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
잊혀 버린 뿌리
새 대통령의 고향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딕슨 시 전체가 한껏 숨을 죽인 것 같았다. 시민 수천 명이 도시 중심부의 연단 앞에 모여 있었다. 지역 상인, 사료 가게 점원, 곡물 창고에서 나오는 가루를 뒤집어쓴 건장한 남자들, 록 강 하류 쪽에 있는 철강 공장에서 일하는 땀투성이 노동자들이 눈에 띄었다. 시골에서 픽업트럭에 몸을 싣고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려온 사람도 있었다. 큰 탑같이 생긴 곡물 창고와 옥수수 밭을 지나고 딕슨 시 사방에 끝도 없이 뻗어 있는 아담한 농가들까지 지나고 나서야 시내로 통하는 아스팔트 도로가 나왔다. 세계의 중요한 사건과는 거리가 먼 지방에서 평생을 산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고향 사람인 헤너핀 애버뉴의 더치 레이건(더치는 레이건의 아버지가 갓난아이인 아들이 뚱뚱한 ‘네덜란드 사람’ 같다며 붙여 준 별명이다. ― 옮긴이)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하는 축제를 구경할 기회를 놓칠 사람은 없었다.
더치가 194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명성을 얻으면서 고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너나없이 나서서 레이건에 대한 기억을 늘어놓았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레이건 사촌’이라고 적힌 작은 현수막을 목에 건 사람도 몇 십 명 있었다. 노점상들은 군중 사이를 헤쳐 가며 네덜란드식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사과 파이를 팔았다. 노인들은 그 위대한 사람과 우연히 마주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로웰 공원에서 인명 구조원을 하던 시절에 레이건이 록 강의 급류에 휘말린 사람들을 휙 낚아채서 구했다는 이야기에서, 1941년에 딕슨 극장에서 자기가 출연한 영화 <국제 비행대대International Squadron>가 특별 개봉했을 때 젊은 희극배우였던 밥 호프를 비롯해 할리우드 명사들을 대거 대동하고 왔다는 이야기를 거쳐, 1950년에 또 다른 영화의 특별 개봉 때 찾아와서 흰색 팔로미노 말을 타고 걸리나 애버뉴에서 행진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딕슨 사람들은 훨씬 더 거대한 무대에서 레이건의 승리를 축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딕슨고등학교 밴드가 횃불을 치켜든 채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이름이 새로 붙은 다리를 건너 행진하고 축하객 수천 명이 컨트리앤드웨스턴 밴드와 트웰브벨스 청소년 합창단의 가락에 맞춰 춤추고 난 뒤 대단원의 막이 올랐다. 1980년 11월의 첫 번째 화요일 저녁 7시 15분에 NBC방송 앵커가 확성기를 통해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이 예상된다고 발표했다. 군중이 환성을 질러 대는 가운데 록 강 상공이 불꽃으로 덮이고 공화당과 민주당 당사에서는 공짜 맥주가 넘쳐 나기 시작했다. 『딕슨이브닝텔레그래프Dixon Evening Telegraph』는 재빨리 호외를 발행했다. 훗날 이 신문은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레이건의 승리를 머리기사로 다뤘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말을 타고 헤너핀 애버뉴를 달그락달그락 활보하는 카우보이 두 명의 익살맞은 행동 때문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두운 11월의 하늘을 수놓는 불꽃에 윤곽만 비치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오는 초라한 말의 안장에는 사람은 없고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카터는 안장에서 내려와라.” 이런 글귀가 눈에 띄었다.
그때만 해도 딕슨 사람들이 왜 카터한테 적개심을 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급등하는 인플레이션과 석유파동, 머나먼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 벌어지는 사태 등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전 10년이 딕슨에 나쁜 시절은 아니었다. 백악관을 떠난 뒤에도 고향에 붙박이로 산 조지아 주 플레인스Plains의 땅콩 농사꾼인 카터가 오히려 ‘인민주의자’인 척하는 후임자보다 보통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했다. 관습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농업지대인 중서부의 대부분 지역에서 1970년대에 다시 번영의 기미가 보였다. 인구 유출 속도가 줄어들고 농업과 제조업이 새로운 소생 징후를 나타냈다. 딕슨도 이 좋은 시절을 누렸다. 인플레이션율을 조정한 딕슨의 가구 소득 중앙값은 1970년대에 9퍼센트 늘었고, 제조업 고용 노동인구의 비율도 18퍼센트에서 26퍼센트로 상승했다. 딕슨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제조업 일자리를 구하는 것만이 번듯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이었다. 딕슨 인근인 스털링Sterling에 있는 노스웨스턴스틸앤드와이어 사는 지역 최대의 고용주로서 이 시절에 분주하게 돌아갔다. 직원이 5000명이었다. 대학 졸업장을 가진 사람의 수도 뚜렷하게 늘어났다. 소크밸리커뮤니티칼리지에서 딸 수 있는 준학사가 아니라 학사 학위가 있는 사람 말이다.
지역 농민들은 아마 불평이 없었을 것이다. 1960년대의 힘든 시기를 지난 뒤, 무역 장벽이 완화되고 소련이 미국산 곡물 수입에 의존하게 되자 1970년대에는 농가 소득과 상품 가격에 호황이 찾아왔다. 연방 정부와 은행들이 좋은 조건으로 신용을 제공하면서 농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81년 1월에 유가증권을 제외한 토지, 가축, 기계, 가정용 가구, 곡물 등 농민들의 실물 자산 평가액은 1조 500억 달러로 그보다 10년 전의 3020억 달러에 비해 크게 늘었다. 딕슨 주변의 농촌에서는 땅 투기와 곡물 수확으로 큰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가축을 팔아 버렸다. 돼지와 소들이 농촌 풍경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엄청나게 넓은 옥수수 밭과 콩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해마다 가을이면 트럭이 옥수수와 콩을 싣고 미시시피 강에서 대기하는 바지선으로 달려갔다. 자작농의 성공은 딕슨 상인들의 성공이기도 했다. 대다수 상인들이 사료와 비료·농기구·식품·직물을 취급하는데, 다시 번영을 구가하는 농민들이 이런 상품을 게걸스레 사들였기 때문이다. 상업 지구 한가운데서 가파른 언덕바지로 바뀌다가 딕슨의 유명한 아치를 지나 록 강으로 곤두박질치는 걸리나 애버뉴는 어느 때보다도 분주했다.
