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중문화와 사회
대중문화가 특정 사회의 가치 체계를 구현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물론 과거 같으면 이 관계를 ‘거울 작용’처럼 생각해서, 대중문화가 사회라는 객관성을 ‘반영’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렇게 단순하게 대중문화와 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감한 논리는 별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중문화는 어떻게 사회의 가치 체계와 관계를 맺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대중문화를 통해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는 문화비평의 논리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문화 형식이다. 대중문화는 ‘새로운 것’을 담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대중문화는 대중의 호불호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대중이 원하는 것에 부합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대중문화의 원리이다. 좀 더 복잡하게 설명한다면, 대중문화는 쾌락 원칙에 충실하다. 쾌락 원칙이라는 것은 즐거움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의 원리이다. 모든 사람들은 즐거우면 계속하고 그렇지 않으면 빨리 그만두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쾌락 원칙은 불쾌한 욕망을 제거해 버리는 기준 노릇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대중문화는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 특히 자본주의 문화 산업의 논리에 따라 생산되는 대중문화는 이런 쾌락 원칙을 형식 논리로 체현할 수밖에 없다. 대중의 취향에 들어맞는다는 것은 쾌락 원칙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즐거움을 지속시킨다는 뜻이다. 쾌락 원칙이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서 특정 사회는 좋거나 나쁜 것을 판가름하는 윤리적 가치 체계를 만든다. 가치 체계는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다. 메타 윤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윤리라는 것은 불변하기보다 욕망의 구조와 필연적으로 연동한다. 특정 사회가 원하는 것에 맞춰서 변화하는 것이 윤리적 가치 체계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중문화를 분석한다는 것은 특정 사회의 가치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그 기원을 탐색하는 것이다. 가치 체계가 어떻게 만들어져서 지탱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대중문화 분석을 통해 특정 사회를 파고들어 가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문화는 그냥 대중을 위한 문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 문화 형식은 대중의 욕망 구조를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 논리이다.
이 글은 《무한도전》이라는 TV 프로그램의 분석을 통해 한국 사회의 가치 체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무한도전》과 같은 작은 형식의 논리를 통해 좀 더 커다란 구조의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이다.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과 이른바 ‘예능’이라고 불리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논리를 통해, 한국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시대정신’을 알아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언제나 개별 형식에서 자신의 근거를 발현시키는 법이다. 물론 이런 시대정신은 실제적이라기보다, 일종의 관념으로서 개체의 실천 활동에서 주체화의 기제로서 작동하기 마련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대책을 시대정신이라고 불리는 관념 체계가 제시하는 것이고, 구성원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런 관념 체계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무한도전》의 형식 논리가 어떻게 시대정신과 접속하고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시대정신이라고 표상할 수 있는 대타자Other를 구성하는 욕망의 작동 원리를 알아보는 것이다. 결국 이 작업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주체화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그 위기와 대응을 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무한도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유효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 질문은 곧 《무한도전》이라는 형식의 논리와 연동하는 대중의 욕망에 대한 궁금증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 《무한도전》의 내적 논리
《무한도전》을 <1박 2일>과 비교해서 훨씬 ‘인간적인 프로그램’으로 정의하는 경향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런 비교는 두 프로그램을 이끄는 유재석과 강호동이라는 진행자 캐릭터에 대한 대립 구도를 통해 정당성을 획득한다.<무한도전·1박 2일 두 PD 상반되는 취향과 연출> (http://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461517.html) 그러나 두 프로그램에 대한 다른 평가를 설득력 있게 만드는 기준은 애매모호하다. 결론적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의 취향과 연출로 인해서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라는 말 이상을 이끌어 낼 수가 없다.
PD의 취향과 연출,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진행자의 개성이 합쳐진 결과 다른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는 말은 솔직히 하나 마나 한 소리이다. 사실 모든 문화 형식의 변별성이 이를 통해 설명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화 형식은 ‘문화 아닌 것’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문화적이지 않은 것을 매개하는 것이 개별 주체의 활동이다.
