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전투에서 싸웠다는 것은 꽤 멋진 경험이다. 지든 이기든 시도해보았다는 감각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곁을 스치는 쓰레기 같은 현실을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삶은 없다. 그 자괴감은 우리 몸 안의 에너지와 영혼을 몽땅 빼앗아 간다. 그리고 점차 녹색으로, 회색으로, 검은색으로, 어두운 현실 속의 미디어처럼 우리 심장을 암흑의 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눈 감은 현실로 말미암은 자괴감은 종종 우리가 누려야 할 뜨거운 삶의 과정들을 건너뛰게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TV 뉴스에 덧칠이 시작되면, 그 거대한 무엇인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웃들에게 총을 겨누게 하고 가족을 분열시키며, 아무 이해 상관도 없는 불특정 대중을 향해 돌을 던지라고 우리를 내부로부터 부추긴다.
이 지경이 되지 않으려면 전투가 필요하다. 전투해야 한다면 당연히 이기는 편이 좋다. 그리고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의 움직임을 1분, 1초라도 놓치지 않고 집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감시하고 집중하는 것,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민의 전투적 자세이자 의무이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의 명장 패튼 장군보다 더 많은 전투에서 싸워왔다. 어쩌면 패튼 장군의 전투는 나보다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는 오직 동쪽으로 행군하며 나치들만을 상대하면 되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상황은 좀 더 복잡하다. 무수한 적은 엉켜진 실타래처럼 단단히 뭉쳐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으로 보이고, 현실은 또다시 이것들과 섞여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베페 그릴로Beppe Grillo
1장
변화와 기적의 정치를 갈망하라
01 국회 청소의 날!
범죄자인 세자르 프레비티 국방장관은 2007년 7월, 국회로부터 해고당하기 바로 직전에 스스로 사임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부정부패에 탈세까지 저지른 프레비티의 충실한 하수인인 24명의 국회의원이 아직 국회에 남아 있다. 국회 내부의 뇌물 수수자들을 쓸어내기 위한 나의 전투는 2005년 6월 7일부터 시작되었는데 나는 블로그에 이 범죄자들의 이름과 각 죄목에 해당하는 판결을 낱낱이 적어놓았다. 과연 독자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델 우트리 상원의원? 기민당DC의 프리제리오 당 서기관? 비토와 스가르비가 범죄자라고? 유죄 판결을 받았었다고? TV 토크쇼에 나와서 아양을 떨어대던 그 기자들도? 물론 투표용지의 후보자 이름 옆에는 당연히 이런 진실들은 쓰여 있지 않다. 단지 그들의 출신 정당만이 적혀 있을 뿐이다. 하지만 24명의 범법자 중 자그마치 10명이 포르짜 이탈리아Forza Italia(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 의해 설립된 진보적 보수주의의 기독교 민주당.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우파 정당) 출신이다. 투표용지의 이름 옆에 적힌 포르짜 이탈리아라는 표기는 그들 모두가 범법자라는 증거나 매한가지이다. ‘포르짜 이탈리아’, 바로 그 빌어먹을 자유의 상징 말이다.
나는 개혁을 원하는 시민의 서명을 모아 이러한 진실을 유럽연합의 바로조 위원장에게 보내기로 했다. 이에 동참한 시민의 서명은 단 며칠 만에 14,000명에 달하였다. 나는 서명과 함께 숨길 수 없는 진실의 기록을 CD에 담아 바로 바로조에게 보냈고, 직접 그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밑의 직원을 통하여 매우 의례적인 답변, 언급할 가치도 없는 그저 쓸모없는 종이 나부랭이에 불과한 판에 박힌 대답만을 보내왔을 따름이다.
