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지난 수년간 젠더와 민족을 연구하면서 정치적으로나 학술적으로 해왔던 작업들의 정점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처음의 계기는 이스라엘의 젠더 관계와 이 젠더 관계가 시오니즘 정착 기획, 이스라엘-아랍 갈등과 관계 맺고 있는 방식을 연구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젠더 구분과 민족 구분을 연구했는데, 남동부 런던 지역에 이어 이후에는 유럽을 비롯한 기타 여러 정착민 사회들을 검토했다. 이 여정 초기에 특히 중요했던 이정표가 1984년 내가 조직했던 <여성과 국민 재생산>Women and National Reproduction이라는 국제 워크숍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 각처에서 온 ‘중요한 타자들’과 함께 ‘집단체의 잉태/전달자’bearers of collectivities(Yuval-Davis, 1980)로서의 여성에 대한 나의 생각을 나눌 기회를 가졌으며, 마침내 이때 『여성-민족?-국가』(Yuval-Davis and Anthias, 1989)가 출간되었다. 지금의 이 책 『젠더와 민족』이 출간되기 직전 중요한 이정표가 하나 더 등장했다. 1996년 6월 그리니치 대학이 <여성, 시민권, 그리고 차이>Women, Citizenship and Difference를 주제로 주최한 대규모 회의에서 역시, 우리는 이 연구의 장을 통해 이룬 의식과 통찰의 성장을 세상에 알렸다(이 회의에 기초한 『페미니스트 리뷰』?Feminist Review의 1997년 9월 특집호 및 나와 프니나 베르브너가 공동 편집한 제드북스사의 발행물을 참조할 것). 당시는 정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새롭고도 시급한 문제들이 계속해서 아주 많이 등장하던 때였다.
위에서 이미 분명히 밝혔듯, 나의 여정은 개인적인 여행도 있었지만, 짧게든 길게든 함께 해준 많은 동료들이 없었다면, 전위displacement, 이동shifting, (‘다시 뿌리내리기’rerooting가 아닌) ‘닻 내림’anchoring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들의 이름을 모두 올리지는 못하겠지만, 캄신 공동체Khamsin collective의 회원들, 특히 아비샤이 에를리히, 나와 함께 젠더 및 민족 구분 기획과 몇 권의 저서를 위해 일했던 친구이자 동료인 플로야 앤시어스, 그리고 이 책의 다양한 개념과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여러 면에서 없었으면 안 되었을 그 밖의 친구들과 동료들을 말하고 싶다. 이들 가운데 몇몇을 알파벳순으로 꼽아 본다면, 마사 애켈스버그, 앨리슨 애시터, 질리언 보텀리, 아브타 브라, 스티븐 캐슬즈, 암리타 차치, 신시아 코번, 필 코언, 클라라 코널리, 신시아 인로, 로버트 파인, 마리엠 헬리-루카스, 데니즈 칸디요티, 헬마 루츠, 헬렌 미코샤, 맥신 몰리누, 에프라임 님니, 루스 피어슨, 진디 페트먼, 애니 피자클레아, 앤 피닉스, 슐라 라몬, 노라 라첼, 폴라 레이먼, 이스라엘 샤하크, 맥스 실버먼, 일레인 운테할터, 지나 바르가스, 피터 워터먼, 프니나 베르브너다.
나와 함께 『정착하지 않는 정착민 사회』(Stasiulis and Yuval-Davis, 1995)를 작업했고, 현재 이 책의 본문이 손질되지 않은 상태일 때 검토해 준 다이바 스타시울리스에게 특별히 고마움을 전한다. 유용했던 그녀의 많은 비평들은 이 시리즈의 편집자인 브라이언 터너와 세이지출판사의 편집자인 캐런 필립스와 키렌 쇼만의 비평과 더불어 이 책을 굉장히 많이 향상시켜 주었다. 또한 그리니치 대학의 젠더와 민족 연구전공생들과 1994년에 헤이그 사회연구학회에서 잠시 가르쳤던 젠더와 민족 강좌 학생들에게도 감사하고 싶다. 나는 이들과 함께 강의를 목적으로 이 책의 여러 초고들을 이용했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들은 자신들이 있는 위치에서 얻은 경험과 통찰을 고맙게도 나와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쓰고 있는 방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물론 아직 마무리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지만, 1991년 런던정치경제 대학교의 모리스 긴즈버그 연구원으로 있던 몇 달을 포함해, 1992년 헤이그사회과학 대학교의 방문 연구원 기간, 그리고 1933~1936년 그리니치 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서 (인자하신 마이크 켈리 학장 밑에서) 매주 있는 강의 시간에서 나를 제외해 준 학기 면제 덕분에 내게 숨 쉴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이 책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이들 대학에 많은 신세를 졌다. 하지만 글이 ‘막힐 때’마다 가장 많은 영감을 떠오르게 해준 것은 노퍽Norfolk 헤이즈브러happisburgh의 ‘로마니’ 마을에서 밀려오는 바다의 파도였다.
