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불평등은 사회를 좀먹는다
사람들이 흔히 자신의 업적을 과대평가하는 것처럼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러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마술 같은 방법이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을 제시하려고 이 책을 쓰지 않았다. 이 책을 쓰는 데, 저자 두 사람의 연구 기간을 합해 50년이라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 이 연구는 사회 계층에 따라 ‘건강 불평등’이 발생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왜 사회 계층이 낮을수록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일까? 왜 빈곤층이 중산층보다, 중산층이 상류층보다 건강하지 못한 걸까? 우리의 연구는 이런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을 공부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로 전염병이나 감염증의 원인과 변화를 연구하는] 역학疫學이라는 학문적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질병이 발생하는 원인을 추적하는 데 이 역학적 방법을 사용했다.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사람들이 특정 질병을 더 자주 앓는 이유, 혹은 다른 계층이나 집단이 그 질병을 덜 앓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또 특정 질병이 점점 더 널리 퍼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도 역학적 방법을 사용했다. 역학적 방법은 건강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쓸 수 있다.
의학에서는 어떤 처방이 듣고, 어떤 처방이 듣지 않는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이를 토대로 처방을 내리는 최근 경향을 ‘근거 중심 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이라고 부른다. 이를 본떠 이 책을 ‘근거 중심 정치학Evidence-based Politics’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대학과 연구 기관이 제시한 연구 결과를 받아들였다. 재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객관적이고 관찰 가능한 결과를 도출한 뒤, 전문가의 감수를 거쳐 권위 있는 과학 저널에 발표된 연구 결과들이었다.
그렇다고 이 연구에 추측이 아예 없다는 말은 아니다. 연구 결과에는 늘 연구자의 해석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해석이 아닌 특정 해석을 받아들이는 데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이후의 연구 결과에 따라 처음의 이론과 추측은 수정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밟아 온 길로 독자들을 인도할 것이다. 핵심 증거만을 표지판으로 삼을 것이며, 막다른 골목이나 잘못된 우회로는 배제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택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모든 현대인의 삶의 질을 한꺼번에 더 나아지게 할 방법이 있다는 우리의 믿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최종 판단은 역시 독자들의 몫이다. 우리는 [이 판단을 돕기 위해] 우리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논거를 제시할 것이다.
사람들은 불평등이 사회를 좀먹는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 사이의 불평등 차이는 눈에 띌 만큼 커 보이지 않는다. 저자 중 한 명은 애초에 선진국별 불평등 효과를 연구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연구를 이끈 동기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드러난 지금, 거의 무의미해 보인다. 많은 발견은 치밀한 판단에 따라 드러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운에 따르기도 한다.
우리가 이제야 이런 내용을 발표하는 까닭은 근거 자료들이 최근에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국가별 소득과 소득 분포, 그리고 국가별 건강과 사회문제를 보여 주는 자료는 최근 들어서야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이제 우리 아닌 누구라도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자료 덕분에 다른 연구자들 역시 각 사회가 어떻게 다른지 분석할 수 있게 됐고, 한 가지 요인이 다른 요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알게 됐으며, 이론을 좀 더 엄밀하게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사람들은 흔히, 새로운 발견은 사회과학보다 자연과학이 더 빠르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자연 현상 이론은 사회 현상 이론보다 덜 논쟁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역사도 조금만 살펴보면 수많은 개인적 투쟁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자연과학 논쟁은 이론에 대한 작은 의견 차이에서부터 시작해 평생 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통 이런 자연과학 논쟁에는 전문가만 참여한다. 일반인이 입자물리학에 대해 자신만의 확고한 견해를 갖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일반인일지라도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회에 대한 이론은 부분적으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론이다. 그러니 그 이론을 실제 우리 자신에 대한 자각이나 사회의 자의식으로 여기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자연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면서 세포나 원자를 설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회과학자들은 수많은 개인들의 의견과 이해관계에 맞서야 한다.
