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글
철학과 삶이 하나 되는 길을 보았다
나는 철학책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기회가 없었고, 대학 1학년 때 들은 철학 개론은 철학에 대한 관심의 싹을 완전히 잘라 버렸다. 강사가 한 학기 내내 《니코마코스 윤리학》 얘기만 해 댔던 것이다. 이후 아주 가끔씩 철학책을 읽게 되기는 했지만 철학이 내 삶의 고민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때문에 삶의 고민과 관련해서는 영성 서적이나 명상 등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는 철학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철학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우리가 삶에서 고민하고 있던 것들이며,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영성 서적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비엔나 서클로부터 시작해서 과학적 방법론이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비록 지금은 과학이 모든 학문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진리’를 찾고자 하는 철학의 일부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왜 모든 박사가 ph.d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하며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된 것이 언어에서 드러나는 서양과 한국 간의 사고방식 차이이다. 영어 truth는 한국어로 ‘진리’와 ‘진실’의 두 가지로 번역된다. 하지만 한국어에서 ‘진리’라는 말은 주로 종교나 영성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고, 일상생활에서는 주로 ‘진실’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이런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서양에서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진리를 찾는 프로젝트라는 데 합의가 이루어져 있고 그 결과물이 사회에 큰 파급 효과를 끼치지만, 한국에서는 진리는 학문, 특히 서양 학문을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종교나 수행의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간주되어 철학과 현실이 별개로 움직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서양에서 철학자들이 차지하는 위상과 한국에서의 위상이 사뭇 다르며, 서양에서는 철학자들이 대학 교육 개편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 힘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누가 어떤 의식 상태에서 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이는 특히 ‘모든 생명은 하나다.’ 같은 궁극적인 진리 수준에 속하는 말일 경우 특히나 더 그렇다. 네스가 이야기하는 심층생태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네스는 생태문제를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자고 이야기한다(물론 그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아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스스로를 분리되었다고 인식하는 것 때문에 생태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므로, 이런 분리 의식을 극복해 나가는 것(그는 이것을 ‘자아실현’이라 부른다.)이 생태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과연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맥락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두 철학자 간의 문답을 통해 이런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이 책이 지닌 또 다른 가치는, 이런 추상적인 얘기를 하는 철학자가 과연 현실에서 어떻게 그것을 실천하는지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첫째, 네스는 ‘사실’ 같은 추상적인 논리 구조에서 벗어나 현실을 다양하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둘째, 네스는 비폭력 저항과 비폭력적 의사소통을 이야기한다. 상대가 자신과 의견이 다를 때 상대를 공격하거나 회피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입장을 상대에게 뚜렷이 밝히는 일을 끈기 있게 계속하여 상대가 다른 가능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라는 것이다.(물론 상대를 개종시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은 생태문제와 관련된 실제 예를 통해 그가 이런 원칙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하는지 보여 주고 있다. 셋째, 네스는 행동에는 선택이 필수적이므로, 자신의 내면 깊숙이 내려가 자신만의 느낌을 찾으라고 이야기한다. 만약 확실한 느낌이 떠오르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의 내면을 주시하며 이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고(그는 이럴 때 생각이 고통스러운 것이 되지만 그것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가능하면 기존에 형성된 생각의 틀을 벗어나는 결단을 내리라고 이야기한다. 넷째, 네스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려면 그 수단이 단순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소박한 삶을 통한 마음의 풍요를 이야기한다. 이 책은 네스가 자신의 삶에서 이런 사항들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네스가 가진 인간적인 약점과 그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여러 가지 실수와 시행착오들을 비교적 솔직하게 보여 줌으로써 독자들이 그의 말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돕는 한편 책의 재미도 더해 주고 있다.
이 책은 실로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때문에 한 번에 쭉 읽어 내려가기보다는 조금씩 내용을 곱씹어 가며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실제로 이 책의 번역은 참으로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몇 번을 읽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이해가 되는 구절이 너무나 많았다. 부디 독자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긴 번역 과정 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고 원고를 함께 다듬어 주신 낮은산 식구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또한 철학용어와 관련하여 조언을 해 주신 강신주 선생님과 노르웨이어 발음과 관련해서 도움을 주신 Ian Shidon Kim 님께도 감사드린다.
