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최신 융합 이론인 몸 이론
이 책은 새롭게 연구하기 시작한 ‘몸과 건축’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몸과 건축이라는 주제는 말 그대로 몸 이론과 건축을 연계시켜 연구하는 것이다. 연계의 방향은 물론 양 방향이다. 몸 이론을 활용해서 건축을 새롭게 해석하기도 하고 반대로 건축을 통해 몸 이론의 범위를 넓히거나 몸 이론에서 애매했던 부분을 명확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둘을 굳이 구별할 필요 없이 ‘이론’이라는 큰 우산 아래 몸과 건축이 하나로 만나서 새로운 가지를 하나 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학문 경향인 융합의 좋은 예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는 1980~1990년대 초반에 이 주제가 잠시 유행한 적이 있다. 푸코와 메를로퐁티의 영향이 컸다. 당시 푸코는 저작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는데 그의 섬뜩한 비판 이론의 많은 부분은 몸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저작 중에 직접적으로 몸을 거론한 것도 상당 부분 된다. 몸 이론으로 환산할 수 있거나 이와 일정한 연관성이 있는 것까지 합하면 그의 저작 대부분은 결국 몸에 관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현대 문명이 인간의 몸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구속해서 물질주의를 이루었는가’라는 한 가지 명제로 좁혀질 수 있을 정도다.
푸코의 여파가 커지면서 그의 정신적 스승 가운데 한 명인 메를로퐁티에 대한 관심도 함께 일어났다. 푸코의 정신적 스승은 여러 명일 수 있는데 몸 이론과 관련해서는 단연 메를로퐁티가 제일 앞에 설 것이다. 그는 인간의 몸을 단순한 단백질 물질 덩어리나 정신의 조종을 받는 기계로 정의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그 대안으로 정신과 물질이 한 곳에서 만나는 종합적 인격체로 정의한 철학자였다. 이런 정의를 처음 내린 사람이 메를로퐁티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명제를 한 권 이상의 책으로 정밀하게 정리해서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시킨 것은 분명 메를로퐁티가 처음이다.
이 두 사람을 통해 몸이 철학적 사유와 이론의 대상이 되면서 몸 이론은 그 대상과 범위를 빠른 속도로 넓혀갔다. 몸을 물질 덩어리로 보고 이것을 최일선에서 직접 만지는 의학이 들어왔고 인간의 몸이 서로 부대끼며 만들어낸 사회 구조의 작동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사회학도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보기 시작하자 학문과 문화 분야 가운데 몸 이론과 연관성을 갖지 않는 장르가 없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몸을 가지고 있고, 결국 인류의 문명과 문화라는 것이 사람이 몸을 사용해서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의학-사회학’의 삼각 체제를 기본 토대로 삼아 인류학과 경제학이 들어왔고 시각 예술의 여러 장르도 들어왔다. 문학은 그 자체가 인간 몸의 관찰 기록이라 할 정도로 몸 이론의 거대한 보고가 되었다. 세부적으로 보면 프랑스대혁명, 마르크스의 자본론,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사회 등 이전부터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루어오던 흥미로운 단골 주제들이 몸 이론으로 재해석하기에 아주 적합한 대상이 되었다. 과학사도 그 가운데 하나여서 몸 역사의 관점에서 재정리되었다.
