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아이린 겐지어
아사프 크푸리
파와즈 트라불시
처음 이 책을 기획한 의도는 노엄 촘스키와 부인 캐롤이 2006년 5월에 8일 동안 레바논을 방문한 기록을 책으로 엮어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촘스키의 강의록과 인터뷰 자료를 모으고, 캐롤이 찍은 사진과 함께 여행 내내 동행했던 아이린 겐지어, 아사프 크푸리, 파와즈 트라불시의 글도 넣기로 했다.
2006년 5월과 6월 사이에 책을 구성하게 될 내용들을 수집하고 쓰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내분이 일고는 있었지만 이삼 주 동안 레바논은 비교적 조용하게 중동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들끓거나 억눌려 있는 아랍 분쟁 지역의 일부라는 현실을 레바논이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라크에서의 살육은 극심했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으며, 서방과 이란 사이의 교착 상태가 이 지역 전체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2006년 6월 28일에 가자 지구Gaza Strip 공격을 재개했고, 7월 12일에는 레바논에 침공을 감행해 34일간이나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2006년 7월 말과 8월, 레바논판 ‘충격과 공포’ 작전은 날이면 날마다 신문 1면을 장식했지만, 이 기사들의 상당수는 이 전쟁을 그 근방에서 일고 있는 분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인 양 다루었다. 서방 언론들은 중동 분쟁과, 그 분쟁이 레바논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자고 서로 약속이나 한 듯했다. 헤즈볼라(레바논의 이슬람 시아파 교전단체이자 정당조직)만이 ‘무분별한 도발’의 주범으로 비난받았고, 이스라엘의 잔혹한 공격은 적절하지 못한 경우조차도 계속해서 정당하다고 평가되었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관계, 이라크와의 관계, 그리고 아랍 지역과 나머지 세계의 관계를 다루는 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작전은 결국 이스라엘군이 미국 정부의 지원과 허가를 받아 무력으로 레바논을 압제하에 몰아넣으려 한 것이었지만, 이런 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거의 없었다.
레바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이 책에 대한 우리의 기획 의도도 바뀌었다. 노엄 촘스키의 강의, 인터뷰, 그리고 에세이는 중동 분쟁에 대한 국제적 관점과 그 근본적인 원인을 조명했다.
마지막 장에 실은 파와즈 트라불시의 글은 서방세계가 중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적하여, 변화의 목적은 국제적인 억압 관계를 흐리려는 데 있음을 밝혔다. 이 글은 중동지역 전반에 걸쳐 일고 있는 분쟁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며, 레바논은 그 분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아사프 크푸리는 노엄 촘스키와 캐롤 촘스키의 레바논 여정을 기록으로 옮겼고, 헤즈볼라 최고지도자 사이드 하산 나스랄라와의 만남도 글로 옮겼다. 아이린 겐지어는 1982년 대학살의 현장이었던 난민 캠프와 키암 수용소를 방문한 소감과 함께 키암 지역을 비롯해 레바논의 역사를 돌아보았다. 캐롤 촘스키의 사진은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폐허가 되기 바로 몇 달 전의 레바논 모습을 담고 있어 전쟁일기 편에 실린 폐허 현장 사진들과 대조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2006년 여름에 자행된 폭격과 파괴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넣었다. 하나디 살만, 라샤 살티, 모나 엘 파라, 라일라 엘 하다드가 쓴 전쟁일기다. 하나디 살만과 라샤 살티는 2006년 7월에서 8월까지, 34일 내내 베이루트(레바논의 수도)에 남아 있었다. 모나 엘 파라와 라일라 엘 하다드는 2006년 여름에 레바논과 가자에서 동시에 일어난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들려주었다.
