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만물의 이면에는 우리가 실제로 직접 증명할 수는 없지만 감지할 수 있는 사물의 신성한 규율이 있단다. …… 섭리에 대한 믿음은 모든 믿음의 최종적인 귀결이자 실체일진대, 이 점에 관해 나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
- 랑케가 아들에게(1873년)
빛이 강렬한 곳에도 짙은 그림자는 있다.
- 괴테, 〈괴츠 폰 베를리힝겐〉 1막
위대한 사람들의 미숙함은 보통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이다. 냉소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천재들이 보통 사람보다 일상생활을 더 잘 꾸려 나가지도 않으며 때로는 자기들보다 훨씬 못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만족해 한다. 냉소적 성향을 가진 사람만이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천재들이 보통 사람들 또는 대단치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심적으로 언제나 천재들의 편에 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떠올리며 다소 위안을 얻는다.
- E. H. 카, 〈러시아인들의 양면〉, 《포트나이틀리 리뷰》
머리말
E. H. 카라는 이름은 도발적인 저작 《역사란 무엇인가》 덕분에 역사 교사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친숙할 것이다. 또 소비에트 역사 전공자들에게는 레닌에서 스탈린까지 이어지는 러시아혁명을 다룬 14권이라는 결코 만만치 않은 저작의 지은이로 기억되고 있다. 19세기 러시아에 매혹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 그는 《낭만의 망명객들》을 통해 알렉산드르 게르첸과 그의 동료들을 우아하게 묘사한 작가였다. 그런가 하면 정치학자들에게 《20년간의 위기, 1919~1939》(The Twenty Years’ Crisis, 1919~1939)는 여전히 고전이다. 오랜 시간을 외교관으로, 그다음에는 《타임스》의 논쟁적인 부편집인으로 영국에 봉사하였다. 가족들에게 그는 언제나 “연구밖에 모르는 학자”였고 친구와 동료들에게는 그냥 ‘테드’였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 카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자 접근하기 어려운 인물, 인간이라기보다는 반신(또는 악마)과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이유들 탓에 그에게는 찬사뿐 아니라 비난도 쏟아졌다. 이런 인물을 두고 어느 누구도 무관심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던 상황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카를 존경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당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그토록 용감하고 단호하게 발언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수많은 적군을 만들기 마련이었다. 한때 트로츠키주의자였던 맥스 이스트먼(Max Eastman)은 그를 “혁명적 폭력이라는 대안적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따뜻하고 조용한 심성을 지닌 부르주아”로 묘사했다.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증오를 결코 숨기지 않았고, 극단주의자들이 어리석고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는 경우에도 …… 그들을 끝까지 두둔했다”는 이유로 그를 공격했다.
한편 몇몇 뛰어난 동료들은 카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전학자 모제스 핀리(Moses Finley)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절제된 지성의 소유자”라고 썼다. 휴 시턴-왓슨(Hugh Seton-Watson)에게 카는 언제나 “존경과 감사의 대상”이었다. 한때 공산주의자였지만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미국인 버트램 울프(Bertram Wolfe)는 그를 변증론자로 비난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학자다운 모습과 성실함, 자료를 다루는 완벽함 때문에 존경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부당한 비난의 대상이든 존경의 대상이든, 그는 그 시대에 너무나 커다란 영향을 남겨서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존재이다. 이것이 E. H. 카에 대한 평전이 필요한 까닭이다.
나는 카를 1973년부터 알고 지냈다. 그는 오랫동안 거의 모든 측면에서 비타협적이었고 고립적이었다. 친절하고 재치가 넘치고 사소한 뉴스에도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충실했지만, 경우에 따라 무뚝뚝하고 눈앞의 일과 관계없는 질문에는 대답하기를 싫어했고 친밀함을 드러내는 이에게 싫증을 내기도 하는, 한마디로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에 관한 모든 것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암으로 투병 중이던 마지막 순간에는 과거보다 약한 면을 보여 주기도 했다.
