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말
사람들은 무료하거나, 저자거리 생활에 힘들어 할 때 여행을 떠난다. 산을 찾기도 하고, 넓은 바다를 보며 자아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시간여행을 한다는 것이며, 역사가 내게 던지는 교훈과 우리의 문화재가 주는 진실에 사색하고 사고하며 나를 찾아 가는 살짝 틀어진 답사여행을 할 뿐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걷고 웃고 춤춘다.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며, 미술사가도 아니다. 전문가들의 노력이 담긴 수많은 책을 찾아 읽고 그 속의 지식들을 내 것으로 소화시키려 애를 쓴다. 지식의 생산자로서가 아니라 유통과정을 거쳐 지식과 감성을 적당히 버무린 소매점의 전달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답사지에 서면 고증을 일삼지 않으려 애쓰는 여행객일 뿐이다. 그리고 문화재 내면의 고통과 절박한 사연에 귀를 기울인다. 하층민들의 피와 땀을 기억해내며 드러나는 아름다움에 감탄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적 사치에 길들여지길 거부하며, 어쩌면 진실은 불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좁은 가슴을 연다.
‘미래의 기억’이 바로 꿈이며 소망이라면, 그 꿈의 종착지는 결국 답사의 궁극적 목표와 같다. 그 목표는 착하고 정의롭게 살기 위함이며, 그러면서도 가슴은 따뜻하게, 짧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만큼은 아닌 이 세상을 알뜰하게 살아가다 행복하고, 즐겁게 죽어가고 싶은 욕심이다. 결국 답사 여행이란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보약이다.
10년 넘게 우리의 옛것을 찾아다닌 결과물을 조심스럽게 내놓게 되었다. 두렵기도 하고 가슴 설레기도 한다. 미천한 글을 선뜻 선택해 주신 서해문집 관계자 분들께 참 감사드리며, 이 책이 나올 수 있게 용기를 주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송찬섭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올린다.
사찰
용문사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등용의 꿈
경남 남해에는 보물 같은 문화가 오랜 역사와 함께 맥을 이어 오고 있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용문사를 꼽는다. 내 고향에 자리한 신라 대찰의 이름과 같기 때문이지만 학창시절 미술학도의 꿈을 안고 스케치를 하기 위해 찾던 단골 장소였기 때문에 ‘용문사’라는 이름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남해를 찾을 때마다 아련한 추억을 안고 오르는 용문사일 수밖에 없다.
용문사龍門寺, 이무기가 등용의 꿈을 안고 드는 곳이다. 나 같은 장돌뱅이가 불심佛心의 세상에 들기 위해 마음을 비운 척하며 달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지형으로 보자면 기세 좋은 산세 아래 용문사가 안착하고 있는 곳이 바로 호구산虎丘山이다. 용문사는 포근히 감싸고 있는 호구산 가운데 불심 가득히 똬리를 틀어 호랑이 뱃살 아래 용호상박의 장엄함을 연출하고 있다. 조금 달리 표현하자면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쳐진 산 가운데 수줍은 여인처럼 낭창히 들어앉아 있는 모습이며, 건물 하나하나가 절묘한 산지가람으로 배치되어 있다. 모습은 그렇게 보일지라도 가히 천지天地의 기가 모여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의 기지였으며, 조선 수군들의 주둔지였다니 호국의 기지로서도 그 역할을 다했음을 미루어 짐작한다. 오목하게 들어간 좁은 입구 탓에 천연의 요새가 되어 용과 호랑이의 기세가 그곳을 지탱했던 것은 아닐까? 용문사엔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치열하게 싸운 당시의 유품들이 남아 있다. 또한 용문사는 유난히 민간신앙과 많이 접목되어 전북 고창 선운사와 더불어 지장사찰로 유명하다.
용문사에 이르는 길은 계곡을 따라 호젓하게 오를 수 있어 참 좋다. 그렇게 오르면 오른편 언덕에 부도밭이 나온다. 사실 나는 부도밭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해남 미황사 부도밭과 이곳 용문사 부도밭을 좋아한다. 이름 모를 고승들의 무덤을 왜 좋아할까? 여전히 의문이지만 굳이 따져 보자면 적막한 가운데서 선善을 생각하는 여유가 생겨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용문사 부도밭에 서면 자연과 역사가 주는 겸허함과 세월의 무거운 화두를 가볍게 덜어 내며 사색에 잠길 수 있어 참 좋다. 사실 꽉 찬 절집의 공간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는 완전한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 후불탱화가 그렇고, 내부 공간 표현이 그렇고, 단청이 그렇듯 장엄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 않은 곳이 바로 부도밭이다. 동양화처럼 비어 있어 자신의 삶을 직시할 수 있는 여백의 아름다움이 있다.