2011년 12월 박준식
1
CHILDHOOD AND THE DISTANCE
거리두기를 시작한 어린 시절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는 흐릿하지만 핵심적인 주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온전히 혼자일 때 가장 자기 자신에 가깝다고 느끼는 조숙하고 호기심 많은 소년이라는 이미지에 대해 아르네 네스가 평생에 걸쳐 집착하고 경도하게 된 뿌리를 찾아보기로 하자. 어떻게 학문 중에 가장 실용성이 떨어지고 추상적이며 답을 찾기가 불가능해 보이고 저주라도 걸린 듯 발전이 없는 철학을 천직으로 택하게 되는 걸까? 물론 산중에 있으면 땅의 경계도 생각의 한계도 사라지므로, 자신만의 시선으로 장엄한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왜곡시키지는 않게 된다. 봉우리들이 각각 다르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돌멩이들도 서로 달라 보이는데 그것이 어린 소년이 눈에 띄는 대로 돌멩이를 모아야만 하는 까닭이다. 어린 시절 아르네는 자연의 다양성을 알아차리기 시작했고 그 다양성에서 혼란한 인간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순수성을 발견했다.
아르네 네스는 노르웨이의 부유한 베르겐 가의 네 아이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은 가족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아르네가 태어난 지 채 일 년이 못 되어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크리스티네는 어린 아르네를 돌보기 위해 보모를 고용했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늘 껄끄러웠고 어린 아르네는 어머니의 수다와 과장스런 감정 표현에 대해 점점 강한 반감을 키워 갔다. 이때부터 거리두기가 시작되었고, 소년 아르네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사물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훗날 비엔나에서 정신분석을 받을 때 아르네는 자신이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과연 어디에서 아버지를 찾으려 했을까? 홀로 있을 때의 편안함에서? 아니면 형들의 조언에서? 대부분은 위에서 조용히 미소 짓는 산, 바로 거기 머무를 때였다. 오르려는 이를 손짓해 부르기는 하지만 결코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금방이라도 가 닿을 듯싶지만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산. 이제 우리는 아르네가 철학을 시작하고 음악을 배우며 등반을 익히고 친구를 사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장면에서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아주 작은 것들
데이비드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 중에 꽤 인상 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연 속의 아주 작은 것들에 금세 마음을 빼앗겼다고 말씀하셨죠. 밖에 나가 작은 생명체들을 바라보며 그것들에 끌렸고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물론입니다. 화학을 예로 들면, 제가 소년일 때는 어떤 용액 한두 방울이 다른 용액에 떨어졌을 때 일어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이었습니다. 그 후 책에서 다른 실험들에 관한 내용을 읽을 때면 그 방울들을 떠올렸지요. 색깔 따위 말입니다.
데이비드 그 용액 방울들 속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아르네 용액 방울들 속이라! 제가 보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환상적인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용액이 퍼져 나가며, 색깔이 없는 두 용액이어도 함께 어울리면서 환상적인 모양으로 확산되고는 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그러니까 제가 다섯 살 때 우스타우세에 갔습니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거기서 저는 자유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서도 그 개념을 이해했습니다. 그곳에는 경계선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어디라도 갈 수 있었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아무런 제한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이 산 할링스카르베를 처음 봤을 때입니다.
데이비드 누가 거기에 데려갔나요?
아르네 어머니입니다. 아버지는 이 산에 오두막 같은 것을 최초로 소유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르당에르비다 고원에서 처음으로 스키를 탄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데이비드 그 오두막이 아직 여기 있습니까?
아르네 아니요. 없어졌습니다. 아주 작은 오두막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두 형과 함께 갔고, 거기에는 저와 무척 재밌게 지냈던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바람이 아주 심하게 불었고, 그들이 저를 이렇게 세워 놓고서는 바람에 날리는지 보았습니다. 물론 그때 저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지요.
제가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아이디어를 산에서 얻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니지요. 하지만 제가 생명체, 광물, 돌과 관련하여 어떤 가치를 알아보는 방법을 익히게 된 것은 바로 여기입니다. 돌이 중요했습니다. …… 돌을 모으는 것 말입니다. 저는 많은 돌을 원했습니다. 크기가 작으면서 양은 많아야 했지요.
데이비드 양quantity 말인가요? 아니면 질quality 말인가요?
아르네 수량에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작은 돌로 이루어진 아주 긴 행렬을 원했지요.
데이비드 각각의 돌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습니까?
아르네 다양체manifold, 말하자면 다양성, 무한한 다양성에서 한 지점을 찾으려 했습니다.
데이비드 각각의 돌이 모두 서로 조금씩 다르다는 점에 감명을 받았군요.
아르네 맞습니다. 모두 다릅니다.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데이비드 왜 작은 것들이 감명을 줍니까?
아르네 다행히도 그러한 심리에 대해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훗날 지식인이 되는 사람들은 종종 아주 작은 세세한 것들에 집착하고는 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아주 큰 것들을 경험할 때처럼 강렬하게 아주 작은 것들을 경험하지요.
