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프롤로그
웹 2.0 시대, 창조하고 소통하라
나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만들 때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그려 보고자 한다. 바라기는, 이 책이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이 지닌 힘에 관해 이야깃거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날 창조성이 날마다 꽃을 피우는 곳이 바로 그곳일 테니. 사람들은 오랜 세월 무언가를 만들어 왔고 만들기에 담긴 뜻을 생각해 왔다. 만들기 그리고 창조를 통한 연결, 곧 ‘커넥팅’이 지닌 힘은 온라인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 일상의 온갖 활동으로 뻗어 가고 있다.
이제부터 내가 펼치려고 하는 이야기들은 앞뒤가 분명하게 이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빅토리아시대의 예술비평가 존 러스킨의 중세 대성당에 대한 논평이 내가 유튜브 동영상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하면, 독자들은 선뜻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또 19세기 사회주의자이자 태피스트리 제작자인 윌리엄 모리스가 120년 전에 웹 2.0 일반과, 무엇보다도 위키피디아에 담긴 만들기와 나누기 정신의 청사진을 그렸다고 하면 여러분은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가톨릭 성직자였던 급진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40년 전에 인간의 행복에 꼭 필요한 조건을 설명했는데, 그것은 오늘날 경제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의 연구와도 꼭 들어맞는다. 우리는 그것을 뜨개질, 게릴라 가드닝, 창조적인 소셜네트워크(SNS)와 관련지어 살펴볼 텐데, 그 순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자수를 ‘저항의 무기’라 일컬은 1970년대 페미니스트 로지카 파커와 뜨개질하는 사람들, 배지 만드는 사람들, 여러 블로거들을 두루 만나 볼 것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우리에게 어떻게 경이로움과 힘, 가능성을 주는지 고민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이 책 영문 원서의 제목이 바로 ‘만들기는 커넥팅이다’(Making is Connecting)이다. 무척 간단한 문장이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만드는 이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이들을 생각하면서 만들기와 커넥팅, 이 두 가지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과정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만들기는 커넥팅이다’라는 제목이 의미 있고 훨씬 만족스러웠다.
만들기가 커넥팅인 이유는 무엇보다 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 무언가 새로운 걸 만들려면 재료나 아이디어 또는 둘 다를 결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 흔히 창조 활동은 어느 순간 사회적 차원으로 이어지고 우리 또한 다른 이들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 무언가를 만들고 그걸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우리가 사회 환경과 물리적 환경에 연결되고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견해에는 반박이 따르고 예외도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이야기를 펼쳐 가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어쨌거나 위의 세 가지가 나의 기본적인 인식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를 고민한 끝에 거둔 열매이므로 짧게나마 그 내용을 먼저 정리하고 넘어가고 싶다.
첫째, 나는 사회학자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삶에 들어와 있는 미디어에 관심을 가졌다. 처음에는 그냥 좋았다. 하지만 15년 전, 아니 10년 전만 해도 사람들에게 익숙한 주요 미디어는 거대 전문 기업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사람들이 기업이 생산한 미디어를 이용하여 무엇을 하는지 연구하자니 조금 비굴해지는 느낌이었다. 꽤 능동적이고 생각이 깊으며 상상력이 돋보이는 활동도 있고 평범한 활동도 있었다. 하지만 창조성을 높이 평가할 만한 활동이 하나도 없었던 까닭은, 그것이 창조적인 작업과 관계가 있더라도 한결같이 ‘다른 사람’이 만든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월드와이드웹이 인기가 치솟으며 본질에서부터 주류가 되었다. 웹은 다양성과 상상력의 세상을 활짝 열었고, 평범한 사용자들과 점점 늘어나는 전문가들이 콘텐츠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웹은 미디어를 만들고 더 나아가 미디어를 쉽게 공유하며 다른 이들과 연결되는 기회를 주었다. 웹이 주는 이 기회는 특징과 규모에서 비교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무척 신나는 연구 주제였다.