그러나 딕슨 주변은 보수적인 지역이었고, 현지인들로서는 지역 출신 탕아가 내놓는 경제 만병통치약의 효능을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 탕아는 오만한 연방 정부가 미국이 소생하는 길을 막고 있다고 설파하는 중이었다. 멀리 떨어진 워싱턴의 관료들을 본능적으로 불신하던 농민들은 ‘진창에 빠져 허우적대는 연방 정부의 농업 정책’을 일신하겠다는 레이건의 약속에 환호했다. 공장 노동자들은 레이건이 자기네 같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희생시키는 환경 규제를 철폐하겠다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복지 수급자 여왕’(조작이나 편법을 통해 과도한 사회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을 경멸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다. 196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이런 사람들을 비판하는 선정적인 기사가 등장했는데, 1976년에 레이건이 대선 경선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거론한 뒤로 민주당 복지 정책의 허점을 까발리는 표어가 되었다. ― 옮긴이)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은 열심히 일하는 딕슨 사람들에게 더없이 공정한 조치로 보였다. 물론 이것이 딕슨을 레이건 진영으로 몰고 가 레이건이 5755표를 얻은 반면, 카터는 1445표만 얻게 한 유일한 쟁점은 아니다. 동향 출신이 백악관에 입성하는 것에 대한 단순한 흥분도 작용했다. 또 관광객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만으로도 지역 사람들의 속물근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딕슨이브닝텔레그래프』의 호외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 외곽의 고속도로는 이제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는 길’이 아니었다.
쓰나미처럼 닥친 불황
그런데 대다수 딕슨 사람들이 알지 못했고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점은 레이건은 결코 제퍼슨 스미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에서 지미 스튜어트Jimmy Stewart가 분한 사람 말이다. 레이건은 특권 집단에 매수된 워싱턴에서 대중을 대변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레이건은 오래전부터 특권 집단과 운명을 같이했다. 그를 정치권으로 이끈 이가 바로 영화사 MCA의 거물, 제너럴일렉트릭의 중역, 미국 남부 선벨트 지대의 백만장자 들이었다. 스미스 씨와 비슷한, 레이건의 대중적인 페르소나는 정치 연극의 교묘한 소품이었을 뿐이다. 건전한 소도시 딕슨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배경일 뿐이었다. 딕슨의 성실한 사람들이 왜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레이건 당선 축하연이 끝나고 바로 다음 날 아침 해가 밝기도 전에 그런 징후가 나타났는데도 말이다.
가장 확실한 징후는 레이건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레이건은 당선한 날 밤에 낸시를 옆에 세워 둔 채 딕슨의 지지에 감사하다며 전화를 걸었다. 다음 날에는 지역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개선장군으로서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당연히 곧 레이건이 방문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귀향 행진을 위한 계획이 조용히 준비되었다. 도시 유지들이 그동안 레이건이 얼마나 자주, 언제 딕슨을 찾았는지 헤아려 봤다면 아마 그렇게 낙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80년 일리노이 주 예비 경선 선거운동을 하면서 도시를 찾기 전 15년 동안 레이건은 딱 한 번 이 도시를 방문했다. 1976년에 제럴드 포드를 상대로 예비 경선을 치르면서 자기가 소도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강조하려고 방문한 것이다. 그 전에 몇 번 도시를 방문했을 때도 기회주의의 냄새가 풍겼다. 저 유명한 1941년의 출현은 레이건이 <국제 비행대대>를 통해 B급 배우에서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믿은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 중역들의 아이디어였다. 그들은 레이건의 명성을 높이려고 루엘라 파슨스Louella Parsons와 귀향 축제에 동행하도록 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파슨스도 딕슨 출신이고 공교롭게도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력한 가십 칼럼니스트였다. 레이건은 1950년에도 같은 이유로 딕슨을 찾았다. 유니버설 영화사의 홍보 담당자는 고향 방문이 영화 <루이자Louisa>를 홍보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1980년에 딕슨에서 신임 대통령의 귀향 행진을 보려면 그의 정치적 이익에 도움이 될 만한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던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딕슨 사람들은 레이건이 당선한 직후 환호의 시기에만 그를 보지 못한 게 아니다. 임기 첫해, 두 번째 해, 세 번째 해까지 레이건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마침내 딕슨을 찾은 1984년에는 재선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카터가 워싱턴에서 떠나기를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던 몇 주 동안 레이건 부부는 캘리포니아에서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거가 끝나고 며칠 뒤 레이건은 부자 동네인 벨에어Bel Air의 교회에서 청중의 환호에 화답하고 비벌리윌셔Beverly Wilshire 호텔에서 며칠 동안 업무를 수행했다. 벨에어는 대통령 부처가 정말 고향으로 생각하는 동네였다. 훗날 워싱턴을 떠난 뒤에 백만장자들로부터 이곳의 저택을 은퇴 생활의 터전으로 선물 받았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도서관 터도 이곳에 골랐다.
두 번째로 냉대를 받은 것은 딕슨고등학교의 밴드인 마칭듀크다. 레이건의 취임식 행사에서 행진하는 20개 고등학교 밴드에 낄 거라고 생각한 학교 측은 새 제복을 주문하고 곡조에 맞춰서 연습을 시작했다. 그런데 취임식을 한 달 앞두고 마칭듀크는 초청 대상이 아니라는 연락이 왔다. 취임식 준비위원회에서 취임식을 매끄러운 방송 행사로 치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일류 고등학교 밴드, 즉 번쩍거리는 장비와 제복을 갖춘 돈 많은 학교 밴드만 부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텔레비전 방송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준비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이던 홍보 담당자 로버트 그레이의 말이다. “방송에 실제로 잘 나올 만한지를 기준으로 뽑았습니다.” 이런 냉대가 널리 알려지면서 준비위원회가 방침을 바꿔 마칭듀크를 포함시켰지만, 이 일화를 접한 일부 딕슨 사람들은 쓴 입맛을 다셨다.
