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이 10회의 강연은 1955년 1월 초순부터 3월 중순까지, 매주 월요일 오후 7시부터 7시 15분까지 바젤 방송국(Radio Basel)에서 방송된 것이다. 이 조그만 강연을 책으로 읽었으면 하는, 수많은 청취자들의 희망이 반드시 나에 대한 호의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극도로 간략하게 해야 하는 시간적 압박 때문에 이 글을 듣는 문장보다는 읽는 문장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했어야 할 예비지식 없는 청취자들에게는, 어쩌면 너무 지나친 부담을 주고 말았다.
한편 인쇄에 부침에 있어, 본문은 라디오 방송의 성격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아무런 손질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인상파와 현대 사이의 수많은 중요 작가들, 더구나 미술상의 여러 경향이 모두 빠져 있다는 것이 이유있는 (따라서 변호할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일어난 미술상의 사건을 서술함에 있어 완전을 기한다는 것은 본시 이 소책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방송할 때는 때때로 규정된 시간의 제약을 받았기에 원고에서 여기저기 몇군데 삭제한 부분을 여기서는 모두 되살려넣었다.
작가와 그 작품의 선택은, 가급적이면 많이, 바젤 미술관에서 이미 발행한 원색판 카드(그림)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경제적인 요구 때문에 크게 제한되었다.
끝으로 이 강연을 나에게 제안하고 수행시켜준 바젤 방송국과 이 책의 출판을 맡아준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1955년, 초판에 부쳐
게오르크 슈미트
1 근대회화(모던아트)의 탄생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79
19세기 중엽부터 어려워진 그림
여러분! 1회에 15분씩 10회에 걸쳐, 그러니까 모두 2시간 30분에 걸쳐서 화가 열 사람의 작품 열점을 골라 차례로 한점씩 감상하기로 합시다. 이들 열 사람이 말하는 언어에 모두 익숙한 분에게는 이로써도 충분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에게는 그 수가 너무 적은 듯합니다. 왜냐하면 이 열 사람의 화가들은 제각기 다른 언어, 다른 문법을 통해, 즉 색채와 형태에 대한 별개의 법칙을 가진 조형언어를 통해 말하며, ‘아름다움’이란 것에 대해서도 별개의 관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상자 역시 거듭 다른 감상태도로 익혀야 하며, 미(美)의 감각에 대해서도 별개의 표준을 적용하는 데 익숙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가 노리는 목표도 이 점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조형에서 조형으로, 화가에서 화가로 변화하는 미술의 언어를 해독하는 데 익숙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들 열점의 작품 가운데 처음 것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워 보입니다만, 나중 것에 이르면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뭔가 특별한 두뇌의 곡예라도 필요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테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얼핏 보아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미술작품도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곧바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전력을 기울여 이야기해보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림을 감상해가는 과정에서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뜻하는 바는, 이 열점의 그림을 통해 이들 열 사람의 예술가를 가급적 완전하게 소개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열점의 그림은 저마다 그것을 그렸던 열 사람의 화가에게는 매우 특징적입니다만, 그러나 그들의 예술적 본질의 일정한 측면에 대해서만, 그리고 그들의 예술 발전의 일정한 시기에 대해서만 특징적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 열점의 그림 하나하나는(이는 우리가 앞으로 그림을 보아가는 데 있어 결정적인 것입니다만) 일반적인 회화발전사의 일정한 단계에 있어서도 특색있는 것들입니다. 열점의 그림은 그러한 의도를 갖고 선정한 것이기 때문에 각각의 그림은 지난 100년간 회화의 가장 중요한 발전단계에서 가치있는 것이고, 우리는 이를 통해 그 기간 동안 예술언어에서 일어난 한 걸음 한 걸음의 변화를 그림에서 그림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1850년경부터 유럽의 회화는 일반대중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옮겨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는 석판화가로서는 19세기의 가장 인기있는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화가로서는―「돈 끼호떼와 산초 빤사」는 1850년에 나타났습니다―그때까지의 관습을 무너뜨리는 첫발을 내디딘 사람입니다. 