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나와 노동하는 수미에게
여기 지도가 있다.
어서 지옥을 떠나,
자유의 땅으로 가라.
머리말
이 책을 하나의 깃발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크게 세 가닥의 실로 짜여 있다. 하나의 실은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나라의 대통령을 국민이 뽑듯이, 또는 국립대학의 총장을 학교 구성원들이 뽑듯이 회사 사장도 종업원들이 뽑으면 안 되는가? 다른 실은 ‘대답’이다.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 에 대한 답은 되는 경우도 있고 안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동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식당 사장을 선거로 뽑자고 주장한다면, 당연히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이런 사정은 순수한 개인 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개인 기업이란 기업주의 사적 소유 재산이므로 그것의 운영권 역시 당연히 소유주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식회사라면 원래 주인이 없는 기업이므로 얼마든지 노동자들 또는 종업원들이 경영권의 주체일 수 있으며 스스로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최종적으로는 노동자 경영권을 확립하기 위해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라는 법 조항을 상법에 신설하자는 주장에까지 나아간다. 세 번째 실은 어떤 의미에서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노동자에게 귀속되어야 하는가 하는 ‘근거’들이다. 나는 다시 이 근거를 부정적인 근거와 긍정적인 근거로 나누어, 먼저 주식회사만의 고유성으로부터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는 것을 노동자 경영권의 소극적 근거로서 제시한 뒤에, 기업 공동체의 이념으로부터 노동자 경영권을 위한 적극적 근거를 이끌어내려 하였다. 질문과 대답 그리고 근거, 이 세 가지 실로 천을 짜면서 맨 마지막에 새겨 넣은 말은 이것이다. -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
누가 쓰지 말라 해도 어떻게든 이 책을 썼겠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3년 전 이맘 때 내가 진보신당의 강령 제정 소위원회의 위원장 직책을 맡은 것이었다. 전문(前文)과 본문(本文)으로 이루어진 강령에서 본문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기초한 문서를 강령소위에서 다듬은 것이었으나 전문은 당의 이념을 담은 지극히 철학적인 문서로서 그 초안을 작성하는 일이 나의 몫이었다. 나는 그 일에 최선을 다했고 나름대로 부끄럽지 않은 강령을 만들었다고도 생각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시급하게 보완해야 할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강령이 “오직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만 인간의 자유와 참된 만남의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도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구호가 몽상적인 헛구호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자본주의라는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인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같이 걸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강령을 처음 기초할 때, 강령제정에 참여했던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랬으니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당 차원의 토론도 실천도 없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결과 당의 생존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으로 날밤을 새다가 당의 대표를 지냈던 사람들이 당을 버리고 떠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다. 하지만 당의 깃발을 만든 사람으로서 당을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었던 나는, 내가 기초한 강령의 한계를 스스로 뛰어넘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왜곡된 재벌경제체제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은 내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절박하게 느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극소수의 특권층을 위해 작동하는 재벌경제체제를 해체하고 우리 모두를 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철학자가 자기와 직접 상관도 없는 주식회사의 경영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는 것은 학문적 월권이나 일탈이 아닌가? 혹시라도 이렇게 물을 사람이 있을까 하여, 대답 대신 서준식 선생의 『옥중서한』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원래 철학이라는 학문의 특징은 그것이 현존의 사회질서 속에 특정한 분야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것은 어려운 말이지만, 요컨대 경제학이 현존질서 속에서 경제현상이라는 대상을 차지하고 정치학이 정치분야를 갖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철학은 현존 사회질서 속에 그 귀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철학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현존 질서 속의 일부가 아니라 그 현존질서 전체, 즉 그 ‘통째’이다. 따라서 다른 분야의 학문이 자칫하면 현존질서 전체를 주어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 그 일부분으로서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는 것과 달리 철학은 현존질서 전체가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를 정면에서 문제 삼게 되며, 때로는 잘못된 현존질서 속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과 대등한 처지에서 대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을 ‘세계관의 학문’이라 부르는 이유이고, 철학이 다른 학문분야들의 ‘통괄자’로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이유이며, 그리고 나아가서는 역사 속에서 철학이 많은 박해를 받아온 이유이다.
