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루드비크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나는 그렇게 고향에 다시 와 있었다. 중앙 광장(어린아이일 때, 소년일 때, 그리고 청년일 때 수없이 지나다녔던)에 서서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지붕들 위로 (투구를 쓴 독일 병사 같은) 망루가 높이 솟아 있는 이 장소가 널따란 연병장을 연상시킨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모라비아가 예전에는 군사상으로 마자르와 터키인들의 침입에 대비한 성채 역할을 했던 사실이 이 도시의 얼굴에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추악한 낙인을 새겨 놓았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해 동안 나를 내 고향으로 이끌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 도시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 같았다. 벌써 십오 년 전부터 다른 곳에 살았고, 이곳에는 이제 아는 사람도 친구도 몇 없었던 것이다.(남아 있는 친구도 피하고 싶다.) 어머니도 내가 돌보지 않는 낯선 무덤 속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내가 무관심이라 불렀던 것은 실은 원한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른 모든 도시에서나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도 좋은 일 나쁜 일 들이 내게 일어났던 것뿐인데. 아무튼 원한이 있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그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를 이곳에 오게 한 일, 그 일은 어쨌든 프라하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내 고향에서 그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지자 느닷없이 억누를 수 없는 유혹을 느꼈던 것이다. 바로 그 일이 추잡하고 저속한 일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난날에 대한 어떤 간지러운 감상 탓에 다시 그곳에 가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일소에 부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조소에 찬 시선으로 그 보기 흉한 광장을 둘러본 뒤, 나는 돌아서서 그날 밤을 위해 예약해 놓은 호텔로 걸음을 옮겼다. 관리인은 “삼 층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배 모양 나무 열쇠를 내밀었다. 방은 그리 마음을 끄는 곳이 못 되었다. 벽 쪽에 침대가 붙어 있고, 방 한가운데에는 작은 탁자 하나와 달랑 의자 하나, 침대 옆에는 거울이 달린 요란한 마호가니 화장대, 문 옆에는 표면이 다 갈라져 일어난 기막히게 작은 세면대가 있었다. 나는 가방을 탁자에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창문은 안마당 쪽으로 나 있고, 호텔 쪽으로 헐벗고 지저분한 뒷면을 드러내보이는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고 세면대로 다가갔다. 빨강과 파랑으로 표시된 수도꼭지 두 개가 있었다. 모두 틀어 보았으나 양쪽 다 차가운 물만 나왔다. 탁자를 살펴보니 적어도 술 한 병과 잔 두 개 정도는 충분히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만하면 쓸 만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방에 의자가 하나뿐이라 한 사람밖에 앉을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탁자를 가까이 밀어 놓고 침대 위에 앉아 볼까 했지만 침대는 너무 낮고 탁자는 너무 높았다. 게다가 침대는 내가 앉자 푹 내려앉아 버려서 의자 대신 쓰기에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침대로서 제 구실을 제대로 할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나는 양손을 짚고 침대에 앉아 보았다가 그다음에는 담요와 시트를 버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구두를 신은 발을 들고서 누워 보았다. 매트리스는 내 무게에 아래로 푹 꺼져 버렸고, 마치 해먹이나 좁은 무덤에 누운 것만 같았다. 이 침대에 누구와 함께 눕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햇빛이 투명하게 비치는 커튼에 망연히 시선을 둔 채, 나는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로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와 여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둘이 하는 말이 모두 잘 들렸다. 그들은 집을 나가 버린 페트르라는 아이에 대해서, 그리고 너무 오냐오냐하여 결국 아이를 망쳐 버린 백치 같은 클라라 아주머니에 대하여 말했다. 그리고 열쇠가 열쇠 구멍에서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옆방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그렇다. 한숨 소리까지 다 들려왔던 것이다!) 남자가 이번에는 정말 클라라에게 단단히 한마디 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도 들렸다.