제니퍼 뢰벤슈타인의 글은 전쟁이 끝나 남부 레바논 사람들이 폐허로 변한 집을 재건하는 동안에도 팔레스타인인人의 목을 죄던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미르나 므네임네흐는 LBC 텔레비전 마르셀 가넴의 노엄 촘스키 인터뷰를 글로 옮겼고, 뉴욕 구겐하임 재단의 베른하르트 게이에르가 그 원고를 번역했다. 제니퍼 뢰벤슈타인은 인터뷰 원고의 편집을 도왔고, 하나디 살만의 일기를 발췌해 편집했다. 아사프 크푸리는 모나 엘 파라와 라일라 엘 하다드의 일기를 발췌해 편집했으며 파와즈 트라불시의 아랍어 원문을 번역했다. 브렛 클락과 먼슬리 리뷰 출판사 편집부는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총괄적으로 감독했다.
우리 세 사람은 캐롤 촘스키의 사진(2006년 5월)과 하나디 살만의 사진(2006년 7∼8월) 중에 책에 실을 사진을 선정하고, 중동사 연표를 만들었다.
2007년 2월
1
촘스키 부부의 베이루트 방문
아사프 크푸리
2006년 5월 8일, 노엄 촘스키와 부인 캐롤이 8일간 머무를 예정으로 베이루트에 도착했다. 촘스키의 여러 레바논 친구들은 그의 레바논 방문을 오랫동안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노엄 촘스키는 거의 40년이나 팔레스타인인과 중동지역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가져왔고, 그들에 관한 글을 쓰고 그들을 옹호하는 일을 공개적으로 해왔으며, 그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한”은 지금과 같은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베이루트 시민들은 노엄 촘스키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촘스키의 베이루트 방문은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American University in Beirut: AUB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촘스키는 5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연이어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강의했고, 8일간의 일정 중 나머지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곳저곳을 방문하는 데 바쳤다. 작가이자 정치운동가이며 촘스키의 오랜 친구인 파와즈 트라불시가 나와 함께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 강의를 제외한 모든 일정을 계획했다.
촘스키가 베이루트를 방문한 시기는 레바논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라크에서 다시 폭력이 일던 때였다. 근래 서방 언론이 다뤘던 레바논 관련 기사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2005년 2월 14일, 레바논 전前 총리 라피크 하리리가 암살된 일일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2005년 봄에 베이루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2005년 4월 말에 시리아군이 레바논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결과에 이르렀다. 1976년 레바논 내전을 빌미로 시리아군이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지 29년 만의 일이었다. 하리리 총리 암살 사건은 아직도 유엔UN 조사위원회에서 조사 중이다. 하리리는 에밀 라후드 레바논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를 2007년 11월까지 3년 더 연장하려는 움직임에 강하게 반대했다. 시리아 정부는 라후드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하기 위해 레바논 국회의원을 협박하고 미리 심어놓은 친시리아계 의원을 동원하여 헌법까지 개정했다. 그에 대한 반발로 하리리 총리는 2004년 10월 총리직에서 물러나 점점 더 투쟁적이 되어가던 반反시리아 진영에 합류했다. 당시 반시리아 진영의 수장은 왈리드 줌블라트였다.
2005년 봄에 일어난 대규모 시위는 고압적인 시리아의 간섭에 오랫동안 참아온 레바논인들이 분노를 터뜨린 것이었다. 게다가 거의 400억 달러에 달하는 국가 부채를 짊어지고 장기적인 경기 침체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레바논 경제상황도 한몫 거들었다. 이 부채 규모는 레바논 국내총생산GDP의 180퍼센트를 웃도는 수치로, 세계 최고 수준의 부채율이었다. 레바논 국민들이 시위를 통해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은 변화였다. 총인구가 400만 명도 안 되는 나라에서 시민 50만 명(2005년 3월 8일)과 군인 75만 명(2005년 3월 14일)이 시위에 나섰다는 것은 국민이 변화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가를 보여준 일이었다.
그러나 정치 엘리트들은 분열되었다. 레바논의 외부 위협 요인이 무엇이냐를 놓고 서로 시각을 달리했기 때문이었다. 헤즈볼라가 앞장선 3월 8일 시위의 주도자들은 주요 위협 요인이 이스라엘의 침략과 더불어 중동의 정치적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고삐 풀린 미국의 중동재편정책이라고 했다. 하지만 3월 14일 시위를 주도했던 왈리드 줌블라트와 라피크 하리리 동맹 세력은 이스라엘의 위협을 비롯한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우선 레바논 내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계속되는 시리아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리아는 친시리아계 정치인들과 첩보기관을 동원하고, 29년 동안이나 레바논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레바논을 마음대로 주물러왔다.