유럽연합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탈리아의 부정부패를 개선해 보고자 했던 내 방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이 국내 일간지의 지면을 장식하기를 바라며 블로그에 범죄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죄목을 기록했다. 기록들은 전부 사실이었기에 모두에게 알려져야만 했고, 신문은 당연히 이 진실에 주목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내 예상은 또다시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어느 일간지도 이 진실을 뉴스로 다루지 않았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이탈리아 언론 자유의 현주소를 새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신문을 통해 우리가 알고 싶은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문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정보만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선택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방법을 바꾸어 국제적인 신문사들의 문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굳게 잠겨 있던 국제신문사의 문은 두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48.275유로에 부가가치세를 더한 비용으로 마침내 열리게 되었다. 2005년 11월 22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nternational Herald Tribune>에 마침내 진실이 공개되었다(지면에 광고 형식으로 한 페이지가 할당되어, 전과기록이 있는 국회의원의 명단이 공개됐는데 신문에 그들 개개인의 상세한 전과 기록은 게재되지 않았지만, 대신 상세한 내용이 쓰여 있는 베페 그릴로 블로그의 인터넷 주소가 올라갔다). 외신들은 처음에 이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언급한 전과자들이 금품수수와 관련해 징역형을 선고받자, 영국의 BBC 월드 서비스 방송국 같은 곳에서는 위의 사건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인도의 간디 평화 재단으로부터 축하 편지가 도착했는데, 편지에는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문제를 겪었었기에 모든 인도신문을 대신해 축하를 보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인도 역시 한때 범죄자들이 기존 정치인들에게 자금을 대주고 정치판에 입성했지만, 그들 중 11명은 이미 국회로부터 추방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한 외신의 보도 이후 모든 이탈리아 신문들은 여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국회 내의 범죄자에 관한 기사를 써야만 했다. 몇몇 의원들은 소송하겠다며 직접 위협을 해오기도 했고, 또 몇몇은 TV와 라디오, 신문기자들에게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을 말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한낱 코미디언이 높으신 국회의원 나리를 심판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으며{범죄자들은 코미디언을 심판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안 된다고?}, 정치와 정의, 사법부는 서로 그 개념을 혼동해서도 안 되고{실제로 이탈리아에서는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다!}, 범법자 판결을 받은 국회의원들의 실제 죄는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언이 고발한 것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다.’라는 기사를 쓰라고 위협했다. 실제로 정치가이자 언론인인 포미치노는 직접 내게 전화해 나의 블로그에 언급된 부정부패라는 것이, 언급된 것처럼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며 아주 사소한 수준이라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있었던 다음 해인 2006년에는 이탈리아의 총선거가 있었다. 나는 이 선거에 새로운 희망을 걸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국회 과반수의 좌석을 차지하고 있던 극우파들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선거법이 등장해 앞을 가로막았다. 극우파들 자신도 이 법을 ‘돼지 똥’이라고 정의한, 바로 그 법 말이다. 이 새롭게 등장한 거지 같은 법은 1993년에 만들어진 선거운동 관련법 및 시민에 의한 직선제를 취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내가 블로그에 선거 후보자들의 범죄 기록을 적는 동안 국민을 보호해야 할 공무원들이 오히려 국민에게서 투표권을 빼앗아 갈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2006년 선거에서 이 범죄자들은 각 당의 당 서기관들에 의해 재선됐다(비례대표제와 비슷한 방식의 선출방식). 그 결과 마르코 트라발리오(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인종차별의 역사≫ ≪불알 월드컵≫ ≪바나나공화국≫ 등 20여 권의 책을 썼다)에 의해 정의된 ‘정직한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인 범죄자들이 국회 내부에 셀 수 없을 만큼 늘어나게 되었다. 크고 작은 범죄자들과 그 공범자들의 수는 무려 82명에 달했다. 이는 이탈리아 범죄의 온상지 나폴리 스캄피아 지역의 주요 범죄자 수보다도 높은 숫자이다. 이 ‘정직한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국회에서 가장 애용하는 방법은 바로 변호사 나리들을 고용하는 것이다. 이들은 범법자들을 위해 법을 바꾸고 실력을 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작자들이다. 국회 정화를 목표로 전투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날 무렵, 나는 좀 더 강력한 방법을 통해 전투를 발전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국회 내부의 범법자들을 고발하기 위해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유럽연합 본부로 갔고 드디어 2007년 9월 8일, ‘V-day’ 전투*가 시작됐다. 이날 하루 동안 우리는 50,000명의 서명을 모아 국회 정화를 위한 법률을 만들기로 했다. 우리는 세 가지 방향에서 국회 정화를 위해 새로운 내용의 법률을 요구했는데, 첫째로 범법자의 국회의원직 불가, 둘째로 정당 비서관에 의해 추가 선출될 수 있는 의원 수를 두 명으로 제한, 마지막으로 국회의원 후보자에 대한 시민의 직접 투표제였다. 나는 이런 의지를 담은 항소를 유럽연합에 제출했고, 국회 위원장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개인적으로는 이 요구에 찬성한다는 뜻을 밝혀왔다. 대법원에서도 법은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존재한다는 성명을 냈고 나는 이런 내용을 담은 이메일을 모든 국회의원에게 보냈다. 메일에 대한 답장은 무려 200통이 넘었다. 대부분은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답변이었다. 심지어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경제팀 최측근인 스카욜라 조차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서한을 보내주기도 했다.
