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국가의 실체를 직시한다
‘국가주의’라는 말은, 요즘 보수 사이에서도 그다지 인기가 없다. 국가보다는 다국적화된 거대 자본 위주의 시장적 사회·경제 질서, 즉 신자유주의가 보수들의 이념이 되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좌우간 ‘멸사봉공’, ‘애국애족’ 류의 표현은 이제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 같다. ‘조국 근대화’ 시절 국가주의의 화신처럼 보이는 박근혜가 한때에 최고 인기를 누리는 정치인이었지만, ‘성공적’인 사업가인 안철수가 그녀에게 성공적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봐서 이제 ‘국가관’보다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능력’이 훨씬 더 큰 ‘매력 포인트’가 된 모양이다. 박정희나 이순신은 여전히 세인들의 머릿속에 강력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지만, 요즘에는 ‘국가 권력자’나 ‘국가에 충성을 다한 장수’보다는 ‘효율적인 경영인’으로 더 부각되는 것 같다. 확실히 공업화 초기와 같은 모습의 국가주의는 점차 박물관 진열대의 유물이 돼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국가’라는, 근대가 만들어낸 유사종교의 주박(呪縛)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인가? ‘주의’까지는 붙이지 않지만, 국가는 여전히 우리 시좌(視座)의 맨 중심에 놓여 있다. 국내에서 국가 최고 통치자 선거(대선)와 국가 입법부 선거(총선) 등이 한꺼번에 있는 2012년, ‘진보’까지도 모든 관심이 거기에 쏠려 있지 않은가? 정권이 극우에서 자유주의 우파로 넘어가든, 혹은 계속 극우의 차지가 되든, 민중의 삶과 연결된 경제·사회 정책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외환위기 이후 15년 동안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국가의 지도자’와 국정을 움직일 ‘국회의원’이 누가 되는가는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서구의 경험으로 본다면 공산당 등 급진 진보가 입각(入閣)하거나 조각(組閣)한다 해도, 자본주의 국가의 기본 성격이 변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꼭 민중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국정이 흘러가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1996~1998년 이탈리아는 공산당 후계 정당 중의 하나인 좌파민주당(PDS)이 참여하고, 그 좌파민주당보다 더 급진적인 또 하나의 공산당 후계 정당인 재건공산당(PRC)이 지지한 좌파·중도 연립내각이 통치했는데, 이들이 주로 한 일은 결국 2011년 경제위기 속에서 이탈리아의 민생경제를 파괴한 원인이 된 유로존 합류를 위해 각종 신자유주의적 준비 작업(예산 삭감과 적자 폭 감소 등)을 하는 것이었다. 이미 개혁주의로 흘러가긴 했지만, 주로 조직 노동자를 지지기반으로 삼는 공산당이 국정에 적극 참여한다 해도 자본주의 국가는 그 생리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산당이나 사회민주주의 정당도 아닌 민주통합당 같은 자유주의 우파의 ‘국정 주도권’ 획득에 일희일비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보다는 노조가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정당이 영세업자나 청년과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개혁의 전제조건이 될 ‘민중운동’ 조직화와 위력화 차원에서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풀뿌리 민중의 조직화 같은 ‘하찮은’ 이야기보다 ‘거대’ 전국 정치판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들린다. 국가에 대해서 도대체 어떤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기에 이렇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 국가가 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국적(또는 미국 국적)의 약탈적 자본과 이들이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생계파괴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길 원한다. 