2005년 봄 이후로 정치적 동맹 판세도 급속히 변모했다. 하지만 동맹관계가 다소 변했어도, 두 연대는 여전히 주요 양대 진영으로 정치권 내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전 군사령관 미셸 아운이 이끄는 자유애국운동이 3·14 연대에서 3·8 연대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공산당과 몇몇 다른 동맹 집단으로 이루어진 초당적 좌파는 압도적이었던 양 진영의 시위로 그늘에 가려지는 듯도 했지만, 이후 더욱 강경한 자세를 취하면서 헤즈볼라와 3·8 연대에 가세했다. 하지만 이 연대로 완전히 흡수되지는 않았고, 그중 일부는 아예 이탈하여 3·14 연대로 들어갔다.
노엄 촘스키와 부인 캐롤이 레바논을 방문한 때는 이런 정치적 상황이 전개된 직후였다. 파와즈 트라불시는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 강연과 더불어 여러 일정을 준비했다. 촘스키 부부는 베이루트 외곽에 있는 사브라 샤틸라 난민 캠프를 방문하고, 레바논과 이스라엘 접경지역을 둘러보았으며, 레바논 남부 키암 마을에 있는 전前 이스라엘 감옥이자 고문장을 찾았다. 헤즈볼라 지도자(3·8 연대), 국회의원 왈리드 줌블라트와 변호사 치블리 말라트(3·14 연대), 그리고 공산당 지도자와 만나 긴 대화도 나누었다. 레바논 아메리칸 대학교에서는 파와즈 트라불시의 사회로 ‘1948년 팔레스타인’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무력 충돌의 역사와 시오니즘Zionism’이라는 주제로 학생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레바논 국내외 신문과 방송 인터뷰에도 10여 차례 응했다.
촘스키는 운집한 청중들과 함께한 두 번의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 강연 후에, 베이루트에 있는 대형 극장 마스라알마디나에서의 세 번째 강연도 성황리에 마쳤다. 진보 성향의 문화협회 ‘알 리카(‘조우’라는 의미)’가 주관한 이 강연은 가산 이사 회장의 소개로 시작되었고, 파와즈 트라불시가 사회를 맡았다. 촘스키는 ‘임박한 위기, 위협과 기회Imminent Crises: Threats and Opportunities’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국이 중동문제에 너무 깊이 개입하여 현재 이런 위기상황들이 초래되었다고 했다.
이런 계획된 일정 못지않게 뜻깊었던 일은 촘스키를 따뜻하게 환영해주었던 수많은 레바논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거리나 호텔 로비에서, 강연장으로 가는 도중이나 강연이 끝난 후에 마주친 사람들과의 만남도 소중했고, 강연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애쓰는 사람들을 보다 못해 자리를 더 늘린 회합도 뜻깊었다. 그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사브라 샤틸라에서는 간이건물에서 일하는 팔레스타인인 약사를 만났고, 팔레스타인 노동운동 지도자와 전 레바논 각료도 만났다. 어떤 남자는 막 구입한 듯 깨끗한 《촘스키, 실패한 국가, 미국을 말하다Failed States》를 들고 나와 사인을 받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많은 만남이 이어졌다.
인상 깊었던 순간들
5월 8일에서 16일까지, 촘스키 부부의 여정에는 파와즈 트라불시, 아이린 겐지어와 더불어 나도 동행했다. 기자들과 다큐멘터리 취재 팀도 각자 사정대로 우리를 따랐다. 아래는 우리의 방문 기록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을 모은 것이다.