둘째, 이렇게 흥미로운 세계는 나 또한 참여할 만한 재미난 곳이었다. 나는 무언가 만드는 것을 늘 좋아해 왔는데, 그렇다고 작품의 관객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웹에서 글과 사진과 그림을, 나아가 웹 사이트 자체를 꾸며서 세상에 내보이는 일은 참으로 쉬웠다. 게다가 반응까지 뒤따랐다. 사람들은 내 웹 사이트를 구경하고 친절한 댓글을 남겼으며 자신들의 웹 사이트에 링크를 걸었다. 이로써 나는 만들기가 커넥팅임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셋째, 나는 앞에서 말한 학문적 관심에서 출발하여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왜 그렇게 하는지 연구하려 했다. 하지만 사람들한테는 별로 재미난 일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저 이야기나 나누면서 내 뜻을 이루자고 ‘인터뷰’를 강요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영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몇 해 동안 ‘창조적인 연구 방법’을 발전시켜 보았다. 연구 과정의 하나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만들어 보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은 비디오, 그림, 예쁜 상자 또는 레고 작품 따위를 실제로 만들며 상념에 빠졌다. 만들기 과정은 곰곰이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 경험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다. 이 새로운 경험은 여러 차원에서 사람의 뇌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목적을 가지고 유도하는 대화에서는 나오기 힘든 통찰력에 이르게 한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보라고 했을 때, 이런 장점이 특히 잘 나타났고 효과도 컸다. 구체적인 얘기는 이 책보다 먼저 펴낸 《창조적 탐험》에 모두 담았다. 이렇게 연구를 하면서 생각하기와 만들기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과정임이 내게 분명하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여러 재료를 만지작거리다가 고르고, 이렇게도 붙여 보고 저렇게도 붙여 보고, 갖고 놀다가 쓸모없는 건 치워 버리면서 작업에 열중해 갔다. 어느새 그것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작품에 가까워졌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완성해 가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발견의 과정이고, 만들기를 통해서 생각을 펼치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시간’을 들여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면서, 사람들은 또렷하게 생각하거나 느낄 기회, 대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기회를 얻었다. 어떤 이미지나 실물을 갖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더욱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연결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얘기하려는 것은 어쩌면 앞의 세 가지보다 중요할 듯싶다. 무엇보다 나는 ‘만들기는 커넥팅이다’라는 아이디어를 스스로 탐색해 보고 싶었다.
웹 2.0, 함께 가꾸는 텃밭
나는 누군가가 월드와이드웹을 발명해 냄으로써 창조 활동이 인간의 삶 속에 갑자기 나타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웹은 평범한 이들이 쉽게 자기가 만들어 낸 창조성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이롭고 신나는 문화 공간을 함께 만들게 해준다. 이 과정을 뒷받침한 것이 ‘웹 2.0’의 등장이었다. 앞으로 이 책에는 웹 2.0이라는 용어가 자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잠깐 ‘웹 2.0’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웹 2.0은 그저 하나의 테크놀로지나 비즈니스 모델도 아닐뿐더러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웹의 후속 편도 아니다. 웹 2.0은 곧 고유의 철학이자 방법론을 의미한다. 나는 웹 2.0을 설명할 때, 내가 직접 레고로 만든 뜰과 텃밭을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로 보여 주곤 한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웹이 등장한 처음 열 해 남짓 동안 웹 사이트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텃밭과 다를 바 없었다. 예를 들어서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웹 사이트가 하나의 밭이라면, 내 웹 사이트(Therory.org.uk)는 딴 곳에 떨어져 있는 밭이었다. 이름이 알려진 시인이 웹 사이트를 만들어 자기가 쓴 시를 올린다면 그 또한 또 다른 밭이 될 것이다. 누구나 웹 사이트들을 방문할 수 있으며, 웹 사이트들은 저마다 정교한 구조 속에 창조적이고 아름다운 콘텐츠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웹 사이트들은 기본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으며 울타리로 가로막혀 있다. 물론 이 모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서 ‘잘못된’ 점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온갖 개인, 크고 작은 집단 또는 조직이 온라인 공간을 꾸며 가는 플랫폼으로 흠잡을 데 없이 기능한다. 바로 이 모델이 우리가 ‘웹 1.0’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에 비해 웹 2.0은 공동 텃밭과 같다. 저마다 자기 텃밭만 가꾸는 게 아니라 공동의 공간에서 함께 어울리며 작업에 힘을 보탠다.
이것이 사실 팀 버너스리가 1990년에 월드와이드웹을 개발할 때 품고 있던 의도였다. 그는 웹 탐색이 검색과 읽기에 그치지 않고 쓰기와 편집으로 이어질 거라 상상했다. 따라서 초창기의 웹은 버너스리의 구상과 다른 것이었고, 최근에 와서야 이 발명가의 뜻대로 웹이 꽃을 피운 셈이다. 그러고 보니 1999년에 나온 팀 버너스리의 책 《월드와이드웹》(한국경제신문사, 2001)을 읽었을 때가 또렷하게 떠오른다. 읽기·쓰기 모델에 관해 읽었을 때, 나는 아이디어는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현실성이 없고 어이없다고 느꼈다. 과연 말대로 이루어질까? 나라면 몇 안 되는 방문자들이 시답지 않은 얘기를 쏟아 놓는 꼴을 보겠다고 몇 시간씩 공들여 웹 페이지를 꾸미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그때까지 네트워크의 힘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는 다른 이들도 대부분 그랬다. 우리는 ‘저기 밖에 있는’ 모든 이들을 ‘구경꾼’으로 여겼다.