철학은 언제나 세계 전체 또는 존재 전체를 생각하는 보편적 학문이다. 당연히 철학이 탐구해야 할 그 전체 속에는 경제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 영역에 속하는 주식회사 역시 하나의 존재자로서 철학적 성찰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런데 철학자라면, 경제?경영학자나 법학자와 달리, 주식회사를 삶의 전체 지평으로부터 성찰해야 한다. 경제학자들이나 경영학자들은 경제적 효율성의 측면에서 주식회사의 가장 이상적인 경영 방식을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법학자들이라면 주식회사에 관계하는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법적 권리의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주식회사법의 정당성을 탐구할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법학자들은 주식회사의 경제적 측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경제·경영학자들은 주식회사의 법적 권리균형의 측면에 대해서 치열한 성찰을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문제되는 한에서만 주식회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철학자는 무엇을 보든 존재(存在)에서 무(無)에 걸쳐 있는 삶의 전체 지평으로부터 그것의 존재 의미와 진리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주식회사를 성찰하는 경우에도 철학은 그것의 경제적 측면과 법적 측면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 등 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측면을 두루 살펴, 삶의 총체성으로부터 그것의 의미와 진리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주식회사 역시 이처럼 철학적 성찰을 통해 끊임없이 그 의미와 진리가 비판적으로 되물어지는 한에서만, 삶의 총체성의 지평 속에서 제 자리를 잡을 수도 있고 제 모습을 유지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서준식 선생의 표현에 기대어 말하자면 철학은 주식회사를 위해서도 그 존재의 본래적 진리를 드러내고 그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고 또 제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주식회사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가장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지평이자 존재의 진리가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장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하이데거가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 말한 것에 맞서, 주식회사야말로 ‘존재의 집’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노동자이다. 노동자가 존재하는 장소는 회사이다. 그리고 모든 회사들 가운데서 가장 지배적인 회사가 주식회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식회사의 존재의 진리를 묻는 것은 오늘날 우리 모두의 삶의 진리를 묻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철학자인 내가 주식회사의 본질을 물었으나, 나는 이 문제가 나처럼 보잘것없는 학자에겐 버거운 과제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다른 훌륭한 학자들이 묻지 않았던 까닭에 할 수 없이 이 물음을 물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허술하고 빈 구석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러 해 동안 준비를 하고, 지난겨울 집중적으로 책을 쓰는 동안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구하려 애쓰기는 했으나, 내 말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으며, 그러므로 경영권은 그 자체로서는 누구의 것도 아니므로 노동자들에게 위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말을 꺼내면, 진보적인 학자들조차 흘려듣거나 아니면 마치 지동설을 처음 듣는 중세의 신학자들처럼 반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서 꼭 한 번 내 생각을 듣고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질문하고 반론을 펴면서 장시간 토론해준 경제학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가 배재대학교의 김진국 교수이다. 지난여름 그와의 토론 후 나는 이제 내 생각을 책으로 옮겨도 좋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회사법의 전문가인 전남대 법대 정영진 교수는 원고를 읽고 친절하게 자문해주었다. 『삼성을 생각한다』의 김용철 변호사와는 책을 쓰기 전부터 생각을 나누었고 책을 쓰는 과정에서도 수시로 원고를 보내 자문을 청했는데 그 분의 호의적 관심과 흔쾌한 동의가 내겐 대단히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강화도의 박진화 화백은 노동자 경영권을 두고 기업인들과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 역시 내겐 확신을 굳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대학생 대안포럼〉과 진보신당 학생위원회의 〈적록포럼〉에 초청받아 노동자 경영권을 주제로 강연을 해왔는데, 그 때마다 대학생들의 적극적 관심과 날카로운 질문이 내 생각을 갈고 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노동자들과는 이 주제를 두고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지난해 봄 진보신당의 진로를 둘러싼 토론회에 초대 받아 갔을 때 나는 간략하게나마 노동자 경영권에 대해 말을 꺼냈다. 뒷풀이 자리에서 오랫동안 노동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해고되어 힘겨운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 이경수 대림자동차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위원장이 왜 그런 얘기를 지금까지 아무도 한 사람이 없었느냐고 물으면서 팸플릿 형태라도 좋으니 빨리 책으로 내달라고 부탁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열 명의 학자보다 한 사람의 노동자의 격려가 내겐 더 큰 힘이었다. 그 부탁에 응답하여 처음엔 팸플릿처럼 짧고 읽기 쉬운 책을 쓰려 했으나, 계획과는 달리 책은 점점 더 길어지고 나는 조금씩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며 이 책을 한참 쓰고 있던 어느 날 밤, 깊은 어둠 속에서 문득 또 다른 내가 나에게 물었다. ‘노동자 경영권에 대한 책인데 중학교 졸업한 노동자도 이해할 수 있게 쓰고 있어?’ 내가 큰 소리로 웃으며 또 다른 나에게 대답했다. ‘요즘은 노동자들도 태반이 대학 나온 사람들이야!’ 또 다른 나는 말이 없었다. 침묵이 흐른 뒤에 내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누구나 곱씹으면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겠지.’