이런 씁쓸한 입맛은 더 고약해질 것이었다. 레이건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성공 가도를 달릴 것이라고 기대한 딕슨 시는 얼마 있다 레이건 재정 정책의 따끔한 맛을 보게 되었다. 레이건이 정부 규모를 축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면서 국내 지출에서 극적인 삭감을 진두지휘했고, 그 효과가 일리노이의 고향을 곧바로 타격했다. 이게 다 대대적인 국방비 증강과 기업 및 개인 소득세 감면 비용을 메우기 위한 조치였다. 첫 번째 예산 삭감으로 저소득층 의료보험인 메디케이드Medicaid, 연방 세입 교부, 교육비 등의 지원에서 일리노이 주가 받는 액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런 삭감이 딕슨 시 문턱을 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첫 번째 희생양은 시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고용하고 있던 주립 정신장애 아동 보호시설인 딕슨발달장애센터Dixon Developmental Center였다. 주 예산이 삭감되니까 센터는 1983년에 문을 닫았고, 1200명의 직원이 일자리를 잃었다. 주 정부에서 예산 삭감이 또 진행되면서 딕슨 교육청에도 위기가 닥쳤다. 1985년에 운영자금이 부족해진 학교들은 스포츠 프로그램을 폐지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선수로 있던 축구부?레이건 취임식에서 연주한 고등학교 밴드·농구부·육상부 들이 모두 대공황 시절에도 살아남은 자랑스러운 전통이었는데, 레이건 대통령이 만들어 낸 궁핍 재정 상황에서 사치품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레이건과 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헬렌 로턴Helen Lawton은 돈을 마련해 주거나 기금 모금을 위해 이름을 빌릴 수 있는지 묻는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냈다. 레이건이 답장을 보냈다. “딕슨 학교들이 직면한 문제는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연방 차원에서 해 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레이건은 나중에 다시 편지를 보내 봉사단체인 딕슨키와니스클럽Dixon Kiwanis Club에서 돈을 기부한 덕에 로턴의 손자가 학교신문을 계속 펴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 기쁘다고 했다. “민간 부문이 개입해서 도움을 주는 걸 보면 언제나 기쁘답니다.” 1985년에 유권자들이 재산세 인상을 승인하고 나서 스포츠 프로그램들은 살아났지만, 딕슨의 학교들은 오늘날까지도 재정 안정화를 위해 분투하고 있다.
딕슨 주민들에게 더욱 가혹한 벌을 내린 것은 대공황 이래 가장 급격하게 밀어닥친 불황이었다. 레이건이 밀어붙인 정책의 직접적인 부산물이었다. 1979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는 통화 고삐를 급격하게 조여서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는 계획에 착수했다. 미국이 ‘통화주의’(정부가 경제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 가장 중요한 수단이 통화정책이라고 보며 시장 기능을 중시해서, 정부의 시장 개입에 반대하고 화폐가치의 안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이론이다. ― 옮긴이)를 완전히 받아들인 첫 조치였다. 이 경제 교리는 레이건을 파죽지세로 권좌에 올려놓은 보수 혁명의 일부였다. 신임 대통령은 통화주의 실험을 지지했다. 이 실험이 기업 도산과 대량 실업, 딕슨 같은 지역사회의 구조적 붕괴를 대가로 치르면서 인플레이션을 잡는 방식이었는데도 말이다. 연준의 긴축 통화 정책은 레이건의 적자 지출과 더불어 금리 급등을 낳았고 외환 대비 달러 가치를 한껏 높여 놓았다. 해외 기업들과 저가 경쟁을 하느라 기운이 빠져 있던 미국의 제조업체들은 거의 하룻밤 새에 달러 가치가 높아지는 바람에 시장에서 한층 더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불황은 쓰나미처럼 딕슨을 덮쳤다. 지역 최대의 고용주로 록 강 북쪽 기슭에 우뚝 서 있던 노스웨스턴스틸앤드와이어는 1980년대에 자금 출혈에 시달렸다. 값싼 수입 철강과 경쟁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까, 회장인 피터 딜런Peter Dillon은 철물점에 들어설 때마다 자기 할아버지가 세운 회사가 문을 닫을 지경에 처한 현실에 맞닥뜨렸다. 1984년에 회장이 어떤 기자한테 말했다. “철물점에 쌓여 있는 나사를 볼 때마다 그게 거의 전부 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아니까요.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건 우리 자유에 대한 위협입니다.” 미국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딜런이 파악한 것처럼 ‘우리 제조업 기반이 영영 사라지게 될’ 판이었다. 레이건은 미국 중공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가 대규모 제철 회사를 위해 구상하는 지원책은 조세를 감면하고 공해와 사업장 안전에 관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었다. 또 마지못해 철강 수입 제한을 시도하면서 자신을 추종하는 자유시장 근본주의자들을 저버렸다. 그러나 이런 시도도 기껏해야 철강 산업에 잠시 숨 쉴 틈을 주었을 뿐이다.
레이건은 미국 중공업을 부활시키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 추진한 정책은 중공업의 쇠퇴를 재촉했을 뿐이다. 1982년에 미국 제철 회사들은 설비의 40퍼센트를 가동하고 있었고, 이 부문에서 30만 명이 실업 상태였다. 전국 곳곳에서 속속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피츠버그, 버펄로, 시카고 사우스사이드South Side 등 여러 도시에 광대한 부동산과 엄청난 수의 실업자가 생겨났다. 대형 제철 업체들은 높은 노동비용과 공해 방지 및 보건 안전 규제를 준수하는 비용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했다. 철강 산업은 신기술에 대한 투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미국 기업들은 해외 경쟁자들에 비해 공장 현대화가 뒤진 상태였다. 효율적인 생산을 못 하고 특수강 시장에서 경쟁하지도 못했다. 다른 중공업과 마찬가지로 미국 철강의 구세주는 임금 양보나 규제 완화가 아니라 혁신에 있었다. 그러나 많은 제철 회사들이 1970년대 말부터 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이런 투자에 쏟아부을 자본이 없었다. 게다가 미국 철강 생산이 살아남을지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은행들로부터 냉대를 당하고 있었다. 자본을 입수할 수 있는 기업들은 흔히 단기 수익성이 더 좋은, 별 관련 없는 사업에 자본을 투자했다. 대표적인 사례인 유에스스틸U. S. Steel은 1980년대 초반에 마라톤오일Marathon Oil Company을 64억 달러에 인수하느라 현금 보유분을 탕진해 버렸다. 당시 철강 생산이 회사 사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도 안 되었다.
오직 정부만 대형 제철 회사들이 생산 능력 확대에 투자하도록 채무보증을 비롯한 유인책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런 지원의 선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1800년대에 연방 정부는 철로가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뻗어 나가도록 하는 데 자금의 상당 부분을 제공했다. 항공 산업이 생겨나는 과정에서도 정부의 후한 지원이 큰 구실을 했다. 훗날 국제 항공 여행을 지배한 보잉747도 이런 과정을 통해 제작되었다. 일본의 경제산업성이 유망한 기술에 대한 직접 투자를 돕지 않았다면 아마 전후 일본의 경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레이건 정부 후반기에도 이런 교훈을 새롭게 배웠다. 정부 보조금을 받는 하이테크 컨소시엄인 세마테크의 연구 성과로 미국이 반도체 제조 부분에서 선두 자리를 탈환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컨소시엄의 본부가 있는 텍사스 주 오스틴의 경제는 면모를 일신했다.