따라서 《무한도전》과 <1박 2일>이 PD의 취향과 연출에 따라 다른 논리를 체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무한도전》과 <1박 2일>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프로그램이 서로 닮아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비교 평가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분명히 <1박 2일>은 《무한도전》과 유사한 프로그램이고, 이런 까닭에 둘은 자연스럽게 비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화비평의 시각에서 본다면, 두 프로그램은 굳이 분리시킬 필요가 없다. 원칙적으로 같은 형식 논리를 드러내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개별 형식의 차이는 있지만, 형식 논리를 놓고 본다면 두 프로그램은 같은 가치 체계를 구현하고 있다. 그 가치 체계는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경쟁’이다.
《무한도전》이나 <1박 2일>이나 보여 주는 것은 경쟁의 논리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형을 거치긴 했지만, 두 프로그램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경쟁을 통해 구성원들의 승패를 좌우하는 게임의 법칙을 채택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또한 두 프로그램은 공통적으로 ‘고통의 스펙터클’을 보여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다가 자기 계발의 금욕주의를 보여 주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변화를 보인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정의에 따르자면, 레슬링에서 복싱으로 성격을 바꾼 것이다.
처음 전파를 탔을 때, 《무한도전》은 말 그대로 ‘궁상스러운 바보들이 벌이는 무모한 도전’이라는 내용에 충실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양산할 수밖에 없는 잉여 노동의 판타지를 적절하게 자극하는 ‘도전들’이 프로그램의 재미를 만들어 냈다. 여기에서 잉여 노동의 판타지라는 것은 자본의 효율화로 인해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잉여 노동력의 주체에게 즐거움을 주는 상상적 이미지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적 이미지는 이상적 자아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꿈의 상태를 만들어 낸다.
《무한도전》의 ‘바보들’은 이상적 자아에서 자아 이상으로 이동한 주체에게 과거의 이미지를 다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무한도전》이 재현하는 희화화한 캐릭터들은 여전히 이상적 자아에 빠져 있는 미숙한 존재들이다. 이를 통해서 시청자들은 자아 이상과 자신의 괴리에서 상실감을 경험하던 현실을 위무 받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잉여 노동력에게 부여된 ‘무한한 시간’이라는 요소는 초기 《무한도전》을 밀고 갔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이 시간은 무의미한 되풀이의 시간이다. 의미를 생산하는 반복이 아니라,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일상의 형식을 보여 주는 것이 《무한도전》이다. 이런 권태의 구조에서도 《무한도전》의 캐릭터들은 행복한 모습을 보인다. 시청자는 생활인이라는 일상의 참여자에서 ‘관조자’라는 선험적 자리로 순간 이동하면서, 이 모든 상황을 관찰하는 근대적 구경꾼으로 거듭 태어난다. 시시껄렁한 놀이를 반복함으로써 시간을 죽이면서 ‘고용’을 기다리는 주체에게 《무한도전》에 등장하는 바보들은 자기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위무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다.
잉여 노동을 표현하는 《무한도전》이 자신보다 모자라는 이들의 향연이라는 점에서 잉여 노동력의 주체는 자기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욕망의 투사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대상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일종의 공감이 여기에서 발생하는데, 《무한도전》에서 희화화된 인물 성격은 현실의 모순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무식한 출연자들’보다 더 나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 준다. 말하자면, 유사-충족감을 《무한도전》이 제공하는 셈이다. 물론 《무한도전》을 보는 시청자들이 진정으로 이들을 무식하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멀쩡한 ‘연예인들’이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퍼포먼스를 보면서, 사회적 규범의 압박을 잠시 비켜 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무한도전》과 잉여 노동의 현실
문제는 《무한도전》에서 재현하고 있는 잉여 노동의 현실이다. 잉여 노동은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 시간을 초과한 노동이다. 일을 하지 않는 고용주의 생활 수단까지 생산하는 일을 노동자가 잉여 노동을 통해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무한도전》은 이런 잉여 노동의 현실에 대한 ‘허구적 진실’을 말해 준다.