1847년 헝가리의 산부인과 의사 제멜바이스Ignaz Semmelweiss는 의사들이 산모의 출산을 돕기 전에 손만 씻어도 산욕열産褥熱로 인한 사망률이 극적으로 낮아질 거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제멜바이스는 자기 주변의 동료 의사들부터 설득해야 했다. 제멜바이스의 진정한 싸움은 최초의 연구와 발견이 아니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 때문에 벌어졌다. 제멜바이스는 동료 의사들의 놀림감이 되었고, 결국 정신병에 걸려 자살하고 말았다. 당시 의사들 대부분은 제멜바이스의 발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스퇴르Louis Pasteur와 리스터Joseph Lister가 [전염병이 세균이나 다른 미생물 때문에 생긴다는] 미생물 병인론germ theory of disease을 세워 위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우고 나서야 의사들은 생각을 바꿨다.
우리는 비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지구온난화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사회가 물질적 성공과는 별개로 사회적 실패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부담을 안고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우려를 더하려는 듯 경기 침체와 고실업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한다.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침내 세상을 더 낫게 만들 기회를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초판에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인 호평이 쏟아졌다. 이는 우리 사이에 변화를 향한 폭넓은 욕구와 우리의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하려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는 증보판(2010년)을 내면서 초판을 조금 손보았다. 초판에서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자세한 통계 출처, 방법, 결과 같은 자료를 원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뺐지만 증보판에는 그 자료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추가했다. 인과관계를 설명하는데 상당 부분을 할애한 13장은 새로 구성하고 보완했다. 또한 무엇이 사회를 과거보다 훨씬 더, 혹은 덜 평등하게 하였는가에 대한 논의를 확대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정치적 태도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정책이 올바른 기술적 해법을 찾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라고 본다. 사회를 평등하게 하는 방법은 수백 가지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여러 정책 중 하나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기발한 해결책보다는 더 큰 평등의 혜택을 인식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우리가 옳다면 여기에 제시된 이론과 증거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상당히 개선시킬 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을 바꿀 수 없다면 우리가 여기에 제시한 이론들은 쓸모없을 것이다. 정치적 변화를 가져올 만큼 사람들을 움직이려면 우리가 이 책에서 제시한 방법이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퀄러티 트러스트The Equality Trust〉(378쪽 참조)라는 비영리 재단을 설립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일종의 증언들을 널리 알리고 이 [고난의] 숲에서 모두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1장
경제성장이 정답이던 시대는 끝났다
인류는 물질적·기술적 진보의 정점에 서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근심에 싸여 있고, 쉽게 우울해하고,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볼지 근심하고, 친구와의 관계를 확신할 수 없고, 공동체에 참여하지 못한 채 소비만을 일삼는다. 참으로 이상하다. 우리는 편안한 사회적 관계와 정서적 만족 대신 과식이나 과소비에서 위안을 찾는다. 그리고 지나친 음주, 향정신성 약물 및 불법 약물의 유혹에 빠진다.
인류 역사에서 전례 없는 부와 풍요를 이룩했는데도 왜 이렇게 정서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일까? 우리는 때때로 친구와 함께 보내는 즐거운 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지만 현실은 그것조차 어렵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지속적인 전쟁 상태에 있는 것처럼 말한다. 스트레스와 정서적 소모에 맞서 정신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전투 말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의 삶은 물질적인 호화로움과 사치로 가득 차서 지구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
미국의 〈하우드 연구소Harwood Institute for Public Innovation〉가 〈머크 재단Merck Family Founcation〉의 위탁을 받아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물질주의” 때문에 자신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균형을 찾아서Yearning for Balance』라는 보고서는 미국인을 대상으로 전국적인 설문 조사를 벌였는데, 미국인들이 “부와 물질적 소득에 대해 매우 이중적인 감정”을 동시에 보이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가 ‘탐욕과 과잉에서 가치와 공동체, 그리고 가족을 중시하는 삶으로 가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다른 미국인들이 이런 소중한 것들을 공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더 개인화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해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고립감을 느끼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보고서는 정작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이러한 쟁점을 토론하면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기뻐했다’고 적고 있다. 우리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타인과 유대하기보다는 사회적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고 홀로 비판하며 물질 소비에 탐닉한다. 동시에 이러한 문제는 순전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여 타인과의 관계에서 해법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정치가들은 더 이상 이런 쟁점을 다루지 않고 우리들에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비전과 영감을 불어넣어 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투표를 하면서도 사회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더 나은 사회를 생각하기보다 이미 주어진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으로,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분투할 뿐이다.
