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내며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는다. 어떻게든 진보 교육감 발목을 잡으려는 보수 진영의 공격은 처절하고 야비하고 집요하다. 물론 진보 진영도 힘을 내어 이에 맞서고 있다. 그런데, 저들만큼 절실해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교육운동을 이끌고 있는 전교조의 태도는 시종일관 미지근한 것 같다. 실지로 인권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전교조 교사들의 태도가 여느 교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학생인권 도입을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러지 않아도 아이들 다루기가 힘든데 인권을 악용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느냐’고 하소연하거나 ‘학생인권만 중요하고 교사인권은 무시해도 되는 것이냐’고 따지는 이들이 제법 많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교육운동 진영의 ‘인권 수준’이다. ‘대의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구현되고, 합법이라는 울타리 안에 안주하면서 이념과 열정을 상실한 교육운동의 초라한 모습이 ‘인권’을 만나면서 드러났다. 전교조 교사들조차 인권을 학생지도 매뉴얼로 받아들이거나, 마음 좋은 어른들이 주는 선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교육운동 진영에서 ‘학생인권’이란 말을 꽤 오래 전부터 써 오긴 했지만, 그에 대하여 절실하게 고민한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전교조 교사들 역시 인권의 소중함을 느낄 기회조차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인권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도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인권이 교문 안으로 들어왔다. ‘뜻밖의 선물’이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지, 어떻게 쓰면 좋은 것인지 잘 모른다. 정체를 모르니 불안하다. 언론에서는 그것이 몹쓸 것이라고 난리를 친다. 참 난감한 상황이다. 일단 창고에 넣어 두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인권을 조금 먼저 만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 왜 학교에 인권을 들여야 하는지, 학교에 들어온 인권이 학생들의 삶을, 교사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낼 수 있는지, 인권이 우리를 어떤 세상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 말을 해 보기로 했다.
처음에 《오늘의 교육》에서 멍석을 깔아 주어 인권운동활동가, 교사 몇 명이 이야기를 시작했고,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붙었다. 각자 서 있는 자리도 다르고, 보는 지점도 다르고, 글을 풀어내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한 가지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인권 없이는 교육도 없다.
2012년 3월
저자들을 대신하여 박복선
1부 혼란을 통한 성숙
체벌 금지 이후,
학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엎드려 뻗쳐 5초 시켰다고 교사 징계 반발”
“휴대폰 압수한 교사 폭행 사실 뒤늦게 밝혀져”
2010년 11월, 서울시교육청이 ‘체벌 전면 금지 조치’를 내린 후 언론은 연일 학생이 교사를 폭행한 기사로 도배했다. 대부분 기사의 논조는 체벌 금지 이후 무서울 것이 없어진 아이들이 교사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정당한 지도도 우습게 보고 대들다가 폭행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참 재밌는 논리다. 정말 학생들이 교사를 우습게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폭행까지 할 상황에 이를까? 그 전에 교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것이다. 교사가 뭔가 학생이 무시할 수 없는 강압적인 조치를 하고 그에 대한 반발로 폭행이 일어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폭행 사건은 뭔가 갈등이 증폭돼 힘이 아니면 그 갈등을 해결할 수 없을 때 일어난다. 그래서, 폭행을 일으킨 문제의 원인이 중요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폭력 문제를 접할 때는 그 원인을 들어 보고, ‘그런 상황이라면 나 같아도 한 대 쳤을 것 같다’며 공감하거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폭력은 안 된다’라고 하는 식의 평가를 내린다. 그런데 학생의 폭력 사건에 대해서는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지 않는다. 오직 ‘학생’에 의한 ‘교사’ 폭행이라는 사실만이 부각된다. 마치 파업이 일어날 때 파업의 원인이 아니라 파업 자체만을 문제 삼는 것처럼.
체벌 금지 이전 ‘교사의 지도’ vs ‘학생의 반항’이라는 갈등의 끝은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력이었다. 즉, 말로 훈계하다가 안 들으면 “너 나와”라고 하거나 “우선 맞자” 하고 때린 후에 “너의 잘못을 알겠니?” 하고 물었다. 그런데 폭력이 금지되자 다른 결말이 목도되는 것이다. 이전과 똑같이 체벌을 하다가 ‘징계’를 당한다든지, 아니면 폭력의 주체가 교사에서 학생으로 바뀐다든지……. 즉 지금 언론을 도배하는 상황은 그렇게 새로운 상황이 아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는, 아니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할 줄 모르는 우리 사회가 길러 낸 아이들의 모습일 뿐이다.