온라인 사이트와 온라인 서비스가 이 잠재적 협력자들의 네트워크를 감싸 안을수록 더 힘을 얻게 된다는 생각이 웹 2.0의 핵심이다. ‘웹 1.0’ 모델이 그저 관객들을 웹 사이트로 끌어오는 방송 채널로 인터넷을 바라보았다면, 웹 2.0은 사용자들이 웹 사이트에서 놀도록 만든다. 유튜브, 이베이, 페이스북, 플리커, 크레이그스리스트, 위키피디아 들은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고 거기에 이바지함으로써 존재하고 가치를 드러낸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사용하고 이바지할수록 더욱더 나아질 수밖에 없다. 이 점이 웹 2.0의 핵심이다. 웹 2.0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팀 오릴리는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웹 2.0’의 수준을 네 단계로 배열했다. 이 네 단계(0~3단계) 구조에서 ‘3단계’ 응용프로그램은 ‘넷(net)에서 작동하고, 그것이 사람들 또는 응용프로그램들 사이에서 가능하게 하는 네트워크와 결속으로부터 근본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 이에 반해 ‘0단계’ 응용프로그램은 CD에서도 똑같이 구현되는 프로그램이다. 1단계와 2단계는 0단계와 3단계의 가운데 단계이다.
따라서 웹에 다가가는 방식으로서 웹 2.0은 온라인 네트워크 구성원들의 집합적 능력을 이용하여 특별히 영향력 있는 자원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웹이라는 영역을 넘어서 생각하면, 웹 2.0을 좀 더 확대해서 적용해 보는 것도 꽤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의 열정이 모여 이루어지는 집합적인 활동, 그리고 그 부분들의 총합보다 훨씬 훌륭한 무언가가 되는 모든 공동의 활동에 대한 은유로서 말이다.
찰스 리드비터의 《집단 지성이란 무엇인가》(21세기북스, 2009)와 클레이 셔키의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갤리온, 2008), 《많아지면 달라진다》(갤리온, 2011) 같은 책은 위키피디아를 본보기로 들고 있다. 위키피디아는 자발적인 협력자와 전문가가 온라인에서 만나 함께 만든 방대한 백과사전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힘을 보태지 않았다면 위키피디아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공짜로, 아무런 대가 없이 힘을 보탠다. 물론 참여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나 위키피디아 항목의 작업 기록 어딘가에 사용자 이름이 오름으로써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뿌듯함은 별개로 하자. 찰스 리드비터와 클레이 셔키는 이어서 백과사전을 만든 위키피디아의 본보기가 다른 모든 분야에도 두루 퍼져 나갈 수 있는지 살펴본다. 이때 위키피디아가 의미하는 것은 높은 참여도와 부지런한 협력이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늘 관심을 두고 있는 건 ‘다른 모든 분야’가 아니라 ‘온라인의 다른 모든 분야’이다. 위키피디아는 참여도가 무척 높고 부지런한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협력이다. 하지만 사실 중요한 은유의 도약은 웹 2.0을 넘어 실생활로 나아가는 데에 있다. 위키피디아로 다른 인터넷 서비스를 해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와 그 복잡한 구조를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에서 웹 2.0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이미 친숙해진 만들기와 공유, 협력이 뜻하는 바를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프라인과 온라인 활동과 관련하여 더 넓은 맥락에서, 더 큰 문제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다시 말해 가상의 온라인 사교 활동을 넘어서 현실의 사회문제에도 유효한 것인지 알아본다. 이는 우리가 ‘가만히 앉아 지시를 받는’ 문화에서 벗어나 ‘만들고 행동하는’ 문화에 좀 더 다가가고 있다는 주장 또는 바람으로 이어진다. ‘가만히 앉아 지시를 받는’ 태도는 대개 학교에서 주입되고, 겉만 번지르르하고 반짝거리는 새로운 소비자 문화의 마력과 텔레비전에 의해 굳어진다. ‘만들고 행동하기’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슬로건이다.