E. H. 카에 대한 연구는 애초에 순전히 지적인 평전로 방향을 잡았지만 불가피하게 다른 무언가로 옮아가고 말았다. 이사야 벌린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한 사람의 전체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런 생각은 뒷날 두말할 나위 없는 진실로 드러났다. 카가 좋아하는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던 니콜라이 베르자에프(Nikolay Berdyayev)는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다. “학자를 개성과 무관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뛰어난 학자는 뛰어난 개성의 산물이다. 바로 그러한 개성의 깊이로부터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창조성을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 우리는 그 인물이 살아온 시대가 부여한 중요한 역할을 첨가해야 할 것이다.
카는 전기 작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엄청난 양의 출판물 말고는, 1925년부터 1960년까지 쓴 비망록과(그 이후 기록들의 행방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얼마 되지 않은 육필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형편은 카의 삶을 백지 상태에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을 완성하는 데 1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인생 여러 단계에서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쓰는 데 기초 자료를 제공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움을 준 사람들뿐 아니라 실제 전혀 관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 결과물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를 두려워하고 싫어했던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여기에 인용된 카의 기록과 관련하여 버밍엄대학 문서보관소에서 그 원본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에 편지와 비망록 사본도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나머지 기록들은 개인이 보관하고 있는 것들이다. 증거 자료를 찾을 수 없을 때 나는 카에게 직접 듣거나 아니면 그의 직계가족한테서 정보를 얻었다. 자료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도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내용은 자료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기억이 고정된 정보 보관소가 아니라 끊임없는 재창조의 과정이라는 점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
케임브리지대학 코퍼스크리스티칼리지에서
2000년 4월 조너선 해슬럼
1
소심하지만 뛰어난 학생
빅토리아시대의 중산층 가정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 Carr, 애칭은 ‘테드’)는 1892년 6월 28일 화요일, 빠르게 팽창하고 있던 런던 북쪽 근교의 어퍼홀러웨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제시(Elizabeth Jessie, 결혼 전 성은 핼릿)이고 아버지는 프랜시스 파커 카(Francis Parker Carr)이다. 그날은 습도가 매우 높은 날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심한 천둥 번개가 그날 저녁부터 목요일 이른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정치적 분위기 또한 심상치 않았다. 북부 아일랜드의 얼스터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수상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Gladstone)은 《타임스》가 분명한 어조로 “국가에 대한 뻔뻔스러운 협잡이자 기만”이라고 비난하고 있던 아일랜드 자치법에 집착하고 있었다. 글래드스턴은 의회를 해산하고 하원에서 압도적 다수를 확보하기 위해 총선을 요구했다. 빅토리아시대(1837~1901)에 형성된 나라 안의 정치적 합의는 아일랜드 문제라는 거대한 무게에 짓눌려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다. 다른 문제들도 떠오르고 있었다. 비록 여전히 세계의 은행이긴 했지만 더 이상 세계의 공장은 아닌 영국은 당시 국부의 분배를 압박하며 조직되고 있던 노동계급을 상대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징후들이 커다란 문제를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국인들에게 글래드스턴은 누가 봐도 성공적인 사회질서를 해체해 나가면서 약간 모호하지만 심술궂게 이런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질서의 기초는 최대한의 자본 축적을 보장하기 위해 짜여졌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의기양양하게 “투자 정신과 시대의 부”를 찬양했고, 전 세계적으로 “인류의 새로운 활동 덕분에 많든 적든 혜택을 입지 않은” 나라는 찾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소득은 이제 지출보다 저축으로 쌓여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자본 총액이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카의 가족은 “부유하지만, 존경할 만하며, 근면한 부르주아지”를 대표할 만한 전형적인 사람들이었다.
