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다시, 도스또예프스끼
도스또예프스끼, 그는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이자 인간의 정신세계를 가장 완벽하게 파헤친 잔인한 천재지만 우리 집 구석의 책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켜켜이 먼지 쌓인 낡은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이 우리 곁에서 멀어진 지는 이미 오래다. 작품이 너무 방대하고 어려워서, 주인공들의 사변이 치명적으로 길고 지루해서, 문장이 극단적으로 상징적이고 복잡해서…… 웬만한 독서광들도 그의 작품을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책장 구석에 무의미한 장식물로 방치되어 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어떻게 하면 구석에 처박혀 있는 그 이름을 환생시킬 수 있을까. 이 작업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독자들을 도스또예프스끼의 생애, 작품, 예술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서이다. 책을 읽으면서 책장 안에 유폐한 낯선 이름을 다시 불러보시라. 도스또예프스끼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은 채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본래적 영혼을 깨우는 일이기도 하다. 귀를 기울이자. 온몸으로 그의 육체와 정신을 느껴보자. 딱딱한 껍데기 안에 갇혀 있는 영혼의 부드러운 속살과 거기서 풍기는 비릿한 살 내음, 따뜻함,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양심의 두근거림, 비정한 세상을 쳐다보는 눈망울의 떨림 그리고 눈물, ‘나’를 통째로 뒤흔드는 고요한 반전과 전복을 경험할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 살았다. 내가 아니라 도스또예프스끼가 서울 뒷골목 술집에서 보드까에 취해 술주정을 했고, 아주대 연구실에서 밤새 책과 씨름을 했다. 혹한의 겨울날 도스또예프스끼가 시베리아 유형을 떠날 때 나도 그 마차 안에 있었다. 그가 모스끄바에서 뿌쉬낀에 관한 연설을 하던 날, 나는 청중 사이에 앉아 손바닥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박수 치며 환호했다. “브라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우라!” 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나는 그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위대한 작가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기도 했다.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 책을 쓰면서 나는 100여 년 전에 기록된 언어에 우리 시대의 숨결을 불어넣고 싶었다. 동시대인들이 묘사한 현장에 직접 가보고, 역사적 기록들을 확인하면서 거기에 현대적인 감각과 의식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이다. 이런 작업이 도스또예프스끼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러시아의 저명한 문예학자 D. 리하초프의 말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작품의 역사적 현장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들은 진실의 감각을 미리 계산해놓고 있다. 만일 독자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속 사건이 일어난 장소들을 알지 못하면 많은 것을 잃고 있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이 많지만 거기서 다루지 않은 자료를 처음 우리말로 소개한 점도 이 책의 새로움이다. 특히 도스또예프스끼의 실생활을 생생하게 기록한 자료들을 많이 다루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문단 생활,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뻬쩨르부르그에서의 생활, 스따라야 루사와 도스또예프스끼 등에 관한 자료들이다.
책을 쓰면서 나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우리 마음속에 부활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을 떠난 지 130년이 된 러시아 작가의 영혼의 편력 속에서 우리가 부둥켜안고 가야 할 ‘최후의 말’은 어떤 것일까. 도스또예프스끼가 우리에게 던진 절박한 질문은 무엇일까. 도스또예프스끼의 말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가. 이런 질문에 골똘히 빠져 있을 때, 뻬쩨르부르그 뒷골목을 거닐다가 우연히 발견한 건물 기둥의 낙서가 떠올랐다. ‘뜨이 랍!’ 러시아어로 ‘너는 노예다!’라는 말이다. 내가 노예라니, 우리 모두가 노예라니! 그럼 대체 누가 주인이란 말인가. 이 낙서는 치기 어린 젊은이가 남긴 공허한 관념일 수도 있고, 도시의 부랑자가 자신의 불만을 표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 말이 지워지지 않는 것일까. 도스또예프스끼의 메시지를 되새기는 지금, 이 말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현듯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인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념의 노예가 되지 않았던가. 그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성욕과 물질의 노예가 되었다. 마르멜라도프는 어떤가. 그는 자신의 무능과 불행을 견디지 못하고 딸을 창녀로 전락시키고 술의 노예가 된 사람이다. 『백치』의 예빤친 장군은 부귀영화를 위해 권력에 목을 매달았다. 그러고 보니 도스또예프스끼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노예들이었다. 자기 삶의 주인이었던 인물들은 기껏해야 『죄와 벌』의 소냐, 『백치』의 미쉬낀 공작,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알료샤 정도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죄와 벌』의 에필로그에서 “아! 이제 모든 것이 변해야 되지 않을까?”라고 독백한다. 이 말은 그가 길고도 험한 노예의 삶을 마감하고 새로운 삶의 주인으로 태어나 내뱉은 첫번째 ‘말’이다. 그리고 이 독백은 그의 마지막 ‘말’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것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최후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모스끄바, 뻬쩨르부르그, 옴스끄, 스따라야 루사……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 나선 여정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물질과 기계문명의 장막에 둘러싸인 나는 온종일 욕망의 과잉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우리는 고골의 표현대로 일상을 사는 ‘죽은 혼들’이 아닐까. 무기력하다. 아나키. 나는 오늘도 나를 향해 조용히 외친다.
