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우리는 사유의 모호함과 난해함을 없애고 실재의 질서와 명료함을 추구하며, 실재를 지배하는 법칙을 밝힐 것을 당당히 요구한다. 복잡성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처한 곤란함과 불명료함, 즉 간단히 정의하는 것과 분명하게 이름 붙이는 것, 우리의 생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사람들은 흔히 과학적 인식이란 현상의 단순한 질서를 밝혀내기 위해 현상의 명백한 복잡성을 제거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식을 단순화하는 방식이 그 지식이 고려하는 현실이나 현상을 제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손상시킨다면, 현실이나 현상을 해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맹목으로 몰아넣는다면,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단순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떻게 복잡성을 설명할 것인가? 그런데 이 문제는 매개 고리 없이는 제기될 수 없다. 복잡성이라는 단어는 자신을 지지해주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이며 인식론적인 고귀한 유산이 없기에 스스로 정당성을 증명해야 한다.
반대로 복잡성이라는 단어에는 불명료성, 불확실성, 무질서가 내포되어 의미론 차원의 커다란 결함이 있다. 일단 복잡성을 정의한다 해도 그 무엇도 해명해줄 수 없다. 하나의 중심 단어로 요약될 수 없고, 하나의 법칙으로 귀착될 수 없으며, 하나의 단순한 생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복잡하다. 다시 말해 복잡한 것은 복잡성이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없으며, 복잡성의 법칙으로 귀착될 수도 없고, 복잡성이라는 생각으로 환원될 수 없다. 복잡성은 단순한 방식으로 정의될 수 없을뿐더러 단순성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없다. 복잡성은 문제를 제기하는 단어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단어가 아니다.
복잡성 사고의 필요성을 이 서문에서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단순화하는 사유의 한계와 불충분함, 결함 등이 드러나고 우리가 복잡한 것의 도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드러나면서 복잡성 사고는 점차 필요해진다. 그다음으로 서로 다른 복잡성이 존재하는지, 이 복잡성을 복잡성들의 복잡성으로 묶을 수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복잡성의 도전에 대응할 사유의 방식을 살펴봐야 한다. 이제 실재를 통제하고 제어하려는 단순성 사고라는 야심을 버려야 한다. 실재와 교섭하고 대화하고 협상하는 사유를 훈련해야 한다.
복잡성 사고를 단념하게 하는 두 가지 환상을 제거해야 한다. 첫 번째 환상은 복잡성이 단순성을 제거한다고 믿는 것이다. 복잡성은 물론 단순화하는 사유가 물러나면 나타나지만, 인식의 질서를 포착·판별하며 분명하게 하는 모든 것을 그 안에 통합한다. 단순화하는 사유는 실재의 복잡성을 분해하는 데 반해, 복잡성 사고는 단순화하는 사유의 방법을 가능한 한 통합한다. 그렇지만 복잡성 사고는 절단하고 환원하고 일차원적으로 만드는 단순화의 맹목적인 결과를 거부한다. 이 단순화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실재를 자신이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환상은 복잡성과 완전성을 혼동하는 것이다. 분명 복잡성 사고는 분리하는 사고가 끊어놓은 학제 간 영역의 마디를 고찰하겠다는 야심이 있다. 분리하는 사고는 단순화 사고의 중대한 특징 중 하나이다. 분리하는 사고는 분리한 것을 따로따로 다루며, 연결하고 통합하고 경합하는 모든 것을 은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복잡성 사고는 다차원적 지식을 열망한다. 하지만 복잡성 사고는 처음부터 복잡한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복잡성의 공리 중 하나는 이론에서조차 전지성(全知性)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복잡성 사고는 ‘전체는 비(非)진리이다’는 아도르노의 말을 모토로 삼는다. 복잡성 사고는 불완전성과 불확실성의 원칙을 인정한다. 하지만 개체 간의 관계도 인정한다. 우리의 사유는 이 개체를 당연히 구별해야겠지만 서로 분리해선 안 된다. 파스칼은 “모든 사물은 무엇인가에 의해 야기되면서 무엇인가를 야기하고, 도움을 받으면서 도와주고, 간접적이면서 직접적이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가장 상이한 것을 연결하는 자연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관계가 모든 사물을 유지하고 있다”고 정확히 가정했다. 마찬가지로 복잡성 사고는 단편적이지도 세분화되지도 환원되지도 않는 지식에 대한 열망과, 모든 지식은 미완성이고 불완전하다는 인식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긴장에 고무된다.