5월 11일, 사브라 샤틸라 난민 캠프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 나즈데Najdeh가 운영하는 직업훈련센터에는 대졸 자원봉사자가 둘 있었다. 영국인 젊은이와 팔레스타인인 젊은이로, 10대 청소년들에게 컴퓨터와 인터넷 이용법을 가르쳤다. 영국인 젊은이는 이곳에서 1년간의 자원봉사를 마쳐서 곧 영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팔레스타인인 봉사자는 레바논에 있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지만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촘스키와 그 팔레스타인인 젊은이 사이에 대화가 오고갔다. 촘스키는 그의 대학 학비를 누가 냈느냐고 물었다.
젊은이는 대답했다.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제사업기구UN Relief and Works Agency for Palestine Refugees in the Near East: UNRWA에서 냈습니다.”
“난민 캠프 밖에서 직업을 찾아보았나요?”
“찾아보았지만, 구하지 못했습니다.”
“왜 일자리를 주지 않는 거죠?”
“레바논인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죠.”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레바논을 떠나고 싶습니다.”
엷은 미소를 띠며 젊은이가 덧붙였다.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 석학으로,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수로 재직.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이 통합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함께 살기 원했으며, 재외국 팔레스타인의회 의원으로도 활동)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난민 캠프에는 커다란 철문이 달리고 벽으로 둘러싸인 600평 남짓한 빈 땅이 있었다. 1982년, 이스라엘군이 팔랑헤 민병대(친이스라엘 성향의 기독교도 민병대)를 침투시켜 캠프를 포위한 후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을 때 희생된 이들이 묻힌 장소였다. 잔디로 덮인 평평한 땅에는 군데군데 두세 개씩 봉긋이 올라온 작은 흙무더기가 보였다. 우리는 대문에 위아래로 길게 난 쇠창살 사이로 묘지를 들여다보았다. 바깥벽에는 색 바랜 커다란 포스터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희생된 이들의 사진이었다. 이가 절반밖에 남지 않은 팔레스타인 노인 문지기가 문 근처 나무 그늘에 앉아 꽃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묘지로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은 미국 사람이면 문을 열어줄 수 없다고 대꾸했다. 내가 나서서 이 사람들은 미국인이 맞지만 좋은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몇 발자국 떨어져 서 있던 촘스키를 가리키며, 특히 이 사람은 미국에서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가장 열심히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일러주었다. 노인은 내 말이 맞는지 틀린지 확인이라도 하듯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일어서서 문을 열어주었다.
5월 11일, 베이루트 헤즈볼라 본부
우리는 삼엄하게 요새화된 헤즈볼라 본부에서 헤즈볼라 지도자 사이드 하산 나스랄라를 만났다. 헤즈볼라는 대중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고 레바논 국회와 평의회에 의석을 갖고 있다. 1990년대 레바논 남부를 점령하고 있던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활동으로 얻은 성과였다. 그렇지만 콘돌리자 라이스, 데이비드 웰치, 엘리엇 아브람스, 제프리 펠트만 등 미국 정부 관료들은 다른 레바논 정치가와 고위인사들을 방문하면서도 나스랄라만은 제외했고, 여전히 헤즈볼라를 테러 단체로 취급했다. 촘스키와 헤즈볼라 지도자의 만남은 저명한 미국인이자 가장 유명한 반체제 인사인 촘스키가 레바논과 중동지역에서 헤즈볼라의 역할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더불어 나스랄라와 함께 나눈 이야기도 그만큼이나 의미가 컸다. 나스랄라는 미국 정부의 엠바고(보도금지 정책)를 깨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한 말을 촘스키가 그대로 인용하는 데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촘스키에게 악의적인 선전만 일삼는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헤즈볼라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대답으로, 촘스키는 국민 여론이 정부 정책과는 다른 경우가 많으므로 정부가 내놓는 정책과 미국 내 여론에서 나올 수 있는 정책을 달리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워싱턴 정부 관료들은 소수의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며,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두 당 대표가 결국 서로 같은 시각을 보인다는 점도 지적하면서 기업의 이해관계를 따라가는 정치가들보다 미국의 대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헤즈볼라에 요구하는 무장해제를 비롯하여 나스랄라는 촘스키와 다양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스랄라는 레바논 남부를 지키기 위해서는 헤즈볼라의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이 문제는 단지 헤즈볼라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레바논 국민 전체를 위한 일이라고 했다. 그 만남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과 텔레비전 취재진을 향해 촘스키는 “나는 헤즈볼라가 잠재적인 공격에 대한 억제책으로 무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주장을 할 만한 근거는 무척 많습니다” 하고 말했다. 우익보수 집단들이 두고두고 이런저런 말을 만들어낼 소지가 충분한 말이었다.
