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혁신을 가로막는가?
20여 년 전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연결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를 처음 본 순간 느꼈던 감동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비록 까만 화면에 하얀 글씨가 나열된 것에 불과했지만 분명 그건 새로운 세상과의 연결이었다. 그 새로운 세상이 날 가슴 뛰게 만들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예상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이미 잘 다듬어진 콘텐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친절한 안내인도 없었다. 단지 연결되었다는 메시지와 나와 똑같은 감동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나의 PC통신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몇 년 후 인터넷이 도래하자 새로운 세상은 PC통신의 울타리마저 넘어 무한히 확대되었다.
록 밴드 ‘그레이트풀 데드’의 작사자이자 전자프런티어재단EFF의 설립자인 존 페리 발로John Perry Barlow는 1996년에 「사이버스페이스의 독립선언문Declaration of the Independence of Cyberspace」을 발표한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본떠 작성된 총 16절의 위 선언문은 “인터넷은 국가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모든 문제는 황금률에 근거한 사회계약에 따라 구성원들이 스스로 해결할 것”이라며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와 존 페리 발로는 지구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분명 공통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 벅찼던 나의 감동과 당돌한 그의 자신감은 모두 한 가지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자유’다. 계획되어 있지 않고 예정되어 있지 않은 불확실성과 현실의 물리적, 경제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무한한 가능성이 만들어 내는 자유. 얽히고설킨 전깃줄의 연결망과 컴퓨터 코드가 가져다 준 자유는 빠르게 그 가능성을 실현하면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자유와 가능성의 땅 인터넷은 그토록 거침없어 보였다.
그러나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 년, 로런스 레식 교수는 첫 번째 저서 『코드Code and Other Laws of Cyberspace』에서 현실의 법(Law)과 함께 또 하나의 법 (Code)이 되어 버린 컴퓨터 코드가 인터넷을 다시 억압된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고 역설했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자유를 구현한 코드가 오히려 사이버스페이스를 현실세계보다 더 자유롭지 못한 공간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존 페리 발로가 자신감에 차 독립을 외친 지 겨우 4년 만의 일이다.
『아이디어의 미래The Future of Idea: the fate of the commons in a connected world』는 레식 교수의 두 번째 저서이다. 이 책은 인터넷의 가치와 자유가 손상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첫 번째 저서와 같은 맥락이지만, 전작과 달리 이를 창의성과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문화와 산업에서의 창의성과 혁신의 의미, 가능성, 그리고 위기를 ‘커먼스commons’, ‘콘트라스트contrast’, 그리고 ‘컨트롤control’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차례로 풀어 나간다.
공유재라고 번역될 수 있는 ‘commons’는 ‘자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공유재는 모든 구성원이 다른 사람의 허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다. 공유재는 인터넷 세상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외적이긴 하지만 오랜 역사 동안 이미 현실 세계에도 존재하는 것들로서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공공도로, 공원 등이 이런 공유재에 속한다. 하지만 초기의 인터넷만큼 공유재가 큰 역할을 한 경우는 없다. 공유재가 의미를 갖는 것은 자유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가 가져다주는 가치와 혁신이다. 레식 교수는 인터넷에서의 공유재란 무엇이고, 그것이 가져다 준 가치와 혁신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우리가 공유재에 대해 갖고 있는 무지와 오해가 무엇이었는지를 명료하게 깨닫게 되는 귀한 계기가 될 것이다.
두 번째 키워드인 ‘contrast’는 현실 공간과 인터넷 공간의 대조이다. 현실 공간에서 느끼지 못한 자유를 왜 인터넷에서 느낄 수 있었는지, 현실 공간을 지배하던 제약이 인터넷의 등장으로 어떻게 극복되었는지를 경쾌하게 들려준다. 그리고 그로부터 탄생한 혁신과 우리 삶의 변화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며 설명한다. 자유와 공유재가 만들어 내었던 창의성과 혁신, 그리고 가능성과 희망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레식 교수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세 번째 키워드인 ‘control’이다. 3부는 옛것이 새것을 어떻게 통제하고 억압하기 시작했는지에 관한 우울한 사례들이다. 레식이 강조했던 법(law)과 또 하나의 법(code)이 인터넷의 공유재와 자유를 어떻게 변질시키고 있는지 보여 준다. 2부에서 들려준 혁신들이 하나하나 무너지고 공유재와 자유가 줄어드는, 불과 몇 년 동안의 역사는 절망적이다 못해 드라마틱하다.
사실 그의 첫 번째 저서가 출간되었을 때만 해도 사이버스페이스의 이상적인 자유에 대해 무한한 희망과 기대를 품고 있던 당시 분위기에서 『코드』는 많은 이들에게 너무 비관적인 내용으로 비쳤다. 충분히 극복 가능한 상황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본다는 반론도 있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에 출간한 두 번째 저서 『아이디어의 미래』에서 레식 교수는 우울한 소감을 던진다. 상황은 자기가 걱정했던 것보다 더 악화되었다고.
출간된 지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이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도 레식의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하다. 레식 교수의 예언이 적중한 지금에 와서야 『아이디어의 미래』는 오늘날 더 적합한 이야기가 된 것이다. 10년이면 아날로그 시대에서도 강산이 한 번 바뀌는 긴 시간이다. 그러니 급박하게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서는 더 말할 나위 없는 엄청 긴 시간일 수밖에 없다. 감수를 위해 이 책을 본격적으로 읽게 되었지만 솔직히 말해 10년 전의 이야기가 과연 어느 정도 현실감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이 책은 오히려 지금 더 유효하다. 레식 교수의 뛰어난 통찰과 신념 덕분에 『아이디어의 미래』는 최근에 나온 그 어느 책보다 더 생생하고 치열한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10년이 지난 세상은 여전히 그가 말한 대로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 포털사이트 이용자가 다섯 살 난 귀여운 딸이 인기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어정쩡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촬영하여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가 저작권 침해를 주장하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와 법정 공방을 벌이게 됐다. 인터넷 시대에 다양한 창의성의 발현과 문화가 다시 억압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관련 업계 사람들이 모여 공정이용 일반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한 논의를 하던 중 그와 같은 사례에서도 만약 노래를 너무 잘 부르게 되면 권리자의 시장이 침해될 수 있으므로 공정이용으로 인정하기 힘들다는 반대에 부딪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코미디 같은 상황도 바로 최근의 일이다.