몸과 건축 시리즈를 시작하며
몸 이론을 초점으로 삼아 거의 모든 학문 분야가 융합하기 시작한 이런 새로운 경향은 분명 1980~1990년대 서양 학계가 남긴 중요한 업적임이 틀림없다. ‘몸과 건축’이라는 주제도 이런 흐름의 하나로 나타났다. 세부적 경향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푸코와 메를로퐁티의 반성철학을 건축에 적용시킨 새로운 연구, 인체와 고전주의 오더 양식을 대응시키는 전통적 이론의 재고찰, 장식 이론을 도입한 새로운 건축 상징 이론 등이 대표적 내용이다. 그 결과 서너 권 정도의 주요 서적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를 끝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몸과 건축’이라는 주제는 소리 없이 시들해졌다. 이후 몸 이론 자체가 인문사회학, 의학, 과학, 예슬 사이의 연관성을 높여가며 지속적으로 번창한 것과 반대되는 현상이다. 아마도 건축계 자체에서 이론 연구가 쇠퇴한 것이 제일 큰 이유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니 세계화니 하는 정치 경제 흐름의 직격탄을 맞아 건축계는 전 세계적으로 자본으로 급격히 종속되었으며 바야흐로 이론 실종 시대가 오고야 말았다. 건축 자체의 고유 이론도 소멸해가는 마당에 융합을 통한 다른 이론과의 연계 연구는 힘들어지게 되었다. 혹은 건축 이론가들이 자기 분야 안에 강하게 갇히는 경향이 심한 것도 이 주제가 시들해진 다른 원인일 수 있다. 건축은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 환경을 구성하는 매우 포괄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다른 학문과 연계시키기 시작하면 비단 몸 이론뿐 아니라 다른 어떤 분야와도 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럴 경우 자칫 건축 이론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져 모호하고 산만해질 수 있다. 건축과 철학을 연계시키려는 시도가 대부분 실패로 끝나버리는 것이 좋은 예이며 ‘몸과 건축’도 이것과 비슷한 경우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몸과 건축 연구가 지금까지 전무했다. 건축계에서 이론 연구를 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몸과 건축’이라는 주제에 대해 얘기를 꺼내면 머리를 갸웃거리며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이 주제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몸 이론 자체에 대해서도 그랬다. 한국에서도 최근 몸 이론이 급속히 성장하는 것을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론 연구에 조금이라도 소질이 있는 건축 이론가거나 아니면 공부의 범위를 조금이라도 넓혀본 건축 이론가라면 ‘몸’이라는 한 음절짜리 단어 하나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것이 건축과 연계?융합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으며, 그 포괄성과 다양함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그려지면서 온몸이 떨리는 학문적 의욕이 솟구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몸과 건축은 왜 이처럼 연계?융합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것일까. 둘은 학문의 대상으로 이론화되기 이전부터 기본적으로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갖기 때문이다. 건축은 몸의 생존 조건을 결정하는 세 가지 기본 조건인 ‘의식주’의 한 부분이다. 스킨을 기준으로 하면 ‘피부-옷-건축’의 세 단계가 성립되는데 역시 그 가운데 한 부분을 이룬다. 그만큼 몸과 밀착된 분야라는 뜻이다. 다른 증거도 많다. 몸이 정신과 육신의 결합체인 것처럼 건물도 정신적 가치와 구조체의 결합체다. 이는 인문사회학이나 의학처럼 인간의 몸에서 정신이나 육신 한쪽만 다루는 대부분의 학문 분야보다 훨씬 유리한 점이다.
인문사회학은 사고와 언어라는 추상적 매개로 정신적 측면만 다룬다. 사실 철학에서 발전시켜가는 몸 이론을 공부해보면 기존의 철학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상만 존재니 사유니 하는 것에서 몸으로 바뀐 것뿐이다. 그만큼 인간 몸에 대해서 반쪽밖에 보지 못한다. 반면 의학은 끌, 정, 톱, 드라이버, 각종 호스와 모터와 전기 장치 등 온갖 기계를 동원해서 육신만 다룬다. 수술대에 마련한 도구를 보면 사실 집 지을 때 쓰는 도구나 카센터에서 자동차 고칠 때 사용하는 도구와 별 차이가 없다. 그만큼 인간의 몸에 대해 나머지 반쪽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 된다.
건축은 다르다. 건축의 물리적 속성으로만 치면 의학 못지않게 철저히 물질적이다. 하지만 그리스 신전이나 고딕 성당에서 보듯 건물은 그 자체가 그리스 신화나 기독교와 동의어일 정도로 정신적 가치 또한 막대하다. 이런 점에서 몸에 제일 근접한 매개이자 학문이다. 신학과 종교와 철학과 똑같이 정신적 가치를 가정한 뒤 육신과 똑같은 물리적 결과물로 이것을 구현해내는 분야인 것이다.