‘나는 노예다!’
1장
아빠, 왜 저 사람들은
불쌍한 말을 죽인 거예요!
모스끄바 유년 시절(1821~1837)
1
모스끄바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스또예프스끼라는 이름의 거리가 있다. 지하철 도스또예프스끼 역에서 내려 역 뒤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이곳에 도스또예프스끼 생가가 있다. 현재 도스또예프스끼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19세기 당시, 제법 규모가 큰 병원의 부속 건물이었다. 모스끄바 마린스끼 빈민구제 병원이다. 생가 옆에는 병원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데, 현재 이곳은 모스끄바 의학아카데미 산하 결핵 과학실험연구소 외과병동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왜 병원에 딸린 부속 건물에서 태어난 것일까. 그의 아버지가 이 병원에 근무했던 의사였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 생가는 전차가 다니는 한적한 길에 있다. 건물은 낡고 볼품없다.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작가의 생가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창틀은 낡아 여기저기 부서지고 페인트칠한 벽들도 벗겨져 흉물스러웠다. 유학 시절 와보고 10여 년 만에 다시 찾았건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이곳을 보고 무슨 창고 건물로 착각했을 정도이다. 문화유적을 잘 보존하기로 유명한 러시아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방인인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생가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몇 가지 확인할 것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러시아에 있는 박물관은 월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다. 그런데 도스또예프스끼 생가는 화요일도 개방하지 않았고, 다른 평일에도 방문 시간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나도 몇 번 헛걸음을 했다. 생가 입구에는 다음과 같이 개방 시간을 친절하게 안내하는 현판이 걸려 있다.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매달 마지막 날은 휴관, 수요일, 금요일은 오후 2시에서 7시까지, 목요일, 토요일, 일요일은 오전 11시에서 오후 6시까지 개관.
생가 앞 병원 정원에는 커다란 도스또예프스끼 동상이 있다. 조각가 S. 메르꿀로프의 1918년작이다. 동상은 처음에 모스끄바 중심가에 위치한 쯔베뜨노이 불바르(가로수길)에 서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지금은 이곳으로 옮겨와 있다. 동상은 단순하면서도 상징적인 선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전신을 형상화했다. 모더니즘의 의상을 입은 잔인한 천재의 모습이다. 상체의 일부를 드러낸 채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린 도스또예프스끼는 인간 세계의 비극을 고통스럽게 응시하고 있다.
모스끄바에는 도스또예프스끼 동상이 두 개 있는데, 다른 하나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러시아 국립도서관 앞에 있다. 이 동상은 현대 조각가의 작품이다. 이 밖에도 러시아에는 도스또예프스끼 동상이 여럿 있다. 그가 작품 활동을 했던 뻬쩨르부르그, 감옥살이를 했던 시베리아 도시 옴스끄, 말년에 가족과 자주 머물렀던 스따라야 루사에도 동상이 세워져 있다.