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은 없다. 자본과의 싸움도 마찬가지이다. 준비가 철저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내가 이 책을 쓰면서 스스로 설정한 첫 번째 기준은 빈틈없는 철저함이었다. 철저성의 원칙이 대중성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책을 읽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현장의 노동자들이 이 책을 한 번 읽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두 번 세 번 다시 곱씹어 읽으면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극히 단순한 말이다.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 그러므로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지휘자를 선택하듯이 노동자들이 사장을 뽑으면 된다. 이 쉽고 단순한 주장에 대해 근거를 알고 싶은 사람은 이제 본문을 보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서출판 꾸리에의 강경미 대표와 문부식 선생께 감사드린다. 그분들이 아니었더라면 이 책이 지금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분들 같은 친구들을 새로 만날 수 있으니, 늙어가는 것도 마냥 서운한 일만은 아니다.
2012. 2. 29.
김상봉
1
바보 같은
물음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 >
혁명이 일어나기 전 루이 14세는 ‘짐이 국가다’라고 했다. 이는 한갓 허세가 아니라 왕권신수설이라는 제법 심오한 이론에 의해 뒷받침된 확고한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지금 우리는 지난 시대의 농담이라 치부하지만, 그 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삼성이 이건희의 것이라 해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듯이 대다수 사람들이 왕이 국가의 주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철학자들이 왜 국가가 왕의 것인가 묻기 시작했을 때, 왕의 절대적 지배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 동요는 혁명에 의해 국가가 모든 국민의 나라가 되기까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기업을 그렇게 민주화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물음의
시작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 내가 혼자서 이런 질문을 처음 던진 것은 1987년 남의 나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한국은 6월항쟁으로 군부독재가 끝나가고 있었는데, 독재가 무너지고 나면 머지않아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되리라는 것은 어리석은 내가 생각해도 분명한 일이었다. 누구의 노예도 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려는 것은 사람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이다. 하지만 세상엔 다른 사람을 노예로 삼아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이 없어지지 않는 한, 억압에 대한 저항과 자유를 위한 투쟁도 끝날 수 없다.
그런데 억압의 주체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므로 저항과 투쟁의 표적 또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이를테면 동학농민전쟁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기본적으로 왕조시대에 봉건왕조와 양반계급이 백성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었다. 그 저항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라가 통째로 제국주의 지배 아래 들어간 뒤 일어난 3.1운동은 민족적 저항이었다. 해방이 된 뒤 4.19에서 부?마(1979년 부산·마산 민중항쟁)와 광주(1980년 광주민중혁명)를 거쳐 87년 6월항쟁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우리는 다시 국가권력을 찬탈한 독재자들에 저항해 싸워야 했던가? 그렇게 이어져 온 저항과 항쟁의 역사는 세계사적으로 보더라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니, 생각하면 할수록 자랑스런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유구한 억압과 저항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군부 독재자들이 물러간 자리에 자본가들이 왕 노릇 하는 것을 보고 있다.
물론 87년 당시에 내가 무슨 점쟁이처럼 그 이후 일어날 일을 예상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후 한국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든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극복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참된 자유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은 그 당시 내가 아무리 학문이 얕고 생각이 짧다 하더라도 불 보듯이 명확한 일이었다. 다만 독재타도가 선결문제가 되어 있었을 뿐, 이미 안으로는 산업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밖으로는 나라 경제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어 돌아가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는 한국사회에서도 더는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것이 보편적이고 절박한 문제라 해서 아무나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생각하거나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분야에 따라 엄연히 전문가들이 있고 원칙적으로 그 전문가들이 해당 문제에 대해 대답을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란 다른 무엇보다 경제체제를 가리키는 이름이요, 그런 만큼 자본주의를 극복할 길을 찾는 것은 경제학자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의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고 또 그 극복의 방안을 어떻게 제시하는지를 경청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나는 학창시절부터 나의 본업인 철학을 공부하는 것 외에도 틈틈이 경제학은 물론 다른 사회과학자들에게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려 애썼다.