데이비드 그와 같은 강도로요? 아니면 더 강하게요?
아르네 저에게는 더 강합니다. 아주 작은 것은 늘 매혹적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건조함을 비롯한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여기 창밖에 있는 이 용담Gentiana nivalis이 고산지대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데이비드 산용담Arctic gentian 말인가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올해는 건조해서 이 꽃이 무척 작습니다. 그 밖에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꽃이 폈을 때조차 2센티미터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엄청난 감명을 줍니다. 그 작음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소우주와 대우주라는 철학의 오래된 주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별, 우주처럼 큰 세계가 있는 반면, 한없이 작은 세계들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큰 세계에서만큼이나 작은 세계에서도 풍부한 복잡성과 다양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 개인사 한 가지도 분명 이 아주 작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형들과 누나가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저는 자신이 작고 홀로 남겨진 존재라고 느꼈습니다.
데이비드 파스칼은 인류가 소우주와 대우주라는 두 개의 무한 사이에 있다고 썼습니다.
아르네 맞습니다. 저에게 소우주는 어린 시절의 한 가지 기억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세 살 때, 보모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보모와 파리
데이비드 빼앗겨 버렸다고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한숨) 이름이 미나였지요. 음, 상황이 어떠했냐면, 저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 어머니가 여섯째를 가지게 되다니 말이지요! 제가 태어난 것은 기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데이비드 여섯째라고요? 그렇지만 두 형과 누나 한 분밖에 없으시잖아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다른 둘은 이미 죽었지요. 그들은 두세 살 때 죽었습니다.
데이비드 그렇군요. 그때 어머니는 몇 살이셨나요?
아르네 마흔 살이었습니다. 더 많았을 수도 있고요. 어머니는 불만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데다 이 여섯째 아이를 가지게 되자, 두 형제에 대한 걱정이 늘었습니다. 좀 거칠었거든요. 제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몸이 안 좋았습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으로 미나를 이미 고용해 놓았지요. 미나가 저를 사랑하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의 온갖 소원을 들어주려고 했으니까요. 저는 소원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형의 말에 따르면 제가 욕조에서 목욕을 하려면 파리가 적어도 한 마리는 있어야 했답니다. 살아 있는 파리인지 죽은 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미나가 파리를 잡아야 했습니다. 한겨울에는 당연히 안 그랬겠지만요…….
데이비드 파리가 선생님에게 있어야 했습니까, 아니면 방 안에 있어야 했습니까?
아르네 물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데이비드 물속에 죽은 채로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데이비드 하긴 거기서 살아 있을 수는 없었겠네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오래 살아 있지 못합니다.
데이비드 그럼 보모한테 파리를 죽여 달라고 하신 겁니까?
아르네 죽이거나 산 채로 잡아서 물속에 넣었습니다. 죽이지 않고 물속에 넣었더라도, 저절로 죽었을 테지요. 그리고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그때 미나는 이미 쉰 살이 넘었습니다. 파리를 잡으려고 여기저기 올라가는 것을 보면 감동적이었지요.
또한 저는 병을 모으고, 한 병에서 다른 병으로 물을 옮겨 담으면 얼마나 높이 차오르는지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아주 넓은 병에서는 물이 거의 안 보이게 되고, 길쭉한 병에서는 꼭대기까지 차게 되지요. 아이들이 어떻게 액체량의 보존 개념을 이해하게 되는가를 연구한 피아제에 따르면 아이들은 보통 길쭉한 병들을 선호합니다…….
우리 가족이 누르하임순으로 가는 도중에 하르당에르 피오르 기차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기차에 탈 때 어머니는 여행 가방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우리 식구가 다섯 명이라 여행 가방이 많았는데 그래도 가방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지요. …… “이게 뭐예요”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나가 말했습니다. “아르네의 병들이에요. 얘한테는 병들이 있어야 되거든요.”
데이비드 길쭉한 병들이었습니까?
아르네 온갖 종류가 다 있었습니다. 그 차이가 중요했죠. 피아제는 아이들이 길쭉한 병들을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다양한 종류의 병들이 여행 가방 가득 있어야 했습니다. “아르네한테는 병들이 있어야 해요.”라는 미나의 설명은 거의 자연법칙에 가까웠습니다. 병들을 놔두고 올 수는 없었으니까요.
데이비드 필요한 것은 늘 가졌군요.
아르네 그 이상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항상 가졌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제가 엄청난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나가 떠나기 전까지는 진짜로 그랬지요. 제 소원은 모두 들어주려고 하는 사람이 제 곁에 한 명 있었으니까요.