서울시교육청의 체벌 금지 조치 이후 학교 안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정책이 시도된 지 1년 남짓 된 상황에서 이야기하기에는 좀 조심스럽기도 하고, 학교 안에서 눈에 띌 정도의 변화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처럼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되어 있는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 어떤 변화가 눈에 보일 정도로 진전된 상태라면 이미 또 다른 질서가 구축된 것이기 때문에 그 질서에 의해 진실이 가려질 수도 있다. 일종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상황이 사실은 더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체벌 금지는 고교 선택제나 일제고사처럼 어떤 제도가 들어온 것이라기보다는 확실히 존재하지만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았던 어떤 뿌리를 건든 사건이다. 그 뿌리의 흔들림이 학교 구성원에게 어떤 흔들림을 주었는가? 이것이 눈에 보이는 사실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혼란’은 그 자체로 의미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혼란’ 자체가 나쁘냐 좋냐가 아니라 그 혼란의 ‘내용’인 것이다.
우리는 흔들렸는가? 흔들린 척하고 있는가? 흔들렸다면 어느 정도, 어느 부분에서 흔들렸는가? 흔들리지 않았다면 왜 안 흔들렸는가? 흔들릴 부분이 흔들렸는가? 아님 엉뚱한 것이 흔들렸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체벌 금지 이후 우리 학교 안에서 있었던 몇 가지 상징적 사건들을 분석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체벌 금지 이후 학생들의 문제 행동이 증가했다?
[사례1]
S교사는 원래 체벌을 하지 않지만 체벌 금지에 대해 다른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불쾌감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말로 지도를 하다가 안 될 때 결국 학생의 기를 꺾을 수 있는 것이 체벌인데 교사의 마지막 수단을 없앴다는 괘씸함 때문이다. S교사는 체벌 금지 조치에 대해 겉으로 문제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대안이 뭐야, 대안을 만들어 놓고 체벌 금지를 시켜야지. 교사 말을 끝까지 안 들으면 어쩌라는 거야. 애들한테 상처 주는 거 싫어서 사소한 잘못에 대해서는 손바닥 몇 대 때리고 말았는데 이제 학생부에 넘겨야지 뭐”라고 말했다.
S교사가 들어가는 반에 결석이 잦은 학생이 한 명 있다. 어렸을 적 부모가 이혼하고 아버지와 사는데 아버지는 아이에게 관심이 많으나 이혼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아이의 부적절한 요구까지 무조건 들어준다. 그러다 아이가 맘대로 하면 폭력을 썼다. 아이는 엄마에 대한 애정 문제에 대해서는 정서적으로 10세 나이에 머물러 있다. S교사의 수업 시간 원칙은 ‘눈에 띄게 자지 않는다’이다. 즉 자더라도 앉아서 턱을 괴고 안 자는 듯한 자세로 자라는 것이다. 그래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모멸감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수업 태도에 엄격한 S교사의 시간에 그 학생은 룰을 지키지 않았다. 몇 번의 지도 후 성찰 교실에 보냈으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고 성찰 교실 상담교사는 정신과 치료를 아버지에게 권고했다.
S교사는 수업의 룰을 지키지 않는 그 아이를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는 교실에 못 들어오게 하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수업에 들어와서 또 수업의 룰을 어기게 된다. 교사는 이 사건을 징계위원회에 올리고 이 학생은 출석 정지 10일이라는 엄한 벌을 받게 된다. 그 출석 정지 기간 동안 학생은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서 다른 학교의 집단 폭행 사건에 연루되고 경찰을 통해서 그 사실을 학교가 알게 된다.
[사례 2]
L교사는 나름 학교생활을 열정적으로 하는 젊은 교사이다. 학생들과도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담임으로서 학급에서 학생들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한 편이다. 특히 핸드폰을 하다 걸리거나 학생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 참지 못한다. 올해 남자 반을 맡게 된 L교사는 천적과도 같은 학생을 만나게 된다. 중학교 때부터 말썽쟁이로 소문이 나서 다른 지역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가 다시 돌아온 이 학생은 L교사의 그런 규칙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즐겨 할 뿐 아니라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드러나도 교사에게 사과하기보다는 오히려 교사의 사소한 약점을 공격하는 행동을 하였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자 교사 지도 불응을 이유로 그 학생을 선도위원회에 올리게 된다. 그런데 학생부 교사들은 L교사가 젊은 여교사라 학생들을 잘 못 다룬다며 교사의 무능을 탓하고 선도위원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학부모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그 어머니는 사건의 책임을 교사에게 물었다. L교사는 지금 휴직 여부를 고민하는 상태이다.