소리바다는 2002년에 시작된 형사기소를 필두로 민사와 형사 양쪽에서 숱한 소송을 수년 동안 겪었는데 음악지문인식 필터링과 워터마크 등 저작권 보호를 위한 기술 조치를 탑재한 다섯 번째 버전마저 허용된 파일에 한해 전송을 허락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국 P2P의 본질을 잃고 평범한 유료 음악 판매 사이트가 되어 버렸다. E2E 원칙이 가장 잘 구현된 인류 역사상 최고의 효율성을 자랑하는 혁신적인 정보 검색 배포 기술이 기존의 권리 체계와 산업 시스템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몰락해 버린 냅스터 사례의 재현이었다. 지금도 P2P는 여전히 불법의 온상으로 특별한 감시와 제재의 대상이다.
레식 교수가 개탄한 저작권 보호 기간의 연장을 위한 미키마우스법은 우리에게도 현실이 되었다. 창작자의 인센티브를 고취시켜 주기 위한 한시적인 권리라는 본질을 무색하게 하는 사후 70년의 저작권 보호 기간이 한EU FTA와 한미 FTA에 포함되었고, 이에 따라 이미 저작권법이 개정되었다. 최근에는 한미 FTA의 이행을 위한 개정안에 일시적 저장도 복제로 본다는 규정이 포함되면서 모든 온라인상의 이용 행위가 권리자의 통제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다.
자유롭고 공개된 프로토콜을 기초로 중립성과 개방성이 본질로 인식되었던 인터넷이 점차 네트워크 소유자들의 관리와 통제가 현실화되면서 네트워크 공유재가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은 계속 진행중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망중립성 논의가 치열하게 전개된 바 있으나, 망중립성이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망중립성이 논의되어야 하는지 그 자체에 대해서도 제대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지 못하다. 논의 결과를 듣다 보면 중립성과 개방성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것보다는 오히려 네트워크 소유자들에게 효율적인 망 관리 권한을 어디까지 허용해 줄 것인지가 논의의 초점이 된 듯하여 당황스럽기만 하다. 레식 교수는 그나마 공유재로서의 스펙트럼의 가능성을 이야기했지만 국내에서는 스마트폰의 와이파이 접속마저도 현실로 이루어지기까지 너무나 힘든 과정을 거쳤던 점을 생각해 보면 공유재로서의 스펙트럼은 요원하기만 하다.
아이폰이 어렵사리 도입된 2009년 11월, 당시 한 고등학생이 만든 애플리케이션인 ‘서울버스’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해프닝은 이 책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당시 서울시와 경기도는 그 지역을 운행하는 버스에 GPS를 장치하여 시민들이 찾는 해당 버스가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려주는 서비스를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하고 있었는데, 서울버스 앱은 그 홈페이지의 내용을 가져와 아이폰에서 편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사실 버스의 현재 위치가 필요한 것은 길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점을 생각해 보면 비싼 돈을 들여 만든 서울시와 경기도의 시스템은 그다지 효용성이 없었고 오히려 무료로 배포된 ‘서울버스’가 그 시스템의 잠재력을 멋지게 실현시켜 준 셈이다. 그러나 경기도가 보인 반응은 ‘서울버스’의 서비스 중단과 제작자에 대한 법적 위협이었다.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데이터를 가져갔으니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였다는 주장이다. 비록 이용자들의 반발로 서비스는 그대로 유지되긴 하였지만 이 사건은 자유와 공유재가 가능하게 한 혁신을 기득권과 ‘무지’가 어떻게 억압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 준 사례이다.
이 모든 상황은 레식 교수가 간파했던 것과 같이 위에서 강요하는 변화를 통해 인터넷이 만들어 내는 자유와 공유재가 사라지는 상황이 현재의 우리에게도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10년이 지났음에도 레식 교수의 통찰은 그대로 유효하고 그가 보여 주었던 암울한 변화의 예견은 많은 곳에서 현실이 되어 가고 있으며, 오히려 그 강도를 더하고 있다. 이 책이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아이디어의 미래』가 지금의 우리들에게 주는 깨달음은 우리의 ‘망각’이다. 우리는 치열한 현재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지금은 일상생활이 되어 버렸지만 과거의 패러다임을 뒤엎었던 수많은 전환들, 지금은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지만 그 전환 때문에 가능했던 눈부신 진보와 귀중한 가치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점차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혁신을 어느 순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가능하게 한 본질을 폄하하고 이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지적재산권 체계가 흔들리고 권리자의 사업 모델이 삐걱거리는 혼란스러움에만 집착한 나머지 지적재산권이 이용 통제가 아닌 재창작의 인센티브를 위해 탄생했고, 그것도 재창작에 필요한 공유재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최소한도에서 어렵게 인정된 것이라는 사실, 지금의 혼란이 넘쳐나는 새로운 창의력과 적극적인 문화 향유의 에너지를 아날로그 시대의 구 체계가 제대로 소화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기존의 산업에 대한 충격과 통제되지 않은 상황의 불안함에만 집착한 나머지 지금의 모든 혁신을 탄생시킨 인터넷을 만든 것은 네트워크 소유자들의 강력한 통제가 아니라 공개된 프로토콜, 그러한 프로토콜을 발판으로 작동하는 자유로운 소프트웨어들이라는 사실, 통제되지 않은 유연성과 적응성이 새로운 산업과 창의적인 사업가들을 탄생시켰고 자유로운 공유재들이 혁신의 비용을 낮추며 공정한 경쟁을 통해 이 사회에 이로운 혁신이 계속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이러한 망각은 옛것이 새것을 억압하는 비합리적인 상황을 합리적인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혁신의 본질을 제거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중립적이고 현실적인 개선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러한 혁신의 원천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거나 따져 보지 못한 사람들이 공공정책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 혁신의 원천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혁신의 원천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레식 교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나오는 “혁신은 옛 체제에서 번창을 구가한 모든 이들의 적이다. 그러나 새 체제에서 번창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겨우 미지근한 지지만 받을 뿐이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두려움 때문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경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것을 신뢰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혁신을 지지해 줄 사람들마저 혁신을 지키는 데 머뭇거리고 있는 상황을 안타깝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불확실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리는 지지자들이 아니라 그 혁신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혁신을 제거하는 데 동조하고 있는 혁신의 수혜자들이다.
