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_ 서울의 시위자들
아프니까 점령이다!
“빚이 2천만 원이에요. 1년 더 다니면 3천만 원이 되는데, 이 돈을 내고 왜 대학을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서강대 학생
“하숙집 방값을 못 내서 빚이 500만 원이에요. 학자금 빚도 1,500만 원 있어요. 3분의 1은 장학금을 받는데도 이 정도예요.”- 성균관대 학생
이들의 고민 앞에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이들은 소위 명문대생이다. 그러나 졸업을 해서 높은 연봉을 받게 되면 빚은 금방 갚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위로할 수도 없었다. 한국에서의 20대 고용률은 60%가 채 안 된다. 10명 중 4명은 실업 상태란 뜻이다. 이들에게 약속된 미래 같은 것은 없다는 뜻이다. 대기업 취업에 성공해서 근사한 연봉을 받지 않는 한, 이 빚을 갚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대기업 취업이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설사 대기업에 취직한다고 하더라도,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에서처럼 언제든지 정리해고 당할 수 있고, 50대가 되면 명예퇴직의 압력을 받게 된다. 중소기업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재벌은 중소기업의 아이디어를 돈의 힘으로 가져가거나, 불공정한 하청계약을 무기로 중소기업의 살길을 막아버린다. 재벌이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만든 유령의 하청기업은 비정규직 형태로 노동자들을 고용한다. 대기업만 고집하지 말라는 말 앞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이유다. 그러면 어디 나가서 장사라도 하라고? 골목시장마저 이마트, 홈플러스 등으로 대표되는 재벌의 유통업체가 장악하고 있는 마당이다. 20년 역사에, 수많은 소비자에게 사랑받는, 그 동네의 터줏대감 같던 빵집마저 대기업의 공세에 문을 닫는 지경이다.
그러니 머리 좀 좋다는 학생이라면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겠다고 고시나 공무원 시험공부에 매달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한편에선, 삼성의 이재용처럼 재벌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대물림 받는다. 심지어 이를 위해 아버지 이건희는 아무 부끄러움 없이 온갖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다. 사법 권력은 공범으로 나서고, 거대 언론은 입을 다문다.
한국의 20대는 이러한 고통을 사회적으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고통이 크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래서 아마도 그 어떤 나라의 청년들보다 절박히 노력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 절박함 탓에 고통을 소리 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무한경쟁에 떠밀려 고통을 말할 틈조차 없는 이들에겐 좌절과 불안만이 떠돈다. 한마디로 답이 없는 사회다.
‘닥치고 정치’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저항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졸업하기도 전에 빚더미로 등이 휘는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닥치고 정치’가 왜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사회에 나가기 전부터 빚을 걱정하는 그들에게, 끊임없는 경쟁에 시달리며 꿈다운 꿈조차 꿀 수 없는 그들에게 정치란 배부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물론 저항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막무가내 개발에 맞서 투쟁을 하다가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숨진 용산참사가 벌어졌고, 재능교육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500일이 넘게 투쟁했지만, 사회는 그야말로 닥치고 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77일간의 공장점거 투쟁을 벌였지만, 돌아온 대답은 경찰의 잔인한 진압이었다.
이 모든 문제가 사회가 1대 99의 구조로 전락하면서 발생한 문제다. 1%에 의한 수탈이요, 1%와의 계급투쟁이다. 필수라는 대학 교육을 위해 빚을 내고, 전셋돈 올려줄 걱정에서 해방되기 위해 빚을 내야 하는 게 99%의 삶이다. 여기에 노동 시장의 유연화라는 구호 아래 비정규직은 늘어가고,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몫은 점점 줄어들고, 해고도 그만큼 자유로워졌다. 평생 빚을 갚고자, 해고되지 않고자, 전전긍긍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정치와 저항은 어려운 일이다.