결국 몸은 건물과 같은 것이다. 애초에 사람들이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부터 몸을 모델로 삼았으며 건물을 바라보는 기본 시각은 몸을 바라보는 그것과 같은 것이다. 몸을 바라보는 시각과 가치관은 고스란히 건물에 스며들어 반영된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은 몸 이론을 적용하기에 가장 좋은 분야다. ‘몸과 건축’이라는 주제는 실로 그 끝을 상정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포괄적이며 파생 내용이 무궁무진하다. 이렇게 보았을 때 서양에서 이 주제가 몇 년 잠시 반짝하고 사라진 점도 이해가 가지 않을뿐더러 하물며 이 주제 자체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우리나라 건축 이론계의 상황은 아무리 노력해도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 나는 ‘몸과 건축’이라는 시리즈를 새로운 연구 영역으로 삼아 그 첫 권을 출간한다. 이 주제에서 나올 수 있는 내용은 앞서 강조했듯이 실로 무궁무진하다. 혼자서도 20여 권을 쓸 수 있을 정도다. 나와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가세한다면 그 확장 가능성은 가늠하기 힘들다. 물론 세상은 나 홀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수용에 한계가 왔다고 판단하는 순간 이 주제에 대한 내 연구는 적당한 선에서 멈출 것이다. 그러나 여건이 허락되는 한 중요한 주제부터 차례대로 출간할 계획을 품고 그동안 몸 이론에 대한 기초 공부를 해왔으며 그 첫 권으로 『기계가 된 몸과 현대 건축의 탄생』을 내놓게 되었다.
기계론과 부위론의 산물, 현대 문명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현대 건축의 최대 주주라 할 기계론이 몸과 건축에 스며들어 우리의 일상생활, 즉 현대 문명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한 것이다. 원래 인간의 몸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전일적 존재다. 신체 하나에 국한하더라도 모든 장기와 기관이 상호 긴밀하게 작용하는 ‘유기성’이 인체 작동의 핵심적 특징이다. 여기에 정신과 정서, 감성과 감정이 함께 작용한다. ‘몸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은 서로 영향을 끼치며 함께 작동한다. 외부로 확장하면 복합성은 더욱 커진다. 기후와 풍토, 산하와 지형, 물과 공기, 먹는 음식과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것 등과 밀접히 연관되어 이런 것들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우주 천체와도 맞닿아 있다.
몸의 이런 복합성을 본능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인격과 자존감의 요체다. 이런 수많은 요소가 매우 복합적으로 작동한 뒤 그 최종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의 나’이며 그 한가운데에 우리의 몸이 있다. 자존감은 내 인격이 올바로 정의되고 존중될 때 얻어지고 지켜진다. 이는 곧 내 몸을 본능에 충실하게 복합적으로 정의하고 존중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내 몸은 나만의 수많은 경험과 기억, 삶과 상징, 환경과 배경, 가계와 족보 등이 얽히고설키며 어우러진 종합적 존재의 장이다. 나만의 세계이자 우주다. 이런 복합성의 본능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 사람이라고 인격과 자존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이 사람의 몸을 이렇게 복합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대 문명이 인간의 몸을 정의하고 대하는 시각은 극단적 기계론이며 부위론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학교, 회사, 사회 등 나를 둘러싼 상위 조직은 내게 오로지 점수와 실적만 요구한다. 효율만이 절대 선이며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내 모든 것은 철저하게 부위별로 조각나서 기계적으로 훈련되고 다루어진다. 학교에서 내 존재는 과목별로 나눈 점수와 등급에 의해 그 무게와 의미가 정해진다. 회사에서는 실적과 고과 점수이며 이런 시각은 그대로 사회와 국가로 이어진다. 한 사람의 존재 가치는 사회에 끼치는 금전적 기여에 따라 정해진다. 돈을 까먹으면 해악적 요소요, 돈을 벌어줘야 바람직한 시민이 된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른바 ‘생산 유발 효과’로 환산된다.