2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는 1821년 봄부터 모스끄바 마린스끼 병원에서 근무했다. 병원은 황후 마리야 표도로브나의 후원으로 1806년에 개원했다. 그녀는 황제 빠벨 1세의 아내로 남편이 죽고 홀로된 처지였다. 빠벨 1세는 뻬쩨르부르그에 있는 미하일로프스끼 성에서 살해되었는데, 이곳은 후일 도스또예프스끼가 다니던 공병학교 건물로 사용되었다. 병원은 사생아와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모스끄바 보육원에 속한 시설이었다. 미하일 안드레예비치가 이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그해 10월 30일,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가 태어났다. 표도르는 둘째로 태어났는데, 위로 한 살 터울인 형 미하일이 있고, 아래로 여러 동생들이 있다.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은 부유하지 않았다. 부모는 조상이 귀족 가문이었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의사의 사회적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중산층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의사 집안의 경제적 수준 또한 여유 있는 편이 아니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버지는 모스끄바 남쪽에 위치한 뚤라 시 근처에 작은 영지를 구입했지만,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도 신통치 않았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부모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어머니는 종교적 심성이 남달랐다. 매주 일요일과 축일이면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은 의무적으로 병원에 딸린 교회에 갔으며, 저녁기도에 참석했다.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온순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엄한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자란 도스또예프스끼 형제에게 어머니는 따뜻한 피난처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평생 어머니를 천사처럼 기억했던 것도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
이에 비해 아버지는 성격이 매우 급하고 거칠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자식들은 아버지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고 그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동생 안드레이(1825~1897)의 회상에 따르면 “아버지는 매우 선량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엄격하고 참을성이 없었으며 게다가 대단히 성을 잘 냈다”. 하지만 그는 자식들에게 체벌을 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형 미하일과 표도르에게 직접 라틴어를 가르쳤다. 자식에 대한 교육열도 각별하여 당시 모스끄바에 있는 공립중학교를 마다하고 보다 교육 여건이 좋은 사립학교에 두 형제를 입학시켰다. 표도르가 L. 체르마끄 기숙학교에 입학한 것은 1834년이다. 그는 약 3년간 이 학교를 다녔다. 기숙학교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집에서 남동쪽으로 4.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노바야 바스만나야 거리에 있었다. 아쉽게도 현재 체르마끄 기숙학교는 보존되어 있지 않다. 이 학교는 경영난으로 1840년대 말에 문을 닫았다.
체르마끄 기숙학교는 훌륭한 교육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학교 선생들도 수준급이었다. 특히 교장이자 소유자였던 체르마끄는 학생들을 끔찍이 보살폈다. 기숙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표도르는 역사와 문학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었다. 시인이자 역사가인 N. 까람진의 『러시아 제국사』는 그가 반복해서 읽었던 책들 중 하나이다. 동생 안드레이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표도르는 러시아 천재 시인 A. 뿌쉬낀에 푹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형과 함께 부모님 앞에서 뿌쉬낀의 시를 자주 암송했다. 동생은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뿌쉬낀의 시 한 편을 회상하고 있다. 뿌쉬낀이 1822년에 쓴 「현명한 올레그에 대한 노래」라는 시다. 이 작품은 고대 러시아의 지도자 올레그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길이가 긴 시지만 그중 마지막 부분을 짧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올레그는 자신의 준마駿馬가 죽은 장소에서 죽음을 예감하며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고독한 친구여, 고이 잠들라
너의 옛 주인은 홀로 남았다
그러니 다가올 내 장례식 날에
도끼에 찍혀 억새풀을 붉게 물들이지도
더운 피로 내 시체를 적시지도 못하겠구나
아, 바로 여기에 내 죽음이 숨어 있었구나!
아, 바로 이 뼈가 내 목숨을 위협하는구나!
표도르는 러시아 작가 중에서 뿌쉬낀과 N. 고골을 존경했지만 이 시기에 고골을 열심히 읽었다는 기록은 없다. 모스끄바 시절 표도르는 낭만적 기질이 강했다. 그는 아직 러시아 현실에 눈을 뜨지 못한 상태였다. 표도르가 러시아 역사와 현실을 이해하는 데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참혹한 러시아의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렸던 것일까. 고골에 대한 기억은 뻬쩨르부르그 시절에야 등장한다.
표도르는 사교적이지 못했다. 아버지가 엄격한 탓도 있었지만 자신의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 탓이기도 했다. 잘 지내다가도 주위의 농담에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자기 확신이 매우 강했으며 말투가 비교적 과격한 편이었다. 이런 성격은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심하고 내성적이던 어린 소년의 마음에는 인간의 비극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천재적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
3
도스또예프스끼 생가의 육중한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겁게 가라앉은 실내 분위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칙칙한 조명과 실내장식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어두웠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출생을 알리는 기록이었다. 19세기 당시의 것이 그대로 전시실에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로 말하면 호적부의 원본인 셈이다. 이 기록은 태어난 아이의 세례를 집전한 마린스끼 병원 부속 베드로 바울 교회의 호적부다. 이 호적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빈민병원 부속 베드로 바울 교회, 1821년 10월 30일, 빈민병원 관사에서 아기 탄생, 군의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들 표도르임. 신부 바실리 이린이 기도를 올리고 부제副祭게라심 이바노프가 입회했다. 11월 4일 세례를 베풀다.
