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어느 황홀하지 않은 저녁
우리 문화에서 타히티 섬은 매혹의 전형이자, 사실상 동의어다. 최고의 매력 요인이라면 아마도 리틀록 출신의 포부시 간호사겠지만, 남태평양이라는 무대도 ‘어느 황홀한 저녁’에 크게 기여를 했다(오페라계 최고의 돈 조반니로 꼽히던 몸으로서 황송하게시리 브로드웨이에 왕림해주신 에치오 핀차 역시 멋들어진 정경을 전혀 망치지 않았다). [1949년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남태평양〉에서 남자 주인공 에밀 드 베크 역을 에치오 핀차가, 여자 주인공 넬리 포부시 역을 메리 마틴이 맡았다.-옮긴이]
전설의 몇몇 측면은 수정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가령 요즘도 많은 관광객이 반드시 들르는 비너스 곶의 이름은 타히티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렇게 붙여진 게 아니고, 1769년에 금성의 태양면 이동을 측정하기 위해 그 장소에 기기를 설치했던 쿡 선장과 천문학을 기리는 뜻이다. 찰스 다윈도 1835년 11월에 비글호를 타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 이름과 장소 자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나라가 던져주는 첫인상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뭍에 상륙했다. 그 이름도 매력적인 타히티였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이 비너스 곶이라는 기억할 만한 장소에 운집하여 싱글벙글 유쾌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려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윈은 타히티 여인들에 열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일반적인 남성들의 의견과 입장을 달리했다. “나는 이곳 여자들의 외모에 몹시 실망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남자들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다윈은 무엇보다도 당시 유행하던 머리 모양에 반대했다.
특히나 한 가지 꼴사나운 유행이 거의 모든 이에게 퍼져 있다. 머리카락을 정수리 꼭대기부터 동그란 형태로 깎아서, 아니 차라리 민다고 해야 할 정도로 바싹 잘라서 가장자리만 고리 모양으로 남기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사람들에게 습관을 바꾸라고 죽 설득해왔지만, 이것은 유행이며, 파리에서처럼 타히티에서도 그 말 한마디면 대답은 충분하다.
다윈의 평가는 예외적인 편으로, 널리 공유되는 입장은 아니었다. 찰스 로턴 때문에 참으로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된 블라이 함장[1789년의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1935년작 〈바운티호의 반란〉에서 배우 찰스 로턴이 블라이 함장 역을 맡았는데, 영화에서는 함장의 횡포가 반란의 원인으로 그려졌다.?옮긴이]은 인간 심리를 이해하는 면에서는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분명했겠지만, 그래도 위대한 뱃사람이었으며 다른 평범한 영국 선장들의 성향과 견주어서 특별히 더 독재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의 바운티호에서 일어난 유명한 반란 사건이 함장의 선상 정책 때문이었다고들 하지만, 반란 주모자인 플레처 크리스천이 타히티와 그곳 여인들을 뒤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던 점도 못지않게 중요한 원인이었다.
타히티는 그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그림엽서처럼 완벽한 천국’이라는 표현은 보통 그 옆 무레아 섬의 몫이다. 내가 판단하기로는(나는 얼마 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를 처음 여행했다) 타당한 일이다. 타히티에서 북서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무레아는 사화산 섬으로, 치솟은 분화구 테두리가 이후의 침식으로 깊게 갈라져서 깔쭉깔쭉한 봉우리들과 늘어진 주름들을 만들어냈다. 타히티에서 무레아를 보면, 특히 아예 섬에 딸린 당연한 부속인 듯한 구름에 푹 감싸인 모습을 보면, 무레아야말로 신비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가장 걸맞은 섬이라는 생각이 든다. 찰스 다윈도 타히티에 머물던 어느 날 가까운 봉우리에 올라 무레아의 마력을 제 몫만큼 받아 안았다.
내가 오른 지점에서, 저 멀리 에이메오(무레아의 옛 이름) 섬이 잘 내다보였다……. 우뚝 솟은 거친 봉우리들에 흰 구름이 묵직하게 올라앉아서, 마치 에이메오 섬은 푸른 바다에 뜬 섬 같고 그 봉우리들은 푸른 하늘에 뜬 섬 같았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인상은 후에도 지속되었음이 분명하다. 오스카 해머스타인은 〈남태평양〉에 등장하는 세상 밖 낙원 발리 하이 섬을 그릴 때 무레아를 모델로 삼았다.
발리 하이는 속삭이네
바닷바람에 실린 그 목소리,
“이곳은 당신의 특별한 섬,
내게로 오세요, 내게로!”
뉘라서 이런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특히나 고작 몇 프랑과 40분의 페리 승선으로 만나볼 수 있을 때라면? 그래서 나와 내 아들 이선은 요전의 여행 중에 무레아를 방문했다. 우리는 실망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발리 하이의 꾐에 넘어간 손님이 우리만은 아니었으며 개중에는 무해하다고 할 수 없는 손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나는 그 낙원에서 벌어졌던 집단살해를,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을 대학살을, 단 한 세대 만에 마무리된 대참사를 이야기하려 한다.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모르는 까닭은 이것이 사람이 사람을 죽인 사건이 아니라 달팽이가 달팽이를 죽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종은 도덕적으로 무고하구나 하며 지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진 말길 바란다. 달팽이가 달팽이를 죽이긴 했지만 죽음의 대리인을 수입한 것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좋은 의도에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지만, 사실 그것은 쉽게 피할 수도 있었을 비극적 오해로 인한 행위였다.
