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한겨레>에 칼럼 연재를 시작한 지 어언 7년이 지나가고 있다. 2005년 5월 ‘심야통신’으로 시작해 2007년 5월부터 2011년 8월까지는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타이틀이 바뀌었고, 그 뒤 다시 ‘일본통신’으로 지금까지 글을 계속 쓰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길게 이어온 연재다.
이들 칼럼 중에서 ‘심야통신’은 이미 2007년에 『시대를 건너는 법』(한겨레출판)으로 출간됐다. 그 뒤를 잇는 이 책은 2007년부터 4년 동안 쓴 ‘디아스포라의 눈’을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요즘 한국에서도 꽤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듯하다. 원래 이산(離散) 유대인을 가리키는 이 말은 현대에는 좀 더 폭넓게,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흩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나와 같은 재일조선인도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이라는 외적인 힘에 의해 이산당한 백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그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언제나 마이너리티(소수?비주류)이다. 당연히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건 즐겁지 않다. 하지만 디이스포라에겐 이점도 있다. 그것은 머조리티(다수?주류)에겐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국민국가 시대에 머조리티란 ‘국민’이기 때문에, 디아스포라는 ‘국민’에게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여기에 수록한 칼럼은 그런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과거 4년간 한국, 일본, 세계의 사상(事象)을 응시하며 쓴 것이다. ‘심야통신’은 2007년 일본에서 번역 간행됐다.(『밤의 시대에 말해야 할 것(夜の時代に語るべきこと)』, 마이니치신문사) 그 서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일련의 글들에서 내가 다룬 화제는 다양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장을 들자면 그것은 ‘국민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얘기하는 ‘국민주의’란 사람들을 ‘국민’과 ‘비국민’으로 분할하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부당한 차별에는 무관심한 듯 처신하면서 자신은 ‘국민’으로서 국가의 비호―그것은 또한 구속이기도 하다―를 받는 걸 당연시하고 의심하지 않는 심성을 가리킨다. ‘국민주의’는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머조리티의 내면 깊숙이 침투해 있다.
이는 그대로 이 책에도 해당된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간다면 그것은 자신이 ‘국민’이라는 걸 의심해본 적 없는 독자들에게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다른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사를 ‘다른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한 개인이나 사회가 건전함을 유지해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필자로서 이 책이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나는 2006년부터 2007년까지 2년간 성공회대 객원교수로 한국에 체류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그때 나는 타자로서의 ‘조국’, 그리고 ‘조국’의 타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슬퍼하거나 한탄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다시 다수의 ‘국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듯한 애매한 혈연공동체적 정서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공공적인 연계로서의 ‘조국’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사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대화를 계속해감으로써 새로 만들어가는 사회, 그것이 나에게는 바람직한 ‘조국’이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2년간의 한국 체류 후반기부터 쓰기 시작해 일본에 돌아온 뒤 지금까지 계속 써온 것들이다. 조국의 사람들에게 이토록 지속적으로 말을 걸어볼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내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나는 항상 조국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거기서부터 대화를 발전시켜 함께 새로운 조국을, 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2008년 3월 말, 나는 「내가 만나고픈 이런 조국」이라는 제목의 글을 한 편 썼다.
2018년 4월 초의 어느 날, 나는 인천공항에 내렸다. (……) 5년 전에 탄생한 현 정부는 에너지 정책의 극적인 전환을 호소해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 한국 정부는 에너지 절약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그 결과 남은 에너지는 북한에 원조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 10년 전에 50퍼센트를 넘었던 비정규직 비율은 한때 70퍼센트 가까이 올라갔으나 새 정부의 정책 덕에 30퍼센트까지 내려갔다. (……) 징병제에서 지원병제로의 전환을 실행에 옮긴 정부는 장기적으로는 군대를 폐지해서 국경 경비나 재해 구조를 목적으로 한 경찰부대로 대체할 구상을 세워놓고 있었다. (……) 재작년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이 마침내 폐지되고 형법상의 간통죄도 철폐됐다. (……) 정주 외국인 노동자나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코리안 디아스포라 들도 이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일상생활을 즐기고 있다.(이 책, 243~246쪽)
이건 다름 아닌, 4년 전에 내가 꾼 꿈이다. 이 꿈은 이명박 정권하에서 크게 멀어진 듯했지만 지금의 정세를 보건대 다시 조금은 근접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역사란 참으로 ‘예측 못 할’ 만큼 역동적이다.(이 책, 55쪽) 쉽게 꿈을 포기하지 말고 겸허한 마음으로 매일매일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한편 일본의 상황은 상당히 암담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사회는 착착 우경화가 진행돼왔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부정적 측면이 전면적으로 불거진 데다 리먼 쇼크(2008년 월스트리트의 대형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세계 금융 위기)까지 가세해 사회적 격차(양극화)가 극대화됐다.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은 집회와 시위라는 사회 활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아키하바라의 무차별 살인 사건과 같은 범죄의 형태로 분출되었다.(이 책, 67쪽) 마침내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그간 장기 집권했던 보수당 대신 민주당 정권이 탄생했지만 이 정권은 국민의 기대를 모조리 배신하면서 무참한 환멸만 안겨주고 있다.