나는 일어섰다. 결정은 이미 내려졌다. 세면대에서 다시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고, 당장에는 정확히 어디로 갈지 모르는 채로 호텔을 나섰다. 분명한 것은 단지 호텔 방의 결함 때문에 이번 여행 전체의(상당히 길고 고단한 여행이었다.) 성공을 위태롭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전혀 내키지는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이곳의 한 친구에게 은밀히 부탁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소년 시절에 알았던 얼굴들을 모두 떠올려 보았지만 하나하나 떠오를 때마다 곧 지워 버렸다. 부탁하는 일이 은밀한 것이다 보니 만나지 못했던 그 긴 세월 위로 애써 다리를 놓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싫었다. 그러다가 아마 여기 살고 있을 한 사람이 생각났다. 예전에 내가 바로 이곳에 일자리를 구해 준 적이 있었던 사람으로, 내가 아는 바로는 이번에는 자신이 내게 도움을 줄 기회를 얻으면 아주 기뻐할 것이었다. 그는 엄격하고 도덕적이면서 동시에 묘하게 걱정이 많고 불안정한, 기이한 인물이었다. 내가 알기로 오래전에 그의 아내는 그와 이혼을 했는데, 이혼 사유는 오로지 그가 그녀와 아들이 있는 곳만 빼고 여기저기 아무 데서나 산다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결혼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했다. 그런 상황이면 내 요구가 이뤄지는 데에 문제가 생길 것이었다. 나는 병원 쪽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병원은 드넓은 정원 여기저기 세워진 여러 건물과 분관 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정문에 달린 수위실로 들어가 탁자에 앉아 있는 수위에게 바이러스 연구실을 대 달라고 했다. 그는 탁자 끝으로 나한테 전화기를 밀어 주면서 “02번.”이라고 말했다. 나는 02번으로 번호를 돌렸고, 코스트카 박사는 방금 전에 나가서 지금 출구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정문 옆 벤치에 앉아서 푸른색과 흰색 줄무늬 병원 가운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를 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하고 키가 크고 말랐으며 꾸밈 없이 보기 좋은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렇다. 바로 그였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마치 정면으로 부딪치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좀 언짢은 듯 한 번 보더니 곧 나를 알아보고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내 느낌에 그는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는 듯했고 나를 대뜸 그렇게 맞아 주어 나는 기뻤다.
별건 아니지만 한 이틀 걸릴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아직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고 하자 즉각 그는 내가 자기를 제일 먼저 찾아와 주었다며 놀라고 기뻐했다. 사심 없이 단지 그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한 질문(재혼을 했느냐고 쾌활하게 물었다.)이 실은 저급한 계산에서 나온 것인데 진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갑자기 언짢아졌다. 그는 (만족스럽게도) 여전히 혼자라고 말했다. 나는 나눌 이야기가 참 많다고 했다. 그는 자신도 그렇다고 하면서, 그런데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봐야 하는 데다가 저녁에는 버스를 타고 이 도시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지금 한 시간 정도밖에 여유가 없어서 안타깝다고 했다. 나는 “여기 살지 않아요?”라고 놀라서 물었다. 그가 여기 사는 거 맞고 새 건물의 원룸에 사는데 “혼자 살기가 힘들다.”라고 해서 나는 마음을 놓았다. 코스트카에겐 이십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도시에 애인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교사고 방이 두 개인 집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 나중에는 그 집으로 옮겨 갈 건가요?”라고 나는 물어보았다. 그는 내가 구해 준 이 일만큼 괜찮은 일을 다른 곳에서는 찾기 어려울 것이고, 그렇다고 그의 애인이 여기에서 자리를 얻기도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관료 체제가 그렇게 늑장을 부려서 한 남자와 여자가 한곳에 같이 살 수 있도록 일을 신속히 처리해 주지도 못한다고 (진심으로) 비난했다. “괜찮아요, 루드비크. 그렇게 견디기 힘든 것만은 아니에요. 왔다 갔다 하자면 돈도 들고 시간도 걸리는 건 분명하지요.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받지도 않고, 그래서 자유롭거든요.” 그는 온화하고 여유롭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당신은 왜 그토록 자유가 필요한 거죠?” 나는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요?” 그가 말했다. “저는 여자들을 많이 쫓아다니니까요.” 나는 대답했다. 그는 “나에게 자유가 필요한 것은 여자 때문이 아니에요. 저 스스로를 위해서죠.”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저기, 제가 가기 전에 잠깐 우리 집에 가시죠.”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바로 내가 바라던 바였다.