모든 것은 철저하게 숫자로 계량화된 뒤 그 숫자의 크기에 따라 줄 세우기가 일어난다. 그 줄에서 몇 번째에 서 있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가치와 존재감, 심지어 인격까지 결정된다. 이런 계량화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가족관계에서도 절대적 법칙으로 굳어져간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계량화된 숫자로 평가한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은 만족할 만한 숫자뿐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점수와 명문대 입학만을 바라고 자식은 거꾸로 부모에게 물질적 뒷바라지만을 바란다.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대 문명의 현실이다. 가족 사이의 관계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학교와 회사와 사회에서는 계량화된 실적만이 우리를 지배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이를 만족시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부위별로 조각낸 뒤 한두 부위만을 선택해서 기계적으로 집중 훈련한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이라는 개념인데 이 개념 자체야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계량화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숫자로 표시되는 실적을 올릴 목적으로 인간의 몸에 적용시키는 순간 엄청난 폐해를 낳게 된다. 유기적이고 전일적이고 복합적인 인간의 몸이 망가지게 되며 그에 따라 정신과 정서, 마음과 감정도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바로 지금 우리 사회,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현대 문명이 겪는 거대한 정신 불안 증세다.
이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이미 수도 없이 나와 있다. 얼마 전까지는 주로 정치?경제?사회 등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경쟁 체제와 물질적 탐욕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주로 진단에 해당된다. 최근에는 처방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으며 요즘 치유 계통의 심리학과 예술학이 인기를 끄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현상이다. 나는 여기에 몸 이론에 의한 분석과 해석을 더하고 싶다. 현대 문명의 문제점과 폐해는 인간의 몸을 매우 잘못된 시각으로 정의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기계론과 부위론이다.
건축도 몸을 둘러싸고 벌어진 현대 문명의 패착과 횡포와 고스란히 맥을 같이한다. 사람이 몸을 바라보는 시각은 자기가 사는 집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으며 이것을 모으면 한 사회의 건축 현상이 된다. 우리가 우리 몸을 기계 부품처럼 대하는 시각은 건물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 요즘 새로 짓는 건물은 고층 아파트와 대형 상업 시설이 99퍼센트를 차지한다. 중소 규모의 차분하고 예술성 있는 작품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감성을 보듬어주고 편히 쉬며 사색하고 산책할 만한 건물은 정말 찾기 힘들게 되었다. 집부터 이런 본유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이며 집 밖에 나오면 돈을 쓰는 순간에만 인간으로 대접받는 거대 상업 공간이 도시를 온통 점령해가고 있다. 이는 모두 기계론과 부위론의 산물이다. 기계론과 부위론의 거대한 음모가 남긴 폐해의 구체적 증거들이다.
기계화된 몸과 현대 건축의 탄생
이상이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이다. 이 책은 현대 문명이 사람의 몸을 기계 부품으로 정의하고 그에 따라 실적 제일주의를 다그치게 된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현대 건축 역시 그 끝에 탄생한 하부구조의 하나일 뿐이라는 결론 아래 ‘현대 건축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 다빈치와 데카르트 등 몸 기계론을 주창하고 개척한 일차적 인물과 그들의 이론을 찾아냈으며 이것이 현대 문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추적했다. 건축은 이런 추적에서 직접적 관계를 갖는 유용한 매개다. 우리의 일상을 관장하는 주변 환경을 물리적 구조체라는 ‘구체적 물건’으로 만들어 구성해내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건물은 이론으로 제시된 추상적 내용을 구체화해서 실제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는 데 유리한 매개다. 이는 ‘건물은 사람이 몸을 바라보는 시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라는 ‘몸과 건축’ 이론의 일반 명제와 다르지 않다.