지난해 3월 11일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을 천 년에 한 번 일어난다는 대지진과 쓰나미가 덮쳤고, 그다음 날 후쿠시마현에 있는 도쿄전력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수소 폭발이 일어났다. 그 뒤 원자로 노심 용융(멜트다운)이라는 중대 사태가 벌어졌다. 지난해 말 일본 정부는 ‘냉온 정지 상태’를 회복했으며 사고가 수습됐다고 발표했으나 현실은 여전히 수습과는 거리가 멀다. 수만 명이 고향을 박탈당한 채 지금도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다.
게다가 대지진과 원전 사고를 계기로 일본의 정치 시스템이 전반적인 기능 부전 상태에 빠진 가운데 신자유주의적인 경쟁 원리를 강조하며 우익적인 주장을 늘어놓는 포퓰리스트 정치가들이 널리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책에서 내가 거듭 경고한 대로 마침내 일본 사회는 파시즘 쪽으로 더욱 기울어가고 있다.
지난 1년간 쓴 글에는 원전 사고와 관련된 것이 많은데, 그만큼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중대한 위기에서 한국 사람들이 교훈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고는 어쩌다 일본에서 일어났지만 원전 의존율이 프랑스 다음가는 ‘원전대국’인 한국에서도 같은 사고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방사능 피해는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몇 세대에 걸쳐 계속 건강과 생활에 결정적인 손상을 입힌다.
한국에서는 원자력 마피아의 이익을 대표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올해 말로 끝난다. 한국 국민은 원전 의존에서 탈피해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미래로 방향을 틀 수 있을지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일본에서는 정부가 산업계의 뜻을 받들어 원전 재가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원자력 마피아들의 반격이 이제부터 본격화될 것이다. 일본 국민은 지금 자국의 권력에 맞서 싸워야 할 시기를 맞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두 민족이 서로 상대방의 고뇌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고뇌를 안겨주는 자들(국가권력, 기업, 어용학자, 어용 미디어 등)에 대한 분노를 공유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한 디아스포라의 이 절실한 물음이 한일 두 나라 국민에게 가닿을 수 있을까. 설사 가닿을 수 없다고 해도 포기할 순 없다.
이 책의 번역자는 <한겨레> 한승동 논설위원이다. 한 위원은 2005년 이래 지금까지 죽 내가 써온 칼럼을 번역해주고 있다. 이 책 편집은 한겨레출판 임윤희 씨가 맡아주었다.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솜씨 좋게 정리하고 적절한 삽화까지 찾아 넣었다. 이 책이 독자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건 임씨의 열의 덕분이다. 두 사람 모두 나와 ‘조국’ 사람들의 대화를 매개해주는 은인이다.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린다.
2012년 2월 도쿄에서
서경식
1장
기억의 싸움은 계속된다
파시즘 전야의
목소리들
요즘 한국 사회는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걸까?
바쁜 일상에 쫓기면서도 때때로 한국의 벗이나 지인 들과 메일을 주고 받는다. 요사이 내게 메일을 보내준 많은 사람들이 본래 용건과는 별도로 이런 글들을 써 보냈다.
“전 여러 가지로 마음이 아프고 힘든 5월을 보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뒷걸음질 치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려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어야 하는 걸까요?” “아시겠지만, 한국은 정말 최악이에요. 말도 안 되는 일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벌어지고 사람들은 당황하고 분노하면서도 익숙해져간다고 해야 할까요. 무력감과 냉소와 분열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은 소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숨죽이고 헐떡이며 사는 곳 (……) 무슨 희망을 바라고 저문 날 황혼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는지…….”