멀리 부도밭이 보일 때쯤 마음은 그리움에 설레고 내쉬는 공기는 달게 느껴진다. 늦은 오전 아무도 없는 공간을 홀로 독차지할 수 있다는 것은 나만의 유려한 자유를 꿈꿀 수 있다는 뜻이며, 어떠한 고독도 내 안에서 녹여 내고, 또 드러내 놓아도 거리낌 없는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고독한 대상을 만나면 나 또한 고독해지듯이 이끼 머금은 부도를 손끝 감촉으로 느끼다 보면, 한동안 적적했던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사색에 잠긴다. 어떤 고승의 무덤일까? 어떤 삶을 살다가 훌쩍 떠나 버린 것일까?
부도밭에 다다를 때면 수목 우거진 주위 공간에 내딛는 걸음걸음 설렘이 가득하다. 재잘거림도 없는 천년 고찰을 찾는 마음 때문일까? 애써 설렘을 털어 내자 유난히 작은 부도가 눈에 띈다. 연꽃 봉우리가 채 피기도 전에 연잎이 아래로 내려와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데 파릇한 이끼가 군데군데 쌓여 있다. 갈라진 속 상처를 감추려는 자연과 부도의 노력이다. 어린 시절 보드라운 생살에 난 상처를 엄마에게 들킬까 두려워 감추기 급급하던 시절의 내 마음과 닮아 있다. 그러나 사실은 화강석이 이끼라는 균에 의해 병들어 가는 중이다.
팔각 원당형 부도 아랫돌엔 각각의 표정을 한 얼굴들이 있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나를 보며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먹이던 누님의 얼굴도 있다. 내가 유난히 용문사 부도밭을 찾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애써 털어 내고 부처님 세상으로 드는 일주문을 지나 다리를 건넌다. 사악한 마음을 내려놓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서라 하지만 사천왕상 앞에 서니 주눅이 드는 것은 여전히 마음의 때를 벗겨내지 못한 탓이다. 잡신을 밝고 있는 다른 사천왕상과는 달리 양반을 밟고 서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양반의 수탈과 핍박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는지, 아니면 탐관오리의 폭정에 굴하지 않는 민초들 삶의 분노를 대신 표현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마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양반 계층의 기존 사회적 통념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표정이 재밌고, 조성될 당시 장인의 해학이 더 재밌으니 그 마음을 빌어 합장을 한다.
사천왕상을 지나자 대웅전이 적당한 간격과 공간을 두고 두 팔을 활짝 벌려 반긴다. 하늘에서 막 착지한 듯 경쾌한 모습, 정면 세 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귀마루 끝선이 하늘을 향해 살짝 들려 가장 이상적인 경지에서 딱 멈춰 있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따라 움직이면 파란 하늘로 향하게 되며, 더불어 내 마음은 청량한 기운으로 가득 찬다. 대웅전 앞마당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넓이를 두고 동·서로 탐진당과 적묵당이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훨씬 편하게 해 준다. 또 대웅전 공포에 조각된 용머리는 어느 절집보다 커서 힘이 실려 있으며, 옆에서 바라보면 섬세한 조각과 단청이 조화롭게 트림하고 있다. 공포에 새겨진 용두는 이런 장돌뱅이를 고통만이 가득 차 있는 차안此岸의 세상에서 행복이 충만한 서방정토, 즉 피안彼岸의 세상으로 이끌어 주는 지혜를 담아내고 있다. 고개 숙여 불심에 기댈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니 용문사 대웅전이 바로 반야용선이다. 반야는 지혜를 일컫는 말이지만 우리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쓸어 주고 보듬어 준다. 지금이야 사라진 풍속이지만 우리가 죽어서 타고 가는 상여가 바로 반야용선이라고 생각하면 생의 겸허함을 또 한 번 느끼게 된다.
대웅전 속 부처님 품으로 가까이 든다. 하늘에는 꽃비가 내리고 극락조가 춤을 추고, 작은 세상의 소품들로 큰 세상을 표현하며 부처님의 세상은 이러이러하다며 조용히 전하고 있다. 가만히 앉아 사색에 잠기고 참회하고 반성하는 공간에서 경의와 부러움에 찬 눈으로 올려다보니 시선이 마음을 급하게 잡아끈다. 지긋이 굽어보는 부처님의 눈매에 기대어 작은 소망 하나 내려놓고 슬며시 일어서 합장하고 뒷걸음질한다.