각자의 몫을 나눠 가진 것처럼 보이는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이 구성하고 있는 ‘공동체’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날마다 느끼면서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알레고리라는 것은 현실을 돌려 말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한때 유행했던 KBS 《개그콘서트》의 <마빡이>처럼, 《무한도전》은 ‘놀이’를 통해 현실을 지배하는 ‘철의 규율’을 드러낸다. 이런 방식은 확실히 <1박 2일>의 복불복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비친다. <1박 2일>이 악동들의 장난처럼 보인다면, 《무한도전》은 세상의 진리에 눈감은 ‘바보들의 배’를 연상시킨다. 이 바보들의 배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바보들의 배에 대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정의에 따르자면, 《무한도전》이라는 ‘허구’를 가능하게 만드는 현실적 실체가 엄연히 존재한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에 바보들의 배가 광인이라는 과잉의 존재들을 처리하기 위한 방책으로 등장한 것처럼, 《무한도전》 역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배제해야 할 과잉의 존재들을 위해 고안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배에 승선한 출연자들이나 시청자들이 결코 ‘병든 영혼’을 가진 것은 아니다. 광인의 영혼은 결코 미치지 않았다. 이처럼 때늦은 21세기형 우신예찬을 《무한도전》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무한도전》이 보여 주는 것은 결국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미치지 않은 ‘합리적 광기’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미친 합리성mad rationality?’을 뒤집어 놓은 판본처럼 보인다.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이 ‘미친 짓’을 함으로써, 그것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자신들도 미쳤다는’ 미친 합리성의 혐의를 벗을 수 있다. 《무한도전》을 보는 우리 모두는 미치지 않았다. 광기라는 잉여를 배제해 버림으로써, 우리는 셈할 수 있는 삶의 안정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배제와 포섭이라는 합의의 과정을 거치면서 설명을 획득한다. 이렇게 공인된 합의를 통해 《무한도전》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에 출몰했던 바보들의 배처럼, 배제이면서 동시에 포섭의 전략을 드러낸다. 사유할 수 없는 것을 분리시켜서 바보들의 배에 태움으로써, 바보가 아닌 ‘정상인들’은 스펙터클을 얻을 수 있다. 정박한 바보들의 배를 구경하러 군중들이 몰려들었으니, 《무한도전》을 보기 위해 한국의 시청자들도 TV 앞에 앉는다.
이런 의미에서 《무한도전》이 드러내는 ‘합리적 광기’는 흥미로운 문제의식을 던진다. 도대체 이런 광기는 무엇인가? 광인은 자신의 광기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광인의 영혼은 미치지 않았다고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영화 《헐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해방된 욕망은 그 해방을 즐기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을 ‘해방된 욕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들은 그 해방된 욕망을 가장할 뿐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미션’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미션이 끝나면 또 다른 미션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제임슨 본드처럼 미션을 무사히 마친 뒤에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다음 프로그램을 지속시킬 수 있게 해 주는 ‘시청률’이다.
《무한도전》이 폭로하는 것은 다람쥐 쳇바퀴처럼 이어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노동 현실이다. 출연자들은 결코 일사불란하게 미션을 수행할 수 없다. 반드시 누군가 미션 기계를 고장 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방송 분량’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의 논리는 ‘잉여 노동에 대한 갈망’을 암시한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자본Das Kapitla》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본이 잉여 노동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노동자는 ―?자유롭든 자유롭지 않든?― 자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을 초과하는 노동 시간을 부가적으로 제공하여, 생산 수단의 소유자를 위한 생활 수단을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런데 생산물의 교환 가치보다 사용 가치가 더 큰 중요성을 띠는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는 잉여 노동이 어느 정도 욕망의 크기에 따라 제한을 받는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잉여 노동에 대한 무제한적인 욕망도 생산 그 자체의 성격에서 생겨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므로 고대에도 교환 가치를 그 독립된 화폐 형태로 획득[즉 금·은을 생산]하는 경우에는 놀랄 만한 과도 노동이 나타났다. 이런 경우에는 폭력적인 살인적 노동이 과도 노동의 공공연한 형태였다.칼 마르크스, 《자본 I-1》, 강신준 역, 도서출판 길, 2008년, 335쪽.