대망의 9월 8일, ‘V-day’ 전투가 있었던 후 이제 많은 이탈리아의 국민과 시민은 새로운 진실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모두를 위한 국회 정화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범법자는 법적인 처벌 외에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그 범죄에 대한 죄과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들은 국민을 대표하는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
이탈리아에는 범법자 말고도 다른 수백만의 정직한 국민이 존재한다.
02 시대착오적인 삽질, 고속열차 개발
성탄 연휴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던 2005년 12월 5일, 경찰이 발 디 수사 계곡*의 베나우스에 있는 시민의 집결지를 공격했다. 경찰의 거룩한 곤봉질은 여자들과 남자들, 신부들, 시장과 시의 몇몇 관료들 위로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공격을 당한 이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인 발 디 수사 계곡을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망가트리려고 하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던 사람들이었다. 증언에 의하면 한밤중에 기동경찰들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별안간 들이닥쳐 공격을 감행했는데, 그들은 국무장관이던 피사누의 졸개들과 이탈리아 프리메이슨 P2의 구성원인 모쥐, 리치오 젤리(기업가로 이탈리아 프리메이슨의 존경받는 거장으로 불린다. 금융 스캔들에도 관련이 있는 강력한 우파 지지자)를 따르는 무리와 아르코레 주의 정신적 미숙아들에 의해 사주를 받은 자들이었다. 지역 주민은 평온하게 폴렌타(이탈리아식 옥수수죽)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쉬고 있다가 느닷없이 공격을 받았다. 국무장관 피사누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마피아와 함께 공생해야 한다’라는 망언을 일삼는 작자로 전에 교통부장관 루나르디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그런 말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래서 루나르디는 어떤 대가를 주는 한이 있더라도 수사 계곡에 터널을 만들고자 했고, 그 프로젝트는 그의 정치적 공약인 동시에 최고 목표가 되었다.
계곡에 터널 하나 뚫는 데 무려 12억 유로! 이것만으로도 매우 비싼 구멍임이 틀림없지만, 실제 드는 비용은 무려 30억 유로에 육박한다. 게다가 이 터널의 완공시점은 15년에서 20년 후로 그때가 되면 터널 따위는 이미 필요하지 않은 시점이다. 물론 지금 당장 개통된다고 해도 그 지역에 터널이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이고 비경제적인 쓸모없는 개발 사업이다.
나는 이미 베페 준티, 수사 계곡의 프란체스코 수사회, NO TAV*운동원, 밀라노 공대의 마르코 폰티, 발디 수사 지역 시장들의 공식 대변인 바르바라 데베르나르디, 콘도베의 시장, 볼로냐의 잡지 <물레방아Mulino>, 시타프 협회 등의 언론 및 관계자들과 함께 터널이 불필요한 증거들과 수많은 증언, 그리고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데이터를 블로그에 올리고 설명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반대 캠페인들은 썩어빠진 정당에 의해 그들과 유착된 건설 회사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사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사회민주당PSDI은 좀 더 다른 속셈으로 그들과 영합했는데, 만약 토리노 시장 키암파리노가 망치질을 할 수 있었다면 피에몬테 주 주지사인 브레소와 사회민주당의 파시노는 그의 망치 밑의 못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리스본에서 보내진 신선한 모차렐라 치즈가 10여 시간이면 토리노의 포르타 누오바 역을 지나 키에브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얼마나 피에몬테 주를 위한 근사한 프로젝트인가? 이 얼마나 무서운 지역이기주의의 참모습인가? 철도국장 엘리오 카타니아{너무도 뛰어난 그의 관리 능력으로 이탈리아 철도국은 수백만 유로의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도 물론 이 고속 열차 프로젝트에 열광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생활하는 이탈리아의 장거리 출퇴근 자들은 운행시간을 만성적으로 어기는 더럽고 냄새나는 열차를 타고 다닌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산자락 계곡의 주민 세금 중에서 몇억만 유로에 해당하는 자금으로 새로운 기차를 사겠다는 공약을 그들에게 내세웠다. 