1982년에 철강 수입 제한 조치를 내린 레이건은 유럽 정부들이 직접적인 자본 제공을 비롯한 공공 보조금을 통해 부당하게 자국 제철 회사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 이 조치를 정당화했다. 이런 발견은 정부 보조금이 미국 중공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도 효과적일 수 있다는 명백한 깨달음으로 이어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레이건과 그의 참모들은 산업 정책이라는 관념 자체를 위장된 사회주의라며 무시했다. 그 대신 조세 정책과 규제 완화를 통해 합병, 투기, 물리적 실체는 없이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회사인 페이퍼 컴퍼니 등을 지원했다. 이런 식으로 생겨난 사업체들이 월가에는 큰돈을 안겨 주었지만, 미국 산업의 미래에는 거의 투자하지 않았다.
레이건 정책의 두 얼굴
새로운 방향을 약속하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레이건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야 했다. 그런 길 중 하나가 산업 투자를 장려하는 정부의 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만약 레이건이 이런 구실을 인정했다면, 자신이 한때 고향이라고 자부한 지역의 최대 고용주를 살렸을 것이다. 빌 클린턴은 두 번째 임기가 막바지로 향할 때쯤 정부가 철강 산업을 지원하도록 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1999년의 철강부문긴급대출보증법Emergency Steel Loan Guarantee Act에 따르면 노스웨스턴스틸앤드와이어는 생산 설비 현대화를 위해 1억 7000만 달러의 정부 보증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지원은 때늦은 조치였다. 그때 회사는 벌써 직원이 1400명으로 줄고 현금 보유고가 바닥 난 상태였고, 정부가 보증한 1억 7000만 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15퍼센트의 대출을 지원하겠다는 은행이 없었다. 2001년에 최후의 일격이 가해졌다. 중개인들이 이 회사의 고철 선적을 거부한 것이다. 고철을 녹여서 철로 만드는, 새로 시작한 전도유망한 ‘고철 재생’ 사업에 제동이 걸렸다. 노스웨스턴스틸앤드와이어는 120년 역사를 뒤로하고 문을 닫았고, 지역 경제 전체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소매업, 각급 학교, 부동산 시장, 보건 의료 시설, 그 밖에 지역의 경제 부문이 큰 타격을 입었다. 스털링 시장 테드 애건Ted Aggen은 회사가 문을 닫는 순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 오랫동안 이런 감정을 느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노스웨스턴스틸앤드와이어만이 아니었다. 딕슨 지역의 많은 사업체가 문을 닫거나 노동자들을 대거 내보냈다. 1982년, 지역의 목수노동조합은 조합 소속 건설 노동자 216명 중 160명이 실직 상태라고 보고했고, 딕슨 변두리에 위치한 론스타산업Lone Star Industries의 시멘트 공장에서는 전체 직원 135명 중 3분의 2를 정리 해고했다. 대다수 딕슨 사람들이 대통령의 모든 정책은 아니라도 많은 정책을 계속 지지한 반면, 실업자 중 상당수는 대통령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고 깨닫기 시작했다. “레이건은 자기가 어디 출신인지 잊어 버렸습니다.” 딕슨의 트럭운송노동조합Teamsters 교섭 담당자인 래리 설리번Larry Sullivan은 1984년에 불만을 털어놓았다. “최근에 내가 교섭한 단체협약 스무 건 가운데 겨우 세 건만 임금 인상을 확정했어요. 나머지는 현상 유지나 임시 삭감이죠.” 실직 중인 목수 로렌스 랠리Lawrence Lally는 대다수 딕슨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을 순식간에 간파했다. “그 사람은 절대 내 친구가 아닙니다. 레이건은 이 주변에 어느 누구한테도 해 준 일이 없어요. 그건 내가 장담합니다. 게다가 백악관보다 오히려 캘리포니아에서 휴가를 보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 같아요.” 랠리가 레이건을 두고 한 말이다.
딕슨의 유권자 가운데 누구보다 보수적이고 레이건 혁명을 지지한 사람들은 가족농이다. 이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레이건을 좋게 기억한다. 그렇지만 레이건의 정책에 배신감을 느낄 이유가 가장 큰 사람도 이들이다. 1980년대에 농민들은 대공황 이래 최악의 위기에 맞닥뜨렸고, 레이건은 상황을 악화하기만 했다. 레이건은 지지층의 핵심을 이루는 미국 농촌의 기반인 가족농을 구제하기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는커녕 가족농 수십만 명을 재정적 파탄으로 몰고 가는 한편 카길이나 몬산토 같은 거대 농산업체에 부를 안겨 주었다.
1980년대 초반에 세계적인 불황이 닥치면서 농산물 수요의 기세가 꺾였다. 연준의 긴축 통화 정책이 만들어 낸 달러 강세 때문에 미국 농산물은 해외시장의 가격경쟁에서 밀려났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뒤 카터가 소련에 대한 곡물 수송 금지령을 내리고 나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농산품 가격과 농가 소득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타격은 1970년대의 투기 열풍 속에 많은 농민들이 쌓아 놓은 막대한 부채가 갑자기 걸림돌이 된 것이었다. 1970년대에 대출을 장려한 연방 기관인 농촌주택청Farmers Home Administration이 1980년대에는 죽음의 신으로 변신해서 담보권을 행사하고 농민들의 땅을 압류했다.
이 문제에 대한 레이건의 해법은 뻔한 것이었다. 연방 정부의 농업 진흥 프로그램을 삭감하고 농산업의 자유기업 체제를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이런 해법이야말로 가족농을 구제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신뢰를 잃은 프로그램을 고수하고 정부의 통제를 늘리는 데서 우리 농업 문제의 해답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우리나라 농업 전체가 다시 자기 발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1985년에 레이건이 농가 정책에 관한 연설에서 한 말이다. 이보다 더 솔직하지 않은 말은 없었다. 당시 정부가 농가 보조금을 대폭 인상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혜택을 받을 주인공은 소농민이 아니라 대지주와 거대 기업농이었다. 1985년 농장법이 통과되면서 이런 속임수를 썼는데, 이 법의 목표는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 만큼 상품 가격을 낮춰서 농업 수출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당시 옥수수의 재배 비용이 25킬로그램당 평균 3.25달러였는데 1986년 중순의 판매가는 1달러였다. 농민들은 연방의 ‘차액 보상 제도’로 손실을 보상받았다.
