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가난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아직도 ‘가난’이라는 말은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노랗게 부황 뜬 얼굴로 자기 몸 하나 지탱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기아 상태에 내몰린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인지 이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을 이제 주변에서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빈곤과 기아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줄었다 해도, 한국 사회가 누구나 먹고 살 걱정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인가? 한창 젊은 대학생들은 미래를 향한 힘찬 희망을 가슴 속에 품기보다 등록금 마련에 전전긍긍해야 한다. 수많은 직장인들도 항상 퇴직과 해고의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한국이 세계에서 음주량 1위라는 통계 수치는 어쩌면 술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일상의 고단함을 뜻하는 지도 모른다. 가난은 행복해야 할 결혼마저도 미루게 하고, 꿈꾸던 미래도 포기하게 한다. 그러니 출산율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당연히 고령화된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도 막을 수 없다.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가난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가장의 비극이나, 가난과 빈곤을 둘러싼 엽기적인 사건들도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거리에서는 노점상들이 생계 발판인 손수레를 지키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철거된 집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는 사람도 있다. 시커멓게 그을린 용산참사 현장을 바라보며 왜 그 사람들이 망루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지, 왜 철거민들이 죽음도 불사한 투쟁 방식 외에는 달리 선택할 방법은 없었는지 다시 묻게 된다.
《가난의 시대》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희망에서 쓰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도시빈민들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빈민해방을 위한 또 하나의 발판을 찾고 싶었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2009년 용산참사 직후 ‘노동자 역사 한내’ 측의 요청으로 쓰기 시작했다. 시대별로 도시빈민운동의 주동력이었던 철거민운동과 노점상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이 과정 속에서 사라져간 열사들의 희생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려고 했다. 그 후에 인터넷 언론매체인 《참세상》에 약 1년간 ‘도시빈민운동사’라는 제목으로 다시 연재를 했다. 각 시기별 빈곤의 실질적 원인이기도 한 비정규직 문제, 주택과 부동산 문제 등 각 정부의 정책들과 한창 뜨겁게 달아올랐던 복지정책에 대해서도 추가로 살펴봤다. 그리고 그동안 정리한 자료를 다시 모아 빈민운동의 평가와 전망 부분을 추가해 책으로 엮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도시빈민들의 생활상과 자신의 삶과 처지를 바꾸기 위해 어떻게 저항해왔는지 담고 있다. 도시빈민들의 저항의 이면에는 수많은 활동가들의 실천이 함께 맞물려 있다. 따라서 도시빈민 활동가들의 모습과 그들이 실제로 현장에 어떠한 영향을 줬는지 살펴보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도시빈민운동은 철거민운동과 노점상운동으로 크게 나뉘면서 몇 가지 흐름으로 전개됐다. 먼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연세대학교 빈민문제연구소와 수도권도시빈민선교회로 대표되는 종교를 매개로 한 빈민운동과 지역주민운동이 등장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철거가 시작되기 전후 세입자들의 주거권, 또는 생존권을 둘러싸고 전개됐던 철거민운동이 여기에 합류했다. 얼마 전 용산참사를 둘러싼 투쟁, 상계동 철거투쟁, 더 거슬러 올라가 경기도 광주의 투쟁은 대표적인 철거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노점상들은 그들의 마지막 생계 수단인 손수레에 대한 단속과 과태료 부과에 항의했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1990년대를 거쳐 최근까지 도시빈민운동의 한축을 이루며 성장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홈리스가 새로 등장했고, 빈민당사자 조직과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 단위들과 반(反)빈곤운동 등이 생겼다. 도시빈민운동과 반빈곤운동은 용산참사를 겪으면서 대외적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그 대응은 여전히 미흡했다. 또한 현재 빈민운동 단체들은 내부적으로 분화를 겪으면서 심각할 정도로 어려운 상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빈민운동은 그래왔던 것처럼 지속될 것이다. 이 책이 앞으로의 도시빈민운동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 책은 필자가 1995년 전국노점상총연합, 전국빈민연합, 최근 민주노점상전국연합과 빈민해방실천연대에서 활동했던 것들이 바탕이 됐기에 도시빈민운동이 분화되는 과정들을 필자가 경험한 만큼만 서술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가 있다. 또한 최근 들어 새로운 반빈곤운동과 빈민운동이 성장하면서 범위가 더욱 다양화되고 있기에 그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용어를 다소 혼재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도시빈민운동과 반빈곤운동의 정의와 향후 전망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부족한 글을 모아 책으로 내게 된 이유는 한국 사회의 반빈곤운동의 흐름을 한 권에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빈민운동, 반빈곤운동의 현실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함으로써 반성과 평가의 기회를 마련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책 작업을 하면서 필자가 이러한 글을 쓸 자격과 역량이 되는지 주저할 때도 많았다. 필자의 경험만 고집하며, 자료의 오류와 부족함을 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러나 모든 미래는 과거의 성찰을 바탕으로 그려진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단순히 가난의 모습을 시대순으로 정리하거나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그려보려는 의도가 더 컸다. 무엇보다도 지금 나는 어디쯤 와 있는지 되돌아볼 기회를 찾고 싶어 좀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빈곤의 그림자는 언제든 우리 곁에 서성이고 있으며, 가난의 끝은 다시 올라올 수 없는 절망의 터널이다. 하지만 자포자기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청 앞에서 한미 FTA 반대 농성을 하는 사람들, 그 밑 지하도에서 장애인차별철폐를 주장하며 장기 농성을 하는 장애인들, 비정규직에 맞서 고립된 망루를 지키는 노동자들, 대전교도소에서 겨울을 맞이할 전철연 남경남 의장 동지와 용산참사로 구속된 사람들, 길거리 모든 노점상과 개발 지역의 철거민들, 이 사회 곳곳에서 헌신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도시빈민 활동가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시빈민운동은 이 사회의 총체적 변화와 함께 전개될 때만 진정으로 희생하신 분들, 특히 단속과 철거에 맞서 돌아가신 많은 열사들의 죽음에 보답하는 것이라는 말도 꼭 덧붙이고 싶다.