수동성, 능동성, 창조성
언제부턴가 교육이 학교 제도로 제도화되면서 배움은 교사가 이끌어 가는 과정이 되었다. 교사는 지식 조각들을 어린 학생들의 머릿속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교육에 이런 공식만 있어 온 건 아니다. 학생들이 자기만의 눈으로 예술과 시, 과학을 바라볼 수 있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교사도 있고, 또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혁신적 교육 사상이 싹을 틔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학교교육의 틀은 지식을 통째로 학생들에게 주입시킨 뒤 학생들이 그 지식을 얼마나 받아들였는지 나중에 시험을 치르는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영국은 1988년에 국가 교육과정이 도입되면서부터 이런 방식이 자리를 잡았다. 이에 따라 7세, 11세, 14세 아동은 시험을 치러야 했고, 16세에는 중등교육 학력평가 시험을, 18세까지는 고등교육 학력평가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영국 전체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기록하고 ‘학교 순위’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장 잘 도와주는 길은 시험에 대비하여 ‘정답’을 학생들에게 꼭꼭 채워 주는 것이 되었다. 교사와 언론인 같은 이들은 안타깝게도 이런 교육 방법의 한계를 몰랐다. 오히려 보수 언론이 드디어 ‘학업 수준’을 감독하고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면서도, 이런 학력평가와 성적 순위를 도입함에 따라 교육이 질이 낮아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학력평가 점수가 점점 높아지기는 했으나, 교육의 질은 갈수록 낮아졌다. 마침내 14세 학생이 치르는 학력평가가 2009년에 사라졌다. 하지만 폐지 목적은 학생들의 짐을 덜어 준다기보다 시험 제도에 필요한 행정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2001~2002년에 ‘낙제 학생 방지법’이 발의되고 제정되었다. 법의 명칭은 그럴듯해 보였지만, 이 법이 시행됨으로써 미국의 학교는 반드시 정기적인 학력평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영국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시험 점수는 높아지는 듯한데 학습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고 비판하는 단체가 많아진 것이다.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이 제안한 교육제도 개선책은 재정 지원 방식의 중대한 변화를 포함하고 있지만, 정기적인 학력평가에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학력평가는 《뉴욕타임스》가 ‘학생들의 학력평가 결과를 교사들에게 책임 지우려는 정책’의 부활이라고 보도했다시피, 교육의 중심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20세기는 단연코 ‘가만히 앉아 지시를 받는’ 시대였다. 더욱이 후반기로 가면 여가라는 것은 집 안에 틀어박혀 밖에 나가지 않고 오랜 시간 붙박이처럼 같은 자리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이건 비관적인 시각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이다. 2010년에 미국 사람들은 하루 평균 네 시간 반이 넘도록 텔레비전을 보았다. 이전에도 수십 년 동안 줄곧 그래 왔다. 영국은 하루 네 시간이 조금 안 된다.9 물론 대단한 시간이다. 또 이 시간은 평균값이므로 이보다 적게 보는 사람들에 비해 평균 시간보다 많이 보는 사람들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마셜 맥루언의 유명한 정의는 다채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이 말은 무엇보다도 텔레비전 같은 하나의 미디어가 우리 삶에 들어와서 삶의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미디어가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건, 미디어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내용이라기보다는 미디어가 우리 일상을 다시 짜도록 만드는 방식 때문인데, 그 방식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매우 뛰어난 통찰이다. 흔히 우리가 미디어 ‘콘텐츠’를 갖고 생각하는 미디어의 ‘영향’은 판단하기가 몹시 어렵고 대체로 서로 관련이 없으며 다른 영향력들과 뒤섞여진 채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방송국은 더욱더 재미있고 유익한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에 상당한 삶을 소비하게 만든다. 이것을 생각하면 텔레비전이 전반적으로 미친 ‘영향’은 확실히 ‘어마어마한’ 것이다.
날마다 평균 네 시간씩 텔레비전을 보다니,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과 비교하면 인류가 시간을 소비하는 방식이 놀라우리만치 크게 바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텔레비전이 잡동사니로 가득하다거나 사람들이 텔레비전만 보는 바보라는 말은 아니다. 날마다 텔레비전에서 유익하고도 재미난 프로그램을 네 시간씩 보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여가를 창조적 또는 사교적으로 잘 보내는 방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한 지나간 세월에 견주었을 때 인류가 여가를 보내는 방식이 눈에 띄게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사람들이 여가를 이처럼 수동적으로 보내도록 한몫 거드는 것이 바로 소비자 문화이다. 1940년대에는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그 뒤로도 많은 비평가들이 줄곧 말해 왔듯이, 현대자본주의가 성공을 거둔 건 우리를 위협하거나 우리 의지를 억누른 채 억지로 산업의 수레바퀴에 올라타도록 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편리하고도 상큼한 물건들을 마구 쏟아 낸 뒤 우리에게 써 보게 하고 가게에서 구입하면 된다고 살살 꾀었던 것이다. 그 상품들은 행복은 아닐지언정 우리에게 만족을 주었다. 예쁘게 포장된 물건의 유혹에 무감각한 사람은 거의 없다. 새로운 느낌과 반짝거림은 적어도 한순간 고단함을 잊게 해준다.
