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헤겔과 아이티
서문
여는 말
「헤겔과 아이티」는 추리소설처럼 쓴 글이다. 이 소개말을 건너뛰고 본문을 곧장 읽어도 좋다. 이 글의 구성과 결말을 이미 아는 독자를 위해 새로 쓴(후기로도 읽힐 수 있는) 이 소개말은 글의 배후에 있는 발견의 과정과 글이 처음 수용될 때의 충격을 기술한다. 이 소개말은 「헤겔과 아이티」가 쓰이기까지 수년간의 연구를 추적하고, 각주에 압축된 자료에 살을 붙여 그 학문적 함의를 더 수월하게 확인하도록 하며, 실세계의 정치적 함의를 지닌, 현재 진행 중인 지적 논쟁들 안에 글을 위치시킨다.
우연한 기획
나는 헤겔이나 아이티에 관해 글을 쓸 작정이 아니었다. 1990년대에 나는 다른 기획에 매달려 있었다. 냉전 시대의 종결과 더불어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에 걸쳐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 경제법칙과 시장 합리성에 대한 호소는 온갖 종류의 실용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는 적법화의 주문呪文이었다. 그런 물신적 숭배 대상인 이 실체 없는 환영幻影, ‘경제’란 도대체 무엇인가? 언제, 왜 발견되었으며, 그 보이지 않는 손을 고려할 때 더욱 당혹스런 질문이겠지만,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여기서 당연히 애덤 스미스Adam Smith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 철학자들의 주장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상이 확립된 맥락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대단히 놀라웠던 점은 19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정치경제학 이론이 유럽 전역에 얼마나 커다란 지적 흥분을 불러일으켰는가 하는 것이었다. 두 세대가 지나고 마르크스가 경제학을 공부할 즈음에 경제학은 ‘음울한 학문dismal science’[‘음울한 학문’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문필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이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 부족 사태를 예견한 맬서스T. R. Malthus의 이론을 접하고 나서 경제학을 가리켜 썼던 표현이다-옮긴이]으로 지칭되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경제학에 관심을 보이는 철학자가 거의 없다. 비록 몇 가지 기본적 경제용어가 일상적 사고의 중심에 자리 잡기는 했지만(수요와 공급, 이윤 동기, 경쟁 등), 경제가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오늘날의 일반 대중에게 여전히 불가해한 문제다. 그러한 지식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사제집단 같은 전문가들의 소관인 것이다. 재미로 경제학 저널을 읽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Wealth of Nations』이 출간되었을 때 독자들이 보인 엄청난 흥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헤겔의 초기 저작은 이러한 연구에 유용했다.1 예나 시기의 저작은 헤겔이 1803년에 읽은 『국부론』의 영향에 대한 놀라운 기록이다.2 제조업에서의 기만적으로 단순한 혁신, 즉 분업이 몰고 온 급진적 변화의 효과를 기술한 스미스의 글은 헤겔의 철학자적 관심을 사로잡았다. 핀의 제조라는 평범한 경우를 예로 들면서, 스미스는 작은 단위로 일을 전문화한 생산의 분화는 노동자의 생산성과 소비자의 필요 양자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며, 인간 상호의존성의 범위와 정도를 엄청나게 증대시킨다고 주장했다.3 헤겔은 반복적이고 분절된 노동 행위가 노동자에게 미치는 끔찍한 영향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핀이 세상에 쌓여가는 광경을 떠올리며, 그에 매료되는 한편 두려움도 느꼈을 것이다. 헤겔은 “필요의 체계”로서의 이 새로운 경제가 집단적 삶의 형식을 바꿔놓을 힘을 지녔다는 점을 인식했다.4 그의 묘사는 극적이었다. “자연의 힘들과 마찬가지로 맹목적으로 움직이며, 야수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이고 엄격한 길들이기와 제어를 필요로 하는” “상호의존성의 괴물 같은 체계”를 “필요와 노동”은 창조해낸다.5 1805~1806년에 이르러 헤겔은 국가에게 이 야생의 게걸스러운 짐승을 길들이는 권력Gewalt으로 나서주기를 요청하는 정체政體 철학의 기초로서 ‘부르주아’ 또는 ‘시민’ 사회die burgerliche Gesellschaft라는 전통적 개념 대신 그 새로운 경제를 사용하고 있었다.6 헤겔에 의한 시민사회 개념의 경제적 재구상은 ‘획기적epoch-making’이라는 평을 받아왔다.7
