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을 대신하며
여기는 감옥, 나는 나비다
유치장 생활도 벌써 6일째. 내내 잠만 잤다. 이틀 전 들어온 세관법 위반 관련 사내도 내내 잠만 잔다. 아직 인사도 못 해봤다. 어제 마지막 쫑파티를 하러 부산에 왔던 희망버스 ‘폐인’들은 모두 잘 돌아가셨는지 궁금하다. 구속영장도 떨어졌으니 나도 이제 다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가야 한다.
사실, 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 섞인 기대들도 있었다. 김진숙 씨와 그의 동료들도 크레인에서 내려왔고, 그동안 무지한 검경에 의해 체포 영장 집행과 구속 영장 신청이 이어졌지만 모두 기각됐다. 주체들도 다 나오는데 연대했던 사람들이야, 하는 자연스런 생각들이었다.
무엇보다 사태의 원인이었던 정리해고 문제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그 부당함이 어느 정도 밝혀졌기에 희망버스 운동을 과도하게 탄압할 명분이 없어졌다는 판단도 있었다. 한진중공업 노사는 부속 내용으로 ‘희망버스 관계자들에 대한 민형사상 고소고발을 취하’한다고 합의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2011년 11월 15일 오전 11시, 5개월여에 이른 농성과 수배 상태를 접고 공개 기자회견 방식을 통해 밖으로 나섰을 때도 경찰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도 평화롭게 서울역으로 이동해 고속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했고, 우리를 환영해주러 나온 부산 희망버스 분들과 함께 오케이오병원에서 85호 크레인 농성자들과 상봉 후 부산 영도경찰서로 향했다. 그 뻘쭘함이라니.
이렇게 평화로울 일을 몇 달 동안 ‘체포’하겠다고 벼른 까닭이 뭔지가 의문이었다. (공지영 소설가와 백원담 교수는 부산역에서 우리를 낚아챌지 모른다며 열차 내리는 곳 바로 앞까지 나왔다. 그 따뜻함에 감사드린다.)
그러나 역시 기대는 금물. 검찰은 출두 당일 기자회견 자료까지 들이대며 나와 진보신당 비정규노동실장인 정진우 씨를 잡아넣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내보내주면 다시 희망버스를 타고 쌍용차로 갈 사람들이라고, 문제가 해결이 되었는데도 19일에 희망버스가 오고, 다시 그 자리를 승리대회로 만들 사람들이라고 왜곡하기도 했다.
19일은 그간 고생했던 크레인 농성자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희망버스 승객들이 수변공원에 모여 마음과 음식을 나누자는, 그야말로 집회도 시위도 아닌 평화로운 사람들이 만나는 마당일 뿐이다.
난 무엇보다 우리가 나갈 수 없는 까닭이 쌍용자동차로 희망버스 승객들이 가주면 좋겠다는 발언 탓이었다는 게 가슴 아프다. 간 것도 아니고 가자고 한 얘기 정도가 구속 사유가 되는 것도 그렇고, 19명이라는 희생자가 나온 사회적 조문의 장소를 언급했다는 게 무슨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되는 것도 웃기다.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등 일부 언론들에서는 아예 대놓고 희망버스는 쌍용으로 가야 한다고 쓰고 있다. 트위터리안들은 한 달여 전부터 도배 수준이다. 이렇게 희망버스 배후들, 기획자들의 폭은 넓어졌다. 더더욱 희망버스에는 수만여 명의 승객들이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탑승했기에 누구만이 운전사요, 기획자며, 어떤 이들은 지시와 동원의 대상이었다고 말할 수 없음에도 자꾸 무슨 조직 사건 만들 듯이 있지도 않거나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일이나 관계를 부풀리고 왜곡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아니면 기획단의 몇몇 ‘깔깔깔’들이 맘 좋게 내가 다 조직했고, 지시했고, 동원했으니 ‘독박’ 쓰겠다고 해서도 안 되는 운동인 것이다. 특히나 한 개인들의 구체적인 혐의에 대해서도 아직 그 법적 논거를 다투지 않은 상태에서 희망버스 전체를 무슨 범죄단체라도 되는 양 함부로 얘기하는 것은, 그리고 그 참여 여부가 걱정되기에 구속 영장을 발부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인권과 법리조차 망각한 반헌법적 행위인 것이다.
