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일관에 대한 두 개의 얼굴
일관一貫이란 ‘하나로 꿰뚫었다’는 공자孔子의 말, 일이관지一以貫之를 줄인 말이다. 『논어論語』에서 공자는 일이관지를 두 번 말한다. 모두 제자와 나누는 대화에서 나오는 말인데, 증삼曾參과 자공子貢이다. 증삼은 증자曾子로 불리며, 뒷날 중국 유학의 도통을 잇는 인물로 추앙을 받는다. 그는 공자의 적통을 잇는 사람으로서, 3000명에 이른다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우뚝 선 인물이 되었다. 자공은 뛰어난 언변과 당시의 임금들도 부러워한 엄청난 재물을 가진 사람이었다. 공자가 죽은 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고 모든 제자들이 떠난 뒤에도 자공은 홀로 남아 3년 더 스승의 무덤을 지켰다. 자공은 공자보다 31세 연하, 증삼은 46세 연하였다.
그런데 공자는 똑같은 말을 두 제자에게 하고 있다. 『논어』에는 중복되는 구절이 여럿 있지만, 이 ‘일이관지’만큼 뚜렷한 구분을 보여주는 구절은 없다. 이 두 구절을 비교해보면, 우리가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방향을 알 수 있다. 먼저 공자와 증삼의 대화를 보자.
어느 날 공자가 증삼에게 말했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었단다.”
“예!”
증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스승의 뜻을 곧바로 알아들은 것이다. 그러나 같이 있던 증삼의 제자들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공자가 아리송한 말만 남기고 떠나자 제자들이 얼른 증삼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로 꿰뚫다니요?”
“흠, 스승님의 도는 ‘충서忠恕’, 그 하나라는 것이다.”
증삼의 말을 듣고서야 제자들은 겨우, 아! 하고 깨달았다. (『논어』, 이인 편)
‘충서’라는 개념 하나로 공자가 자신의 사상을 말했다는 증삼의 설명이다. 송宋나라 주희(朱熹, 1130~1200)는 이 구절에 주목하여 자신의 체용론體用論을 만든다. 충忠은 나의 온 정성을 다하는 것이므로 뿌리, 곧 체體가 되고 서恕는 내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이므로 쓰임, 곧 용用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충은 천도天道이며 서는 인도人道고, 충은 천하의 근본이고 서는 천하에 쓰이는 도라는 구분도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주학程朱學의 체용론은 『논어』라는 책의 참뜻 해석에 충실한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그런지 다음 공자와 자공의 대화를 보자.
어느 한가로운 날이다. 두 사람은 연못가에 앉아 묵묵히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사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기억하여 아는 사람이라고 여기느냐?”
“예.”
자공은 선뜻 대답해놓고 스승을 바라보았는데 공자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공자의 웃음에 약간 의문이 든 자공이 다시 물었다.
“아닙니까?”
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다. 나는 하나로 꿰뚫어서 아는 사람이다.”
“예……,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나뭇잎이 떨어져 희미하게 동심원을 그리는 물살을 바라보았다. 자공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을 다잡고 꼭 묻고 싶었던 말을 했다.
“스승님, 제가 평생 동안 마음에 새기며 살아갈 수 있는 말을 한마디 해주십시오.”
공자는 자공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공자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아마도 서恕일 것이다.”
“좀 더 설명해주십시오.”
“네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는 뜻이다.”
“예…….”
자공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갖고 다니는 죽간에 ‘서’란 글자를 새겼다. (『논어』 위령공 편)
자, 어떤가? 자공과의 대화에선 ‘충’이라는 낱말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단지 ‘서’만 있을 뿐이다. 자공과의 대화에선 충이 없으므로 체용론을 만들 건더기가 없다. 또 하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대화의 모습이다. 두 개의 대화에서 어느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겨질까. 증삼은 공자보다 46세 연하였다. 공자가 73세에 죽었으므로 공자가 죽을 때 증삼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 27세밖에 안 된 증삼이 제자들을 거느린 하나의 학단을 만들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증삼은 공자가 말년에 말한 공문십철에도 끼지 못한 인물이다. 그런 어린 제자가 자신의 제자를 거느리고, 공자의 가장 핵심적인 발언을 듣는 위치라는 것이 믿어지는가? 바로 여기서 날조의 문제가 발생한다. 아마도 증삼과 공자의 대화는 자공과 공자의 대화를 짜깁기하고, 충이란 말을 끼워 넣어 만들어낸 픽션일 것이다. 그럼 무슨 의도로 공자의 말을 날조했을까. 공자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증삼을 적통 계승자로 만들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싶다. 그러나 그 날조는 너무나 허술하다. 바로 같은 책, 『논어』의 다른 편에서 날조의 증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두 개의 대화에 나온 ‘일관’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증삼의 일관은 수량화되어 있다. 충서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공자의 사상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공의 일관은 세상사를 하나로 꿰뚫어보는 통찰로서의 일관이다.