마지막으로, 아마 처음으로 하는 말일 텐데, 항상 나를 위해서 그 자리에 있어 준 알라인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굴에게도 감사한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살펴주었지만 나의 영어가 결코 그가 바라던 기준에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관된 한 권의 책으로 저술되었기는 하지만 이 책의 여러 장들은 별도의 논문으로 다음과 같이 부분 출판되기도 했다. “Gender and Nation”, Ethnic and Racial Studies vol.?16 no.?4, 1993, pp.?621~632; “Women and the Biological Reproduction of ‘the Nation’”, Women’s Studies International Forum vol.?19 issue 1-2, 1996, pp.?17~24; “Women, Citizenship and Difference”, Feminist Review vol.?57 no.?1, Autumn 1997; “Women, Ethnicity and Environment”, Feminism and Psychology vol.?4 no.?1, 1994, pp.?179~198.
1장 | 젠더와 국가의 이론 정립
만일 여성이 어머니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민족은 죽음의 길에 접어들 것이다.
민족의 어머니들, 즉 여성 모두가 우리 투쟁의 거목이다.
이 책은 젠더 관계와 젠더 관계가 국가 기획과 그 과정에 미친, 혹은 그로부터 받은 영향에 관한 글이다. 이 책의 주안점은 여성women의 위치position와 위치설정positioning에 있다. 그러나 남성men과 남성성masculinity 역시 이에 못지않게 이 책의 중심에 있다. 나의 사회학 스승인 히브리 대학교의 에릭 코헨Eric Cohen이 항상 말했듯이, “남성을 논하지 않고 여성을 논한다는 것은 한 손으로 손뼉을 치는 것과 같다”. 나는 지난 몇 년간 연구를 하면서 내가 배운 것의 상당 부분을 거부해 왔지만 이 말씀의 정서에는 여전히 동의한다. ‘여성성’womanhood은 관계성의 범주이며 그와 같이 이해하고 분석해야 한다. 더욱이 민족성nationhood의 구성물들이 대개 ‘남성성’manhood과 ‘여성성’ 모두의 특정 개념들과 관련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주장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의 인식론적 뼈대는 지식이 상황적이며(Haraway, 1990), 한 가지 입장에서 나오는 지식은 ‘완성’되지 못한다(Hill-Collins, 1990)는 인식에 기반한다. 이 책을 쓰기 전이나 쓰는 동안 다양한 입장의 학자와 활동가들이 쓴 여러 책과 논문을 읽었지만, 나 역시 나만의 입장이 있기에 이 책의 관점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자리한 특정한 위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여러 이론적 요점들을 설명할 때에 내가 선택한 구체적 사례들이 상당 부분 내가 살아 온 (주로 이스라엘과 영국의) 사회에서 발생한 사건들이나 (서문에서 언급한) 나의 절친한 동료들과 친구들의 사례에 근거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에서 나는 본격적으로 이 책을 써 보겠다는 용기를 내게 되었다.
민족 및 민족주의 이론화에 헤게모니를 지닌 대부분의 작업들은(예컨대 Gellner, 1983; Hobsbawm, 1990; Kedourie, 1993; Smith, 1986; 1995), 가끔 여성들이 쓴 저작까지도(예컨대 Greenfeld, 1992와 같은), 젠더 관계를 무관한 것으로 외면했다. 민족주의 학자들의 주요 학파인 ‘원초론자들’은(Geertz, 1963; Shils, 1957; Van den Berghe, 1981) 민족이라는 친족 관계가 ‘자동적’으로 확장된,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민족주의 관련 문헌들은 민족의 ‘생산’, 혹은 ‘재생산’의 문제들을 논할 때 주로 여성들보다 국가 관료들이나 지식인들과 관련하여 말했다. 아민(Amin, 1978)과 주바이다(Zubaida, 1989)의 분석과 같은 유물론적 연구들은 (민족뿐만 아니라)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경계를 설정하고 재생산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국가 관료와 기타 국가 장치들을 중요시했다. 한 시민사회가 민족적으로 분열되는 이유는, 이 사회에 헤게모니를 쥔 민족 정신이 있고 그 본질을 국가가 좌우하고 있는데, 집단체에 따라 이 국가에 대한 접근이 차별받기 때문이다.
어니스트 겔너(Gellner, 1983)나 앤서니 스미스(Smith, 1986)와 같은 기타 민족주의 및 지식사회학 이론가들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특히 억압받는 집단체들의 이데올로기 생산과 재생산을 중시했던 지식인들을 강조했다. 이들은 헤게모니 지식인 계급에서 배제되고 국가 장치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집단기억’을 ‘재발견’하고, 대중들의 구술 전통과 언어를 문서 형태로 변형하여, 먼 신화 혹은 역사의 과거 속에 ‘민족의 황금기’의 초상을 그렸다. 이들의 이러한 재구성은 민족주의 열망들에 기반이 된다.
그러나 이 책이 검토하는 것은 관료제나 지식인(뿐만)이 아니라 여성이 생물학적·문화적·상징적으로 민족을 재생산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여성들은 대체로 민족주의 현상의 다양한 이론화 작업 속에 ‘은폐’됐는가?