부르주아 사회
헤겔은 지금 우리가 근대성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삶에 일어난 파열을 날카롭게 관찰한 사람이었다. 예나 시기의 강의 노트는 그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가득하다. 그의 평생에 걸친 기획은 그러한 변화를 철학적 의미의 견지에서 이해하는 것이었다. 헤겔의 철학 체계는 추상적 차원으로 상승할 수도 있다.(예나에서 그의 초기 강의를 들은 어느 학생은 “강의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며, 도대체가 무슨 문제를 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8 그러나 헤겔의 글은 나처럼 유물론적 성향을 지닌 이론가들이 특별히 좋아할 만한 종류의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세부사항으로 가득하다. 핀 제조, 커피 마시기, 구빈원, 남성용 프록코트, 타래송곳(코크스크루), 양초 심지 절단기 등등. 헤겔의 개념적 어휘 가운데 가장 추상적인 용어조차 일상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예나 시기의 글을 보면 헤겔의 핵심 용어인 ‘대상화objectification’(외화Entausserung)는 그 지시대상이 일상적인 인간 노동이며, ‘부정negation’은 소비의 욕망을 가리키는 헤겔의 용어이고, 자연적 필수불가결함에 대립되는 역사적으로 창조된 필요는 패션의 사회적 모방으로써 예시된다.
필요의 체계는 서로에 대해 알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 낯선 이들 사이의 사회적 연계다. 소비자들의 “물릴 줄 모르는 욕망”과 “영국인이 ‘안락함comfort’이라 부르는 것”의 “끝 모르는 무한한 생산”이 결합하여 식별할 수 있는 어떤 한계도 없는 “사물의 운동”을 생산한다.9 사실 헤겔이 묘사한 것은 유럽 식민주의 체제의 탈영토화된 세계시장이며, 그는 이것을 묘사한 첫번째 철학자다.10 이 우연적이고 맹목적인 의존성은 이제 시민적civic 휴머니즘의 전통에서 그랬던 것처럼 통치의 법에 대한 일치된 동의의 기초를 제공하는, 공적 시민으로서의 재산 보유자들 사이의 계약 관계를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덤 스미스가 이해하는 바의 정치경제학에 의해 창조된 사회인데, 이는 분명 여전히 도시적인 또는 ‘부르주아적인burgerliche’ 사회지만 식민지 무역이라는 근대적 현실에 의해 변형된 사회이다. 신흥 상인계급Handelsstand은 원거리 무역업자들로 이루어진다. 그들의 이익은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가 이해한 것처럼) 자신의 재산을 굳게 지키는 데 있다기보다 재산의 ‘소외Entfremdung’의 조건, 즉 사고팔 권리를 굳게 지키는 데 있다. 헤겔은 교환되는 물품은 가치가 동일한 반면 그 역설적인 사회적 결과는 불평등이라는 점, “거대한 부와 거대한 빈곤의 대조”라는 점을 인식한다.11 통상 교역은 지속적으로 자기재생산적인 인간관계의 망, “근대적 의미의 ‘사회’”를 창조한다.12
새로운 사회는 민족 집단ethnic group이나 혈연에 기초한 씨족Stamm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적 방식으로 이해된 ‘Volk(민족)’의 해체다.13 낡은 의미의 시민사회와 비교할 때 부르주아 사회는 비애국적이며, 무역에 있어 민족의 경계를 넘어 나아가려는 충동에 지배된다. 통상에는 국경이 없다. 통상의 자리는 바로 바다다. 엄밀히 말해 경제와 민족은 양립 불가능하다.(애덤 스미스는 식민경제가 국체national polity를 왜곡시킨다고 보았다.)14 경제는 무한히 팽창하는 성질이 있는 반면 민족은 제약을 가하며 경계를 지운다. 헤겔은 어떤 다른 형식의 상호의존성으로서 정체政體─법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윤리적 교정책을 제공하고, 그리하여 시민사회와 국가라는 양 측면이 상호대립을 통해 서로를 가능케 하도록 만드는 정체─를 도입함으로써, 부르주아/시투아이엥이라는 야누스의 얼굴을 한 개인을 생산하는, 사회의 힘과 국가의 힘 사이의 이 대립을 궁극적으로 해소한다.15