[사례 3]
어머니하고만 살고 있는 K는 복학생이다. 수업 시간에는 잠만 자고 복학생이라는 이유로 다른 친구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지배하기도 한다. 평소에 위가 좋지 않았던 K는 배가 너무 아파서 교사 화장실에 뛰어 들어갔다가 자기가 늘 사용하던 칸이 잠겨 있자 막 두들기며 안에 있는 사람을 나오라고 한다. 그 안에 있던 나이든 교사는 놀래서 나와 교사 화장실을 당당히 사용하려는 K를 야단치게 되고 K는 “아이 씨x, 화장실 한번 쓴 거 가지고 왜 그래!” 하며 소리를 질렀다. 교무실에 끌려와서도 건성으로 잘못했다고 하고 집에 가 버리자, 그 교사는 “내가 명퇴를 하든지, 저 자식을 징계위원회에 올려 잘라 버리든지 해야 한다”며 분개했다.
위 사례에서 언급된 학생들은 언론에서 교사를 폭행했다며 보도한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학교와 상황에 따라 좀 다른 양상으로 드러날 뿐이다. 지금까지 징계위원회는 학교 폭력, 절도, 흡연 등 주로 큰 사안이 있을 때만 열렸는데 체벌 금지가 된 이후 교사의 지도에 불응한 학생들이 징계위원회에 올라오는 일이 빈번해졌다.
위 사례들은 체벌이 지금까지 무엇을 가려 왔는지 보여 준다.
첫 번째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체벌은 이미 배움으로부터 도주한 아이들의 수업 태도를 강제하는 역할을 해 왔다. 공부할 의지가 없어도 듣고 있는 자세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잠을 청해도 몸은 책을 보고 있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고 자야 했다. 왜 그 아이가 배움으로부터 도주하고 있는지에 대한 원인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체벌 금지가 된 이후 성찰 교실이 만들어졌고, 상담 교사를 통해 그 아이의 상황이 드러나게 되었다. 불우한 개인사가 그의 잘못을 모두 용서할 만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줄 모르는 존재들이 그런 상처를 왜 폭력으로 표현하는지는 짚어 봐야 할 지점이다. 흔히 상처가 큰 사람의 공격성은 자신보다 약자인 사람을 향하기 마련이다. 왕따 같은 학교 폭력이 그러하다. 학교 폭력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최근의 보고들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주먹을 휘두른 가해자라는 것이 드러난 사실이라면, 고된 비정규직 노동을 하느라 자식을 돌보지 못하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사건이 터진 후에도 부모들은 자식 걱정보다도 피해자 배상 문제 때문에 한숨을 쉬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어찌 보면 소위 말하는 문제아들의 문제 행동은 이 사회의 비정상성을 보여 주는 문제적 징후이다. 냉혹한 자본주의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몰아가고 있는지, 특히 사회의 폭력을 여과할 장치가 없는 존재들에게 어떤 식으로 내면화되고 표출되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인권이 문제 학생들의 문제 행동에 날개를 달아 준 게 아니라 그동안 음성적으로 해 오던 것을 이제는 교사 앞에서도 감히 대놓고 하는 것일 뿐이다. 음성적인 문제의 심각성이 더 크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간 폭력으로 감춰졌던 문제가 드러나는 것에 학교와 사회가 어떤 성찰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이 사회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이렇게 폭력의 이면에 숨겨진 문제가 더 심각한데도 학생에 의한 교사 폭행에만 분노하는 이유는 ‘폭력’ 그 자체인가? 아니면 감히 ‘교사’에게 폭력을 쓴다는 사실인가? 사실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날로 심해지는 중산층의 몰락 속에서 이혼 가정이 증가하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방치되는 아이들이 많아졌으나 이 아이들의 상처를 방치한 채 입시 경쟁에만 올인하게 만드는 사회와 학교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아이들의 내면에 만들어 내는 폭력성이라는 괴물이 아닐까?
교육을 포기하는 교사가 늘고 있다?