5월 12일, 베이루트의 마스라알마디나 극장
촘스키의 강연이 끝난 후 가슴이 뻐근하도록 감격적인 일이 있었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촘스키에게 다가와서는 “저는 킨다입니다” 하고 말한 순간이었다. 킨다는 촘스키의 책 《해적과 제왕Pirates and Emperors》을 들고 있었다. 킨다가 일곱 살 때 썼던 편지가 실려 있는 책이었다. 킨다는 1986년 4월, 미국의 폭격으로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있던 자기 집이 파괴된 후에 그 편지를 썼다. 그 사건은 민간인 60명에서 1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분명한 테러 공격이었다. 저널리스트 도널드 네프는 당시 상황을 꼬집어 “동네 불량배(레이건 행정부)가 꼬마(카다피 정권)에게 싸움을 건 꼴”이었다고 절묘하게 표현했다. 킨다는 촘스키에게 자기 책에 사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킨다의 어머니도 그 자리에 있었다. 촘스키는 캐롤을 불러 두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킨다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 아저씨께
대통령 아저씨는 왜 하나뿐인 우리 언니 라파와 내 친구 라샤와 내 아기인형 딸기를 죽였나요? 라샤는 아홉 살밖에 안 됐어요. 우리 아빠가 팔레스타인 사람이라서 아저씨가 우리를 전부 죽이려 한다는 게 정말이에요? 그리고 카다피 대통령 아저씨가 우리를 아빠 집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해서 카다피 아저씨도 죽이려 한다는 게 맞나요?
제 이름은 킨다예요.
리비아 폭격과 1986년 4월에 벌어진 일의 여파를 보도했던 ABC 통신원 찰스 글래스는 폭격으로 무너진 킨다의 집 잔해 더미 속에서 킨다의 편지를 발견했다. 글래스는 미국 교육을 받은 킨다의 가족이 레바논으로 이사한 후에도 계속해서 방문하고 연락했다.
5월 13일, 레바논 남부 키암
화창한 봄 날씨에 우리는 키암으로 가기 위해 레바논과 이스라엘 국경을 따라 난 좁은 길을 달렸다. 길에는 드문드문 가시철망 울타리가 쳐 있었다. 이스라엘 국경 마을 메툴라를 지날 때는 거주민들이 집 안에서 일하는 모습이 아주 가까이서 보였다. 집들이 언덕 위로 옹기종기 모여 있고, 감시탑 꼭대기에는 이스라엘 국기가 꽂혀 있었다. 갈릴리에서 가장 고지대인 그곳은 깊은 계곡이 이어지고, 개울이 굽이쳐 흘렀으며, 5월의 짙푸른 들판이 장관이었다. 키암에서 멀리 셰바팜스와 헤르몬 산 쪽으로 향하는 골짜기 너머의 풍경도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남부 레바논 헤즈볼라 지도자 셰이크 나빌 카우크가 키암에 있는 전前 이스라엘 감옥이자 고문장 터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기자들과 텔레비전 취재진도 와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카우크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촘스키에게 다가가 포옹하더니 양쪽 볼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수용소 마당 한가운데에는 히브리 글자가 새겨진 녹슬고 고장 난 군용 트럭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2000년 5월, 이스라엘 군대가 떠나면서 버리고 간 것이다.