대양의 섬들은 진화를 위한 위대한 자연의 실험실들이다. 섬은 우리에게 생물의 변화에 관한 아이디어를 무수히 주었고, 갈라파고스핀치부터 하와이의 파리까지 고전적 예제들을 무수히 제공했다. 지리적으로 고립된 데다가 접근이 까다롭고 포식자나 경쟁자가 곧잘 없는 환경이다 보니, 이 풍요로운 안식처에 어찌어찌 다다른 생물들에게는 기회가 폭발적으로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령 갈라파고스핀치들은 적응방산(適應放散)을 통해 다양한 생태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대륙에서라면 보통 여러 과의 새들이 채웠음직한 생태적 지위들을 메웠다. 어떤 종은 크고 작은 씨앗을 먹고, 어떤 종은 딱따구리처럼 행동하며, 어떤 종은 선인장 가시를 써서 틈새에 숨은 곤충을 뽑아낸다. 다윈은 그 유명한 체류 기간 동안 이 새들의 겉모습에 감쪽같이 속았기 때문에 이들을 여러 집단으로 분류했다. 나중에 런던에서 어느 조류 전문가가 다윈의 수집품들을 점검하여 폭넓은 다양성의 기저에 갈라파고스핀치 특유의 해부학적 특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했을 때에야 비로소 다윈은 진짜 사정과 의미를 알아차렸다.)
육상 달팽이는 가장 좋은 사례이자 가장 깊이 연구된 사례에 속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하다. 극소수의 달팽이들이 (자연적 뗏목이나 새 발에 묻은 진흙 같은 기묘한 이동 수단을 통해서, 혹 거리가 너무 멀지 않을 때는 허리케인을 틈타서) 기나긴 바다 여행에 운을 걸었다. 운이 좋아 이주에 성공한 녀석들 앞에는 무수한 조각으로 갈가리 나뉜 (군도라는) 광활한 세상이 펼쳐졌는데, 각각의 조각이 머물러 살 만했고 결국에는 진화적 방산을 낳을 만했다. 게다가 달팽이는 거주 영역이 좁기로는 따를 자가 없는 데다가 자웅동체이기 때문에, 최초 인구가 아무리 적어도(극단적으로 줄이라면 한 마리라도) 쉽게 독립된 개체군을 형성할 수 있고 결국에는 새로운 종이 될 수 있다. 섬에 떨어진 쥐 한 마리는 (임신한 암컷이 아닌 한) 한때의 기억으로 덧없이 사라지고 말겠지만, 섬에 떨어진 달팽이 한 마리는 거대하고 약동적인 개체군의 조상이 될 수 있다.
태평양 화산섬들은 어디보다 유망한 장소다. 최대한의 고립에 (해안부터 화산 정상까지 실로 광범위한) 생태적 다양성이 결합된 곳이기 때문이다. 섬은 보통 상당히 대칭적인 모양의 화산 하나로 이루어진다. 화산 옆면은 쩍쩍 갈라져, 분화구 가장자리에서 바다까지 내달리는 계곡들이 줄줄이 파여 있다. 달팽이들은 대부분 습한 곳을 선호하기 때문에 계곡 바닥에는 살지만 그 사이 등성이에는 살지 않을 때가 많다. 이런 일반적인 지리 분포 역시 진화의 가마솥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요인이다. 계곡 하나하나가 별개의 주머니인 셈이라 섬 안에서도 더욱더 고립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양의 섬들 중 최고의 다양성을 자랑하는 곳에서는 번식력이 몹시 좋은 달팽이 종류가 계곡마다 별개의 종으로 진화하여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태평양 섬 달팽이들의 폭넓은 방산 현상은 진화의 영광이고, 다윈을 좇아 이 직업에 들어선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즐거움과 지식의 원천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약간의 질투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달팽이 연구에 경력을 바쳐왔는데, 내가 탐구한 대서양 산호섬의 달팽이들, 즉 버뮤다제도의 푀칠로조니테스Poecilozonites 속과 바하마 제도의 체리온Cerion 속은 다양성이 한결 덜하기 때문이다.) 다윈이 연구한 갈라파고스제도는 전형적인 사례로, 불리물리데Bulimulidae 과에 속하는 달팽이 고유종이 60여 종 남짓 서식한다. 더 유명한 사례로는 고립 정도가 더 심한 중앙 태평양 섬들에서 발견된 두 가지 대규모 방산 현상이 있다. 하와이 섬들에 퍼진 아카티넬리데Achatinellidae 과의 수백 종, 그리고 타히티와 무레아와 기타 이웃 섬들에 퍼진 파르툴라 속의 백여 종이다.
태평양 화산섬 달팽이들은 진화 이론의 역사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한다. 중요하고 오래된 한 가지 논쟁의 초점이기 때문이다. 생물 변화의 원인이라는 굵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보다 걸맞은 동물은 없는 듯하다. 문제를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다. 진화에서 환경의 역할은 무엇인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물들은 달라진 조건에 맞추기 위해 제 형태를 바꾸는가? 만일 그렇다면, 환경은 개체가 생애 중에 획득한 형질을 물려주는 라마르크식 과정을 통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아니면 무작위적인 변이의 스펙트럼 중 자연선택으로 적자를 골라내는 다윈식 적응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가?
