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락치의 조건
“일 학년 C반 이마노. 육 교시 끝나고 학생회실로 오세요.”
같은 말이 두 번 반복되고서 스피커는 침묵했다.
아무리 짚어봐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호출당할 일이 없다. 입학 정원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소위 ‘지상의 아이들’ 가운데 수석으로 들어왔다거나, 그 반대로 누군가가 입학을 포기한 자리에 보결로 턱걸이했다면 눈에 띌 법도 했지만 합격자 가운데 마노는 루비와 나란히 꼭 중간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이 넓은 학교 안에 학생회실은 어디 붙어 있나.
한 반의 정원은 25명, 각 학년의 반은 A부터 Z까지 총 26개. 반 구별은 출결 관리에나 쓰이는 것으로 별 의미가 없고, 학생들은 120개 이상의 강의실을 옮겨 다니며 정규 과목과 선택 과목 수업을 들었다. 한 학년의 정원 650명 중 10퍼센트인 65명이 지상 출신 전형자들이었는데 올해 비율은 여자 36명, 남자 29명이었다. 쌍둥이가 동시에 이곳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처음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확률적으로도 드물다는 사실 외에는 특이 사항이 그다지 없었다. 입학식이 끝난 지 이틀째일 뿐인데 누가 왜 부르는 걸까?
기숙생들은 적응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입학식 1개월 전부터 방주시로 이주를 마치고 각종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했다.
이 높이까지 올라오는 데에 쓰이는 초대형 엘리베이터 전용 건물부터 압도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동시대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서 제도나 문물은 지상에 있을 때와 형식 및 외양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상에는 없는 예측 불허의 첨단 시스템이나 문명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저 기본적인 데서 기능이 더 발전되고 규모가 커지거나 조금 더 세련되거나 옵션이 붙었다. 마노와 루비같이 이미 한번 와본 적 있는 아이들은 어지간히 웅장하고 화려한 정도로는 놀라지 않았다.
그래도 옛날엔 몰랐다가(혹은 모르는 척했다가) 지금 와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이곳 사람들 절대 다수가 보유한 상상을 초월하는 부였는데, 이것은 그 자체가 특징이자 다른 모든 특징들의 이유가 되었다.
적응해야 할 진짜 대상은 이곳이 자랑하는 절대적인 높이였다. 체감하기 어려운 초현실적인 수치의 높이가 이곳 사물들에 공연히 신비성을 부여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규모 때문에, 지상에도 분명 있을 법한 것이 단지 여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고급스러워 보였다. 공들여 만든 도시의 요소요소는 각각 한 편의 완결성을 가진 작품이었다.
돔과 안전거리를 유지하도록 이곳 건물들은 최대 30층이 넘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어서 각 건물의 높이가 심리적 부담을 안겨줄 만큼은 못 되었다. 다만 장소가 주는 일종의 착시 현상으로, 딛고 선 발아래로 뻗어 있는 1200미터에 대한 상상이 단조로운 수직과 수평을 무한 확장하여 무수한 입방체를 확대 재생산했다. 지상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이 시각 자극에 저마다의 더듬이를 최대한 활성화시키며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그 바닥에는 공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모자람 없는 침전물이 깔려 있었다.
마노도 속이 울렁거렸다. 옛날에 3박 4일간 머무른 곳이었음에도, 처음 와보는 것처럼 또는 자기가 못 올 데를 온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너무 오랜만이거나 그사이 도시가 더욱 찬란해졌거나 일 텐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사막에 던져놓아도 선인장이나 낙타 수준의 적응력을 자랑할 루비 같은 아이 한둘을 제외하고는, 합격생들 가운데 대부분이 마노와 같았다. 입학 한 달 전부터 합격생들을 불러 모아 적응 훈련을 시키는 이유는 바로 이 높이였다. 문명에 대한 적응 또는 오심(惡心)에의 적응.
2개월 전.