10월 30일은 러시아 구력이다. 러시아는 17세기 후반 뾰뜨르 1세가 율리우스력 사용을 결정한 이후 1918년 1월까지 구력을 사용했다. 이것이 신력, 즉 그레고리력으로 바뀐 것은 1918년 2월부터였다. 1918년 2월 1일은 신력에 따라 2월 14일로 고시되었다. 도스또예프스끼가 태어난 10월 30일도 신력에 따르면 11월 11일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유년 시절은 동생인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가 남긴 회상기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많은 도스또예프스끼 연구자들이 작가의 유년 시절을 언급하면서 이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표도르도 말년에 자신의 유년 시절을 돌아보는 단편적인 글을 남겼지만 동생의 회상기처럼 상세하지는 않다. 안드레이는 표도르보다 네 살 아래로 유년 시절을 형과 함께 보냈다. 그는 후일 뻬뜨라셰프스끼 서클 회원들이 체포될 때 경찰의 실수로 연행되어 뻬뜨로빠블로프스끼 요새 감옥에 13일 동안 감금되기도 했다. 안드레이는 회상기를 1875년에 쓰기 시작해서 1896년에 마쳤다. 이 회상기가 최초로 출간된 것은 1930년이다.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는 회상기에서 자신의 가족이 살았던 집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기록을 현재 보존되어 있는 도스또예프스끼 생가와 비교하면서 살펴보니 훨씬 더 생생하게 그 모습이 그려진다.
나와 동생들이 태어난 시기에 아버지가 살고 있던 집은 (……) 모스끄바 마린스끼 병원의 오른쪽에 있는 독립가옥으로 3층짜리 석조 건물 중 1층이었다. 요즘 관사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방에 비해 옛날의 관사 방은 훨씬 검소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미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당시 네댓 명의 자식이 있었던 아버지는 영관領官급이면서도 현관방과 부엌을 빼고 방이 두 개밖에 없는 집에 살고 있었다. 추위를 막을 수 없는 현관 입구에는 여느 집처럼 (깨끗한 정원으로 난) 창이 하나뿐인 현관방이 있었다. 그 안쪽에는 천장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널빤지 칸막이가 쳐진 어둠침침한 아이들 방이 있었다. 다시 그 안쪽에는 거실이 있었는데, 두 개의 창문이 길 쪽으로 나 있고 세 개의 창문은 깨끗한 정원을 향해 나 있는 꽤 넓은 방이었다. 그다음은 길 쪽으로 난 창이 달린 응접실인데, 부모님의 밝은 침실은 널빤지 칸막이로 그 응접실과 구분되어 있었다. 이것이 집의 전부이다! 뒷날 가족이 늘었을 때, 그때는 이미 30년대였는데, 이 집에 뒤쪽 정원으로 난 창문이 세 개 달린 방을 하나 더 들였다. 그래서 전에 없던 어두컴컴한 출구가 또하나 생겼다. 부엌은 꽤 큰 편으로 추운 현관과 통해 있었다. 부엌에는 커다란 러시아 벽난로가 있고 그 옆으로 천장에서 가까운 곳에 잠자리가 있었다. 아궁이 같은 것도 없었다! 그때는 화로 없이도 맛있고 근사한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 추운 현관에는 2층으로 이어진 계단 밑에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살던 집의 구석구석이다.
집의 모양은 극히 검소했다. 아이들 방이 딸린 현관방은 짙은 진주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거실은 밝은 카나리아빛이고, 응접실은 거기에 딸린 침실과 함께 짙은 코발트색이었다. 그 당시 벽지는 사용하지 않았다. (……) 가구도 매우 간단했다.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카드놀이를 하지 않았지만 거실에는 (창문 사이에) 카드놀이용 테이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 그리고 거실 가운데 식탁과 밝은색으로 니스칠한 자작나무 의자가 대여섯 개 있었다. 여기에 녹색 염소가죽으로 만든 부드러운 쿠션을 놓았다. (……) 응접실에는 소파, 몇 개의 안락의자, 어머니가 쓰시던 화장대, 부인용 옷장, 책장이 있었다. 침실에는 부모님의 침대, 세면대, 어머니의 옷을 넣어둔 두 개의 커다란 트렁크가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창을 가리는 두꺼운 커튼이나 문가의 휘장은 당연히 없었다. 창에 는 아무 장식도 없는 흰색 옥양목 커튼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크지 않은 집에서 식구들이 각자의 방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스또예프스끼 생가를 둘러보니 안드레이가 묘사해놓은 그대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 낡은 생가를 이 기록에 나와 있는 대로 복원한 것이 분명하다. 거실은 생가에서 가장 큰 방인데, 길 쪽으로 두 개의 창문이, 병원 정원 쪽으로 세 개의 창문이 나 있다. 창문에는 어여쁜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햇빛은 비교적 잘 들어오는 편이어서 실내는 화사했다. 군데군데 테이블과 긴 소파가 놓여 있고, 소파 앞에는 카드놀이를 했다는 흔적을 남겨놓기도 했다. 병원 정원 쪽으로 나 있는 창문 곁으로 다가갔다. 지금은 쇠창살이 쳐 있는데, 그 너머로 아름드리 떡갈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으로 병원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병원 현관은 2층으로, 정면에는 계단이 있고 계단 양쪽으로 경사로가 나 있다. 이 정원 모습이 옛날 그대로라면 도스또예프스끼는 형과 함께 이곳에서 산책을 하며 사색에 잠겼을 것이다.