상이한 두 적응 이론(라마르크식 대 다윈식)에 대항하여, 어떤 식으로든 형태가 환경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일은 없다고 단언한 진화학자들도 있었다. 물론 어처구니없게 부적응적인 개체들은 죽겠지만, 변이가 만약 드물게 등장하는 데다가 한 방향으로만 벌어지는 사건이고 대부분의 대안들이 주변 환경에 충분히 어울리는 것이라면, 적응을 하더라도 개체군들 사이에 차이가 빚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선택에 의한) 외적 형태 변화보다는(드문 돌연변이에 따른) ‘내적 요인들’이 진화적 변화 형성에 더 압도적으로 기여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문제를 시험해볼 생물로 태평양 화산섬 달팽이보다 나은 대상이 있겠는가? 계곡마다 서로 다른 개체군이 산다면 얼마나 멋진 자연적 실험이 되겠는지 생각해보라. 계곡들은 대개 환경이 거의 같을 텐데, 그럼에도 근연 관계가 먼 달팽이들의 서식지가 되었다니. 만약에 적응 현상이 압도적이고 기후가 모종의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진화를 빚어낸다면, 떨어져 있지만 조건이 비슷한 계곡들에 사는 여러 달팽이는 공통의 조건에 적응하여 진화했으므로 닮은 점이 몹시 많을 것이다. 반대로 ‘내적 요인들’이 압도적이라면, 개체군들에게서 형태와 환경의 상관관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처음으로 중요한 주장을 내놓은 사람은 존 T. 굴릭(1832~1923)이었다. 하와이에 파견된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이었던 굴릭은 1872년에서 1905년 사이에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하여 포문을 열었다. 굴릭은 성인이 된 후에는 대체로 중국과 일본에서 살며 선교 활동을 했지만, 부모의 교구에 살던 젊은 시절에 하와이의 아카티넬리데 달팽이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수집해두었다. 굴릭은
‘내적 요인들’을 강하게 지지했으며 자연선택에 의한 통제는 물론 어떤 형태의 환경적 영향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그는 달팽이 껍데기의 형태와 계곡의 지역 환경 사이에서 아무런 상관관계도 발견하지 못했다. 식생과 습도와 온도가 명백히 같은 장소들인데, 달팽이들의 껍데기 모양은 그보다 더 다를 수 없다 싶었다.
굴릭은 19세기 말의 지배적 사조였던 결정론에 강하게 반대하면서(주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달팽이 껍데기에서 드러난 예측 불가능성을 일반화할 때 전반적으로 역사의 우연성을 옹호할 수밖에 없다고 의기양양하게 주장했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옹호 대상이었다.
(동일한 환경에서 서로 다른 형태들이 생겨난다는) 내 주장이 사실에 부합한다면, 오늘날 흔히 이야기되는 가정, 즉 생물의 변화가 환경 변화에 의해 속속들이 통제되며 그에 따라 인간의 진보도 외부적 운명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가정은 분명 사실에 위배된다. (1905년에 작성된 굴릭의 유명한 논문 「종의 진화와 기질의 진화」에서.)
내가 1969년에 쓴 박사 논문에서 위 문장을 인용했을 때는 (확고한 적응주의자의 입장에서) 굴릭을 비아냥거리는 뜻이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굴릭의 말이 틀렸다는 생각에 예전만큼 확신이 없다.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동기가 과학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은 여전하지만, 사람들은 이따금 잘못되거나 비논리적인 근거에서 정확한 답을 끌어내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역사의 우연성과(생명 일반의 역사에서나 호모 사피엔스의 문화에서나) 인간의 자유의지는(신학적 의미라기보다 실제적 의미에서) 과연 얽혀 있는 개념들이고, 동일한 환경에서 눈에 띄게 다른 해답들을 만들어낸 ‘실험’은 이런 개념들을 지지하는 좋은 증거일 만하다.
어쨌든 굴릭이 그런 결론을 내리자 다윈주의자들의 항의가 폭풍처럼 몰아닥쳤다. 엄격한 적응주의자 중에서도 가장 헌신적이었던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응수하기를, 굴릭이 ‘동일한’ 환경이라고 여긴 것이 인간의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 달팽이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했다(타당성 없는 말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동일한 조건으로 보인다고 해서 이 육상 연체동물처럼 작고 섬세한 생물들에게도 동일하게 보이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실수다. 그들의 필요에 관해서…… 우리는 실상 너무나 무지하다. 다양한 식물 종의 정확한 비중, 다채로운 곤충들과 새들 각각의 수, 결정적인 시기에 햇빛이나 바람에 얼마나 노출되는가 하는 미묘한 특징, 그 밖의 미세한 차이들이 우리에게는 결코 손에 잡을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이 수수한 생물들에게는 대단한 의미가 있을지 모르며 나아가 적응이 필요할 만큼 충분히 큰 차이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크기나 형태나 색깔에서 자연선택에 의한 미세한 적응이 생겨날지도 모르는 것이다.
1906년, 헨리 에드워드 크램프턴(1875~1956)은 굴릭의 모노그래프를 읽은 뒤 이 실랑이에 가담하기로 결심했고 이후 50년의 경력을 타히티와 무레아와 주변 섬들의 파르툴라 달팽이에 관한 방대한 연구에 바쳤다. 크램프턴은 그 전까지 실험발생학과 자연선택 분야에서 탁월한 작업을 해왔다. 그런 전력 때문에 적응주의 쪽으로 살짝 기우는 입장이었으나, 보장할 만한 증거가 있다면 월리스의 환경형성설보다 굴릭의 ‘내적 요인들’을 기꺼이 지지하겠다는 열린 태도를 취했다. 크램프턴은 태평양으로 열두 번 탐사를 갔고, 방대한 모노그래프를 세 편 발표했다. 달팽이 진화에 관한 한 역사상 최고의 업적일 이 논문들을 뭉뚱그려 ‘파르툴라 속의 변이, 분포, 진화에 관한 연구’라고 부른다(타히티 편은 1917년에, 다른 섬들 편은 1925년에, 무레아 편은 1932년에 나왔다).