캐럴 페이트먼(Pateman, 1988)과 레베카 그랜트(Grant, 1991)는 여기에 적절할 설명을 내놓는다. 페이트먼은 폭넓은 영향력으로 서구 사회 및 정치 질서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의 기반을 다져 온 고전 이론인 ‘사회계약론’을 연구하였다. 이 이론은 시민사회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나눈다. 여성(과 가족)은 사적인 영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정치와 무관하게 보인다. 페이트먼과 그 밖의 페미니스트들은 이 모델의 가정 자체의 타당성과 공/사 구분에 반발했다. 페이트먼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적 영역 없이는 공적 영역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최초계약의 의미도 둘 없이는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둘은 한 이야기의 상호 의존적인 절반들이기 때문이다. 시민의 자유는 가부장적 권리에 달려 있다. (Pateman, 1988: 4)
민족주의와 민족이 주로 공적인 정치 영역의 부분으로 논의되면서, 공적 영역의 장에서 여성이 배제되고 또한 그 결과 공적 영역의 담론에서 여성이 배제되었다.
페이트먼에 뒤이어 레베카 그랜트는 여성의 위치가 적합한 정치 영역 밖에 있었던 이유에 대해 흥미롭게 설명한다(Grant, 1991).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홉스와 루소 이론의 기반은 모두 가상의 자연 상태에서 질서 정연한 사회로의 이동을 그리는데, 이는 오로지 태생적으로 남성적인 성격이라 가정된 것의 측면에서만―(홉스가 말한) 남성의 공격적 성격과 (루소가 말한) 남성의 이성 능력의 측면에서만―존재하는 것이다. 여성은 이 과정에 포함되지 않으며 따라서 사회적 영역에서 배제되고 ‘자연’에 가까운 존재로 남게 된다. 이후의 이론들은 이러한 가정을 주어진 그대로 따랐다.
민족주의 이론들이 젠더를 도외시했지만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으니 바로 발리바르(Balibar, 1990a)와 차테르지(Chatterjee, 1990), 그리고 모스(Mosse, 1985)다. 이들의 통찰에 영향을 주고 이를 양성한 이들은 젠더 영역에서 작업해 온 소규모이나 성장 중인 페미니스트 학자들(예컨대 Enloe, 1989; Jayawardena, 1986; Kandiyoti, 1991a; Parker 외, 1992; Pateman, 1988; Yuval-Davis, 1980; 1993; Yuval-Davis and Anthias, 1989)의 모임이었다. 그럼에도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의 『민족주의』Nationalism(Hutchinson and Smith, 1994)에서 편저자들은 민족주의와 젠더 관계를 연관시킨 이 책의 유일한 인용구를 마지막 장인 「민족주의를 넘어」“Beyond Nationalism”에 실었다. (『여성-민족-국가』Woman-Nation-State의 서론에서 가져온) 이 인용구는 다음과 같다.
여성은 생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민족을 재생산하며 그 가치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여성이 국가라는 각축장에 들어옴으로써 민족성의 내용과 경계, 그리고 민족 자체를 다시 정의하게 되었다. (Hutchinson and Smith, 1994: 287)
그러나 물론 여성들이 그저 국가라는 각축장에 ‘들어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항상 거기에 있었고, 국민의 구성과 재생산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주의 관련 분석 담론에 이들을 분명하게 포함시킨 것은 매우 최근의, 그것도 부분적인 노력이었을 뿐이다.
이 책의 목표는 이러한 민족과 민족주의의 젠더적 이해를 위한 분석적인 기획을 도모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젠더 관계가 몇 가지 주요한 차원의 민족주의 기획에 중대하게 기여한 바를 체계적으로 점검할 것인데, 여기에는 국민 재생산, 민족 문화, 그리고 민족 시민권과 아울러 민족 갈등과 전쟁이 포함된다.
이 책에서 민족주의 기획은 ‘민족국가’와 극명하게 구분되며, 민족의 경계가 실제로 소위 ‘민족국가’들의 경계들과 결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민족’ 구성원권이 하위국가적, 초국가적, 교차국가적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분명해지겠지만 나의 분석은 해체주의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끼워졌다 떨어져 나가는 ‘자유로이 떠도는 기표들’로 구성되는, 동시대 시민들의 극단적 포스트모더니즘의 구성(Wexler, 1990)을 거부한다. 반면 사회적?경제적 권력 관계의 결정적인 중요성과,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범주화든 이를 포함하고 교차하는 사회적 분할들을 나는 강조한다. 이러한 사회적 분할들의 형태는 이들이 다른 사회 관계들이나 사회 행동들과 연계된 방식에 따라 유기적이고 경험적이며 재현적이다(Anthias, 1991; Brah, 1992). 이들은 서로 다른 형태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상이한 존재론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Anthias and Yuval-Davis, 1983; 1992).