레식 교수를 알게 된 지 벌써 7년이 다되어 간다. CCLCreative Commons License의 한국 버전을 만들어 정식으로 론칭했던 2005 년 3월 21일이 그를 처음 만난 날이다. 그 이후에 많은 교류가 있었고 지금은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로 그 어느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나의 멘토이자 스승이다. 그는 내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인터넷의 자유와 열림의 가치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 주었고 진정한 혁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가르쳐 주었다. 그 때문에 지적재산권이든 인터넷 거버넌스든 모 아니면 도 식의 무지한 극단에 빠지는 실수를 하지 않고 나름대로 균형을 유지하는 현명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냥 큰 고민 없이 평범한 법률가로서의 역할로 살아갔었을 내가 혁신을 증명하기 위해 작지만 또 하나의 진지한 삶을 경쾌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레식 교수의 이야기는 언제나 명확하다. 스티브 잡스의 키노트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그의 강연에서도 그랬고, 개인적인 대화에서도 그랬고, 그의 모든 책에서도 늘 그랬다. 그는 결코 애매하거나 어렵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도 깔끔한 비유와 적절한 재구성으로 명쾌하게 전달한다. 언제나 핵심을 놓치지 않는 그의 논리는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처음에는 그의 이런 명확함이 비상한 머리와 풍부한 지식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진정성과 끊임없는 고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진정성은 그 어느 논리보다도 설득력 있고 명확하다. 놀라운 통찰은 문득 얻어진 것 같지만 끊임없는 고심이 가져온 선물이다. 이 두 가지는 모든 지식을 뛰어넘으며 어떤 학습 과정보다 우수하다.
그동안 자유와 공유재를 바탕으로 문화적, 산업적으로 놀라운 혁신을 만들어 나가는 진정한 혁신가들을 만나면서 그의 통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겨우 20대 중반을 갓 넘긴 매력적인 프랑스 청년 실뱅 짐머(Sylvain Zimmer)가 2004년에 만든 음악 유통 사이트인 자멘도(jamendo.com)는 보유하고 있는 31만 곡이 넘는 멋진 음악들을 누구든지 무상으로 자유롭게 감상하고 다운로드 받을 수 있도록 CCL을 적용하고 있다. 그 대신 인디 뮤지션들에게 자신들의 음악을 알리고 팬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한편 호텔이나 매장의 배경 음악, 영화의 삽입곡 등 영리 이용은 따로 대가를 받고 라이선스를 주고 그 수입을 뮤지션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다양한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다.
누구나 편집할 수 있고 심지어는 누구나 남이 편집한 내용을 고칠 수 있는 극단의 자유가 기존의 유명 백과사전을 밀어내고 세계 최고의 온라인 백과사전을 만들어 낸 위키피디아(wikipedia.org)의 기적과 같은 성공 사례는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다. 위키피디아를 만들어 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여를 공유재로 남기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서로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혁신가들임이 틀림없다.
수많은 디자이너들의 다양한 일러스트와 디지털 콘텐츠를 무료로 제공하는 대신 이를 이용한 실물 제품의 판매나 개별 프로젝트를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는 일본의 로프트워크, 모든 기사를 자유롭게 복제할 수 있도록 하여 인지도를 높이고 권리를 관리하는 비용을 줄이는 대신 광고 등의 수입을 얻는 온라인 매체인 블로터닷넷(bloter.net), 거의 대부분의 수업 내용과 자료를 공개하여 전 세계 배움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학교 인지도를 올리고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는 MIT의 오픈코스웨어(ocw.mit. edu), 각자 자신들의 악기 연주나 아카펠라를 올리면서 자유로운 복제와 변경을 허용함으로써 끝없는 재창작과 리믹스를 통한 창의성을 주고받는 시시믹스터(ccmixter.org) 등도 그러한 혁신가들이 만들어 낸 공유재들이다.
나는 이들이 만들어 낸 혁신을 보면서 자유와 공유재에 대한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거센 억압과 무관심에 시달리지만 이들이 꾸준히 만들어 온 혁신은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혁신의 원천이 무엇인지 기억하게 해 준다. 레식 교수도 이 책에서 줄곧 암울한 변화를 계속 이야기하지만 역시 희망을 놓지 않는다. 현 상황을 다시 돌이킬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하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혁신의 구조를 벗어나 또다시 통제의 구조를 수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려고 애쓴다.