요컨대 반세기의 노고를 한 문장으로 줄여 말하자면, 크램프턴은 굴릭을 확고부동하게 지지하는 입장이 되었다. 크램프턴은 주변 환경에서 파르툴라의 형태와 색을 예측할 수 있다는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 동일한 기후 조건에서 때에 따라 상이한 해법들이 등장하는 듯했다.
크램프턴은 인접한 계곡에 사는 달팽이들 간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세 가지 주요 원인 탓이라고 해석했고(고립, 돌연변이(그의 용어로는 ‘선천적 요인들’),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 개중 다윈이 선호한 메커니즘에는 미미한 역할만 맡겼다. 크램프턴이 보기에 첫째 요인인 고립은 실제 원인이라기보다 경향성을 유도하는 전제 조건이었다. 지리적 분리가 직접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고, 독립적인 개체군들을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속성이 퍼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셋째 요인인 자연선택은 대체로 부정적인 힘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뭔가 다른 메커니즘에 의해 새로운 속성이 생겨나며, 자연선택은 그 속성이 쓸모가 없을 때 그것을 제거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적 변화의 원천은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 미국 생물학자들 가운데 멘델 연구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편에 속했던 크램프턴은 둘째 요인인 돌연변이, 즉 선천적 요인들에 의해 “내부적으로 생성된” 변화야말로 창조성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어떤 환경에서든 제대로 작동하는 해부학적 형태는 수백 가지쯤 가능할 것이다. 특정 계곡의 특정 개체군이 띤 형태와 색은 고립된 집단 속에서 어쩌다 비적응적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퍼짐으로써 빚어진 우연한 결과이기 쉬울 것이다.
계곡들 간의 차이가 정말 그런 식으로 생겼다면, 그것은 대체로 비적응적인 현상이다. 물론 각 지역의 종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되지 않아야겠지만(이런 부정적인 의미에서 적자(適者)여야 하겠지만), 각각의 독특한 속성은 무수히 많은 대안 중 하나일 뿐이고, 고립된 집단에서는 자연선택이 아니라 우연한 돌연변이에 의해서 어떤 독특한 해답도 충분히 생길 수 있다. 크램프턴은 타히티의 파르툴라를 이야기할 때 선택보다 돌연변이에 무게를 두었다.
환경의 역할은 서식 범위에 한계를 짓거나 특정 개체들이 제거되게 하는 것이고, 개체들의 특질은 다른 선천적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무레아의 파르툴라에 관한 크램프턴의 위대한 모노그래프(1932)가 나온 지도 벌써 6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의 작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확실히 내게는 선입견이 있다. (나 같은) 달팽이 연구자들은 크램프턴을 수호성인으로 받들어도 무방하니까. 그래도 나는 크램프턴의 파르툴라 연구를 진화생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볼 만한 이유가 세 가지쯤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인접한 계곡의 달팽이들이 보이는 형태와 색의 미세한 차이가 비적응적 현상이라는 그의 논점은 맞는 말일 것이다. 크램프턴의 바로 다음 세대에서 진화생물학이 엄격한 적응주의를 굳게 믿는 쪽으로 기울었기에, 그의 업적은 일시적이나마 폄하되었다. 그러나 한층 다원적인 오늘날의 풍토에서 위대한 세 편의 모노그래프는 새로이 존경과 관심을 받고 있다.
둘째, 크램프턴은 순수한 헌신과 노력으로 엄청난 노동을 해낸 것만으로도 최고의 경의를, 경외에 가까운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 나는 무레아를 딱 하루 렌터카로 돌아보았을 뿐이다. 그늘을 벗어나거나 길을 이탈하는 모험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열사병으로 쓰러지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크램프턴은 열두 차례 탐사를 떠나서 매번 몇 달씩 묵었고, 당시는 비행기나 렌터카가 아니라 배와 말의 시대였다(뚜벅이가 되어야만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과학적 글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관습에 따라 한껏 절제미를 발휘한 문장에서, 크램프턴은 작업 환경에 관해 단 한마디 스치듯 적어놓았다.
폴리네시아 같은 지역에서 현장 작업을 할 때는 열대지방에 흔한 문제들을 겪게 마련이다……. 증기선은 주요 항구들만 오가므로 그곳에서 이웃 섬으로 더 들어가려면 커터선, 포경선, 카누 등을 써야 한다……. 말을 확보할 수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계곡 탐사는, 거의 예외라곤 없이 오직 도보로만 가능하다. 가로질러야 하는 곳의 경사가 너무 급하고 건너야 하는 개울은 너무 깊으며 파르툴라가 서식하는 빽빽한 숲이나 덤불 속에 길이라고는 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크램프턴은 그럼에도 연구를 계속하게 만드는 보상적인 즐거움에 관해서도 썼다.
그런 작업을 하자면 어쩔 수 없이 활동적인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경험은 풍성하고 다채로우며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이 모노그래프는 아름다운 섬들이나 그곳의 재미난 거주자들에 관해 묘사하기에 적합한 지면이 아니다. 그저 밤낮으로 힘들게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노력해야 했으나, 사이사이 대단히 즐거운 시간이 있었다고만 말해두겠다. 특히 타히티 섬은 달리 비견할 곳이 없을 만큼 아름다우며, 그곳 부족장들과 가족들은 아낌없이 우리를 환대했다. 당시에 우리는 특전을 누린 셈이었다. 이제라도 사의를 표할 수 있어서 기쁘다.
수집은 노고의 시작일 뿐이었다. 크램프턴은 이후 오랜 시간을 들여 달팽이들을 측정하여 통계를 계산했고(타히티 모노그래프를 쓸 때는 8만 개쯤, 무레아 작업에서는 무려 11만 6천 개쯤), 더욱이 (당시로 보더라도) 믿기 힘든 일인데, 그 모두를 혼자서 손수 했다! (컴퓨터도 소형 계산기도 없었다. 크램프턴이 ‘계산 기계’라고 말한 것은 연속 빼기로 나눗셈을 수행하고 단순 연산 하나에 몇 분씩 철걱대던 구식 기계 장치를 가리킨다.) 그는 또 한 번 줄여서 말한다.