이어 1870년경에는 인상파 화가들이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1890년경에는 표현파가, 1910년경에는 입체파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바로 초현실주의자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기에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이들의 전진은 하나같이 미술적 표현의 새로운 세계를 온통 혁명적으로 정복하는 것이면서도, 그것은 일종의 유기적인 성장의 논리를 갖고 앞선 단계에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열 사람의 화가는 각자 모두 그들 자신으로서는 가장 필요한 일을, 가장 개인적인 필연성을 실행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고찰해볼 때, 이 100여년 동안 일어난 사실이 꼭 그대로, 극히 의미있게, 회화의 발전사 전체 속에 얽혀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단계로 나눠본 회화의 역사
중세 초기 이래 회화의 역사를 간단히 훑어본다면,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14세기 초까지의 중세 초기. 이 시기의 그림은 아직 원근법에 의한 공간묘사도, 빛과 그림자에 의한 신체성 묘사도, 자연의 물질성 묘사도 알지 못한 채, 필경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신체를 요구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생각건대 당시의 화가들도 그것을 바랐을 테고, 또 그럴 능력이 없던 것도 아니었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필요로 하지 않았는가 하면, 그들은 눈에 보이는 차안(此岸)적인 현실을 그리려 했던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피안(彼岸)적인 현실을 그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14세기 초에서 15~16세기로 접어드는 중세 후기, 즉 조또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로부터 라파엘로(Raffaello)까지. 이 시기의 그림은 바야흐로 차안적인, 눈에 보이는, 측정할 수 있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의 묘사를 목표로 했고, 그러기 위해 공간적, 신체적, 물질적인 영상(illusion)과 해부학적, 색채적인 정확성을 묘사하는 수단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재발견한 것이지요. 재발견이라 함은 이 모두가 고전적인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에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가 ‘재생’, 즉 ‘르네상스’라 불리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 ‘자연주의적’이랄 수 있는 그림은 인간 생활의 다른 면?철학, 과학, 기술 따위?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자연을 합리적으로 지배하려 했던 시기의 필연적 표현이었습니다.
대개 1500년대 중반경에 셋째 단계로 전환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역시 눈에 보이는 현실의 인식과 묘사였습니다만, 이 시기의 사람들은 마침내 모든 자연인식은 결국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에 달려 있다는 것, 그렇기에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두고 말하자면 우리가 보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사물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즉 절대적인 공간이 아니라 단지 공기원근법적으로 상대적인 공간을, 촉각적인 물질성이 아니라 단지 가상적인 물질성을, 절대적인 대상색(對象色)이 아니라 오직 상대적인 현상색(現象色)을 보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띠찌아노(Tiziano)의 원숙기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색조의 회화가 나타납니다.
그리하여 이 발전의 최후에 나타난 사람이 다름아닌 도미에입니다.색조의 회화는 회화적으로 풀어헤쳐진 화풍으로서, 거기에는 화가의 개성적인 필적이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묘사된 대상의 물질성―재질성이라고도 함―대신에 필촉의 물질성이 나타납니다. 빛은 이미 사물 위에 있지 않고 사물 사이에 있습니다. 그동안 수차에 걸쳐 르네상스의 완전한 자연주의로 복귀하려는 반동이 나타났지만, 이런 방식의 그림이 인상파 초반까지 계속되어왔습니다. 16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대화가들은 거의 모두가 이 색조의 화풍에 의한 화가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만년의 띠찌아노, 루벤스(P. P. Rubens), 프란스 할스(Frans Hals), 벨라스께스(D. Velazquez), 렘브란트(Rembrandt), 와또(J. A. Watteau), 샤르댕(J. B. S. Chardin), 고야(F. Goya), 꼬로(J. B. C. Corot), 도미에, 꾸르베(G. Courbet), 초기의 마네(E. Manet) 등이 그러합니다.