애덤 스미스를 읽으면서 헤겔은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주의 전통, 그것도 그 가장 신성한 토대인 자연 상태에 도전하는 사회 묘사를 발견했다. 역사적 불변항과는 거리가 멀고 자연법 이론과 날카롭게 대립하는 그것은 인간의 상호의존성에 관한 역사적으로 특정한 설명이다. 홉스에서 로크John Locke와 루소Jean Jacques Rousseau에 이르는 계약론이 자연적 자유를 지닌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을 사회적ㆍ계약적 합의를 이루는 조건을 결정하는 존재로서 철학적 사변의 출발점으로 정립한 반면, 헤겔의 근대적 주체는 상품 교환으로 인해 이미 사회적 의존의 망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헤겔은 경제에서 국가로 나아가는가? 리델Manfred Riedel은 국가가 새로운 사회를 무제한성에서 구해내고 통제를 주장하기 위한 데우스엑스마키나deus ex machina[라틴어로 ‘기계장치의 신神’을 의미하며, 극에서 갑자기 출현하여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결말을 이끌어내는 초자연적인 힘을 말한다-옮긴이]로 등장한다고만 말한다.16 사태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로빈슨 크루소와 프라이데이”17
헤겔은 예나 시기의 다양한 강의에서 새로운 사회를 묘사하는 가운데 ‘교환을 통한 인정Anerkanntsein im Tausch’으로서의 ‘상호인정’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18 독자는 모든 해당 텍스트에서 이 주제가 필요의 체계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튀어나온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음과 같은 질문은 불가피하다. 주인과 노예 관계와 새로운 세계 경제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전문가들의 견해를 따를 때 헤겔이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호소한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무엇일까? 그리고 만약 헤겔이 노예제를 프랑스 혁명의 국내적 측면을 묘사하는 데에만 알레고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이것은 그가 동시적으로 진행하는 상품 거래에 대한 논의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1805~1806년의 예나 시기 텍스트에서 헤겔은 (핀의 제조, 교환에 있어 물품의 이동, 노동자의 비인간화 등) 경제적 주제들과, 주인과 노예의, 그리고 “상호인정”이 “극단적 형태로” 나타나는 “생사를 건 투쟁”의 정치적 주제들(텍스트의 여백에 그는 “폭력, 지배와 종속”이라고 적어놓았다) 사이를 연이어 빠르게 이동한다.19 개념상으로는, 자신의 예속 상태를 뒤엎고 법치국가를 확립하는 노예들의 혁명적 투쟁이 헤겔의 분석을 무한히 팽창하는 식민경제에서 떼어내, 그가 자유의 실현으로 규정하는 세계사의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이론적 중심점hinge을 제공한다. 이러한 이론적 해결은 바로 그 순간 아이티에서 실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연관은 명백해 보이는데, 너무도 명백하여 증명의 부담이 다른 주장을 펼치고자 하는 쪽에 지워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 해석은 헤겔과 더불어 “철학은 당대의 이론이 된다”는 리터Joachim Ritter의 널리 수용되는 명제20를 뒷받침한다. 또한 그것은 리델을 성가시게 했던 문제, 즉 국가를 데우스엑스마키나로 도입하는 것의 분명한 자의성을 제거해준다. 