직접 측정을 하고 세세하게 분류하는 일은 모두 필자 본인이 담당했다. 그러므로 인적 계수는 전 연구를 통틀어 일정하다고 할 수 있다……. 표준편차는 소수점 여덟 자리까지 계산했다……. 이런 작업에 직접 종사해본 사람만이 이런 정량분석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지를 짐작할 것이다……. 2주에서 8주씩 걸린 수학적 고역으로 얻는 것이라고는 이 숫자들, 그리고 더불어 적힌 문장 한 줄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최종 결과를 내려면 이 기법을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유용성의 기준에서 궁극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훌륭한 과학은 모두 누적적이다. 누구도 처음 한 번에 모든 것을 제대로 해낼 수는 없다. 크램프턴의 모노그래프들이 과거의 노력과 발상을 담은 기념비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래도 존경받아 마땅하기야 했겠지만, 그것은 차라리 인간 고생물학 분야의 한 표본이라고 불러야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모노그래프들은 후속적인 개정과 연장을 가능케 한 귀중한 보고였다. 나는 이 점을 더없이 개인적인 방식으로 실감했다. 크램프턴이 ‘수학적 고역’의 세월을 통해 생산한 표들을 내가 적어도 세 편의 기술 논문에서 가져다 썼기 때문이다.
이 결정적인 면을 좀 더 확실하게 설명해보자. 크램프턴은 타히티와 무레아와 근처 섬들에서 파르툴라가 ‘당시 시점에’ 보였던 지리 분포와 변이를 기록하는 데 50년을 보냈다. 이 작업은 순간의 포착으로서 대단히 중요하고 영구한 가치가 있다. 크램프턴의 반세기는 파르툴라의 미래 역사에 비하면 스쳐가는 한순간에 불과할 것이었다. 크램프턴은 ‘미래 작업의 기준선을 긋기 위해서’ 평생을 헌신한 것이다. 파르툴라는 향후에도 계속 빠르게 진화할 테니, 크램프턴의 기준선은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중간 정차역이 될 것이었다. 과학자라면 모름지기 이런 관점에서 그의 헌신을 바라보리라. 현재의 인상보다 미래의 변화가 훨씬 가치 있기 때문이다.
크램프턴의 계획은 결실을 맺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래 보였다. 다음 세대에 이르러, 세계 최고의 달팽이 생물학자 세 명이 전적으로 크램프턴의 작업에 기초하여 파르툴라 연구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노팅엄 대학의 브라이언 클라크, 버지니아 대학의 짐 머리,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대학의 마이크 존슨이 그들이다. 그들은 다양한 조합으로 공동 저술을 하며 196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숱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셋 모두가 가장 좋아한 섬인 무레아를 주된 대상으로 삼아 크램프턴의 결과를 다듬었고, 크램프턴에게는 없었던 수학적 과정이나(요즘은 컴퓨터로 계산한다) 유전학 기법을 적용하여 그것을 대단히 세련되게 만들었다. 1980년에 머리와 클라크는 「무레아 섬의 파르툴라 속 : 진행형의 종 분화」라는 중요한 논문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맺었다.
무레아 분류군의 진화 역사는 아직 정확하게 재구성되지 못했지만, 이미 이들은 최초의 종들 사이에서 상호작용이 어떤 양상으로 벌어졌는지를 유례없이 자세하게 보여주었으며 흥미롭고도 역설적인 사실들도 몇 가지 보여주었다. 그들은 종 분화의 박물관이자 실험실이다.
생쥐와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잘 짜더라도 어쩌고 했던 번스의 한탄[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스의 시 「생쥐에게」에는 ‘하지만 생쥐야, 앞날을 생각해봐야 소용없는 건 너만이 아니란다. 생쥐와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 일이 멋대로 어그러져, 고대했던 기쁨은 고사하고 슬픔과 고통만 맛보는 일이 허다하잖니!’라는 절이 나온다.?옮긴이]에 달팽이도 더해주자. 아무리 대단한 기대도 인간의 허영의 불꽃에 휩싸이면 순식간에 죽고 만다. 1980년의 저 대담한 발언 이래로 고작 10여 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무레아는 이제 파르툴라의 활발한 종 분화를 연구하기에 알맞은 실험실이 못 된다. 무레아는 능묘가 되었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시도한 것이 줄줄이 더 큰 문제를 낳아 사태가 침소봉대된 경우에 대한 비유들을 떠올려보자. 무레아에서 파르툴라가 전멸한 사연을 이해하려면 그런 그림을 상상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라든가, 어느 동요에서 파리를 삼킨 할머니를 생각해보자. (할머니는 그 파리를 잡으려고 거미를 삼켰고, 거미를 잡으려고 새를 삼켰고, 새를 잡으려고 고양이를 삼켰고…… 이렇게 동물계의 큰 덩치들까지 올라간다. 삼킨 내역을 죄다 늘어놓아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행마다 자꾸 길어지지만, 마지막 행은 놀라우리만치 짧다. ‘옛날 옛날에 말을 삼킨 할머니가 있었는데요, 할머니는 결국 죽고 말았어요.’)