나란히 합격 통지를 받은 마노와 루비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 소위 ‘지상의 아이들’은 옛날 교감이 약속했던 대로 학비를 면제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등록금과 수업료만이었고, 방주고에서만 사용하는 전용 전자 교재 대금과 교복을 비롯해서 다달이 드는 기숙사 비용은 일시불로 완납해야 하기에 드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엄마 아빠는 입학 준비로 적금 하나와 보험 두 개를 해약한 날, 두 남매의 휴대전화에 월 사용 한도가 정해진 포인트 결제 기능을 입력했다.
“친구들 사귀면 먹는 거나 사복이나 해서 로데오 거리에 들락거릴 일이 있겠지. 아껴 써. 이번 달 사용 한도에 못 미치면 다음 달로 이월되게 조정해놓았으니까, 안 쓰고 모아놨다가 정말 필요한 데다 몰아 써도 돼.”
루비가 열여섯 자리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개인 식별 정보가 저장된 투명한 홀로그램이 화면에 떠올랐다.
“이게 거기 올라가서도 되나?”
“전 지구에서 다 돼. 사막이나 밀림, 극지방은 빼고. 휴대전화 잃어버리면 바로 연락해, 홀로그램 정보를 변경해야 하니까.”
기숙사 비용 다음으로 고가는 교복 대금이었다. 지상의 아이들은 방주시에 전원 입주한 뒤 지도 교사의 인솔에 따라 단체로 교복을 맞추게 되어 있었다. 방주고의 교복 투피스는 지상에서 유통되지 않는 특별 원단으로 제작된다고 했다. 자주 세탁하기에 기본 2장을 구비해야 하는 드레스 셔츠만 해도 유기농 60수 트윌 면에 앞가슴의 장식 자수는 수작업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의 고가라면 디자이너의 이름값이라고 남매는 짐작하며, 적어도 이걸 입고 졸업할 때까지는 더 이상 키가 자라면 안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그게 앞으로 너희들의 일상이 될 거라고―아니 되어야 한다고 했다. 새 생활로의 부화는 그렇게 감가상각비의 계산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에 처음 올라온 날, 지상에서 온 합격생들은 ‘데칼로그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12층짜리 기숙사 건물에 들어섰다. 시차도 없는데 장거리 비행이라도 마친 듯, 모두가 각자의 트렁크를 끌고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로비에 집합했다.
단체 규율이 생명인 기숙사라는 장소를 생각해볼 때 더없이 어울리는 숙소 이름이었다.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을 복제한 경건하고 역동적인 그림이 로비 벽면에서 아이들을 맞이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처단하는 내용의 그림 속 인물들은 엄숙하거나 겁에 질린 표정이었고 아이들은 공연히 위축되었다. 그때 사감 교사 대표가 앞으로 나와서 입실 요령을 설명했다.
“합격증 확인 받으셨고 지문 등록 다 하셨지요? 지금부터 설명 잘 들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그 무거운 트렁크들 갖고 쩔쩔매는데, 방에 못 들어가요. 여기 주목! 우리가 지금 모여 있는 일 층은 보시다시피 기숙사 로비예요. 관리실하고 사감실 있고, 자세한 구조랑 시설들은 나중에 설명해드릴게요. 보시면 이 층부터 육 층까지 여학생들 방입니다. 칠 층은 식당하고 매점이나 세탁실, 운동 센터 같은 편의 시설 있고요, 팔 층부터 십이 층까지 남학생들 방입니다. 사감 선생님들 따라 각각 줄 맞춰서 가세요. 남학생들은 동쪽 엘리베이터 두 개, 여학생들은 서쪽 엘리베이터 두 개. 문 옆 인식기에 자기 지문을 대지 않고 그냥 타면, 탄 사람 머릿수하고 인식한 지문 개수하고 맞지 않아서 문이 안 닫힙니다. 남학생 쪽 엘리베이터는 이 층부터 육 층까지 안 서요. 여학생 쪽 엘리베이터는 칠 층 위로는 못 올라갑니다. 잘 알아두셔야 해요. 남자가 서쪽 엘리베이터에 몰래 올라타봤자, 지문으로 신분을 확인하니까 문이 안 닫힌단 말예요.