모든 장면이 사진기자와 카메라맨의 렌즈에 포착되었지만,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목을 빼고 지켜보는 존재가 또 있었다. 눈부시게 환한 하늘 위로 보일 듯 말 듯 날고 있는 무인정찰기 한 대. 우리는 이스라엘군이 국경지역을 주기적으로 정찰하면서 레바논 민병대와 팔레스타인 민병대의 움직임을 감시한다는 말을 이미 들었다. (다음 날, 베이루트의 모든 주요 일간지 1면에는 키암 수용소 감방을 살펴보는 촘스키와 카우크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이삼일 후, 흥분한 블로거들이 이렇게 주장하고 나섰다. “노엄 촘스키는 지하드를 찬양한다.” “촘스키를 미국으로 돌아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전형적인 보수우익 집단의 ‘촘스키 죽이기’ 식 악담이 줄을 이었다.)
5월 13일, 레바논 남부 나바티예
촘스키는 남부 레바논 문화위원회의 ‘공개 토론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분명 우호진영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화위원회는 세속주의(secularism, 인간 활동이나 정치적인 의사결정이 종교적 믿음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의) 좌파 활동가들이 모인 단체다. 오랫동안 문화위원회의 사무국장을 지낸 하비브 사덱은 레바논에서 진보적인 대의를 위해 활동해온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촘스키를 소개하기 위해 나선 하비브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 저명한 현대 언어학자이자, 현 시대 최고의 진보 사상가이며, 좌파 국제주의자의 상징인 촘스키를 우리 모두 환영합시다.”
청중들의 열띤 박수 소리로 하비브는 한참이나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노엄 촘스키는 억압받는 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자 나서는 사람이 진정한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아까보다 더 열광적인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또한 진정한 지식인이란 압제국의 거대한 힘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박수 소리로 또다시 연설이 중단되었다.
하비브 사덱의 말과 뒤이어 나온 연설자들의 말소리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귀를 쫑긋 세워야만 했다. 계속해서 의자 움직이는 소리나 박수 소리 같은 소음이 계속된 데다가 음향 시스템도 불안정했다. 100여 명의 나바티예 주민이, 나이 든 사람은 양복을 차려입고 젊은이들은 색색깔 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와서 촘스키의 말을 듣고 직접 질문도 하고 싶어 작은 회관으로 모여들었다. 회관 바깥 정원에도 미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열린 창과 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없었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멀찌감치 물러서서 찍찍거리는 스피커를 통해 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노엄 촘스키와의 토론회는 다소 소란스럽고 열광적인 모임으로 변했고, 한 시간 정도 만에 짧게 끝났다. 모임이 끝날 무렵 멋지게 차려 입은 70대 노인 하비브 사덱이 내게 다가와 시간이 너무 짧아 촘스키와 더 오래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
5월 14일, 베이루트
레바논 공산당에서도 촘스키와 대화를 나누고자 호텔로 대표자를 보내왔다. 오랫동안 노동계 지도자로 활동한 공산당 지도위원회 위원 모리스 나라가 찾아왔다. 영어와 아랍어 통역을 위해 함께 온 젊은 공산당원은 정부 각료 밑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진기자들이 나타나 면담 장면을 찍어댔다. 그때마다 통역을 맡은 당원은 카메라에 찍히지 않으려고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공산당 대표자와 촘스키가 만나는 자리에 자신이 있는 사진이 신문에 실리는 날이면 자기의 정치적 정체성이 드러나 상관의 심기를 건드릴 게 뻔했다. 젊은 당원이 뒤로 물러날 때마다 파와즈와 내가 임시변통으로 대신 통역을 맡았다.