‘페티시’라는 개념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페티시는 성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여기에서 그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페티시란 특별한 사물에 집착함으로써 불안을 무의식적으로 극복하는 걸 뜻한다. 마르크스의 경우 페티시는 상품의 가치가 사회적 가치라는 걸 잊고서 그것이 독립적이고 실재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방식을 설명한다. 서로 연관된 이 두 개념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페티시를 보편적이고도 일상적인 방식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것은 소비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기쁨을 얻고, 그런 행위가 어리석거나 무분별하지만 여전히 기쁨을 준다는 걸 알며, 그 기쁨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다시금 잊어버리는 방식이다. 이 두 개념 사이에서 텔레비전과 소비 지상주의는 사람들을 무감각하고 ‘만족스런’ 몽상에 빠뜨린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 몽상 속에서는 당연하게도 환경오염을 비롯한 사회문제들이 골치는 아프지만 먼 일로, 무엇보다도 ‘다른 누군가의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좀 더 낙관할 수 있는 이유는 ‘만들고 행동하는’ 문화에 나날이 참여가 높아지는 현상이다. 이런 태도는 ‘가만히 앉아’ 있는 수동성을 거부하고, 창조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개인이 성장하는 기회를 좇는다. 2008년 교육평론 저술 《학교가 왜 필요한가?》에서 가이 클랙스턴은 일부 교사들이 ‘가만히 앉아 지시를 받는’ 학교 문화를 거부하고, 학생들에게 만들고 행동하는 것과 관련한 과제를 내주고 있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함께 어울려 질문을 던지고 서로 다른 탐구 전략을 내세우며 자기만의 해법을 찾아간다. 배움이란 것이 모든 이가 참여하는 쉼 없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교사들도 이를테면 벌을 치거나 악기를 배운다든지 하면서 학습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이런 교실은 칠판에 ‘가장 올바른 답’들만 빼곡히 적혀 있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 연구와 실험, 나아가 그릇된 실험 결과마저 감싸 안아 주는 분위기를 만든다. 그리고 ‘직접’ 체험하며 배우고 탐구하고 질문하는 태도를 기른다.
미디어의 경우도 인터넷에 바탕을 둔 상호작용 쪽으로 분명히 옮겨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시간을 쓰고 관계를 맺는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 사람 가운데 적어도 4분의 3이 일상적으로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고,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일상적인 사용자이다. 케이서가족재단은 미국 전역의 젊은이들을 조사한 연구 결과를 2010년에 자료집으로 펴냈다. 이 연구에 따르면, 12~18세 청소년 가운데 74퍼센트가 소셜네트워크 웹 사이트에 프로필을 올려놓았고, 28퍼센트가 블로그를 개설했으며, 25퍼센트는 비디오를 포스팅했다. 영국도 마찬가지로 온라인 소셜네트워크는 매우 인기가 높아, 페이스북 같은 곳에 계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전체 인구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다. 해마다 블로그를 개설하고 온라인 토론에 참여하며 정보와 음악, 사진을 서로 나누고 자신들이 만든 비디오를 업로드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휴대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일이 늘어나는 주요 원인은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서 의견과 자료를 나누고자 하기 때문이다. 웹 2.0의 인기는 이 대목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들이 사용하기 쉬운 온라인 도구의 사용법을 배우고 서로 가르쳐 주며 함께 자료를 만들고 나눔으로써 사람들은 전자 미디어로 무엇을 하고 거기서 무엇을 얻는지가 완전히 달라졌다. 또한 온라인에서 힘을 보태 함께하는 것들의 ‘범위’도 놀랄 만큼 다채로워졌다. 한편 학계는 정치 활동이나 언제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 같은 훨씬 ‘진지한’ 활동에 좀 더 관심을 두는 편이다. 하지만 온라인에는 그야말로 모든 것과 관련된 커뮤니티가 있다.
오프라인에서는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비롯해 그것과 관련된 클럽, 전시회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잡지 《메이크》가 소개하는, DIY 기법과 기계, 로봇공학과의 연계 작업도 관심을 끌고 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소비하는 물건의 양을 줄이고 다시 사용하거나 재활용하는 등 새로운 길을 찾으려 한다. 이를테면 트랜지션 타운 운동은 공동체가 힘을 모아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찾아가도록 용기를 북돋웠다. 그리고 곧 살펴보게 되겠지만, 웹은 오프라인 활동에서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 조직의 도구로서 중요한 노릇을 해왔다.
일상에서 창조하라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만드는 사람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보람을 준다. 앞으로 나는 이 책에서 ‘창조성’이란 낱말과 ‘일상의 창조성’이란 구절을 아무 거리낌 없이 쓸 것이다. 창조성을 명쾌하고도 단순하게 정의하는 건 즐거우면서도 때로 길이 가로막혀 답답한 일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그 고민을 시작하면서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해 나가 보도록 하겠다.