나뽈레옹 시대에 나타났던, 자연주의로 복귀하려는 최후의 반동인 ‘고전주의’(앵그르 J. A. D. Ingres, 1780년 출생) 이후에 주목할 만한 전환이 나타납니다. 조또부터 라파엘로까지 하나하나 쌓아올려졌던 자연주의적인 대상묘사의 여섯가지 요소가 다시 하나하나 허물어져간다는 사실입니다. 그 여섯가지 요소란 물질성의 영상, 신체성의 영상, 공간성의 영상, 묘형의 세부, 해부학적인 정확성, 대상의 색채입니다. 이 양상이 직접 넷째 단계로 이어지고, 우리는 지금 그 흐름 속에 서 있는 셈입니다.
자연주의적인 그림에서 이탈해감에 따라, 자연주의 이전의 미술의 미가 열광적으로 재발견되어왔던 것(지금도 그러하지만)은 명백합니다. 사람들은 자연주의에 대한 능력과 예술적인 능력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에는 거기서 단지 불완전한 능력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연주의로부터의 이탈은 과학 이전의 자연인식으로 역행하는 데 따른 현상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사물의 가시적인 현상을 넘어, 사물 속에 숨어 사물 사이에 작용하는 비(非)가시적인 여러 힘을 추구해온 근대의 자연과학에 평행하는 현상입니다. 완전히 자연주의적인 자연묘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미술의 본래적인 과제로 여겨지고 또 그 최고봉인 양 생각되지만, 참으로 창조적인 미술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이렇다 할 정신적 노력 없이 여느 미술학교에서도 배울 수 있는 한갓 기술적인 예기(藝技)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기이하게도 때를 같이하여 사진술이 발명되었고, 그 때문에 미술가들은 더욱이 자연을 충실히 묘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수백년에 걸친 미술가의 주요 과제였지요.
그리고 미술가들은 차츰 그의 과제를 전과는 반대로, 자연을 개인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예술적인 표현수단이 한 걸음 한 걸음 독립했고, 예술 외적인 필요에 봉사하는 시녀에서 스스로 자유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화가는 스스로 이 과정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분위기 묘사를 강조한 도미에
그런데 이 갈림길에서, 이들 열명의 화가 중 첫번째 사람인 오노레 도미에는 아주 독자적인 입장에 서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만년의 렘브란트나 고야 등을 상기한다면, 이 「돈 끼호떼와 산초 빤사」도 그 미술상의 표현방법에 있어서는 원칙적으로 별반 새로운 게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도미에의 선구자, 이를테면 고전파의 앵그르를 상기해본다면 어떨까요. 앵그르에게는 홀바인(H. Holbein)이나 라파엘로 같은 화가가 최고의 모범이었으니까요.
분위기 없는 앵그르의 선(線)원근법적 공간묘사에 비해 도미에의 공간은 빛과 공기로 충만해 있습니다. 역광을 담뿍 받으며, 균형이 맞지 않는 두 말 탄 사나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습니다. 죽마처럼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그의 애마 로신안떼를 타고 있는 기고만장의 돈 끼호떼와, 다리 짧은 당나귀 등에 버티고 앉은 땅딸보 산초 빤사입니다. 그 두 사람 뒤편의 돌산 골짜기도 빛을 머금은 공간(대기) 속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화법은 우리가 공기원근법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입니다. 즉 그려진 디테일이 전경에서 후경으로 점차 불명확해지는 반면, 공기의 명도는 전경에서 후경으로 높아집니다. 그런데 분위기와 역광의 효과는 신체성의 영상을 약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도미에에게 빛은 이미 신체를 조각적으로 나타내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빛은 사물 사이에 작용하는 하나의 독립된 자연력이 되어 그 어디든 물체의 표면에 부딪혀 빛납니다. 그러므로 이 두 인물은 손에 잡힐 듯한 신체성이 아니라 한갓 현상으로서, 아니 하나의 환상과도 같이 우리 눈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분위기의 톤(tone)을 노리는 그림은 다시 물질성의 영상을 버리고 반대로 착색의 물질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이 그림에서 보듯 도미에는 이미 털가죽과 의복, 피부, 암석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 넓적하고 두툼한 필촉으로 디테일이 무시된 채 칠해져 있습니다. 앵그르가 젊은 화가들을 비난했던 대로 아무렇게나 칠해져 있습니다. 자연의 갖가지 물질이 온통 색채라는 하나의 물질 속에 이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필촉이야말로 도미에의 위대한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필적입니다.