Occupy 월스트리트, Occupy 여의도
이런 와중에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소식을 들었다. 이 운동은 가해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지목했고, 월스트리트라는 공간을 점령함으로써 숨어 있던 ‘금융자본’을 우리 눈앞으로 체포해왔다. 그것은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난 지 꼭 10년이 지난 2011년 9월의 일이었다. 9.11 테러가 2000년대의 10년을 규정했다면, 월스트리트 시위는 앞으로의 10년을 규정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우리는 몹시 흥분했고, 1%의 탐욕스러운 수탈이 한국의 청년들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 함께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망설이지 않았고, 2011년 12월 10일 Occupy국제공동행동의 날에 맞추어‘아프니까 점령이다. Occupy 여의도’의 이름으로 한국증권거래소 앞을 점령했다.
한국에서의 점령운동에도 나름의 작은 역사가 있다. 2008년 촛불부터, 쌍용자동차의 공장 점거, 월스트리트 시위대에 연대의 메시지를 보낸 김진숙 민주노총지도위원의 85호 크레인 점령이 있었다. 점령은 가해자를 구체적으로 세상에 드러내고, 그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수평적으로 끌어모으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점령의 장소에서 우리는 1%가 장악한 세계를 벗어나 우리 99%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금융자본주의의 심장을 점령한다는 것은 기존 세계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의 태아가 자랄 수 있다.
그들의 이야기, 곧 우리의 이야기
그래서일까? 월스트리트 시위대가 직접 쓴 『점령하라』는 우리의 저항과 닮아 있었다. 월스트리트 시위대를 위해 피자를 주문해주는 미국의 트위터리언들은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와 피자를 전해준 경기도 구로의 시민과 닮았다. 주코티 공원에 텐트와 플래카드를 설치하지 못하게 막아서고, 행진하는 시위대를 연행하는 미국의 경찰은 네 차례에 걸쳐 텐트를 철거하고 비닐조차 덮지 못하게 막아섰던 한국의 구청, 경찰과 닮았다. 미국 대학생들의 학자금 대출 탕감 요구는 여의도를 점령한 학생들의 등록금 폐지와 학자금 대출 탕감 요구와 닮았다. 월스트리트 시위를 지지하는 미국 노동자와 학생들이 연대를 표명했던 것처럼, 해고에 맞서 싸우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재능교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함께 여의도 점령지에서 연대 시위를 벌였다. 1%가 국경을 넘나들며 99%를 수탈하듯이, 우리 99%도 국경을 넘어 같은 고통에 맞서 싸우며 연대하고 있다.
그들이 어째서 싸우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싸워왔는지 알기 위해, 언론이나 지식인의 입을 쳐다보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들은 1%에 맞서 싸우는 그 정신 그대로, 이 책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99%의 입으로 직접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여의도를 점령하는 우리, 한국에서 팍팍한 삶을 전투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다.
마침 2012년 봄에는 미국의 대선과 한국의 총선이 같이 있다. 그래서 2012년 정치를 점령하자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투표가 점령의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선거만을 점령한다면, 우리의 점령은 투표함을 개봉하는 순간 끝나버린다. 우리가 점령해야 할 것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1%만의 고장 난 자본주의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민주주의이며 진정한 99%의 정치다. 우리는 전 세계의 99%다.