2012년 2월
최인기
1장
극심한 사회변동 속 빈민의 등장
: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
일제강점기에는 일상생활의 유지에 필요한 생활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민중의 생활 상태가 매우 열악했다. 이들의 삶은 하루를 벌어 하루를 연명하기에도 벅찼으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수준이었다.
빈민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일제강점기에는 일상생활 유지에 필요한 생활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민중의 생활 상태가 매우 열악했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연명하기에도 벅찼으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수준이었다. 수입의 거의 대부분이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지출됐고, 이중 70% 이상을 식비로 지출한 것으로 조사됐다. 따라서 질병에 노출되기가 쉬웠고 당연히 의료비도 감당하기가 힘들었으며,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따르면, 빈민은 자신의 생계를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세민’, 생계가 매우 곤란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궁민’, 또는 ‘부랑자’나 ‘걸인’ 등 다분히 추상적으로 분류됐다. 1920년대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월 수입이 20원 이하인 경우를 빈민으로 간주했는데, 이와 같은 기준을 조선에 적용한다면 당시 조선인 대부분은 빈민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1930년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소작농’의 연간 수입은 205원, ‘세농’은 140원이었다. 당시 소작농 가구가 약 150만 가구에 이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곡창지대인 전라도 농민 가운데 절반 정도가 빈민의 범주에 포함됐을 것이고, 조선인 절대 다수는 빈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울의 빈민은 어땠을까? 당시 경성부 사회과의 조사에 따르면, 1936년 11월 서울에 거주하는 조선인 실업자와 세궁민은 10만 5,000여 명이었다. 조사에서 빠진 사람들과 걸인을 합하면 적어도 11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 인구가 60만 명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6명 가운데 1명꼴로 빈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도시빈민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토막민’이다. 이들은 농촌과 도시의 빈민들로 경성을 비롯한 각 도시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으며 하천이나 제방, 산기슭, 다리 밑과 같은 곳에 거주했다. 굴을 파서 그 위에 멍석을 깔고 주위에 짚을 펴서 만든 곳에 거주했던 것이다. 토막민이 근대적 빈민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1920년대 초였다. 그리고 토막민이라는 용어는 그들의 두드러지는 외양을 이루는 주거 상태에서 연유했다. 공공재산 또는 사유재산에 대한 부당한 침해를 의미하는 ‘무단 점거’라는 말로 이들의 상황을 표현함으로써 불법성이 강조되기도 했다. 오늘날의 무허가 정착지 주민과 유사한 개념으로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1927년에 서울의 토막민은 3,000여 명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더욱 빠르게 증가해, 1938년 1만 6,600여 명, 가뭄피해가 컸던 1939년 이후에는 2만 911명으로 늘어났고, 1940년 말에는 약 3만 6,000여 명에 이르렀다. 10년 사이에 1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토막민의 대부분은 일용노동자나 삯짐을 져서 근근이 생활했다. 1938년 말 조선총독부가 서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664명의 토막민 가운데 직업이 있는 사람은 938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82%가 일용노동자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일용노동자의 1년 평균 실업일수가 140일이었으므로 토막민 가운데 대부분은 1년에 절반 이상을 일정한 수입 없이 살아갔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안정된 수입 없이 불안정한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침략 전쟁기 일용노동자들에게 강제저축이 강요되고, 각종 ‘국방헌금’ 등이 강제로 징수된 점 등을 감안한다면 도시빈민의 삶은 굉장히 열악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살펴 볼 대상은 화전민이다. 화전민은 일제의 조선 농촌에서 수탈적 농업정책이 진행되면서 출현했다. 자작농 겸 소작인이었던 소지주는 남의 집 행랑 칸을 빌어 농사하는 막실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그러다 힘든 생활고를 견뎌내기 어려워 결국 산속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화전민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화전민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산불이 번질 우려와 죄를 짓고 도피처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화전금지정책’을 실시해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다. 당시 화전민들은 대체로 북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았으며, 산림에 불을 지르고 그곳을 경작해서 감자, 보리, 조, 콩 등의 작물을 재배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조선후기에 파악된 화전민은 도합 235결이었으며 1928년에는 9,806호로 전체 5만 4,134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화전민의 식생활도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장해뒀던 곡식은 초봄이면 바닥이 났기에 초봄이 지나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함경남도 장진군 신남면 일대의 화전지대를 답사하고 〈고해순례〉를 쓴 최용환 씨는 화전민의 집을 보고 다음과 같이 썼다.