카의 가계는 스칸디나비아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게 거의 확실하다. 가족의 성은 잔목(殘木) 또는 습지를 뜻하는 중세 영어 ‘커’(kerr)에서 유래했고, 이 단어는 다시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크헤르kjarr, 스칸디나비아 신화에서 나오는 인물로, 로마제국 황제에 비견될 수 있다에서 나왔다. 바이킹 정착자들은 노르만을 정복하기 수백 년 전에 잉글랜드 북동부의 광범위한 지역을 식민지화했다. 우리가 테드의 조상을 만나게 되는 때가 바로 중세 후반기이다. 조지 카(George Carr)는 상인이었고 1450년에는 행정관을 지냈으며 뉴캐슬의 8선 시장이기도 하였다. 조지 카의 가족은 15세기와 16세기에 모험 상인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영국 내전1640~1646, 의회를 무시하고 실정을 거듭한 찰스 1세에 대해 항거한 의회파와 그를 지지한 왕당파 간의 싸움. 청교도혁명이라고도 한다. 카의 선조들은 이 내전에서 왕당파 쪽에 섰다에서 패한 진영에 서는 바람에 사회적 지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왕정복고 이후인 1693년에 태어난 매슈 카(Mathew Carr)는 선덜랜드에서 신분이 낮은 닻 제작자로 생계를 이어 갔다. 그 뒤 가문의 한 분파는 요크셔를 거쳐 남쪽으로 이주하였으며, 18세기 말 무렵이 되면 가죽 닦는 비누 생산자에서 검정 구두약 생산업자로 변신한 테드의 증조부가 런던 북쪽 교외의 바네트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 로버트가 1819년에 하이게이트에서 태어난다. 그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테드의 아버지 프랜시스 파커는 가장 가난했다.
프랜시스에 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케임브리지의 최우수 학생 후보군에 속할 정도로 집안에서 매우 똑똑하다는 평판을 얻었고 …… 꽤 유명한 체스 기사”였다. 프랜시스의 생업인 필기용 잉크 판매는 빅토리아시대에 중산계급 가정을 충분히 부양할 만큼 안정된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커다란 부를 축척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야망이 없었다. 실제로 테드가 태어난 어퍼홀러웨이 글래드스뮈어가 62번지의 집은 지금도 여전하듯이 당시 그 지역의 전형적 형태인 아담한 반독립 가옥이었다. 테드의 부모는 임신 중에 새로 지은 그 집으로 이사했는데 당시 길 맞은편의 대부분 지역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교사와 은퇴한 목사, 사무원, 타자수, 언론인, 양말 장수 등 도시 근교에서 안락한 삶을 이루고 있는 다른 이웃들의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공간만 허락되면 입주 하인을 고용할 수 있었다. 어퍼홀러웨이는 하이게이트보다 사회적 위계에서 좀 더 높은 지위에 있는 햄스테드를 천천히 따라가고 있었다. 햄스테드를 넘어서면 핀칠리와 북쪽의 헨던 같은 마을을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이 펼쳐진다. 가족은 “전형적인 중산계층이었고 완전히 빅토리아적”이었다고 카는 회상했다. “내 기억에 우리 가족은 한 번도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카가 태어난 가정은 그야말로 안정적이고 정상적이었지만 단 한 가지 결정적으로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카의 집에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이모(제시의 언니) 노처녀 아멜리아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굶주린 사랑을 카에게 집중함으로써 해소하려고 했다. 그녀는 카가 나중에 “저 빅토리아시대의 공포, 의존적 친척”이라고 생생하게 회고한 사람이다. 1895년 6월 24일 남동생 프레드릭이 태어났을 때 제시의 건강은 좋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이 기회를 틈타 자기 욕심에 어린 테드를 낚아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녀를 제지할 정도로 단호하지 못했기에, 제시가 건강을 회복할 무렵에 이르러서야 카의 부모는 아멜리아의 욕망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미숙한 세 살 때 어머니의 보살핌으로부터 갑작스럽게 멀어짐으로써 동생들이 태어날 때마다 흔히 아이들이 겪는 문제가 그에게는 한층 더 심각하게 나타났다. 한참 뒤에 테드는 불행한 어린 시절에 겪은 충격을 회상하곤 했다. 이렇게 고백한 적도 있다. “그래요. 이런 기억을 떠올리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만, 나는 혼자 외롭게 성장했기 때문에 감정 상태가 언제나 약간 삐딱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남동생과 여동생은 테드가 세 형제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자신은 스스로를 외로운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부모한테 느낀 소외감의 정도는 그가 말년에 《후즈후인명사전》에 등재되었을 때, 부모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또한 테드가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 친구(타마라 도이처)가 “고아 같다”는 말을 건네자 그는 지체 없이 공감하였다. “그 말이 나한테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한테서 받는 것들은 상당한 영향력이 있게 마련이죠.”