2012년 2월
서울에서 점령운동을 펼치는 ‘대학생사람연대’ 소속 시위자가
연대의 마음으로 씀
머리말
이 책은 월스트리트 점령운동(Occupy Wall Street)이 시작된 후 처음 몇 달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2011년 9월 17일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부터 책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총 60여 명이 작업에 참여했다. 학생, 교수, 작가, 예술가, 노동자, 전문직 종사자, 여자, 남자, 유색인, 백인, 청년 및 장년 등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사람이 조사와 글쓰기, 삽화, 편집에 참여했다. 이 책을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공식적인 기록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책을 만든 대부분의 사람이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또 모두 점령운동의 지지자라는 것은 분명히 밝혀둔다.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 대한 책을 쓰자는 아이디어는 월스트리트 60번지에서 열린 교육 활동그룹 회의에서 처음 나왔다. 많은 사람이 책 출간 계획에 관심을 보였지만 경계를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이른 기획이라고 느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책을 기획한 사람들이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과 같은 수평적인 운동에서 공식적인 대표성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을뿐더러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밝혔음에도, 책이 점령운동의 “공식 성명서”로 소개되거나 받아들여질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결국 교육 활동그룹의 다음 회의에서는 출판에 반대하는 쪽으로 투표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책 출간을 지지한 사람들은 따로 모임을 만들어 독자적인 모임을 갖기로 했다. 하지만 독자적인 모임 내에서도 책의 지향점에 대해 서로 다른 목소리가 드러났다. 책이 점령운동의 다양한 목소리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점령운동이 초기에 거둔 성공과 실패에 대한 분석이어야 한다, 미래의 점령운동에 지침이 되는 안내서여야 한다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점령운동 스스로 메시지를 드러내도록 책을 써야 한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점령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과 수십 차례가 넘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우리가 이 책을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인사이드 스토리’라고 부르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과 그 밖의 다른 관심 있는 사람들을 월스트리트 60번지에서 열린 편집 회의에 초청했고, 참석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환영받았다.
책을 만드는 동안 우리는 손 신호와 같이 점령운동에서 사용해온 의사결정 방식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점령운동이 제시한 모델을 언제나 고수할 수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임도 월스트리트 점령운동과 마찬가지로 아직 성장하는 중인 불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직접 민주주의의 원칙, 합의에 따른 의사결정, 그리고 투명성이라는 기본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했다는 것만은 말해두고 싶다.
최종 원고를 넘긴 2011년 12월 초,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미래는 여러 면에서 여전히 불투명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99%다”라는 구호로 시작한 월스트리트 시위가 50년 전에 있었던 민권운동 이래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진보운동의 씨앗을 심었다는 점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 역사적인 운동의 시작을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다.
시작
“타흐리르 광장을 재현하고 싶은가?
- 애드버스터(Adbusters)의 촉구, 2011년 7월 13일
월스트리트 시위는 작년에 거의 모든 대륙에서 벌어졌던 전(全) 지구적 저항 운동의 하나로 일어난 점령운동이다. 물론 나라마다 정부의 성격이 다르고 요구 사항도 다르지만, 모두 족쇄 풀린 글로벌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다는 데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2011년 초부터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수많은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튀니지의 반정부 시위는 2010년 12월 17일, 채소 노점상이었던 스물여섯 살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Mohammed Bouazizi)가 경찰이 돈을 뜯어내려 자꾸 자신의 물건을 강탈하고, 여덟 명이나 되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되자, 이에 좌절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분신한 사건이 일어나며 시작되었다. 부아지지의 사진과 동영상이 페이스북을 통해 퍼졌고 이에 분노한 튀니지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와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Ben Ali) 대통령이 축출되었다.
튀니지의 뒤를 이어, 알제리, 레바논, 요르단, 모리타니, 오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 이집트의 첫 거리시위는 1월 25일 시작되었는데, 1월 31일에 벌써 25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겨울 날씨치고 따뜻했던 덕분에 광장에는 만 개가 넘는 텐트가 자리를 잡았고, 말뚝에 비닐이나 천을 덮은 천막도 세워졌다. 광장에는 나이, 사상, 배경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또 많은 사람이 ‘텐트도시’가 되어버린 타흐리르 광장을 찾아와 시위대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다양한 성격의 위원회도 구성되었는데, 치안 위원회, 쓰레기 처리 위원회, 의료봉사 위원회 등이 만들어졌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시위자들은‘화가의 코너’를 만들어 플래카드와 배너를 제작해서 야외에 전시했고, 시인들은 임시 무대에서 시 낭송회를 열었다. 야외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다. 다양한 위원회와 야외 행사는 후에 유럽과 미국에서 있을 점령운동의 좋은 모범이 되었다.