나는 이 책이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를 희망한다. 레식 교수의 말대로 과연 무엇이 최선인지 심각하게 고심해 볼 수 있는 계기기 되기를 바란다. 지적재산권이 중요하다고 해서 더 많이 보호될수록 좋은 것인지, 통제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더 많은 통제가 바람직하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가 미덕처럼 알고 있는 다다익선이 어떤 경우에는 선이 아니라 악이 될 수 있다는 간단한 가정을 고심해 보자. 지적재산권 전문가이든 네트워크 전문가이든, 아니면 그냥 문외한이든 간에 지금 누리고 있는 혁신이 소중하다면, 그 혁신이 어디서 왔는지 진정성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창의성과 혁신은 어마어마한 것이 아니다. 창의성과 혁신은 자유로운 사고와 용기 있는 실천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깨달음이다. 그것이 창의성과 혁신의 미래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결정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아이디어의 미래”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윤종수 판사
CC코리아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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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스 구겐하임은 재능 있는 영화감독으로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제작했다. 일부는 상업적인 작품이고 일부는 비영리 목적의 영화다. 특히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다큐멘터리에 대한 열정이 강하다.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중 최고로 꼽히는 작품 가운데 하나는 「첫해The First Year」다. 공립학교 교사들의 부임 첫 해를 다뤘다. 다시 말해 공립 교육의 「후프 드림스」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감독은 반드시 ‘저작권 해결’을 해야 한다. 저작권이 유효한 소설을 영화로 만들려면 저작권 소유자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오프닝 크레딧(영화가 시작할 때 제목과 제작진의 이름을 나열하는 부분)에 노래를 삽입하려면 그 노래를 만든 작곡가나 가수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런 일들은 저작권법에 따라 창의적인 과정에 부과되는 일상적이고 합리적인 제한이다. 그런 제도가 없으면 구겐하임 같은 감독의 창의성이 발휘될 수 없다.
그러나 영화에 우연히 등장하는 소품들은 어떨까? 영화 속 한 장면에 나오는 기숙사 방 벽에 붙은 포스터, ‘담배 피우는 남자’가 들고 있는 코카콜라 캔, 배경의 트럭에 그려진 광고 등도 역시 창작물이다. 이런 것들을 영화에 등장시킬 때도 허가를 받아야 할까? 구겐하임은 “10년 전만 해도 우연히 삽입되는 창작물의 경우 일반인들이 알아볼 때만” 저작권이 문제가 됐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아주 다르다. “이제는 어떤 창작물이든 어느 한 사람이라도 알아보면 사용 허가를 받고 저작권을 구입해야 한다. 거의 모든 예술 작품이나 가구, 조각품을 영화에 사용하기 전에 저작권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구겐하임은 이렇게 표현한다. “영화를 찍기 전에 사용할 모든 소품의 목록을 만들어 변호사에게 보내는 직원 여럿을 고용해야 한다.” 변호사들이 목록을 검토한 뒤 사용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알려 준다. “창작물의 원작을 찾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다.” 원작을 찾을 수 있다고 해도 허가가 거부되는 경우가 잦다. 따라서 변호사들이 어떤 소품이 사용 가능한지를 결정한다. 영화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주체가 변호사라는 얘기다.
변호사들이 이런 통제권에 매달리는 이유가 뭘까? 통제를 하지 않으면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법 체제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SF영화 「12 몽키즈」는 개봉 28일 만에 법정으로부터 상영 금지 명령을 받았다. 한 예술가가 영화에 나오는 의자 하나가 자신이 디자인한 작품의 스케치와 비슷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배트맨 3: 포에버」도 개봉되지 못할 뻔했다. 배트맨이 모는 차 배트모빌이 한 정원을 통과하는데 그 정원을 원래 설계한 사람이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개봉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998년 에는 「데블스 애드버킷」의 개봉이 이틀 지연됐다. 한 조각가가 자기 작품이 배경에 사용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가 빈발하자 변호사들은 자신들이 감독을 통제해야 한다고 믿게 됐다. 그들은 영화 제작사에게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결국 법적인 문제라는 점을 확신시켰다.
이런 통제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비용 면에서만이 아니다. 구겐하임은 이렇게 말한다. “내 경우는 창의성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 감독으로서 내가 만들어 내려고 했던 세계가 완전히 밋밋해진다. 당연히 들어가야 할 요소들이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하나의 세계를 구상하고 창작해서 그 세계로 관객들을 데려가는 것이 내 일이다. 제작사가 감독인 내게 돈을 지불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작품에서 특정 라이프스타일을 즐기고, 거실 벽에 특정 미술품을 걸어 놓고, 특정한 일을 하는 등장인물을 설정한다면 그것들은 내가 표현하려는 비전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젠 그것을 사용하려면 왜 반드시 넣어야 하는지 그 정당성을 먼저 입증해야 한다. 그건 잘못된 일이다.”
이 책은 영화 제작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영화감독이 어떤 문제로 골치를 썩이든 간에 그 문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다만 내가 구겐하임의 사례를 서두에 꺼낸 이유는 이 책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훨씬 더 근본적인 의문, 즉 “그처럼 터무니없고 극단적인 규칙이 만들어지는 이유가 뭘까?” 하는 문제의 핵심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왜 창작의 과정에 혁신이나 창의성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듯한 규칙이 끼어들어 발목을 잡아야 하나? 그것은 비단 영화만이 아니라 예술 전체, 예술만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의 혁신적인 일 전부에 해당되는 문제다.
법학 교수 제시카 리트먼에 따르면 저작권법은 일반인들이 “그런 법이 있을 수 있어? 말도 안 되지.”라는 반응을 보일 만한 조항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런 법은 실제로 존재하며, 일반인들이 정확히 봤듯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법이다. 그런데도 왜 엄연히 존재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이 우리를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었을까? 고등교육을 받고 고액의 연봉을 받는 변호사가 남자 대학생 동아리 파티에 관한 영화의 배경 장면에 포함되는 포스터 한 장의 사용권을 협의하러 돌아다녀야 하고, 사전촬영 허락을 받지 않은 광고판을 장면에서 삭제하라고 편집자에게 황급히 지시해야 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법률 세계를 만들었길래 잘나가는 영화감독이 감독 지망생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게 됐을까?