각 층에 방은 열네 개씩 있고요, 같은 학년 둘이서 한 방을 씁니다. 이, 삼 학년 선배들하고는 식사 시간이나 휴게실, 언제 어디서든 마주치게 되겠죠. 자기 학년 중에 기숙사 쓰는 사람 얼마나 되겠어요. 얼굴들을 오늘내일 사이로 싹 다 익혀놓는 게 좋아요. 그러고서 기숙사 생활 중에 모르는 얼굴이다, 처음 본다, 이런 사람하고 마주치면 아, 이 사람은 선배구나. 그냥 바로 꾸벅 인사하세요. 여기 인사한다고 생뚱맞게 쳐다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다 기분 좋게 받아줍니다. 게다가 지금 다들 타향살이 떠나온 사람들이잖아요. 적은 인원이 이 초호화 시설 안에 살아가면서 서로 의지하고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힘들어요. 어쨌든 같은 층에서도 홀수로 남은 사람은 방을 혼자 쓰기도 하고, 남는 방들은 간혹 방에 보수 문제가 생겼을 때 옮겨 가는 예비용으로 쓰입니다. 아시겠어요?
이제부터 여학생들은 이쪽 여자 사감 선생님 따라 이동하시면 됩니다. 각 방문 앞에 자기 이름 적혀 있는 데로 들어가면 돼요. 누가 자기 룸메이트인지 가보면 바로 알 거고.”
그때 루비가 손을 들었다. 루비는 조금 전에 자기 휴대전화를 꺼내느라고 트렁크를 여닫다가 다쳐서 손가락에 밴드에이드를 감고 있었다.
“선생님, 조금 전에 엄지손가락을 다친 사람은 어떻게 하지요?”
“양손을 다 다쳤나요? 양쪽 엄지 지문을 등록했을 텐데.”
“네. 오른손만인데요. 엘리베이터 탈 때는 어느 쪽을 대나요?”
“오른손 왼손 어느 쪽이든 양손 등록만 했으면 상관이 없어요. 간혹 양쪽 엄지가 다 다친 사람은 사감 선생님한테 따로 말해서 둘째손가락을 등록하면 됩니다. 열 손가락 다 다친 사람들은 별도 인식 장치를 대여해주니까, 다친 사람 있으면 지금 손들고 말해요.”
루비 외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신입생들은 남녀로 갈려 각각 2열 종대로 서서 사감을 따라갔다.
짐을 풀자마자 아이들은 같은 방을 쓰는 친구와 눈인사 외에는 나눌 시간이 없었다. 즉시 옷장에 들어 있는 지정된 추리닝을 입었다. 단체 추리닝이라니 얼마나 끔찍한 옷일까 루비는 생각했으나, 프랑스 어느 대학에서 왔다는 의상학과 교수가 디자인한 거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 실물을 보자 원단의 질은 기본이고 몸에 밀착되어 이루는 라인이나 파스텔 톤의 색깔이 생각만큼 혐오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각자 휴대전화를 갖고 식당에 모여 기숙사 생활의 규칙을 들었고, 지시에 따라 휴대전화에 다운받은 학교 어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켜서 학교 시설물 안내를 보고 들었다.
학교 부지 전체를 둘러싸면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으로 기다란 타원이 그려지는데, 그 안에 고등학교 말고도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함께 있었다. 타원의 총넓이는 약 560제곱미터. 도시의 총면적이 39.5제곱킬로미터라는 점에 비추어 학교 부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다. 부속 유치원,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이중 고등학교에만 지상의 아이들이 올 수 있었는데 앞으로 10년 안팎 성과를 보아 ‘지상의 아이들’ 전형을 중학교까지 확대할 거라고 한다.