파르툴라 속 달팽이들은 죽은 식물에 자라는 균류를 먹고 산다. 농업에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 파르툴라가 토착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사소하나마 딱 하나 있긴 한데, 그마저도 전적으로 긍정적이다. 여인들이 그 껍데기를 꿴 레이를 만들어서 관광객에게 파는 것이다. 한편, 고립된 섬에 새로 도입된 동물들은 토착 생물들과 농업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을 때가 많다. 예컨대 오스트레일리아의 토끼들이 그랬고, 가장 위험한 생물을 하나 들라면 뉴질랜드에 가서 수많은 모아 종 새들을 싹 쓸어버린 인간이 그랬다. 무레아에서도 새로 도입된 달팽이들이 구슬픈 파멸의 연쇄를 개시했다.
무해한 파르툴라와는 대조적으로, 아카티나Achatina 속에 속하는 아프리카 나무 달팽이는 거의 언제나 참담한 재앙이나 다름없다. 우선, 녀석들은 거대하다(달팽이 기준에서). 둘째, 녀석들은 살아 있는 식물을 해치우는 대식가로, 농작물 종들도 먹어치운다. 아직도 사람들이 일부러 녀석들을 도입하곤 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사람들은 아카티나를 식용으로 키운다. 듣자 하니 녀석들은 수분 함량이 높아서 개체당 고기 무게가 많이 나간단다.) 아카티나가 인도태평양 지역에 처음 수입된 것은 1803년이었다. 레위니옹의 주지사가 장본인으로, 그는 자신의 숙녀 친구가 달팽이 수프를 계속 즐길 수 있게 마다가스카르에서 녀석들을 들여왔다. 아카티나는 주지사의 정원을 탈출하여 온 섬을 쑥대밭으로 만든 끝에 1847년에 인도까지 도달했다. 1930년대에는 남태평양 섬들로 퍼지기 시작했는데, 대개 사람들이 식용으로 일부러 도입한 경우였다.
아카티나 풀리카Achatina fulica는 1967년에 타히티에 도착하여 곧 주변 섬들로 퍼졌다. 1970년대 중반에는 특히 무레아에서 녀석들이 심하게 기승을 부리며 사람의 거주지까지 침범했다. 한 농부가 자기 집 벽에서 손수레 두 대 분량의 달팽이를 떼어냈다는 기록도 있다. 뭔가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하지만 que faire(어떻게 하나)? 프랑스령 섬사람들은 물었다.
사람들이 시도한 해결책은 파리를 잡으려고 말을 삼킨 할머니 이야기처럼 원래 문제보다 더 큰 난리를 일으키고 말았다. 생물학적 통제는 원칙적으로는 좋은 생각이다. 독성 화학약품보다야 자연의 포식자가 낫다. 하지만 포식자는, 특히 외래의 장소 및 생태계에서 데려온 것일 경우에는 도입을 시도하게 만든 애초의 생물들보다 더 문제가 될 수 있다. 새 포식자가 문제의 동물만을 잡아먹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녀석들이 무해하거나 유용한 다른 생물들을 더 좋아하면 어쩌겠는가? 특히 녀석들이 (자연적 포식자가 없던 상태라 방어 체계를 진화시키지 못해서 취약할 때가 많은) 고유종들을 공격하면 어쩌겠는가?
따라서 생물학적 통제를 시도할 때는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또 한 번 노랫말을 빌려 표현하되 파리 삼킨 할머니보다는 최근의 작품을 골라보자면, ‘사람들은 언제나 깨닫게 될까?’[미국 포크송 가수 피트 시거의 1960년대 노래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중 한 소절.-옮긴이] 내가 개인적으로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동물들의 판테온 맨 꼭대기에는 오이글란디나Euglandina 달팽이가 있다. 플로리다산으로 ‘킬러’ 달팽이나 ‘늑대’ 달팽이라고도 불리는 녀석이다. 오이글란디나는 뛰어난 효율과 먹성으로 다른 달팽이들을 먹는다. 녀석은 다른 달팽이의 점액 흔적을 감지하여 추적함으로써, 사냥감이 간 길을 뒤따라가서 잽싸게 잡아먹는다.
그렇다 보니 오이글란디나는 다른 달팽이들에 대한 생물학적 통제 도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그렇지만 몇몇 모호한 성공 사례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도리어 종종 의도치 않은 참혹한 부작용을 낳았다. 오이글란디나가 사람들이 정한 적을 내버려둔 채 다른 무해한 희생자들에게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내 편견을 용서하기 바란다. 하지만 나는 오이글란디나의 소행을 개인적으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달리 도리가 없다(생물학자는 자신의 연구 대상에 대해 상당히 감정적이 되는 법이다). 나는 박사 논문을 포함하여 경력 초반의 적잖은 세월 동안 푀칠로조니테스라는 놀라운 버뮤다 달팽이를 연구했다. (연체동물계에서 다윈의 갈라파고스핀치 격인 이 달팽이는 큰달팽이 중에서는 유일하게 버뮤다 섬까지 다다른 녀석들이다. 이 속은 20여 종으로 방산하여 다양한 크기와 형태를 자랑했다. 특히 화석 기록이 풍부하지만, 내가 연구를 시작한 1963년만 해도 버뮤다에 적어도 세 종이 번성하고 있었다.) 오이글란디나는 1958년에 버뮤다제도에 도입되었다. 원래 식용으로 수입되었으나 정원을 벗어나 섬 전체로 퍼져 해충이 되어버린 오탈라Otala 속 달팽이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다(무레아의 아카티나와 파르툴라와 같은 이야기다). 내 생각에 오이글란디나는 오탈라의 개체 수를 손톱만큼도 줄이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녀석들은 고유종인 푀칠로조니테스를 끝장냈다. 예전에는 섬 전역에서 푀칠로조니테스를 수천 마리씩 찾아볼 수 있었으나, 내가 녀석들의 유전학을 조사하고 싶어 하는 어느 학생을 위해 개체군들의 서식지를 찾아주려고 1973년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살아 있는 녀석을 한 마리도 찾지 못했다. (작년에 개중 가장 작고 꼭꼭 숨어 사는 한 종을 찾아내긴 했지만 내 연구의 주 대상이던 커다란 푀칠로조니테스 베르무덴시스Poecilozonites bermudensis는 멸종한 듯하다.)