2월 14일, 위스콘신 주 매디슨에 있는 주의회청사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이를 시작으로 미국에서도 거대한 저항의 물결이 일었다. 시위는 곧 근처의 대학교와 주변 도시인 밀워키, 그린베이, 오하이오 주 콜롬버스로 번져갔다. 위스콘신 주의회청사 시위는 공무원의 단체 교섭권을 제한하는 법에 반대해서 일어난 것인데, 몇몇 시위자는 이집트의 국기를 흔들었다. 2월 20일 이집트의 노조 지도자 카말 아바스(Kamal Abbas)는 위스콘신의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카말 아바스는 “여러분이 우리를 지지했던 것처럼 우리도 여러분을 지지합니다.”라고 동영상에서 밝혔다.
여름이 되자 사하라 사막 이남, 남미, 아시아, 유럽에까지 시위가 퍼져나갔다. 이 모든 시위가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 참여할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언론 활동그룹의 일원인 세니아(Senia)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칠레,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났던 시위가 라틴계 사람들에게 “매우 깊은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11년에 일어난 여러 시위 중에서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을 조직하고 전략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스페인의 “분노하는 사람들(Los Indignados)”이었다.
스페인에서 일어난 5월 15일(May 15) 운동, 다른 말로 15M 운동은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조직되었다. 60여 개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시위자들은 각 도시의 대표적인 광장에 야영캠프를 세웠다. 그래서 광장을 점거한 사람들을 “야영자들(Las Acampada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스페인의 공영방송사는 650만에서 800만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운동에 가담해, 복지예산 축소, 20%까지 치솟은 실업률, 기업의 탐욕으로 생긴 폐해에 반대하여 시위를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총회와 활동그룹을 만들고 합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했다. 이후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은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자들보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조직을 더 많이 따르게 되었다. 윌리 오스터웨일(Willie Osterweil)은 뉴욕 총회와 월스트리트 점령운동 이전에 있었던 블룸버그마을(Bloombergville) 운동에 참여했고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6월에 스페인의 점령시위 현장을 방문했는데,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점령캠프는 정보교환, 시위, 혁명 활동의 중심부 역할을 했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공동주방을 만들어 음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환경, 군사, 여성인권 등의 사안을 다루는 코너를 만들어 회의와 토론회를 열었다. 나는 그곳에서 함께 일하면서 자원을 공유하고 함께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목격했다. 그들은 점령캠프를 혁명 구호들이 적힌 플래카드로 가득 채웠고 어디를 가든지 헝겊 배너, 구호가 적힌 종이 상자, 낙서 등을 잊지 않고 남겨두었다.”
윌리에게 스페인 시위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새로운 절실함을 느꼈다. 역사적인 순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머리로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깨달았다.”라고 썼다. 이어서 그는 “점령캠프는 정말 마법 같은 분위기였지만, 완전히 엉성하게 임시변통으로 만들어진 형세였다. 테이프, 줄, 방수포, 천, 천막을 받치는 기둥, 테이프로 고정된 대나무 막대 세 개를 덮은 비닐이 캠프를 이루고 있었다. 태풍이 분다면 모든 게 한순간에 날아가버릴 터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만약에 세계 곳곳에서 아주 많은 사람이 가세한다면, 이 캠프가 오히려 태풍이 되어 모든 것을 날려버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썼다.
윌리는 스페인의 점령캠프에 있는 동안 ‘분노하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고, 뉴욕에서 다른 운동가들과 점령운동을 계획할 때 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었다. “스페인에서 얻은 경험은 블룸버그마을 운동, 뉴욕 총회 그리고 궁극적으로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을 계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윌리는 설명했다. 윌리와 ‘분노하는 사람들’의 교류는 서로 다른 대륙에서 시위를 계획하는 이들이 어떻게 서로 소통하고 생각과 전략을 나누고 협력했는지 잘 보여준다.