그 밖에 히스기야 관(체육관), 호산나 관(대강당), 오병이어 당(식당)을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이 있는 르호보암 관(학생회관), 특별활동이나 특별수업 및 우수한 인재들의 개인 연구실들로 이용되는 아디엘 관(스터디센터), 방주시 중앙도서관의 규모에 못지않은 교내 도서관인 코헬레트 관과 어린이 전용 도서관. 그리고 중학교 건물에 이웃한 이곳 기숙사. 앞으로 특별 수업이나 연구 용도의 스터디센터가 두어 채 정도 더 지어질 거라고 한다. 그 밖에 ‘마라나타 길’ ‘누룩의 길’ ‘겨자씨의 길’ 등 성경에서 이름을 딴 각종 산책로와 공터 등에 아름다운 조경이 갖추어져 있다. 필요한 모든 문화가 다 갖추어져서 기숙생들은 학교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어 보였다.
1차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저녁 시간이었다. 기숙사에서의 첫번째 식사로 저녁 메뉴는 소 안심 스테이크 반쪽과 시금치 퓌레를 중심으로 하여, 공동의 식탁에는 올리브유에 발사믹 식초를 첨가한 소스를 찍어 먹는 빵들과 오리엔탈 드레싱 샐러드가 놓여 있었고, 후식으로는 에푸아스 치즈 한 조각과 얼 그레이 티가 나왔다. 아이들은 각 방에 딸려 있는 욕실에서 교대로 목욕을 마치고 점호를 받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양 벽에 붙은 두 개의 침대에 나눠 눕고서야 마노는 같은 방을 쓰는 배두인이라는 친구와 제대로 인사를 할 시간이 생겼지만, 그 녀석은 가만 보면 혼자서 뜻 모를 진언 같은 걸 중얼거리는 일이 많아서 되도록 신경 쓰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두인이는 불경을 한 구절씩 읽고 외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는데, 두인이 이런 철저한 미션스쿨에 입학이 허가된 것은 우수한 성적 외에도 ‘우리는 만인에 대해 차별 없이 열려 있습니다’를 광고하기 위함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이들은 절반 이상이 간밤에 잠 못 이룬 후유증을 얼굴에 주렁주렁 달고 식당에 모였다. 아침은 일본식으로, 채소와 된장을 넣고 끓인 조우스이라는 죽에 굴을 넣은 것과 작은 꽁치구이 한 마리, 매실 조림과 낫토 등 네 가지 반찬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양식·한식·일식·중식 전문가들이 학생들의 두뇌 회전과 시간별 신체 상태를 고려한 최적의 식단을 구성한다고 했다.
맛이야 나무랄 데 없지만 뒤숭숭한 기분으로 마친 아침 식사 후 인솔 교사를 따라 히스기야 관으로 단체 이동했다. 로데오 거리에서도 최고급 원단과 섬세한 바느질로 손꼽히는 부티크에서 디자이너와 어시스턴트 두 명이 출장을 나와 아이들의 교복 사이즈를 재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교복 맞추기가 끝난 뒤 아이들은 학교 시설 곳곳을 안내받으며 각 건물의 상세한 역사 안내와 이용 교육을 받았다. 코헬레트 관을 둘러본 뒤에는 사감 대표의 안내도 있었다.
“좀더 폭넓은 공부와 수준 높은 연구를 위해 방주시 중앙도서관으로 가서 대출증을 등록하기 원하는 사람은 따로 앞에 모이기 바랍니다.”
그 방송에 따라 앞에 모인 이들은 65명 가운데 갑작스러운 맹장염 때문에 에녹중앙병원으로 실려간 한 명을 제외한 모두였다.