“양지바른 산비탈에는 거의 빈틈없이 연접된 화전이 있고 물 흐르는 좁은 골짜기 마다 ‘틀거리’의 집이 있으니 그는 산에서 나무를 베어온 채 별로 다듬지도 않고 네 귀를 맞추어 덧놓고 덧놓아 기둥도 일없이 지은 집이다. 그 틀거리 사이에 바람을 막기 위하여 흙을 엷게 바르고 한편에 들고나는 문이 있으니 이것이 곧 순화전민들이 일시 우거하는 안식처라 한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방안에 온돌은 있으나 방과 부엌에 바람벽도 없이 화통했고 어느 해에나 창호지를 했는지 더럽다 못하여 검고 절어서 방안에서 햇빛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이 되었다.”
농촌에서 쫓겨난 화전민들은 척박한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간섭받지 않은 채 살아갔다. 심지어 조선총독부의 ‘화전금지정책’을 위반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잡혀가도 감옥에서 먹여주고 입혀주기 때문에 오히려 화전을 경작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기에, 형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빈민에는 토막민, 화전민 외에도 근대적 규모와 시설을 갖춘 공장에 들어가 직공으로 일하던 공장 노동자들도 포함됐다. 이들 역시 1930년대 중반 한 달 수입이 16~17원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가족 수가 4~5명인 경우 최소 27원은 있어야 한 달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공장 노동자도 빈민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공장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이른바 ‘노동빈민’도 상당수였다. 이 사람들은 도시의 잉여 노동력으로 대규모 공사현장에 투입되어 노동빈민으로 활용됐다.
농촌에서는 일제의 수탈 정책으로 빈농층이 늘어났으며 조선 민중의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됐다. 월 수입액을 기준으로 당시 빈민을 규정하면, 일제강점기의 3대 빈민층이던 농촌의 광범위한 빈농층, 도시의 토막민, 화전민은 물론이고 다수의 공장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빈민까지 범위가 확대된다. 이 사람들은 일본에서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난 이후, 전쟁에 휘말려 가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전쟁노동력으로 동원되면서 조선민중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노동력 수탈의 피해자가 됐다. 뿐만 아니라 가혹한 노동조건과 군사적 노동통제 하에서 살아남더라도, 광복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빈민들은 다시 실업과 폭등하는 물가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날그날의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열악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노점상은 어떻게 형성됐는가?