문제는, 노무현 정권이 입안·추진하고 이명박 정권이 비준·발효한 한미FTA의 사례에서 보듯이, 극우냐 자유주의 우파냐의 구별 없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주류 정치세력은 하나 같이 바로 신자유주의적인 ‘자유무역’의 장려에 ‘국가’의 힘을 모두 쏟아부어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국가에 ‘시장으로부터의 보호’를 주문하고 싶지만, 국가야말로 시장주의적 민생파괴의 견인차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자세히 논하겠지만, 지배계급의 ‘사무총국’과 같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보면 이는 불가피하고도 당연한 일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는 시장, 즉 대자본의 고도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렇게 된 이상, 자본의 도구가 될 집권 정치인들이 어느 정당 출신이냐보다는, 자본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인 민중운동의 발전 상태가 어떤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의 주술에 걸려 있는 사람들에게 이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국가주의는 갔지만,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의 시대가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인 병영국가는 어디 가지 않았다. 고문이 없어지고 형량이 줄어들었을 뿐,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민중적 교파의 신도를 위시한 병역거부자가 감옥에 가고 평생 이등 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병영사회의 규칙은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아주 쉽게 망각된다. 군사주의 선전이 한국 자본과 함께 고도로 발전(?)되어서 그런 것인가? 이제 ‘멸사봉공’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겠지만, 인터넷 포털 뉴스를 볼 때마다 군 복무 중인 인기 연예인이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대한 건아답게 군 생활을 잘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들이 밝은 표정으로 이렇게 이야기함으로써 군 복무는 ‘남자의 당연한 의무’가 된다. ‘군복을 입은 인기 얼짱’ 덕분에 군의 의무적인 살인 교육이 ‘쿨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심신을 유순하게 만드는 그 살인 교육의 ‘효율성’을, 이 사회의 실질적인 주인인 자본도 이제 탐낸다. 회사마다 직원들을 해병대 캠프에 보내거나 군대식 극기훈련을 시키는 게 인기 있는 ‘사기 진작 방법’으로 통한다. 다수가 군에 갔다 오거나 적어도 군대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합숙 교육’을 받아본 사회에서, ‘군기’는 사회의 주된 문화적 코드가 되어버린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의 구령에 따라 일제히 일어나 “위하여!”, “건배!”를 큰 소리로 외쳐대는 월급쟁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삶에 스며든 군대의 살기를 그대로 발견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광경을 보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국가’에 주박되어 있는 정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국기에 대한 경례부터 일사불란한 의례적 행동까지 국가에 대한 거의 무의식적으로 의식화됐다 싶은 믿음과 군사주의는 이미 우리 속살에 배인 일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일상은 보통 반성적 고찰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일각의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민주화’된 국가는 내부적으로 폭력을 훨씬 덜 쓰게 되는 만큼 외부적으로도 과거의 권위주의적 국가에 비해서 훨씬 덜 호전적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시각이야말로 ‘국가에의 주박’의 극치라고 생각한다. 본문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논하겠지만, 소외된 ‘타자’에 대한 국가의 내부적 억압기구(경찰 등)의 태도는 여전히 극도로 폭력적이다. 단, 구미권에서는 주요 폭력의 표적이 되는 소외되는 타자의 자리에 ‘토박이 노동자’ 대신 인종적 혹은 문화적으로 다른 이민자 등이 들어선 것뿐이다. 물론 쌍용자동차 투쟁의 폭력적 진압이나 용산 참사에서 볼 수 있듯이, 국내에서는 여전히 ‘토박이 노동자’도 ‘대들기’만 하면 크게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또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의 본산쯤 되는 미국이 냉전 종식 이후 감행한 모든 침략(소말리아, 세르비아, 이라크, 아프간 등)을 생각해보면 자본주의적 국가의 틀 안에서 제도적 민주주의가 군사주의와 얼마나 호환성이 좋은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최근 미군의 침략 현장마다 공범 내지 종범으로 열심히 나서고 있다. 민주화가 다 됐다지만, 전 세계에서 수감된 병역거부자의 약 90%가 매년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다. 진정한 민주주의, 즉 노동자의 일터 관리까지 포함하는 직접적인 민주주의가 실행되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부르주아적 ‘제도민주주의’ 또는 ‘의회민주주의’가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은 유해한 허상일 뿐이다.