평등한 자들 사이의 상호인정은 노예제의 모순들로부터 논리적 필연성을 띠고 출현하는데, 그 모순들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노예들이 “자유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기치 아래 ‘인정 투쟁’을 벌이며 노예제에 맞서 싸움으로써 역사의 능동적 행위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마당에21 인간 노예를 법적으로 ‘물품things’으로서 거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세기 동안의 역사적 망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이 「헤겔과 아이티」를 집필하는 동기가 된 수수께끼였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서 그물망처럼 얽힌 모든 관련 증거들로 나를 이끌었는데, 이 증거들로 인해 초점이 아이티 쪽으로 이동했음은 물론 더 큰 폭으로는 학문의 문제, 즉 오랜 시간에 걸친 연구대상의 구성이 어떻게 사태를 조명하는 만큼이나 감출 수도 있는가 하는 문제로 이동하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헤겔과 아이티」는 연관에 관한 글, 침묵 속에 있는 이 두 가지 역사적 현상을 연결하는 ‘과and’에 관한 글이다. 이 연구 과정에서 나를 추동한 것, 그리고 실은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은 학문이 우리의 상상력에 가하는 한계에 대한 점차 분명해지는 의식이었다. 헤겔이라 불리는 현상과 아이티라 불리는 현상은 (신문과 잡지가 명확히 기록하고 있듯이) 그 시작 시점에는 서로에게 스며들 만큼 연관되어 있었지만 전수의 역사를 거치면서 서로 분리되었다. 이 지점에서 서구중심주의라는 유령을 들먹이기는 물론 쉽다. 하지만 그것은 서구중심주의 자체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티가 어떤 역할을 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끌어들인다.
역사적 해석에 있어서의 변화는 한 사람의 발명품이 아니다. 서로 무관한 학자들이 서로의 연구를 바탕으로 성과를 축적해가는 것이다. 헤겔 학자들은 자료를 꼼꼼하게 수집하여 제시했는데, 그런 철두철미함 덕분에 허술한 연구에서라면 슬쩍 가려졌을 지식의 공백을 발견해내는 것이 가능하다. 이 공백은 공식 서사의 이면에 있는 또다른 서사의 편린들을 드러낸다. 그 다른 서사의 일부분들을 하나로 맞춰보려고 노력하는 중에 나는 다양한 분과학문에 속한 일군의 저자를 발견했는데, 그들의 학문적 성과는 우리 시대의 가장 흥미롭고 독창적인 연구에 속한다. 아이티 혁명은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으로서 다양한 담론의 교차지점에 존재한다. 제임스C. L. R. James의 『검은 자코뱅: 투생 루베르튀르와 산도밍고 혁명The Black Jacobins: Toussaint L’Ouverture and the San Domingo Revolution』(1938)[한국어판: 『블랙 자코뱅: 투생 루베르튀르와 아이티혁명』 (필맥 2007)], 에릭 윌리엄스Eric Williams의 『자본주의와 노예제Capitalism and Slavery』(1944), 데이비드 브라이언 데이비스David Brion Davis의 『혁명의 시대(1770~1823)의 노예제 문제The Problem of Slavery in the Age of Revolution, 1770-1823』(1975), 로빈 블랙번Robin Blackburn의 『식민지 노예제의 전복: 1776년에서 1848년까지The Overthrow of Colonial Slavery, 1776~1848』(1988), 폴 길로이Paul Gilroy의 『검은 대서양: 근대성과 이중의식The Black Atlantic: Modernity and Double Consciousness』(1992) 등의 고전은 말할 것도 없고, 조운 데이언의 『아이티, 역사, 신들Haiti, History and the Gods』, 시빌 피셔의 『부인된 근대성: 혁명의 시대의 아이티와 노예 문화Modernity Disavowed: Haiti and the Cultures of Slaves in The Age of Revolution』,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와 마커스 레디커의 『다두多頭의 히드라─선원, 노예, 평민과 혁명기 대서양 연안의 숨은 역사The Many-Headed Hydra: Sailors, Slaves, Commoners, and the Hidden History of the Revolutionary Atlantic』[한국어판: 『히드라─제국과 다중의 역사적 기원』(갈무리 2008)], 미셸 롤프 트루이요의 『과거를 침묵시키기: 권력과 역사의 생산Silencing the Past: Power and the Production of History』, 그리고 데이비드 제거스David P. Geggus의 많은 논문을 읽고 나서, 아이티를 문명사에서 완전히 주변적인 존재, “다른 사회들과의 문화적 공통성을 결여한” “외딴 나라”22로 치부하는 능변가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시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하다.