그러면서 사탕발림으로 발 디 수사 계곡의 일반인에서 시장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주민에 대해 열차 우선 이용 권리를 약속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누구나 그렇듯이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속셈이 다른 법이다. 결과는 역시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식’이 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철도 본연이 지닌 운송수단으로서의 실질적인 목적은 사라졌고 환경오염과 부채, 수많은 문제점만이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마침내, 2005년 12월 7일 토리노에서 고속열차 반대를 위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유모차에 어린아이까지 대동한 가족들을 포함, 10여만 명의 사람들이 얼음장 같은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뜨거운 포도주를 함께 나누며 집회에 참석했다. 나 역시 반대 집회에 동행했는데, 그 자리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정치인이라고는 누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규모 반대 집회의 효과가 있었던지 프로디 정부는 마치 고속철도 계획을 수정한 것처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묘하게 포장을 바꾼 것일 뿐 내용은 이전과 비교하면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그저 시민을 향해 몽둥이찜질 대신 약간의 안정제를 투여하는 것으로 방법을 약간 바꿨다고나 할까. “고속열차를 만들 것이다. 만들 것이다. 그렇다. 만들어야 한다. 만들어야만 한다. 국민이여 눈을 감아라. 그리고 오직 나의 눈만을 바라보라.” 프로디는 마법을 거는 거대한 뱀과 같다. 하지만 계곡의 주민은 몽둥이찜질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감지덕지해야만 하는 걸까.
실제로 모다네와 토리노 사이를 운행하는 열차는 겨우 38%의 이용률을 보일 뿐이다. 토리노와 리오네를 연결하는 열차는 이용자의 감소로 말미암아 폐선 됐다. 또한, 열차를 이용해 운송하는 물류의 양도 해마다 줄고 있다. 그런데도 새로운 터널공사에 드는 비용을 모두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 유럽연합의 지원금은 고작 10% 남짓에 불과할 뿐으로 우리의 세금으로 거의 모든 개발비용을 충당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비용적인 문제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것은 바로 터널공사가 진행되는 산에 석면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하루 500여 대의 트럭이 석면이 함유된 잔해들을 싣고서 이 계곡의 도로를 20년 동안 질주할 것이다. 이 고속열차의 경제성을 따져보면 한 해에 4천만 톤의 물류가 이송되어야 하는데, 이는 하루에 350대의 열차에 해당하며 이는 다시 시속 150km/h 물류 열차나 아니면 시속 300km/h의 승객을 태운 열차가 4분마다 한 번씩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 된다. 열차 이용자와 물류 양의 감소로 수요는 줄었는데, 본전을 뽑기 위해서 열차는 쉬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야만 한다. 그 사이 이미 석면에 의한 환경오염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계곡 주변을 말이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명확한 증거 앞에서 마침내 여러 정당과 언론 매체들이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제 이 계곡의 터널공사는 이탈리아가 군국주의 국가를 전면에 표방하고 다시 나서지 않는 한 결코 진행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곧 새로운 타협안이 도착할 것이다. 정치가들은 늘 그렇듯이 또 새로운 뭔가를 대안으로 얘기할 것이고, 이미 뭔가를 했다고 우길 것이다. 또한, 기업들은 우리도 모르는 어떤 일에 사용했다고 수천만 유로의 금액을 새롭게 청구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수사 계곡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이탈리아의 새로운 변화를 시사한다. 이전에는 결코 이런 변혁을 가져온 일이 없었다.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그리고 이번 일들이 진행된 과정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반성하고 되짚어 봐야 할 것이다.
