 형성 중의 사회만이 사실상 최초의 아메리칸 후보로 비중 있게 거론되고 있다. 물론 18세기 말에 이로쿼이 연합이나 테쿰세 등이 주창한 인디언 부족연합 운동이 있었으나, 국가 있는 사회에 필적할 만한 정치 공동체로 나아가진 못했다.
만약 나바호 부족이나 체로키 부족도 미국처럼 국가를 만들었다면, 이들 인디언이 거뜬히 최초의 아메리칸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을까. 미국의 경우와 한번 비교해보자. 2,000명 남짓, 타운을 중심으로 생활했던 미국인은 필요에 의해 주(州)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진통 끝에 주를 합친 합주국(合州國)을 탄생시켰다. 반면에 인디언은 몇몇의 부족연합을 오래 지속시키지 못했다. 그 대가로 인디언 부족은 미합중국에 강제로 편입되어야 했다.
국가보다 오래된 사회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공동체의 구성원을 지칭하는 용어였던 인디언도 적잖은 세월이 흐른 지금은 구체적인 부족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 통계국의 2000년 조사를 참조하면, 미국 땅에 사는 인디언은 전체 미국인의 1퍼센트에 조금 못 미치는 250만 명가량 된다. 이 중에서 반 이상, 아니 3분의 2에 육박하는 인디언이 도시에 거주하는 이른바 도시 인디언(urban indian)이다. 도시 인디언은 ‘인디언’이라는 일반적 특징에다 ‘도시’ 거주라는 특수한 상황까지 결합되어 있다.
나바호·체로키·수우 인디언 등 500개가 넘는 부족에다 도시 인디언이라는 사정까지 감안하면, 부족사회의 스펙트럼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은 각기 다른 부족의 구성원을 하나로 묶어 인디언으로 부른다. 공통된 것 못지않게 다른 것이 많은 여러 부족을 인디언이라는 이름으로 결속시키는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인디언의 정체성을 살펴보는 작업은 인디언이 누구인가라는 문제에서 출발한다.
외형적으로 인디언은 각 부족 구성원의 양적 결합이다. 쉽게 말해 부족민이 곧 인디언이라는 얘기다. 부족사회가 누군가를 부족민으로 인정하면 그 사람은 동시에 인디언도 된다. 미국에 사는 한 사람이 캘리포니아 주의 주민이면서 미국 국민인 것과 같은 원리다. 부족민의 지위 결정에 관한 권한은 원칙적으로 부족 정부가 갖고 있다. 몇 가지 기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부족민 여부를 결정하지만, 대개는 혈통이 중요한 잣대가 된다. 인디언 혈통이 2분의 1 이상 또는 8분의 1 이상일 것을 요건으로 삼는 부족도 있지만, 대부분의 부족은 4분의 1 이상의 혈통을 요구한다.
혈통 기준을 둘러싸고 미국 정부와 인디언 부족은 종종 충돌한다. 혈통 기준을 느슨하게 하면 인디언 숫자가 늘어난다. 이렇게 되면 인디언 사회가 더 확대된다. 그래서 연방정부는 인디언 혈통 기준을 강화하려고 한다. 반면에 연방정부의 의도대로 혈통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수 세기 후에 인디언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혈통 기준을 4분의 1로 고수한다 하더라도 다른 인종과 혼인을 계속하다 보면 갈수록 혈통 비율은 낮아질 것이고 종래에는 4분의 1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마저 드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혈통 기준은 인디언의 정체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체로키?나바호 등 부족의 혈통이란 개별 부족민 사이의 핏줄을 따지는 것이지, 인디언으로 불리는 전체 부족을 아우르는 혈연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인디언의 정체성은 혈통이 아니라 정치적인 요소에서 찾아야 한다. 서로 다른 부족 이름을 가진 별개의 부족을 인디언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게 하는, 질적 결합을 이끌어내는 정치적 동력이 바로 인디언의 정체성이다. 그 정체성은 정적으로는 ‘인디언다움(in-dianness)’으로 나타나고, 동적으로는 ‘범(汎)인디언주의(Pan-Indian-ism)’로 드러난다.
