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어密語
색色과 충蟲은 계절의 물후物候°이다. 계절은 색을 가지고 가장 먼저 몸을 바꾸고 충들은 가장 먼저 새로운 계절풍의 기후 위에 내려앉는다. 계절이 바뀌면 인간도 인체 내의 색을 함께 바꾼다. 내장과 비장의 색을 바꾸고 눈동자는 충들의 눈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계절을 만난다. 고통은 예외 없이 경이롭게 배치된다. 저녁이 되면 처마가 연해지고 사람의 눈이 연해지고 세상의 풍문이 모두 산간으로 돌아가지만 고통은 안정이 되지 않는다. 몸은 선대로부터 우리의 피까지 장구하게 이어진 산문을 풀기 위해, 무너져가는 고대의 담벼락에 써진 언어들을 해독하려 애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파촉문자巴蜀文字°처럼 해독되지 않는다. 고고학은 고통의 흔적을 다른 흔적으로 지우고 살아남은 문명이다. 로마의 시인은 고문을 살피며 ‘통일되지 못한 문자들’에게서 새로운 전망을 찾아보려 하고 에트루리아어° 같은 고어의 깊은 체내로 들어가 자신의 필체의 흔적을 그곳에서 찾아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시인의 문명은 육체를 문자로 부화시키려는 욕망이나 허심이 아니다. 시인의 문명은 고통이 존재하는 육체 속에서만 지어진다. 언어가 홀로 설 수 있는 육체. 시는 그러한 육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명이다.
시인은 육체 속에 존재하는 흉가凶家를 자신의 시라고 여기기도 하고, 시인은 사랑을 마치고 육체가 추고 있는 춤은 모두 흉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간절기間節期가 되면 눈은 육체의 소문을 내보내기 시작한다고. 우리 자신의 육체로부터 우리 자신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육체로, 어쩌면 우리의 육체가 흉가가 되지 않기 위해 하나의 춤이 필요한지 모른다고, 우리의 육체가 춤이 되기 위해선 하나의 흉가를 반드시 체험해야 한다고. 그리하여 해가 짧고 때가 춥고 만물이 스스로를 거두고 감추는 춘분春分의 저녁으로 가서 우리들의 진술은 번복된다고. 하나의 진술 속에 한기寒氣가 생기고 뜨거운 수기手記를 낳고 그곳에 자신의 태궁胎宮을 마련한다. 작은 눈금들이 생기는 명칭은 시라고 불러야 하며 육체보다 이름이 먼저 순환되는 주야晝夜를 우리들의 밀어密語라고 부른다.
자정을 통과하는 낮은 지상의 어떤 시계에서도 측량이 되지 않는다. 늦은 밤에 시작된 시작詩作은 새벽에 날아가는 인체人體가 된다. 그의 언어들은 하늘의 물을 기록하는 시간이 된다. 종천終天이란 오행이 하늘을 다 운행하는 운기학설의 순환지를 말한다. 땅속에서 발견된 수천 년 된 어느 토용土俑은 항아리를 안고 있었다. 항아리 속의 물은 다 말랐다. 하지만 항아리는 아직 금이 가지 않았다. 고대엔 그 항아리 속으로 물 한 방울이 자연적으로 떨어지는 데 1주야가 걸렸지만 이제는 천 개의 물방울 같은 밀어密語가 필요하다. 항아리를 들고 나타난 그 토용은 바람에 눈을 떴지만 온량溫?을 식별할 수 없다. 육체가 모두 흙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부족에게는 그 흙에 피를 돌게 하는 몰골법沒骨法°이 생길 것이다. 시인은 흙을 굽는 마음으로 그 언어를 주관해야 한다. 언어의 육기°를 토용의 몸과 항아리에게 흘려줄 것이다.
젖처럼.
식蝕°, 『몽계필담』°
『몽계필담』에는 철이 되지 않았는데 기후가 먼저 온 것을 ‘태과’라고 하며 철이 이미 되었는데 기후가 아직 이르지 않는 것을 ‘불급’이라 전한다. 태과와 불급의 사이엔 간절기가 머문다.
간절기가 되면 인체 속엔 새로운 생물의 성장이 시작된다. 새로운 부호들이 몸속에서 떠오른다. 한 계절이 한 계절을 밀어낼 때 몸속의 소음은 나른하고 따스한 누란°이 되기도 한다. 오후의 햇볕에 어제의 강우량이 사라지듯, 비밀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어느 날 문득, 그림자 속을 채우고 있는 강우량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간절기는 통증처럼 밀려와 몸에 쌓인다. 몸속의 한랭전선은 아직 잊지 못한 누군가에게로 끊임없이 월남중이다. 궐음사천厥陰司天을 만나기도 하고 태양사천太陽司天을 만나기도 한다. 인체는 몸속의 이 절기節氣에 해당하는 풍향을 바꿀 수는 있어도 쉽게 그 풍향의 견해를 역사에 제출할 수 없다. ‘자신의 탄생을 자각한 이야기’가, 그 이야기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자문하며 이야기의 ‘겹’을 이룬다. 세계는 스스로의 음악 속에서 수만 개의 식蝕을 거치며 음악의 세계사°가 되어간다.