이에 따라 ‘다빈치-데카르트-건축’의 삼각 축을 뼈대로 기계론과 부위론이 현대 문명을 형성하고 장악해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다빈치는 인간의 몸을 기계적으로 본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며 이를 건축과 연계시킨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데카르트는 이런 몸 기계론을 이론적으로 정리해서 사상적 뒷받침을 마련했다. 여기에 절대 공간과 순수 물질이라는 개념을 더해서 몸 기계론이 일상생활로 퍼지고 궁극적으로 현대 문명으로 확장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절대 공간과 순수 물질이란, 한마디로 인간을 둘러싼 자연-인공 환경 전반에서 주관적이고 상징적이며 자의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함으로써 공간을 순수 과학의 공식이나 숫자처럼 객관화되고 계량화된 상태로 정리하겠다는 개념이다.
계몽주의에 들어와서 페로와 렌 등 일련의 경험주의?과학주의 건축가들이 등장해서 ‘공간 비우기’를 통해 데카르트의 주장을 건물에 적용하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 이렇게 비워진 공간은 이후 19세기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를 거치며 대형화되면서 ‘텅 빈 거대 공간’으로 확장된다. 공간이 면적으로 환산되는 순간이며 면적은 다시 재화와 동의어가 되었다. 19세기 만국박람회는 이런 ‘텅 빈 거대 공간’의 발전을 이끈 국제적 행사였다.
그 끝에 나온 것이 르코르뷔지에와 미스 반데어로에의 건물 모델이다. 르코르뷔지에는 철근 콘크리트 모델을, 미스 반데어로에는 철골 모델을 각각 완성한 장본인이다. 두 모델을 합하면 20세기 건물의 99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만큼 두 사람의 중요성과 위치는 절대적이며 20세기 건축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으로 통한다. 두 사람의 건축은 다빈치에서 시작해서 400여 년을 이어론 기계론과 부위론의 산물이다. 물론 두 사람의 작품 자체는 일정한 예술성을 확보하며 수준 높은 고급 예술작품의 반열에 올라 있다. 이들이 타계한 지도 40년이 넘어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이들의 작품은 바야흐로 전통 시대의 고전 걸작처럼 되어가고 있다. 아울러 20세기를 이어온 수많은 건축가와 사조의 예술작품은 대부분 두 사람의 건축 모델을 배경으로 삼는다. 한마디로 두 사람이 없었으면 20세기 건축은 없었다고 할 정도다.
두 사람의 절대적 영향력은 고급 예술로서의 건축 작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조형 환경 역시 99퍼센트 두 사람의 건축 모델로 구성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들의 모델이 기계론과 부위론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이것이 수준 높은 예술적 통제를 받지 못하고 일상 환경으로 내려올 경우 기계론과 부위론의 폐해가 극대화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점이다. 흔히 ‘무표정하고 삭막한 회색 상자’로 통칭되는 현대 대도시의 비인간적 속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여기에 후기 자본주의가 시작된 1990년대 이후에는 대형 상업 공간의 문제가 가세한다. 기계론과 부위론이 결국 물질주의를 이루기 위해 나왔기 때문에 이 두 이론의 부산물인 두 사람의 건물 모델 역시 자본의 집적을 돕는 상업 공간으로 귀결되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르코르뷔지에와 미스 반데어로에는 20세기 현대 건축을 완성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이들의 건축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다양한 각도에서 진행되어왔다. 내 서재에만도 르코르뷔지에에 대한 단행본은 40여 권, 미스 반데어로에에 대한 것은 20여 권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들의 건축을 몸 이론의 관점에서 해석한 연구는 이 책이 전 세계적으로도 처음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본다. 앞의 연구들이 대부분 두 사람의 건축을 찬양하는 쪽이었던 반면 몸 이론으로 해석하면 그 반대도 가능해진다. 기계론과 부위론의 부산물로서 현대 문명이 겪는 폐해에 대한 건축적 주범이라는 비판적 내용이 나올 수 있다는 점도 새로운 점으로 제시하고 싶다.
인문건축의 지속적 연구를 선언하며
‘몸과 건축’ 시리즈는 앞으로 전개될 나의 인문건축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가 될 것이다. 이번 책이 내가 펴낸 43번째 책이다. 그동안의 저술 작업에 대한 이런저런 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부족한 점에 대한 지적도 있겠지만 긍정적 내용을 요약하면 두 가지다. 건축을 공사 현장에서 직접 건물을 짓던 토건 분야에서 끌어내 예술과 인문학 분야로 가져온 점과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건축도 대중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감사드려야 할 과찬임이 틀림없으나, 개인적으로는 내 연구와 저술 작업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학술성과 대중성 사이의 고민’ 때문이다.