병원에서 나와 우리는 곧 새 건물들이 모인 곳에 이르렀다. 건물들은 평평하게 고르지도 않은 먼지 날리는 땅(잔디도 인도도 차도도 없는)에 서로 아무런 조화도 이루지 못한 채 나란히 솟아, 저 멀리 펼쳐진 광대한 평원의 경계에서 어떤 서글픈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어떤 문으로 들어가 아주 비좁은 층계를 올라갔고(승강기는 작동하지 않았다.) 사 층에서 코스트카의 이름이 적힌 곳 앞에 멈추었다. 현관을 지나 방에 들어서 보니 만족스러운 것 이상이었다. 넓고 안락한 소파가 한쪽에 놓여 있고, 그 외에도 작은 탁자 하나에 안락 의자 하나, 커다란 책장, 턴테이블과 라디오가 있었다.
나는 코스트카에게 방이 아주 근사하다고 하고서 욕실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내가 보이는 관심에 기분이 좋은 듯 그는 “평범해요.”라고 말하고는 욕실 문이 난 현관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욕조와 샤워기, 세면대가 달린 자그마하지만 아주 마음에 드는 욕실이었다. “이렇게 근사한 아파트를 보니까 생각이 나는데, 내일 오후하고 저녁때 뭐 하세요?” 하고 내가 물었다. 그는 당황스러워하며 “어쩌죠, 내일은 제가 하루 종일 근무하는 날이라서 7시쯤이나 돼야 돌아올 텐데요. 저녁엔 시간이 없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답했다. “저녁에는 시간이 날 수도 있긴 할 텐데, 그런데 그전에 오후 동안 아파트를 빌려 주실 수는 없겠어요?”
내가 이렇게 묻자 그는 놀랐지만 즉시(망설인다고 여겨질까 두려운 듯이) “안 되긴요, 얼마든지 쓰세요.”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가 왜 그런 부탁을 하는지 결코 알려고 하지 않겠다는 듯 덧붙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묵을 곳이 마땅치 않으면 오늘부터라도 여기서 주무시죠. 전 내일 아침이나 돼서야 돌아올 테니까요. 아니, 내일 아침에도 안 올지 몰라요. 바로 병원으로 갈 거거든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호텔에 묵고 있어요. 문제는 제 방이 좋지가 못한데 내일 오후에 분위기 좋은 공간이 좀 필요하거든요. 물론 혼자 있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라고 나는 말했다. “아, 네, 그렇겠네요.” 코스트카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잠시 후 그는 말을 이었다. “당신을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돼서 기쁩니다.” 그러고는 다시 덧붙였다. “물론 그것이 정말 좋은 일이라면요.”
그러고 나서 우리는 작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코스트카는 커피를 끓여 왔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소파에 앉아 보니 푹 꺼지지도 않고 삐걱거리지도 않으며 아주 튼튼한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코스트카는 이제 병원으로 가 봐야 한다면서 방의 내밀한 요소들을 서둘러 알려주었다. 욕실 수도꼭지를 잠글 때는 끝까지 돌려야 하고, 따뜻한 물은 보통의 경우와 달리 ‘냉’이라고 새겨진 수도꼭지에서 나오며, 턴테이블의 전선을 꽂는 플러그는 소파 아래 있고, 작은 장 속에는 마개를 딴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보드카가 한 병 있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열쇠가 두 개 달린 고리를 건네주면서 건물 입구 열쇠와 아파트 열쇠를 가르쳐 주었다. 이제까지 수도 없이 잠자리를 바꿔 가며 정처 없이 살아왔던 탓에 나는 특별히 열쇠를 숭배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그래서 그 열쇠들을 주머니 속에 넣으며 소리없이 커다란 기쁨을 맛보았다.