많은 선진국이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사회적으로는 실패하고 있다. 이 대조되는 두 현상은 중요한 이정표다. 삶의 질을 실제로 개선하고자 한다면 관심의 초점을 물질적인 지표와 경제성장에서 사회 전체의 심리적·사회적 복지로 옮겨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개인적인 치료나 처방을 이야기하는 데 그치기 십상이다. 정작 중요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고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패배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새롭고 강력한 비전을 만들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가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정치도 우리 모두의 삶도 바꿀 수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 투표 대상, 정치가에게 요구하는 내용까지 바꿀 힘이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사회 안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의 수준이 물질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줄 것이다. 소득 격차의 정도는 우리가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부모, 종교, 가치, 교육, 형벌 제도가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의 정도가 우리 모두의 심리적 복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증명할 것이다. 어떤 연구는 사랑으로 보살피는 존재가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기 위해 아이의 몸무게 변화를 조사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망률과 소득 분포를 통해 성인의 사회적 필요를 보여 주고 사회가 그 욕구를 어떻게 채워 줄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금융 위기는 2008년 말부터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영국 정치인들은 금융 위기 한참 전부터 공동체 해체나 반사회적 행동의 증가를 근거로 이 사회를 “붕괴된 사회broken society”라고 불렀다. 현재의 금융 위기로 우리는 붕괴된 경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가 무너진 원인은 때때로 가난한 사람 탓이라고 말한다. 경제가 무너진 원인은 대부분 부자 탓이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신뢰를 받아 온 금융기관 책임자들은 더 큰 보수와 보너스를 위해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고 얄팍한 투기 거품speculative bubble의 보호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허약한 경제를 만들었다. 붕괴된 사회와 붕괴된 경제 모두 불평등 증가에 원인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말하려는 진실이다.
경제성장이 가져다주지 못한 것들
경제성장이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수천년 동안 인류는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물질적 생활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기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기에는 물질이 풍부한 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유한 국가는 이제 배를 채우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따뜻한 곳에서 지내는 것을 더 이상 최우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선진국 시민들은 어떻게 더 먹을까가 아닌, 어떻게 덜 먹을까를 고민한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뚱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진보의 동력이던 경제성장은 많은 선진국에서 이미 그 임무를 마쳤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평안과 행복이 증대하던 시대도 끝났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회가 더 부유해질수록 스트레스와 우울증 및 각종 사회문제가 장기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선진국 국민들은 긴 역사의 여정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여행의 과정은 그림 1-1에서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저마다 다른 경제 발전 단계에 있는 국가들의 국민 총소득(GNI)과 기대 수명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 준다. 가난한 국가에서는 경제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기대 수명이 빠르게 증가하지만 중진국 수준에 다다르면 그 증가 속도가 감소한다. 삶의 질이 향상되고 국가들이 더 부유해지면 경제성장과 기대 수명 간의 상관관계는 약해진다. 결국 그 상관관계는 사라지고 우상향하던 곡선은 수평을 그리게 된다. 이는 선진국이 더 부유해진다고 해서 기대 수명이 더 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이런 현상은 선진 30여 개 국가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으며 들어맞는 사례는 그림 1-1의 맨 오른쪽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그림 1-1에서 곡선이 완만해지다가 결국 평평해지는 이유는 기대 수명의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주 풍요로운 국가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건강 상태는 크게 개선된다. 달라진 것은 건강 상태의 개선이 평균적인 삶의 질 향상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0년이 지날 때마다 선진국의 기대 수명은 2년에서 3년씩 증가한다. 이러한 현상은 경제성장과 관계없이 일어난다. 따라서 미국은 그리스나 뉴질랜드보다 거의 두 배나 더 부유하지만 그 나라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림 1-1의 곡선에서 벗어나기보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곡선 자체가 상향 이동한다. 