이러니 나는 짐 머리와 브라이언 클라크와 마이크 존슨의 고통을 공감한다. 1960년대 중반부터 무레아 섬 파르툴라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온 그들은, 자기들의 마지막 논문 몇 편이 녀석들의 최후 자취가 되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오이글란디나는 1977년 3월 16일에 무레아에 도입되었다. 이는 프랑스 농촌경제국과 농업경영연구과의 공식적 조언과 승인을 받은 일이었다. 다른 곳들에서 도입이 실패와 폐허만을 낳았다는 정보가 이미 널리 퍼진 실정이었는데도 말이다. 오이글란디나는 아카티나를 무시한 채 파르툴라를 상대로 대공습을 개시했다. 히틀러의 군대보다 더 철저하고 신속하며 효율적인 공습이었다. 내 동료들이 이 재난을 지적한 글을 처음 쓴 1984년에(참고 문헌을 보라) 오이글란디나는 무레아 섬의 일곱 파르툴라 종 가운데 하나를 이미 소탕했고, 매년 1.2킬로미터의 속도로 섬에 퍼지고 있었다. 무레아 섬의 최대 폭이 12킬로미터쯤이니 그런 속도라면 공간이 바닥나는 건 금방이었다. 내 동료들은 1986년이면 파르툴라가 완전히 사라지고 없으리라는 음울한 예측을 내놓았다.
제대로 맞히는 게 오히려 싫은 일도 있는 법이다. 1988년에 짐, 브라이언, 마이크는 간결하고 최종적인 제목을 단 글 「무레아 섬에서 파르툴라의 멸종」을 발표했다. 파르툴라는 사라졌다. 내 동료들은 그 전에 일곱 종 가운데 여섯 종을 가까스로 수집해두었고, 현재 여러 나라의 동물원이나 생물학 연구 기지에서 인공번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쩌면 어느 날 파르툴라가 무레아에 재도입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 앞서 오이글란디나를 제거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뿌리 깊게 이식된 것은 물리적인 것이든 감정적인 것이든 근절하기 어렵다. 메리 마틴이 자기 머릿속에서 한 남자를 씻어내려 노력했으나 가망 없는 일임을 깨달았듯이. 판도라의 상자 바닥에는 희망이 남아 있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나쁜 녀석들을 다시 가둘 수 있단 말인가?
무레아는 사람들 꿈속의 발리 하이지만, 파르툴라의 삶은 전혀 황홀하지 않은 저녁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밤이 내렸다.
무레아만(그리고 버뮤다까지만) 희생되었다 해도 충분히 슬픈 이야기다. 그런데 오이글란디나는 그 옆의 더 넓은 타히티 섬에도 빠르게 번지고 있으며, 파르툴라는 이제 겨우 두 계곡에서만 살고 있다. 오아후 섬에서는 파르툴라보다 더 다양한 아카티넬리데들이 다 사라졌다(혹은 거의 그럴 지경이다). 이유는 다른 섬들과 같았다고 봐도 좋다. 호놀룰루 시의 확산도 도움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갈라파고스제도에서는 불리물리데 종이 절반 넘게 멸종했다.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멸종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진화생물학자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감정이 차올라서 합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익사시킨다. 남들이 다 말한 것, 대단히 유창하게 표현되었으나 효과는 미미했던 말들 외에 달리 무엇을 말하겠는가? 좋은 논증들조차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8월의 캔자스에 넘치는 옥수수처럼 진부하고, 블루베리 파이처럼 평범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나는 통상적이지 않은 탄원을 하나 해볼까 한다. 보통의 논증을 역으로 뒤집은 주장을. 역발상은 때로 사고의 물꼬를 새롭게 트는 건전한 효과가 있다. 내가 영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알았던 한 친구는 아주 탁월한 토론자였는데, ‘군주제는 폐지되어야 하는가’라는 케케묵고 진부한 주제에 대해 찬성 쪽 변호를 맡게 되었다. 여왕의 판공비, 혹은 민주주의 시대에 왕권은 부정적인 상징이라는 둥 흔한 논점을 꺼내놓는 대신 그 친구는 군주제가 군주와 그 가족에게 부당하므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정상적인 사생활을 영위할 가능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데이트를 하건 맥주를 마시건, 오, 이런 일은 없었으면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트림을 하건, 다음 날 가십 잡지에 머리기사로 실리고야 만다.
파르툴라의 멸종은 파르툴라에게 부당한 일이다. 이것이 통상적인 논증이고, 또한 제일로 중요한 논점이라는 데 나도 이의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인간 중심적인 생태학도 필요한 법이다. 인간에게는 달팽이보다 인간이 더 와 닿게 마련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그리고 모든 도덕적 문제의 기준은 인간이어야 적법하다는 윤리학적 이유에서. 도덕적 문제란 인간의 관심사지 자연의 관심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주장하련다. 우리는 헨리 에드워드 크램프턴을 위해서라도 무레아 섬의 파르툴라 문제를 애달파해야 한다. 오이글란디나와 인간의 어리석음이 크램프턴 평생의 헌신을 망가뜨렸으니까. 크램프턴은 하늘에서 소풍을 즐기는 운송 수단 따위는 없던 시절에 태평양 섬들을 열두 번이나 방문했다. 위험한 낭떠러지를 따라 강렬한 열대의 열기 속에서 두 다리로 계곡을 오르내렸다. 달팽이들의 크기를 잰 뒤 컴퓨터 없이 수치를 줄줄이 합산하는 일에 몇 달씩 매달렸고, 그것은 실로 최악의 과학적 노역이었다. 그 결과 그는 파르툴라에 관한 위대한 모노그래프 세 편을 발표했다.