집을 나서며 코스트카는 자신의 아파트가 “정말로 아름다운 어떤 것”을 내게 가져다주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그래요. 이 집 덕분에 아름다운 파괴를 행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내가 답하자, 그는 “파괴가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었다. 속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이렇게 묻는 것을 보면서(부드럽게 묻지만 생각은 도전적인 질문) 십오 년 전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변함없이(좋은 사람지만 좀 우스웠다.) 그가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대답해 주었다. “당신이 하느님의 영원한 작업대에서 평화롭게 일하는 일꾼이라는 거 알아요. 파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나는 하느님의 견습 석공이 아닌걸요. 게다가 만일 하느님의 석공들이 이 세상에다가 진짜 벽으로 건물을 짓는다 해도 우리의 파괴가 그 건물들에 해를 입히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겁니다. 한데 내가 보기엔 어디 가나 벽은 없고 무대 장치뿐이에요. 무대 장치들을 파괴하는 건 아주 올바른 일이지요.”
우리는 지난번에(한 구 년 전쯤이던가) 이야기하다 헤어졌던 바로 그 지점에 다시 와 있었다. 우리의 논쟁은 이번에는 은유적인 성격을 띠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근본적인 것을 잘 알았고 그래서 다시 얘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서로 그사이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서로 다르다고 반복해서 말해야 할 뿐이었다.(나는 코스트카의 이런 다른 점을 좋아했고, 그와 논쟁을 하면, 나는 정말 누구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언제나 확인할 수 있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에 관한 내 불확실한 생각을 아주 분명하게 하려고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말씀하신 건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죠. 하지만 말이에요, 그렇게 회의적이신데 벽과 무대 장치를 구별 지어 주는 분명한 근거를 어디서 찾으시죠? 당신이 비웃는 환상이 정말로 단지 환상이기만 한 것일까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은 없나요? 당신이 잘못 생각하는 거라면 어쩌죠? 또 그것이 가치 있는 것들이고, 당신은 그 가치들을 파괴하는 사람이라면요?” 그는 이어서 말했다. “변질된 가치나 가면이 벗겨진 환상은 똑같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고, 서로 비슷하게 닮아서 그 둘을 혼동하기보다 더 쉬운 건 없죠.”
도시 반대쪽 끝에 있는 병원까지 코스트카를 바래다 주면서 나는 주머니 속 열쇠를 가지고 놀기도 했고,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지금 이 신축 구역의 울퉁불퉁한 땅을 걸어가면서도 자신의 진리를 내게 납득시키려고 애쓸 수 있는 오랜 친구가 옆에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코스트카는 물론 우리가 내일 저녁 시간 내내 함께하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곧 철학은 접어 두고 일상적인 이야기로 말을 돌렸는데,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내일 저녁 7시에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집에서 기다릴 것인지 확인했고(그에겐 다른 열쇠가 없었다.) 정말 더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만지면서 수염이 너무 길어 이발소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코스트카는 “마침 잘됐군요. 특별 면도를 하게 해 드리죠!”라고 했다.
나는 코스트카의 좋은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한 조그마한 이발소로 따라 들어갔다. 거기에는 세 거울 앞에 커다란 회전 의자가 하나씩 있었는데, 그중 둘은 이미 남자 둘이 차지하고서 젖힌 얼굴에 거품을 잔뜩 얹고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여자 둘이 그들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코스트카가 그중 한 여자에게 다가가서 무어라고 귓속말을 하자 여자는 면도칼을 수건에 닦더니 이발소 뒤쪽에다 대고 누군가를 불렀다. 곧 흰 가운을 입은 아가씨가 하나 나오더니 면도를 하다 만 남자를 맡았고, 코스트카가 말을 걸었던 여자는 나에게 살짝 눈인사를 하며 빈 의자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코스트카와 나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고, 나는 받침대 구실을 하는 작은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자리를 잡았다. 너무도 여러 해 동안 나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앞에 놓인 거울을 피해 눈을 위로 뜨고 석회를 칠한 천장의 얼룩들을 둘러보았다.