그러나 쓸모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의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불변의 현상으로 인정하고 다만 체제 내의 경제운용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 그 체제 자체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도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가장 좋은 경제체제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알려달라고 어떻게 청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나는 자본주의의 비판과 극복을 위해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서 시작해 왜 멸망할 수밖에 없는지 그 필연성을 설명하는 데 마르크스만큼 ‘과학적으로’ 이로정연하게 설명한 사람은 예전에도 없었고,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아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마르크스-엥겔스와 그 후예들이 자본주의 극복의 길을 어떻게 제시하는지를 살펴보기 시작한 뒤에 나는 갈수록 당혹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상은 너무 높은데 반해 그 이상에 이르는 길은 너무 모호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즉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삶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으뜸가는 삶의 욕구가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원천이 흘러넘치고 난 후에-그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상의 실현가능성을 의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이런 이상을 싫다 하겠는가? 비록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 하더라도 조금이나마 저 이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그것을 위해 내 모든 삶을 다 바쳐도 좋겠다는 것은 또래 젊은이들과 함께 내가 품었던 소망이기도 했다. 문제는 꿈 그 자체가 아니라 꿈을 실현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노예적 예속을 철폐할 수 있으며, 또 노동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 삶의 욕망이 되고 그런 까닭에 개인들의 모든 가능성이 최고도로 발휘되어 결과적으로 생산력도 발전하고 더 이상 결핍이 없어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면 되고 그러면서도 필요한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그런 사회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잘 알려진 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물음에 대해 “사적 소유의 철폐”가 정답이라고 주장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 문구에 한 마디를 더 붙여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철폐라고 말한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왜곡 없이 표현하게 될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5. 국가 자본 및 배타적인 독점권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하여 신용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 6. 운송수단을 국가 수중으로 집중. 7. 국가가 소유하는 공장 및 생산도구의 증대. 공동계획에 의한 토지의 개간 및 개량”등을 생산수단 사회화의 주된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경제야말로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했던 노동해방의 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생산수단이 ‘국유화’된다 해서 노동자들이 해방되리라는 추론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자본가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기업을 소유하고, 국가가 임명한 관료가 공장을 관리하고 경영한다 해서 노동자가 억압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까닭은 국가의 권력을 독점한 자가 자본을 소유한 자에 비해 더 선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보자면 생산 수단을 국가가 소유하든 자본가가 소유하든 노동자가 공장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국가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가 아니라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대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두둔하는 사람들은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선량한 독재의 주체라고 가정하고 말한다. 어쩌면 국가권력을 장악한 레닌이나 스탈린은 자기 자신을 해방된 프롤레타리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스탈린적 독재의 객체일 뿐인 노동자라면?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그런 독재의 희생자인 농민이라면? 아무리 선량한 독재라 하더라도 그 독재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노동자는 주인이 바뀌었을 뿐 예속된 노예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독재 아래 있는 자는 자기 삶의 주인이라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타인의 후견과 보살핌 아래 있는 사람을 자유인이라 할 수도 없다.
아직 소련이 붕괴되기 전이었던 시절에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쁘띠부르주아적 소아병이라고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경우에도 내 자유를 그들이 말하는 독재에 헌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자본에 의한 인간의 예속이 명백한 악이듯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한 인간의 예속 역시 어떤 방식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악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박정희의 독재가 나쁘다면 김일성의 독재도 나쁜 것이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대단한 차이라도 있는 듯이 장광설을 늘어놓는 친구들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둘 다 나쁘다 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할 수도 없는 일이건만, 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며 또 할 수 있는지 누구에게도 대답을 듣지 못했고 나 스스로 그 대답을 찾을 수는 더더욱 없었다.