이 글을 쓴 사람들은 서로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고 나이도 성별도 각기 다르다. 다양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 사회의 현상에 대한 ‘탄식’과 ‘낙담’과 ‘분노’의 마음을 끝없이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일본에 있는 나는 벗들에게 뭔가 명확한 답장을 쓸 처지도 못 된다. 그저 답답할 뿐이다.
‘최악’이라면 일본의 상황도 최악이다. 2009년 6월 18일치 <아사히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지하철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사람을 향해 확성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대는 일본인이오, 한국인이오?’ 그 남자는 ‘조선 사람이오’ 하고 화난 소리로 받았다.” 그해 5월 31일 도쿄에서 영주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집회에 약 200명이 항의하기 위해 몰려들었을 때의 상황이다. 그들은 “특권을 계속 요구하는 재일 한국인을 조선반도로 쫓아 보내라!”고 증오를 드러내며 외쳐댔다고 한다. 이런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는 단체 가운데 하나가 ‘행동하는 보수’를 자임하는 ‘자이니치(在日) 특권 허용 반대 시민모임’이다. 2006년 말에 발족해 현재 6000명 가까운 회원을 모았다고 한다. ‘재일 특권’이란 ‘재일외국인의 특권’의 줄임말일 게다. 그들은 재일외국인이 일본인 이상의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격렬히 반대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재일 특권’ 중에서 대표적인 게 ‘정주(定住) 외국인 지방참정권’이다. 특권이기는커녕 너무 약소하다 할 만큼 기본적인 인권인데도 일본에선 아직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지금 일본의 민주당도 이 안건에 대한 당내 의견을 조율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은 물론 제1야당인 민주당에서도 ‘행동하는 보수’의 잠재적 동조자가 적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결코 고립돼 있는 세력이 아니다.
그들의 표적은 재일조선인만이 아니다. 마닐라의 빈곤 지역에서 태어난 필리핀 사람 알란 칼데론 씨는 1993년에 일본에 왔고, 최근 12년 동안 산업폐기물 처리 회사에서 일해왔다. 착실한 사람으로, 직장에서의 신뢰도 돈독하다. 역시 일본에 온 필리핀인 사라 씨와 결혼해 장녀 노리코도 얻었다. 이들 일가는 외국인으로 등록하고 주민세도 냈다. 노리코가 소학교 5학년이 돼 정식 체류허가 신청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단 2006년 7월 사라 씨가 불법체류 혐의로 체포당했다. 칼데론 부부는 이미 10여 년간 일본에서 착실히 생활해왔고, 일본에서 태어난 딸은 일본어밖에 할 줄 모르고 일본 사회밖에 모른다. 그런 일가에게 특별 체류허가를 내주라는 시민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2009년 4월 두 사람을 강제출국시켜버렸다. 딸은 학교에 계속 다니기 위해 일본에 남았고 일가는 이산가족이 됐다. 칼데론 일가의 집 주변과 딸 노리코가 다니는 중학교 앞으로 몰려간 ‘행동하는 보수’들은 “범죄자 일가를 내쫓아라!” 하고 외쳐댔다. 눈 감고 귀 막고 싶을 만큼 야만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노리코는 얼마나 두렵고 슬펐을까.
리먼 브라더스 파산 쇼크 이후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요소들이 전 세계에서 한꺼번에 분출했다. 이런 크로테스크한 폭력은 지금 온 세상에서 횡행하고 있다. 거액을 노린 투자회사나 은행 경영자들을 향해야 할 정당한 분노는 참으로 간단하게도 ‘직장마저 빼앗긴 외국인’들에 대한 분노로 바꿔치기돼버렸다.
