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삼킨 죽음은 여전히 내 내부의 한가운데 가로걸려 체증처럼, 신경통처럼 내 일상을 훼방 놓았다. 나는 여전히 사는 게 재미없고 시시하고 따분하고 이가 들끓는 누더기처럼 지긋지긋해 벗어던질 수 있는 거라면 벗어던져 흠뻑 방망이질을 해주고 싶었다.
부처님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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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정하고 오붓한 한 식구들이었다. 남자 둘, 여자 둘의.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두 남자 식구가 차례차례로 죽어갔다. 아주 끔찍한 모습으로. 그리고 그 끔찍한 사상(死相)으로 이십여 년 동안이나 여자들은 얽맸다.
6?25가 터지고 한동안 오빠는 꽤나 신이 나 보였다. 오빠는 그전부터 좌익운동에 가담하여 심심찮게 말썽을 일으켜오던 터라 신 날 만도 했을 테고, 그런 오빠 때문에 적잖이 속을 썩이던 아버지도 때가 때이니만큼 내버려두려는 눈치였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오빠는 바깥출입을 뚝 끊고 안방에 누워 담배만 온종일 뻐끔뻐끔 피고, 수염이 무성하게 자라도 깎을 체도 안 했다. 누가 찾아와도 없다고 따돌리지는 않고 만나긴 만나는데 뭔가 상대방을 몹시 불쾌하게 해서 보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날로 심해지는 폭격에서보다 오빠의 이런 태도에서 더 위급한 폭발물 같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늘 찾아오던 오빠의 ‘동무’가 총잡이를 앞세우고 찾아왔다. 마당에 마주 선 채 웅얼웅얼 대화가 오고갔다. 조용한, 거의 졸립도록 권태로운 말의 주고받음이었다. 별안간 오빠가 “못 해” 하고 악을 썼다. 상대방이 “못해? 죽인대도.” “죽어도 싫다니까.” 목숨은 어처구니없이 조급하게 흥정된 모양이다. 총잡이가 정말 총을 쐈다. 한 방도 아닌 여러 방을, 가슴과 목과 얼굴과 이마에.
그들은 갔다. 우리 식구는, 나는 얼마나 소름 끼치게 참혹하고 추악한 죽음을 목도하고 처리해야 했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산산이 망가진 상체의 살점과 뇌수와 응고된 선혈을 주워 모으며 우리 식구는 모질게도 악 한마디 안 썼다. 그런 죽음, 반동으로서의 죽음은 당시의 상황으론 극히 떳떳치 못한 욕된 죽음이었으니 곳을 하고 아우성을 칠 계제가 못 됐다. 믿을 만한 인부를 사 쉬쉬 감쪽같이 뒤처리를 했다.
우리는 마치 새끼를 낳고는 탯덩이를 집어삼키고, 구정물까지 싹싹 핥아먹는 짐승처럼 앙큼하고 태연하게 한 죽음을 꼴깍 삼킨 것이었다.
그 후 아버지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빨갱이라면 이를 갈아도 시원찮을 그분이 그때 한자리하고 있는 친구를 찾아가 구질구질 아첨을 떠는 눈치더니, 일을 봐준다고 쫓아다니고 어이없게도 숨어 들어앉은 친구의 자제를 밀고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승승장구할 때도 아닌 패세가 분명할 시기에 이 무슨 망령인지.
세상이 바뀌고 아버지는 원한을 산 사람들의 고발로 잡혀갔다. 1·4후퇴를 며칠 안 남기고 용케도 풀려나온 아버지는 전신이 매 맞은 자국과 동상으로 푸릇푸릇 짓무르고 해지고 퉁퉁 부운 채 썩은 냄새를 심하게 풍기는 송장이었다. 그래도 그 끔찍한 몰골로 목숨은 붙어 있어 우리를 피난도 못 가게 서울에 묶어놓았다가, 1·4후퇴 후의 텅 빈 서울에서 돌아가셨다. 그것은 오빠의 죽음보다 더 끔찍한, 차마 눈 뜨곤 볼 수 없는 죽음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도 감쪽같이 처리했다. 아아, 우리는 이미 그런 일에 능숙해져 있었다.
당시의 서울에선 알리려야 알릴 만한 곳도 없었지만, 서울이 수복되고 나자 빨갱이로서 매 맞아 죽은 아버지의 죽음은 욕되고 수치스런 것이었기 때문에 가까운 친척에게까지 그 일을 속이자고 어머니와 나는 공모했다. 공모를 더욱 빈틈없이 하기 위해 우리는 이사까지 갔다.
난리 통엔 죽은 이도 많았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없어진 이도 많았으므로 나의 아버지와 오빠도 일가친척에게 없어진 이로 알려졌다. 그것은 실로 일거양득이었다. 행방불명이란 생과 사에 똑같이 반반씩의 확률이 있으므로 우리 모녀의 불행도 남의 눈에 반쯤은 줄어서 비쳐졌을 게 아닌가.
이렇게 해서 우리 모녀는 앙큼하게도 두 죽음을, 두 무서운 사상을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꼴깍 삼켜버렸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제사도 안 지냈다. 그들은 행방불명이니까.