농장법은 미국 농민들의 경쟁력을 개선하는 데 비참할 정도로 실패했다. 미국의 세계 밀 시장 점유율은 1981~1982년의 44퍼센트에서 26퍼센트까지 떨어졌다가 1988~1989년에 37퍼센트로 반등했다. 통밀은 54퍼센트에서 39퍼센트로 떨어졌다가 다시 52퍼센트로 올라섰다. 무엇보다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차액 보상 제도가 대농장에는 유익한 보조금이 될 만했지만 중간 규모 가족농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는 점이다. 중간 규모 가족농 중 기록적으로 많은 수의 농가가 부채를 갚지 못했다. 미국은행협회는 1985~1989년만 해도 40만이 넘는 미국 농가가 땅을 잃었다고 보고했다. 이런 와중에도 연방의 농장 지원 프로그램은 1984년 73억 2000만 달러에서 기록적으로 증가해 1986년에는 258억 달러였다. 그해 연방 예산 적자의 15퍼센트에 달한 액수다.
그러나 이 정책을 실패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이건에게 정말로 중요한 유권자 집단인 농산업체에게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곡물과 가축 가격의 침체는 카길과 콘티넨털그레인Continental Grain 같은 곡물 거래 기업들에게는 뜻밖의 횡재였다. 사실상 원재료를 싼값에 사들였기 때문이다. 곡물 거래 기업을 비롯한 대규모 농산업체들은 이 시기에 이윤이 폭증했다. 식품 가공업과 도매업은 198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이 좋은 산업의 반열에 올라섰다. 11년 동안 자기자본이익률이 평균 18.4퍼센트로 의료 산업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거대 농산업체들은 낮은 상품 가격의 혜택을 소비자들과 공유하지 않고 고스란히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1980년에서 1989년 사이에 농민에게 지불하는 가격은 40퍼센트 떨어진 반면, 소비자 식품 가격은 36퍼센트 올랐다. 미국이 한창 농업 위기를 겪는 가운데 당시 세계 최대의 농산업체였던 카길은 1986년 이윤이 4억 900만 달러로 66퍼센트까지 늘어났다. 12년 만에 최고의 세전 이윤을 기록한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판매량이 저조할 때의 기록이다. 보조금 258억 달러가 농산업체의 복지 기금 노릇을 한 셈이다.
철강 산업같이 위기에 빠진 산업의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이지만, 농산업체의 배를 불리지 않고 가족농을 구제할 합리적인 제안들은 있었다. 아이오와 주 출신 연방 상원의원 톰 하킨Tom Harkin과 아칸소 주 출신 연방 하원의원 빌 알렉산더Bill Alexander가 1985년에 제출한 농장법 안이 그 예다. 농산품의 최저가를 설정해서 소규모 생산자에게도 공정한 대가를 보장해 주는 내용이었다. 일정한 토지를 생산에서 제외해 토양을 보호하는 내용도 있었다. 농업 지역 출신 공화당 하원의원들은 이 법안을 지지했지만, 백악관의 거센 반대와 랠스턴퓨리나나 전국식품가공협회National Food Processors Association 같은 농산업체들의 강력한 로비에 부딪혔다. 도시 출신 민주당 의원들이 반대한 것도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법안이 통과되면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식료품 값이 올라갈까 봐 염려했다. 하킨은 소비자물가가 4퍼센트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정도는 도시 노동자의 최저임금이 올라간 뒤 나타나는 물가 인상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했다. 이 법안도 납세자들의 보조금이 필요했겠지만, 그 돈은 대기업이 아니라 소농민들에게 갔을 것이다. 레이건이 하킨의 법안을 지지했다면, 자기 고향을 둘러싼 가족농들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했다면, 이 법안은 분명히 입법화되었을 것이다.
1980년대에 제조업과 농업이라는 가장 중요한 두 부문이 급속하게 쇠퇴하면서 딕슨에 어두운 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업체들이 도시의 상업 지구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농기구 업체 네 곳 중 세 곳이 문을 닫았다. 학교에 등록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고 지방 교육청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그 전 50년 동안 빈곤 지역을 돕기 위해 촘촘하게 짠 안전망은 레이건의 예산 삭감 때문에 대부분 넝마 조각이 되어 버렸다. 주거 보조, 저소득층 지원 식품 교환권, 저소득층 법률 지원 등이 모두 최소한만 남았다. 레이건 정부의 예산은 농촌 경제 발전을 장려하기 위해 존재하던 일련의 프로그램을 대폭 삭감해 버렸다. 1981년에서 1987년 사이에 미국 농무부의 농촌주택청에서 후원하는 농촌 발전 프로그램이 69퍼센트 삭감되어 16억 7000만 달러에서 4억 9000만 달러로 줄었다. 또 농촌을 대상으로 한 기업 및 산업 대출과 지역사회 시설 대출은 85퍼센트나 줄어들었다. 제조업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직업 재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자금은 거의 남지 않았다.
이 책을 쓰려고 인터뷰한 딕슨 사람들 가운데 레이건이 옛날에 자기가 살던 동네를 구제하기 위해 막후에서라도 어떤 일을 했다고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1990년대 초 어느 민간단체가 딕슨극장을 개수하는 데 쓸 기금을 주州에서 받기 위해 41만 달러 모금 운동을 벌였을 때 전 대통령 레이건은 1000달러를 기부했다. 1984년에는 도시가 쇠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애를 쓰는 사업가들이 내고장유산재단Hometown Heritage Foundation을 설립하고, 리Lee 카운티에 직원을 1000명 이상 고용하는 사업체를 유치하는 사람에게 줄 상금 1만 달러를 내걸었다. 레이건은 과거에 딕슨의 학교 돕기를 거부한 것처럼, 이 재단의 명예 회장은 맡았지만 사업체를 끌어들이는 데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재단 이사 밥 해밀턴Bob Hamilton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 사람은 기업을 유치하는 데 자기 이름을 활용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자리를 맡았습니다.” 어떤 이는 모름지기 대통령이라면 나라 전체를 보살펴야지 한 지역을 편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공정성이 레이건에게는 당찮은 말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의 평론가한테 전화해서 버디 엡슨Buddy Ebsen(1960년대에 CBS TV에서 방영된 시트콤 <비벌리 힐빌리스The Beverly Hillbillies>로 유명한 성격파 배우 ― 옮긴이)을 좀 도와 달라고 말하고, 불가리에서 빌린 비싼 보석을 걸치면서 좋아하는 부인을 두었으며, 정유 산업의 규제를 풀어 준 뒤 정유 회사 중역들이 백악관의 생활공간을 다시 꾸미게 한 대통령이다. 이런 사람이 자기 고향에 약간 혜택을 주도록 전화하는 문제에 대해 갑자기 투철한 윤리 의식에 사로잡혔다는 말인가.