데이비드 하지만 선생님이 세 살 때 미나는 떠났지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미나가 저를 너무 버릇없게 만든다는 것을 어머니가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저를 완전히 응석받이로 만들고 있었지요. 그래서 미나는 해고됐습니다. 다른 이유가 더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해고 사유 가운데 하나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 뒤로 저에게 미나를 대신하는 사람이 다시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두 형과 다른 일이 있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제가 가진 특별한 소원을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고, 저는 그런 어머니에게 질려 버렸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 대항하는 껍질
데이비드 그럼, 그때 아버지는 어땠습니까?
아르네 아버지는 제가 한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암에 걸리자 어머니는 함께 독일로 가셨고, 아버지는 오랫동안 병원에 계셨습니다. 갓난아이였던 저에게는 미나가 어머니 같았습니다. 미나가 저에게 우유를 줬습니다.
데이비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습니까?
아르네 그렇습니다! 훗날 비엔나에서 정신분석을 받으며 두세 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기억해 내려고 해 봤지만 그건 불가능했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데이비드 어머니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아르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의와 저는 그 이유를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물론 그게 제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지요. 어머니는 재능이 있었고 배우가 될 수도 있었지만 실패한 뒤로는 자포자기했습니다. 극작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머니는 짧은 희곡을 한 편 썼습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가족 구성원 중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 쉽게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희곡의 출판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에 대한 제 부정적인 태도는 어머니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집중되게 되었고, 저는 곧 허풍이 심하고 감정적 히스테리가 심하던 어머니가 연기를 하는 경우가 많으며 전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데이비드 그 무렵 선생님은 감정에 저항하고 계셨던 것인가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저는 감정에 엄청나게 저항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매를 맞을 때면 어머니는 보통 저를 이 층으로 데려가거나 소파로 끌고 갔기에, ‘이제 매 맞겠구나.’라고 느낌이 올 때면 스스로 계단을 올라가 이층으로 가서는 소파에 엎드려 제 운명을 기다렸습니다. 매를 맞기 전이나 도중 혹은 그 뒤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어머니에게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꾸짖으면 저는 그저 냉랭해졌고 오랫동안 어머니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저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고, 저는 어머니에게 저항함으로써 제가 어머니에 대해 힘이 있다는 느낌을 조금은 가지게 되었습니다. 훗날 이 체험으로 인해 저는 공평함에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소위 말하는 객관성을 중시하면서 관료적 방식 혹은 과학적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데이비드 ‘관료적’과 ‘과학적’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시는군요?
아르네 글쎄요, 학교에서 에세이를 써야 했을 때, 글들이 관료적인 스타일로 나오더군요. 무슨 얘기를 하든 간에 은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것은 바로 어머니를 닮지 않으려는 저의 바람에 기인합니다. …… 전 어머니와 반대가 되어야 했으니까요.
데이비드 감정에 저항하는 태도 자체가 감정적이군요?
아르네 아, 네,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거리두기를 할 수 있습니다. …… 저는 어머니를 떨어뜨려 놓을 수 있었고, 고통도 그렇게 떨어뜨려 놓을 수 있었습니다. 매 맞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데이비드 자라면서 이런 거리두기를 갈망하셨습니까?
아르네 저는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프로이트식 용어로 말하자면 성격무장 12이라는 것을 발전시켰습니다. 즉, 일종의 장갑 혹은 껍질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내면 깊숙한 곳, 껍질의 한참 아래가 제가 있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느 정도 뚫고 들어올 수는 있지만 갈수록 점점 더 뚫고 들어가기 힘들어지므로 아무도 완전히 껍질 내부로 들어올 수는 없지요.
데이비드 그렇다면 지금도 다른 사람이 그 내부에 완전히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미나가 사라졌을 때 경험한 사랑의 상실은 제 발달을 억제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 다른 상실을 겪을까 봐 자신을 방어하고는 했습니다. 아무도 완전히 내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공황 상태에 빠지거나 애정 결핍 때문에 미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데이비드 세 살 때 벌써 한 사람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을 느끼셨군요. 그 뒤로는 없고요.
아르네 더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을 잃어버리고 나면, 주위에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찾을 길 없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니까요. 큰형 랑나르에게 이런 따뜻함이 조금 있었지만, 그는 제가 여덟 살 때 미국으로 가 버렸습니다. 그는 떨림은 없지만 달래는 듯 꽤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가졌고, 스피노자의 월광 소나타 제2악장 같은 아주 로맨틱한 곡들도 피아노로 연주했습니다…….