체벌 금지 이후 학생들의 문제 행동이 늘어나고 교사들이 지도를 포기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고들 한다. 이것을 정확히 다시 말하면 그전에는 학생들이 체벌하는 교사의 눈앞에서는 문제 행동을 안 했는데, 체벌 금지 조치 후 그런 조심성이 사라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의 교사의 교육력 부재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이 끝까지 지도를 저항하는 부분은 두발, 복장, 핸드폰 등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이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사생활 영역에 대해서는 교사들이 지도를 안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다면 그 외의 다른 문제, 교사-학생에게 언어적, 육체적 폭력을 행사하거나 금품 갈취, 절도, 흡연 등의 문제는 교사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한 학생이 보이는 문제 행동의 깊숙한 뿌리가 교사 개인을 통해 치유될 수 있는가? 지금까지는 체벌을 통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처럼 괜찮은 척했기에 교사가 해결할 수 있는 일처럼 비쳐졌다. 그런데 감춰져 있던 것을 걷어 내고 드러나게 하여 그 문제의 원인을 파고들수록 교사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지금까지는 교육 활동의 걸림돌이었던 학생들의 정서적 결핍, 학습의 결핍 등이 체벌이라는 폭력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체벌 금지로 인해 더 이상 ‘문제’를 개인의 책임이나 훈육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학생 개개인의 문제적 상황을 드러내고 제대로 된 원인을 찾아내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이다. 다만 지금의 학교 시스템으로는 그 해결 방법을 찾는 게 요원하기에 현장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이다. 장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복지 안정망이 구축되어야 하고, 학교교육에서는 입시 경쟁이 줄어들어야 한다. 이런 장기적인 문제 해결책이 너무 먼 얘기라면 당장 교육적 조처에 대한 학교의 권한이라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권고를 받더라도 학부모에게 이를 강제할 권한이 학교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성의 있는 학부모를 만나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으나 학부모와 연락이 안 되거나 문제 학생이 그 이후로 학교에 안 나와 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최소한 그 학생이 학교에 안 나왔을 때 찾아갈 수 있는 사회복지사가 학교에 필요하다. 상담사, 사회복지사, 의사 등 여러 전문가들의 협업 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교사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교사가 지도를 기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교사 혼자 힘으로 그 아이를 끌어안거나 징계를 통해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문제 행동의 뿌리에 근접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절실하다.
따라서, 학생인권 이후 교사가 교육적 지도를 기피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참견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 대해 교육의 이름으로 간섭하는 일을 멈추고 교사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교사 개인이 아니라 학교와 사회의 구조적인 해결책을 역설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학생인권은 학생을 둘러싼 학교 구조의 문제, 더 나아가 이 사회 구조의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남는 교사 권력의 문제
이런 장?단기적 처방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교사의 권력은 문제로 남게 된다. 첫 번째 사례에서 치료 후에 그 학생이 수업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를 복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특수한 상황에 놓인 그 아이에게는 수업의 룰을 완화시켜서 적용할 것인지, 아니면 그 아이가 그 수업의 룰을 지킬 때까지 계속 수업에서 배제할 것인지 고민하여 결정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은 교사 혼자 내려야 하는지 교사와 학생이 함께 내리는 것인지 그 둘 외의 다른 전문가와 함께 내릴 것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교사에게 전권이 있었기 때문에 교사의 기준에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이 룰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매년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룰이 바뀌었고, 중?고등학교에서는 시간 시간마다 룰이 바뀌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배려나 공동체의 규칙을 익히기보다는 힘에 의해 장악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자신의 자유를 몰래몰래 향유할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익혀 왔다. 첫 번째 사례에서 학생이 출석 정지를 당했던 10일 동안 다른 학생들은 무엇을 학습했을까? ‘정신적 트라우마 때문에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친구와는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까? 나도 저 친구처럼 정말 듣기 싫은 수업 시간이 있는데 그때 수업을 듣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를 배웠을까? 아니면 ‘저 선생님에게 개기면 학교도 못 오는구나. 하고 싶어도 딴 선생 시간에 해야겠다’를 배웠을까?
체벌 금지로 교권이 흔들렸다고 하지만, 사실 그 교권은 권력이었다. 체벌은 교사의 지도 - 학생의 반항이라는 갈등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첫 번째 사례의 교사는 자신의 수업의 룰을 보호하기 위해 학생에게 과도한 징계 처분을 내렸다. 출석 정지는 학교 폭력을 저질렀을 때와 같은 경우 내려지는 매우 무거운 벌이다. 즉 체벌이 금지되어도 교사의 권한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는 예이다. 지금까지는 교사의 권력을 체벌을 통해 보여 주었으나 이제는 징계의 경중으로 교사의 권력을 보여 주게 된 것이다. 징계든 체벌이든 힘으로 문제 행동을 억압하여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방식이라면 학생들이 학습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른 상황에서 똑같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뿐이다.