하여튼 이래저래 다시 얼마 동안은 국민 세금을 축내며 부산의 구치소 신세를 져야 하나 보다. 생각해보니 지난 몇 년 동안 집이 따로 없었다. 병원이거나 요양지이거나 농성장이거나 수배처이거나……. 이젠 더는 갈 곳이 없어 빵이 거처가 되는가 보다. 뭐 별 특별한 일도 아니다.
“대공분실 세 번 가고, 징역 두 번 살고, 수배 5년 지내다 보니 머리 희끗한 쉰셋이 되어 있더라”는 저 ‘김진숙’도 있지 않는가. 새도 둥지를 틀지 않는 35미터 철 구조물 위에서 309일을 살다 내려와야 하는 새로운 인류도 있지 않는가.
이렇게 슬프고 가혹한 일도 ‘승리’라고 눈물 콧물 찍찍 흘려야 하는 우리, 가파른 삶들을 생각하면 별 힘든 일도 아니다. 지금도 ‘전쟁 같은 밤일’을 치러야 하는 무수한 노동하는 삶들, 최소한의 존재 조건도 얻지 못한 채 ‘비정규직’이라는 신종 노예의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하는 900만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면 특별히 가혹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슬픈 것은, 다시 한순간의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지나갔고, 그 시간 동안 더 충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수 있었을 많은 순간들을 놓치고 왔다는, 반성과 후회다. 모두의 일이라는 집단논리로 다시 어떤 한 소중하고, 여리고, 오히려 살아 있는 가슴들을 죽인 적은 없었나. 작고 옅고 소박한 참여가 어떤 이에겐 최선임을 함부로 하진 않았나.
결과라는 한 길에 빠져 과정이라는 수만 갈래의 길을 무시하진 않았을까. 왜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양보하거나 나눠서도 할 수 있는 일을 무겁고 어렵게 했을까. 오만가지 안타까웠던 순간들이 아쉽고, 아깝다.
답답하긴 하지만 갇혀 사는 것도 다르게 생각해보려 한다. 도대체 나는 지금 어디에 갇혀 있고, 어디에서 자유로운가. 따져보면 눈앞의 현상과는 전혀 다른 진단이 나온다. 내가 아직도 답답한 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무지한 철창 몇 가닥 때문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이곳은 오히려 내 해방터이고, 과분한 수양처이고, 잠깐의 휴식처이다.
지금 내가 혹독하게 갇혀 있는 감옥은 ‘나’라는 이 지지리도 못난 에고의 감옥이다. ‘너’라는 집착의 무덤이다. 현상 앞에서 늘 본질적 물음들을 후퇴시키는 삶의 보수주의이고, 내 안에 도사린 어떤 역사와 진보에 대한 패배의식이다. 결코 깨끗하게 털어내버리지 못하고 음습한 내 영혼이 기숙처로 삼는 이 뿌리 깊은 자본의 문화, 가부장제의 문화이다.
실상 내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이런 일상의 달콤한 감옥으로부터 내가 탈출을 감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탈을, 다름을, 전복을 꿈꾸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문 앞에서 내가 나의 탈출을 게으름과 미련으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일상의 감옥을 부숴야 한다. 내 의식을 꽁꽁 묶어두고 있는 이 무지를, 게으름을, 관습적 틀을, 두려움을 깨부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순해지고 편해진다. 그래서 구속이다, 아니다로 그들이 묶을 수 있는 것은 미안하지만 단 한 가지도 없다.