셔츠 깃 안으로 흰 수건을 접어 넣는 이발사의 손가락이 목에 느껴진 후에도 나는 계속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발사는 한 발짝 물러섰고, 이제 가죽 끈에 면도칼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으며, 나는 아주 편안한 무심함으로 가득한 황홀한 부동 상태 속에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면도 크림을 듬뿍 바르는 젖은 손가락들이 내 뺨 위에 느껴지자 기이하고 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게 아무것도 아닌 모르는 여자, 나 또한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그런 사이의 낯선 여자가 나를 부드럽게 만지고 있었다. 그다음에 이발사는 솔로 비누를 펴 바르기 시작했고, 나는 아무래도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지가 않고 얼룩들이 박힌 허공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쉬는 사이에도 생각은 멈추지 않는 법이므로) 내가 면도날을 날카롭게 갈아 놓은 여자에게 완전히 내맡겨진 무방비 상태의 희생물이라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내 몸은 허공에 사라지고 오로지 손가락들이 와서 닿는 얼굴만이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감미로운 두 손이 내 머리를 몸통에 갖다 붙이려는 생각은 전혀 없이 단지 머리 그 자체로만 여기는 듯 들고 (돌리고, 애무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제 옆 탁자에서 기다리고 있는 날카로운 면도날이 내 머리의 그 아름다운 자율성을 완성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스르르 들었다.
얼마 후 손길이 멈추고 이발사가 이번에는 정말로 면도칼을 집으려고 물러서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이 순간(생각은 계속 움직이므로) 내 머리의 주인(들어올리는 여인), 나의 다정한 살인자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장에서 시선을 내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나는 경악했다. 내가 속으로 즐기던 유희가 돌연 기이하게도 현실적인 윤곽을 띠었던 것이다. 내게 몸을 숙이고 있는 거울 속의 여자, 그녀를 아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내 귓불을 쥐고 또 한 손으로는 얼굴의 비누 거품을 꼼꼼하게 긁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조금 전 그렇게 놀라며 발견했던 그녀의 정체가 조금씩 부서지면서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세면대 위로 몸을 구부리고, 두 손가락으로 면도칼에서 거품 덩어리를 털어 내고는 허리를 다시 펴더니 내 의자를 살짝 돌렸다. 그때 우리 시선이 한순간 마주쳤고, 나는 다시 그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얼굴이 약간 다르긴 했다. 마치 그녀 언니의 얼굴인 듯, 안색이 흐려지고 시든, 약간 홀쭉해진 얼굴. 하지만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십오 년 전이 아니던가! 이 세월 동안 시간은 그녀의 진짜 윤곽을 가리는 가면을 새겨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가면에는 구멍이 두 개 있어서, 그 구멍으로 실재하는 그녀의 진짜 두 눈, 내가 예전에 알았던 그대로의 두 눈이 다시 이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에 다시 혼선이 생겼다. 다른 손님 하나가 이발소 안으로 들어와 내 뒤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그는 곧 내 이발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이 아름다운 여름과 시 외곽에 짓고 있는 수영장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발사는 무어라 대답을 했는데(별 의미 없는 대답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보다는 목소리에 주목했다.) 그 목소리는 분명 생소했다. 괄괄하고 무심하고 거의 상스러운 데까지 있는 음성, 완전히 낯선 목소리였다.