「헤겔과 아이티」는 의미의 전통적 위계를 벗어나는 지식상의 변화를 옹호한다. 이 글은 사실이란 고정된 의미를 지닌 데이터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계속해서 놀라게 할 수 있는 연결 통로로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상상력을 얽매지 말고 오히려 불어넣어야 한다. 사실이 선행 결정된, 권위 있는 명제에 대한 증명으로 열거되는 가운데 확고한 지식이라는 허구에 포섭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사실은 더 많은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 학문적 논쟁의 의미는 지적 세력권turf의 관념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집단적 학문에는 하나의 정치가 있다. 그 목적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적 공공영역─역사의 승자가 지식을 독점적으로 지배한 결과 결정적 경계들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은 곳─을 위해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헤겔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점이 중요한가?
헤겔이 실제로 생도맹그Saint-Domingue[아이티 혁명이 일어난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의 별칭. 산도밍고San Domingo,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역시 같은 섬을 가리킨다-옮긴이]의 사건에 고무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공은 피에르 프랑클랭 타바레스Pierre-Franklin Tavares에게 돌아가야 한다. 1990년대 초 타바레스는 독일보다 프랑스 쪽 자료에, 그리고 그 자신의 건실한 직관에 의존하면서 일련의 짤막한 사변적 논문을 써나갔는데, 거기서 다음과 같은 과감한 주장을 폈다. 헤겔은 아주 젊은 시절부터 노예제라는 당대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는 노예제에 대한 비판이 고대인의 의상衣裳으로 위장되어 있을 때조차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 레날 신부Abbe Raynal[1713~1796. 계몽주의시대 프랑스의 저술가이자 신부로서 정식 이름은 기욤 토마 프랑수아 레날Guillaume Thomas Francois Raynal-옮긴이]가 쓴 인도 제국諸國의 역사[흔히 『두 인도의 역사』로 약칭되는 『두 인도 내 유럽인의 정착과 상업에 관한 철학ㆍ정치사』를 지칭하며 이 책은 후에 「헤겔과 아이티」의 각주에서 정식으로 언급된다. 여기서 ‘두 인도’(les deux Indes)는 동인도와 서인도를 통칭한다-옮긴이]를 읽은 청년 헤겔은 겉으로 표현했던 것보다 카리브해 연안의 노예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헤겔은 평생 “레날주의자”로 살았다.23
「헤겔과 아이티」 출간 이후 닉 네스비트Nick Nesbitt는 헤겔의 원숙기 저작 『법철학』을 생도맹그 노예의 관점에서 읽기 시작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이 “진보적” 텍스트는 좀더 “소심한” 『정신현상학』의 추상적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예가 반란을 일으킬 권리에 대한 해명과 급진적 분석”을 통해 “아이티 혁명에 대한 최초의 위대한 분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24 우리로서는 강조점이 다를 수 있고 세부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여하튼 타바레스와 네스비트는 각기 다른 텍스트에 주목하면서 [헤겔과 아이티의] 연관이 자명하다는 데 대해 일치된 견해를 보인다.25 아이티 학자들의 경우, 내가 2005년 포르토프랭스에서 「헤겔과 아이티」를 발표했을 때 놀라지 않았다.(이미 그들은 타바레스의 논문들에 관해 알고 있었다.)26