데이비드 스피노자가 아니라 베토벤이죠.
아르네 물론입니다. 아시겠지만, 이러한 거리두기가 과학적 명료함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학자가 되려면 객관성이 필요하고, 이렇게 일로매진하면 정교한 작업들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고통과 불편함을 잘 견딜 수 있게 되면, 모든 감정을 표출하기만 하면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보다 더 큰 힘과 통찰력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선생님은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일을 쉽게 해내는 일종의 기술을 얻게 된다고 믿고 계신 것인가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사람들이 저와 함께 살면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일 것입니다.
데이비드 지금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아니면 어렸을 때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아르네 늘 그렇습니다. 저는 흔한 말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저와 성별이 다른 사람들은 “당신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요. 도대체 어디 있나요”라거나 “뭐가 문제예요”라고 불평을 늘어놓고는 합니다. 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오슬로에서 비엔나로 갈 때 탔던 기차는 아주 느렸고, 저는 자리에 앉아 가면서 완전히 혼자일 수 있었습니다. 작은 칸막이방에 여덟 명이 있었지만, 저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다른 사람은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데이비드 늘 무언가를 쓰고 계시는군요.
아르네 쓰든지 아니면 그냥 생각만 하든지 둘 중 하나이지요. 한번은 이런 적도 있습니다. 저는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여자분이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여자분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분은 제 눈이 완전히 멍한 상태였던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지요. 심지어 지금도 제 아내 킷 파이는 “당신은 저를 제대로 보지 않아요.”라며 불평합니다.
데이비드 정말 그렇습니까?
아르네 그렇습니다. 분명 저는 자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집중력을 가져다줍니다. 저는 상상에 빠져듭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시적인 상상은 아닙니다.
시와 정확성
데이비드 전혀 시적이지 않다고요? 시적인 것과 상상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갑자기 그런 구분을 하시는 이유가 뭐죠?
아르네 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그랬듯이 저는 모든 종류의 감상에 저항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감상벽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느낌, 음, 강한 느낌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감상벽은 안 됩니다. 대부분의 시는 감상적입니다. 말 자체를 중시하지요.
데이비드 늘 말을 넘어서고 싶어 하셨군요…….
아르네 물론입니다. 입센의 작품을 공부하고 있을 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인 안드레아스 빈스네스는 그 극에서 실제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 제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그는 “이제 아르네가 읽어 봐라.” 하고 나서는 항상 그 즉시 저를 멈추게 하고는 했습니다. 감정을 실어 읽는 일이 저에게는 불가능했으니까요. 저는 어떤 것도 연기하듯 읽을 수 없었습니다. 아주 안 좋았지요. 연기하듯 읽는 부분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니까요. 저는 말을 없애 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데이비드 입센의 작품 가운데, 선생님이 그 말을 넘어서고 싶다고 느꼈던 작품이 있었습니까?
아르네 《브랑》. 브랑은 주인공 이름입니다. 브랑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삶이 반드시 무언가를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고 느꼈습니다. 브랑에게는 그것이 신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아니지만요. 하지만 무언가를 위해 삶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살 만한 가치가 없을 테죠.
데이비드 삶은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습니까?
아르네 그렇습니다.
데이비드 모든 종류의 삶이 다 그렇습니까, 아니면 인간의 삶만 그렇습니까?
아르네 인간의 삶만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과 그냥 사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 따라서 저는 이것을 동물에게 적용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데이비드 성취를 증명해 줄 대상을 찾아다니며 늘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셨습니까? 특정 목표들을 바라보며 “써야만 해. 읽어야만 해.”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르네 늘 그러지는 않습니다. 꿈꾸는 것도 나름의 역할을 합니다.
데이비드 꿈꾸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르네 꿈꿀 수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기는 했지만, 학생 때는 꿈꾸기에 저항했습니다. 전제와 결론 사이의 연결고리를 꿈꿀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제가 책에서 읽은 철학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꿈꿨습니다. 그 다음 날 그 일부를 적어 보았을 때 그 결론이 전제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요. 끔찍한 발견이었습니다.
데이비드 지금 온갖 주제에 대해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읽으며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시는 거 맞죠?
아르네 그렇습니다. 저는 11살 때 형 아링과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링과 함께 있으려면 그가 공부 중일 때 아주 조용히 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책을 뒤적이는 것이 자연스러웠지요. 당시 봤던 책은 도표나 곡선 말고는 그림이 전혀 없는 그런 책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이 저에게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외국어로 써졌든 관료적인 문체로 써졌든 문제될 것이 전혀 없었지요. 제 노르웨이 스승인 철학자 빈스네스는 저에게 ‘양호’보다 나은 평점을 한 번도 주지 않았습니다. ‘양호’는 괜찮다는 정도이지 특별히 높은 평점은 아니었지요. 저는 아주 훌륭한 논증을 많이 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그는 언어에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끔찍했습니다. 맞춤법은 너무 구식이었지요.