또한 나는 아무 문제의식 없이 우리 모두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 모두가 ‘근대’를 거쳤다는 무비판적 가정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화 과정이 가속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서구 중심적인 가정이다(보다 자세한 논의는 3장을 볼 것). 더욱이 라탄시도 시인하듯, ‘포스트모던한 구도’(Rattansi, 1994: 16~17)를 짜는 가운데 라탄시를 비롯한 학자들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으로 주장해 왔던 다양한 모습들이 사실 다른 형태의 사회에서도 존재해 왔다. 그는 ‘주체’와 ‘사회적인 것’들의 중심성과 본질성을 모두 해체하고, ‘주체성’과 ‘사회성’을 규명하는 구성적 특징으로서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분석하며, (그리고 이야말로 어떤 사회, 어떤 시기에 대해서든, 어떤 페미니즘 분석에서든 초석이 될 것인데) “섹슈얼리티와 성적 차이에 대한 질문들과의 교류”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두―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주장했다시피―훌륭한 사회학적 분석이라면 언제나 당연한 것들이다. 더욱이 근본주의 종교 운동이 남반구뿐만 아니라 북반구 전 지역에서 증가하고 있는 시기에 동시대 사회를 거대서사가 종료된 사회로 묘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반면 역사적으로 위대했던 사회의 거대서사가 최고의 헤게모니를 자연화한 경우에도 이들 사회에서 상이하게 자리 잡은 구성원들을 동질적으로 통합하면서 통제한 적이 전혀 없다.
이러한 관찰들을 고려할 때, 이 책의 기획의도는 젠더 담론과 민족 담론이 서로 교차하고 서로에 의해 구성되는 다양한 방식을 토론하고 분석하기 위한 틀을 소개하는 데 있다. 이에 착수하기에 앞서, 이 장의 다음 두 단원에서 각각의 담론을 개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젠더’ 논의의 초점은 ‘성’과 ‘젠더’ 개념들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여성’의 범주를 둘러싼 이론적 논쟁들에 있다. 이러한 논쟁들의 이해는 여성성과 남성성 개념이 민족주의 담론 안에서 구성되는 방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족주의 기획들과 그 과정들에 남녀 관계가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들을 분석하는 데 중요하다.
‘민족’ 개념은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운동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제도들과 관련하여 분석해야 한다. 민족은 상황적으로 저마다 특정한 역사의 순간에 놓이는데, 민족을 구성하는 민족주의 담론은 유동적이고 헤게모니 경쟁 속에 있는 상이한 집단들을 통해 촉발된다. 이들의 젠더화된 특징은 오직 이러한 맥락화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두 단원에 뒤이어 이 장의 마지막 단원은 이 책의 다음 장들에서 검토하게 될 젠더와 민족이 교차하는 지점들의 주요한 차원들을 개괄하면서, 여성의 보다 ‘자연화’된 역할인 생물학적 국민 재생산자 개념에서 출발하여, 민족의 문화적 구성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살펴보고, 국민의 자격으로서의 시민 구성이 시민권의 권리와 의무를 통해 젠더화되는 방식까지 아우를 것이다. 끝에서 두번째 장에서는 군사와 전쟁의 젠더화된 성격을 살펴본다. 이 책은 페미니즘과 민족주의의 복합적인 관계의 검토와 함께 결론을 맺으면서, 정체성 정치의 덫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여성들 간의 민족적 차이 및 기타 형태의 차이들을 설명하는 횡단의 정치를 페미니즘 정치 모델로 지향할 것이다.
여성과 젠더 관계 분석
페미니즘 문헌들이 방대하고 다양하기는 하지만, 이들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대략 세 가지 주요한 질문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번째 질문은 페미니스트들의 공통된 관심의 원인을 분석하려는 시도로 “왜/어떻게 여성들은 억압받는가?”이다. 여성과 남성의 권력차를 결정하는 구성원리에 대한 연구가 있어 왔다. ‘가부장제’ 관련 이론들(Eisenstein, 1979; Walby, 1990), 또는 성/젠더 체계(Rubin, 1975) 내지 ‘젠더 체제’(Connell, 1987)―이렇게 부르는 것을 선호하는 이들이 있다―관련 이론들은 그 시작부터 페미니즘 이론의 중심에 있었다. 공/사 영역 혹은 자연/문명이라는 사회 영역의 이분법적 구성체들은 이러한 분석의 중심이 되어 왔다.
두번째 질문은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의 존재론적 토대와 관련된 질문으로 “이러한 차이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가, 사회학적으로 결정되는가, 아니면 둘의 조합에 의해서인가?”이다.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일반적으로 ‘성과 젠더 논쟁’(Assiter, 1996; Butler, 1990; Delphy, 1993; Hood-Williams, 1996; Oakley, 1985)이라 알려졌다. ‘여성’과 ‘남성’ 범주의 경계와 기초에 관한 질문들은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분석틀이 등장함에 따라 보다 문제시되었다.
세번째 질문은 대체로 민족 중심적이고 서구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단순하기까지 한 일부 초기 페미니즘 문헌의 관점들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났다. 이는 여성들 안에서의 차이, 남성들 안에서의 차이, 그리고 이들이 젠더 관계의 일반 개념들에 미친 영향들에 관한 문제다. 이 질문을 처음 던진 것은 대개 흑인이나 소수인종 여성들이었고(hooks, 1981), 그 다음에 이 질문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해체주의 페미니즘에 포함되었다(Barrett, 1987).