이제 그녀는 양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문지르며 세수를 시키는데 이때 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녀다, 십오 년 후에 내 얼굴 위에 다시 그녀 손의 감촉을 느끼고 있다, 그녀가 다시 나를 어루만지고 있다, 다정하게 나를 오래오래 어루만져 주고 있다고(절대 애무가 아니라 지금 세수를 시키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낯선 목소리는 점점 더 수다스러워지는 그 남자의 이야기에 뭐라고 계속 대답을 하긴 했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믿으려 들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두 손을 믿고만 싶었다. 이 손길을 보면 분명히 그녀라고 나는 한사코 주장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이 손의 감촉에서 나는 진짜 그녀인지, 그녀가 나를 알아본 것인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다음 그녀는 수건을 집어 내 얼굴을 닦았다. 그 수다스러운 손님은 자기가 한 농담에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아마도 그 남자가 자신에게 건네는 말에 그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것은 즉 그녀가 나를 알아보았으며, 마음의 동요를 억누르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그녀에게 말을 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녀는 내 목에 둘러져 있던 수건을 걷어 냈다. 나는 일어섰다. 상의 안주머니에서 5코루나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우리 시선이 다시 마주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넬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는데(그 남자는 계속 수다를 떨었다.) 그녀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아주 빠르고 사무적인 동작으로 돈을 받는 바람에 나는 갑자기 혼자 만들어 낸 환영을 믿은 정신 나간 사람 같아져 버렸고 그녀에게 단 한 마디조차도 건넬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묘하게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나는 이발소를 나왔다. 내가 아는 것, 그것은 다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었고,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이의 얼굴이 맞는지 머뭇거린다는 것이 참으로 야비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사실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급히 호텔로 가서(가는 길에 맞은편 인도에서 어릴 적 오랜 친구인 야로슬라프, 침발롬이 있는 악단의 단장인 그를 발견했지만, 나는 마치 찌르는 듯한 너무 강렬한 음악을 피하는 것처럼 얼른 시선을 돌려 버렸다.) 코스트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직 병원에 있었다.
“저, 아까 소개해 준 그 이발사 이름이 루치에 세베트코바 맞나요?”
“지금은 다른 이름을 쓰지만 그 여자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녀를 아시죠?” 코스트카가 말했다.
“아주 오랜, 아주 먼 옛날 일이지요.”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조금 더 걷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제1부 전문)
--------------------------
작가 소개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1929년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1854년~1928년)의 문하생이었으며, 체코의 주요한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이며 브르노 뮤지컬 아카데미의 수장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배웠으며 훗날 음악학을 공부하였다. 이러한 음악적 배경은 그의 작품의 근간이 되었다.
1948년 브르노에서 중등교육 과정을 마친 후 찰스 대학교의 예술학부에서 문학과 미학을 공부했으나, 두 학기 만에 프라하 공연예술 아카데미 영화학부로 옮겼다. 그곳에서 영화 기획과 희곡 창작 강의를 들었으나 1950년, 정치적인 이유로 학업을 중단했다. 1952년 학교를 졸업한 후 영화 아카데미에서 세계 문학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젊은이들처럼 공산당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쿤데라는 1950년, ‘반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추방당했으나 1956년에 재입당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에 참여하였다.
쿤데라는 소련 침공과 프라하의 봄 이후 모든 공직에서 해직당하고 저서를 압수당했으며 글을 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금지당하는 역경을 만났다. 『농담』과 『우스운 사랑』 단 두 권만 고국 체코에서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다준 작품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랑스에서 처음 출판되었으며 1989년 공산정권 붕괴 전까지 체코 내 출판 및 외국어판 수입이 금지되었다. 출판 금지 조치 해제 이후에도 쿤데라는 모국에서 이 작품이 출판되는 것을 반대해 왔다가 지난 2006년이 되어서야 체코에서 이 작품을 출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쿤데라의 작품들은 프랑스어판이 그의 ‘정본’으로 인정, 번역 출간되고 있으며 프랑스 정착 후에는 프랑스어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1975년 프랑스 이주 후 르네 대학교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하다가 1980년 파리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1981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땄으며 현재 프랑스에 거주 중이다.
--------------------------
역자 소개
방미경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프랑스문학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프랑스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플로베르』(편역), 뤽 페리의 『미학적 인간』, 쿤데라의 『농담』, 『삶은 다른 곳에』 등이 있으며 논문 「꿈의 거울: 플로베르의 성 앙투안의 유혹」에 관한 연구」, 「움직이는 백과사전 『부바르와 페퀴셰』에 대하여」, 「『마담 보바리』에 나타난 현실과 꿈의 상호 파괴성」, 「침묵을 꿈꾸는 말-베케트의 「몰로이」 연구」, 「죽음을 향한 기다림과 기다림을 채우는 말-「베케트의 말론 죽다」에 대하여」 등이 있다.
-------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