그 일은 그 자체로 위대하고 영원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크램프턴은 개인적 영광을 위해서 또는 자신의 연구의 진화 과정 중 한 순간을 박제해두겠다는 생각에서 논문을 쓴 게 아니었다. 그가 평생을 애쓴 까닭은 미래의 진화 연구에 기준선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파르툴라는 자연의 진화 실험실이었고, 크램프턴은 자신이 극도의 세심함과 정밀함으로 좋은 출발점을 닦아둔다면 향후에 남들이 파르툴라의 미래를 추적함으로써 연구를 더 진전시키고 진화에 관해 더 많이 알아내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모든 수고를 기울였다. 한 인간의 지적 헌신보다 더 고상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든 현장 생물학자가 맞닥뜨리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그리스신화에서 영웅 오디세우스를 공격했던 바다 괴물들.-옮긴이], 즉 이따금 닥쳐오는 위험과 꾸준히 이어지는 지루함을 뚫고 평생 끈질기게 버틴 것보다 고상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크램프턴의 업적은 미완성으로 남았으며 심지어 조롱받기에 이르렀다. 고매했으나 사라지고 만 그의 목표들에 대해 묵념을.
나는 인간이 자연과의 감정적 연대를 계발하지 않고는 생물 종들과 환경을 구하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으리란 것을 잘 안다. 사랑하지 않는 것들을(그저 추상적 의미에서 높이 평가할 뿐인 것들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다른 작업들도 계속해나가자. 영화, 책, 텔레비전 프로그램, 동물원, 공동체마다 작은 생태 보전 지구를 가꾸는 노력, 초등학교 수업, 박물관 전시, 심지어 (여러분이 나를 그곳에서 만날 일은 절대 없겠지만) 새벽 6시에 만나는 야생 조류 관찰 모임도.
그런 노력을 이어가고 확장하자. 우리가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뼛속 깊이 직접 체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자연을 위한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남태평양〉에서 에밀 드 베크로 분했던 에치오 핀차를 다시금 떠올리며, 자연을 여성으로 묘사한 전통적인 표현을 받아들여보자(그런 관습이 기분 나쁘다면, 자연을 남성으로 상상하여 ‘멋진 사내와 사랑에 빠졌다네’라고 노래해도 좋다). 이 가사는 비록 신선미가 부족할지언정(그리고 핀차는 메리 마틴을 격찬하는 것일 뿐 나처럼 그 대상을 자연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테지만), 감성적 분위기만큼은 흠 잡을 데가 없으며 닳아빠진 마음의 소유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의 눈에서든 눈물을 자아낼 만하다. 최고 베이스 가수의 목소리가, 으뜸음을 벗어나 높이 솟아오르는 대목을 떠올려보자.
그녀를 찾아냈다면, 절대로 놓아주지 마요.
그녀를 찾아냈다면, 절대로 다시는 놓아주지 마요!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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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스티븐 제이 굴드 Stephen Jay Gould, 1941~2002
고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 1941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1963년에 안티오크 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했고, 1967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고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부터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2002년 작고할 때까지 하버드 대학 지질학 및 동물학 교수로 재직했다. 말년에는 뉴욕 대학에 교환 교수로 있으면서 생물학과 진화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굴드가 역설한 진화 이론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료 나일스 엘드리지와 함께 발표한 ‘단속평형설’이다. 이는 진화가 점진적이지만은 않으며 갑작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이론으로, 전통적 다윈주의 관점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또한 굴드는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는 점을 평생 역설했다. 그리고 생명이 복잡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비판했고, 생명의 역사에서 ‘우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신의 수많은 저작들을 통해 일생을 바쳐 강조했다.
굴드의 저술 활동은 왕성하고 전방위적이었다. 전체 22권의 저서와 101편의 서평과 497편의 과학 논문과 300여 편의 자연학 에세이를 남긴데다 그 글들의 소재는 언어, 문학, 음악, 건축, 심지어 스포츠(특히 야구)를 넘나든다. 한편 굴드는 ‘과학의 대중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과학을 사회로부터 분리된 절대적이고 균일한 것이 아닌,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에 따른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에는 급진적인 성향의 과학자들이 모여 결성한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에 참여했으며, 진보적인 생물학자들의 비영리 단체인 ‘책임 있는 유전학을 위한 회의Council for Responsible Genetics’에서는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고생물학회와 진화학회, 미국과학진흥회 회장을 역임하고, 40개 이상의 여러 학술상과 메달을 비롯해 44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굴드의 주요 저작으로는 『개체발생과 계통발생Ontogeny and Phylogeny』, 『다윈 이후Ever Since Darwin』, 『판다의 엄지The Panda’s Thumb』(전미도서상 수상), 『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Wonderful Life』(과학도서상 수상)를 비롯해 『플라밍고의 미소The Flamingo’s Smile』,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Bully for Brontosaurus』,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Time’s Arrow, Time’s Cyc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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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명남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환경대학원에서 환경 정책을 공부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일했고, 현재 전업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지울 수 없는 흔적』, 『지상 최대의 쇼』, 『이보디보, 생명의 블랙박스를 열다』, 『프랜시스 크릭』, 『신기한 수학 나라의 알렉스』, 『시크릿 하우스』, 『몸에 갇힌 사람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물리와 함께하는 50일』, 『자연자본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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