데이비드 아링의 경제학 책들을 읽고 계셨던 것인가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데이비드 지금 제 손에는 선생님이 16살 때 사셨던 네 권짜리 경제학 교과서가 들려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하셨던 것으로, 페이지 여백에는 청춘의 느낌이 묻어나는 필체로 써진 조그만 메모들이 있는데, ‘경제학이란 무엇인가’라고 적고 그에 관한 여러 사람들의 관점을 정리한 작은 메모지도 있군요.
아르네 …… 제1권은 549페이지짜리 책입니다. 다른 권들도 그와 같지요. 그런데 오직 제1권만이 가치론, 맑스, 사회주의 같은 완전히 추상적인 주제를 조심스럽지만 다소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제 정치적 견해에 꽤 영향을 줬지요. 그런데도 저는 개의치 않고 제1권에 점점 더 많이 집중했습니다. 거기에 철학자들의 저술이 인용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데이비드 그렇다면, 그것이 시작이었나요? 선생님은 경제학의 가치론에서 출발한 뒤에, 철학이 해 볼 만한 진짜 영역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셨던 것인가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그 다음으로 저는 회프딩의 이 책 《현대 철학의 역사》를 샀습니다. 그 두 권짜리 책이 제가 가장 좋아했던 것입니다. 아주 매력적인 철학사 책이지요. 1894년 덴마크어로 출판된 것입니다. 물론 덴마크어인 줄 모르고 실수로 산 것이지요. 거기서 스피노자를 발견했습니다. 적어도 그의 철학은 삶 자체에 대해 제대로 의문을 던졌지요.
데이비드 페이지 여백에 ‘신의 무한한 속성들에 관한 스피노자의 가르침에 집중하라.’라는 글씨가 밝은 녹색 잉크로 휘갈겨져 있네요. 당시에 벌써 무한한 다양성에 관한 내용을 골라내고 있었군요.
아르네 유툰하이멘 산악 지대에서 한 노르웨이 대법원 판사가 스피노자에 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 기억이 있었기에, 학교에서는 라틴어에 전혀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틴어로 책을 쓴 스피노자에 흥분하게 되었지요. 그러고 나서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소년 시절에 구했습니다. …… 그 책의 어떤 판본을 입수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스피노자가 쓴 라틴어는 키케로에 비해 무척이나 간단합니다. 키케로는 우리 어머니 같습니다. 항상 과장되게 말하고 속임수를 쓰고는 합니다.
데이비드 선생님은 늘 화려한 문체나 어법을 수상쩍게 여기시는군요. 결국 고등학교 때 철학을 향한 정처 없는 여행길에 오르겠다는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철학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중이었고, 결국 철학이야말로 선생님이 가장 추구하고 싶은 것이었고요.
음악적 환경
데이비드 그 무렵 선생님에게 음악은 어떤 것이었나요?
아르네 글쎄요. 14~16살 때 저는 아링 베스테르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방과 후 거기 가서는, 종일 그와 함께 지내는 일이 무척이나 잦았습니다. 제가 피아니스트가 되어야 할지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했고요. 저는 몇 시간씩 그의 연주를 들었고, 그가 다른 학생들에 대해 비평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저는 비평할 때 무자비했습니다.
데이비드 음악에 드러나는 감정과 느낌을 비판하는 면에서는 어떠셨습니까?
아르네 어찌된 일인지 그런 면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관대했습니다. 누구나 음악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서정적일 수 있습니다. 저는 서정적인 면에서 훌륭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데이비드 실제로도 그러십니다. 결국 선생님은 추상적인 것을 선호하시지만, 음악으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음을 발견한 셈이로군요. 여전히 언어보다 음악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르네 그렇습니다. 음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의미의 충만함은 언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완벽하고 완전합니다. 과장된 표현은 거의 성공하지 못합니다. 물론 쇼팽의 음악을 우스꽝스럽게 연주하는 것도 가능하지만요. 장대한 리타르단도…… 환상적인 리타르단도. 화려한 문체나 어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악에도 위험이 좀 있습니다.