같은 소득일 때라도 기대 수명은 더 늘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자료를 보면 국가들이 부유해질수록 평균적인 삶의 질이 건강에 공헌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든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건강과 장수가 중요하다고는 해도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또 있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건강의 관계가 평평해지듯, 경제성장과 행복의 관계도 그렇게 된다. 건강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느끼는 행복 역시 경제성장 초기에는 증가하지만 점차 수평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학자 리처드 레이어드Richard Layard가 행복에 관해 쓴 책에서 이미 이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각국의 행복 정도는 그 국가의 문화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어떤 사회에서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실패를 인정하는 게 되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치게 자기만족적이며 뻔뻔한 게 된다. 국가별 행복을 조사하는 데는 이러한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그림 1-2는 이른바 ‘행복 곡선’이 부유한 국가에서 기대 수명과 마찬가지로 평평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두 경우 모두 중요한 차이는 경제성장 초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가가 부유해질수록 그보다 훨씬 부유한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행복에 기여하는 비중은 줄어든다. 그림에서는 행복과 기대 수명이 모두 일인당 국민소득 약 2만 5천 달러에서 평평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몇몇 자료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소득 수준이 시간이 갈수록 높아질 거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부유한 국가들이 더 부유해지더라도 행복 수준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그림 1-2처럼 어느 한 시점에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한 결과만으로 내려진 결론은 아니다. 일본, 미국, 영국과 같은 국가에서는 충분히 오랜 기간 동안 행복이 변화하는 정도를 살펴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국가가 부유해질수록 행복이 증가하는지 여부를 관찰할 수 있었다. 관찰한 결과, 실질 소득이 두 배 증가한 경우에도 행복 수준은 증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적 사회보장 정도measure of economic welfare’나 ‘실질적인 진보 지수genuine progress indicator’처럼, 교통 정체나 환경오염 같은 비용을 제거한 뒤의 순혜택을 측정하는 지수를 사용하는 연구자들도 같은 유형을 발견했다.
건강이나 행복, 아니면 복지를 나타내는 다른 어떤 지수를 사용하더라도 같은 결과를 얻는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경제성장이 인간의 복지에 여전히, 아주 중요하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삶의 질이 개선될수록 기대 수명과 같은 객관적인 지수는 물론 행복과 같은 주관적인 지수도 증가했다. 그러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섬에 따라 소득의 추가 상승은 점점 덜 중요해진다.
이는 예측 가능한 사실이다. 점점 더 많이 가지게 될수록, 이미 가지고 있던 것에 빵이나 자동차를 더 추가한다 해도 인간의 복지는 그다지 증가하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 한 조각이 최고다. 그러나 배고픔이 해결된 뒤에 주어지는 더 많은 빵은 사람을 특별히 더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빵이 썩어 귀찮아질 뿐이다.
오랫동안 경제성장을 해 온 국가들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수확 체감’diminishing return, 데이비드 리카도가 주장한 것으로 일정 농지에서 작업하는 노동자 수가 증가할수록 일인당 수확량이 줄어든다는 이론하는 수준에 도달할 것이며 추가 소득이 건강, 행복, 복지에 미치는 영향은 더 줄어들 것이다. 이미 몇몇 선진국에서는 150여 년간 지속적으로 평균 수입이 증가해 왔으며 추가적인 부가 이전처럼 그리 큰 혜택을 가져오지 않는다.
사람들의 사망 원인이 점점 다양해지는 경향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국가가 부유해지면 가장 먼저 감소하는 것이 가난병이다. 전염성이 매우 큰 질병인 결핵, 콜레라, 홍역은 아주 가난한 나라에서는 여전히 널리 퍼져 있지만 사망 원인과는 거리가 멀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전염병이 사라져 가면서 퇴행성 심장 질환이나 암 같은 부자병들이 그 빈자리를 메꾸고 있다. 가난병은 주로 어린이가 걸리고 한창 나이에 생명을 앗아 가지만, 부자병들은 삶의 후반기에 일어난다.
그림 1-1과 그림 1-2에서 곡선이 평평해지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국가들이 물질적 삶의 질의 정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즉, 경제가 더 성장한다고 해도 그 성장이 가져다주는 혜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부자병이라고 불리던 것은 부유한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 되었다. 과거에 심장병, 발작, 비만 등은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심장병은 실업가의 질병으로 여겨졌고 뚱뚱하면 부자, 깡마르면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점점 더 많은 선진국에서 이러한 통념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부자들에게 흔하던 질병은 그 방향을 바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점점 퍼지기 시작했다.