오히려 이 시간들이 고맙고 감사하다. 그들은 내가 더 문화적으로 단련될 수 있는 시간을, 인간적으로 더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을 내게 주었다. 이미 내 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어서도 그렇지만, 이런 단순 감옥으로는 묶을 수 없게 벌써 나는 다양한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시공간들 속에 무한히 열려 있다.
처음으로 돌아오자면 여하튼 희망버스가 계속 달리자고 하는 한 난 아마도 계속 이곳에 잡혀 있어야 하나 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좋다. 희망버스가 첫 마음처럼 가볍고 경쾌하게, 무슨 정연한 논리와 정세가 아니라 사람의 뜨거운 마음들로 연료를 채워, 숫자를 떠나 쌍용으로 재능으로 콜트콜텍으로 현대차 비정규직 현장 등으로 씽씽 달리면 좋겠다.
무엇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이 아니라, 연대가 필요한 곳에 그냥 연대하러 가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그 간명한 마음들이 살아나면 좋겠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게 무슨 죄냐고 무슨 잘못된 일이냐고, 그리고 그게 무슨 그리 큰 어려움이냐고…….
국민의 1퍼센트도 안 되는 재벌들이 독점하고 있는 99퍼센트의 사회적 자산들이 원래의 사람들 몫으로 나눠지기만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현대 민주주의가 그나마 실험된 게 몇백 년인데 계속 이런 내용적 봉건영주들의 시대를 가만히 놔둘 거냐고…….
이런 세상을 놔두고 어떻게 우리 아이들에게 더하기, 빼기의 단순 정의를 가르치고 도덕을 얘기할 거냐고 사람들이 마구 얘기하면 좋겠다. 희망버스를 출발시켰던 우리 지역에서만큼은 다시는 조남호 같은 이들이 없게 만들겠다는 지역 희망의 연대운동들이 만개하면 좋겠다.
아, 이런 좋은 꿈들을 꾸다 보니 갇혀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정리해고는, 비정규직화는 어쩔 수 없다는 이 시대의 감옥에서, 모든 억압과 좌절의 감옥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나오는 꿈을 꿔본다.
2011년 겨울
송경동
3부. 이상한 나라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산재 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앉아 있다
또 뭐라고 써야 하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잘린 손가락과 발들을 위로하면 될까
강압으로 목과 허리에서 탈출한 디스크 추간판들을 위로하면 될까
모든 부러진 뼈, 찢어진 눈, 터진 머리, 이완된 근육
닳아진 무릎, 손상된 폐를 위무하면 될까
압사, 추락사, 감전사, 질식사, 쇼크사, 심근경색, 유기용제 중독으로
하루에 여덟 명씩 일수 붓듯 착실하게 죽어간다는
모든 산재 열사들을 추모하면 될까
식당아줌마, 중국집배달부, 퀵서비스, 가정노동
모든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에게도
180만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도
농업노동자들에 불과한 영세농민들에게도
산업폐기물이 된 노령인들에게도
산재보험 적용을 해달라고 간구하면 될까
산재 민간감시원을, 산재요양 기간과 적용 범위를 좀 더 늘려달라고
산재 주무 기관을 좀 더 민주화시켜달라고 청원하면 될까
산재 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을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앉아 있다
사무직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서비스직 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전문직 종사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내 아내에게는 내 아이에게는 산재가 없을까
사랑하는 사이에는 산재가 없을까
신체가 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잘리는 것만이 산재일까
비정규직으로, 실업으로 쫓겨나는 것은 산재 아닐까
쪼들리는 삶으로부터 오는 모든 정신의 훼손과 관계의 파탄은 산재가 아닐까
나의 모든 시도 실상은 산재시다
내가 외로움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모든 형태의 산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 세계에 대한 항의다
내가 자연을 그리워할 때 그것은
모든 조화로움으로부터 쫓겨난
근본적인 산재에 대한 항변이다
보라, 저 거리에 나온 모든 상품들도
불구의 몸으로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거리에 선 모든 나무들도