이 방을 지나면 응접실로 사용한 진한 코발트색 방이 나온다. 코발트색이 너무 진해 약간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렇게 어두운 색으로 응접실을 칠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거실과 비교하면 작은 방인 이곳에는 작은 탁자 주위에 긴 소파와 의자들이 있었다. 바로 옆은 칸막이로 막은 침실이다. 이 탁자에서 도스또예프스끼 형제가 책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탁자 옆으로 책을 꽂아놓은 책장이 있다. 100여 년이 지난 책들인가. 모두가 낡고 두꺼운 커버를 씌운 것들이다. 일일이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가 즐겨 읽던 까람진, 뿌쉬낀 등일 것이다.
이것이 전부였다. 정말 단출하고 소박한 살림이 아닌가. 러시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별의별 문학박물관, 작가의 생가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단순한 곳은 처음이다. 이곳에 직접 와보니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의 살림이 넉넉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침실의 성화聖畵를 제외하고는 하다못해 그 흔한 장식용 그림 한 점 없었다. 침대도 볼품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니 짙은 코발트색 응접실이 가정 형편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귀족들이라면 절대 그런 누추한 색으로 응접실을 치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19세기 유명한 러시아 작가들은 대부분 귀족 출신이다. 뿌쉬낀, 레르몬또프, 뚜르게네프, 똘스또이 등이 그렇다. 큰 귀족 집안 출신이 아니더라도 많은 작가들은 성공해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도스또예프스끼는 가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해야만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부유한 생활을 누려보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가난이다. 그의 첫 작품 제목이 ‘가난한 사람들’ 아니던가. 가난이라는 테마는 이후에도 줄곧 작품의 중심이 되었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없다. 생가에 직접 와서 느낀 것이지만 이는 그의 출생, 성장과 깊은 관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어려서부터 물질적 부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작가였다. 웅장한 저택과 잘 다듬어진 정원, 화려한 응접실과 편안한 침실, 실크 드레스를 입고 보석으로 몸을 치장한 부인들, 주인을 따르는 여러 명의 시종들, 황금색으로 칠한 사륜마차, 여름밤을 유혹하는 낭만적인 야회, 입맛을 다시게 하는 진기한 요리들, 향수, 고급 포도주와 보드까. 이런 디테일을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똘스또이와 자주 비교된다. 똘스또이가 러시아 최고의 귀족 집안 출신인 반면 그는 평범한 잡계급, 지금으로 말하면 쁘띠부르주아 계급 출신이다. 똘스또이 소설을 읽어보면 귀족 생활에 대한 묘사가 자주 나온다. 뿐만 아니라 귀족 생활을 그린 그의 섬세한 필치는 매우 자연스럽고 전형적이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렇지 않다. 도스또예프스끼가 귀족 생활을 묘사하는 장면도 흔치 않지만, 그것도 자세히 읽어보면 부자연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에 나오는 귀족들은 몰락했거나 갑자기 출세한 인물이 대부분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장편소설『백치』의 예빤친 장군이다. 그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인물이다. 소설 앞부분에 주인공 미쉬낀 공작이 예빤친 장군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도스또예프스끼는 장군이 사는 거대한 저택을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묘사할 뿐이다.
예빤친 장군은 리쩨이나야 거리에서 스빠스 쁘레오브라제니야 사원 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자기 소유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의 6분의 5는 남에게 세를 놓고 있었다. 이렇게 엄청나게 큰 집 말고도 예빤친 장군은 사도바야 거리에 큰 집을 또 한 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역시 많은 수입을 거두었다.