이 장의 지면과 범위의 한계를 고려한다면, 이 세 질문들에 대한 모든 논쟁을 체계적으로 검토할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에 제기된 문제들에 관한 어떤 논의든 위 질문들에 대한 특정 입장들을 내포하거나 그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으므로 여기서 간략하게라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억압에 대한 설명은 상당 부분 남성들과는 다른 사회적 영역에서의 이들의 위치에 관한 것들이었다. 여기에 공/사 그리고 자연/문명의 영역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있어 왔다. 많은 페미니즘 문헌이 여성은 “역사로부터 은폐되어 왔다”(Rowbotham, 1973)는 사실을 지적하고 반대하면서도, 남성이 공적 영역에 위치하고 여성이 사적 영역에 위치한다는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시민권에 대한 4장에서는 공/사 영역의 이분법과 이것이 여성이 시민으로서 자리 잡는 것과 관련된 방식의 몇 가지 문제점을 논의할 것이다. 이러한 구분이 특히 젠더적이고 인종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허구적이라는 점, 그리고 여성을 자유와 권리로부터 배제시키는 데 종종 사용되었다(Philips, 1993: 63)는 주장도 논의할 것이다. 아울러 지금까지의 주장은 공과 사의 경계선이 식민 이후 민족들의 시민사회 구성을 분석하는 데 전혀 적절하지 않은 도구였다는 것과 젠더 관계의 비서구 중심적 분석에서는 이와 같은 공과 사의 경계를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Chatterjee, 1990).
그러나 공/사의 이분법은 페미니즘을 비롯한 사회과학 문헌에서 여성을 남성의 정반대 극에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분법들 가운데 단지 하나일 뿐이다. 그 밖에 자연/문명의 구분도 있다. 여성과 자연의 동일시는 ‘문명’화된 공적 정치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문화에서나 남성보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가치가 덜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도 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남성man이 동물보다 우위에 있는 이유는 생명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출산하는 성이 아닌 살해하는 성이다. (Harding, 1986: 148에서 인용)
셰리 오트너는 좀더 일반적으로 남성이 ‘문화’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여성은 ‘자연’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음을 주장했다(Ortner, 1974). 이는 아이를 잉태한다는 점에서 여성은 새로운 ‘것들’things을 자연적으로 창조하고, 반면 남성은 자유롭게/강제적으로 문화적 창조를 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또한 결과적으로 가정의 영역에 보다 한정되어 ‘전前사회적’ 존재인 아이를 양육한다. 인간은 어디에서든 자신의 문화적 생산물을 물질계보다 우위에 두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문화의 목표는 자연을 통제하고/하거나 초월하는 데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열등한 상징적 위치에 그치고 만다. 헨리에타 무어는 구데일(Goodale, 1980)을 좇아 여성들의 상징적 폄하와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오염의 개념을 덧붙인다(Moore, 1988). 여성들이 월경기나 출산 후에 피를 흘릴 때 종종 ‘오염시키는’ 존재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이런 일반화된 개념들이 여성의 위치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지적한다. 이러한 일반화는 상이한 사회들의 다양성을 동질화하고 폐기해 버린다. 또한 ‘문화’보다 ‘자연’이 열등하다는 서양 문화의 특정 가치들이 보편적이며 모든 사회가 이를 공유하고 있으리라고 가정한다. 끝으로 하나 더 짚어 본다면, 이들은 남성과 여성을 포함해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가정한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 갈등이나, 지배, 저항,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회 변화의 개념들을 정의해 버리는 것 같다. 더욱이 여성의 종속에 대한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이유에 대한 연구로 인해 젠더 관계가 다양한 사회에서 구성된 역사적 특수성과 그 재생산 방식을 주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듯 여성의 신분을 일반화하는 개념들에 대한 비판 역시 ‘가부장제’ 개념과 관련이 있다.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가부장제를 폭넓게 이용하면서 여성을 하위에 두려는 자치 체제를 설명해 왔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페미니즘 정치학은 인문, 사회, 급진, 그리고 이중체계 페미니즘 등의 개별 학파로 깔끔하게 구분되어 있었다(Walby, 1990). 이러한 사상 학파들의 차이는 일차적으로 여성 억압의 ‘그’ 명분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무엇인가―법인가, 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자신의 특권을 움켜쥐고 있는 남성들인가―하는 문제에 모여 있었다. 또한 맑스주의와 페미니즘 간의 ‘불행한 결혼’에 대한 논의나 가부장적 억압을 계급 착취와 관련하여 이론화해야 한다는 논의도 많았다(Hartmann, 1981).
‘가부장제’ 개념은 그 자체가 매우 문제적이다. ‘파테르’pater, 즉 아버지의 지배가 전통적으로 어린 남성들에게도 적용되어 왔고 여성에게만 해당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 종종 인정받고는 있지만, 이 점이 이 용어를 일반화해서 이렇게 페미니즘에 사용하는 데 이론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대개 아니었다. 실비아 월비의 연구(Walby, 1990)에서처럼(1989년에 나온 Sociology 특별호도 참고하라), 이러한 용례는 고용, 가정, 생산, 문화, 섹슈얼리티, 폭력 그리고 국가와 같은 상이한 형식들에 따라 차별화되면서 이론적으로 보다 정교한 모델로 발전했지만, 이때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가부장제가 특정한 역사적 시기 혹은 지리적 지역에 놓이면, 이런 일반화된 사용 규칙의 예외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예컨대, 캐럴 페이트먼의 논의에서 가부장제는 특히 역사적으로 근대 이전 시기와 관련이 있다(Pateman, 1988). 그녀에 따르면 근대 자유국가에서 체제는 가부장제로부터 남성단체fraternity 체제로 바뀐다. 가부장제에서는 아버지가(혹은 아버지 상으로서 왕이) 남성과 여성을 모두 지배하는 반면, 남성단체 체제에서는 남성이 그들의 여성을 사적 영역에서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얻으면서 공적·정치적 영역 안에서는 자기들만의 평등한 사회질서 계약에 동의한다.