열여덟 살 난 감독 지망생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다음 그에게 자기 영화에 넣을 수 없는 모든 것의 긴 목록을 얘기해 주겠다. 왜 넣을 수 없느냐고? 법적으로 촬영을 허가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허가 받으려면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 (자유라고? 자유는 이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친구 두 명과 영화를 만드는 건 전적으로 자유다.
한 시대는 논란이 되는 아이디어보다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아이디어에 의해 규정된다. 한 시대의 특징은 아무런 변론이 필요 없는 확실한 것에 따라 결정된다. 권력은 누구나 당연히 여기는, 다시 말해 정신 나간 사람만이 의심하는 아이디어에서 나온다. ‘당연시 되는 것’을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이면 정신이 온전하다고들 말한다. “모두가 아는 것”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때로는 사회가 잘 굴러가지 않고 정지하게 된다. 의문을 갖고 따지는 데 드는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이렇게 아무런 시비가 없는 아이디어가 그대로 수용되지만 그것이 사회의 역동성에 제동을 건다. 이런 시대에는 모두가 진실로 믿는 것에 대해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의심을 갖도록 만드는 일이 너무도 힘들어진다.
지금의 우리 시대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수세대 만에 가장 중요한 기술 혁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기술, 그에 따른 문화 혁명은 현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혁신을 자극한다. 그런데도 이런 번영(다시 말해 ‘자산’)의 핵심에 관한 아이디어들이 우리를 헛갈리게 만든다. 이 혼동으로 우리는 그 환경을 바꾸게 된다. 그러면 번영 자체가 달라지게 된다. 우리는 번영을 이끄는 힘이 무엇인지 안다고 믿고, 실제 번영의 성격을 무시한 채 인터넷 혁명의 규칙을 바꾼다. 이런 변화는 결국 혁명의 종말을 부른다.
내 주장은 이처럼 얇은 책에 담기에는 너무 큰 담론일지 모른다. 따라서 독자들이 이 책을 계속 읽도록 하기 위해 좀 더 간명하게 요지를 설명해 보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터넷’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은 그 성격이 바뀔지언정 영구히 우리 곁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 또 앞에서 말한 혁명의 종말을 내가 입증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변수가 너무 많을뿐더러 아직 끝나지 않은 일도 너무 많고, 설득력 있는 예측을 하는 데 필요한 쓸 만한 데이터가 너무도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문화의 맹점,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해악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인터넷 혁명과 이 혁명이 이끌어 내는 창의성을 이해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부분의 역할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부분이 저절로 사라지거나, 심지어 누구의 손에 의해 제거되더라도 알아채지 못한다. 그 효과가 얼마나 큰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종말을 경계하지 않는다.
이런 맹점은 혁신의 환경을 해친다. 인터넷 기업가들의 혁신만이 아니라, 더 넓게는 저자와 예술가의 혁신도 포함된다. (하지만 인터넷 기업이 내가 의도하는 바의 극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 맹점은 인터넷 자체에 변화를 가져온다. 그 변화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능력을 해치게 된다. 이런 잠재력은 원래의 인터넷에서는 실현됐지만 그 인터넷 자체가 변하면서 점점 약해져 간다.
이런 변화를 막으려는 싸움은 좌파와 우파 간, 또는 보수와 진보 진영 간의 전통적인 투쟁이 아니다. ‘자산 ’의 범위에 관한 규정에 의문을 갖는 것은 자산 그 자체에 의문을 갖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나는 열렬한 시장주의자다. 하지만 그것은 시장의 합당한 범위 안에만 국한된다. 나는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상황에서, 자산이 수행하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역할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은 상업성과 비상업성 간의 갈등에 관한 글이 아니다. 내가 옹호하는 혁신은 상업과 비상업 부문 전부에 공히 적용된다. 그 혁신을 옹호하기 위해 내가 끌어다 대는 논지는 좌파만큼이나 우파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지금 문제가 되는 진정한 투쟁은 옛것과 새것의 싸움이다. 이 책은 애초에 새것을 위해 만들어진 환경이 옛것을 보호하는 환경으로 둔갑하고 있다는 데 대한 비판이다. 법원, 의회, 그리고 원래의 인터넷을 만든 바로 그 프로그래머들이 그런 둔갑을 앞장서서 지휘하고 있다.
옛것과 새것의 싸움. 결코 새로운 투쟁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혁신은 옛 체제에서 번창을 구가한 모든 이들의 적이다. 새 체제에서 번창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겨우 미지근한 지지만 받을 뿐이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두려움 때문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경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것을 신뢰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옛 체제에서 번창한 사람들은 인터넷이 두려운 존재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대처할까? 이 책은 바로 이 문제를 짚는다. 새 체제에서 번성을 구가할 수 있는 사람들도 그 새 체제를 앞장서서 옹호하지 않는다. 이 책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분연히 일어설 의도가 있는지 묻는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결코 일어설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
우리 앞에는 두 가지의 미래가 놓여 있다. 하나는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갈 수 있었지만 외면해 온 길이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묘사하기가 쉽다. 인터넷에다가 최첨단 TV를 섞은 뒤 간단한 쇼핑 방법을 추가하는 것으로 대충 설명할 수 있다. 현재와 별 다름 없는 미래다. 아메리칸온라인AOL이 바로 그런 미래를 꿈꾼다. 아직은 AOL의 시각을 수용할 수 없지만 타임워너의 AOL 합병을 보는 가장 냉소적인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사용자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규모 네트워크를 콘텐츠에 대한 거의 완벽한 통제를 보장하는 체제로 만드는 것이다.
그 콘텐츠는 절대 다수에게 동시에 ‘뿌려지지’ 않는다.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사용자를 정확히 겨냥하는 광고로 포장돼 제공된다. 그러나 그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일방통행일 뿐이다. 반응을 보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창의성을 불어넣는 자유는 지금처럼 제한될 게 뻔하다.