생가 안에는 두 개의 전시홀이 별도로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와 직접 관련이 있는 곳은 아니다. 그를 기념하는 유물들을 전시하거나 작은 규모의 행사를 치르기 위한 장소이다. 작은 홀 전면에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사진이 하나 걸려 있다. M. 빠노프(1836~1894)가 1880년 6월 9일 자신의 작업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도스또예프스끼는 뿌쉬낀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모스끄바에 체류하고 있었다. 빠노프는 모스끄바에서 활동한 유명한 사진가였다. 특히 인물 사진을 잘 찍었는데,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인 I. 끄람스꼬이는 1881년 『예술잡지』3월호에 「도스또예프스끼의 초상화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빠노프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도스또예프스끼 사진 중에서 이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든다. 사진 속의 도스또예프스끼가 이상하게 내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초상화나 인물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눈이다. 화가나 사진작가가 제일 표현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인물의 눈에 담긴 심리 상태이다. 사람이나 기계 앞에 선 모델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어색함으로 어쩔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빠노프가 포착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시선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하고 자연스럽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는 것처럼.
이 사진은 도스또예프스끼가 죽기 반년 전에 찍은 것이다. 마지막 대작『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채 완성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는 바로 전날 수많은 청중 앞에서 뿌쉬낀에 대해 연설했다. 작가의 말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열광적인 환호를 받자 그도 극도로 흥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진기 앞에 섰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제의 흥분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사진기 앞에 앉아 있다. 위대한 작가이자, 간질 환자, 순교자, 죽음에 직면한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여기 내 앞에 도스또예프스끼가 있다. 그의 눈이 살아 움직인다. 이쪽에서 보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저쪽에서 보면 냉정한 시선이 서슬 퍼렇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눈은 맑고 깊다. 이 세상의 고통, 치욕, 불행, 절망, 파멸을 모두 목격한 눈이다.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안내를 하던 박물관 관리인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내 눈물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는가. 세상 어떤 인간이 그 앞에서 떳떳할 수 있단 말인가.
도스또예프스끼 박물관에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할 것이 또하나 있다. 그의 친필 서명과 평소 사용하던 펜촉이다. 친필 서명은 복사본으로 1881년 도스또예프스끼의 장례식 행렬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기념으로 나누어준 것이다. 친필 서명 위에 뾰족한 펜촉이 달린 나무펜대가 놓여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필적은 매우 독특하다. 아주 명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사롭지 않은 힘이 느껴진다. 서명을 마무리하는 장식체가 현란하다. 펜촉은 공중에서 한 바퀴, 다시 내려오면서 급하게 꺾인다. 병적으로 예민했던 작가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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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안드레이는 회상기에서 가족의 일상사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마치 하루 일과를 시간에 따라 적어놓은 것 같은 이 기록은 당시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우리 집에서는 하루하루가 정해진 질서에 따라 똑같이 지나갔다. 아침에는 일찌감치 6시에 일어났다. 아버지는 7시에 벌써 병원에 출근했다. 집에서는 ‘병원’을 ‘병실’이라고 불렀다. 이 시간에 방을 청소하고 겨울이면 벽난로를 피웠다. 9시가 되면 아버지는 병원에서 돌아와 곧 시내에 있는 단골 환자들한테 왕진을 갔다. 우리는 이것을 ‘개업의사 일’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집을 비운 동안 우리 아이들은 공부를 했다. 그리고 후일 두 형은 기숙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늘 12시경에 귀가했는데 우리는 오후 1시에 점심식사를 했다. (……) 오후 4시에 차를 마셨고, 그것이 끝나면 아버지는 다시 한번 병원으로 회진을 하러 갔다. 저녁에는 돼지기름을 쓰는 두 개의 초가 켜진 응접실에서 지냈다. 내 기억에는 당시 스테아린으로 만든 초가 없었다. 양초는 오직 손님이 왔을 때나 가족 경축일에만 켰다. 우리 집에는 램프도 없었다. (……) 정확히 밤 8시가 되면 으레 저녁밥이 마련된다. 식사가 끝나면 우리 아이들은 성상 앞에 서서 기도를 드린 다음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잠을 자러 갔다.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은 모스끄바에 거주하는 여느 중산층 가족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생활했다. 형제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면 모스끄바 근교에 위치한 아버지 소유의 영지에서 여름 한철을 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미하일과 표도르 형제는 자연을 벗하며 한가로운 전원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표도르는 이곳, 다로보예 영지의 아름다운 브리꼬보 숲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후일 작가가 되어 소설『악령』속에서 어릴 적 경험과 기억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소년 시절 표도르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1837년 2월 27일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이미 1836년 가을부터 병석에 누워 있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버지는 백방으로 아내를 구해보려 했지만 의사인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의 해체를 가져왔다. 아버지는 다 큰 두 아들을 뻬쩨르부르그 공병학교에 입학시키고 다른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시골 영지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이해는 미하일과 표도르가 가장 존경했던 시인 뿌쉬낀이 죽은 해이기도 하다. 뿌쉬낀은 같은 해 1월 29일, 결투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뻬쩨르부르그에서 사망했다. 뿌쉬낀이 죽었다는 소식을 도스또예프스끼 형제가 접한 것은 어머니의 장례가 끝난 후였다. 시인이 죽은 지 한 달이나 지난 시점이다. 동생의 회상에 따르면 미하일과 표도르는 뿌쉬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친 사람처럼 흥분했다고 한다. 그들은 시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M. 레르몬또프의 시를 어디선가 입수해서 낭송하기도 했다. 동생은 이 장면을 생생하게 진술했는데, 그가 기억하는 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시인은 가고 운명은 다했다!