여기 대웅전 불단에 참 보물이 하나 들어 있지만 나는 볼 수 없다. 바로 조선 인조 때 시인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특히 상례에 정통했던 촌은 유희경● 선생의 《촌은집》 책판이다.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흘러왔는지 알 수 없으나 최근에 남해군에서 해설을 덧붙여 번역본을 내놓았다. 남해의 아우님을 통해 한 권 귀하게 구할 수 있어 탐독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촌은 유희경 하면 빠트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 바로 부안의 기생 이매창이다. 매창梅窓은 호며, 계유년 태생이므로 계생癸生이라고 불렸다. 매창은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40대 중반의 유희경을 만나 사랑을 나눴다. 유희경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당시唐詩에 능통했던 박순朴淳으로부터 시詩를 배웠다. 매창과 유희경은 당대에 서로가 잘 알려진 인물이라 전부터 끌림이 있었다. 이후 해후를 하고 시詩로 화답을 나누었으니 마음이 통하고 몸도 통하는 것이 이치다. 2년이라는 꿈 같은 세월이 흐르고 회자정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유희경이 서울로 간 사이 임진왜란이 터진 것이다. 유희경은 비록 천민 출신이지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고 있던 터라 매창을 만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시를 지어 주고받는다. 이때 유희경이 매창을 향해 지은 시가 《촌은집》에 기록되어 있다.
얼마 전 부안 지역 답사에서 매창의 시비詩碑가 있는 상소산 서림공원을 찾아 그를 그리워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굳이 꼽자면 매창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의 삼대 여류시인이다. 아마 매창이 기생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로는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떤 사연인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의 생은 태생적 한계에서부터 가냘프고 한스럽고 애절하고 서글프다. 그의 시는 힘없이 가느다란 울림이자, 자신의 처지에 지친 한계를 담고 있으며, 가슴에 맺힌 그리움의 대명사처럼 절망에 지친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말은 못 하였어도 너무나 그리워
하룻밤 어둠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소첩의 마음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이 헐거워진 금가락지 좀 보시구려.
유희경이 서울로 올라간 후 왜란이 발발해 의병 활동을 하고 있을 때 매창이 지은 시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리워 밤을 하얗게 보내다 생긴 흰 머리칼, 메마른 손가락에 사랑의 정표 가락지가 헐렁해진 만큼이나 힘겹게 보냈을 매창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원망과 애정 어린 투정, 이토록 절절한데 뭐하시느라 여적인가, 빨리 돌아와 그리워 지친 마음과 몸을 보듬어 주길 간절히 원하는 여인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다.
봄날이 추워 겨울옷을 꿰매고
사창에는 햇살이 비치는구나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기니
옥루가 바늘과 실을 적시는구나
매창의 시 <자한自恨>이다. 그리워 흐르는 눈물로 바느질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서러움이 가득 담겨 있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전란이 끝난 후에도 유희경은 매창을 찾지 않았다. 1607년 매창을 15년 동안 독수공방시킨 후 다시 부안을 찾은 유희경은 이미 환갑이 되어 버렸다. 매창의 나이 서른다섯, 기생의 신분에도 수절한 매창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지만 독수공방시킨 유희경의 심사는 또 무엇이었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유희경은 얼마를 머물다 매창의 곁을 떠나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3년 후 서른여덟의 나이로 매창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촌은집》에 실린 매창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지은 유희경의 시를 읊으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임정자의 옥진●을 애도한 시에 차운함
맑은 눈동자에 하얀 이빨 푸른 눈썹을 가진 아가씨가
홀연히 뜬구름을 좆아 아득히 사라졌네.
비록 고운 넋은 폐읍으로 돌아갔지만
누가 옥골을 고향에다 묻어 줄까?
타지에서 죽어 새로 조문하는 이도 없고
다만 경대에는 지난날 향기만 남았네.
정미년 연간에 다행히 서로 만났었지만
슬픔의 눈물 견딜 수 없어 옷깃을 흠뻑 적시네.
대웅전 뒤뜰의 녹녹한 습기가 한가함을 더하고 십우도를 감상하는 발걸음이 여유롭다. 양반들이 즐겨 했다는 사군자 그림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어 천왕문 사천왕에 밟혀 있는 양반상과 대비시키며 미소 짓고, 순수한 이기적 동기에서 세속적인 욕망만을 추구해 왔던 저급한 인간으로서 지장보살께 사죄드렸다. 혹여 지옥의 문턱에서 만나면 할 말은 있어야 하니 말이다.
이후 맑은 바람이 가슴을 스치고 나는 심하게 한가해진다. 보배로운 땅의 행복한 하루해가 그렇게 넘어가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면 울던 아이도, 심하게 불던 바람도 잠에 든다는데 바로 오늘을 마감해야 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문득 벗과 함께 하는 한잔 술이 그립다.
(서문, 1장 전문)
---------------------------
필자 소개
박필우
뒤늦게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즐거움을 깨닫고 몸소 답사를 즐기며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유배지에서 유배객을 만나다』가 있다.
-------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