인체는 스스로가 무덤이 될 순 없을까? 신들의 육체는 저 자신이 인간의 무덤이 되기 위해서 수많은 몽상을 해왔다. 동화 속에서 신비하게 무덤을 통과하는 무수한 생물들처럼, 고통을 통과하는 이 동화가 우리의 삶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내 육체에서 일어나는 이질異質들을, 일식日蝕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당신을 보고 나서 생겨버린, 내 눈의 일식이란 여러 번 ‘해가 숨어서’ 육체 속에 싸라기눈이 날리고 우수수 들오리들이 날아간다.
삶은 역병疫病이다. 우리는 고통을 해석할 수 있는가? 해석학解釋學이라는 단어는 ‘신들의 사신使神’에 해당하는 헤르메스°에서 유래한다. 신에게 어떤 전갈도 받은 적이 없지만 헤르메스는 자신의 영토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신들의 소식을 전한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고통의 한계에 대해 언급하며 ‘해석’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라고 한다. 헤르메스가 그랬듯이, 고통은 부지런히 자신의 영토를 돌아다니며 소식을 전한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고통은 바실리스크 도마뱀처럼 노른자 없는 달걀을 낳기도 하고, 발 없는 도마뱀처럼 독한 침을 흘리기도 한다. 이 몸뚱이를 다 지나가면 눈이 멀 것 같다고, 고통에 가득 찬 사람들은 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꺼내 연못의 아기천사들이 품고 있는 동그릇 속으로—도랑에 비친 무지개를 동전으로 건져 올리듯—던지기도 한다. 베누스 패°나 괴테의 『서동시집』에 등장하는 부적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상고시대나 선사시대처럼 사냥한 짐승의 발톱이나 깃털을 아끼는 책 속에 넣어두어야 할까? 적을 살해하고 그 신체의 일부를 몸에 장식해야 고통이 사라질 것인가? 침상 아래 아파신상을 모셔두어야 하는 것일까? 부활절의 횃불이 문지기를 통해 언제 내 방 앞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금식기가 끝난 날의 일기처럼, 말오줌나무 덤불을 헤치고 나와 어제 산 칼을 잃어버릴까봐 조급해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황망하다. 중국의 문자를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고대의 창힐은 네 개의 눈으로 세상을 관측했다고 하는데 눈이 어찌나 밝은지 그의 눈은 귀신의 세계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병명倂明이라 불리던 그의 눈은 고통을 볼 수 있었는가? 그러나 고통은 산술이 아니므로, 노발리스°의 언어를 빌리지 않아도 우리는 세상이 눈을 뜨고 있든 눈을 감고 있듯 항상 같은 형상이라는 것을 안다. 단지 항해의 설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생선의 눈알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지켜온 시의 역사는 지느러미가 안내한 눈동자들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인가? 역사와 자연의 그 혼묘한 수의 세계로 편입시킬 수 없는 것이 여기 내 육체에 진동하므로, 내 뺨은 수치심으로 붉어지고 있다고, 뺨은 일식日蝕을 한다. 새로운 산술법처럼. 언어가 뺨을 한 대 맞은 것처럼 화끈거린다. 그토록 연유되었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수치심이 되어간다고. 악몽惡夢이란 그저 통증을 길들이는 육체의 다양한 사변들에 불과하다고. 그것을 우리는 천둥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없다고.
고통의 생명력은 역설적이게도 산술법을 포기하고 그것의 조언을 부정할 때, 더이상 숟가락을 훔쳐간 도둑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듯이 생겨난다. 고통의 산모産母들은 우리들의 언어 속 여기저기 부락을 만들어 모여 살고 있다. 고통은 조금씩 실족되어가는 언어 안에 자리한다. 시인은 그 언어의 별자리를 자신의 육체 속에서 더듬어 찾는다. 시인의 말은 금지된 곳을 떠돈다. 그 언어를 내 문지방 앞에 놓고 본다. 그곳에 엎드려 차가운 뺨을 대어본다.
쓸개 빠진 놈처럼.
(序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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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경주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 작품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를 올리며 극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몇 년간 다양한 이름으로 여러 지면을 통해 야설작가와 유령작가로 글쓰기를 해왔다.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시차의 눈을 달랜다』, 산문집 『패스포트』, 공동 희곡집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분홍주의보』 등이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 · 전소연
『가만히 거닐다』 저자. <시차적응> <빛의 유목> <Passport Project No.1 앨리스 증후군> <흰고래의 등> 등의 사진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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