우리나라의 파르나스는 텅 비었다.
뿌쉬낀 죽다. 뿌쉬낀 돌아가다.
영원히 우리를 버렸다.
북쪽 나라여, 북쪽 나라여, 너의 천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네 기적의 가수는 지금 어디에?
우리의 기쁨의 주인은 지금 어디에?
우리의 뿌쉬낀은 지금 어디에? 그는 없다!
아 그렇다. 왕성한 마음을 지닌
시인은 지상의 삶에 등을 돌렸다!
시인은 구름 위로 올라갔다
전에 살던 세계로 가버렸다!
형 미하일과 표도르는 1837년 4월 아버지를 따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뻬쩨르부르그로 떠났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때 모스끄바를 떠나 평생을 모스끄바 밖에서 살았다. 그가 다시 이 도시를 찾은 것은 일 때문이었고,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모스끄바를 잊지 않고 그리워했다. 슬라브주의자들은 모스끄바를 정신적 고향으로 여겼다. 도스또예프스끼도 슬라브주의자로서 모스끄바를 러시아 정신의 부활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와 반대로 그가 반평생을 살았던 뻬쩨르부르그는 서구주의자의 본거지였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세운 인공 도시, 뻬쩨르부르그에서 살면서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도시를 기괴하게 표현했다. 그에게 서구의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문명은 러시아 정신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지나지 않았다. 작가의 말년 대작들이 대부분 모스끄바에서 발행된 잡지에 발표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5
아버지와 두 아들은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도중 뜨베리 현의 한 역참에 잠시 들르게 되었다. 거기서 표도르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건장한 체격의 전령 한 사람이 커다란 주먹으로 마부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마부는 주먹을 맞으면서 반사적으로 말에게 채찍질을 했다. 이런 광경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표도르는 “이 혐오스러운 광경은 일생 동안 내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전령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 민중 속에 존재하는 저열하고 잔인한 성격을 나도 모르게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이 장면은 나중에 『죄와 벌』에서 문학적으로 재현되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세 차례 꿈을 꾸는데, 그 첫번째 꿈의 내용이 그것이다. 꿈속에서 미꼴까는 죽어가는 말을 잔혹하게 채찍질한다. 그 장면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라스꼴리니꼬프는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던 어린 시절을 보았다. 일곱 살이었던 그는 어느 축제일 저녁에 아버지와 함께 마을을 산책하고 있었다. 흐리고 답답한 날이었고, 장소는 완전히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대로였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마을은 꿈에서 본 것보다 훨씬 평평했다. 작은 마을은 손바닥을 펴놓은 듯 사방으로 트여 있었고, 주위에는 버드나무 한 그루 없었다. 멀리 지평선 가까이 숲이 거뭇하게 보일 뿐이었다. 마을 경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큰 선술집이 있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산책하며 지나갈 때마다 아주 불쾌한 인상과 심지어 공포감마저 느끼곤 했다.
(……)
선술집에서 (……) 술 취한 덩치 큰 농부들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타, 전부들, 타!”
아직 젊고 뚱뚱하며 목에 살집이 많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은 한 농부가 소리쳤다.
“다들 데려다주지, 타!”
하지만 바로 웃음소리와 야유가 흘러나왔다.
“이런 쓸모없는 말이 데려다준다고!”
“이봐, 미꼴까, 제정신이야? 이런 암말을 짐수레에 매다니!”