이런 속박은 지금 존재하는 경제에 가해지는 제한이 아니다. 제조나 유통에 막대한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제한은 법이 만들어 내는 불필요한 부담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지적재산권과 그 외에 정부가 보장하는 특권을 말한다. 초기 인터넷이 규정한 ‘다수 대 다수’의 소통에 대한 보장은 쇼핑을 할 수 있는 수많은 수단, 제공되는 것 가운데 선택을 할 수 있는 수많은 수단으로 대체된다. 거기서 제공되는 것은 현재의 집중화된 유통 시스템에 맞아 떨어진다. 쉽게 장악되고, 쉽게 영향을 받고, 쉽게 호객 행위에 넘어가는 대중을 중독시키는 초고속 케이블 TV를 말한다.
우리가 갈 수 있었지만 가지 않은 미래는 그려 내기가 훨씬 어렵다. 그 이유는 인터넷의 전제 자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인터넷의 최초 프로토콜을 만든 설계자들은 조부모가 손자와 대화하는 데 컴퓨터를 사용하는 세계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들은 어떤 노래든 30초 내로 내려받을 수 있는 기술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월드와이드웹WWW은 매사추세츠 공대MIT에서 연구하던 몇몇 컴퓨터 과학자들의 꿈나라였다. 지금은 미국 서부 워싱턴 주에 있는 내 컴퓨터가 나의 책 구입을 추적해 내가 좋아할 만한 작가를 추천해 준다. 이렇게 인터넷이 고객의 취향까지 추정해 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미래에도 우리가 상당히 현실성 있게 그릴 수 있는 요소가 있다. 그 요소들은 비용이 더욱 낮아져 창의성을 가로막는 장벽이 무너진 결과의 산물이다. 가장 큰 변화는 유통 비용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제작 비용의 변화 역시 중요하다. 제작과 유통의 비용 둘 다의 변화는 디지털화의 산물이다. 디지털 기술이 아날로그기술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현실을 만들어 내고 복제한다.
이런 변화는 우리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창작 분야부터 보자. 특히 법이 창의성을 ‘저작권’으로 규제하려고 시도하기 오래전의 오프라인부터 시작해 보자.
미국 헌법이 처음 제정되던 시절에는 기본적으로 창의성이 규제되지 않았다. 11장에서 논하듯이 저작권법은 사실상 출판업자들에게만 적용됐다. 그 범위도 지도, 도표, 책에 국한됐다. 뒤집어 말하자면 창의적 삶의 다른 부분은 전부 무료였다. 음악은 변호사의 승인 없이도 대중 앞에서 연주될 수 있었다. 소설이 저작권 등록을 했더라도 그것을 자유롭게 희곡화할 수 있었다.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로 각색될 수도 있었다. 창의적 행위 자체가 무엇인가를 취해서 조금씩 조금씩 새로운 것으로 수정해 나가는 행위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공공재public domain는 폭도 넓고 깊이도 깊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 작품도 바로 그 즈음 영국 출판사의 지배를 벗어났다.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그런 작품의 저작권이 미국에서는 보호받을 수 없었다.
이런 창의적 행위에 누가 참여할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사회 규범 때문에 그런 창조적 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성별이나 인종을 불문하고 주어지지는 않았던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정신은 ‘이야기하기’였다. 사회는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말하는 이야기에 의해 규정됐다.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결정하는 데 있어서 법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유복해서 글을 깨친 늙은이는 책을 통해 트리폴리 만에서 해적과의 싸움에 대해 안다. 그 노인은 마을 광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준다. 현지 극단이 술집에서 손님들을 위해 그 싸움을 극화한다. 인기가 높아지면 그 극단은 다음 마을로 자리를 옮겨 다시 공연을 한다.
그렇다고 그 당시가 지금보다 ‘훨씬 더 창의적이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양도 질도 아니다. ‘전성기’를 상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창의적 행위에 가해지는 제한의 성격에 관한 문제를 말하고자 한다. 과거에는 기술적인 제한이 분명히 있었고 그런 제한이 중요했다. 그러나 특정 주제에 관해 가해지는 제한을 제외하면 법률은 누가 다른 사람의 작품을 취해 개작하는 데 대해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았다. 이런 창조적 행위는 자유로웠다. 적어도 법의 지배는 받지 않았다.
이제 1990년대 말로 가 보자. 그 당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은 어땠나? 디지털 기술은 작품 창작에 드는 비용을 크게 줄였다. 영화 제작 비용은 10년 전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음악이나 다른 디지털 예술의 제작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생이 음악 시간에 ‘음악 처리 장치’를 이용해 교향곡을 작곡해 그것을 곧바로 들을 수 있었다. 그 10년 전 그 비용이 얼마였을지 상상해 보라. 작곡 기법을 교육하고 재생 장치를 구입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었다. 디지털도구는 새로운 무엇을 창작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의 지평을 크게 넓혀 주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이 가능할 때만 그것을 창작하려는 사람들에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애플 컴퓨터가 ‘소비자’에게 단지 소비만 하지 말고 더 많은 일을 해보라고 촉구하는 광고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내려받아라, 섞어라, 구워라.Pip, mix, burn,
애플이 말한다.Apple instructs.
어차피 그건 당신의 음악이니까.After all, it’s your music.