바로, 여기서 고전 읽기의 맛이 생긴다. 후대의 왜곡과 날조의 숲을 헤치고, 원래의 본뜻을 찾아가는 맛. 『논어』도 마찬가지다. 증자로부터 비롯되는 충효의 정치이데올로기, 정주학으로 대표되는 형이상학의 관념철학으로 덧칠된 『논어』 읽기를 하지 말고 공자의 진의를 찾아가는 ‘공자학’으로 읽어보자는 뜻이다. 이 책은 그런 생각에서 『논어』를 읽었고,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들과 연결시키면서 읽는 재미를 가져오려 했다. 새롭게 보기?낯설게 보기가 창의성의 원천이라는 것을 동의한다면, 이 세상엔 아직 발견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2011년 12월
장주식
둘째 마당
고르면 가난이 없다
균무빈의 세계
자공과 공자는 이런 대화를 또 나눈다. 역시 엄청난 재력가답게 자공은 재물과 관련한 질문을 공자에게 자주 한다.
자공이 물었다.
“만약 널리 베풀어 수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어진 사람(仁者)이라 할 수 있을까요?”
공자가 대답했다.
“어찌 어질다뿐이겠느냐? 반드시 성인聖人이라 불러야 하겠지. 요임금이나 순임금 같은 이도 그것을 걱정으로 삼았다. 무릇 인자는 자기가 서고 싶은 곳에 남을 세우고,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남이 도달하게 해준다. 아주 가까운 곳으로부터 비유를 찾는 것이 인을 행하는 방법이라 할 만하다.”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有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 「6-28」
자공은 재물이 많았지만 교만하지 않았으며, 공자 학단을 위해서도 아낌없이 재물을 내놓았다. 그래서 자공은 그렇게 물었다. 사람들에게 재물을 베풀어 병들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떠냐고. ‘인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자공은 무첨無瞻, 무교無驕에 제중濟衆까지 욕심을 내고 있었다. 아니, 자공은 자신감이 있었다. 재물 정도야 아낌없이 내놓을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자공은 지난번 무첨무교에서 기대했던 칭찬을 듣지 못하여, 이번엔 과연 어떤 대답을 들을지 잔뜩 긴장했다.
그런데 이런! 공자의 대답은 천만뜻밖이었다. 어찌 인자일 뿐이겠느냐? 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마어마한 반응이었다. 자공의 생각을 훌쩍 뛰어넘는 대답이었다. 요순임금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라니! 요순이 누군가.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 백성들이 임금의 이름을 알 필요가 없었던 시대의 임금들이 아닌가? 그들이 이르지 못하여 그것을 병통으로 여긴 경지라면, 자공으로선 언감생심, 바라보지도 못할 곳이 아닌가. 결국 공자는 자공의 말을 인정하지 않은 셈이었다.
언젠가 스승 공자가 자공은 군자의 반열에도 이르지 못한 그릇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자공은 군자보다도 한참 등급이 높은 인자의 반열에 이르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성인은 인자도 이르기 어려운 위치지 않은가. 이에 자공은 몹시 궁금했다. ‘제중’이 성인의 일이라면, 자공 스스로는 제중할 마음이 있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자공의 궁금증에 대하여 공자는 곧바로 대답을 알려줬다. 먼저 가까운 곳으로부터 어짊을 베풀어나가라고 말이다. 내가 서고 싶은 곳에 남을 세워주고 내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남을 도달시켜주라는 말이다. 아마도 자공에게서 그 부분이 다소 미약함을 공자는 보고 있었던 듯하다. 널리 수많은 사람을 구하려 하지 말고 가까운 이웃부터 돌보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치를 재확인하고 있음이다.