반면 밸런타인 모가담(Moghadam, 1994)은 인구학자 존 콜드웰John Caldwel을 따라 가부장제를 특정 지리적 지대의 위치에 놓았으니 바로 ‘가부장제 벨트’로, 북아프리카에서 중동을 지나 인도아대륙[남아시아 지역]의 북부 평원과 중국 농촌지역까지 펼쳐져 있다. 이러한 ‘고전적 가부장제’(Kandiyoti, 1988)의 ‘벨트’에서 가부장적 확대 가족은 중심 사회단위가 되어, 연장자 남성이 다른 모든 이들을 지배하며 가족의 명예는 여성들의 통제된 ‘정숙’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가부장제를 특정한 사회 제도, 역사적 시기 혹은 지리적 지역에 국한하는 방식은 어느 정도 상이한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식의 사회 관계를 차별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 해도, 분석도구로는 여전히 너무 조잡하다. 일례로, 이러한 방식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몇몇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뿐 아니라 일부 남성들까지도 지배할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참작하지 않는다. 또한 여성의 억압이 다른 형태의 사회적 억압과 사회적 분할들과 서로 맞물려 있고 또한 이들에 의해 여성억압이 명료해지는 구체적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른 글에서 플로야 앤시어스와 나는 가부장제가 자본주의나 인종차별주의와 같은 유형의 사회체제로부터 자율적인 별도의 사회체제라는 개념을 반대한 바 있다(Anthias and Yuval-Davis, 1992: 106~109). 오히려 우리는 여성의 억압이 사회적 권력과 물적 자원의 분배와 관련된 사회 관계 특유의 필요조건이었다고 주장했다. 젠더, 인종, 계급은 이들이 비록 각기 다른 존재론적 기반과 별도의 담론을 지녔다 해도, 구체적인 사회 관계 속에 서로 맞물려 있으며 함께 논의될 때 더 명확히 설명된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도 부가 개념으로 볼 수는 없으며 어느 것도 추상적으로 우선시할 수 없다. 아브타 브라가 제안했듯(Brah, 1992: 144) 억압들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가부장제를 이론화하면서―가부장제는 정립된 이론들을 통해 더욱 정교해졌지만(Ramazanoglu, 1989; Walby, 1990)―젠더 관계는 최소한 암묵적으로는 생물학적 성차에 따른 필연적 결과로 축소되고 고립되고 말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가부장제 개념이 시사하는 바와는 대조적으로 여성들은 젠더 관계 결정에 단순히 수동적인 수용자도 비참여자만도 아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점은 똑같은 방식, 똑같은 정도로, 심지어는 특정 시기의 똑같은 사회 안에서조차도 모든 여성들이 억압받고/받거나 종속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차와 생물학적 재생산의 구조에 관계하고 그 주변에서 재현 형식을 정립하는 헤게모니 성 담론과 그 실천이 상이한 사회 안에 그리고 이들 사회에서의 상이한 위치에 따라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게일 루빈은 이를 ‘성/젠더 체계’라 했다(Rubin, 1975). 로버트 코넬은 12년 후[이 글에서는 2000년, 즉 21세기가 되었을 때]에 관한 글에서 이와 유사한 자신의 개념인 ‘젠더 체제’와 자연화된 생물학적 ‘성’을 분리했다(Connell, 1987). 현재 성/젠더 논쟁의 상황을 보면, 두 개념 모두에 작별을 고하고(Hood-Williams, 1996), 오로지 차이 개념에 집중할 필요가 있겠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남녀 차이의 고정성 문제는 이러한 차이에 존재론적 근거를 둔 페미니즘 논쟁의 중심이었다. 시작 당시부터 페미니즘 정치는 성과 젠더의 차별화에 의존해 왔다. 노동, 권력, 성품의 성 구분은 생물학적인 것(‘성’)이 아닌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젠더’)이라는 주장을 통해 다양한 학파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성평등을 지향하며 변화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회와 가족, 그리고/또는 담론 안에서 구성되는 주체성에 대한 이들의 해석을 설명하고 정리하는 중심 범주”(Gatens, 1991: 139)로서, 생물학적 환원론의 위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크리스틴 델피는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의 작업과 성역할에 대한 파슨스주의 이론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앤 오클리Ann Oakley의 『성, 젠더, 사회』Sex, Gender and Society, 1985에 이르는 연구들을 검토하면서 성과 젠더에 대한 논쟁의 전개 과정을 개괄했다(Delphy, 1993). 노동의 분업, 남녀 간의 심리 차이는 점진적으로 탈자연화했고, 문화적 변수가 중요해졌다. 그러나 델피에 따르면, 이들의 저서 중 어느 것도 그리고 그 이후의 페미니스트들의 저서 중 어떤 것도 젠더가 자연적 성 이분법에 기초한다는 가정을 의문시하지 않았다. 아울러 주디스 버틀러는, ‘성’이 ‘자연’에 의해 구성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젠더’가 ‘문화’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이해할 때, “생물학이 아닌 문화가 운명이 된다”고 했다(Butler, 1990: 8).