다른 환경에서 생활해오던 각 부족은 유럽인이 이주해온 다음부터는 비슷한 역사를 공유하게 되었다. 미국 건국 이후 시작된 서부 정복으로 땅과 마을, 가족까지 잃는 고통을 함께 겪으며 상실의 상처가 서로에 대한 연민으로 발전했다. 미국 정부의 강압 정책에 맞서 부족 공동체와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은 다른 부족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졌다. 이런 공통의 정서인 ‘인디언다움’이 ‘범인디언주의’와 결합하면서 인디언의 정체성이 드러난 것이다.
범인디언주의는 미합중국 체제에 사실상 편입된 각 부족이 구체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문제를 부족 공동으로 대응하자는 움직임의 정치적 표현이다. 이런 현실적인 요구에 대처하는 한편으로 부족 전체가 추구해야 할 이상과 비전을 수립하는 일도 범인디언주의의 몫이다. 범인디언주의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유행했던 인디언 기숙학교(boarding school)의 영향으로 싹을 틔웠다. 20세기 중반부터는 파우와우(powwow)라는 부족연합 축제를 통해 내실을 키워나갔다.
1960년대 이후로 여러 인디언 단체가 꾸려지면서 범인디언주의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 범인디언주의에 영향을 받은 활동가는 부족 경제 개선, 부족 토지 보존, 미국과 체결한 조약의 이행, 인디언의 권리 확보 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런데 이들의 투쟁은 인디언 개개인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인디언 부족의 정치적 권리와 문화적 차이를 미국 정부가 인정하라는 요구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인디언 운동을 편견 철폐와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경제적 시위 정도로 진행하려는 비인디언(Non-Indian) 활동가와 달리, 인디언이 원했던 것은 자치(自治, autonomy)였다.
이 책의 7장에서 더 다루겠지만, 인디언 사이에서도 부족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두고 해법이 갈린다. 어떤 모습을 지향하든 인디언 부족연합은 기존 국가와는 본질이 다르며, 또 달라야 한다. 전쟁을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국가가 주도한 가장 야만적인 폭정은 핵발전소의 건설이다. 핵발전소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 가동되고 있는 순간마저도 정기적이고 일상적으로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유해한 방사성 입자를 방출하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이 어디 이뿐이랴. 얼마나 분통이 터졌으면 크로포트킨이 이렇게 한탄했을까. “실제로는 촌락 공동체가 자연적으로 사라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 국가는 예외 없이 촌락공동체를 파괴했다.” 물론 국가도 할 말은 많을 것이다. 국가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여기서 상론할 건 아니지만, 이 점만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국가는 자신이 통치하고자 하는 사회보다 젊다. 토크빌 역시 “왕국을 세우고 공화국을 만든 것은 인간이지만, 촌락은 하느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것”이라고 적었다. 촌락은 거친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요소는 입법자가 쉽사리 틀 지을 수 없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천방지축 날뛰는 새파란 국가 속에 경륜 깊은 사회가 버티고 있지 않다면,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 얻은 촌락의 자치는 최고 권력이 휘두르는 칼에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토박이 주민이 대를 이어 살아온 사회에 권력을 부여하지 않는 한, 국민을 위한다는 국가의 어떤 시도도 결국엔 공염불로 끝나고 말 것이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권력의 분산이라고 해서 국가가 인위적으로 기획한 지방자치단체에 권한을 위임하는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국가보다 오래된 사회로부터 배워야 한다. 장소에 뿌리박은 토착(土着)의 삶에 대한 존중, 공적(公的)인 것에 바탕을 둔 한계선의 설정, 세상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관계(關係)적 사고에서 우러나오는 절제, 이것이 바로 인디언 부족연합의 비전이다.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촌락인 마을을 지켜야 한다. 국가보다 먼저.
(책머리에,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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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여치헌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검사와 변호사로 근무했다. 강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법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지금은 서울에서 변호사로 일한다.
토착의 삶이 위협받는 현실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와 한국 사회 어디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여러 곳의 토착민 사회가 보편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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