국가의 실체와 함께 국가폭력의 실체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무엇보다 그 폭력이 여태까지 어떻게 합리화되고 낭만화되어왔는가 하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불교부터 기독교까지 애당초 평화주의적 요소가 강했던 세계종교들이 어떻게 해서 군사주의와 결탁하게 됐는지, 《일리아드》부터 영화 <람보>나 <300>까지 군사적 폭력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낭만화되어왔는지, ‘폭력적 남성성’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고정화되어왔는지도 이 책의 주된 초점이 될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국가폭력과의 투쟁이 세계사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 조감할 것이다.
국가폭력과의 투쟁은 결국 계급사회와의 투쟁, 평등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총체적인 반계급·반자본 투쟁의 과정에서도 특별히 국가폭력과의 투쟁에 중점을 두고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명백하다. 현재의 교육제도나 매체 등이 갖는 특성 때문에 다수에게 대대적으로 계급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수많은 도시, ‘적’을 포로로 잡아 학대하거나 그 시체 위에 오줌을 싸는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르는 미군을 보면 의분을 느낄 사람이 다수일 것이다. 본능적으로 전쟁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 다수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만이 전쟁의 종식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 사회의 이념지도는 다소 바뀔 수 있을지 모른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다수의 생각은 하나의 물리력이 되니, 이와 같은 세계관의 변화가 결국 사회·정치적인 진보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믿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
2012년 2월 박노자
1
국가는
무엇인가
국가는 누구의 편인가
과거에 비하면 ‘성역 없는 시대’, ‘비판의 시대’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우리의 비판적 사고의 폭이 넓어졌다. 1990년대 이후 계속된 제도적 민주화에 힘입은 바 크다. 정부는 능히 비판해도 종교세력, 특히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기독교(개신교)를 비판하기는 어려운 게 과거의 사정이었다. 하지만 소망교회 출신의 대통령이 인상적인(?) 이미지를 제공한 덕분인지, 예수보다 황금의 신인 맘몬을 더 숭배해서인지, 특유의 배타주의로 어쩌면 북조선을 능가하는 폐쇄성과 권력 세습을 보여서인지 한국 주류 교회에 대해 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1980년대는, 활동가 중 감옥에 가느라고 군대에 가지 못한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운동권마저도 ‘군대에 갔다 와야 남자가 된다’는 식의 통념에 대해 이렇다 할 만한 담론적 저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 사이의 선후배 관계나 남녀 관계 형태가 어쩌면 군사주의 문화의 영향을 꽤 받았다고 비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군사문화에 대한 지탄이야말로 사회운동의 통념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1980년대에 ‘민족’과 ‘애국’은 좌우를 불문하고 신성시되는 영역이었지만, 노무현 정권 이후로는 ‘단일민족’과 같은 언사를 정부에서마저도 더 이상 거의 쓰지 않는다. 학계에서는 ‘국사’와 같이 ‘민족’을 제외하고서는 그 본령의 의미를 상실할 것 같은 일부의 ‘내재적으로 민족주의적인’ 학문만 빼면 ‘탈(脫)민족’은 거의 주류인 듯하다. 종교도 군대도 민족도 다 상대화된 이 시대에, 우리 비판 정신이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영역이 있을까?