그렇다면 과연 제중에 이르는 길은 없는 것인가? 있었다. 공자는 그 길을 이렇게 제시한다. 아주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한다.
애공이 유약에게 물었다.
“흉년이 들어서 쓸 재물이 부족하면 어찌하면 좋을까요?”
유약이 대답했다.
“왜 철법徹法을 쓰지 않으십니까?”
“둘도 오히려 부족한데 어찌 철법을 쓰겠습니까?”
유약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굶주릴 것이며, 백성이 굶주리면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넉넉하겠습니까?”
哀公問於有若曰, 年饑用不足, 如之何? 有若對曰, .徹乎? 曰, 二, 吾猶不足, 如之何其徹也, 對曰, 百姓足, 君孰與不足, 百姓不足, 君孰與足? 「12-9」
애공은 노나라의 임금이었다. 유약은 공자의 제자로서 당시에 벼슬을 살고 있었다. 염구나 자로나 유약이나 재아 같은 많은 제자들이 제후나 대부들에게 가서 벼슬을 살았는데, 제자들이 펴는 정책 대부분이 공자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이 대화에서 유약이 제시하는 철법은 공자의 가르침에 다름없다. 철법이란, 1/10의 세법을 말한다. 직접 농사를 지은 농민이 충분한 수확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세법이었다. 당시에 애공은 이 철법을 쓰지 않고 2/10를 세로 거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둘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애공은 흉년이 들어서 세가 적게 걷히므로 더욱 많이 곧, 셋이나 넷을 걷고 싶어서 유약에게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유약은 세를 낮출 것을 권했다. 흉년이 들수록 나누라는 것이다. 그리해야 모두가 가난을 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에 유약이 덧붙이는 구절이 통쾌하지 않은가?
그러한 유약의 논리는 바로 공자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공자가 살던 당시 노나라의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계씨季氏에게서 벼슬을 살던 염유?有와의 긴 대화다. 좀 길지만 전문을 인용해보겠다.
계씨가 장차 전유?臾 땅을 정벌하려 했다. 이에 염유와 계로가 공자를 뵙고 말했다.
“계씨가 곧 전유 땅을 치려고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구(求, 염유의 이름)야, 그것은 너의 허물이 아니냐? 전유는 옛날에 선왕께서 동몽산東蒙山의 제주祭主로 삼았다. 또 나라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사직을 지키는 신하와 같다. 무엇 때문에 정벌하려고 하느냐?”
염유가 대답했다.
“계씨가 치려고 하는 것이지, 우리 두 사람(염유와 계로)은 모두 원하지 않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구야, 옛말에 이르기를 ‘있는 힘을 다하여 벼슬을 살다가 능력이 모자라면 그만둬야 한다’고 했다. 군주가 위태로운데도 바로잡지 않고 넘어지려 하는데도 부축해주지 않으면 장차 너희 같은 벼슬아치를 무엇에 쓰겠느냐?”
공자가 잠시 말을 멈췄는데도 염유와 계로가 묵묵히 있자 공자가 다시 말했다.
“또한 구야, 너의 말이 잘못되었다. 호랑이와 코뿔소가 우리에서 뛰어나오고 거북의 등껍질과 귀한 옥이 궤 속에서 깨지면 그건 누구 잘못이겠느냐? 그것을 지키는 자들의 잘못이 아니냐?”
염유가 말했다.
“지금 전유는 견고하고 또 비(費, 계씨의 수도) 땅에 가까워서 지금 얻어두지 않으면 후세에 자손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구야, 군자는 그것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마치 아닌 척 돌려서 변명하는 말을 미워하느니라.”
염유가 부끄러운 낯빛으로 무료하게 앉아 있으니 공자가 다시 말했다.
“내가 들은 말이 있다. ‘나라와 큰 집안을 소유한 자는 적은 것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근심하며, 가난을 근심하지 않고 편안하지 못한 것을 근심한다’고 했다. 무릇 고르게 하면 가난은 없고, 조화롭게 하면 적지 않고, 편안하게 하면 무너지지 않는다.”