사회에서는 전문 학술서보다 대중적 책을 더 원한다. 전문 학술 이론은 논문으로 좁혀지고 단행본은 전문적 내용을 대중을 상대로 쉽게 풀어주는 이원화된 흐름이 굳어져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학자로서의 포부가 있기 때문에 대중적 책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전문 학술 연구도 논문보다는 단행본이 더 잘 맞고 꼭 필요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나에 대한 평가가 학자와 대중 저술가의 양 극단을 오간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혹자는 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둘은 굳이 구별할 대상이 아니라는 일반론도 격언처럼 새기고 있다. 학자가 나이가 들고 학문이 깊어지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면 어려운 전문 학술 이야기를 대중들에게 쉽고 친절하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무도 잘 알고 있다.
새로 시작한 ‘몸과 건축’ 시리즈에는 저술과 연구를 둘러싼 이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학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하고 싶은 바람을 담고 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기여를 함과 동시에 대중에게도 건축을 읽고 나아가 건축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아가 몸과 건축 시리즈가 포함된 인문건축이라는 연구 방향은 나의 50대를 관통하는 주도적 내용이 될 것이다. 몸과 건축 이외에도 건축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주제를 준비 중에 있으며 차례로 선보일 것이다. 계속해서 여러분의 격려와 사랑을 기대해본다.
마지막으로 날로 척박해져가는 출판 환경 속에서도 졸고를 정성껏 출간해주신 인물과사상사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사랑하는 두 딸과 애들 엄마에게도 늘 그렇듯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요즘은 두 딸을 앉혀놓고 아버지가 하는 작업을 이해시킨답시고 내 자랑을 늘어놓곤 하는데 지루해하지 않고 신기한 척 감탄과 맞장구를 쳐주는 두 딸에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번 책을 통해 사람은 실적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 자체의 인격체로 소중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내 자신에게도 스스로 고마움을 느껴본다.
1장
제의
몸을 통해 건축이 태어나다
몸의 영원성과 합일성
건축의 탄생 배경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다. 몸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류 문명, 특히 서양 고대 문명은 인간이 자신의 몸을 고찰한 내용과 매우 흡사한 궤적을 그리며 진행되었으며, 건축도 그 가운데 하나다. 건축은 몸의 물리적 보호라는 기능을 통해 몸과 직접 부딪히는 장르이기 때문에 더욱 비슷했다. 건축의 성립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면 ‘내 몸 하나 누일 거처를 확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1-1 고대의 몸 개념 가운데 건축의 탄생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 주제로 가장 먼저 ‘제의’를 들 수 있다.
제의(祭儀, ritual)는 ‘제례 의식’의 준말이다. 제례는 권력자의 장?제례가, 의식은 대자연의 신에 올리던 경배 형식이 각각 주요 내용을 이루었다. 둘을 합하면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자연과 교감하는 방식으로 극복하려던 대응 형식’이 된다. 이는 죽음의 문제를 인간의 기술력으로 해결하려는 서양 특유의 합리주의가 탄생(기원전 5세기 경)하기 이전의 대표적인 문명 형식이자 세계관이었다.
제의에 담긴 몸의 의미는 영원과 합일이었다. 두 개념은 같이 작동했다. 영원이란, 몸을 사망과 함께 소멸하는 단순한 물질 덩어리로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생물학적 죽음이 인간의 완전 소멸이 아니라 단순히 이 생의 육신이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영원한 존재를 담보해주는 생명의 장이 필요한데, 영원성을 갖는 몸이 바로 그것이다. 고대 종교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내세 사상이나 미라가 가장 널리 알려진 예인데, 사상적으로 풀어 말하면 몸을 정신과 하나로 합해진 것으로 보았다는 뜻이 된다. 합일이라는 개념이다. 육신과 정신의 합일 개념은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로 이어지는 현대 철학의 핵심적 몸 개념이기도 한데, 그 뿌리는 원시-고대의 제의까지 올라갈 수 있다.