그래도 여전히 관습적으로, 별다른 비판적 검토 없이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개별 정부, 즉 한반도 남반부에 실재하고 있는 구체적인 국가인 남한 정부까지는 우리가 쉽게 비판적으로 해부한다. 친일파 등 국내 기득권 세력과 미국 등 외세가 결탁해서 이루어진 남한의 건국 과정이나 반공 규율사회라는 과거의 특징부터, 재벌의 해결사처럼 행동하면서 재분배에는 매우 무능한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국가의 반(反)민중적 성격까지 모두 어렵지 않게 비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남한 정부에 대해서 우리는 ‘국가폭력’이라는 용어를 자주 쓴다. 해방 직후의 1946년 10월 민중투쟁의 진압이나 제주도, 여수, 순천에서의 저항에 대한 야만적인 탄압에서부터 최근의 용산 참사까지, 국가폭력은 말 그대로 남한의 역사를 관통하는 주된 코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국가폭력을 비판함과 동시에, 우리는 통상적으로 국가에 너무나 많은 긍정적인 역할을 기대한다. 우리가 강력하게 요구만 하면 국가가 비정규직 양산을 정지시킬 것이고, 반값 등록금 실천부터 시작해서 기초적인 복지망을 구축, 확대시킬 것이라고 기대한다. 일면으로 십분 이해될 수도 있는 태도다. 국가는 결국 우리 모두가 내는 세금을 관리하는 기관들의 총칭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납세자가 연대해서 이 기관에 세금의 합리적인 이용을 요구해 그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국가는 우리에게 ‘국가폭력’의 주체로 보이는 동시에 시장의 폭력성을 잠재울 사회정책을 실시할 ‘선의’의 주체로 보이기도 한다. 국가폭력의 규모가 다 밝혀진 이 시대에 근대적 경제 발전에 있어서의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케임브리지 대학 장하준 교수 류의 ‘제도학파’ 저서들이 잘 팔려 사회적인 공감을 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국가의 폭력성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사회·경제의 ‘합리적인 조절자’로서의 국가에 가장 큰 희망을 거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의 국가 경영 경험에 대해서 지금도 비판적 성찰보다 자화자찬을 더 많이 하는 유시민, 문재인 류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렇다는 것이야 놀랄 일도 없지만, 이제 통합진보당에 합류한 노회찬, 심상정 같은 사민주의 우파 정치인들까지도 현존의 국가를 ‘복지국가’로 개조시키는 것을 꿈꾸고 있지 않은가? “밉고 미워도 다시 한번” 국가의 힘에 기대보자는 것이다.
국가는 합리적 조절자인가
그렇다면 국가는 정말 사회의 계급 갈등에 중립적인 ‘합리적 조절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국가폭력이란, 국가의 본질과 꼭 연결돼 있지는 않은 ‘공권력의 남용’ 정도인가? ‘시민’의 견제에 순치된 국가는 정말 ‘복지사무소’와 같은 순기능만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본격적인 답을 하기 전에 일단 두 가지의 단서를 달아야겠다. 첫째, 민중의 여론과 압력에 밀리는 상황에서, 국가나 국가 산하의 지역자치단체 등은 당연하게도 민심 수습 차원으로 가끔 옳고 좋은 일도 할 수 있다. 서울에서의 학교 무상급식이나 학생인권조례, 체벌금지 등이 최근의 사례가 되겠지만,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의 복지국가 건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새로운 장기 주기(周期)의 시작 단계였으므로, 성장률이 높아 이윤 마진도 비교적으로 높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살려 경제발전에 추가적 탄력을 주고, 파시즘 패배 이후에 전례 없이 높아진 노동자들의 투쟁적 계급의식을 무마시켜 체제에 대한 지지를 확대하려는 차원에서, 그 당시 국가의 노동자 복지에 대한 투자는 거의 불가피하게 보일 정도로 당연했다. 물론, 동기와 과정이 어떻든 간에 복지국가 건설의 과정에서 유럽 노동자들이 역사상 최초로 몇 주에 걸친 여름휴가부터 자녀의 대학 무상교육 수혜까지 맛볼 수 있게 된 것은 엄연히 사실이다. 둘째, 꼭 계급적 인식의 고양과 투쟁의 성과가 아니더라도, 어떤 특별한 역사적 상황에서 자본주의 국가는 (비록 민중에 매우 불리한 방식일지라도)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다. 예컨대 남한의 권위주의적 정권이 (비록 1970년대 말까지 앞서 갔던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자극을 받아 불가피하게 ‘북한 따라잡기’를 한 측면이 확연하지만) 특정 산업 부문의 집중투자를 통해 공업화라는 역사적인 과제를 단기간에 수행한 것은 사실이다. 단, 분배를 거의 전제하지 않아 극도로 불균형하고 착취적인 세계 최장의 노동 시간과 세계 최고 강도의 살인적 노동에 기반한 성장이, 남한을 ‘중진국’으로 만드는 동시에 결국 다수의 남한 민중을 영구히 불행한 피해자로 만든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본다면 ‘국가 주도의 공업화’라는 말은 분명히 성립된다. 그렇다면 국가란 광범위한 의미의 ‘진보’에 보탬을 줄 수 있단 이야기인가?