타바레스의 사변이 더 널리 논의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며, 나 자신의 연구에서 그의 논문들을 그토록 뒤늦게 발견한 것은 유감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인 이 학자를 너무 성급하게 구미歐美 학계 패권의 희생자로 간주하기 전에(프랑스 시민인 타바레스는 파리에서 수학했고, 그런가 하면 헤겔 기성학계는 내 연구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헤겔의 아이티뿐 아니라 아이티의 헤겔, 다시 말해 헤겔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아프리카계 카리브인들의 헤겔 수용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네스비트는 이 유산을 에메 세제르Aime Cesaire의 연구 작업을 통해 추적한 바 있다.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닌 세제르의 개념 ‘네그리튀드negritude’는 “종속과 노예화라는 공통 경험”에 바탕을 둔 아프리카인 디아스포라의 자기 이해를 지칭하는데, 거기서 아이티 혁명에서의 노예의 자기 해방은 “상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27 개인적으로 세제르는 이폴리트Jean Hyppolite가 새롭게 번역한 헤겔의 『정신현상학』(1941)을 발견하고 흥분에 휩싸였던 젊은 날을 상기하며 네스비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신현상학』의 프랑스어 번역본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나는 레오폴드 상고르Leopold Senghor에게 그것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지. ‘레오폴드, 헤겔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게. 보편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특수자에 몰입해야 한다!’”28 헤겔을 읽는 참으로 생산적이고 ‘보편적인’ 경험은 전체적이고 전체화하는 체계의 요약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상상력이 최대한 구체적으로 예시된 변증법적 사유와 조우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해방을 통해 얻어짐을 세제르는 이해하고 있었다.
만일 헤겔 [사유의] 원천이 문제되는 것의 전부라면 그 결과는 현재의 학문적 구조 안에 편입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 경우 그것은 영향의 원천으로서나 또는 맥락에 대한 설명으로서 헤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저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의미에 본질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철학적 학문의 역사는 서구의 사상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에서 식민지 경험을 배제해온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어느 철학 교수가 내게 솔직히 말했듯, “만약 헤겔이 아이티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고 해도 그 사실 때문에 내가 헤겔을 가르치는 방식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정당화될 만한 뛰어난 진술이지만, 내가 아이티 없는 헤겔은 생각하지 못하게 될 정도로 [헤겔과 아이티를] 잇는 접속어 ‘과and’를 강조하는 가운데 뒤흔들어놓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관점이다. 자유에 관한 근대 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아이티의 역사에 대한 무지 속에 연구를 진행하기에 제대로 나아가질 못한다. 역사적 맥락이 근대 철학에 스며드는 것, 이것이 진정 그 스스로 의식하고 있던 헤겔의 근대주의적modernist 의도였다. 그러나 그 역도 참이다. 역사와 진리 사이의 필연적 상호연관에 대한 그 자신의 강조로 인해 헤겔 철학은 우리가 헤겔이라 부르는 지시대상이 역사적으로 인식되어온 방식에 연루된 억압들과 분리될 수 없다.