먼저, 다른 이들은 ‘창조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아마도 오늘날 창조성 연구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일 것이다. 그의 연구서 《창의성의 즐거움》(북로드, 2003)은 더없이 창조적인 이들, 그러니까 발명과 창조로 노벨상을 탄 이들을 비롯하여 창조자로 이름을 날린 이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그래서 그의 결론은 구태의연하기도 하고 엘리트주의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근거만큼은 충분하다. 칙센트미하이는 사회학적으로 창조성에 다가갔는데, 그 방법론은 결코 구태의연하거나 관습적이지 않다. 그것은 창조적 ‘천재’라는 고전적 인식을 거부하고 우리가 창조성이라 부르는 것이 몹시 협력적인 환경에서 나오는 것임을 드러낸다. 창조적 결과물은 번갯불이 치듯 찰나에 영감을 얻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오랜 세월을 두고 물리학, 시, 건축 또는 그 어떤 분야에서든 ‘상징적 영역’에 통달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해 온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개인, 집단, 조직의 따뜻한 격려가 한몫을 거든다. 칙센트미하이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다시 말해 문화와 과학,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창조성이 어떻게 샘솟는지 사회학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데 관심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적어도 내가 이 책에서 정의하는 창조성은 문화 속에서 하나의 상징적 영역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새 노래, 새 아이디어, 새 기기는 모두 창조성과 관계가 있다.
창조성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인정하고 우러러본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창조성은 상징적 규칙을 품고 있는 문화, 상징적 영역에 새로움을 보태는 사람 그리고 혁신을 인정하고 입증하는 전문가들의 현장, 이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체제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창조적인 개인은 이 세 요소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칙센트미하이의 정리는 창조가 일어나는 특정한 배경과 그 영역에서 활동하는 다른 주요 인물들에게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숲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부러져 쓰러지는 소리는, 숲속에 그 소리를 듣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기는 수용적인 애호가가 없으면 사라지고 만다.
이렇게 되면 창조성의 기준이 너무 높아진다. 먼저 눈에 띄게 독창적인, 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는 듯, 눈에 띄게 독창적인 것임을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더 나아가 이 다른 이들은 ‘그저 그런’ 사람들이어서는 안 되고, 인정받고자 하는 영역의 거물들, 선구적이고 이름난 사상가들이어야 한다. 하지만 삶이 만만치 않은 이유는 어떤 특정 영역에서 이미 유명해진 인물들이 자신의 높은 지위에 연연해 앞길이 훤한 새 인물을 구태여 따뜻하게 맞아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던가.
이는 창조성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고, 칙센트미하이는 그 정확한 렌즈로 세상에서 인정받는 중요한 혁신을 낳는 사회 조건을 분석해 냈다. 창조성을 다룬 다른 저자들 또한 칙센트미하이의 정의와 접근법을 따라 ‘더 낮은 수준의’ 창조성을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두드러진 문화적 또는 과학적 혁신은 어떻게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에 도움이 되는 렌즈가, 이 책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일상적인 창조성을 연구하는 데에 꼭 들어맞는 렌즈는 아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창조가 얼마든지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우리 가운데 누구든, 예상 밖으로, 하지만 놀랍고도 창의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어떤 성취를 두고 그것이 노벨상을 탔기 때문에 ‘창조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평생 한두 번밖에 이루지 못할 일이라서 창조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창의적인 인간이므로 창조는 오히려 우리가 더 자주 하는 어떤 것이다. 이런 넓은 의미에서, 창조란 어떤 일을 하는 방법, 우리가 글로 쓰고 만들어 내는 많은 것들, 경영이나 자기표현 그리고 재치나 통찰력 넘치는 말하기에 관해 우리가 품고 있는 일상적인 생각들까지 아우른다.
이렇게 일상적인 수준까지 내려오면 우리가 창조라 부르는 것의 경계가 조금은 흐릿해진다. 예를 들어 내가 공룡 모양으로 생일 케이크를 만들었다고 하자. 아마도 나는 무언가를 ‘창조’한 기분이 들 것이다. 여기에는 독자들도 동의하리라. 하지만 내가 10년 동안 똑같은 공룡 케이크를 만들어 온 생일 케이크 전문가라고 털어놓는다면 독자들은 그것을 창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내 창조성에 대한 평가는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 이를테면 가게에서 산 장식물로 공룡의 눈과 비늘을 꾸민 것을 독자들은 ‘반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내가 인터넷에서 다른 공룡 케이크 사진을 보고 따라한 것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쉽게 집착한다. 하지만 《창조적 탐험》에서 나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고자 하면 논쟁은 끝이 없다. 어떤 것은 창조적‘이고’ 어떤 것은 창조적‘이지 않다’고 하는 주장이 맞선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창조성이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고, 더욱 중요하게는 그것이 사람의 본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측면의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성을 다룬 연구서의 대부분은 사실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표적인 인물들에게서 다채로운 정의를 이끌어 낸 찰스 럼스덴은 합리적으로 이렇게 정리한다. “내가 연구서에서 본 창조성의 ‘정의’는 …… 그 창조자들의 독특한 흔적을 품고 있으면서도 어느 만큼 서로 일치하는 면이 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능력이 바로 창조성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3장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이 접근법이 안고 있는 문제는 최종생산물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이다. 창조는 ‘과정’이고 ‘느낌’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창조는 새로운 터전을 내부에서 닦는 일이 된다. 어디론가 가서 전에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로부터 다른 이들이 인정해 주는 결실에 다다르는 것이다. 하지만 결실보다 중요한 건 창조 과정 자체이고, 창조성은 내부로부터 가장 잘 입증된다.