데이비드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바흐의 음악에서 좀 더 완벽한 의미를 발견합니다. 감정 표현에 기반을 둔 음악에 비해 바흐의 음악 구조가 더 명확하기 때문이지요. 브람스가 과장됐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르네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늘 화려한 기교의 연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리스트의 협주곡을 시작할 때 저는 엄청난 기쁨을 가지고 첫 부분을 연주합니다. 니체처럼 일종의 초인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이지요. …… 거대증 혹은 일종의 과대망상증 같은 것인데, 음악에서는 어느 정도까지 스스로에게 이런 것을 허용했다가 곧 이렇게 말하고는 하지요. “이건 그다지 좋지 않군. 깊이가 없어. 어떤 점에서는 혐오스럽기까지 하군. 하지만 오 하느님! 이건 멋지군. 너무 매혹적이야!”
데이비드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아르네 아니요. 결코 아닙니다. 노르웨이의 제 음악 선생으로부터 전문적인 비평 감각을 익혔기 때문에 그러지 못합니다. 저는 최고 수준의 학생들을 비판하고는 했지요. 또한 제가 바라는 연주 수준에 비해 제 연주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삶의 큰 기쁨 하나를 잃어버렸으니까요. 그냥 아마추어로 연주하는 것 말입니다. 저는 그런 기쁨을 아주 일찍 잃어버렸습니다.
데이비드 아흔 살에도 매일 몇 시간씩 피아노를 연주하는 선생님의 형 랑나르처럼, 선생님도 다시금 그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르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형처럼은 말고요. 저는 형이 큰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꽤 오랫동안 봐 왔습니다. 제가 아주 조그만 소년이었을 때 그 피아노 아래에 앉아, 의미가 완전히 충만해짐을 느꼈지요. 그로 인해 언어에 대한 저의 불신은 더 강해졌습니다.
데이비드 선생님에게는 의미가 완전한 것이 중요했습니까?
아르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순수해야 합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하고, 모호한 점도 없어야 합니다. 정확해야 하고요. 음악적 사고는 대체로 명확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피아노 선생의 학생들을 비판할 때 저는 “이 부분이 매끄럽지 않았어요.”라고 종종 말하고는 했습니다. 원래의 진행에서 확연하게 다른 식으로 연주를 해 나갈 때, 그 다름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더 능숙하게 처리해야만 매끄럽게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음정에 어떤 변화라도 생기면, 무척이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요. 반면, 시인 같았던 제 선생 베스테르는 음악에서 색깔을 보았지요. 그는 화음을 시각화할 수 있었습니다. …… “이건” 그는 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고는 했습니다. “하하. 이상하군. 여기 말이야, 파랗고 노랗고.”
데이비드 선생님은 그런 식으로 듣지 못했나요?
아르네 노력은 했지요. 저는 그의 색깔 이야기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 아주 인상적이었죠. 여기저기 조금씩 바꾸기만 해도 수백 가지 색깔이 나타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장기였고, 제 전문 분야는 구조였습니다.
데이비드 선생님은 괴테가 모든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철학이 음악의 수준에 도달하기를 열망하십니까?
아르네 물론입니다.
데이비드 항상이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실망했습니다.
데이비드 시도는 해 보았습니까?
아르네 그렇습니다. 당시 저는 과학철학을 지향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무언가를 좀 먹어야 할 것 같군요…….
초기 산행 : 친구와 산
데이비드 등반이 선생님의 삶과 사상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아르네 저는 아주 큰 집의 부엌에서 태어났는데, 정원이 집보다 훨씬 더 컸지요. 오슬로 교외의 홀멘콜렌이란 곳으로 스키 점프로 유명합니다. 정원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곳의 4분의 3은 완전 야생의 자연으로, 큰 나무와 작은 나무들이 질서 없이 어우러져 마치 작은 숲 같았습니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작은 나무에 기어오르기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보다 큰 나무에, 마침내 큰 전나무와 가문비나무에도 기어올랐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정원 한쪽에 있는 가장 큰 나무 아래에 도로가 있어서 나무 위에서 아래쪽의 사람들에게 전나무 방울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큰 스키 행사가 있을 때면 수천 명의 사람이 지나가고는 했습니다. 물론 저는 힘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지요. 음, 적어도 무언가를 아래로 던질 수는 있었으니까요. 위에 있으면서 거기서 보고 조망하는 느낌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저는 금세 장비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어떤 가지를 쓰면 좋을지, 어떤 가지는 안 될지를 판단해야 했으니까요.
