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바라트의 거울
나에게 네이키드와 누드는
(사전 편찬자들은 옷이나 보호물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동의어로 분류하지만)
사랑과 거짓, 진리와 예술만큼 확연히 다른 것이다.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Graves,
「네이키드와 누드The Naked And the Nude」
이렇게 한번 해보라. 책을 덮고 당장 옷을 벗어라. 만약 지금 욕실에서 이 책을 읽으려 했다면 괜찮겠지만 하필 서점에 있거나 버스나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면 인생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왜 그런지, 단순히 옷을 입지 않은 것뿐인데 뭐가 그렇게 큰 문제인지, 왜 책 한 쪽을 미처 다 읽지도 못하고 체포되어야 하는지 이제 이 책에서 알아보자. 우선 신발을 벗어던졌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네이키드가 될지 누드가 될지 정하는 것이다.
현대 영어는 고대 앵글로색슨족과 중세 노르만족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의 단어와 사고방식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녹아 있다. 네이키드naked라는 단어는 앵글로색슨 게르만어파에서, 누드nude라는 단어는 노르만계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영어는 옷을 입지 않은 상태를 정교하게도 두 단어로 나타내는데 의미가 각기 다르다. 누드는 옷을 입지 않고 고의로 시선을 끄는 것을 말하며 네이키드는 단순히 옷을 입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 누드는 예술 활동에서, 네이키드는 욕실에서 일어난다. 네이키드는 자연 그대로의 날것을, 누드는 이상적인 것을 뜻한다. 미술 비평가 존 버거는 이렇게 썼다. “네이키드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누드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혼자서는 인식하지 못한다. 네이키드가 누드가 되려면 누군가에 의해 하나의 대상으로 보여야 한다.” 더 나아가 “누드는 결코 옷을 벗고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는다. 누드는 옷의 일종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두 단어를 구별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다. 서점에서 누군가가 벌거벗고 서 있는데 애써 그에게 가서 네이키드인지 누드인지 물어볼 사람이 있겠는가. 이 책에서 나는 프랑스인이나 독일인처럼 그 두 단어를 구별 없이 사용할 것이다. 의미상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이 책이 번역될 때 발생할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또 책 전체에서 한 단어만 계속 쓰면 읽기가 지겨워질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주로 나체 상태가 불러일으키는 많은 특수한 문제들에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체에 대해 왜 그렇게 당황하는가? 나체는 왜 사람들을 그렇게 흥분시키는가? 왜 어떤 종교는 나체를 비난하고 또 어떤 종교는 권하는가? 나체 시위로 무언가 보람 있는 것을 이룰 수 있는가? 젖꼭지를 가린 재닛 잭슨의 가슴이 겨우 눈 깜짝할 동안 노출됐다는 이유로 CBS에 55만 달러의 벌금을 매기는 나라에서 어떻게 음경 연기자들이 자신의 생식기를 주무르는 공연을 할 수 있는가? 경찰은 옷을 입은 것처럼 보디페인팅한 알몸의 여자와 누드 슈트를 입은 여자 중누구를 체포할까? 그리고 ‘네이키드 셰프’가 옷을 벗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점들을 비롯해 나체에 대한 수많은 의문이 드는 이유는, 설사 나체가 타고난 몸 상태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수많은 모순된 사고, 느낌, 행위의 촉매제 역할을 하면서 어떤 때는 비극적인, 어떤 때는 감동적이고 기묘한 역사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 다채로운 내력도 일종의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웃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종에게 푹 빠져서 몸을 보여주고, 보면서 끝없이 황홀해하는 종이 있다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더 관대한 사람들은 나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다른 동물과 우리를 구별 짓는 속성, 즉 자의식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세계 최고最古의 종교인 자이나교의 전설은 나체에 관한 또 다른 관점을 잘 설명해준다. 어느 날 자이나교 창시자의 아들인 바라트 황제가 목욕 후에 거울로 자신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몸을 가진 존재라는 깨달음은 우리 자의식의 핵심이며, 그것이 우리가 몸을 가꾸고 옷을 입는 데 많은 돈과 노력을 들이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몸과 외모를 인식하는 방식이 자아와 세상을 인식하는 데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종교와 나체
나체를 찬양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인들은 다른 어떤 민족과도 다르다.
그들에게 나체는 수치스럽거나 우스꽝스럽거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투명하게 보는 것(그리스의 종교적 체험의 한 측면)과 운동경기의
관점(승리와 명예를 축하하는 일을 최고의 목표로 보는 것-옮긴이)에 관련한
중대한 의미를 띠고 있었다.