전 세계에서 일어난 시위의 또 다른 공통점은 시위대가 그 지역의 상징적인 장소를 점령해 그곳에 자신들이 살고 싶어하는 모습의 작은 사회를 만들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바로 모든 구성원의 의식주를 함께 책임지는 사회였다. 점령캠프는 시위자들에게 공동체 의식과 가족애를 느끼게 해주는 장소였으며, 서로 의견을 나누고 언론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몇몇 나라에서 부당하게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검열하긴 했지만, 많은 시위자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운동을 잘 조직하여 빠른 시간에 대규모의 사람을 모으는 것이 가능했다. 이는 2011년 전 세계적으로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이면서, 나아가 사람들이 비(非)계급적 구조와 ‘수평적’ 의사 결정 방식을 선호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구조와 방식은 전통적인 지배구조가 아니라 온라인 소셜네트워크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윌리는 스페인에서 돌아와 ‘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뉴욕 시민들의 모임(New Yorkers Against Budget Cuts, 이하 예산삭감반대모임)’과 국제사회주의기구(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 등의 운동단체와 함께 블룸버그 시장이 입안한 예산 삭감안을 반대하는 점거시위를 조직했다. 물론 스페인의 점거에 비할 수 없는, 훨씬 소박한 규모의 시위였다. 3주 동안 진행된 이 점거운동은 블룸버그 시장의 이름을 따 블룸버그마을 운동이라고 불렸다. 블룸버그 시장의 예산안이 원안대로 통과되면 4천 명의 공립학교 교사들이 해고되고 20개의 소방서가 폐쇄될 터였다. 6월 16일부터 약 50여 명의 시위자가 시청 근처의 브로드웨이와 파크 스트리트의 모퉁이를 점거했다. 6월이라 날씨가 따뜻해 텐트까지는 필요 없었고, 침낭이면 밤을 보내기에 충분했다. 지역 공무원 노조와 교원 노조에서 음식을 제공했고, 조그만 도서관이 만들어졌으며, 뉴욕시립대학교 교수들이 토론회를 진행했다. 점거는 시의회에서 수정안이 통과된 6월 29일 이후에도 며칠 동안 더 지속되었다. 블룸버그마을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중에 뉴욕 총회와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한결같이 점거와 회의를 함께하는 과정에서 강한 공동체 의식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블룸버그마을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 매우 강한 동지 관계가 생겼습니다. 야영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잠을 자지 않고 서로를 보살폈습니다.”라고 뉴욕시립대 바룩대학의 교수이며 노동운동가인 예순여덟의 재키 디살보(Jackie DiSalvo)가 말했다. 블룸버그마을 운동 둘째 주에 합류한 스물일곱 살 제즈 볼드(Jez Bold)는 여태껏 정치 운동이나 시위를 피해왔었는데, “정치 활동을 하면서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아이디어가 놀라웠습니다.”라고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제즈는 덧붙여서 시위대에 연대의식이 형성되는 것은 전형적이지 않은 시위의 형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통적인 시위나 데모와는 전혀 다릅니다. 전통적 의미의 집회와도 다르죠. 모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밤을 새우기로 결정했고 밤을 새우는 데 필요한 준비를 했어요.” 제즈는 블룸버그마을 시위대가 자발적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간이 도서관을 만들고 토론회를 기획했다고 전한다. 심지어 블룸버그마을 오페라도 직접 기획했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이 점령지를 앞마당 같은 분위기로 만들었다고 제즈는 말한다. “뉴욕에 있는 아파트에는 어디나 현관 계단참에 앞마당 같은 공간이 있잖아요. 그런 공간에서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나와 현관 계단참에 모여 이웃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어울리는 것이죠.”
제즈는 ‘블룸버그마을 13인’의 구속도 목격했다. 열세 명의 시위자가 시의회의 예산안 투표를 막고자 서로의 몸을 묶고 시청 로비에서 시위를 벌였다. “열세 명이 둥그렇게 앉아 서로의 팔을 케이블 타이로 묶고 시위 중이었습니다. 경찰이 들어와서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거부했어요. 경찰이 케이블 타이를 끊으면 새로 타이를 꺼내 다시 묶었죠. 결국 경찰이 한 사람씩 뒷문으로 끌어냈습니다.” 열세 명 전부 구속되었고 다음 날 시의회는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대규모 예산 삭감안이 통과된 것을 알고 모두 실망했지만, 시의회가 블룸버그 시장의 예산안을 수정해서 해고 계획 대부분과 소방서 폐쇄 계획을 백지화했다는 사실을 위안 삼았다.