데포르마시옹의 미술적·인간적 의미
그래서 그 색채―백마의 흰색, 산초 빤사가 걸친 망토의 붉은색 등―는 절대적인 대상색이 아니라 상대적인 현상색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밝은 곳에서만 그 흰색은 희고, 붉은색은 붉게 보이며, 어스름 속에서는 흰색은 푸른 회색으로, 붉은색은 갈색으로 보입니다. 명암법의 그림이나 외광파(外光派, Pleinairisme)의 그림을 색조의 화풍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앵그르나 홀바인의 눈으로 보고, 그것을 미술의 표준으로 삼아 도미에를 본다면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표준에 맞는 공간도 신체도 재질도 색채도 없고 더욱이 묘형은 난잡해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도미에를 가령 만년의 렘브란트를 척도로 해서 볼 때, 자연주의적으로는 소극적인 것이 모두 예술적으로는 적극적인 것이 됩니다. 환상적인 빛에 싸인 신체도, 환상적인 빛으로 가득 찬 공간도, 개성적인 힘찬 필촉도.
그런데 지금까지 보아온 것 외에 아직 까다로운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즉 돈 끼호떼나 그가 타고 있는 말의 모습이 모두 기묘하게 해부학상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이르면 도미에는 그때까지의 어느 누구도, 가장 대담한 렘브란트나 고야까지 훨씬 능가합니다. 만일 이 그림을 보고 웃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을 그의 희화(戱畵) 계열에 넣어도 무방하겠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희화를 볼 때는 해부학상의 과장이나 오류를 무시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요구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도미에의 유화에서 그 해부학상의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 사물의 원래 형태를 뒤틀리게 함)을 보고 웃어넘기기엔 그의 그림이 너무도 진지한 면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고전적인 미술법칙을 이만큼 통렬히 타파했다는 점에서, 도미에의 실로 진지한 예술적 의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뒤틀린 형체를 ‘아름답다’고 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표현력에 찬 것으로, 각별히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야 하겠지요. 여기서 진실이라 함은 물론 자연과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의미에서의 진실입니다. 도미에는 권력자의 횡포에 항거하여 약자의 생명을 지키려고 익살스러운 전투에 나선 기사로서의 체험을 그 스스로 갖고 있습니다. 그가 그린 돈 끼호떼, 그 윤곽의 웅대함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해부학상의 데포르마시옹이 지닌 미술적?인간적 의미를 파악한 셈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던아트(근대회화)를 이해함에 있어 최대의 난관 가운데 하나를 돌파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도미에로부터 나온 한 갈래 길이 반 고흐(V. van Gogh)로 이어지고, 그후의 수많은 화가들에게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해부학적으로 잘못됨 없이 그려진 말이 모두 미술작품으로서의 생명이 길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부학적으로 뒤틀리게 그려진 말이라고 해서 모두 생명이 긴 것은 아닙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형태적인 면에서 알게 된 것―자연에 의거하지 않는 형태의, 미술상의 고유한 가치―을 다음번에는 색채적인 면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미에의 색조의 회화로부터 씨슬레(A. Sisley)의 회화로 나아갈 때, 즉 인상파의 눈을 통해 보는 법을 배우고자 할 때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책머리에,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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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게오르크 슈미트(Georg Schmidt, 1896~1965)
스위스 바젤 출생. 바젤 대학에서 역사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1년부터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면서 미술비평 활동을 했다. 1939년 바젤 미술관장에 취임하여 1961년까지 이 미술관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이끌었다. 1958년부터 1965년 사망할 때까지 뮌헨 조형미술아카데미 교수로 재직하면서 근대회화에 관한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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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옮긴이 김윤수(金潤洙)
1936년생. 미술평론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하고 서울대 강사, 이화여대와 영남대 교수, 창작과비평사의 사장 및 대표이사, 민예총 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다. 계간 『창작과비평』을 비롯해 미술전문지에 많은 미술평론을 발표했으며, 저서로 『한국현대회화사』(1975)가 있고, 번역서로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1984), 허버트 리드의 『현대회화의 역사』(199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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