헤겔의 침묵
한 가지 경고caveat는 고려할 만하다. 만약 헤겔이 (유럽의 독서 대중 전체가 그랬듯) 아이티에 대해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면 왜 그의 글에는 더 명백한 논의가 없는가? 네스비트는 [아이티에 대한 헤겔의] 언급이 당대인이면 누구나 알아들을 만큼 충분히 노골적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언급들이 수세기 동안 체계적으로 간과되었다는 사실은 후대 학자들이 책임질 일만은 아니다. 아이티 혁명에 대한 사실상의 침묵에 헤겔 자신은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가? 타바레스는 이 점을 꼬집어 언급하면서 헤겔의 침묵이 프리메이슨과의 연계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자크 동트Jacques d’Hondt의 연구를 참조하면서 그는 “증거자료와 정보의 출처 가운데 어떤 부분에 대해 모르는 척하거나 침묵을 지키는” 헤겔의 경향은, 그가 살던 혁명의 시대에는 특히나 정치적 감시 아래 놓였던 비밀결사의 조직원들에게 전형적이었음을 논변한다.29 자크 동트는 이러한 연계가 헤겔에 대한 비의적 독해를 전반적으로 불가피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30
정치적 은밀함과 공적인 투명함, 계몽적 이성과 은둔자적인 신비주의, 근대주의와 영원한 앎에 대한 모순적 욕망을 결합한 프리메이슨이 당대인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의심할 수 없다. 프리메이슨은 헤겔과 아이티의 이야기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요소로서 노예무역이 이루어지는 보르도 항, 생도맹그의 농장, 노예제 철폐를 주장하는 영국의 저술가들, 파리에서 『미네르바』에 기사를 보내는 저널리스트들, 독일의 출판업자들을 서로 연결해준다.31) 헤겔은 이 거대한 소통망의 일부였으며, 거기에 가르베, 아르헨홀츠Johann Wilhelm von Archenholz, 레인스포드Marcus Rainsford, 코타Johann Friedrich Cotta, 욀스너Konrad Engelbert Oelsner 등이 가담해 있음을 알고 있었다.(이 인물들은 모두 「헤겔과 아이티」에 등장한다.) 우리는 헤겔의 초기 정신철학의 정치와 잡지 『미네르바』에 대한 독서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잡지는 프리메이슨 정신에 입각하여 지롱드 세계시민주의Girondin cosmopolitanism를 옹호하는데, 후자는 혁명적 이상의 국제적 확산에 진력하되 투생 루베르튀르의 공화국은 명시적으로 수용하는 반면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혁명적 공포의 “추상적 부정”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욀스너는 파리에서 『미네르바』에 보낸 「역사적 서신Historical Letters」에서 파리 자코뱅 당원들을 “식인종Menschenfleischfresser”이라고 비난했다. 욀스너는 자코뱅 당원들이 “가장 문명화된 민족을 가장 야만적인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는 “난폭한 민주주의”를 열망한다고 한탄했다.32 이와 정반대의 역사적 운동을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은 레인스포드였으며, 그 역시 『미네르바』 프리메이슨 조직망의 일부였다. 자코뱅 프랑스의 “암살자와 처형자들”이 “위대하고 품위 있는 민족”을 “원시시대의 야만적 상태”로 돌아가게 만드는 동안, 세계는 “검은 공화국”에서 자신의 처지를 떨치고 일어난 “흑인들이 가장 악독한 노예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 노예제의 야만적 상태를 뒤로한 채 “일거에 사회관계를 구성하고 법률을 제정하며 군대를 통솔하는 모습”을 보았다.33(유럽인들은 자신의 근대성이 지닌 야만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후대의 비난에서 이 세계시민주의자들은 자유롭다.)34
시빌 피셔는 헤겔이 노예 반란군 앞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한 논의를 중단함으로써 (그의 당대인들을 포함한) 『정신현상학』 독자들로 하여금 “개략적 이행의 빈 곳을 채우도록” 유도하며 이 때문에 지난 세월 동안 “헤겔 연구에서 가장 큰 이견들 가운데 일부”가 생겨났다고 말하는데35 이는 옳은 말이다. 침묵은 추측을 유발하는 힘이 있으며, 문제되는 인물이 권위를 의심할 수 없는 헤겔이기에 우리는 이 침묵에 저자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고 서둘러 추정하게 된다.36 그러나 가장 간단한 답이 가장 적절한 답인지도 모른다.