어린 시절 3박 4일간 스쳐 갔을 때 마노는 외부인이며 구경꾼이었다. 이번엔 이곳에서 생활하기 위해, 이곳 시민의 품위와 자격을 갖추기 위해 지상의 합격생들은 오리엔테이션 기간 동안 방주시 곳곳을 거의 하루에 한 곳씩 들러서 그곳을 이용하는 요령, 이용 자격, 일상생활의 관습이나 물가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아이들은 가끔 자신들이 도시라는 인체를 정밀 해부 실습하는 중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때로, 원시인이나 다른 행성의 아이들이 지구 문명 세계로 와 철저하게 교육받는 듯한 모욕감까지 느꼈다. 아니, 뭐 이런 사소한 것까지? 우리가 이거 처음 보는 줄 아나 봐. 이런 것쯤은 지상에도 다 있거든요! 이런 불평도 얼굴에 드러났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어떤 날도 심리상담 날처럼 의아하고 수상쩍지는 않았다.
그날도 방송 안내에 따라 아디엘 관 7층에 있는 심리상담연구실로 옮겨 간 아이들은, 중학교 시절의 한 뼘짜리 보건실만 한 상담실을 생각하고 갔다가 문밖에서 저마다 주춤거렸다.
상담실이라면 보통 전공과 담당 교과목이 따로 있는 교사가 겸직 발령을 받아서 그 자리가 대개 비어 있는 방이었으며, 때로는 보건실과 함께 교사들의 뒷담화 장소로 쓰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특별 지도 대상자인 문제아들이 두들겨 맞거나, 교무실 구석 여유 공간이 모자라 끌려온 몇몇 아이들이 단체로 기합을 받는 일은 있어도 진정한 상담이 이루어지는 곳은 아니었다. 때문에 당최 상담실에서 연구는 무슨 얼어 죽을 연구를 한다는 건지, 코웃음 치면서 따라간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온 심리상담연구실은 7층 절반을 차지할 만큼 컸다. 방의 크기와 연구 효율 및 성과와의 정확한 상관관계는 증명된 바 없지만, 그 안에서 형식적인 상담 이상의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만은 짐작게 했다.
“들어오는 순서 상관없이 하나씩 자리 잡아 앉으세요.”
흰 가운을 입은 심리상담연구실의 담당 교사가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실험심리학 박사’라는 직책과 이름이 두 줄로 적힌 명찰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깨끗하고 빳빳한 가운과 연구실에 비치된 기자재들이 주는 전문적인 분위기에 조금씩 호기심이 생겼다.
“각자 자리에 앉으시면 투명한 책상 아래로 모니터가 보일 겁니다. 오른쪽에는 헤드폰이 걸려 있고요. 이 헤드폰을 먼저 씁니다. 아니 거기, 지금 말고요. 지금은 설명 먼저 듣고, 제가 쓰라고 하면 쓰세요. 헤드폰을 쓴 다음에 먼저 화면에 나타나는 지시대로 자기 합격 번호하고 이름을 입력하세요. 그다음 화면이 넘어가면 헤드폰에서는 음악이 나올 거고요, 화면에서는…… 다들 한 번쯤은 이름 들어봤을 거예요. 로르샤흐 검사하고 착시 그림 같은 거, 뫼비우스의 띠를 응용한 에셔M. Escher의 그림들. 다 본 적 있지요? 그런 그림들이 계속해서 나올 거예요. 그걸 그냥 집중해서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헤드폰 상단 안쪽에 부착된 뇌파 감지기가 여러분의 현재 상태와 정신적 피로도를 비롯한 심리 전체를 해석하고 그 결과를 저한테 전송해줄 거예요. 그림 보고 음악 들으면서 뭐 애써 이것저것 생각하려고 용쓰지 않아도 되고 그냥 멍하니 보면 그만입니다. 그림을 보다 보면 조금씩 잠이 올 텐데 그대로 의자에 기대서 눈 붙여버려요. 여러분이 잠들면 수면 상태에서…… 뭐라고 설명해야 다들 쉽게 알아들으려나. 보통 꿈으로 많이 나타나는 무의식 가운데 어떤 것들, 자기가 원하는 것, 기억, 이런 것들이 산출 및 종합 분석돼요. 무슨 얘기인지 알겠지요? 한마디로 오늘 이 시간 면대면 상담은 없습니다. 이게 다예요. 그럼 질문 있는 사람?”