“이보게들! 이 적갈색 말은 앞으로 20년은 버틸 거야.”
“타, 모두들 데려다줄 테니!”
미꼴까는 이렇게 소리치면서 제일 먼저 수레에 뛰어올라, 고삐를 쥐고 마부석에 섰다.
(……)
여윈 말은 온 힘을 다해 수레를 끌어당겼지만 겨우 한 걸음 한 걸음 종종걸음만 떼면서, 세 사람이 휘두르는 무자비한 채찍 때문에 신음 소리를 내고 몸을 웅크렸다. 수레에 탄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지만, 미꼴까는 불같이 화를 내며 암말에게 더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 그러면 꼭 그 말이 내달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이런 죽일 놈 같으니!”
미꼴까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는 채찍을 버리고 몸을 숙여 수레 바닥에서 길고 두툼한 수레 채를 꺼내 양손으로 그 끝을 잡고서 힘껏 적갈색 말 위로 쳐들었다. (……) 미꼴까는 온 힘을 다해 수레 채를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 미꼴까는 다시 한번 수레 채로 불쌍하고 여윈 말의 등짝을 갈겨댔다. 말은 엉덩이를 감추었지만 마지막 힘을 다해 수레를 끌어보려고 이리저리 뛰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사방에 서 여섯 사람이 채찍질을 했고, 수레 채는 사정없이 두 번, 세 번 또다시 정확하게 네 번 말 등 위에 떨어졌다. 미꼴까는 말을 한 번에 죽이지 못한 것이 분해 광기에 사로잡혔다.
(……)
미꼴까는 미친 사람처럼 외치며 수레 채를 버리고 다시 몸을 굽혀 쇠 지렛대를 꺼냈다.
“모두 조심해!”라고 그는 소리치고, 있는 힘껏 불쌍한 말을 쇠 지렛대로 내리쳤다. 타격이 가해지자 암말은 비틀거리면서 주저앉았다가, 다시 마차를 끌어당기려 했지만 쇠 지렛대가 또다시 말 등을 내리치는 바람에 마치 네 다리가 꺾인 듯이 땅에 고꾸라졌다.
“뒈져라!”
미꼴까는 이렇게 외치면서 미친 듯 수레 위에서 날뛰었다. 취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몇 명의 청년들도 닥치는 대로 채찍이고, 몽둥이고, 수레 채 따위를 집어 들고는 숨이 넘어가는 암말에게 달려들었다. 미꼴까는 옆에 서서 아무 생각 없이 쇠 지렛대로 말 등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여윈 말은 머리를 축 늘어뜨리고 숨을 괴롭게 몰아쉬다가 죽고 말았다.
(……)
“아빠, 왜 저 사람들은…… 불쌍한 말을…… 죽인 거예요!”
소년은 흐느끼면서 숨이 막혔고 찢어질 듯한 가슴에서 이렇게 외마디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술 취한 사람들이 못된 짓을 하는 거야.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 어서 가자!”
아버지는 말했다. 그는 아버지 손을 붙잡았지만 가슴이 미어졌다. 그는 숨을 돌리고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건장한 체격의 전령이 주먹으로 마부의 뒤통수를 후려치던 광경을 목격한 기억이 미꼴까와 야윈 말이 등장하는 꿈속 이야기로 바뀌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보듯이 도스또예프스끼가 본 광경은 정말 끔찍했다. 그는 이 장면을 잊지 않고 20여 년이 지난 후 작품 속에 그 참혹함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꿈은 라스꼴리니꼬프가 도끼로 노파를 무참히 살해하는 사건을 암시한다. 여기서 주인공은 이미 자신의 행위가 불러올 비극적 결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꿈은 작품 전체의 주제를 암시하는 최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폭력은 도스또예프스끼가 평생 잊을 수 없었던 주제 중 하나이다. 사디즘을 성적 쾌락에만 한정하지 않고, 폭력을 통해 쾌감을 느끼는 가학증으로 이해한다면 도스또예프스끼는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정신적 질병을 사디즘이라고 이해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죄와 벌』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살인, 폭력, 고문, 경멸, 학대(아동학대), 전쟁 등 약자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인간의 본성을 자주 다루었다.
(서문, 본문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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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병훈
노어노문학을 전공하고, 모스끄바 국립대학에서 러시아 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 강의교수로 재직중이며, 같은 대학 의대에서 ‘문학과 의학’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미하일 불가꼬프의 『젊은 의사의 수기 ? 모르핀』, 벨린스끼 문학비평선 『전형성, 파토스, 현실성』(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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