물론 애플은 컴퓨터를 팔려고 그런 광고를 냈다.1 하지만 그 광고는 우리 역사에서 아주 깊이 흐르는 이상적인 정신을 건드린다. 애플이 판매하는 기술(물론 다른 회사도 판다.)은 인류 사회의 시초부터 수많은 세대를 거치며 해 온 것을 우리 세대가 우리 문화로 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에서 어떤 것을 선택한 뒤 ‘내려받고’베낀다는 뜻, ‘섞고’원하는 대로 고치라는 뜻, ‘굽는’다른 사람이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낸다는 뜻 행위를 말한다. 이 마지막 것이 가장 중요하다. 디지털 기술은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창작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보통 사람들이 음악의 ‘소비’수동적으로 듣기만 한다는 뜻에서 단독으로, 또 집단적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데 참여하는 삶으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음악만이 아니라 영화, 예술, 상업 행위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능력은 디지털 기술이 나오기 전부터 있었다. 랩 음악은 다른 사람의 음악을 ‘차용해’음악 중 일부를 추려서 베낀다는 뜻 거기다가 가사나 다른 음악을 ‘섞고’, 그렇게 만든 음악을 음반이나 테이프로 ‘구워’ 다른 사람들에게 파는 형태였다. 재즈도 한 세대 전에는 마찬가지였다. 음악만 그런 게 아니지만 특히 음악은 늘 이전의 것을 기초로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창의성을 문화와 경제의 광범위한 부분으로 확장할 잠재력을 확보했다. 기술은 한 세대 전체에게 무엇인가를 창조할 수 있게 해 주고, 그 창의성을 인터넷의 하부 구조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해 준다. 개작한 영화, 새로운 형태의 음악, 디지털 예술,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하기와 글짓기, 그리고 시, 비평, 정치적 행동주의가 거기서 생산된다.
이런 예술을 통해 자유로운 문화가 형성된다. 사실 예술을 통해서만이 아니다. 내가 묘사하는 미래는 창의성의 어떤 다른 영역만큼이나 경제에도 중요하다. 대다수 사람들은 혁신이 창의성과는 다르고, 창의성이 경제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인터넷 네트워크는 창의성의 모든 형태를 가능케 해 준다. 자유로운 문화의 미래는 인터넷 네트워크가 경제적 혁신의 모든 영역에 열려 있게 해 주고, 이런 창의성을 가로막는 벽을 가능한 한 낮게 유지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이미 이런 잠재력을 보고 있다. 수많은 기업들이 인터넷의 개방되고 중립적인 기반을 이용해 개인이 상호 교류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이메일이 그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호 접촉을 유지해 주는 메시지 대부분은 개인이나 그룹간의 실시간 대화다. 배우자들이나 친구들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일하며 인스턴트 메신저를 통해 항시 연락할 수 있다. 어떤 주제에 관해서라도 토론할 수 있는 그룹이 쉽게 만들어진다. 이제는 상호 교류의 가장 큰 장애물은 서로 동시에 소통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지만 이제는 그 조건마저 제거됨으로써 공공 토론도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당신들이 지금 하는 토론에 나는 오늘 밤에 내 의견을 달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그 다음 날에 참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기술은 점점 더 진보한다. 수많은 사람이 이 인터넷의 공유 기반을 이용해 더 나은 방식을 실험할 수 있다. 여기서 거액의 비용이 낭비될 수도 있지만 진정으로 뛰어난 몇몇 혁신이 이런 실험에서 이뤄진다. 예를 들어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엄마가 자기 손목시계를 건드리면 아들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가 엄마의 손길처럼 아들의 손목을 부드럽게 눌러 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들이 함께 음악을 들으며 곡과 곡 사이에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 두 사람이 지금 당장 통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알려 주는 기술, 지역 사회가 가상으로 구성된 배심의 심의를 통해 당면 문제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술도 개발될 수 있다. 사실 이런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그 잠재력은 무한하다. 그리고 기술이 인간성을 망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정반대로 기술의 잠재력은 우리의 삶을 더욱 인간적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나 ‘내려받고, 섞고, 구울’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 그에 대항하는 운동도 맹렬한 기세로 일어나고 있다. 일반 사람들에게 애플의 ‘내려받아라, 섞어라, 구워라’라는 슬로건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콘텐츠 산업에 종사하는 변호사들에게 그것은 대역죄에 해당한다. 저작권법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들에게는 ‘나의 CD’에 담긴 음악은 바로 ‘나의 음악’이라는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다. “라이선스 문안을 읽어 보라.”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2 “법전을 읽어 보라.”고 그들은 강조할 것이다.
라디오에서 듣든 CD를 사든 대형 식당에서 그 노래를 듣는 데 추가 요금을 지불하든, 그 노래가 주제곡으로 나오는 영화 입장권을 사든 간에 그런 음악은 ‘나의 음악’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 주변에 만연한 문화다. 내려받거나 섞거나, 특히 구울 ‘권한’은 없다. 변호사들은 그런 행위에 대한 허가를 요청하면 얻을 수도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업계의 관대한 허가를 나의 권리로 혼동해선 안 된다. 변호사들은 우리 문화의 이런 부분은 소수의 소유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저작권법은 그런 권한을 만들어 낼 의도가 결코 아니었지만 결국은 저작권법이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이런 갈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증거가 애플이다. 음악을 ‘내려받고, 섞고, 굽는’ 용도로 애플이 파는 바로 그 기계가 일반 사용자들이 할리우드 영화를 ‘내려받고, 섞고, 굽는’ 행위가 불가능하도록 프로그램화돼 있기 때문이다. 디즈니 영화를 ‘내려받고, 섞고, 구으려’ 하면 콘텐츠가 베껴지는 게 아니라 컴퓨터가 망가진다. 소프트웨어, 다시 말해 코드가 이 콘텐츠를 보호하고, 애플 컴퓨터가 이 코드를 보호한다. 음악은 나의 것일지 몰라도 영화는 내가 소유할 수 없다. 영화는 제작사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만 베끼고 섞고 구울 수 있다. 그런 권한과 그 권한을 뒷받침하는 법이 창의성을 억제한다.