여기서는 이 정도로 얘기해 두자. 3장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창조성을 새로이 정의하면서 이런 문제들을 극복해 나갈 것이다.
이 책은 일상의 창조성이 지니는 가치를 말하고자 한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 실생활에서 겪는 경험 그리고 오늘날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온라인의 창조성을 모두 다룬다. 하나의 영역과 다른 영역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전통적인 공예와 DIY 활동이 지니는 가치와 윤리, 이로움에 관해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들어봄으로써 오늘날 웹 2.0의 창조성에 관해 배울 수 있으리라. 또 그 반대 방향으로도 통찰을 얻게 되리라. 이를 위해 관련된 이론과 철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은 모두 근거가 튼튼하고 현실적이며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이 과정 자체가 특별한 창조 활동의 경험으로 이어져 나간다면 좋겠다.
하지만 이 책은 몇몇 기술자, 장인, 블로거, 유튜브 제작자들에 관한 사례연구 모음집이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의 중심 내용이 아니다. 다양한 사례를 만날 곳은 많다. 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나서 거기서 추려 낸 일화를 바탕으로 책을 쓰고 싶지는 않다. 이 책은 자서전과 일반론을 한데 엮은 책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책을 읽고 싶은 독자들이 있다면 훌륭한 책 두 권을 추천하고 싶다. 이 두 권은 내가 이 책을 탈고했을 즈음 출간되었다. 철학자이자 오토바이 수리공인 매슈 크로퍼드의 《손을 써서 일하기》와 잡지 《메이크》의 편집장인 마크 프런펠더의 《손으로 만든》이 그것이다. 앞의 책은 미국에서 《일하면서 배우기》로 출간되었다. 또 리처드 세넷의 뛰어난 저작 《장인》(21세기북스, 2010)도 함께 추천하고 싶다. 세 권 모두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의 소중함과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지혜와 감정을 알려 준다. 또한 우리가 물질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 세계를 바꾸어 나가기 위해서는 그 물질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책에도 어느 만큼은 일화가 담겨 있고 자전적인 내용도 조금 들어 있지만, 내가 중요하게 말하고 싶은 건 무언가를 만드는 일의 소중함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우리 스스로 ‘미디어’ 문화를 만들고 함께 나누는 일을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텔레비전 방송국이나 인쇄기 같은 전통적인 미디어를 손에 넣는 일이 아니라 저음질 유튜브 동영상, 특이한 블로그, 스스로 만든 웹 사이트 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예나 목공처럼 꼭 ‘손으로’ 다듬고 빚는 일은 아니지만, 나는 이런 것들 역시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과 다를 바 없는 의사소통의 한 형태이자, 더 나아가 거기에 새겨지는 인격과 개성, 고유한 본성을 매개로 우리를 다른 이들과 연결시켜 준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나는 수많은 창조 사례를 샅샅이 살펴보지 않는다. 나는 “일상의 창조성이 왜 중요한가?”라는 좀 더 폭넓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것은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하며 따라서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내 의도를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스스로 ‘비판적’이고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에게 이런 생각을 내비쳤을 때, 학자들은 내가 하는 일을 기껏해야 곁들이 정도로 생각한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학자들이 정부의 방송 규제나 정당 관련 문제를 비롯하여 ‘현실의’ 문제들과 씨름하는 동안, 나는 사람들이 날마다 어여쁜 물건이나 재미난 비디오 소품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이런 일들은 즐거운 것이긴 하지만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와는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은 굳이 갈래를 짓자면 ‘문화적’인 일이다. 사람들이 텔레비전에서 시시한 오락물을 보는지 아니면 그 시시한 오락물을 직접 만드는지, 스스로 꽃을 기르거나 장난감 또는 장갑을 만드는지 아니면 슈퍼마켓에서 그것들을 사는지, 직접 노래를 작곡하는지 아니면 남의 노래를 구입하는지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만들어진 결과물 하나하나가 퉁명스러운 관찰자의 눈에는 사소해 보일지라도. 어쩌면 독자들도 내가 위에 든 본보기들이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 아님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시시한 오락이나 꽃, 장갑, 노래는 마음에서 지워 버린다 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기업이 공급하는 물건을 소비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만들기를 선택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하다. 조금 더 확장하자면, 그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온전하고도 새로운 방식에 이르는 길이고, 더 나아가 우리가 세계를 대하는 방법에서 실제로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일상의 창조라는 생각이 더욱 발전하여 뜻있고 정치적이고 아주 중요한 본보기가 된 사례가 바로 트랜지션 타운 운동이다. 기후변화가 심해지고 인류가 크게 기대고 있는 석유가 고갈됨에 따라서 앞으로 인류는 참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는 ‘창조적’이므로 함께 어울려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 바로 트랜지션 타운 운동이다. 함께 어울려 산다는 생각으로 환경에 해를 끼치거나 다 써서 사라지는 것에 크게 기대지 않는, 새롭고도 유쾌한 삶의 방식을 계획하고 생각을 모으면 인류는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운동의 취지이다. 낙관주의와 창조성을 바탕으로 한 이런 생각이 현실로 실현되고 있으며, 지금도 트랜지션 타운 운동은 널리 퍼지는 중이다. 로브 홉킨스의 《트랜지션 입문》, 션 체임벌린의 《트랜지션 발전 과정》 같은 책들과 웹 사이트 http://www.transitionnetwork.org는 트랜지션 타운 운동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트랜지션 타운 운동은 이 책의 생각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훌륭한 본보기이다. 하지만 그다지 ‘정치적’인 콘텐츠가 담겨 있지 않은 온라인 비디오나 만들기 사이트, 집에서 벌이는 일상의 이벤트, 전문교육을 받지 않는 이의 예술적 시도, 뜨개질로 올빼미를 뜨고 태양열 발전으로 빛을 내는 전구로 눈을 다는 사소한 노력, 그리고 대량생산된 물건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모든 노력 또한 이 책에선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트랜지션 타운 운동의 핵심 낱말 가운데 하나인 ‘복원력’과 ‘창조적 역량’을 갖추어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것이다.