이는 매우 중요한 점이므로 문화에 관한 장(3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론적 차이가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델피와 버틀러 모두 ‘젠더가 성에 선행함’을 지적하고, 노동(델피)과 의미(버틀러)의 사회적 분할이라는 문화적 구성이 성차가 자연적이고 전前사회적인 것으로 구성(되고 사용)되게 하는 수단임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위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는 실험들이 특정 인간이 남/여성인지를 결정하는 Y염색체의 존재 혹은 부재를 밝히려 했고, 보다 최근에는 혹자들이 지닌 경험적 양가성의 관점에서 (1991년 굿펠로Goodfellow와 그의 연구팀이 분리해 낸 SRY 염색체[Sex-Determining Region Y, 성 결정 유전자]와 같은) 특정 유전자를 찾았다. 그러나 후드-윌리엄스Hood-Williams가 지적하듯, 이런 특정 기획은 동어 반복이자 순환 논리를 지닌다. 즉, 과학자들은 “이들을 유전학적으로 확인하기 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남성/인간man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한다”. 미셸 푸코(Foucault, 1980a)와 토머스 래커(Laqueur, 1990)가 지적했듯, 역사적으로―그리고 이에 따라 문화적으로―분명했던 것은 단지 모든 인간을 남성 혹은 여성으로 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플로야 앤시어스와 내가 주장했듯(Anthias and Yuval-Davis, 1983: 66), 성차나 생식의 그 어떤 필연적인 ‘자연적’ 사회효과는 없으며, 생산이 계급의 물질적 토대가 되는 것과는 달리, 성차나 생물학적 재생산이 젠더의 물질적 토대가 되어 주지는 못한다. 사회적 재생산 관계에서 페미니즘 유물론을 발견해 보고자 하는 분석들을 통해 우리는 유물론 기획을 다른 대상에게 중첩시키면서 그 준거 개념들을 부적절하게 재생산해 냈음을 보았다.
젠더는 ‘실제’ 사회적 남녀 차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젠더는 이들의 사회적 역할들이 인종 및 민족 집합체에서 이들이 갖는 경제적 위치나 구성원권과는 정반대로, 이들의 성차나 생물학적 차이에 따라 정의되는 일단의 주체들과 관련된 담론의 양식이다. 성차 역시 담론 양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담론을 통해 일단의 사회적 주체들은 상이한 성적/생물학적 구성물을 지닌다고 정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젠더’와 ‘성’ 모두 담론 양식으로 분석할 수 있으며, 다만 그 사안이 다를 뿐이다.
‘성’과 ‘젠더’ 모두에 대해 이들이 담론을 통해 의미를 구성한다는 주장과 비자연적이고 비본질주의적 성격을 갖는다는 주장으로 인해 성과 젠더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그러나 비영어권 국가에서 페미니즘 정치에 관여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곳 페미니스트들의 최우선적인 그리고 가장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그 지역 언어로 ‘젠더’에 해당하는 단어를 ‘발명’해 내는 것임을 알 것이다. ‘성’ 담론과 ‘젠더’ 담론을 구분하지 않는 한, 생물학은 그 사회의 도덕 및 정치 담론에서 운명으로 구성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경계의 희석을 거부할 수 있다. 모이라 게이튼스는 성과 젠더의 비본질주의적 이론 접근은 다음을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전혀 반론이나 의심 없이 몸과 심리 모두 출생 이후 수동적인 백지tabula rasa의 상태라고 가정한다. 즉 젠더 이론가들에게 어느 성이든 정신은 중립적이고 수동적 존재이며 다양한 사회적 ‘학습 내용’이 새겨지는 백지 상태다.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몸은 이러한 각인들의 수동적 매개체다. (Gatens, 1991: 140)
여기에서 지름길로 직진하면 ‘정치적 공정성’에 이르게 된다. 젊은이들을 사회화하고 어른을 ‘재교육’하는 올바른 사회 환경 조건을 제공하는 데 적절한 ‘스키너 박스’가 구성될 수만 있다면 모든 남성과 여성은 평등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모두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이튼스는 이런 종류의 사고에 대해 이들이 환경론적인가 본질주의적인가로 귀결되는 단순화된 이분법적 사회이론에 근거한다고 비판하며, 적어도 몸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몸은 언제나 성性이 있는 몸이기 때문에 동일한 행위라도 그것을 남성이 수행하는가 여성이 수행하는가에 따라 각기 다른 개인적?사회적 중요성을 지닐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아는 언제나 상황적이다.