…
예산삭감반대모임이 블룸버그마을 운동을 마무리 지을 무렵, 밴쿠버에 있는 친환경, 반(反)소비 잡지인 애드버스터가 7월 13일 사람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글을 실었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타흐리르 광장을 재현하고 싶은가?
9월 17일 맨해튼 남쪽으로 달려가서 텐트를 치고 키친을
만들고 평화의 바리케이드를 쳐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
애드버스터의 웹사이트 하단에 있는 블로그 난에 이집트의 타흐리르 광장과 스페인의 점령투쟁을 따르라고 촉구하는 글이 실렸다. 애드버스터가 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상상했던 것은 2만 명의 사람들이 월스트리트에 모여 한두 달 동안 한 가지의 명확한 요구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요구 사항이 분명하지 않다고 맹비난을 받은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이 단 한 가지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자는 제안으로 촉발되었으니 재밌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회의원들을 좌지우지하는 돈의 힘을 막고자, 대통령특별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요구한다.” 이것이 애드버스터가 제안한 한 가지의 명확한 요구였다.
애드버스터는 월스트리트 점령이라는 운동의 이름을 만들고 임무와 날짜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집트와 스페인의 예를 따르라는 조언도 해주었다. 하지만 애드버스터의 참여는 거기까지였다. 윌리 오스터웨일에 따르면,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 대한 애드버스터의 실질적인 지원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애드버스터는 근사한 두어 개의 포스터 이미지와 아이디어만을 제공했을 뿐, 일은 여기 뉴욕에 있는 사람들이 다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재키 디살보는 “예산삭감반대모임 사람들은 애드버스터의 제안에 처음에는 매우 회의적이었어요. 하지만 일단 관심을 두고 추이를 살피기로 했지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블룸버그마을 운동에서는 총회가 중앙조직이고 의사 결정 기관이므로, 예산삭감반대모임은 약식 총회를 열어 분위기를 살피기로 했다. 첫 총회는 8월 2일 볼링그린 공원의 끝에 있는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황소상 앞에서 열렸다. 하지만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총회에 참여한 경험이 없어서 회의가 집회로 변질해버렸다. 심지어 발표가 끝나자 월스트리트로 행진하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총회에 익숙한 사람들은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고, 운동가로 활동하는 조지아 상그리(Georgia Sangri)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것은 총회가 아니에요.”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황소 동상의 반대쪽으로 가서 총회의 형식에 따라 토론하자고 제안했다. 첫 약식 총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애드버스터의 제안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대통령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라는 요구는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맨해튼 남쪽의 배터리 공원 내에 있는 아일랜드기아 기념관(Irish Hunger Memorial)에서 다시 모임을 갖기로 하고 첫 약식 총회를 끝냈다. 일주일 후 8월 9일에 열린 두 번째 총회에서는 민주적으로 진행되는 총회의 방식을 집중적으로 교육했고, 세 번째부터는 매주 한 번 맨해튼 알파벳 시티의 톰킨스 스퀘어 공원에서 총회가 열렸다.