―마리오 페르니올라Mario Perniola
「화려한 의복과 적나라한 진실The Glorious Garment and the Naked Truth」
이 책은 나체에 대한 종교적 관점에서 시작한다. 심리학이 출현하기 전 자신과 자신의 몸에 대한 인간의 관심을 높이고 구체화한 것이 바로 종교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일상적이고 극히 사적인 공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종교 지도자나 신도들의 나체 상태를 용인하지 않을 것 같고, 나체로 참여하는 종교 활동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초기 종교의 우상들이 빌렌도르프와 몰타의 ‘비너스’처럼 나체 여성의 모습이고 그리스와 인도에서 나중에 발생한 종교 역시 종종 남성의 나체 형상을 숭배했다. 남자가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기독교 교리는 기독교 나체주의자들의 강력한 무기이며, 유대교에서 최초의 인간 아담 카드몬은 몸에 만물을 품고 있는 거인의 형상이다. 인도 자이나교에서 우주는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며, 평화롭게 앉거나 서 있는 남자 나체상들은 깨달음을 얻은 스물네 명의 창시자들을 표현한 것이다.
진리는 역설의 옷을 입고 있다는 말이 있다. 종교도 진리를 추구하면서 인간의 형상에서 풍부한 근거를 얻었다. 몸은, 한편으로는 신의 창조물로서 기독교의 용어를 빌리자면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두 개의 서로 다른 몸 사이의 상호작용과 매개물을 통해 생겨나는 한, 몸은 고통과 고통의 원인이 발생하는 곳이다. 몸이 신전도 되고 감옥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 종교에서 발견되는 몸에 대한 양면적인 태도의 근원이 된다.
그 양면성을 인정하지만 첫 두 장에서는 여러 종교가 몸에 대한 수치심과 혐오감을 가르쳐온 역사는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고, 여러 전통에서 나체가 어떤 식으로 숭고한 정신적 목표에 이용됐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몸과 나체에 대한 사고방식의 역사보다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측면, 다시 말하면 나체가 사람들을 일깨우고 힘을 부여하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 실제로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종교 단체와 개인들이 정신 수행 중에 옷을 벗으라고 권한 사실은 거의 알려진 적이 없으니 놀라울 것이다. 특히 가장 뜻밖인 것은 고대든 현재든 기독교와 나체의 관계다. 2003년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 <나체의 순례자The Naked Pilgrim>에서 미술 비평가인 브라이언 슈얼은 에스파냐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기독교의 성지-옮긴이)로 순례를 떠났다. 한때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그 순례 동안 눈물이 날 만큼 감동했고 스스로 그런 사실에 몹시 놀랐다. 그는 피니스테레에서 옷을 벗어 태우고 바다에 뛰어드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그 여행을 마무리했다.
정치와 나체
웰링턴 공은 매일 나폴레옹의 벗은 모습을 보았다.
살아생전에 적이었던 나폴레옹의 완벽한 근육질 가슴은, 시간이 지날수록
노화되어 가는 웰링턴 공 자신의 피부만큼 익숙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안토니오 카노바가 만든 나폴레옹 1세의 나체 거상이
오늘날까지 하이드파크 코너에 있는
앱슬리하우스의 나선형 계단에 서 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그 장군의 집 말이다.
―조너선 존스Jonathan Jones, 「아직도 그대로Hanging in There」,
『가디언The Guardian』, 2006년3월11일
나체에 대해서 우리는 상반되고 역설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종교에서 나체는 수치스러움, 억제해야 할 욕망을 나타내기도 하고 순수함, 수치를 모르는 상태, 심지어 육체의 거부를 뜻하기도 한다. 반면 정치에서 나체는 강력한 힘과 권위, 혹은 취약성과 노예 상태를 상징한다. 이런 상반된 의미들 때문에 우리가 나체에 대해서 모순적이고 복잡한 반응을 보이게 되며, 나체가 예술과 철학 탐구에 중요한 기반이 된다.
현대 서양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는 두 가지 요인, 즉 고대 이교도 전통과 중동의 유대교 전통이 작용했다. 유대교 문화에서는 나체가 주로 가난과 노예 상태와 연관되었다. 부자와 권력자들은 부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옷을 입고 장신구를 걸쳤지만 매춘부, 노예, 광인들은 벌거벗었다. 이와 달리 그리스인들은 나체를 이상형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에 정치가들이 자신을 신과 비슷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나체 조각상을 새겼다. 기독교 전통이 이런 고대 이교와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으니 기독교가 나체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언뜻 당연해 보인다.