이 싸움은 훨씬 넓은 전투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영화를 관장하는 저작권법이 서서히 모든 종류의 콘텐츠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변화는 창의성의 모든 면에 영향을 준다. 상업적인 활동뿐 아니라 비상업적 활동, 예술뿐 아니라 과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음악과 영화만이 아니라 경제 성장과 일자리에도 파장이 미친다.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결정하느냐가 우리 미래의 큰 부분을 좌우하게 된다. 사람들은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사회를 늘 ‘자유롭다’라고 말하겠지만 그 ‘자유’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지금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이상에 관한 투쟁이다. 어떤 규칙이 혁신의 자유에 적용돼야 하느냐는 문제다. 나는 그것을 ‘도덕적 문제’라고 부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너무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인상을 줄지 모른다. 어쩌면 정치적 문제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우리 대다수는 일상적인 정치의 부조리에 권태를 느끼고 무시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라고 하면 별로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 차라리 이것을 헌법상의 문제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에 관한 문제며, 이런 가치가 달라지도록 허용할지 말지 여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과연 자유로운 사회가 될 것인가? 그리고 자유로운 사회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그 질문을 적합한 맥락에 놓고 고찰해야 한다. 음악이나 혁신 같은 특정 부문의 갈등에서 한 발 물러나 더욱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의 자원에 관해 생각해 보자. 이 모호하고 개괄적인 의미에서 자원이 어떻게 관리되는가? 누가 어떤 자원을 이용할 수 있다고 누가 정하는가?
모든 사회에는 자유로운 자원이 있고 통제받는 자원이 있다. 자유로운 자원은 누구나 취할 수 있다. 통제받는 자원은 사용하기 전에 누군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자유 자원이다. 누구의 허가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취해 사용할 수 있다. 뉴저지 주 프린스턴 머서 가 112번지에 있는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집은 통제 자원이다. 거기서 하룻밤을 묵으려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 가장 격렬한 정치적 논쟁은 ‘자원 관리에 어떤 시스템이 가장 효과적이냐?’를 두고 벌어졌다. 국가일까, 시장일까? 냉전은 바로 이런 싸움이었다. 사회주의를 채택한 동방은 정부가 자원을 할당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시장을 채택한 서방은 시장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 국가와 시장의 투쟁이었다. 결국 ‘어떤 시스템이 가장 효과적이냐?’가 문제였다.
그 싸움은 끝났다. 대부분의 경우는 시장이 승리했다. 물론 예외도 있고 반대자도 여전히 있다. 그러나 우리가 20세기를 거치면서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면 그것은 바로 국가보다 민간 관리가 더욱 효과적이라는 사실이다. 누가 언제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 결정하는 데는 정부보다 시장이 낫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로널드 코즈가 말했듯이 시장에 어떤 부정적인 문제가 있든 간에 정부의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세기다. 따라서 질문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정부나 시장 중 어떤 시스템이 독점적인 권한을 갖고 주어진 자원을 관리해야 하느냐?’가 아니다. ‘시장이냐, 국가냐?’가 아니라 ‘어떤 자원이든 그 자원이 통제되어야 하느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느냐?’가 우리가 당면한 문제다.
우리 문화는 통제와 관리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어떤 자원이 ‘자유롭다free’고 말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즉시 가격이 무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free’는 훨씬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프리 소프트웨어 재단FSF의 설립자로 현시대의 철학자인 리처드 스톨먼은 “공짜 맥주라는 뜻에서의 ‘free’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에서 말하는 ‘free’를 뜻한다.”고 말했다.3 하나의 자원이 ‘free’라면 ‘누구로부터도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이 사용할 수 있을 때’ 또는 ‘필요한 허가가 공평하게 주어질 때’를 말한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면 우리 세대에 던져진 질문은 시장과 국가 중 어느 쪽이 자원을 관리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그 자원이 자유로워야 하느냐는 것이 돼야 한다.
사실 새로운 질문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이 질문을 무시하도록 세뇌당해 왔을 뿐이다. 자유 자원은 항상 혁신, 창의성, 민주주의의 중심이 돼 왔다. 도로는 내가 말하는 의미에서 자유 자원이며, 그 주변에 자리 잡은 공장이나 회사들에 부가가치를 부여한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도 내가 말하는 의미에서 자유 자원으로, 뉴욕 시의 가치를 높여 준다. 재즈 음악가는 인기 있는 노래의 코드 배열을 자유롭게 차용해 새로운 증흑곡을 만든다. 그 곡이 인기를 얻으면 다른 사람들이 또 사용하게 된다. 우주선의 궤도를 계산하는 과학자들은 케플러와 뉴튼이 개발했고 아인슈타인이 수정한 상대성 이론을 자유롭게 활용한다. 발명가 미치 케이퍼는 비지칼크VisiCalc라는 스프레드시트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IBM PC를 위한 첫 킬러 애플리케이션killer application(등장하자마자 다른 경쟁 제품을 몰아내고 시장을 완전히 재편할 정 도로 인기를 누리는 상품이나 서비스)인 로터스 1-2-3을 개발했다. 이 모든 경우에서 정부든 개인이든 다른 누군가의 독점적 통제권 밖에 있는 자원의 가용성이 과학과 예술의 발전에 초석이 됐다. 앞으로도 발전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집단 사고방식의 근저에는 자유 자원이 열등하다는 직감이 숨어 있다. 다시 말해 사용에 제한이 없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다. 또 그라우초 막스미국 코미디언 영화배우가 말했듯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우리가 원해서는 안 된다는 그릇된 생각이다. 예일 대학교 교수 캐럴 로즈는 이렇게 말했다. “대개 사람들은 우리 세계가 가장 잘 관리되려면 세계 전체가 개인 소유자에게 분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세계를 더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모든 자원을 개인 소유자들에게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서두에서 말한 바로 그 ‘당연시 되는’ 아이디어다. 통제가 좋은 것이며, 따라서 더 많은 통제가 더 낫다는 발상이다. 또 자원을 개인 소유자들에게 분배해야 발전이 이뤄진다는 생각이다. 더 많이 분배할 수록 우리의 미래는 더욱 번창한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예외이거나 불완전하며, 이타주의나 부주의, 또는 공산주의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 자원은 공산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컨대 소련은 표현의 자유도, 공짜 맥주의 나라도 아니었다. 내가 말하는 자유 자원은 이타주의의 산물도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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