데이비드 그렇다면 자연에서 골라낸 무언가는 벌써 장비에 해당되는 것인가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이미 장비입니다. 위로 갈수록 점점 더 가늘어지는 나무의 꼭대기에 얼마나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지 가늠하는 것처럼 그 장비를 쓰는 방법은 기술이고요.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이것이 제 등반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하나밖에 없는 좋은 친구였던 할프단과 함께 론다네 근처에 있는 그 친구 가족의 오두막에 갔을 때였습니다. 작은 개울 위로 협곡이 있었는데, 거기서 우리는 탐험을 시작했습니다. 할프단과 저는 개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지요…….
데이비드 몇 살 때였습니까?
아르네 13살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큰 산 하나에 처음으로 올랐습니다. 전문적인 등반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산과 등반을 연결시켜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말이지요.
데이비드 그것이 왜 중요했습니까?
아르네 글쎄요. 그 위대함…… 단순히 크기만이 아니라 그 모양, 그 형태의 위용이랄까요. 그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스미우바리엔 산(1916미터)은 공격적이지 않으면서도 강하다는 느낌을 주는 아주 넓은 봉우리입니다. 어떤 종류의 공격성도 없지요. 폭이 너무 넓어서 정상 쪽으로 다가가도 그 폭은 서서히 좁아집니다. 할링스카르베 산의 주변부처럼 자애롭지요. 그래서 제 등반은 곧 산에 대한 일종의 숭배를 수반하게 되었습니다. 한 봉우리에 거의 다 올랐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그 너머에 다른 산들이 계속 솟아올라 있었고, 그래서 점차 우리는 모든 산의 정상에 오르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데이비드 당시에는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했군요?
아르네 물론입니다.
데이비드 하나가 아니라 모두 다?
아르네 정상에 도달하는 것 말입니다. 그 얼마 뒤 제가 스무 살이나 그보다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정상에 오르기에는 날씨가 최악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몇 미터는 네 발로 기어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매우 중대한 일인 양 말이죠. 여기서 수량의 문제가 다시 나옵니다. 우리는 각 산의 수를 세고, 또한 등반해야 할 거리와 전체 이동거리, 산의 높이 등을 계산해 가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산의 정상에 오르고자 노력했으니까요. 등반해야 할 거리를 계산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산마루와 이어진 첫 번째 산의 높이가 2000미터라면, 다음번 산은 300미터밖에 안 될지도 모릅니다. 약간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가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산에 대한 우리의 숭배였습니다. 따라서 산에서 친구와 내가 사진을 찍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니까요.
데이비드 하지만 실제로 사진을 찍기는 하셨지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산 사진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진에 사람은 안 나옵니다.
데이비드 사람이 없다고요?
아르네 당연히 없습니다. 제 친구가 산을 가리고 있으면, 그는 비켜야만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산은 신성하니까요…… 산은 신성합니다.
데이비드 그 사진들로 산의 무언가를 포착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더 그런가요?
아르네 아닙니다. 그것은 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의 사진을 찍을 수는 없지요.
데이비드 그렇죠. 하지만 무엇을 볼지 결정할 때라 해도, 거기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진 속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은 선생님이니까요. 사진을 찍는 선생님 자신 말이죠.
아르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가급적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산으로서 산을 경험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데이비드 산처럼 되어야 하는군요?
아르네 그렇습니다.
데이비드 등반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도 이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아르네 처음으로 올랐던 봉우리에 제가 가지기를 원했던 그 모든 자질과 속성이 있었습니다. 나머지 봉우리도 어느 정도는 그랬고요. 아주 뾰족하고 폭이 좁은 것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봉우리들은 중량감이 있어야 하고,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용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단단히 제자리에 있어야만 하지요.
데이비드 음. 할링스카르베 산은 빵덩어리처럼 보입니다. 맞죠?
아르네 맞습니다, 당신에게는. 저에게는 그보다는 고원에서 솟아오르는 큰 흰긴수염고래 같습니다.
데이비드 무척이나 노르웨이적인 특별한 모양의 산입니다.
아르네 그렇습니다. 동감입니다. 산의 모양은 그 특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선생님이 여기 처음 온 다섯 살 때 그것을 느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르네 모르겠습니다. 저는 산이 실제로는 땅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닿아 있다고 알았던 것 같습니다.
데이비드 하늘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산들은 할링스카르베 산만큼 하늘과 넓게 닿아 있지 않죠.
아르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산은 좋은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대체물 같은 것입니다.
데이비드 산이 아버지의 대체물이라는 것은 훗날 정신분석을 통해 알게 된 사실 같군요. 그것은 선생님이 본래 잘 원하지 않던 방식, 즉 산을 의인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르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산은 일종의 보호자였습니다. 고요하고 독립적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일러 주면서, 무엇이 가치 있는지 저에게 보여 줬지요…….
데이비드 …… 사진에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