공자는 말을 멈추고 두 제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이와 같은 까닭에 먼 곳 사람(전유의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文德을 닦아서 스스로 오게 해야 하고, 오면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 지금 유와 구, 너희 둘은 계씨를 돕는 자리에 있으면서 먼 곳 사람들이 오게 하지 못하고, 나라가 분열되고 부서지는데도 지키지 못하면서도 나라 안에서 창과 방패를 움직일 것을 꾀하고 있구나. 나는 두렵다. 계손씨의 근심이 전유에 있지 않고 자기 집 담장 안에 있을 것이.”
季氏將伐.臾, .有季路見於孔子曰, 季氏將有事於.臾, 孔子曰, 求, 無乃爾是過與. 夫.臾, 昔者, 先王, 以爲東蒙主, 且在邦域之中矣, 是社稷之臣也, 何以伐爲. .有曰, 夫子欲之, 吾二臣者, 皆不欲也. 孔子曰, 求, 周任有言曰, 陳力就列, 不能者止, 危而不持, 顚而不扶, 則將焉用彼相矣. 且爾言, 過矣. 虎.出於., 龜玉毁於.中, 是誰之過與? .有曰, 今夫.臾, 固而近於費, 今不取, 後世必爲子孫憂. 孔子曰, 求, 君子, 疾夫舍曰欲之, 而必爲之辭. 丘也聞, 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夫如是故, 遠人不服, 則脩文德而來之, 旣來之, 則安之, 今由與求也, 相夫子, 遠人不服而不能來也, 邦分崩離析而不能守也, 而謨動干戈於邦內, 吾恐季孫之憂, 不在.臾而在蕭墻之內也. 「16-1」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는 전쟁의 시대였다. 일정한 땅을 차지한 제후들은 서로 남의 땅과 남의 백성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 패자覇者가 되고 싶어 했다. 염구가 벼슬살이 했던 계씨는 노나라의 정권을 좌지우지했던 인물이다. 그 역시, 남의 땅과 남의 백성을 탐낸 인물이다. 이 대화에서 공자는 제자인 염구와 자로에게 정치를 하는 기본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정치란, 무력에 기대서 하는 것이 아니며, 균均과 화和와 안安이라는 것이다. 균은 재물이요, 화는 정신문화다. 재물을 고르게 갖는다면 빈부 때문에 상대적인 박탈감이 없으니 정신문화 또한 조화롭게 발달할 것이며, 이미 재물이 고르고 문화가 조화롭다면, 사람들이 편안하고 행복해할 것은 자명하다. 여기서 조화와 편안함을 갖고 오는 출발점이 바로 재물을 고르게 하는 일이다. 그것을 공자는 ‘균무빈均無貧’ 곧, ‘고르게 하면 가난이 없다’고 했다.
‘단표누항’의 세계는 개인이 가난에 얽매이지 않는 자세다. 타고난 본성이 그러하든 후천적으로 깊고 넓은 수양을 쌓아 그렇게 되었든 가난을 뜬구름처럼 여긴다는 것은 마음의 자유를 얻는 좋은 길임에 틀림이 없다. 공자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거친 밥을 먹고 물 한 사발 들이켠 뒤 팔을 베고 누웠으되, 즐거움이 그 속에 있구나. 의롭지 못한 부귀는 나에겐 뜬구름과 같다.
子曰, 飯.食飮水, 曲肱而寢之, 樂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7-15」
그러나 결코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될 순 없다. 사람의 일반적인 욕심은 부유하고 싶고 귀하고 싶기 때문이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상대적인 박탈감이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행복지수도 비례하여 높아지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봐도 그렇다. 오히려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행복감은 더 낮은 경우도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총생산이 늘어날수록 빈부의 격차가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가난할 때는 견디기가 쉽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내가 갖지 못했을 때는 서글퍼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따라서 단표누항의 세계는 일반적일 수가 없으며 누구나 행복한 세계일 수는 없다. 공자는 안회의 ‘단표누항’의 세계를 높이 보되, 한 발 더 나아간다. 그것이 바로 ‘균무빈’이다. 고르면 가난이 없다는 것. 한 가족, 한 동네, 한 나라일지라도 그들 경제의 총량을 구성원들이 고르게 나눠 갖는다면, 가난할 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고르다’면 상대적 박탈감이 존재할 수가 없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이른바 ‘보편적 복지’를 2500여 년 전에 공자는 주장했다. 결국 공자는 현실에 뿌리를 탄탄하게 내린 삶의 철학자였다. 모든 사람이 타고난 생을 영예롭게 누리다 떠날 수 있기를 바랐던 ‘인정仁政’의 정치가였다.