불안한 미래
레이건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20년 동안 그의 고향이 부흥하는 일은 없었다. 1990년대는 번영의 시대였지만, 딕슨 같은 곳은 잔치에 끼지 못했다. 렉서스를 모는 투자은행가들이 딕슨의 스타벅스에서 라떼를 홀짝이는 일은 없다. 딕슨에는 스타벅스나 렉서스 대리점이 없기 때문이다. 렉서스를 사고 싶은 사람은 록퍼드까지 한 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딕슨의 인도는 자갈과 19세기 가로등의 모조품으로 장식되지 않았다. 도심 재개발의 징후도 없고 호숫가 산책로나 반짝거리는 유리 지붕으로 덮인 상가가 생길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걸리나 애버뉴에 소매상도 많지 않다. 주 정부나 카운티 정부 청사와 특징 없는 업무용 건물 서너 동, 아무도 찾지 않는 것 같은 선술집들뿐이다. 의류나 식품을 사려면 2005년에 딕슨 시 외곽에 생긴 월마트로 가야 한다.
대서양과 태평양 연안에서 엄청난 부를 쌓았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지난 20년 동안 들렸다. 월가에서는 100만 달러를 보너스로 준다느니 실리콘밸리에서 인터넷 관련 기업 백만장자들이 속출한다느니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부가 딕슨에는 전혀 흘러들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율을 조정한 딕슨 시의 가구 소득 중앙값은 1970년대에 높아지다가 1979년에서 1999년 사이에 실제로 9.1퍼센트 떨어졌다. 1999년은 주식시장이 붕괴하기 직전으로 미국의 호황이 정점에 달했다. 이런 수치는 부유층이 정말로 더 부자가 된 대도시 권역의 풍요로운 지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딕슨에서 동쪽으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시카고 교외 윌메트Wilmette에서는 같은 기간에 가구 소득 중앙값이 29퍼센트 높아졌다. 1999년 달러 가치 기준으로 9만 4789달러에서 12만 2515달러로 오른 것이다. 미국 전체가 딕슨보다는 윌메트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을 들여다보면 딕슨이 오히려 나라 전체보다 사정이 좋았다. 같은 기간에 전국 가구의 소득 중앙값은 19퍼센트 떨어졌다.
딕슨은 규제가 완화된 상업, 학살당한 노동조합, 절망적인 상태의 공공 부문, 민영화, 기업합병, 임시 노동의 증가 등 레이건 시대의 비참한 특징을 두루 보여 준다. 미국 경제계의 거센 약탈로부터 정부가 한때는 딕슨을 보호해 주었지만, 이 도시의 운명은 이제 시장의 변덕스러운 놀음에 휘둘린다. 규제 완화 덕분에 통신 회사들이 저개발 지역에는 서비스를 공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딕슨에 광대역 인터넷 서비스가 들어간 것은 윌메트보다 한참 뒤의 일이다. 요즘은 자동차 없이는 딕슨을 찾아가거나 딕슨에서 외지로 나갈 수가 없다. 여객 철도 노선이 아예 없었고, 수익성 없는 버스 노선은 버스 회사에 대한 규제 완화 덕분에 대부분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딕슨에서 마지막으로 버스를 운영한 그레이하운드 사는 2001년에 터미널을 폐쇄하고 도시를 떠났다.
1988년에 대형 보험사인 유에스에프앤드지USF&G에서 시내에 사무실을 열고 걸리나 애버뉴의 상업 지구 한가운데에 2층짜리 업무용 벽돌 건물을 짓기로 하자, 딕슨 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했다. 꼴사나운 콘크리트 주차장이 정면에 붙어 있는 우중충한 정방형 건물은 길 건너편에 있는 유서 깊은 딕슨극장의 보자르 양식 정면이나 근처에 있는 19세기 건축인 리 카운티 청사와 통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유에스에프앤드지의 신축 건물은 활력의 징후였다. 회사에서 그 건물을 방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레이건이 톡톡히 기여한 합병 열풍은 1998년에 딕슨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세인트폴St. Paul 보험회사는 유에스에프앤드지를 인수하면서 수천 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하고 수익성 없는 보험 계정을 해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세인트폴은 곧바로 딕슨 사무실을 폐쇄했다. 도시 한가운데에 텅 빈 업무용 건물만 덩그러니 남았다.
시대 분위기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징후도 있다. 보험회사 건물 1층을 쓰는 인력 파견 회사는 미국 산업 경제의 파편을 쪼아 먹으면서 돈을 버는 회사다. 지역의 제조업체는 노동조합 소속이 아닌 저임금 노동자가 필요할 때 임시인력서비스사를 찾는다. 복지 혜택을 주지 않아도 되고 경기가 안 좋으면 바로 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땅을 일구거나 철강을 생산하면서 존엄성을 누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임시인력서비스사에서 나눠 주는 비정규직이라도 얻으려고 넙죽 허리를 굽힌다. 아무 날이나 임시인력서비스사의 창문을 들여다보라. 남자와 여자 들이 책상에 멍하니 앉아 다음에 얻을 최저임금 일자리를 소개하는 직업훈련 비디오를 보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임시인력서비스사를 이용하는 회사 중 하나인 레이오백Rayovac은 2003년에 딕슨 외곽의 88번 주간州間 고속도로 변에 2000만 달러를 들여 공장을 세운 건전지 제조사다. 레이오백은 오랫동안 근거지로 삼은 위스콘신 주 매디슨을 포기했다. 노동조합에 소속된 생산직 노동자들을 내치고 딕슨에서 노동조합에 소속되지 않은 노동자들을 채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노동자들의 평균 시급이 13.50달러였는데, 딕슨에서는 8.50달러에도 일할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일리노이 주는 당시 미국 3위의 건전지 제조업체를 끌어들이기 위해 기반 시설 공사를 비롯한 410만 달러 상당의 혜택을 제안했다. 일리노이 주는 레이오백이 가명으로 공장을 짓는 것까지 허용해 주었다. 그 결과 위스콘신의 지방 공무원과 주 공무원, 레이오백의 직원 들은 공장이 실제로 이전할 때까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딕슨 사람들은 새 공장이 생긴다는 소식에 한껏 들떴다. 특히 직원용 운동 시설과 휴게실에 있는 대형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보면서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이 건전지 회사는 옛날에 딕슨에 있던 고임금 사업장이 전혀 아니다. 회사는 연중 300명만 고용하며 계절적 고용 수요를 임시인력서비스사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로 채운다.