원시-고대 시대에 몸의 합일 개념은 이들 현대 철학자의 주장처럼 정밀한 사상 체계를 갖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주술적 성격을 띠면서 제의라는 포괄적 문명 형식에 포함된 원초적 본능에 가까웠다. 혹은 이론으로 체계화할 필요조차 없는, 너무나 당연한 본능이자 확신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현대 철학자들이 어려운 사상 체계로 주장한 합일적 몸 개념도 합리주의와 기계문명이 깨뜨려 떼어놓은 육신과 정신의 통합 상태를 원시-고대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시도다. 고대인이 본능적으로 느끼고 행하던 개념을 후대의 말과 논리로 체계적으로 설명해서 복원한 것이다.
원시-고대의 ‘몸 합일’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생존을 위해 문명을 일구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이었다. 자연에 투쟁적으로 맞서보기도 하고 경건하게 의탁도 해보는 등 온몸을 다해 자연 속에서 생존 거처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인간의 몸은 정신과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합리주의가 더해진 그리스 윤리학에서는 이것을 ‘지덕체를 두루 갖춘 균형 잡힌 인간’이라는 이상적 인간상으로 제시한다.
그 통로는 종합 감각을 통한 자연과의 교감이었다. 굳이 기계적 관측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자연의 변화와 운행 원리를 온 감각으로 예측할 수 있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면서 느끼는 희열과 쾌락은 이런 능력을 깨끗이 잃어버린 현대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종합적으로 얘기해서 인간이 자신의 몸을 매개로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은 지금은 상상 못할 정도로 포괄적이었고 다양했다. 몸의 온갖 감각적 기능이 펄떡거리며 살아 있고 역설적으로 기댈 것이라곤 몸밖에 없던 아득한 옛 시절에 몸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많았다. 바로 이 대목에 신화가 개입한다. 현대적 기록 기술이 없던 시절, 이런 내용을 사실에 가장 가깝게 기록하는 것이 신화이기 때문이다. 신화에 나오는 내용을 지금은 대부분 허구나 미신으로 간주하고 잘해야 비유적 표현으로 해석하지만, 의외로 신화의 많은 부분이 사실이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화가 허풍이라면 이것을 좀 더 사실에 가깝게 다듬은 것이 고대 서사물인데, 호메로스Homeros의 『오디세이아』나 『일리아스』가 대표적인 예다. 『일리아스』의 끝에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부분을 보면 바람이 잘 안 불어 화장 장작이 타오르지 않자 북풍과 서풍에 제물을 약속하며 바람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마침내 바람이 불어 장작이 타올라서 장례를 무사히 치르게 된다. 고대 서사물에 매우 흔하게 등장하는 ‘바람과 비와 구름을 부르는’ 이런 장면은 단순히 고대의 미신이나 과장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과학적 장비 대신 온 감각과 예측 능력을 집중해서 인간의 몸으로 일기를 예측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연의 변화를 온몸으로 읽어내는 이런 능력은 삼국지 적벽대전에서 알 수 있듯 단순히 비와 바람을 불러 전쟁에서 승리하는 등의 기능적 목적만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저 멀리서 혹은 저 높은 곳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구름이 몰려오는 자연의 흐름과 변화를 내 몸의 신경과 감각으로 느껴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험은 실로 찬란하고 황홀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험은 인간에게 존재감을 확보해주는 가장 기본적 조건이자 원초적 단서다.
이와 같은 배경을 생각하면 몸은 생각의 조종과 명령을 받는 단백질과 무기물 덩어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명령하며 행하는 살아 있는 주체다. 흔히 몸을 물질적 대상인 육신으로 한정 짓는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몸은 육신과 정신이 하나로 합해진, 존재의 본질 그 자체다. 육신과 정신은 존재를 유지하고 행하는 과정에서 굳이 서열이나 앞뒤 관계를 가릴 필요가 없는 한 덩어리다. 육신과 정신이 하나가 되어 작동하는 대표적 예가 본능적 감각인데, 이런 감각을 느끼는 주체 그 자체다. 이 같은 몸의 본래 의미는 원시-고대 시대에 제의를 통해 ‘합일적 몸’ 개념으로 정립되었다.