며칠 전인 5월 9일, 우리는 촘스키에게 5월 10일 일정이 변경되었음을 알렸다. 공산당, 노동단체, 그리고 몇몇 동맹 당들이 정부의 법률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 법안에는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을 안기는 새로운 노동계약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위는 5월 10일로 예정되었고, 도시 중심부의 교통이 마비될 것은 분명했다. 우리는 베이루트 시내는 피하기로 했다. 촘스키는 우리도 시위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었지만, 안전 문제 때문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촘스키는 5월 10일에 있었던 시위와 그 여파에 대해 빠짐없이 알고 싶어 했다. 이와 관련하여 촘스키는 모리스 나라 의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공산당과 노동단체 이외에 또 어떤 당이 시위에 참여했는가? 시위의 규모는? 이 시위가 정부에게 법률 초안을 수정하도록 압박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정부가 초안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후속대책은 무엇인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촘스키를 초대하거나 만나고 싶어 했지만 아쉽더라도 그 요청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시아파 최고 성직자 아야톨라 무함마드 후세인 파들랄라의 초대도 거절했다. 이제 서방에서는 거의 잊힌 사건이지만, 1985년에 미국 CIA가 파들랄라를 암살하려고 서베이루트의 인구밀집지역에서 자동차 폭탄 테러를 자행했다. 당시 파들랄라는 위험을 면했지만 그 테러로 무고한 시민 80명이 죽고 부상자도 200명 이상 발생했다. 그때 촘스키가 미국 정부를 비난한 것을 파들랄라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초대도 거절했다. 시리아 정부 고위관료가 촘스키에게 다마스쿠스(시리아의 수도)를 방문해달라고 했지만 그런 초대에 응하기에는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다. 바로 그날, 시리아 정부는 작가이자 민주주의 운동가인 미셸 킬로를 체포했다.
5월 15일, 무크타라
슈프 산악지대를 따라 한참을 운전해 간 후에 우리는 해발 900미터가 넘는 무크타라에 도착했다. 도중에 데이르엘카마르 마을과 베이트에딘 마을 두 곳을 잠시 들렀다. 오스만 제국이나 그 이전 시대에 세워진 옛 주택과 석상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무크타라는 줌블라트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다. 이 고장 저택의 전형적인 형태로 지어져 천장이 높고 아치가 있으며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이 달린 줌블라트 저택은 초록이 우거진 계곡을 내려다보며 장엄하게 우뚝 서 있었다.
왈리드 줌블라트가 대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유능한 변호사이며 지금은 레바논 대통령 후보로 나선 치블리 말라트가 함께 있었다. 줌블라트와 말라트는 모두 친정부파 ‘3·14 연대’에 속하며, 줌블라트는 레바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우리는 호화로운 오찬을 함께했고 식사 후에는 긴 대화의 시간이 이어졌다. 줌블라트는 시리아 정권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술회했다. 1977년 자신의 아버지 카말 줌블라트가 암살된 것을 비롯해 1970년대 이후 시리아 정부 명령으로 자행된 수많은 암살 사건을 열거했다. 우리는 레바논과 이 지역의 미래에 대해 두 사람으로부터 건설적인 제안을 듣고 싶었으나, 여러 가지 곤란한 점이 있어 그 논의의 초점은 자꾸만 흐려졌다. 말라트는 어떻게 하면 레바논 정당들이 현재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지 촘스키의 조언을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촘스키는 레바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자신의 의견은 중요치 않다고 현명하게 대답했으며, 레바논 내부 문제에 외부인을 개입시키는 것은 파괴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촘스키 부부가 8일간 레바논을 방문한 것은 여러 중요한 연계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베이루트에서 촘스키를 맞은 사람들에게는 희망과 이성이 담긴 미국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그것은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이라크와 중동에서 더 많은 폭력과 파괴를 불러오는 워싱턴 관료들의 끊임없는 선언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촘스키 자신에게도, 몇십 년 동안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지역과 사람들을 직접 둘러보고 경험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이 방문이 뜻깊었다. 특히 중동지역의 긴장이 고조된 시기여서 더욱 특별했던 방문이었다.
(서문,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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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노엄 촘스키Avram Noam Chomsky
미국 MIT대학 언어?철학과 명예교수이자 인스티튜트 프로페서(Institute Professor: 독립된 학문기관으로 인정되는 교수)이며, 인지과학 혁명의 주역으로 활약한 언어학자이자 철학자다. 어릴 때부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져온 그는 언어학자로만 머물지 않고 1960년대부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피력하기 시작했다. 세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미국의 제국주의와 다국적 거대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지배권력의 선전에 맞서 사람들에게 지적인 자기방어법을 제공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제시한다. 100여 권에 이르는 책을 썼다.