소심한 아이 카는 내면에 ‘외로움과 냉정함’을 지니고 성장하였다. 그는 사랑 받기를 무척 갈망했지만 동시에 감정의 상당 부분을 억제하는 것도 배웠다. 겉으로 드러나는 자제력 때문에 그는 불가피하게 또래 집단으로부터 멀어졌다.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지만 그는 그러한 감정들을 글로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친구와 가족들이 카의 행동 방식을 보고 그가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려면 여러 해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 거르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분출하는 것은 스스로를 아프게 하였다. 그는 뒷날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배멀미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첨예하고 격렬하게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는 심적 배멀미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아멜리아가 테드를 학대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녀는 야망이 없는 아버지와 허약한 어머니가 베풀지 못한 삶의 방향감각을 제시하였다. 동시에 테드의 라틴어 학습과 관련된 학교 과제를 지나치리만큼 많이 도움으로써 해를 끼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테드는 이러한 공부를 통해 통제되지 않은 맹렬한 감정의 바다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얻게 되었다. 1900년 1월 22일에 출생한 ‘아이크’라는 별칭을 가진 여동생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늘 아멜리아 이모는 숙제를 시키기 위해 오빠를 자기 방으로 서둘러 끌고 갔다고 회상했다. 그러한 관계는 풍성한 결과를 낳았고 남동생과 여동생은 테드의 남다른 관심을 부러워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모 아멜리아가 테드를 아무리 사랑했다 할지라도 그녀가 테드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테드의 가정과 관련하여 또 하나 색다른 점은 그가 공동체 안에서 고립된 가족 출신이라는 점이다. 카는 “나는 40~50명 친척들만으로 이루어진 폐쇄된 사회에서 …… 성장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였다. 이 점은 뒷날 도스토옙스키 전기를 쓰는 과정에서도 쉽게 포착된다. “어린 시절에 함께 놀 친구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은 도스토옙스키의 인생과 작품 모두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방 세 칸짜리 집에서 여섯 형제자매와 더불어 성장한 사람이 고립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얘기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 가족은 분명히 고립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사회적 활동이 없었고 모든 활동과 반응은 외향적이 아니라 내성적이었다.”
동생 둘이 더 태어남에 따라 리스데일에서 멀지 않은 노스혼시의 크라우치힐에 있는 더 넓은 주택으로 이사를 갔지만 고립되어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카의 친척들은 보통 일요일 점심때 하이게이트 근처에 살고 있는 큰아버지(프랜시스의 형) 랠프 카의 훨씬 넓은 집에 모였다. 나머지 사회생활 역시 가족 중심적이었고, 그 결과 삼촌 알프레드를 제외하고 친척 모두가 가족 경영에 참여하였다. 사소하지만 주목할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카의 친척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유머를 만들어 함께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 점은 그들과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게 된 이들의 생활을 다소 곤란하게 만들었다. 테드는 자신이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다른 사람들은 재미없어 하는 것에 웃곤 하였기 때문에 ‘비틀린 유머 감각’을 가졌다고 비난받았다”라고 회상하였다.