이 책은 첫머리에서 인터넷은 잠깐 뒤로 미루고, 무언가를 만들려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철학적·정치적·실용적 해설을 먼저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2장에서는 빅토리아시대의 장인이자 사상가인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3장에서는 오늘날의 만들기와 DIY 철학, 활동, 동기를 살펴본다. 4장에서는 다시 인터넷으로 돌아가서 온라인 환경에서 ‘만들기는 커넥팅’임을 생각해 본다. 그다음으로 일상의 삶에서 사회적 결속과 협력적 프로젝트의 소중함으로 눈길을 돌린다. 5장은 행복을 다룬 오늘날의 연구 작업을 고찰하고, 6장은 다른 이들과 끈끈하게 이어 주는 사회적 접착제인 ‘사회자본’을 살펴본다. 7장은 창조적 표현과 변화를 이끌어 내는 도구를 이야기하면서 이반 일리치의 철학을 충분히 살펴볼 것이다. 8장은 웹 2.0에 대한 비판과 옹호에 눈을 돌려, 어떤 주장에는 동의하고 어떤 주장에는 반대하게 되는 이유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9장은 이 모든 논의를 간추려 결론을 내린다. ‘만들기는 커넥팅’의 다섯 가지 중심 원리를 정리하고, 미디어, 교육, 노동, 정치와 환경의 관점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
먼저 밝혀 둘 것이 있다. 본문에서는 웹 사이트 주소인 URL을 쓰지 않았다. 예를 들어 유튜브를 이야기하면서 굳이 ‘(www.youtube.com)’이라고 따로 쓰지 않았다. 검색으로 사이트를 찾아가기가 무척 쉽기 때문이다. 또 내가 프리사이클을 이야기할 때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독자들이 사는 나라의 프리사이클 사이트일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 스스로 검색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프리사이클 사이트를 찾아가길 바란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는 URL은 표기했다. 예를 들어 http://www.landshare.net은 http://www.landshare.com과 헷갈리지 않도록 써 두었다.
이 책의 웹 사이트 주소는 http://www.makingisconnecting.org이다.
사이트에는 비디오, 보충 자료, 관련 링크, 그 밖에 정보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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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데이비드 건틀릿 David Gauntlett
웨스트민스터대학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이자 커뮤니케이션미디어연구소(CAMRI) 공동대표. 뛰어난 연구 업적으로 예술인문연구평의회(AHRC)와 공학과학연구평의회(EPSRC)에서 여러 차례 연구 지원을 받았고, BBC, 레고, 테이트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창조적인 기관과 공동으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미디어와 정체성을 다루는 웹사이트 Theory.org.uk와, 창조성과 시각 미디어를 연구하는 웹사이트 ArtLab.org.uk를 운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움직임의 경험』(Moving Experiences, 1995), 『미디어, 젠더 그리고 아이덴티티』(Media, Gender and Identity, 2002), 『창조적 탐험』(Creative Explorations, 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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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수영
진실한 책 한 권이 가진 힘을 믿는 전문번역가이다. 한 권의 책을 옮길 때마다 많은 독자들과 연결되고 소통하는 즐거움을 쌓아 나간다. 『조화로운 삶의 지속』, 『사라진 내일』, 『사코와 반제티』, 『새로운 빈곤』, 『황금의 땅, 북극에서 산 30년』,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 『누가 99%를 터는가』를 우리말로 옮겼고, 이뉴잇 옛이야기를 엮은 『빛을 훔쳐 온 까마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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