도나 해러웨이(Haraway, 1990)의 ‘상황적 지식’ 등의 개념을 따르고 있는 게이튼스의 마지막 주장은 젠더 관계를 분석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자아는 언제나 상황적이다”라는 주장의 중요성은 젠더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관계의 분석과 관련이 있다. 몸의 상황은 생물학적이든 담론적이든 오로지 성차와 관련하여 구성되지는 않으며 자아의 상황이 오로지―혹은 언제나 일차적으로―몸에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다. 게이튼스나 그녀와 같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에게 성차가 중요한 것은 이들이 중산층 서구 중심 정신분석이론, 특히 라캉의 시선(Lacan, 1982)으로 사회를 관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급, 민족, ‘인종’과 국가와 같은 거시적 사회 구분도 특수한 신체 ‘유형’이나 연령, 능력과 같은 보다 주체적인 몸과 관련된 차이들만큼이나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하다. 여아 혹은 남아가 자신과 다른 이들에 접근하지 않는 한, 거울 보기로는 자신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체의 정체성은 항상 이 모든 차원에 따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상황적이었다. 구체적으로 아이들의 사회를 예로 본다면, 타자성은 그것이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오로지 성에 국한하고/하거나 성을 이분화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위와 같은 다른 차이들을 모두 억압해 버린다면 ‘여성’이란 범주는 단일화된 범주로 파악될 수 있다. 1970년대 백인 중산층 ‘의식화 집단’인 페미니스트들이 모든 여성의 조건은 본질적으로 똑같다는 것을 참여자들이 ‘발견’하는 데 목표를 두었던 상황처럼 말이다(Yuval-Davis, 1984).
여러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스들이 질문해 왔던 것은, 만일 여성들이 서로 다르다면, 어느 정도까지 ‘여성’이라는 용어가 의미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데니즈 라일리는 ‘여성’을 변동하는 정체성으로 보고 “‘여성’ 범주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담론적으로 구성되며, 언제나 스스로 변화하는 다른 범주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Riley, 1987: 35). 그러나 엘리자베스 위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정체성을 결여했다고 차이가 무한증식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차이의 범주들이 역사적으로 생산되는 우세한 구조를 지닌 범주들에 의해 명료히 설명되는 동안, 오히려 이 차이들이 대체되고 탈자연화한다는 뜻이다. (Weed, 1989: xix)
따라서 이런 역사적 지배구조들은 어떤 차이들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적절하게 여겨지는지, 어떤 것들이 아닌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스펠먼이 주장했듯, 여성들 간의 유사성은 이들의 차이의 맥락 안에 존재하며, “이러한 차이들이 유사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이 논쟁의 모든 참여자들에게 동일한 시간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동일한 권위가 부여된 것도 아니다”(Spelman, 1988: 159).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여성들 간의 차이 그 자체에 관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상이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여성들에게 공통된 것이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어떻게 페미니즘을 이 모두를 떠안을 수 있는 정치 운동으로 구성할 것인가에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6장)은 이 문제를 터놓고 다뤄 볼 것이다.
민족 및 국가 집단체에 대한 구성원권이 여성마다 다르다는 점은 여성들 사이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차이이며 이것이 이 책의 중심 주제이다. 여성들 간의 차이들이 대개 그렇듯, 집단체 구성원권 역시 지배구조 안에서 이해하고 다른 사회관계들을 통해 규명해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한 집단체 안에 속한, 또는 소속 집단체가 서로 다른, 여성 대 여성의 지위과 권력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집단체 구성원권으로부터 (암리타 치하치히Amrita Chhachhi의 1991년 용어를 사용하자면) ‘강요된 정체성’을 구성하도록 할 수도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는 정체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자유로이 떠도는 기호’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Wexler, 1990). 특정 역사적 환경에서의 국민과 국가의 관계는 이러한 구성물들에 중심 역할을 한다.
(서문, 1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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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니라 유발-데이비스 Yuval-Davis, Nira
이스트런던 대학교 이민·난민·소속 연구소(The Research Centre on Migration, Refugees and Belonging) 소장 니라 유발-데이비스는, 이스라엘 반체제 학자로 런던 소재 국제연구단체인 ‘분쟁지역 여성들의 네트워크’(Women in Conflict Zones Network)와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또한 국제사면위원회, 유엔개발계획, 유엔여성폭력보고위원회와 같은 여러 국제기구에서 자문위원 및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함께 지은 책으로는 『여성-민족-국가』(Woman-Nation-State, 1989), 『인종차별화 경계선』(Racialized Boundaries, 1992), 『정착하지 않는 정착민 사회』(Unsettling Settler Societies: Articulations of Gender, Race, Ethnicity and Class, 1995), 『여성, 시민권, 차이』(Women, Citizenship & Difference, 1999), 『근본주의의 경고 신호』(Warning Signs of Fundamentalisms, 2004), 『소속의 상황 정치』(The Situated Politics of Belonging, 2006) 등이 있고, 최근 『소속 정치: 구역 간 논쟁』(The Politics of Belonging: Intersectional Contestations, 2011)이 출간되었다. 그녀의 저서들은 유럽과 이스라엘, 그 밖의 정착민 사회에서의 민족주의, 인종차별주의, 근본주의, 시민권, 정체성, 소속, 젠더 관계와 관련한 이론 및 경험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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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박혜란
대학과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동국대와 건국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흑설공주 이야기』, 『황금요정 이야기』, 『플롯 찾아 읽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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