8월과 9월 초에 열린 총회의 주요 안건은 9월 17일로 잡힌 대규모 반(反)월스트리트 시위를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이를 대비하여 음식위원회(보급품을 위해 1천 달러를 모금했다), 학생위원회, 홍보위원회, 인터넷 활동그룹, 문화예술위원회, 전술위원회 등의 새로운 조직도 구성했다. 몇몇 시위 조직자들은 시위의 효과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지만, 어쨌든 시위의 규모가 커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드버스터가 제안한 9월 17일 시위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알려지면서, “처음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조차 누군가 시위를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라고 재키는 말했다. 초창기 총회에서도 “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월스트리트로 가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나왔고 이러한 우려를 최소화하고자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하지만 총회가 시위의 안전에만 신경 쓴 것은 아니었다. 만약 9월 17일 시위가 실패로 끝나면, 여름 동안 블룸버그마을 운동을 통해 생겨났던 동력이 힘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홍보위원회는 9월 17일 시위가 실패하더라도 총회를 지속적으로 끌고 갈 수 있도록 사람을 모으는 일을 담당했다. 그리고 문화예술위원회는 문화예술 행사를 통해 정치를 변화시키고자 9월 17일에 맞춰 월스트리트에서 ‘뉴욕흥겨움거래소’New York Fun Exchange, 뉴욕증권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를 비틀어 이름 붙인 것이다. 축제를 개최하기로 했다.
디데이가 다가오면서 전술위원회는 점점 할 일이 많아졌다. 홍보위원회는 사람을 모으고, 문화예술위원회는 상상력을 발휘하고, 전술위원회는 9월 17일 총회의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9월 초순에는 점령 장소로 공원이나 월스트리트가 가능한지 예행연습을 시행했다. 톰킨스 스퀘어 공원의 경우, 저녁에 문을 닫고 나면 경찰들이 남은 사람들을 쫓아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월스트리트의 경우, 문화예술위원회가 9월 1일에 점거를 시도했는데, 경찰이 활동가 12명을 에워싸고 그중 9명을 연행해버렸다. 일련의 시행연습을 통해 9월 17일 시위에서 “경찰이 매우 강력하게 시위대를 진압할 것”임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총회를 한 장소에서 한 번만 갖고, 주말 내내(9월 17일은 토요일이었다) 계속 장소를 옮겨가며 총회를 여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전술위원회는 남쪽 맨해튼에 있는, 최소한 2천 명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원을 샅샅이 찾았다. 시 소유 공원뿐 아니라 민간 소유의 공원까지 전부 뒤졌다. 상징적인 이유에서 월스트리트와 멀지 않아야 했고, 경찰이 진압을 시작하면 도망갈 수 있도록 출구가 많은 곳이어야 했다.
위의 조건을 충족하는 후보지 여덟 곳이 정해졌고, 그중 체이스 맨해튼 플라자가 가장 유력했다. 그런데 당일 정오경 경찰이 체이스 맨해튼 플라자를 물샐틈없이 바리케이드로 봉쇄해서 총회를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술위원회는 그때까지 비밀에 부쳤던 후보지를 신속하게 답사했고 주코티 공원에서 그날 총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시위 기획자들은 오후 2시 30분에 “믿을 만한 동료 기획자들”에게 집결 장소 후보지의 위치가 그려진 전단을 나눠주었고, 3시에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첫 번째 공식 총회가 주코티 공원에서 개최되었다.
(추천사, 머리말,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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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시위자(Writers for 99%)
2011년 타임(TIME)지는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를 선정했다. 중동을 휩쓴 시위가 유럽과 미국 등으로 확산하며 국제 정치를 다시 짰다며, 시위에 몸담은 사람들, 바로 ‘시위자’들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선정의 이유라고 밝혔다. 이 책의 지은이는 바로 그 시위자들이다.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을 이끄는 실무 그룹에서 운동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쓰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60여 명의 공동작업을 거쳐 이 책이 탄생했다. 학생, 교수, 작가, 예술가, 노동자, 전문직 종사자, 여자, 남자, 유색인, 백인, 젊은이, 노인 등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사람들이 조사, 저술, 삽화, 편집에 참여했다. 필진 모두는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이며, 자신들을 ‘99%를 위해 글 쓰는 사람들(Writers for 99%)’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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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임명주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하고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한 후 주한 프랑스 대사관 상무관실에서 근무했으며, 프랑스 농식품진흥공사(SOPEXA)의 한국 대표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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