캐롤 촘스키Carol Chomsky
노엄 촘스키의 부인. 촘스키의 강연 여행 로드 매니저로도 활동한다. 2006년 5월의 레바논 여행에도 동행했고, 그때 캐롤이 찍은 사진 일부가 이 책에 실렸다.
모나 엘 파라Mona el-Farra
가자 지구 자발리아 난민 캠프에 있는 알 아우다 병원의 의사이자 공동 설립자다. 현재 모나는 건강 상담사, 지역사회 조직 전문가, 인권운동가로 일하고 있다.
라일라 엘 하다드Laila el-Haddad
저널리스트라는 직업 때문에 여행을 자주 한다. 여행을 하지 않을 때는 남편 야신이 일하는 미국과 부모가 살고 있는 가자를 오가며 지낸다.
아이린 겐지어Irene L. Gendzier
미국의 중동 정책에 관한 글을 쓴다. 현재 보스턴 대학의 정치학과 역사학 교수다. 대표적인 저서는 다음과 같다. 《지뢰밭에서의 기록 : 1945~1958년, 미국의 레바논과 중동 외교정책》(국내 미출간). 포크R. Falk, 리프턴R. J. Lifton과 공동 편집한 《전쟁이라는 범죄 : 이라크》(국내 미출간).
아사프 크푸리Assaf Kfoury
수학자, 컴퓨터공학자, 그리고 정치운동가다. 베이루트와 카이로에서 성장한 아랍계 미국인으로 중동을 자주 방문한다. 현재 보스턴 대학의 컴퓨터공학 교수다.
제니퍼 뢰벤슈타인Jennifer Loewenstein
위스콘신매디슨 대학의 중동 연구 프로그램 부국장. 가자 지구, 예루살렘, 베이루트에서 거주하며 일을 했고, 중동과 관련하여 광범위한 주제로 글을 쓰고 강의한다.
하나디 살만Hanady Salman
레바논 일간지 《아스 사피르》 편집장. 1968년에 베이루트에서 태어났고, 내전으로 레바논을 떠났던 1981년부터 1986년까지는 프랑스 파리에서 살았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97년 조지타운 대학에서 아랍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샤 살티Rasha Salti
독립 큐레이터이자 프리랜서 작가다. 판화 작가이기도 하며, 2000년에 뉴욕 뉴스쿨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인문학 석사를 받았다. 라샤의 에세이, 기고문, 편년사는 아랍어와 영어로 이집트의 《알 아람 위클리》, 레바논의 《자와야》,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계간 리포트》, 알제리의 《나크드》, 미국의 《중동연구 및 정보 프로젝트》와 《비둔》 같은 잡지에 실리고 있다.
파와즈 트라불시Fawwaz Traboulsi
역사학자, 저널리스트, 그리고 오랫동안 정치운동가로도 활동했다. 현재 베이루트에 있는 레바논 아메리칸 대학에서 정치학과 사회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어로 나온 그의 가장 최근 저서는 《레바논의 역사》(국내 미출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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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강주헌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 브장송 대학에서 수학했다. 불어 전공자로서 영어권 학자인 촘스키를 연구한 독특한 이력을 지녔으며, 지적 자유와 거침없는 삶을 추구하는 열린 정신의 소유자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는 한편 ‘펍헙 번역 그룹’을 설립해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기획에는 국경도 없다》가 있고, 옮긴 책으로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1, 2》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문명의 붕괴》 《슬럼독 밀리어네어》 《월든》 등 100여 권이 있다.
유자화
전문 번역가. 현재 초등학교 보건교사로도 일하면서 건강과 의학을 비롯하여 심리학, 철학, 과학,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옮긴 책으로 《단순한 삶》 《욕망의 아내》 《나쁜 생각》 《감춰진 생물들의 치명적 사생활》 《어머니를 돌보며》 《건강, 음식, 질병에 관한 오해와 진실》 《비행기의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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