이제는 정부가 국민의 의사 수렴 과정 없이 제멋대로 결정을 내리고 지역 행정에 대해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려면 정부의 계획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인증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국민에게 설명과 동의를 얻지 못한 국가 결정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냄새나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03 푸른 황금의 유혹, 수도 민영화
1992년에 식생활 용수 사업의 민영화*를 법으로 제정한 갈리법Legge Galli(환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새로운 수자원의 개발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다. 생존을 위해 누구나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물이 기이하게도 상품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 덕분에 공기업과 사기업을 합한 통합 자본을 가진 92개의 회사가 생겨났다. 이 회사들은 두 가지의 거룩한 목표를 지니고 탄생했는데, 하나는 물장사를 이용한 엄청난 수익의 창출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짝에도 쓸모는 없지만, 월급은 꼬박꼬박 잘 주는 새로운 일자리의 창출이다. 이 새로운 회사의 안락의자는 선거에서 낙선한 하원의원들이 차지했고, 그 자리는 낙선의원들에게 세상에 다시없는 지상 낙원이 되어 주었다. 경영진에게는 고액의 연봉과 역시 고액의 주식배당금, 스톡옵션이 제공되었다.
전 세계에는 이 푸른 황금, 바로 물이 없어서 죽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30,000명이나 된다. 물은 생명이며, 생명을 팔고 사는 행위는 매우 부도덕하지만, 불행히도 수자원 매매에는 엄청난 수익이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다. 로마에 상수원을 공급하는 물 기업 아체아ACEA가 2006년에 30%의 수익 성장률을 보였다고 한다. 수익? 대체 어떤 수익? 생명 줄을 팔고 산 대가로 얻어진 수익? 하지만 누구도 이에 항의하는 사람은 없다. 시민은 묵묵히 돈을 내고 정치가들은 잘한다고 손뼉을 친다. 2006년 한 해 동안 이탈리아에서 물을 이용해 얻은 매출은 무려 50억 유로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공짜 빗물이 거액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실로 새로운 가나의 혼인식(신약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첫 번째 기적으로 물이 포두주로 바뀐다)이 아닐 수 없다. 단지 이번에는 포도주 대신 돈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미래의 전쟁은 석유가 아닌 물 때문에 싸우게 될 것이다. 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당장 실험해보라. 아주 간단하다. 물 대신 1리터의 원유를 마셔보면 될 테니까. 전 세계 약 10억 명의 사람들은 마실 물이 부족하여 고통을 겪고 있다. 해마다 2백만 명에 달하는 어린이들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죽어간다. 이것이 비단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아직도 증거가 부족한가?
이탈리아 역시 일부 지방에서는 식수공급 부족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구 온난화 때문인 기후 변화는 이제 직접적으로 우리의 생활용수 공급을 감소시키고 있다. 하지만 반비례해서 이에 대한 우리의 대책은 더 형편없어졌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낡고 구멍이 숭숭 뚫린 수도관을 가진 나라이다. 에밀리아 로마냐 주에서는 해마다 30%의 생활용수가 누수 되고 있고, 남부 풀리아 지방의 누수는 50%에 달한다. 거기에 강, 급류, 시냇물 등 모든 물길에서 오염이 증가하고 있다. 정화시설을 갖추지 않은 채 흘려버린 공업용수는 강으로, 바다로, 무단 배출되고 오염된 매연이 공기 중으로 대책 없이 퍼져 나가도 누구 하나 통제하는 이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아주 많은 병의 물을 사서 마신다. 유럽 인들이 연평균 일 인당 약 80리터의 생수를 소비하는 것에 비해, 이탈리아 사람은 배가 넘는 170리터의 생수를 소비한다. 유럽에서만 보자면 생수 소비량 1위를 기록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로 야기되는 또 다른 불명예스러운 1위가 있는데, 먹자마자 바로 버려지는 플라스틱 물병의 개수이다. 한 해에 이탈리아에서 버려지는 가연성 플라스틱 물병의 개수는 약 50억 개, 이 물병들은 소각되며 발암물질인 다이옥신을 내뿜는다. 그리고 다이옥신은 사정없이 우리의 폐 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물은 이제 정치적으로 변하여 각 정당의 주요 정치 공약 안건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오염된 물로 말미암아 일반 시민이 갈증을 없애려면 더 비싼 물을 사 마셔야만 한다. 비싼 물은 관리가 더 필요하고, 따라서 점점 더 사유화되어간다. 풀리아 지역의 주 정부 대표 니키 벤돌라는 환경단체 리스본 그룹의 회장인 리카르도 페트렐라를 풀리아 지역의 상수도 본부 담당자로 임명하였다. 페트렐라는 매우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유럽 최고의 수자원 분야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겨우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사임하였다. 상수도 사업과 관련된 기업의 로비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나는 블로그를 통해 사회 운동을 하면서 물과 관련된 문제들과 자주 직면했다. 2005년 나폴리 공연에는 알렉스 자노텔리(세계 평화 운동 및 정의 사회 구현 운동 관련 재단의 설립자) 신부와 동석했는데 그는 내가 아는 인물 가운데 손에 꼽을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함께 수자원 민영화에 대해 강한 반대와 항의를 계속했다. 그러나 캄파냐 지역 ATO2(영토관리부처) 산하 136개 지방 자치단체에 대한 우리의 수도세 인하 요구는 정부의 명령에 의해 중단되었다. 캄파냐 주지사로 바쏠리노(생활쓰레기 및 공업 쓰레기, 불법폐기물 등 환경을 오염시킨 책임을 물어 후에 재판에 기소되었다)가 있던 그 엿 같은 정부에 의해서 말이다. 바쏠리노는 바로 나폴리안 르네상스(나폴리의 쓰레기 스캔들에 의해 많은 정치인과 마피아들이 기소된 사건을 말한다)의 주인공이자, 쓰레기 바다의 주인공이다.