박사는 아이들 속에서 올라온 손을 보고 고갯짓했다. 마노는 자기 옆자리에 앉은 그 아이를 돌아보았다. 야생 들쥐한테 뜯어 먹히다 만 듯 아무렇게나 들쭉날쭉하게 친 짧은 머리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표정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는데, 입을 열자 목소리로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희들 개개인의 욕망인지 기억인지를 무작위로 캐내 가지고 상담 자료로 쓰겠다는 얘기 같은데요. 사람을 직접 만나보고 얘기해봐야 그 사람이 뭘 생각하는구나 어떤 사람이구나 아는 거지, 상담의 주요 요소인 라포르 형성을 배제하고 이런 식으로 굳이 기계 장치를 써가면서 전원의 심리를 체크하는 게…… 효율적이긴 하겠지만 썩 유쾌한 방법은 아니잖아요?”
그때 몇 초 사이 마노는 이상한 눈치를 챘다. 티나지 않게 애쓰지만 분명 동요하다가 곧 제자리를 잡는 박사의 눈동자와, 3시 방향 벽에 붙어 서 있던 사감 대표가 자신의 휴대전화에 무언가를 끼적거리는 모습이 묘하게 관련 있어 보였다.
마노는 ‘너 찍혔어, 인마’라는 뜻으로 다시 옆자리를 돌아보았는데, 그 아이는 그런 분위기 따위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박사는 사감 대표와 오묘한 눈빛을 교환하고서 대답했다.
“아. 그래요.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뭔가 시험받는 듯해서 유쾌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면 우리 한번 생각해볼까요. 지금 질문한 학생은 설탕이 달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요?”
“맛을 보면.”
“그러면 불이 뜨겁다는 걸 어떻게 알지요?”
“그야 만져보면.”
“그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몇 도나 되는지 알아보려면 살가죽이 다 벗어질 때까지 만져봐도 모자라겠지요.”
“……”
“이렇게 인간이 감각만으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건 정확한 데이터를 얻는 데 실패할 확률도 높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불이 몇 도나 되는지를 알아보려면, 꼭 온도를 재는 도구가 필요해요. 사람은 도구를 만들지만 도구는 사람 생활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요. 인간 본연의 감수성과 정서를 존중하는 우리 철학적 관습 때문에 처음에는 익숙지 않겠지만, 믿고 맡겨주시면 반드시 정확하고 공정한 데이터를 얻어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말해둘 것은 이 데이터가 여러분에게 어떤 불이익을 주는 용도로 쓰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또 여러분의 데이터를 옆자리 친구도 알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관리한다는 거예요. 여러분을 가르치고 관리해야 하는 선생님들은 물론 필요에 따라 이 데이터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학생에게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모르고서는 도움을 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의 담임 선생님조차도 이 데이터를 열람하기 위해서는 세 단계의 보안과 합당성에 대한 검토를 거칠 것입니다. 이후에도 선생님이 이 데이터를 외부로 복사하거나 유출하는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도록 감독 관리에 만전을 기할 거고요. 마지막으로, 그런 일은 거의 있을 수 없지만 이 데이터를 토대로 하기는 하되 검사에서 미처 발견되지 않은 개개인의 특성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학기 중에 면대면 개별 상담은 꾸준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조금은 원하는 대답이 되었는지.”
질문자는 썩 만족스러운 눈치는 아닌 듯했지만, 박사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꼭 확실한 조치와 반성을 기대하기보다는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행위 자체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듯, 다른 말 없이 이어지는 지시대로 헤드폰을 머리에 썼다.
마노도 헤드폰을 쓰면서 상대가 눈치 못 채게 곁눈질했다. 잠깐 드러난 옆얼굴은 뜻밖에도 작고 지나치게 하얘서 헤모글로빈이 부족해 보였다. 곧바로 턱을 괴었기 때문에 얼굴이 가려졌지만, 마노는 스쳐 지나가듯이 본 속눈썹이 무척 길다고 느꼈다.