두 번째 사례의 학생 역시 힘에 의한 학교의 지도에 단련된 학생이다. 학교 아니 가정에서조차 끝까지 자기편이 되어 주었던 어른을 만난 적이 있었을까? 이미 전학을 경험한 학생은 어른들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좋든 나쁘든 모든 교사는 꼰대일 뿐이고, 그들이 어떻게 힘을 구사하는지도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선생님의 엄포 따위가 두려울 리가 없다. 만만한 담임교사가 자신에게 엄포를 놓는 모습이 두려울 리가 없는 것이다. 학부모 역시 교사들의 이러한 반응에 지쳐 있을 확률이 높다.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식을 학교조차 포기하고 내쳐 버리면 더 망가질 거라는 벼랑 끝 불안감은 교사를 공격하는 형태로 표현되었을 수 있다. 힘에 의한 학생 통제가 계속될 때 교사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인 것이다.
세 번째 사례의 학생 역시 그 학생이 저지른 가장 큰 죄는 교사 화장실을 당당하게 쓰려고 한 점이다. 좀 부가된다면 화장실을 두드린 정도가 되겠으나 평소에 장이 안 좋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학생의 불손함이 교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수는 있으나 문제의 핵심이 학생의 불손함인가? 비위생적인 학생 화장실의 모습인가? 만약 이 일로 교사가 그 학생이 전학 가기를 원한다면 첫 번째 사례를 볼 때 가능할 수 있다. 다만 복학생이었던 그 학생이 다시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 한다면 그 학생은 어떤 인간으로 성장할 것인가? 첫 번째 사례를 보면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에도 그 학생은 폭력 사건에 연루되었다. 학교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잘라 낸다고 하지만, 그 잘라 낸 싹들은 더 큰 폭탄이 되어 이 사회와 학교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약자를 유괴하여 성적으로 학대하고 죽이는 최근의 사이코패스적인 범죄의 양상은 우리 사회가 어떤 괴물을 키워 내고 있는지 보여 준다.
학생들이 규칙을 지키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모두가 지켜야 하는 규칙이라면 그 규칙은 함께 정해야 한다. 그 룰은 누구나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것이어야 하고, 누구나 지킬 만한 것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그 룰은 만드는 것도 교사고, 실시하는 것도 교사고, 지키지 않았을 때 벌칙을 주는 것도 교사였다.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력을 교사가 독점하고 있기에 룰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규칙 위반 행위가 아니라 교사에게 반항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인권은 그 룰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다. 그 룰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인가? 방식에 있어서도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는가? 그 룰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것인가?
체벌 금지의 시초는 폭력과 구분되지 않는 과도한 폭력으로부터 1차적으로 학생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격적으로 체벌 금지 조치가 내려지는 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많은 저항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체벌 금지는 학교 권력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고, 모든 권한을 독점한 채 자의적인 판단을 하는 것을 교사의 전문성이라고 포장해 왔던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 사회의 승자 독식의 구조가 변화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아이들에게 학교는 얼마나 의미 있는 공간인가? 의미 없는 공부, 청년 실업과 등록금 문제로 드러나는 학력 자본의 불확실성, 이에 대한 불안과 공포, 무한 경쟁에서 자포자기한 무력감들, 무력감에 빠지느니 말썽이라도 일으켜서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 이 모든 불행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자살하거나 학교 밖으로 나가 차라리 괴물이 되기를 선택하기보다는 그런 내면을 학교에서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은 문제를 해결할 열쇠와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 아닌가? 학생들이 학교라는 테두리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드러내고 그것을 치유하려는 과정에서 사회의 변화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때 학교라는 공간의 교육력이 확장되는 폭은 상상의 범위를 초월할 것이다.
학생들의 이러한 내면이 표면화되는 것이 혼란이라면 체벌 금지와 학생인권 정책은 학교에 혼란을 주고 있다. 아니 혼란을 주어야 한다. 이 혼란으로 약자에게 냉혹하고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사회 전체에 혼란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이 혼란은 교사들에게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이 약육강식의 냉혹한 세상에 저항하는 아이들을 억압하는 존재가 될 것인가? 새로운 변화의 길을 모색하는 도반이 될 것인가?