수자원은 공공의 자원이다. 당연히 시민에 의해서 운영되어야만 한다. 시민은 자신들이 마시고 사용하는 물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지녀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민영화와는 다른 의미이다. 수자원은 특정 개인에게 위탁되어서는 안 된다. 수자원의 민영화로 말미암아 일반 시민이 얻은 이익은 아무것도 없다. 얻은 거라고는 폭탄 수준의 엄청난 수도요금 고지서뿐이다. 그렇다고 공급되는 물의 질이 좋아진 것도 아니다. 수자원의 민영화는 그저 정당과 정부, 그리고 특정 개인의 사욕이 뒤섞여 튀겨진 냄새 나는 기름 덩어리에 불과하다.
지구의 한쪽은 목이 말라서 죽어가고 있는데 다른 한쪽은 물이 넘쳐난다. 연간 한 잔의 커피를 만들기 위해 140리터의 물이 사용되며, 청바지 한 벌을 만들기 위해서는 11,000리터가, 자동차를 위해서는 400,000리터의 물이 사용된다. 물이 없다면 전 세계의 모든 생산 활동은 중지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물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물은 미래의 비즈니스다. 전 세계가 수자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저 낭만으로 분수대에 동전을 던져 넣지만,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지구의 모든 물은 돈을 내는 자만이 마실 수 있게 허용될 것이다.
끔찍한 세상이다.
(서문,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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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베페 그릴로 Beppe Grillo
1948년 7월, 이탈리아 제노바의 리구리아에서 태어났다. 전공은 회계학이지만 오디션에 참가해 코미디언으로 데뷔, 1986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그릴로 메트로' 쇼의 주인공이 되면서 코미디계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이듬해 TV에서 당시 이탈리아 총리 크락시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방송에서 퇴출당하고, 이 사건은 그의 삶의 행보를 보다 적극적으로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1993년, TV에 잠시 출연할 기회를 얻지만 무려 1,600만 명의 기록적인 시청률을 보이면서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정권에 의해 다시 방송 출연이 금지되었다. 이후 그는 방송 복귀를 스스로 거부하고 블로그 활동과 SNS, 매년 100회가 넘는 국내외 공연을 통해서만 대중과 만나고 있다. 세상의 부패와 거짓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과 조롱을 퍼붓는 공연에는 매회 수만 명의 관객이 참여해 뜨거운 신뢰와 지지를 보낸다. 뉴스위크, 타임, BBC 방송 등의 각국의 매체들이 앞 다투어 그의 활동을 톱뉴스로 다루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몇 년 전 MBC 국제시사프로그램 'W'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라는 기획으로 그의 행보를 깊이 있게 다루면서 국내에도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사상 유례가 없는 무려 200만 명의 시민을 집결시킨 분노의 상징 'V 데이'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는 얼마 전부터 인터넷과 SNS를 통해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 '파이브스타’ 운동을 펼쳐가고 있는데 이 운동으로 그는 2010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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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임지영
한국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졸업 후 현재 Teatro Flaiano in Rome에서 전속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이탈리아 방문 시 프레스 센터에서 통역을 담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국제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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