나체에 대한 모순적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정치 영역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들은 무장한 리무진과 경호원이라는 보호 ‘의상’이 필요한 반면,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옷을 벗겠다는 협박만으로 정부나 기업에 몸값을 요구할 수 있다.
인간은 옷을 벗으면 공격받기 쉽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이상하게도 강해진다. 정치적 시위에 나체가 자주 이용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시위자들은 몸을 노출해 복합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도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현 상태에 도전하며, 두렵지 않으며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명분에 힘을 싣는다. 동시에 인간의 취약성과 약점도 드러낸다.
3장과 4장은 나체의 이런 복합적인 의미가 시위에 어떻게 이용되는지,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나체를 이용하면서 나체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나체와 정치의 연관성은 나체 조각상으로 지위와 권력을 표현한 것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성서에서 군사력이 곧 승리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를 바탕으로 다비드 조각상이 제작되면서 1,000년이 넘도록 예술 작품에서 나체를 표현하지 못하게 했던 기독교적 죄의식의 굴레를 벗겨주었다.
유럽에서 고대 이후 제작된 최초의 남성 나체 조각상은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상인데, 헤르메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전령으로서 날개 달린 샌들, 날개 달린 모자 등이 상징으로 쓰인다-옮긴이)를 연상시키는 부츠와 모자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조각상은 15세기 중반 피렌체의 메디치가 대저택 안뜰에서 공개되어 세상이 떠들썩하게 메디치가의 승리와 대담함을 과시했다.
60여 년 뒤인 17세기 초, 미켈란젤로도 다비드상을 조각했는데 이번에는 완전한 나체였으며 높이가 5.2미터나 되었다. 이는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져, 고대 이후 공공장소에 전시된 최초의 남성 나체 조각상이 되었다. 피렌체가 사방에서 강한 나라들의 위협을 받고 있던 당시 그 조각상은 피렌체 사람들에게 타고난 힘과 승리의 잠재력을 든든하게 전달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베네치아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에게 의뢰한 자신의 나체 조각상은 패전과 동시에 웰링턴의 것이 되었다. 처칠이라면 아무리 세계대전이 종전했다고 해도 결코 히틀러의 나체상을 집에 가져다 놓지 않았겠지만, 웰링턴은 자신이 무찌른 적의 나체상을 아무렇지 않게 집에 두었다. 150년 뒤 1967년 잉글랜드의 궁내 검열관은 연극 <윌슨부인의 일기Mrs Wilson’s Diary >에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의 나체상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금지했다. 이렇듯 관습, 법, 사고방식은 시대, 지역, 계급, 미학으로 짜인 복잡한 거미줄에 엮여 있다.
대중문화와 나체
현대 소비문화의 속성이 충분히 알려져 있고 그것에 대한 냉소까지 존재하는 지금도
사람들은 몸이 얼핏 보이기만 해도, 아니 나체라는 말만 꺼내도 분위기만 맞으면
낄낄거리거나 화를 낸다. 나체는 중요한 몸인 동시에 평범한 몸이다.
그래서 포르노 산업의 주재료인 동시에 학교 체육 시간의 장애물이다.
나체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 규칙, 관습에는 모순, 복합성, 부인이 가득하다…….
―루스 바칸Ruth Barcan, 『나체: 문화적 해부Nudity: A Cultural Anatomy』
바칸이 말한 모순 덕분에 나체는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흥미진진한 렌즈가 된다. 잉글랜드 도싯 주의 체른 애바스에는 9미터나 되는 성기에 키가 55미터인 남자의 모습이 수백 년 동안 건재해 있다. 반면, 2007년 미국의 한 출판사는 아주 작게 그려진 남자 나체 조각상의 그림조차 책에 싣지 않겠다고 했다. 논란을 일으킨 이 그림은 독일에서 가장 잘 팔리는 어린이 책 작가 로트라우트 수잔네 베르너의 것으로, 조각상은 미술관 내부를 그린 삽화의 배경에 놓여 있다.