비정규직이나 외국인 노동자 해고가 줄을 잇고 있다. 취직난도 심각하다. 젊은이들 사이에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익명의 헐뜯기 차원에 머물던 울분이 이젠 ‘행동하는 보수’라는 형태로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탤런트 출신 지사가 인기인이 돼 마치 ‘서민의 대변자’처럼 영웅시되는 모습도 내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건 일본의 리버럴파나 진보파 언론인?지식인에게 위기감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도리어 노동운동의 결집력과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행동하는 보수’에 쏠리는 젊은이들의 심정에 이해를 표하거나, 내셔널리즘과의 공동 투쟁도 필요하다는 따위의 말을 꺼내놓기 시작한 이들도 있다. 이런 정경은 바로 교과서에 나오는 ‘파시즘 전야’가 아닌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일본보다 훨씬 높은 한국에서는 상황이 일본보다 한층 더 심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탄식하고 분노하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고민하는 소리는 앞서 소개한 벗들의 메일처럼 한국에선 꽤 폭넓게, 그리고 분명히 들려오고 있다. 여기 일본에선 그런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다. 한국과 일본 어느 쪽이 ‘최악’일까. 메일을 보내준 벗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답장 삼아 보낸다. 이 위험한 역사의 분기점에서 서로 사는 곳은 다를지라도 여러분의 탄식과 분노는 바로 나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2009년 7월 3일
원전 폐기물
‘10만 년 보관’의 의미
후쿠시마 원전은 아직 복구될 기미조차 없다. 아직도 폭발과 방사능 대량 분출 위험이 사라지지 않았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필적하는 대형 사고다. 아니 사태는 아직 제어 불가능 상태로 진행 중이므로 체르노빌을 능가하는 대재앙이 될 게 분명하다. 여진도 계속되고 있다. 진원지에서 2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도쿄에서도 시시때때로 건물이 삐걱댈 정도의 흔들림을 느낄 수 있다. 원자로와 건물에 결정적인 균열이 생기거나 또다시 쓰나미가 덮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가고 있다. 흡사 땅속에 숨어 있는 거대한 불의 용〔火龍〕이 무슨 명확한 의도를 갖고 집요하게 날뛰는 형국이다.
도쿄전력은 4월 17일 당면한 위기를 모면하기까지 6개월 내지 9개월이 걸린다는 ‘공정표(工程表)’를 발표했지만, 아마도 도쿄전력이나 일본 정부까지 포함해서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설령 이 공정표대로 일이 진행된다 해도 아직 원자로 폐지로 가는 긴 도정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뒤 다시 수십 년이라는 불안한 세월을 우리는 누출되는 방사능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체르노빌은 사고 발생 뒤 25년이 지났지만 현장에 아직도 방사능 위험이 남아 있고 그 관리를 위해 막대한 돈과 노력이 투입되고 있다. 아무것도 산출하는 것이 없는, 그야말로 시니컬한 비용이다. 후쿠시마도 그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게 확실하다.
나는 식민 지배와 전쟁 시대 뒤에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기에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평온한 나날이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음 한편에 이대로 인생 마지막까지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으면 하는 소시민적 바람이 있었던 걸 부인하지 않겠다. 지하에서 날뛰는 불의 용은 그런 내게 통렬한 경고였다.
이번 사태로 사물에 대한 적도가 크게 흔들렸다. 특히 시간 척도가. 지금 확실한 것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후쿠시마 사태가 해결되는 걸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예순 살이지만 내 학생들, 동료의 아이들과 같은 젊은 세대도 앞으로 계속 이 불안과 우울의 세월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생이라는 시간 척도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파트너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절전을 위해 조명을 낮춘 상점가를 걸어 작은 영화관에 도착하니 아직 상영 시작 1시간 전인데도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 영화는 <영원한 봉인(Into eternity)>이라는 2010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이다. 한국에서도 개봉됐을까? 부디 많은 분들이 한번 보시기를 권한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서쪽으로 약 240킬로미터 떨어진 올킬루오토라는 섬에 거대한 지하 시설이 건설되고 있다. 방사성 폐기물을 지하 500미터에 있는 18억 년 전의 안정된 지층에 저장해서 인체에 해가 없어지는 10만 년 뒤까지 보관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온칼로(핀란드어로 ‘숨겨진 장소’라는 뜻) 프로젝트’라고 한다.
원전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라고들 한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특수 유리로 고정해 스테인리스 용기에 밀폐해서 30년에서 50년에 걸쳐 식힌 뒤 지하 수백 미터에 묻게 돼 있는데 일본에서는 아직 최종처리장 건설 장소조차 정하지 못했다. 폐기물 처리에 대한 아무런 전망도 세우지 못한 채 원전을 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도 사정이 어슷비슷하다.
그러나 10만 년이 도대체 어떤 시간인가. 지난 100년 동안에만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큰 재해와 기후 변동의 영향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변화를 견뎌내고 10만 년 동안 계속 보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도대체 10만 년 뒤에 인류가 존재하기나 할까. 미래의 인간이 다시 파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위험해. 파지 마!”라는 경고 메시지를 어떻게 10만 년 뒤의 인류에게 전할 수 있을까. 10만 년 전이라면 네안데르탈인 시대다. 우리는 네안데르탈인은커녕 이집트 피라미드나 나스카의 거대한 지상그림 메시지조차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런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시니컬한 삶이다. 인간은 어찌 이토록 터무니없는 일에 손을 대고 만 것인가.