팔다리 잘리며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들녘 강물의 모든 실핏줄들도
검은 가래에 막혀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하늘 위에서 내리는 모든 눈도 비도
산재에 물들어 있고, 보라
저 하늘의 오존층도 우리의 폐처럼
숭숭 구멍 뚫리고 있다
이 모든 산재를 보상하라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이 모든 산재를 지속가능한 상태로 되돌리라고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누구에게? 저 자본에게
우리의 잘린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아
닳아진 무릎뼈와 폐혈관과 혼미해진 정신들을 모아
배부른 저 자본에게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이윤이 중심이 아니라
건강과 안전과 평화와 연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가장 악독한 산재, 이 눈먼 자본주의를 추방해야 한다고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인 착취와 소외의 세계화를 막아야 한다고
모든 사랑스런 관계들을 파탄으로 내모는
이 불안정한 세계를 근절해야 한다고
산재 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자본주의를 추방하지 않고
산업재해 없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생각하면 이렇게 간단한데 그것이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
나와 우리가 진정으로 겪고 있는
가장 엄중한 산재는 이것이 아닐까
더 이상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꿈꾸지 못하는
이 가난한 마음들, 병든 마음들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세계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차별 없는 서울행진단’이 구로공단에서 집회를 연다 해서 잠깐 들렀다가 잘 아는 형을 만났다. 오십하나. 대학 중퇴 후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평생 마치코바(영세 공장)와 건설 현장 일용 노동일을 하며 사는 형이다.
처음엔 못 알아보고 옆 사람하고만 인사를 나눴다. 힐끗 쳐다보는데 자세히 보니 형이었다. 못 알아볼 수밖에 없는 게 얼굴이 뇌수술 받고 난 사람 모양으로 심하게 부어 있었다. 부채 모양의 시민선전용 선전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도 잘 몰라본 거였다.
“아니, 형 이게 웬일이에요.”
기가 막혔다. 일용으로 나가 용접일을 하는데 육중한 철구조물인 주차 파렛트가 덮쳐왔다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 주차 파렛트가 무너지는 것은 처음 봤다고 한다. 다른 게 무너지는 것은 많이 봤다는 말이니 좋은 이야기도 아니었다.
죽을 뻔했는데 다행히 코뼈만 주저앉았다고 한다. 못 피했으면 압사다. 내일 수술인데 좀이 쑤셔 나왔단다. 태어날 때부터 지체 장애인 아이를 숙명처럼 키우며 평생이 고생인 형이다. 운동이 뭐라고 좀 쉬시지, 라는 말이 입 밖까지 나왔다가 들어갔다. 그 마음을 어떻게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다행히 산재 처리는 받게 되었다고 한다. 생각하면 큰일인데도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만 건네고 덤덤히 앉아 함께 집회를 보았다. 십수 년을 보아도 별 달라지지도 않는데 그렇게 우리는 똑같은 자리에 앉아 집회를 본다. 도처에 고난뿐인 사람들로 둘러싸여 사는 삶인지라 웬만한 아픔에는 심드렁해지기도 한다. “죽진 않았어. 그러면 됐어.” 하기도 한다. “또 죽었대. 왜 죽었대. 그냥 살지.” 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감성마저 메말라져 버리고 말았을까.
다음 날 한 선배의 권유로 산악회 모임에 처음 가보았다. 치악산이었다. 산 초입부터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스물 초반부터 서른 초반까지 종일 쭈그려 앉아 하는 용접과 배관일을 하며 두 무릎과 허리가 다 망가져 있었다. 산소통과 알곤통과 LPG통과 오비키(목재의 한 단위로 건설 현장에서 쓰인다)와 파이프관과 앵글더미와 철근더미와 7인치 그라인더와 함마드릴과 너무 친하게 지냈던 결과였다. 잔업철야를 너무 좋아했던 까닭이다. 야리키리(공사 현장 은어로 단축공정을 일컫는다)를 너무 좋아했던 까닭이다. 종일 허리 한번 펴지 않고 쭈그리고 앉아 용접 불빛만 쫓던 결과다. 작년 초엔 두 다리를 무거운 부대자루처럼 질질 끌고 다니다 숙원이었던 무릎 관절 수술을 받던 어머니의 병상을 지키며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겉은 말짱한 청년인데 근육과 관절은 노쇠해 버린 내 청춘이 서글펐다.