마지막 두 장에서는 서양 대중문화에서 이런 모순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그리고 나체라는 개념이 ‘실제로 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만큼 중요한지 설명하려 했다. 제이미 올리버는 네이키드 셰프로 유명해졌지만 한 번도 옷을 벗은 적이 없다. 또 1960년대에 무대에서 나체 혁명을 일으킨 뮤지컬 <헤어Hair>의 나체 장면은 20초도 채 되지 않았고, 나체를 소재로 한 영화 <풀 몬티The Full Monty (벌거벗은 몸이라는 뜻-옮긴이)>에서도 나체가 등장한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심지어 <풀 몬티 완전 노출The Full Monty Fully Exposed>이라는 제목으로 출시된 DVD도 진짜 ‘풀 몬티’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조직화된 사회운동으로서 나체주의는 1960년대 이후 쇠퇴하고 있지만 대중들은 나체를 더 많이 용인하고 즐기게 되었다. 덕분에 설치 미술가 스펜서 튜닉은 나체로 사진과 영화를 찍을 수천 명의 지원자를 쉽게 구했으며 자선단체들은 기금 모금용 나체 달력 제작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됐다. 나체에 대한 수치심은 나체가 본질적으로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나체가 우리 모두 똑같은 인류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준다는 것을 인식하며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지역의 차이는 있지만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일부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는 다양한 나체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번지점프를 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거나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요가 수업을 받고, 마술 제의에 참여하고, ‘나체의 밤’에 수영장에 가고, 영화관에 가고, 온천욕을 하거나 알몸 보디페인팅을 할 수 있다. 프랑스 남부 카프닥드의 ‘나체 도시’에서 휴가를 보내고, 뉴욕이나 에든버러 사설 클럽에서 나체로 목욕하거나 나체로 외식하고, 베를린이나 뮌헨의 중심가에서 나체로 일광욕을 하고, 런던에서 ‘알몸’ 디스코텍에 놀러 가고, 네덜란드 체육관에서 알몸으로 운동하고, 뉴질랜드에서 나체로 돌아다니거나 알몸으로 독일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갈 수도 있다.
나체로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나체가 관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적절하지 않은 때에 적절하지 않은 장소에서 옷을 벗으면 벌금을 내거나 감옥에 가야 한다. 몸 내부를 보여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몸의 외부에 관한 한 아직 그런 자유가 없다. 1,800만 명 이상이 관람한 군터 폰 하겐스의 ‘인체의 신비’전은 실제 인간의 몸을 사용했는데 합성수지 주입 보존법을 실행하기 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몸을 ‘벗겨냄’으로써 나체의 개념을 확대했다. 또한 자기공명영상 MRI과 같은 수많은 의학 기술 덕분에 신체 내부는 더욱 쉽게 볼 수 있지만 신체 외부를 노출하는 것은 여전히 법적, 도덕적 제한 대상이다. 혼란스럽다고? 그럴 만하다. 이 책이 그 혼란을 정리해주지는 않겠지만, 이 책을 통해서 혼란을 더 흥미롭게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서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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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필립 카곰 Philip Carr-Gomm
작가이자 심리학자인 필립 카곰은 1945년 런던에서 태어나 웨스트민스터 스쿨을 졸업한 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20여 년 동안 나체주의, 자이나교, 드루이드교와 현대 마법 종교 위카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베스트셀러『드루이드교의 기본The Elements of the Druid Tradition』을 비롯해 『드루이드의 길The Druid Way』,『영국 마법의 역사The Book of English Magic』등 총 14권의 책을 냈다. 현재 영국 서식스 주에 살며 심리치료사 및 몬테소리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카곰은 2001년 여름에 연구를 위해 찾은 영국 최초의 자연주의 리조트에서 우연히 옷을 전부 벗게 되었다. ‘온갖 걱정과 근심의 무게를 더한 듯한’ 옷을 벗고 나니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나체가 되는 기쁨을 알게 된 뒤 나체의 역사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누드모델을 서고 인도로 순례 여행을 떠나기도 하면서 나체 현상을 조사했다.
『나체의 역사』는 다양한 문화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정치적, 대중적인 나체 활동을 상세하게 분석해, 인간의 나체가 하나의 육체적인 상태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핵심적 요소임을 명쾌하게 논증한다.
블로그 http://philipcarrgomm.wordpress.com
홈페이지 http://philipcarrgomm.druid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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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정주연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고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최근작『책과 집』을 비롯해 잭 런던의『밑바닥 사람들』『버닝 데이라이트』, 루이스 메넌드의『메타피지컬 클럽』, 제임스 트레필의『산꼭대기의 과학가들』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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