머천트테일러스스쿨
이처럼 테드의 성장 환경은 폭이 좁았고 오직 책을 통해서만 다른 세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테드가 열세 살이 될 때까지 그의 학교생활에 관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다만 키가 아주 크고 말랐으며 지적이고 통찰력이 있었다고 한다. 눈이 근시였고 친척들 대부분의 특징인 주먹코를 다소 닮은 코를 가지고 있었던 테드는 내성적이었고, 반사회적이라기보다는 과묵하고 놀이기구보다는 단어를 더 좋아하는 아이였다. 사랑보다는 곧바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아이였지만, 천성적으로 타고난 재치로 자기보다 영리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빅토리아시대의 전형적인 가치 가운데 하나인 절약이 몸에 밴 부모는 카의 중등 교육비를 들이지 않았다. 테드는 1905년 머천트테일러스스쿨(Merchant Taylor School)의 장학금을 확보하였다. 당시 이 학교는 런던 중심부 차터하우스 광장으로 옮겨 와 왕실 가족이 세운 웅장한 빅토리아풍의 고딕 양식 건물에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크로우치힐의 집에서 그는 북부철도 열차가 내뿜는 증기와 유황 냄새를 맡으며 앨더스게이트Aldersgate, 런던으로 들어가는 성문 가운데 하나로 17세기 초반에 건설되었다와 소매치기, 그 밖에 크고 작은 범죄로 악명이 높은 도시로 통학하였다.
머천트테일러스스쿨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런던에서 통학할 수 있는 근교의 공립학교들에게 학생들을 빼앗기자 약간의 위기를 느꼈지만, 카에게는 더 나은 선택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올바른 선택이었다. 교장 존 나린(John Narin)은 연구교수로 있던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 학부 과정의 고전 수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스물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인 1900년에 이 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는 눈에 띄는 실수를 저질렀다. 경험이 부족한 나린은 그때까지 머천트테일러스의 고전 분야 최우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던 옥스퍼드대학의 세인트존스칼리지와 심각하게 충돌하였다. 교장이던 그가 1902년부터 1911년까지 화해를 거부했기 때문에 고전 분야의 최우수 학생이면서 세인트존스칼리지로 진학 예정이던 대부분의 학생 대표는 다른 곳으로 진학해야 했다. 또 1914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 이사회의 감사 보고서는 수업 시간이 너무 짧고 숙제는 너무 많으며 다수 학생들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아 소수만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의 고전 분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나린이 교장으로 부임했을 때 최신 교과목들은 거의 개발되지 않았지만 그가 오고 나서 다소나마 진전을 이룩해 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 학교는 “공립학교 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은 부모를 둔 중산계급의 소년들에게 중등교육과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입학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테드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는 세계였다. 학생들은 풀 먹인 하얀 이튼칼라 교복을 입었다. 4학년이 되면 중산모도 쓸 수 있어서 실제 그렇게 하기도 하였으며 여름에는 맥고모자를 쓰기도 하였다. 엄격한 규율이 있었지만 이 학교는 의심할 바 없이 비범한 개성의 장이기도 하였다. 학교의 단체 사진에서 학생 하나하나가 자신만의 동작을 취하고 있는 장면은 그런 학풍을 잘 보여 준다. 게다가 기발함은 교사로서 으뜸으로 갖추어야 하는 요건은 아니더라도 차선쯤은 되었다. 차터하우스 광장에서 몇몇 교사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거만했지만, 그들은 대개 유능할 뿐 아니라 친근하다는 명성을 유지하였다. 고전을 가르치는 유능한 교사 콘웨이는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한 학생은 콘웨이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무너져 버리는 럭비 스크럼을 발견한 첫 수업을 이렇게 회상했다. “콘웨이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학생들이 서로에게 공을 던지고 있었기에 교사 주위를 감싸고 있어야 하는 존경의 영역이 침해받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기분이 몹시 상했고 학생들을 혐오하게 되었습니다.” 고전 분야의 또 다른 교사였던 뱀스필드는 키가 크고 짙은 머리에 잘생긴 남자 교사였다. 그는 언제나 낡은 검정 코트와 갈색 코르덴조끼를 입었으며 널리 존경을 받고 있었다. 뱀스필드는 테드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학의 아름다움을 학생들에게 소개하였다.