예상한 대로 한 시간 정도 걷고 나니 오른쪽 무릎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내색할 수 없는 고통이 점점 심해졌다. 푸르른 산도, 화기애애한 관계들도 모두 아득히 멀어져갔다. 빨리 평지가 나오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튼튼하게 서 있는 나무가 부러웠고, 초록으로 다시 태어나는 나뭇잎새들이 부러웠다.
과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산재를 겪다 보면 나뭇가지 하나도 함부로 부러뜨리고 싶지 않다. 그들에겐 인재가 산재일 터다. 식은땀을 흘리며 혼몽하던 밤들이 생각나 맑은 시냇물을 흩트려놓고는 미안해서 빨리 정화되기를 소망해 본다. 못 하나를 박을 때도 정확히 가격해서 몇 번에 박아주고 싶다. 너무 많이 아프지 않게. 철근 하나도 한곳만을 너무 많이 사용해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이 세상 자본가들은 같은 인간인데도 그런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다. 같은 돈을 주고 산 기계는 오히려 무척이나 아끼지만 인간은 마모될 때까지 쓰고 싶어 한다. 안전을 위한 조치보다는 피치 못하게 책임져야 할 산재가 일어나면 그때 보상이나 해주고 끝나길 원한다. 그것이 일상적인 안전유지 비용보다 훨씬 덜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색을 낸다. 그렇게 생산된 모든 가치가 사유화된다. 모든 걸 가지면서 그들이 지는 책임은 불과 일부분이다. 국회의원들은 그런 조삼모사의 산재보상법을 만들며 생색을 낸다. 똑같은 강도, 도둑놈들이다.
보라.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산재 아닌 것이 있는지. 모든 실업도 산재다. 모든 파탄 난 사랑의 많은 부분도 산재다. 가정불화의 대부분도 산재다. 독거노인도 거개가 산재다. 모든 교통사고의 주요인도 산재다. 모든 생태위기도 뿌리는 산재다. 이런 사회다 보니 가지지 못한 자들은 축복 어린 아이를 가지면서도 어떤 재난을 떠올린다. 삶 자체가 재난의 연속이다. 모두 무한정한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의도된 결과다.
우리는 그럼에도 아주 작은 것들만을 요구한다. 명백한 산재에 대해서라도 최소한의 책임을 다해주기를. 누구라도 명백한 산재에 대해서는 보상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조금은 더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조금은 더 안전하게 착취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아주 소박한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소박한 부탁마저 번번이 배신당하고 만다.
오늘이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이란다. 삼가는 마음을 보낸다.
그런데 세계 자본주의 추모의 날은 언제나 오는 것일까. 그런 날도 빨리 와서 시 한 편 써보면 참 좋겠다.
※ 세계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
1993년 4월 28일 태국의 심슨인형 제조공장에서 188명의 노동자들이 죽은 대형 화재사고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인형을 훔쳐갈지 모른다고 평소 공장 문을 닫아두는 바람에 탈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매년 4월 28일을 ‘세계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로 정해 세계 노동자들이 함께 산재 추방을 외치고 있다. 현재 13개국에서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110개국에서 매년 공동행사를 열고 있다.
(서문, 3부 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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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송경동
2001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구로노동자문학회와 전국노동자문학연대에서 활동했다. 시집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을 냈으며, 제12회 천상병시문학상과 제6회 김진균상, 제29회 신동엽창작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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