내가 왜 노동자들이 사장을 뽑으면 안 되는가라는 엉뚱한 질문을 던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노동자의 자유와 주체성은 그가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형성하는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실현된다. 하지만 공장이나 기업 내에서 어떤 노동자도 ‘홀로주체’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의 자유로운 자기형성은 동료 노동자와의 만남 속에서 생산활동의 ‘서로주체’가 되어 그것을 공동으로 결정하고 형성하는 활동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공장이나 기업 내에서 이처럼 노동자 공동의 자기결정이 일상화된다면, 기업은 임금노예들의 강제노동수용소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도 같은 자유 시민들의 삶의 공동체에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물론 오늘날 거대화되고 전문화된 기업 내에서 모든 일을 모든 노동자들이 때마다 토론해서 같이 결정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공상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모든 공화국들이 그렇게 하듯이 기업도 전문경영인 사장을 적절한 임기를 두고 노동자들이 선출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가 노동자들의 신임을 얻으면 계속 사장 노릇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야 할 것이다. 사장이 물러나지 않으려면 노동자들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므로, 이렇게 되면 우리는 비록 간접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노동자들의 공동의 의지에 따라 회사가 운영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장은 아테네 같은 폴리스가 되고 노동자는 그 폴리스의 주권자인 자유로운 시민이 될 것이다. 공장이나 기업이 그런 폴리스 또는 그런 공화국이 되면 안 되는 까닭이라도 있는가? 이것이 막연하나마 20여 년 전 내가 품었던 두서없는 생각이었다.
기업이 된
국가
하지만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더 진척시킬 수 없었다. 주관적으로 보자면 아직 내가 그 생각을 끝까지 이끌고 갈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설령 이런 생각들이 성숙해 어떤 열매를 맺었다 하더라도 그때는 그런 생각이 무슨 대단한 반향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진 산업국가들은 여전히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한국은 정치적 민주화도 달성하지 못한 처지에 경제의 민주화를 생각하기엔 너무 이른 시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20여 년 한국도 세계도 변했다. 그 변화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오래전 함석헌이 말했듯이 오늘날 국가가 더도 덜도 아니고 기업국가가 되었다는 데 있다. 기업국가란-링컨의 유명한 말에 빗대어 표현하자면-기업을 위한, 기업에 의한, 기업의 국가를 의미한다.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국가가 아니라, 기업을 위해 존재하며, 기업에 의해 통제되고 조종되며, 그런 까닭에 기업의 이윤추구의 수단이 되어버린 국가가 바로 기업국가이다. 그 결과 점점 더 기업을 닮고 기업에 동화되어 이윽고 그 자체로서 기업이 되어버린 국가가 바로 기업국가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이 바로 그런 기업국가인 것이다.
이처럼 국가가 기업에 동화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나라 안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모르는 사이 다시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확산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기업이야말로 어차피 사장을 선거로 뽑는 단체가 아니므로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독재적인 조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정신에 투철한 학자나 지식인들은 자본주의 경제제도와 자유민주주의가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속한다고 믿지만 이는 가엾은 자기기만이다. 특히 한국처럼 사회적 관계에서도 봉건적인 주종관계가 다 청산되지 못한 나라에서 기업은 세상에서 가장 독재적인 조직이다. 상사가 퇴근하지 않으면 부하직원도 퇴근하지 못하는 조직, 주인이 화장실을 가지 않는다고 머슴도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조직이 재벌 기업이다. 그리고 그 많은 기업집단의 지배권을 2대, 3대를 이어 자식에게 세습하는 집단이 재벌 기업이다. 박정희나 전두환의 독재와 김일성,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합친 것이 바로 이 나라 재벌의 행태인 것이다. 거기 무슨 민주주의의 정신이 뿌리내릴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국가가 통째로 기업국가가 되어버리면 나라 안의 모든 공동체들 역시 민주주의가 질식하고 독재와 권위주의가 지배하게 되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총장을 교수를 비롯한 대학 구성원들이 선출하는 것은 87년 민주화의 중요한 성과들 가운데 하나였다. 나라가 민주화된 만큼 나라 안의 크고 작은 공동체들 역시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즈음 우리는 나라가 기업국가화 되면서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국립대학의 총장직선제를 폐지할 것을 압박하는 것이 이즈음의 상황이다. 그 까닭은 대학도 기업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왜 국가가 기업이 되어야 하며, 왜 국가 내의 모든 조직과 기관이 기업을 닮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 까닭은 국가의 목적이 기업의 목적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목적이 이윤추구이듯, 국가 역시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 내의 다른 모든 공동체들도 이윤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은 조직이 있다면, 그것은 무위도식하는 조직, 국가와 사회에 폐를 끼치는 조직이라는 것이 이즈음의 이데올로기이다. 국가가 기업국가가 되었다는 것은 이처럼 경제적 이익의 추구가 국가의 목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치의 원리와 경제의 원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는 자유의 이념에 기초하고 있지만, 다른 하나는 필연성의 원리에 매여 있고, 하나는 정의를 추구하지만 다른 하나는 이익을 추구하며, 하나가 공공성의 원리라면 다른 하나는 사사로운 개별성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국가경영의 원리와 기업경영의 원리 역시 같은 것일 수 없다.