(책을 펴내며,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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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한낱
인권교육센터 ‘들’,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겉보기와 달리 한없이 소심하고, 겁이 많다. 굵직하고 대범한 행동은 못 하지만, 앞으로도 얇고-가늘고-길게 인권운동을 하고 싶다. ‘권위주의 속의 카나리아’인 청소년들과 줄곧 시간을 보내서인지 ‘꼰대 바이러스’에 특히 취약하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내 삶의 키워드로 생태를 정착시켜 보려 꼼지락거리는 중.
최형규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사의 삶을 살고 있다. 그저 평범한 선생 노릇에 지쳐 가던 중에 만난 ‘학생인권’이 지친 삶에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고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과 함께 다시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조영선
서울 경인고 교사,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아이들을 억압하면서 벌어먹는 것이 죄스러워 학생인권에 관심을 가졌으나 요즘에는 교사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사람이다.
정용주
서울 백석초 교사,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어른이 되어 가면서 점점 세상에 대한 질문이 사라져 버리지만 그렇다고 습관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완성된 무엇을 만들어 인정받기보다 시도하고 그러다가 깨지면서 살아가고 있다.
임동헌
전문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통신을 공부하고 있다. 전문계 고등학생에 대한 우리 사회의 천박하고 폭력적인 편견과 오해로 인해 꺾이고 잘려 나간 아이들의 자존감을 살려 보고자 소박한 움직임을 하고 있다.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에서 활동하며 노동자로서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실천을 함께할 동지들을 찾고 있다.
이형빈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된 학교를 사직하고 서울시교육청 교육감 정책보좌관으로 일하며 혁신학교와 학생인권 정책을 담당했다. 2012년 3월 1일 자로 공립교사 발령을 받았으나, 3월 2일 교육과학기술부의 임용 취소 조치로 하루 만에 해직되었다.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빛난다고 생각하며, 언젠가 다시 학생들을 빛나게 하는 교사로 살고자 하는 소망을 갖고 있다.
이혁규
청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학교가 좀 더 인간적이고 즐거운 공간으로 탈바꿈되며, 그 속에서 교사와 학생이 행복하게 만나기를 소망하며 교실과 학교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질적 연구 방법을 이용하여 수업과 학교 현상을 연구하고 있으며, 학습공동체를 통해서 단위 학교를 변화시키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는 《교과 교육 현장의 질적 연구》, 《수업, 비평의 눈으로 읽다》, 《문화와 교육》(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9월 11일 이후의 감시》가 있다.
이정희
중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친다. 학교는 싫지만 아이들이 좋다. 삶에 지쳐 아픈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독거릴 때, 내게 전해지는 그 마음들이 학교를 때려치우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에게 괜찮은 어른 친구가 되고 싶다. 그래서 솔직하고 당당하게 살고자 노력, 하고 있다. 엄청.
이수광
이우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산다. 내용적으로는 ‘인간적인 학교’, 운영 형식적으로는 ‘자치 학교’ 만들기에 관심이 많다. 이런 생각을 제도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경기도교육청 혁신학교추진위원으로 활동한다. 그간 여럿이 함께 쓴 책으로 《교육개혁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 《굿바이 사교육》이 있다.
오혜원
경기도에서 영어 교사를 하고 있다. 요즘 바쁘지도 않으면서 바쁜 척하다 보니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유를 가지고 삶을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것, 혼자 있는 시간을 충만하게 즐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람이다.
오동석
평화의 생태계 안에서 인권의 대지 위에 민주주의를 쌓고 그 토대 위에 입헌주의와 법치주의를 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헌법 연구자이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제정자문위원회에 참여한 이후 학생인권에 터 잡아 학교에서 민주주의 짓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서울본부 공동집행위원장. 인권을 만나고 삶이 충만해졌다. 인권과 교육의 만남, 인권과 청소년의 만남이 주로 내가 영감을 받고 나를 달뜨게도 하는 주제이다.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주로 둥지를 틀고 있고, 최근에는 학생인권조례 제정 일에 발품을 팔러 다닌다. 쓴 책으로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가 있고, 함께 쓴 책은 《대한민국 1%》, 《뚝딱뚝딱 인권짓기》, 《인권, 교문을 넘다》 등이 있다.
박복선
전교조 결성으로 해직되면서 선생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복직한 학교를 나온 것도 그 덕분이다. 우리교육에서 편집장을 했고, 하자센터에서 부센터장을 했고, 지금은 성미산학교에서 교장을 하고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재미로 살고 있다.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청소년 언론 《오답승리의희망》 편집진. 고등학교 때부터 청소년인권운동을 당사자로서 시작해서 2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코가 꿰어서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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