방사능은 맛이나 냄새가 없어서 감지할 수도 없다. 따라서 방사능 공포는 ‘아프다’거나 ‘뜨겁다’는 직접적 감각으로는 알아챌 방도가 없다는 불안에서 비롯된다. 상상력의 산물인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상상력을 차단한다고 해서 방사능 위험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미카엘 마센(Michael Madsen) 감독의 영상은 처절하도록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뼈가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동반한다. 그것은 10만 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사태가 진행 중임에도, 미디어 여론조사에서는 원전을 ‘폐지 또는 감축’하기보다 ‘증설 또는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여전히 다수를 차지했다. 지방선거에서도 원전 추진파 또는 용인파 지사들이 잇따라 당선됐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정부와 전력회사의 선전에 세뇌당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것도 한 요인이겠지만 작가 다카무라 가오루(高村薰)의 다음과 같은 해석이 내 생각에 더 가깝다. “후쿠시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괴로워서 그런 게 아닐까. 겪어본 적 없고, 앞이 보이지 않는, 언제 끝날지 전망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애써 눈을 돌리려 하고 있다.”(<도쿄신문>, 2011년 4월 14일)
인간은 약하고 어리석다. 상상만 해도 두려운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눈앞의 편의나 이익만을 보고 생각을 멈춘다. 전쟁이나 학살의 역사적 교훈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우행과 만행을 반복한다. 인간은 스스로 이 약함과 어리석음을 이겨낼 수 있을까. 2011년 5월 6일
(머리말,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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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경식 徐京植
1951년 일본 교토시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이다. 할아버지는 충청남도 청양군의 농민으로, 1920년대에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아내와 어린 아들, 즉 서경식의 부친을 불러들였다. 서경식은 일본 패전 6년 뒤 일본에서 태어났다.
1965년에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3년 후 승(勝)과 준식(俊植) 두 형은 모국으로 유학 갔으나, 군사독재가 맹위를 떨치던 1971년 ‘학원간첩단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형들은 잔혹한 고문을 받으며 군사정권이 종말을 고한 1980년대 말까지 긴 세월을 옥중에서 보냈다. 부모님은 자식들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1969년 와세다대학 불문학과에 입학한 서경식은 형들의 구명운동을 벌이면서 1980년대 전반부터 발표할 데 없는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첫 책인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1991년에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1995년에는 『소년의 눈물: 어느 재일조선인의 독서 편력』으로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받았다.
1990년대 초부터 여러 대학에서 재일조선인과 역사 문제에 대한 강의를 해왔고, 2000년부터는 도쿄경제대학 교수로 ‘인권과 마이너리티’라는 강좌를 맡고 있다. 마이너리티(소수?비주류) 입장에서 ‘국민주의’를 비판하는 것,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것, 그것이 그의 강의를 관통하는 일관된 메시지이다. 또한 문학, 미술, 음악 등 다방면에 걸친 문필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의 글에서는 식민 지배와 전쟁 등 가혹한 진실을 응시하고 상처받은 이들의 증언에 귀 기울이려는 지향성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2년간 성공회대 객원교수로 한국에 체류했는데, 이때 한국인들과 교류한 체험은 그의 사색과 문필 활동에 더 많은 과제를 안겨주었다.
2005년 5월부터 2년간 <한겨레>에 ‘심야통신’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2007년 5월부터 2011년 8월까지는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그 후엔 ‘일본통신’으로 타이틀을 바꿔 지금까지 글을 쓰고 있다. 이들 칼럼 가운데 ‘심야통신’을 묶어 『시대를 건너는 법』(한겨레출판)을 출간했고, ‘디아스포라의 눈’을 엮은 것이 이 책이다.
서경식의 글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소수자, 군사정권 시대의 정치범 가족, 소수자 문제를 가르치는 교육자라는 세 가지 아이덴티티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시선으로 한국과 세계의 사상(事象)을 응시하는 그의 문장은 자신이 머조리티(다수·주류)의 일원임을 의심해본 적 없는 많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시야를 제공해줄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주요 저작으로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고뇌의 원근법』 『언어의 감옥에서』 『나의 서양음악 순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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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한승동 韓承東
1957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다녔다. <한겨레>가 창간된 1988년부터 현재까지 <한겨레>에서 기자로 활동해왔다. 3년간 도쿄 특파원을 지냈고, 국제부장과 문화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논설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대한민국 걷어차기』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우익에 눈먼 미국』 『부시의 정신분석』 『시대를 건너는 법』 『나의 서양음악 순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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