이 긴장이 내 삶 전체를 고무했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결코 체념에 빠져 분할된 지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연구 대상을 그것의 맥락과 선례, 변화에서 분리할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다차원적인 사유를 열망했다. 그리고 결코 내적 모순을 제거할 수 없었다. 나는 적대적인 심오한 진리를 적대적이면서 상보적인 것으로 여겼다. 나는 결코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억지로 축소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초기에 쓴 책에서부터 복잡성에 직면했다. 이 복잡성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보이는 내 연구들의 공통분모였다. 하지만 복잡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말이 되어서야 복잡성은 정보 이론, 사이버네틱(원래는 조타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명체나 기계의 제어와 통신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현재 ‘제어학’이 번역어로 제시되고 있다―옮긴이), 시스템 이론, 자기조직 개념 등에 실려 내 연필 끝으로, 내 컴퓨터 자판 위로 왔다. 복잡성이라는 단어는 복잡함, 불명료함이라는 평범한 의미를 제거했고, 질서와 무질서, 조직을 연결하고, 조직 안에서는 일자(一者)를 다수와 연결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상보적이면서 적대적인 방식으로 작동했다. 또 무리를 이루어 상호작용하면서 복잡성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고 확대되고 갈래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내가 다루는 주제의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이동했다. 복잡성은 경험주의적, 논리적, 합리적인 것들의 관계라는, 이른바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묶는 거대 개념이 되었다. 이 과정은 1970년에 시작된 《방법》의 준비 작업과 일치한다. 내 책 《잃어버린 패러다임》(1973)에서 복잡한 조직, 심지어 최고도로 복잡한 조직은 공공연하게 중심 기획이 되었다. 복잡성의 논리적 문제는 1974년에 발행된 논문인 〈복잡함의 너머, 복잡성〉의 주제가 되었다. 《방법》은 사실 복잡성의 방법이었다.
다양한 텍스트1를 정리해서 엮은 이 책은 복잡성이라는 문제 제기에 대한 입문서이다. 만일 복잡성이 세계를 여는 열쇠가 아니라 맞서야 하는 도전이라면, 복잡성 사고는 도전을 피하거나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찾아내고 심지어 뛰어넘도록 도울 것이다.
에드가 모랭
1장
맹목적 지성
의식화
우리는 물리학적,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세계에 관한 상상을 초월하는 지식을 얻었다. 과학 덕분에 경험적이며 논리적인 검증법이 점점 더 폭넓게 확산됐다. 이성의 빛은 신화와 암흑을 정신의 최하층으로 밀어 넣었다. 그럼에도 도처에서 오류와 무지, 맹목은 우리의 지식 증대와 더불어 커져갔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급진적인 의식화가 필요하다.
1. 오류의 심층 원인은 사실이나 논리 자체가 아니라 지식을 이론이나 이데올로기처럼 체계적으로 조직화하는 방식에 있다.
2. 과학 자체의 발전과 관련해 새로운 무지가 나타났다.
3. 이성의 오용과 관련된 새로운 맹목이 생겨났다.
4. 인류가 초래하는 가장 심각한 위협은 맹목적인 지식과 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진보, 말하자면 핵무기·질서 조작·생태계 훼손 등과 연관이 있다.
이러한 오류와 무지, 맹목, 위험은 공히 실재의 복잡성을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인식을 조직화하는 분절적인 방식에서 기인한다.
지식의 조직화 문제
모든 지식은 의미 있는 자료 선택을 통해 생겨나며 의미 없는 자료는 거부된다. 나누고 묶고 위계화하며 중심화하는 논리 작용은 사실 사유 또는 패러다임을 조직화하는 초(超)논리 원칙, 즉 사물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을 지배하지만, 우리는 의식하지도 못하는 불가사의한 원칙에 따른다.