기업이 아무리 많은 사람을 상대하더라도 원칙적으로 그것은 개별적 이익을 추구하지만, 국가가 설령 어떤 기업을 운영하더라도 그것은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공적 복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국가가 기업화되면서 국가와 기업의 이런 구별이 사라지고, 아예 국가가 기업의 이윤추구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가 추구하는 이윤이 우리 모두를 위한 이윤일 수 있다면 내가 그것을 굳이 나쁘다 말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추구하는 이윤은 결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사적으로 소유될 수 있는 이익만이 자본주의적 기업이 추구하는 이윤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플라톤의 철학과 베토벤의 음악을 자기 지갑이나 금고 속에 독점할 수 없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 공공적 존재자이자 보편적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자기 지갑이나 금고에 넣을 수 있는 것, 자기 혼자 소유할 수 있는 것, 오직 그렇게 사사로운 것만이 기업이 추구하는 이익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기업의 이윤추구의 도구가 되어버리면, 우리의 삶에서 공공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의 집은 사적 이윤이라는 염산이 섞인 빗물에 침식될 수밖에 없다. 그리되면 너와 나의 인격적 만남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경쟁과 다툼 속에서 찢어지고 우리는 서로 고립되며, 결국에는 경제적으로도 가난해진다. 왜냐하면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까닭은 모두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마지막 한 사람의 사적 이익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경제적 양극화란 국가가 기업이 될 때 일어나는 필연적 결과이다.
(머리말,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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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상봉
‘만남’의 철학자는 ‘길’ 위에서 쉬는 법이 없다. 80년대 초반 을지로 야학에서 어린 노동자들과 추운 밤을 보낸 시절부터, 독일로 건너가 칸트에 대한 논문을 끝내고 돌아온 뒤 지금까지 진정한 만남의 공동체를 향한 그의 열정은 계속되고 있다.
한때는 ‘거리의 철학자’가 그의 이름이었다. 막막한 길 위에서 7년 동안 다섯 권의 철학책을 썼고, 주체성을 박탈하고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학벌체제를 폐지하기 위해 <학벌없는사회>의 산파가 되었다. 그의 철학의 핵심어는 ‘서로주체성’이며, 외부로부터 이식된 근대를 거부하여 주체성의 새로운 지평을 독자적으로 개척했던 ‘미완의 함석헌’은 그의 일생의 숙제이다. 이런 그에게 자본권력과의 싸움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유학 당시 매일매일 빼곡이 써내려간 작은 공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공장의 폴리스(polis)화. 폴리스로서의 공장. 즉, 하나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단위로서의 공장. 이때만이 모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왜 사장은 선거를 통해 뽑으면 안 되는가?” <철학의 연습을 위한 짧은 메모들>(1987. 11. 23)
6월항쟁을 ‘성공한 항쟁’이라 말하는 언설의 이면에는 그 뒤 이어졌던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기억이 배제되곤 했다. 그 결과 ‘민주정부 10년’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기업지배국가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슬픈 역설이 탄생했던 것이다. 오늘의 금융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지배원리는 주식회사이며, 자본의 소유권을 당연시하고 전횡을 방치하는 한 민주주의는 껍데기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왜 경영자를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 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인간의 자유가 자본에 영구히 종속되는 모순을 극복하는 ‘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호모 에티쿠스』, 『나르시스의 꿈』,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학벌사회』, 『만남』, 『굿바이 삼성』, 『다음 국가를 말하다』 등 다수의 책을 펴냈으며, 현재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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