자본주의 이전에도 잉여 노동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것은 교환 가치를 “독립된 화폐 형태로 획득”하는 경우에 과도 노동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화폐 형태로 환원되는 교환 가치에 대한 욕망이 과도 노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잉여 노동에 대한 욕망은 생산의 성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렇게 잉여 노동은 화폐를 더욱 많이 획득하고자 하는, 말하자면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망의 산물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렇게 잉여 노동의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노동자의 권리가 아니라 자본가의 권한이다. 자본가는 노동일을 무한히 늘리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정의를 오늘날에는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전일화 이후에 이제 잉여 노동에 대한 갈망은 자본가의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화와 자기 관리라는 이데올로기는 노동자마저 자본가의 욕망을 가진 주체로 만들어 내고 있다.
《무한도전》은 어쨌든, 정해진 방송 분량을 ‘생산’해야 한다. 빨리 마친다고 해서 노동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무한도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잉여 노동이다. <1박 2일>은 복불복이라는 경쟁적 구도를 도입해서 미션의 성격을 ‘승자독식’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로 무장한다. 시청자들은 이를 보면서 웃지만, 네모난 화면이 보여 주는 그 가상이 실제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다.
《무한도전》의 정치성은 이렇게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차원에서 출몰한다. 《무한도전》이나 <1박 2일>은 놀이와 게임으로 잉여 노동의 현실을 치환한다. 이 과정에서 삶은 유사 서바이벌 게임처럼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무한도전》뿐만 아니라, 최근 흥행하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경우도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살아남기’이다. 이 시대의 패러다임을 잘 보여 주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을 살아남도록 ‘선택’해 주는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시청률을 좌지우지하는 시청자들이다. 이 시청자들은 생산자라기보다 소비자로 TV 앞에 앉아 있다.
자본 축적을 위해 필수적인 교환의 관계가 여기에서 성립한다. 물론 이 교환의 관계는 실제적인 화폐의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관계가 상징적이기 때문에 《무한도전》이 보여 주는 잉여 노동에 대한 갈망은 더욱 의미심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잉여 노동에 대한 갈망은 실제로 화폐라는 매개 형식의 상징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폐는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매개 형식이라는 것이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 같은 철학자의 주장이었다. 이런 논리에 입각하면 화폐는 인간 존재와 관련해서 폐기할 수 없는 언어와 같은 상징체계로 판명난다.
따라서 실제적인 화폐 거래가 소거된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무한도전》이 보여 주는 것은 잉여 노동을 그만둘 수 없는 현실이다. 마르크스는 생산 수단을 소유한 소수의 권한으로 잉여 노동 시간이 좌지우지된다고 했지만, 지금 현실에서 보면 그렇게 맞아 들어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오히려 오늘날은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잉여 노동 시간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확실히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가 빚어낸 ‘자기 계발’ 또는 ‘자기 관리’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축적 체제를 잉여 노동에 대한 갈망을 중심으로 재정의한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부르주아적 주체로 거듭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인 《무한도전》에서 중요한 것은 캐릭터의 역할이다. 주어진 몫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 또한 현실의 논리를 닮아 있다. 이들에게 미션은 곧 퍼포먼스이면서 또한 ‘도전’의 결과를 끊임없이 지연시켜서 프로그램을 완성해야 하는 ‘노동’이다. 그러나 이 노동은 마르크스가 전제했을 물질적 노동의 차원을 훌쩍 넘어서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무한도전》은 비물질적 노동의 시대에 잔류하고 있는 물질적 노동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4. 《무한도전》과 한국 사회
예능 프로그램 따위는 현실의 문제와 관계없다는 생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무한도전》과 같은 프로그램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단순한 사안을 복잡하게 만드는 지적 허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문화 형식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라는 삶의 터전에서 발생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엄연히 ‘문화’라는 것은 자연적이기보다는 인간적 활동의 산물이다. 여기에서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따라서 다양한 이론적 설명들이 나올 수 있지만, 특정한 문화 형식을 현실의 논리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현상이나 징후로 본다는 점에서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헤겔주의적 관점에서 형식은 결국 내용의 논리라고 정의 할 수 있다. 문화 형식이 보여 주는 그 ‘내용의 논리’는 결코 총체적인 방식으로 주체에게 인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주체도 그 내용에 포함되어 있는 작용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경험주의처럼 경험을 초월한 완전한 ‘백지 상태’가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문화 형식은 인식의 오염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확실히 문화 형식에 대한 분석에 적대적인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이런 경험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반지성주의를 떠받치는 유력한 논리 구조를 형성하는데, 한국 사회는 이런 철학의 이데올로기화 과정을 잘 보여 주는 ‘동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무한도전》을 자본주의의 축적 체제나 욕망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은 사소한 작업이라기보다 중요한 개입이다. 모든 문화 형식은 언어, 더 나아가서 코드라고 부르는 기호의 약속 체계에 따라 만들어지고 지속된다. 이것을 구조주의 기호학이 정의하는 것처럼 의미화 또는 상징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고, 라캉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것처럼 ‘판타지의 발명’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특정한 문화 형식이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는 과정은 일정한 ‘선험적 체계’의 작용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 약속의 체계에서 작동하는 논리를 밝혀내는 것이 바로 문화비평 행위에 내재한 목적이다.