마찬가지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이행하는 불명확한 순간에, 이 두 학설은 자료를 취사선택하는 원칙을 결정하는 데서 처음으로 대립했다. 천동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세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자료는 의미 없다고 거부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지동설을 수용하기 위해 오히려 그 자료를 근거로 삼았다. 지동설은 별자리 같은 과거의 학설과 동일한 구성요소를 포함했으며 종종 옛날 계산 방식도 이용했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모든 사고방식은 변해야 했다. 기존 중심이었던 지구가 이제는 주변 요소로 밀려나고, 반대로 주변 요소였던 태양이 중심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시대의 인류-사회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예컨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집단수용소인 굴락(Goulag) 말이다. 사실상 그 필요성이 인정되었다 해도 굴락은 소련이 사회주의를 건설하던 초기, 자본주의에 포위된 어려운 상황의 산물로 이차적이고 일시적인 부정적 현상이었다. 따라서 굴락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시스템의 변두리로 여겨졌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굴락을 전체주의적 본질을 드러내는 사회주의 시스템의 중심핵으로 간주했다. 중심화, 위계화, 분리 및 동일시화가 작동함에 따라 사람들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시스템의 통찰이 굴락 때문에 전적으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같은 현상을 사유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의 편견, ‘열정’, 이해관계가 생각의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라는 개념과 집단수용소라는 개념이 서로 이질적으로 여겨져 분리되는 선험적 분리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개념을 굴락으로 환원하는 선험적 동일시도 피해야 한다. 즉 일차원적이고 추상적인 통찰을 피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인식을 절단하고 실재를 왜곡하는 패러다임의 성격과 결과를 우선 알아야 한다.
지식의 병리학, 맹목적 지성
우리는 분리, 환원, 추상화 원칙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다. 이 원칙들은 내가 ‘단순화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데카르트는 마음(ego cogitans)과 물질(res extensa), 즉 철학과 과학을 구분하면서, 그리고 ‘명석판명한’ 생각, 즉 그 자체로 분리된 사유를 진리의 원칙으로 삼으면서 서구의 중심 패러다임을 공식화했다. 17세기 이래로 서구사상의 모험을 통제해온 이 패러다임은 과학적 인식과 철학적 성찰의 거대한 진보를 이끌었으며, 그 해악은 20세기가 되어서야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음과 물질의 분리는 과학적 인식과 철학적 성찰의 소통을 저해하면서 마침내 과학의 자기 인식 및 성찰, 심지어 자기 이해 가능성마저 박탈해버렸다. 게다가 이러한 분리 원칙은 과학 지식의 커다란 세 영역, 즉 물리학, 생물학, 인문학을 극단적으로 분리했다.
이러한 분리를 개선하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단순화, 즉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환원하는 것, 예컨대 생물학적인 것을 물리학적인 것으로, 인문학적인 것을 생물학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방법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초(hyper)전문화는 현실의 복잡한 망을 찢고 조각내야 했으며, 실재의 추상적인 분할을 실재 그 자체라고 믿게 해야 했다. 또 과학적 인식의 전통적 이상에 따르면 현상의 명백한 복잡성 이면에 있는 완벽한 절대 질서를 발견해야 했다. 이 완벽한 절대 질서는 우주와 같은 불멸하는 기계의 규칙을 정하는데, 이 기계는 목적과 시스템에 따라 다양한 극소 요소(원자들)로 결합되었다.