사람이 죽으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눈물이 마르면 침을 몰래몰래 발라가며, 기운이 빠지면 박카스를 꼴깍꼴깍 마셔가며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고, 조상객을 치르고, 노름꾼을 치르고, 거지를 치르고, 복잡하고 복잡한 밑도 끝도 없는 여러 가지 절차를 치르고, 복잡한 철자 때문에 웃어른과 아랫사람과 말다툼도 치르고, 차례에 제사에 또 제사를 치른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은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지고 진저리가 나고, 빈털터리가 되고 지긋지긋해지면서 죽은 사람에게서까지 정나미가 떨어진다. 비로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자(死者)를 삼킨 것이다. 은밀히, 음험하게. 어머니와 교외의 조그만 집에 살면서, 나는 밥벌이를 다녀야 했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나절 집에 돌아올 때, 앞서가는 젊은 남자의 뒤통수가 잘생기고 걸음걸이가 근사했다고 치자. 그 무렵의 나는 그런 일로도 감미로운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는 그런 나이였다. 그러나 나는 무서웠다. 앞서가는 사람이 행여 돌아다볼까 봐, 돌아다보는 그의 얼굴이 꼭 피투성이의 무너져 내린 살덩이일 것 같아 나는 무서웠다. 나는 지독스런 혐오감으로 몸을 떨며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내 처녀시절,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나는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보냈다. 무서운 게, 무서워하며 사는 게 지긋지긋했다.
너도 결혼을 해야지. 처자식만 알 착실한 남자하고. 어느 날 어머니가 그랬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에 대번에 동의했다. 처자식만 아는 착실한 남자라는 말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처자식의 먹이를 벌어들이는 것 외에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 섣불리 참여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남자,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 남자가 좋고말고. 그리고 나는 왠지 그런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오빠와 아버지에게 복수라도 하는 기분이었고, 무엇보다도 사는 일에 지쳐 있기도 하였다.
나는 그런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애를 낳고 또 낳고 또 낳았다. 애에 대한 내 욕심은 채워질 줄 몰랐다. 알 게 뭐람. 언제 또 어떤 시대의 횡포가, 광기가 검은 총구가 되어 내 아이의 가슴을 향해 겨누어질지 알게 뭐람. 뭘 믿고 아이를 둘만 낳을까. 셋도 적지. 넷도 적고말고. 다섯 여섯…… 나는 몸서리를 치면서 자꾸 아이를 낳았다. 남편이 참다못해 불임수술을 할 때까지 내 출산은 계속됐다.
처자식만 아는 남편, 많은 아이들. 그래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는 게 매가리가 없고 시들시들하고 구질구질하고 답답하고 넌더리가 났다. 사는 즐거움, 나는 흥미를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마치 망가진 용수철처럼 매가리가 없이 풀려 있었다.
싱싱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서움증조차도 처녓적 같은 싱싱함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망령이 어두운 골목길에 피투성이의 유령이 되어 나타날까 봐 무서워하는 대신 유령도 못 되고 어느 구석에 꽉 처박혀 있는 망령을 지지리도 못난 것으로 얕잡고 있기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망령이 처박혀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들이 있는 곳을 명치 근처에서 체증을 위식하듯 내 내부의 한가운데서 늘 의식해야만 했다. 그 느낌은 아주 고약했다. 어머니와 함께 두 죽음을 꼴깍 삼켰을 당시의 그 뭉클하기도 하고, 뭔가가 철썩 무너져 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속이 뒤틀리게 메슥거리기도 하던 그 고약한 느낌은 아무리 날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았다.
자업자득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삼켰으니까. 나는 망령들을 내 내부에 가뒀으니까. 나의 망령들은 언젠가는 토해내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는 체증이 되어 내 내부의 한가운데에 가로놓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차 나는 더 묘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망령을 가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내가 망령에게 갇힌 꼴이라는 것을. 나는 망령에게 갇힘으로써 온갖 사는 즐거움, 세상 아름다움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당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늘 두 죽음을 억울하고 원통한 것으로 생각해왔는데 그 생각조차 바뀌어갔다. 정말로 억울한 것은 죽은 그들이 아니라 그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나일지도 모른다 싶었다. 그 나이에,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 가장 반짝거리고 향기로운 시기에 그런 것을, 그 끔찍한 것을 보았다니, 그리고 그것을 소리도 없이 삼켜야 했다니! 정말이지 정말이지 억울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인 것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삼킨 죽음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 무렵 나는 낯선 길모퉁이 초상집에서 들리는 곡성에도 황홀해져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오래 서성대기가 일쑤였다. 저들은 목이 쉬도록 곡을 함으로써, 엄살을 떪으로써 그들이 겪은 죽음으로부터 놓여나리라. 나에겐 곡성이 마치 자유의 노래였다.
(본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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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마흔 살이던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 뒤 『휘청거리는 오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등의 장편소설,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의 소설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못 가 본 길이 아름답다』 등의 산문집을 내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이산문학상(1991),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황순원문학상(2001) 등을 수상하였다. 등단 41주년을 맞은 지난 2011년 담낭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림 · 조문현
전남대학교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예술학을 전공하였다. 개인전 7회와 뉴욕햄튼 아트페어, 서울국제 아트살롱전, 광주 아트페어, 한중교류전, 한일교류전 등을 비롯하여 단체?초대전에 150여 회 참여하였다.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강사, 대한민국 한국화 대전과 무등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2010년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상 허백련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한국미협, 전통과 형상회, 전업작가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광주 무등산 아래 우리문화미술연구소에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연구하며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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