《무한도전》에 대한 대중의 관심, 그리고 거기에 투영되어 있는 잉여의 욕망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광인들에게 그랬듯이, 정상성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기 때문에 추방해 버린 것들이다. 이렇게 추방된 것들을 스펙터클로 만들어서 귀환시키는 ‘멀쩡한 바보들’이 바로 《무한도전》의 광대들이다. 이렇게 과거의 것은 언제나 현재성으로 귀환한다. 《무한도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희극성은 도전에 실패한 자들, 또는 일시적으로 성공했지만, 언제 닥쳐올지 모를 그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위무의 판타지이다. 이런 맥락에서 《무한도전》에 대한 문화비평은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뒷담화’가 아니라, 이 형식의 논리를 지속시키는 집단적 욕망에 대한 이론적 개입을 의미한다. 이 과정을 통해 문화 형식은 정상성의 재현으로 셈해지지 않는 잉여의 자리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현실을 구성하는 자본의 작용과 정치적 헤게모니의 충돌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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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택광
문화비평가. 경희대학교 대학원 영미문화전공 교수. 1999년 《씨네21》을 통해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 미술, 영화,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 등을 펴냈다.
김봉석
영화평론가. 《씨네21》, 《한겨레》에서 기자로, 《브뤼트》에서 편집장으로 일했다. 영화, 만화, 장르소설 등 대중문화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등이 있다.
권경우
문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대학문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대학문화의 생성과 탈주》(공저), 《신자유주의 시대의 문화운동》, 《아이돌》(공저) 등이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대중문화 속에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읽어 내는 작업들을 진행하는 중이다. 대중문화 블로그 ‘더키앙 http://www.thekian.net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에세이집 《대한민국 남자들의 숨은 마흔 찾기》가 있다.
황진미
원래는 의사로, 진단검사의학 전문의다. 2002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데뷔, 현재 《한겨레》, 《한겨레21》, 《시사저널》 등 여러 매체에 영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기고하고 있다. 공저로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 《의학과 문학》, 《올드보이 백서》 등이 있다.
김종갑
건국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문화철학에 관심이 많고 몸문화연구소 소장이다. 《타자로서의 몸, 몸의 공동체》, 《근대적 몸과 탈근대적 증상》, 《그로테스크의 몸》(공저), 《내 몸을 찾습니다》(공저)를 비롯해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김소연
영상예술학과 박사과정 졸업, 연세대학교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실재의 죽음》, 《환상의 지도》 등의 저서와 《삐딱하게 보기》,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등의 역서가 있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시사IN》, 《씨네 21》 등에 미술평론과 시평을 고정 연재한다. 교통방송, 교육방송의 미술 패널로 출연했다. 서울대학교, 국민대학교 등에 출강 중이며, 자전거 7대를 소장한 자전거마니아다. 《새빨간 미술의 고백》을 비롯해 여러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거처는 www.dogstylist.com이다.
정여울
독문학을 전공했고,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영화와 드라마,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국민국가의 정치적 상상력》(공저),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시네필 다이어리 1, 2》가 있다.
이재원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통번역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텍스트 언어학, 기호학 그리고 수사학으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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