예나 시절 헤겔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위대한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정신현상학』을 완성했을 때 그는 겨우 서른여섯 살이었고 삶은 엉망이었다. 최근에 테리 핀커드Terry Pinkard가 펴낸 전기에서는 헤겔의 실존적 궁핍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돈도 없었고, 돈이 되는 그럴싸한 직업도 없었으며, 아이가 하나 딸려 있었는데 그 아이를 낳은 여성은 최근에 그녀를 버린 어떤 자[헤겔의 집주인!]의 아내였으니, 헤겔은 이제 완전히, 철저히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37 이런 사람이 자신의 첫번째 주요 저작에서 아이티를 명시적으로 언급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언급은 당시 독일 당국도, 또한 얼마 전 발생한 투생 루베르튀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그리고 마침 그때 헤겔의 도시를 침공한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철학으로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파악하는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내걸었던 야심찬 철학자는 스스로 나서 체포당하지는 않을 터였다.38
예나에 들어온 프랑스 병사들은 헤겔이 묵던 집을 들쑤셔놓았다. “악당들이 내 문서를 복권처럼 어질러놓았음이 틀림없네.”39) 예나를 떠나기 위해 헤겔은 친구들이 마련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일자리를 받아들여 밤베르크로 이주했고, 거기서 친親나폴레옹 성향의 정치 일간지 『밤베르크 신문Bamberger Zeitung』을 편집했다.40 이처럼 헤겔의 침묵에는 정치적 파장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폴레옹의 승리가 몰고 온 영향, 이주와 개인적 기반 상실에 따르는 위험까지 다양하고 아주 일상적인 이유들이 존재한다. 분실된 증거─1803년작 『인륜성의 체계』 마지막 부분에서 삭제된 “역사에 불과한 것mere history”,41 1803~1804년의 예나 체계에 빠져 있는 마지막 단편 제22번의 마지막 페이지(들)42─의 운명, 그리고 헤겔 사후 그의 저작물을 공식 선별한 편집인들의 동기43가 당연히 궁금하다. 그러나 헤겔과 아이티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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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수전 벅모스 Susan Buck-Morss
미국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수전 벅모스는 독일 비판철학과 프랑크푸르트 학파 전문가이다. 1977년에 아도르노와 벤야민을 중심으로 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연구서 『부정 변증법의 기원: 테오도어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The Origin of Negative Dialectics: Theodor W. Adorno, Walter Benjamin and the Frankfurt Institute』를 펴냈고, 1989년에는 벤야민이 남긴 미완의 대작 『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또는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정교하게 읽고 재구성한 역작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The Dialectics of Seeing: Walter Benjamin and the Arcades Project』를 발표했다. 또한 2002년에는 20세기 ‘대중 유토피아’의 등장과 쇠퇴를 그린 『꿈의 세계와 파국: 대중 유토피아의 소멸Dreamworld and Catastrophe: The Passing of Mass Utopia in East and West』을 펴냈고, 2003년에는 9.11 테러를 화두로 공격적인 세계화 정책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비판이론을 담은 『지난 테러를 생각한다: 이슬람교와 좌파 비판이론Thinking Past Terror: Islamism and Critical Theory on the Left』을 출간했다. 현재 코넬 대학 정부학과 교수로 있으며, 정치철학과 사회이론, 세계화와 이슬람주의, 시각문화 등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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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성호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뉴욕주립대학-버팔로SUNY-Buffalo에서 로렌스D. H. Lawrence 연구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소설, 문화이론, 비평을 강의하고 있으며 비평동인지 『크리티카』의 편집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국 리얼리즘 및 모더니즘 소설, 낭만주의, 마르크스주의, 세계시민주의, 한국문학 등에 관한 글을 썼고 슬라보예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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