그러한 지식, 더불어 지식의 정확성과 작동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척도와 계산에 기인했다. 그러나 거듭되는 수학적 처리와 형식화는, 수량화된 실체를 지배하는 공식과 방정식만을 유일한 현실로 고려하여 존재와 존재자를 분해해버렸다. 마지막으로 단순화하는 사유는 하나와 다수의 결합〔하나이자 여럿, 여럿이자 하나(unitas multiplex)〕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는 다양성을 무력화하면서 추상적으로 결합했다. 혹은 반대로 통일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다양성을 그저 늘어놓기만 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맹목적 지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맹목적 지성은 조화와 통일성을 파괴하고, 주위의 모든 대상을 분리한다. 그리고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분리 불가능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중요한 현실들은 분해되어 있다. 이 중요한 현실은 분과 학문을 가르는 경계를 가로지른다. 인문학의 분과 학문에서는 더 이상 인간이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맹목적인 현학자들은 인간이란 실존적으로 허황된 환영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매체들이 수준 낮은 우민화를 조장하는 반면, 대학은 수준 높은 우민화를 장려한다. 지배적인 방법론은 몽매함을 양산한다. 왜냐하면 분리된 지식 요소들은 더 이상 결합되지 못하고 우리는 해당 요소들을 자신의 흔적으로 간직하거나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식의 놀랄 만한 변화에 접근했다. 인식이란 이제 더 이상 인간 정신이 성찰하고 논의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점차 국가와 같은 익명의 권력에 의해 조작되고 정보와 관련된 기억 속에서 흔적으로만 남겨지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 대대적이고 경이로우며 새로운 무지에 학자들은 무관심하다. 자신들의 발견 결과를 실질적으로 통제하지 않는 학자들은 자신이 수행하는 연구의 의미와 성격을 지적인 측면에서조차 통제하지 않는다.
인간의 문제는, 무지한 전문가들을 양산해내는 과학적 몽매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독점했다고 주장하는 아둔한 교리들, 예컨대 알튀세르 식 마르크스주의에 따르자면 자유경제 관료주의에도 있다. 그리고 마치 진리가 열쇠만 있으면 열 수 있는 금고 속에 들어 있는 것인 양 모든 문을 다 열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한심한 만능열쇠 같은 몇몇 핵심 아이디어도 마찬가지로 문제다. 그리고 입증되지 않은 일반 지식은 편협한 과학만능주의와 다르지 않다.
불행히도 일차원적이고 절단적인 사고방식은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들 속에서 가혹한 대가를 치른다. 즉 절단은 살을 자르고, 피를 쏟게 하고, 고통을 일으킨다. 인류-사회 현실의 복잡성을 수용하지 못하면, 개인이라는 극소 차원과 인류가 생존하는 지구 전체라는 극대 차원 속에서 무한한 비극에 이르고, 우리는 극한의 비극으로 끌려간다. 사람들은 정치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 만들고 이원론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맹목적인 충동을 이용하는 조작 정치를 구상한다면, 그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 전략을 세우려면 복잡한 인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전략은 불분명하고 우연한 것, 상호작용과 반작용의 다양한 움직임과 함께 혹은 그것들에 반해 작동하면서 추진되기 때문이다.
복잡성 사고의 필요성
복잡성이란 무엇인가? 복잡성은 분리될 수 없도록 연결된 이질적인 요소로 구성된 망, 즉 함께 짜인 복합체(complexus)이다. 또한 복잡성은 실제로 우리의 현상 세계를 구성하는 사건, 행동, 상호작용, 반작용, 결정, 돌발적인 것 등으로 구성된 하나의 망이다. 그렇다면 복잡성은 뒤죽박죽, 뒤얽힘, 무질서, 모호함, 불분명함 등 온갖 불안정한 특성들과 함께 제시된다. 바로 여기에서 무질서를 몰아내면서 질서를 잡고, 불확실한 것을 몰아낼 확실한 지식이 필요해진다. 즉 질서 있고 확실한 요소를 선택하고, 모호한 것을 제거해 명확하게 만들고, 구별하며 위계화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하지만 명료함을 추구하는 작업은 복합체의 다른 특성들을 제거하는 순간 맹목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우리를 맹목적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복잡성은 과학에서 쫓겨났던 방법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왔다. 세계의 완전무결한 절대 질서,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결정론, 유일한 절대 법칙에 대한 복종,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된 구성(원자)을 밝혀내는 데 전념했던 물리학의 발전은 결국 실재의 복잡성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물리적 세계 속에서 파괴와 무질서의 출현 원칙, 예컨대 ‘열역학 제2법칙’을 발견했다. 그다음에 물리적·논리적 단순성이 있으리라고 예측된 곳에서 미시물리학의 극단적 복잡성을 발견했다. 소립자는 근원적인 하나의 조각이 아니라, 아마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의 경계일 것이다. 