지적으로 자신만만했던 테드는 자주 “학급에서 일등을 차지하였고” “교과과정상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과학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과목에서도” 잘할 수 있다는 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1906년 첫 학년을 마치면서 그는 수학과 신학 우등상 그리고 모범상을 들고 집으로 갔다. 실제로 이후 경력과는 어울리지 않게 처음에는 수학과 성경에서 가장 높은 학업 성취도를 보였다. 게다가 드물긴 하지만 그는 아흔 나이에 이르러서도 성경을 인용하는 데 놀라운 소질을 드러냈다. 물론 저학년 학생이 치러야 할 개인적인 대가도 있었다. “학급에서 언제나 일등을 차지하는 학생들은 동급생들한테 인기가 없었다.” 게다가 테드는 멍청한 학생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통학에는 몇 가지 장점도 있었다. 고학년 학생들은 주변의 동행자들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어서 학교 가는 길에 아침 신문을 읽었다. 그 당시 주변 세계에 대해 우경화되어 가던 경제.정치 제국의 중심지를 학습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생각도 향상되었다. 테드는 동료 학생들과 달리 자유당을 지지했다. 반면 테드의 아버지는 1895년과 1900년에 치른 선거에서 보수당을 지지했다. 그런데 “열렬한 자유무역 옹호자”이던 그는 보수당이 독일과 미국의 격렬한 경쟁에 직면하여 산업보호 정책으로 전환하자 테드와 더불어 자유무역을 확신하고 있던 자유당으로 전향하였다. 실제로 테드는 아버지의 “자유무역의 장점에 대한 논리적 설명과 ‘관세 개혁론자들’의 불합리한 오류의 분쇄”를 “합리적 주장의 과정에 대한 최초의 통찰” 기회였다고 회상하였다.
1906년 총선에서 거둔 자유당의 승리는 테드에게 “첫 정치적 기억”이었다. 그는 로이드 조지의 사회개혁안에 대해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변하지 않고 “로이드 조지의 집권 기간 내내 자유당을 확고하게 지지했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고 지적하였다. 테드의 친구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정통 보수당 가정 출신이고 그들은 로이드 조지를 악마의 화신이라고 여겼다”는 점이 그를 힘들게 했다. 테드에게 로이드 조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변치 않는 영웅이었다. 학교에서 자유당은 “무시될 만큼 극소수”였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은 그 무렵 이미 깊숙이 스며든 고립감을 더욱 강화시켰다.
(머리말 일부,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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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조너선 해슬럼 Jonathan Haslam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부 교수. 영국 학술원 회원.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에서 E. H. 카의 지도를 받고 버밍엄대학에서 소비에트의 외교정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예일대학, 하버드대학, 스탠퍼드대학, 프린스턴대학 고등연구원 등의 초청으로 다년간 미국에서 연구하고 강의했다. 현재 냉전 시대의 국제관계와 유럽 현대사를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Russia’s Cold War, 1917~1989(2011), The Nixon Administration and the Death of Allende’s Chile(2005), No Virtue Like Necessity(2002), The Soviet Union and the Threat From the East, 1933~1941(1992), The Soviet Union and the Politics of Nuclear Weapons in Europe, 1969~1987(1989), The Soviet Union and the Struggle for Collective Security in Europe, 1933~39(1984), Soviet Foreign Policy, 1930~33(198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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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박원용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소비에트 집권 초기 고등교육기관의 개혁〉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네프기(1921~1928) 학생집단의 생활양식: 노동자 예비학부를 중심으로〉, 〈‘신체문화’에서 ‘선수 양성공장’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체육정책 변화>, 〈10월혁명의 영상독해: 에이젠슈테인의 ‘10월’을 중심으로〉, 〈스탈린 체제 일상사 연구의 현황과 쟁점〉 등의 논문을 통해 1920년대 러시아 사회를 영화와 여가활동 등 문화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연구와 1930년대 스탈린 시기의 일상사 연구를 진행했다. 현재 1920~30년대 미국과 소련의 상호 이미지에 관한 연구에서 시작하여 냉전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함께 지은 책으로 《역사가들》(2011), 《19세기 동북아 4개국의 도서분쟁과 해양경계》(2008) 등이 있고, 《10월 혁명: 볼셰비키 혁명의 기억과 형성》(2008)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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