지구온난화와 성장의 한계
부유한 국가들이 경제성장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혜택의 끝에 도달함과 동시에 인류는 지구온난화와 성장의 자연환경적 한계를 인식해야 했다. 기후변화와 해수면 상승을 막기 위해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사실은 현재의 소비 수준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특히 가난한 나라, 개발도상국의 삶의 질이 높아질수록 더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 책의 15장에서는 우리가 소개한 시각이 지구온난화 감소 정책과 어떻게 연계되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사회 내, 사회 간 소득 격차
우리는 인간의 실질적 삶의 질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새로운 해답을 찾아야 하는 첫 세대다. 경제성장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답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가장 강력한 실마리는 우리가 사회 내 소득 격차와 사회 간 소득격차에 매우 다르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4장에서부터 12장에 걸쳐 우리는 건강과 폭력, 정신 질환, 십대 출산, 교육 실패와 같은 사회문제를 다룰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회 내에서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 따라서 소득과 삶의 질이 올라가면 이러한 문제도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회를 비교해 보면 이러한 사회문제들이 한 사회의 평균 소득과 별 관계가 없거나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건강을 예로 들어 보자. 그림 1-1에서처럼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간의 기대 수명을 비교하지 않고 가장 부유한 국가만을 살펴보자. 그림 1-3은 부유한 국가만을 보여 준다. 몇몇 국가들은 기대 수명이 낮아도 다른 국가보다 두 배나 더 부유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국가 중 어디라도 그 사회 “내부”의 사망률은 소득과 매우 밀접하고도 체계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그림 1-4는 미국 내에서의 사망률과 소득 수준의 관계를 보여 준다. 그림은 해당 지역의 전형적인 가구 소득에 따라 우편번호를 분류해 소득별 주민들의 사망률을 나타낸 것이다. 그림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부유한 우편번호 지역에 사는데 낮은 사망률을, 왼편에 있는 가난한 지역 사람들은 높은 사망률을 보인다. 미국 자료를 이용했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거의 모든 사회에서 발견된다. 모든 사회에서 소득이 높을수록 사망률은 낮아진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님을 기억하라. 그림 1-4가 놀라운 것은 사회 내에서 건강을 나타내는 그래프의 기울기가 매우 정연하고 규칙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기울기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각 사회 안에서 건강과 행복은 사람들의 수입과 관련이 있다. 부유한 사람은 같은 사회에 속한 가난한 사람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다. 그러나 부유한 사회를 비교해 보면, 한 사회 사람들이 다른 사회 사람들보다 평균적으로 두 배 더 부유하다고 해도 건강과 행복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서로 다른 국가 간의 평균 수입이나 삶의 질 차이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같은 국가 내의 수입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는 모순 말이다.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는 부유한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수준을 실질 소득 수준이나 삶의 질이 아니라 사회 내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문제가 생긴다는 설명이다. 중요한 것은 평균 수준이 아니라 자기가 남들보다 나으냐 그렇지 못하냐는 데 있다. 즉, 사회 내 서열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두 번째 설명은 그림 1-4에서 볼 수 있는 건강의 사회적 기울기가 상대적 수입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건강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니라 건강한 사람으로부터 건강하지 않은 사람을 분리해 내는 사회 이동성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건강한 사람은 사회적 사다리의 위쪽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사다리의 아래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설명이다.
다음 장에서는 사회 내에서 소득 격차를 줄이거나 늘리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더 평등한 사회와 덜 평등한 사회가 건강이나 사회문제에 있어 전반적으로 동등한 수준의 부담을 안고 있을까?
(들어가며,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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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리처드 윌킨슨 Richard Wilkinson
건강의 사회 결정 요인에 대한 국제 연구로 널리 알려졌다. 영국 노팅엄 의과대학에서 지역사회 의학을, 런던 정경대에서 경제사를 공부했다. 노팅엄 대학 사회역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08년 은퇴했다. 지금은 노팅엄 의과대학과 런던 대학(UCL)의 명예교수, 요크 대학의 방문 교수다. 국내에 소개된 저서로 『평등해야 건강하다』, 『건강 불평등』이 있다.
케이트 피킷 Kate Pickett
케이트 피킷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형질 인류학을, 코넬 대학에서 영양학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역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요크 대학 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국립 건강 연구 재단National Institute for Health>에 소속돼 있다. 리처드 윌킨슨과 함께 설립한 <이퀄러티 트러스트Equality Trust>의 재단 이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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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전재웅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국제 대학원에서 국제 지역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시카고 대학에서 인류학 석사과정을 거쳐 현재는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한국 현대사와 미국-동아시아 관계사를 중심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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