유에스에프앤드지의 예전 건물 2층에는 딕슨상공회의소가 있다. 상공회의소장 짐 톰프슨Jim Thompson은 언제나 활짝 웃는 호감형 인물이다. 도시에 닥친 재난에 대해 말할 때도 “입에 쓴 약이지만 삼켜야 한다”며 파안대소한다. 톰프슨의 아버지는 로널드 레이건과 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로 레이건이 영화배우 시절에 가끔 고향을 찾으면 환영 행사를 조직한 인사 중 하나다. 톰프슨의 책상 바로 옆의 벽면은 미국 제40대 대통령의 온갖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그러나 톰프슨은 딕슨에서 제일 유명한 아들에 대한 추억이 도시에 경제 부흥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톰프슨이 하는 일은 기업과 고소득 일자리를 이 지역에 유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 졸업장이나 시장성이 있는 기술을 가진 노동자가 부족한 탓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이 지역으로 이전을 고려하는 기업들은 문제 해결 능력과 컴퓨터 관련 지식을 갖춘 노동력이 있는지부터 묻는다. 톰프슨이 이렇게 말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지역이 직면한 진짜 문제는 이런 일자리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양질의 교육을 받은 노동력을 어떻게 구하느냐 하는 겁니다. …… 로봇 공학이 도입되고 자동화된 공장 라인이 들어서는 걸 봤습니다. 몇 년 뒤에 우리가 이런 일자리를 채울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정말로 궁금해요.”
상황은 밝지 않다. 딕슨의 교육 기회는 미국의 다른 특권 지역을 따라잡지 못하는 형편이다. 딕슨의 성인 인구 중 학사 이상 학위를 가진 사람의 비율은 1970년대에 9퍼센트에서 12퍼센트로 높아졌지만, 그러고는 정체 상태에 머물렀다. 2000년에는 12.7퍼센트만 대학을 졸업했다. 사실상 20년 전과 같은 비율인 셈이다. 부유층 교외인 윌메트는 역시 상황이 훨씬 좋다. 대학 교육을 받은 성인의 비율이 1980년 54퍼센트에서 2000년 73퍼센트로 높아졌다. 최근 몇 년 동안 딕슨고등학교 졸업생 가운데 평균 25퍼센트만 4년제 대학에 진학할 예정인 것으로 밝혀졌다.
딕슨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계경제에서 경쟁하기 위해 젊은이들을 더 잘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레이건 시대 이후 공공 부문을 무시하는 전통 때문에 이런 일에 쓸 수 있는 기금이 부족하다. 1980년대에 딕슨의 각급 학교에 대한 주와 연방의 지원은, 인플레이션율을 조정한 수치로 23퍼센트 감소했다. 1990년대에 약간 늘어났지만, 2004년에도 여전히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한 해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 지방 세입까지 포함한 학교에 대한 전체 지출은 어느 정도 늘었다. 하지만 딕슨 시 교육감 로버트 브라운의 말에 따르면, 이런 증가액은 대부분 급여와 복지 혜택?건물과 설비의 유지 보수?특수교육에 대한 새로운 요구에 투입되었다. 그의 말로는 지난 15년 동안 일반 교육 프로그램은 사실상 전혀 확대되지 않았다.
브라운은 로널드 레이건에 관해 부정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학교에 관한 인터뷰에 응했다. 그만큼 레이건은 브라운이 일하는 지역사회에서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딕슨 어린이들의 미래에 대한 투자가 부족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데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컴퓨터 부족에 따른 체계 부실, 불충분한 과학실, AP 코스advanced-placement course(수학 능력이 뛰어난 고등학생이 대학 수업을 미리 듣고 학점을 딸 수 있는 제도 ― 옮긴이)의 부족 등이 무엇보다 큰 문제였다. 2003년 경제 위기의 여파와 아직도 싸우고 있는 딕슨 시로서는 과학실 신설 같은 사치는 생각도 할 수 없다. 경제 위기 때 공무원들은 학교 행사에 돈을 받게 했고, 수업 정원을 늘려서 프로그램 삭감에 대응했다.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 도입이나 교직원 확충은 논외의 문제다. 이런 사실이 함축하는 의미는 분명하다. 딕슨의 학교와 어린이 들이 계속 뒤처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세계경제에 속해 있습니다.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해요. 교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도구도 더 필요하고요. 외부 자원을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쟁하지 못할 겁니다. 지금 우리가 받는 돈으로는 경쟁할 수 없어요.” 브라운이 한 말이다.
미국 교육을 개선하기 위한 레이건의 계획은 민영화였다. 학부모에게 사립학교 수업료에 대한 세금을 공제해 주면, 공립학교가 경쟁을 위해 교육 프로그램을 개선할 것이라는 식이었다. 이 안은 지난 20년 동안 미국 전역에서 보수주의자들을 집결시키는 구호가 되었다. 그러나 미래의 대통령을 가르친 학교 체제의 교육감인 브라운은 민영화가 답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생기죠. 학교를 민영화하면 잘사는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가게 됩니다. 좋은 학교는 특수교육 문제라든가, 결손가정이나 저소득층 문제를 참으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결국 한쪽에는 가진 자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못 가진 자들이 있게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분리된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운영하려고 하면 파국만 생길 게 뻔합니다.”
학교와 고용 기반의 미래에 관한 불안감이 감도는 가운데 딕슨의 지도자들은 로널드 레이건에 대한 찬사를 통해 성장한 지역 산업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 부자 사업가들의 기부금으로 마련한 레이건 기념물들이 곳곳에서 방문객을 맞이한다. 컴퍼트인호텔에는 인명 구조원 차림을 한 젊은 레이건의 모습이 담긴 큰 사진이 수영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레이건은 백악관을 떠난 뒤 딱 한 번 딕슨을 찾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남긴 자취를 소중히 돌본다. (레이건은 1960년대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딕슨에 총 네 번 방문했다.) 로웰 공원, 공립 도서관, 시청, 고등학교, 강변 등에 레이건을 기념하는 표지판이 있다. 냉전 시대의 낙서와 녹슨 철조망까지 고스란히 갖춘 으스스한 베를린장벽 복제품도 시내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옆에는 레이건이 남긴 불후의 말이 담긴 표지판이 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이 벽을 허물어 버리시지요.”