여기에서 남한과 같은 ‘성공 사례’를 가지고 국가의 역할을 논하는 것은 다소 무의미해 보인다. 1960~1970년대라는 기간만 집중적으로 봐도 남한과 대만 등 일부 ‘성공 사례’ 이외에는 너무나 많은 실패의 사례가 보이기 때문이다. 남한은 개발독재였다면, 최고지배자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 통치 1965~1997)가 가진 (50억 달러 정도의) 스위스 은행 계좌만 성장(?)하고 나라는 여전히 자원 공급만 가능한 빈국으로 남은 자이르(콩코민주공화국의 전 이름)와 같은 ‘반(反)개발 독재’의 사례도 있다. 칠레의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통치 1974~1989)는 박정희와 정치적 성향이 너무나 흡사한 초강경 반공주의, 백색테러의 화신이었다. 하지만 칠레 경제는 남한과 달리 1973년 쿠데타 이후로 발전이 아닌 퇴보를 거듭해 1977년의 산업 생산량은 1968년의 수준에 불과했다. 1980년, 실업률 25%의 칠레는 발전이 아닌 대중적 빈곤, 대량 생계형 이민, 급격한 생산력 퇴화의 나라였다. 실제로 세계적 차원에서 본다면 1960~1970년대에 개발에 성공한 자본주의적 개도국보다 비참한 실패의 경우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문제는, 개별적인 ‘성공’과 ‘실패’를 넘어 자본주의적 국가를 움직이게 하는 논리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논리를 발견하자면 좋든 싫든 불가피하게 국가의 계급적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지배계급의 사무총국
본격적인 사회혁명을 거쳐 구(舊)지배층이 해체된 일부 사회를 예외로 인정할 수 있겠지만, 국가의 주요 기구들은 대부분 권력을 행사하여 한 사회 지배구조의 골간을 이루기에 해당 사회의 지배계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 않을 수 없다. 필리핀이나 중남미처럼 지주의 자녀들이 장교나 고급관료가 되어 국가를 지주계급에 유익한 방향으로 통치하든, 권위주의 시대의 남한처럼 일제시대의 관료 출신과 해방 이후 육사·서울대·미국제 박사 출신들이 새로운 국가고위층의 골격을 이루어 재벌과 부동산 부자 위주의 경제적 질서를 잡아주든, 넓은 의미에서 지배계급과 국가를 운영하는 고급관료 엘리트는 꼭 쌍두마차처럼 보인다. 전두환 시대에 벌어진 ‘국제그룹’의 몰락과 해체 등 군사독재시대의 일부 괴담(?)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가 가끔 개별 재산가 등 일부 지배층 구성원에게 무자비한 사정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지만, 크게 봐서 국가는 지배계급의 ‘사무총국’ 성격을 띤다. 특정 상황에서 개별적인 지배자의 이해관계를 거스를 수 있어도, 즉 지배계급으로부터 전술적이고 상대적인 자율성을 보장받아도, 보다 총체적인 의미에서는 지배계급의 계급으로서의 이득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다. 개도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2008년 세계공황 시작 이후, 국채를 남발해 국가재정의 장기적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은행에 ‘구제 금융’을 마구 퍼부었던 구미권 국가들의 ‘위기 극복’ 행위를 보면, 국가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非)우량 주택담보 대출’을 잘못 받았다가 집을 날리고 길거리에 내몰리는 수백만 명의 피지배층 미국인들은 국가로부터 그 어떤 특별 지원을 받지 못해도, 월(Wall)가는 늘 국가에 충분히 기댈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5위 은행재벌인 골드만삭스는 국가의 지원으로 위기의 2008년을 무난히 지나 2009년에 기록적인 130억 달러의 순소득을 올렸다. 빈민의 위기는 국가와 결탁된 재벌에게는 기회일 뿐이다. 국가의 근본적인 계급적 성격을 염두에 두면, 이는 예외라기보다는 ‘당연지사’에 가깝다.