공자는 한 개인으로서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며 인생을 자유롭게 살다가 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엔 주변의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눈에 보였으리라. 인자는 수많은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수가 없다. 공자의 그런 생각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논어』에 나온다.
장저長沮, 걸익桀溺이 짝을 이뤄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가 그들 곁을 지나가다가 자로를 시켜 나루터를 물어 오도록 했다. 자로가 달려가 묻자 장저가 나루터는 가르쳐주지 않고 엉뚱하게 물었다.
“저기 수레 고삐를 잡고 있는 분은 누군가요?”
“공구孔丘라고 합니다.”
“노나라 사람 공구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러자 장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분은 나루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 것이오.”
하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자로는 그 옆에 있던 걸익에게 물었다.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 좀 가르쳐주십시오.”
자로의 물음에 걸익도 엉뚱하게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은 누군가요?”
“저는 중유仲由라고 합니다.”
“노나라 사람인 공구의 제자인가요?”
“그렇습니다.”
자로의 대답에 걸익은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며
“물이 이리저리 도도하게 흐르듯 천하가 어지러운데, 누구와 더불어 변역을 시킬 수 있을까?”
혼잣말로 노래하듯이 이렇게 뇌까리더니 자로를 돌아보고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느니, 차라리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어떠하겠소?”
하고는 자로의 대답도 들으려 하지 않고 괭이로 흙을 긁어 밭의 씨앗을 덮었다. 자로는 잠깐 묵묵히 섰다가 수레로 되돌아가서 공자에게 말했다. 자로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공자는 한참 동안 서글픈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공자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사람이라 날짐승이나 길짐승과는 무리 지어 살 수 없으니, 내가 사람의 무리와 함께하지 않으면 누구와 같이 살겠느냐.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도 애써 변역시키려 들지 않으리라.”
長沮, 桀溺, .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長沮曰, 夫執輿者, 爲誰. 子路曰, 爲孔丘. 曰是魯孔丘與. 曰是也. 曰是知津矣.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爲仲由. 曰是魯孔丘之徒與. 對曰然. 曰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人之士也, 豈若從.世之士哉. .而不輟. 子路行, 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18-6」
장저와 걸익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은사隱士들이다. 세상의 부귀와 공명을 훌쩍 벗어나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공자는 단표누항의 안회를 높이 쳤듯이 그런 은사들도 높게 보았다. 공자도 왜 은사의 삶이 부럽지 않았겠는가? 한때 공자는 자로에게 “뗏목을 타고 저 멀리 바다로 두둥실 떠나가고 싶다”고 술회한 적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사랑하는 제자, 자로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나는 사람들 속에 살겠다’라고.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며 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공자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탐구의 결과 가운데 하나로, 경제적인 방면에서는 ‘균무빈의 세계’가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그리하여 공자는 강조한다. “나누면 가난이 없다.”
요즘 대학등록금을 반값으로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서울시에서는 초중고생의 전면 무상급식의 가부를 놓고 주민투표를 하여 수십억 원의 예산을 낭비했다. 이 문제들의 해결은 공자의 말을 들어보면 의외로 쉽다. 과연 우리의 부는 편중되어 있는가? 고른가? 대답은 참 쉽다.
(서문, 2부 ‘균무빈의 세계’ 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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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주식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책읽기를 좋아하고 글도 쓰며 산다. 서울살이 20년을 정리하고 여주로 내려온 뒤, 몇몇 사람들과 함께 고전을 읽는 재미를 붙였다. ‘논어 읽기’는 그 가운데 하나다. 지금까지 세상에 펴낸 책으로는 동화 『그리운 매화향기』, 『토끼 청설모 까치』, 『바랑골 왕코와 백석이』,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 소설 『순간들』, 옛이야기 『오줌에 잠긴 산』, 『토끼전』, 교육 산문집『하호아이들은 왜 학교가 좋을까』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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