록 강에서 남쪽으로 완만히 이어지는 매력적인 길로 식민지 시대 빅토리아풍 주택이 즐비한 헤너핀 애버뉴는 2002년에 레이건 길로 헌정되었다. 그 길 옆에 있는 다른 집들은 대부분 칠을 새로 하거나 지붕을 새로 얹는 정도였는데, 레이건이 소년 시절을 보낸 수수한 목조 주택 816번지는 정성 들여 수리되었다. 바로 이웃한 지구에는 작은 공원 한가운데에 레이건의 동상이 앉아 있다. 북쪽으로 네 구역 위에는 레이건이 다니던 사우스사이드초등학교South Side School가 딕슨역사관Dixon Historic Center으로 호화롭게 개조되어 있다. 밤나무 목재로 된 문짝과 계단 등이 완벽하게 복원되었고, 레이건의 옛 교실을 꾸미기 위해 오래된 가구를 모아 놓았다. 콩 모양의 젤리 과자로 만든 대통령 초상화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계단통에는 기퍼 모습의 동상들이 있다.
민간 재력가들은 레이건의 유산을 기념하려고 소년 시절 집과 역사관에만 10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돈을 낸 사람들은 윤리적 문제로 추궁받는 전형적인 사업가들이다. 레이건의 이미지에 마냥 행복하게 바짝 엎드릴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레이건 옛집 바로 옆에 있는 동상은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의 회장을 지낸 드웨인 O. 안드레이어스Dwayne O. Andreas가 기부한 것이다. 거대 농산업체인 이 회사는 1998년에 안드레이어스의 아들과 다른 중역 한 명이 연방 법원에서 가격 조작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부패 관행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나머지 중 대부분을 기부한 노먼 윔스Norman Wymbs는 플로리다의 부유한 사업가로 레이건의 이미지를 드높이는 데 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윔스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레이건을 성인처럼 떠받드는 전기 두 권을 쓰기도 했는데, 출간하기 전에 원고를 레이건에게 검토하게 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연방 정부가 레이건의 소년 시절 집을 매입해 국가 유적지로 운영하도록 하는 법안에 서명한 2002년에는 윔스가 공공 신탁에 어느 정도나 열의를 보이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2006년 현재 이 집을 관리하는 직원은 자원봉사자들뿐이며 웹 사이트도 없고, 겨울에는 대부분 문을 닫았다. 국가 유적지로 만들었으면 전문가들이 영구적으로 운영했을 테고, 나이가 지긋한 윔스가 세상을 떠난 뒤 집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오랫동안 로널드 레이건 가옥 재단Ronald Reagan Home Foundation 회장을 맡고 있던 윔스는 42만 달러에 부동산을 매입하겠다는 정부의 제안을 거부했다. 자기와 다른 기부자들이 그때까지 쏟아부은 500만 달러에 턱없이 못 미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지난 25년 동안 이루어진 일에 관해 말하는 겁니다. …… 딕슨 시의 모든 사람이 이 집에 이런저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사람들에게 연방 정부에 모든 걸 넘겨주겠다는 모욕적인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정부 제안을 거절하는 구실치고 이렇게 그럴듯한 말도 없다. 언뜻 보기에 기부자들이 옛집을 보존하고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일은 소규모 사설 재단보다는 미국 내무부가 더 장기적으로 믿음직스럽게 수행할 수 있다. 윔스는 자기가 쏟아부은 금액을 정부가 납세자들의 돈으로 갚아 주지 않는 것에 대해 발끈한 게 분명하다. 레이건이 살아 있었다면 아마 윔스가 보여 준 개인적 부에 대한 관심과 정부에 대한 경멸을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록 강 위로 솟은 언덕들 사이에 자리 잡은 조용한 시골구석인 딕슨은 겉보기에는 여전히 쾌적한 동네다. 매년 봄이면 걸리나 애버뉴 양쪽 가장자리에 튤립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사람들은 한창때의 로널드 레이건을 연상시키는 온기를 뿜어 댄다. 그러나 시내 중심가에서까지 섬뜩한 침묵이 감돈다. 냉랭한 분위기를 감지한 방문객은 이런 동네에 의미와 활력이 있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때 철강과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던 영스타운이나 플린트처럼 딕슨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이 마약 판매 구역을 놓고 살인을 일삼지도 않고, 쓰레기통에서 아기가 발견되지도 않는다. 그저 한때 미국 중서부 소도시들의 특징이던 활기와 산업을 찾아볼 수 없을 뿐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과거의 흔적이다. 웅장한 리 카운티 청사와 딕슨극장, 반듯한 빅토리아풍 저택, 강변에 늘어선 벽돌 공장들까지 다 고대인들의 자취처럼 보인다. 과거에 이곳에 살았지만 지금은 폐허를 통해서만 정체를 가늠할 수 있는 마야나 수메르의 자취 말이다. 그들의 장대한 문명을 덮쳐 버린 사회가 패스트푸드 식당, 체인 모텔, 월마트, 비닐 외장재로 된 조립주택 등이 이어진 값싼 풍경을 이루면서 바야흐로 도시 가장자리에 퍼져 나가고 있다. 조금 더 나가 보면 더 아름다운 경치가 손짓을 한다. 시골 풍경은 50년 전의 모습과 비슷하다. 외딴 농가와 큰 탑 모양의 곡물 창고 들이 광대한 농업의 지평선 한가운데에 여전히 보초처럼 우뚝 서 있다. 그러나 이 농가들의 문을 두드리는 순간 환상은 무너져 내린다. 페인트가 벗어지고 창문에는 비닐이 씌워 있다. 대부분 빈집이고, 그나마 세를 들어 사는 사람들도 농사와는 무관하다. 농가 주변의 광대한 토지 수천만 제곱미터는 머나먼 곳에 있는 거대 농산업체 소유다. 젊은 레이건을 품었던 딕슨은 이제 사라지고 있다.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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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윌리엄 클라인크넥트 William Kleinknecht
『뉴어크스타레저Newarks Star-Ledger』의 전문 기자. 『뉴욕데일리뉴스New York Daily News』의 범죄란을 담당하기도 했다. AP통신과 미국직업언론인협회에서 상을 받았으며 『미국저널리즘평론American Journalism Review』, 『미국법률저널National Law Journal』, 『보스턴피닉스Boston Phoenix』 등에도 기고한 바 있다. 저서로는 『새로운 소수인종 폭력단: 미국 조직범죄의 변모New Ethnic Mobs: The Changing Face of Organized Crime in America』가 있으며 뉴저지 주 글렌록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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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유강은
국제 문제 전문 번역가. 옮긴 책으로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 『The Left 1848~2000』, 『미국민중사』,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두뇌를 팝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기로에 선 미국』 등이 있다. libromio@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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