국가의 생산력 개발에의 ‘성패’는 대체로 국가가 대표하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달려 있다. 1960~1970년대의 남한처럼 북한과의 경쟁에서 그렇지 않아도 명분이 전혀 없는 정치군인과 약탈적 재벌의 지배 블록이 수출 주도의 산업개발 없이는 완패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 일단 지배계급의 이해관철 차원에서 민중의 희생을 대가로 초고속 개발이 이루어진다. 반대로 칠레나 자이르처럼 기존의 지배층이 외부로부터 그 어떤 특수한 위협도 받지 않은 채 자원의 채굴과 수출만으로 충분히 호의호식하며 자신들의 스위스 은행계좌를 살찌울 수 있다면, 개발이 아닌 ‘반개발’ 정권이 세워진다. 이윤 마진이 아직 두터운 경제적 주기의 초기에 총(總)구매력 제고 차원에서 복지정책이 실시되는 것과 이 주기의 말기인 금융화된 경제체제에서 금융자본가의 이윤을 높이기 위해 복지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것은 사실 전혀 모순이 아니다. 양쪽의 경우 모두 유럽 지배층이 국가를 통해서 그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국가를 ‘합리적인 조절자’로 생각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음의 극치인 셈이다. 계급국가는 합리적이지 않으며 합리적일 수도 없다. 예컨대 지금의 남한처럼 모국어 이해마저도 잘 안 되는 서너 살짜리의 유아들까지 혀 수술을 받아가면서 ‘영어 유치원’에서 ‘원어민’에게서 영어를 배워야 할 정도로 전국적인 ‘영어 광풍’을 일으키는 것은 합리성이 아니고 그 반대다. 영어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 다수가 영어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그저 다수에 대한 가혹 행위이자 엄청난 규모의 낭비일 뿐이다. 그러나 영어 능력을 그 주된 문화자본으로 삼고 있는 남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서 ‘영어 광풍’은 너무나 필요하다. 그러한 분위기에서야 영어를 무기로 삼는 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합리화하고 세습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영어 마을’을 대대적으로 짓는 등 ‘영어 광풍’을 열심히 부추기고 있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과연 ‘중립적’이고 ‘합리적’인가?
국가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집행기구’인 만큼 국가의 폭력도 철저하게 계급적이다. 국가폭력의 계급성은 여러 차원에서 고찰해볼 수 있다. 예컨대 징병제 상비군이 체제에 복종할 줄 아는 유순한 노동자를 양성하는가 하면, 전시 상황에서는 대다수가 중산계층 출신인 장교들의 생존율이 하층민 출신의 졸병들보다 훨씬 높다. 외국 노동자에 대한 극우파 테러리스트의 폭력이나 기업주의 폭력 등에 경찰은 ‘솜방망이 대응’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급진 운동이나 노동운동 등 조금이라도 ‘반체제적’ 냄새가 나는 운동에 대해서는 툭하면 탄압적 태도로 맞선다. 노동자 파업에 초강경 대응하는 남한 경찰은, 의사나 약사 등 중산층의 집단적인 의사표현에는 절대로 폭력적 대응을 하지 않는다. 사실, 국가폭력의 현장에서야말로 계급 구별의 선이 확연히 드러난다. 계급 관계라는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진정한 현실은, 국가가 폭력 내지 살인을 하는 ‘비정상적인’ 위기 상황에서 노골화되고 만다. 그러한 입장에서 보면 국가적 살인에 대한 연구는 궁극적으로 사회의 계급적 성격, 계급 사이의 역학 관계에 대한 연구다.
(머리말,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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