‘합일적 몸’을 좀 더 확장하고 다듬으면 전일론(全一論, holism)이 된다. 몸은 세상 만물 가운데 전일적으로 존재하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다. 전일론은 단순히 정신과 육체의 합일뿐 아니라 몸을 이루는 각 부위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머리와 몸통과 사지, 내장과 근육과 뼈대, 이목구비 등 신체의 각 기관은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서 하나의 거대한 전일적 존재 상태를 이룬다. 얼굴도 하나의 작은 몸이요,■1-2 손도 하나의 작은 몸이며, 발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내장 기관의 관계와 상태는 손과 발과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상태에서는 정신이 육신의 지배를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일은 현대인에게도 흔히 일어나는데 현대 문명에서는 이런 경우를 절제력이 부족하고 문명화가 덜 된 부정적 상태, 심지어 위험하거나 정신 질환 상태로까지 몬다. 정신이 육신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생산 효율과 실적 향상이라는 현대 문명의 미덕에는 분명 위험 요소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대에는 이렇게 본능의 조종을 받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소득을 올리지 못하게 되고 결국 무책임하고 무능력하며 쓸모없는 인간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진실은 이와 반대다. 현대인은 본능을 억압당하며 원초적 자유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이전에 없던 수많은 병적 중독증에 시달리며 신음한다.
현대 문명은 기계가 이런 본능을 대신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몸은 생산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본능은 쓰이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퇴화할뿐더러 기계문명에 자본의 논리가 개입한 뒤에는 억압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생산성 향상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현대적 모범생은 이런 원초적 본능을 최대한 억제하고 다소곳이 생산성 향상에 매진해서 더 많은 실적을 내는 인간상으로 굳어졌다.
이집트 미술에 나타난 몸의 영원성
죽음에 대응하거나 자연과 교감하는 문제는 원시-고대 문명에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제의에는 당시 문명을 지탱하던 다양한 요소가 들어 있다. 종교적 초월을 바라는 주술을 기본 배경으로 하며 여기에 인간의 중요한 본능 가운데 하나인 놀이 기능까지 가졌다. 종교와 놀이는 축제로 합해져 형식화되었다. 신화가 탄생하고 신화를 섬기던 장 역시 제의였다. 심리학에서는 제의의 본질을 현대인이 잃어버린 인간의 중요한 능력인 ‘감탄’으로 좁혀서 보기도 한다. 관심과 활동의 범위를 나 또는 내 가족 등 개인사에 국한하지 않고 대자연과 전 우주를 상대하며 느끼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었다.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웃음’으로 좀 더 좁히기도 한다. 우리 현대인은 과연 하루에 몇 번이나 웃는가. 원시-고대에는 하루에 몇 번 웃었을까.
(서문,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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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임석재
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프랑스 계몽주의 건축에 관한 연구로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1호 교수로 학과를 창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공은 건축 역사와 이론, 비평 등이며 이외에도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폭넓은 주제로 현실 문제에 대한 문명 비판도 병행하고 있다. 연구와 집필에 머물지 않고 그동안 공부하면서 쌓은 내용을 실제 설계 작품에 응용할 준비도 하고 있다.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현재까지 40권이 넘는 저서를 펴냈으며, 대표 저서로는 『추상과 감흥』, 『미니멀리즘과 상대주의 공간』, 『건축, 우리의 자화상』, 『서양건축사』(전 5권), 『서울, 골목길 풍경』, 『교양으로 읽는 건축』, 『나는 한옥에서 풍경놀이를 즐긴다』, 『계단, 문명을 오르다』, 『한국의 간이역』,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전 2권), 『우리 건축 서양 건축 함께 읽기』, 『임석재의 생태건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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