노점상은 오래된 상거래 행위로 그 형성 시기를 정확히 가늠하기가 어렵다. 조선 시대 이전부터 저소득층인 천민이나 상민들이 생계유지를 위한 방편이자 경제활동의 기초 단위로 노점상을 해왔다고 알려진다. 조선 초기에는 중앙 정부에 그 지방의 특산물과 농·어물, 공산품들을 상납하면서 지방의 특정 상품은 발전했지만 타지방과의 상품 교류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따라서 각 지방은 한정된 물품만을 마을 장터에서 유통했으며, 특정 품목은 지방마다 가격이나 가치가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다 조선 중기 이후 마을 장터에서 여러 지방의 특산물, 농작물, 약간의 공산품이 활발하게 유통되기 시작했고, 점차 도시가 발달하면서 장터도 함께 발전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중앙정부가 각종 세금을 쌀로만 부과하면서 지방의 특산물을 손쉽게 얻을 수 없었다. 그러자 중앙정부는 직접 또는 지방관청을 통해 지방 특산물을 구입했다. 그러면서 유통을 담당하는 상인들이 생겨났고 국가에서 그들에게 일부 품목에 대한 독점권을 인정해주면서, 독점권을 바탕으로 자본이 형성됐다. 이러한 잉여자본을 통해 그동안 특정한 지방에 국한되던 상품들이 여러 지방으로 유통됐다. 또한 교통이 발달하면서 이전보다 더 폭넓게 상품들이 유통되는 환경이 마련됐다. 이를 계기로 독점자본이 생겼고, 이것은 전국에 유통망을 확보하면서 사재기를 통해 더욱더 큰 이익을 얻으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양반과 상민의 계급이 붕괴하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독점자본은 더욱 확대됐다. 천민이나 상민들의 생존을 위한 방편과 기초적인 유통 상거래 행위에서,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변화된 시장은 전국에 유통망을 가진 독점자본으로 변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점상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자신의 육체노동을 이용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중추적인 유통기능을 담당했던 ‘보부상’과 상업을 본업으로 삼고 특정 장터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현재의 대리점 형태)’들이 있었다. 또한 상업을 본업으로 하지는 않고, 소작농을 겸하며 물건을 팔던 노점상들이 있다. 조선 시대부터 노점상은 소작농이나 저소득 상인, 천민들의 생계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지금의 노점상들도 과거의 보부상이나 소작농을 겸하던 조선 중후기 노점상들의 명맥을 잇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계급이 파괴되고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유통시장에는 세계 곳곳의 문물들이 유입되는 복합적인 양상이 나타났다. 1930년대 노점상 및 행상의 수는 약 11만 3,000여 명으로 전체 상업 인구의 23.8%를 차지했다. 이를 다시 남녀별로 구분해보면 남성은 물품 판매업주, 노점행상 등의 순서로 구성되는 데 반해, 여성은 접객업과 노점이나 행상이 상업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선의 상업 인구는 접객업과 노점행상 및 군소 상점주가 절반 이상이다. 시장 역시 일정 기간을 정해 열리는 5일장으로 발전하게 된다. 5일장은 주로 대도시보다는 지방 중소도시에서 형성됐는데, 일정 기간이라는 특징 때문인지 활동 반경은 더욱 넓어졌고 더 크게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의 소작농, 농업노예, 극빈 계층들은 도시로 유입되면서 난전과 노점상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노점 거리가 형성됐던 곳은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장소로 기능했다. 마을의 시장이나 장터는 민중의 억울함과 분노를 토로하는 토론장이자 진정한 삶의 현장이었다. 시장과 노점 거리가 형성된 곳에서는 세간의 정보가 유통되고 집회가 벌어지면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거나 전국적인 시위나 항일투쟁이 시작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지배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1944 조선구호령11을 제정했다. 조선구호령의 적용 대상은 65세 이상의 노쇠자와 13세 이하의 유아, 임산부, 불구, 폐질, 질병, 상병 기타 정신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해 노동에 지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급여 내용에는 생활부조, 의료부조, 조산부조, 생업부조 등이 있으며, 구호는 신청주의, 자산조사 규정, 거택보호 등을 원칙으로 했다. 조선구호령은 형식적으로 빈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근대적 의미의 공공부조제도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그러나 실제로는 안정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지배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해방과 한국전쟁이 낳은 도시빈민
1945년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민중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빈익빈 부익부는 더욱 심해졌고, 항일투쟁가들을 탄압하던 경찰과 관료들은 친일을 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나아가 자본가들은 해방 이후에도 더욱 당당하게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하며 부를 축적해갔다. 또한 해방 후 바로 벌어진 한국전쟁은 민중의 많은 부분을 앗아갔다. 해방 직후 90만 명이던 서울의 인구는 급속도로 늘어나, 한국전쟁 직전 170만 명에 이르면서 연평균 인구 증가율이 9.1%에 달했다. 북한 주민들 가운데 64만여 명이 월남하기도 했다. 또한 250만여 명으로 추정되던, 귀환한 재외동포의 상당수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농촌에 연고가 없는 일부 재외동포들은 월남민 대다수와 함께 도시로 유입됐다.