우주는 그 자체로 완벽한 기계가 아니라, 분해하는 동시에 조직화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삶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자율성을 생산해내는 극단적으로 복잡한 자기환경조직 현상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인류-사회적 현상은 자연현상을 해석하기 위해 만들어낸, 덜 복잡하고 명료한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인류-사회적 복잡성을 파기하거나 은폐하지 말고 그것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복잡성 사고가 어려운 이유는, 이 사유는 다양한 현상들이 서로 뒤죽박죽 섞여 있는 상태(상호작용-반작용하는 끝없는 움직임),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 흐리멍덩한 것, 불확실한 것, 모순된 것 등에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험을 위해 몇몇 개념 도구와 원칙을 고안해낼 수 있다. 그리고 명백히 드러나야 할 새로운 복잡성 패러다임의 양상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이미 졸저 《방법》의 제1, 2권에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몇몇 개념 도구를 언급했다. 예를 들면 분리·환원·일차원화의 패러다임을 분리하지 않으면서 구별해주고 동일시하거나 환원하지 않으면서 결합하는 구별·결합의 패러다임으로 대체해야 한다. 이 패러다임은 <b>실제의</b> 한계(모순의 문제)와 원칙의 한계(형식주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이 전통적인 논리를 통합하는 대화적이고 트랜스논리적인(translogique) 원칙을 포함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높은 차원의 추상적 통일성(전체론)과 낮은 차원의 추상적 통일성(환원주의)을 피하는 ‘하나이자 여럿, 여럿이자 하나’라는 원칙이 숨어 있다.
나는 여기서 내가 끌어내려 애썼던 복잡성 사고의 ‘명령들’을 열거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네 사유의 무능을 민감하게 여기고, 절단하는 사유는 필히 절단하는 행동에 이른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즉 사유의 현대적 병리학을 인식케 하는 것이다.
사유의 오래된 병리학은 사유가 창조해낸 신화와 신들에게 독립적인 삶을 부여해주었다. 정신의 근대 병리학은 실재의 복잡성을 보지 못하게 한 초(hyper)단순화 속에 있다. 반면 사유의 병리학은 이상주의 안에 있다. 이러한 이상주의 안에서 사유는 스스로 해석해야 하는 현실을 은폐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론의 병은 교조주의와 독단주의로, 이는 이론을 이론 자체에 가두고 이론을 경직시킨다. 이성의 병리학은 합리화이다. 합리화는 정합적이긴 하지만 부분적이고 일방적인 사상의 시스템 속에 실재를 감금해버려, 실재의 일부가 비합리적임을, 또 합리성은 비합리적인 것과 대화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여전히 복잡성의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카를 포퍼(Karl Popper), 토머스 쿤(Thomas Kuhn), 임레 라카토스(Imre Lakatos), 폴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 사이의 인식론적 논쟁에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맹목은 우리네 야만성의 일부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사상의 야만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 정신의 선사시대에 살고 있다. 오직 복잡성 사고만이 우리 지식의 문명화를 도울 것이다.
(서문,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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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에드가 모랭 Edgar Morin, 1921~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문명비평가이다. 세계 여러 대학의 명예교수이며,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의 명예 연구부장인 모랭은 자연과학·인문과학·사회과학을 종횡하는 포괄적인 사유를 통해 오늘날의 학문과 사회의 위기를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오래전부터 문화 실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했으며, 그 관심은 《시대정신》(1960), 《오를레앙의 소문》(1969) 등에 잘 집약되었다.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는데, 그중 1977년 1권을 펴낸 뒤 2004년 6권에 이른 《방법》 시리즈〔《자연의 자연》(1977), 《삶의 삶》(1980), 《지식의 지식》(1986), 《생각들》(1991), 《인간성의 인간성》(2001), 《윤리》(2004)〕가 대표작이다. 그 밖에 《복잡성의 지성》(1999),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2007), 《나의 철학자들》(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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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신지은
사회학을 전공하고, 파리 5대학에서 〈현대의 산책자. 고독과 함께하기의 경계에서 방랑하는 인간〉으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관심 분야는 일상생활의 사회학, 문화 사회학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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