화면에 합격 번호를 입력하고 ‘다음’을 터치하자, 인적사항 관리에 대한 안내문에 동의하는 과정을 거친 뒤 첫번째 그림이 나왔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졸음이 모래 폭풍처럼 덮쳐오기 시작했다. 박사가 잠을 억지로 참을 필요는 없다고 했으니 마노는 그대로 졸음에 몸을 맡겼고, 다른 아이들도 정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사정은 비슷해 보였다. 긴장을 이완시켜 수면을 유도하는 나른한 음악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유사(流沙)같은 잠에 빠져드는데, 꿈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눈앞에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노가 이 도시로 다시 올 마음을 먹게 한 그 아이.
‘저는 여기 사람이에요.’
그 아이를 언젠가는 만날지 모른다는 기대만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공부에 결정적인 추진력이 된 건 사실이었다. 루비는 마노가 불가능해 보이는 방주시 입성에 난데없이 열의를 보이자, 동생이 하는 걸 자신이 못하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며 따라 도전했다. 그러니까 두 아이를 방주시로 끌어올린 건 이름도 모르는 시나이 광장의 아이였다. 마노의 기억에 남아 있기로는 그 아이가 자신들과 동갑이거나 많아야 한두 살쯤 더 먹었을 터였는데, 이름 석 자 없더라도 39.5제곱킬로미터라는 제한된 범위와 열일곱에서 스물 사이 연령대의 여자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를 활용하여 이러한 사람 찾는다고 한마디만 올리면 당장 찾는 것도 시간문제겠지만 그래서는 큰 의미가 없었고, 별로 좋은 일을 계기로 만난 것도 아닌 만큼 만천하에 알리는 일은 그 아이와의 추억을 훼손시키는 것 같았다.
마노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은색 펜던트를 추리닝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다 어느덧 꽤 깊이 잠들었다. 감은 눈앞에는 그때의 일이 연속 스틸처럼 떠올랐다.
광장에서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그때까지도 단추에 걸려 하늘거리던 머리카락 한 뭉치. 마노가 멍하니 셔츠를 부여잡고 선 모습을 보다가 옷을 빼앗으며 루비가 하던 말.
‘내놔봐, 답답해가지고.’
여행지에서 얻는 물건과 인연에는 무언가 특별한 뜻이 있거나 그것 자체가 미래에 대한 일종의 예지라는 미신적이고 낭만적인 믿음이 있었던 루비는, 머리카락을 둥글게 말아 이리저리 꼬더니 리본 모양으로 매듭을 지어 놓았다. 머리카락으로 장식을 만들었다는 데서 비롯되는 원초적이면서 불가항력인 섬뜩함을 그 부드러운 모양이 잊게 했다. 루비는 마침 광장 가판대에서 사온 은색 펜던트 안에 그걸 담았다.
‘아니, 그렇게까진 안 바랐는데. 이런 것도 있어서.’
마노는 이름 모를 소녀가 준 레몬색 레이스 달린 손수건을 흔들어 보였다. 피를 찬물로 곧바로 지우지 못해서 힘주어 세탁했음에도 손수건에는 희미하게 얼룩이 남아 있었다. 루비는 마노의 목에 펜던트를 걸어주었다.
‘엄마가 우리더러 다시 방주시로 입성하라고 그런 건 진심일 거고, 혹시 알아, 이걸 부적으로 삼아두면 언젠가 다시 그 아이를 만날지도 모르지. 너 딱 보면 내가 모를 것 같아? 그 아이 보고 그냥 한눈에 뻑갔으면서. 굳이 그걸 뒤쫓아가서 뭐라고 말했는지 나한테도 결국 안 가르쳐주냐. 퍽도 좋을 때다, 순진해빠져서는.’
(본문 ‘프락치의 조건’ 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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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구병모
2009년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장편소설 『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 『방주로 오세요』, 소설집 『고의는 아니지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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