도시에 새로운 거처와 일자리를 찾는 인구는 폭증했지만 일본과의 교역이 단절되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지역·산업 간 분업체계는 거의 와해됐다. 게다가 물자수급의 불균형 문제까지 겹치면서 극심한 실업난과 식량난을 겪었다. 따라서 도시로 몰려든 다수의 해외동포와 월남민 들은 안정된 일자리와 거주지를 구하지 못한 채 도시빈민층으로 전락했다. 전쟁으로 총 주택의 30%가 파괴되는 등 폐허가 되다시피 한 도시는 빈민들을 수용할 만한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그 결과 도시빈민들은 시가지 안팎의 유휴지에 미군들이 쓰고 남은 각종 건자재를 이용해서 판잣집을 짓고 노점상이나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토막집과 화전민과는 달리 ‘판잣집’은 언제, 어디에서부터 쓴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8.15해방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피난민들이 임시 거주지로 사용하려고 미군들이 진주시 가지고 들어온 나왕, 미송 등의 목재조각과 루핑, 깡통, 등을 이용해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생겼다고 추측할 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토막민이 도시빈민의 원형을 이뤘다면,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도시에 유입인구가 증가하면서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판자촌이 확산됐다.
또한 피난민까지 겹쳐 국공유지나 사유지를 막론하고 무허가 주택이 마구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이는 판잣집, 천막집, 방공호, 토굴 등으로 불리며, 정부의 묵인과 방조 아래 들어섰다. 1955년 영등포의 삼구시장에서 화재가 나면서 도시 미관을 저해하고 무허가라는 이유로, 1955년 5월 7일부터 9월까지 무허가 판잣집의 철거가 시작됐다. 1966년에 들어 최초로 실시한 전수조사에서 밝혀진 무허가 건물의 총수는 13만 6,650동이지만, 실수는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판자촌은 시 외곽의 산허리를 중심으로 하천변에는 끈질기게 늘어났다.
한국전쟁 이후 노점상들의 유통구조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미군부대의 물품들이 시장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황폐했던 유통구조에서 미군부대의 물품은 중요한 품목 중의 하나로 급부상했고 이것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노점상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부산의 국제시장과 청계천 주변 이태원, 용산전자상가 등의 전신도 바로 이것이다. 전쟁 중에 피난민으로 살아가는 데 노점만한 것이 없었다.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거나 노점상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이때부터 노점상들은 극히 한정된 자원 가운데 자신만의 독특한 물품을 개발해 경쟁력을 높여갔으며, 저렴한 가격으로 서민들의 구매욕을 자극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1955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65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국민 대다수가 절대적 빈곤 상태에 처해 있었다. 당시 도시빈민들은 극심한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궁핍한 상태로 전락했고, 전통사회의 신분과 계층구조가 무너지며 사회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는 이행국면에 있었다. 한편으로는 빈곤한 상황에서 탈출해 중간층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이것은 이후에 나타난 도시빈민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점이다. 한편 8월 15일에 해방이 되자, 미군정에서 해오던 3년간의 구호사업이 월남한 피난민과 국내거주 빈민에 대한 식량과 의료 및 주택 공급에 치중됐다. 미군정은 1945년 미군법령 18호에 의해 조선총독부 경무국 위생과를 보건후생부로 변경하고 사변재해의 구제와 기아의 방지, 최소한의 서민생계 유지, 보건위생 및 치료, 응급주택 공급 등에 중점을 둔 정책을 펼쳤으나 획기적인 사업을 추진하거나 장기적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1948년에 정부를 수립하고 남한 정부는 보건후생부와 노동부를 통합했고, 이를 사회부로 명명하기도 했다. 또한 제헌헌법 19조에서 ‘노령, 질병 기타노동 능력 상실로 생활유지의 능력이 없는 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공적 부조19와 관련된 정책은 주로 외국의 민간 원조단체가 주축이 되어 보육원, 양로원과 같은 수용보호시설을 세우는 등 미국식 사회사업이었을 뿐 새로운 공적 부조 제도는 생기지 않았다.20 한편 노동복지 분야에서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그리고 노동위원회법 제정이 추진됐고, 1953년에는 이것들이 공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법들은 유명무실했고, 실제로 거의 적용되지도 않았다.
(들어가는 글,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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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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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일터를 잃은 사람들과 함께 투쟁해온 빈민활동가. 지금은 사라진 청계천 주변과 동대문 운동장 근처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87년부터 보석 세공 공장에서 일하며 부조리한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고, 노동자와 활동가를 병행하며 살아왔다. 경제적 어려움과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20년 넘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더불어 사는 사회,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노점 단속과 철거문제에 관심이 많다. 1995년부터 빈곤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고 ‘전국노점상연합’에서 활동하며 목소리를 높였고, 1999년부터 2009년까지 ‘전국빈민연합’의 사무처장을 맡으며 노점 단속 현장뿐 아니라 주택과 상권의 철거 지역에서도 활동했다. 지금은 ‘빈민해방실천연대’ 집행위원장,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사무처장으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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