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열며
맛난 만남
만남은 맛남이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맛난 만남을 갖는다. 이 몇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이상 예전의 나일 수가 없다. 그런 만남을 그저 흘려보내놓고 자꾸 딴 데 가서 기웃대며 불운을 탓한다.
단 한 번으로 삶 자체가 업그레이드되는 만남, 그런 만남을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강진 유배 시절 제자 황상(黃裳, 1788~1870)이다. 내가 황상을 처음 안 것은 예전 임형택 교수 논문에 잠깐 인용된 「삼근계」란 짧은 문장 때문이었다. 글이 가슴을 쳤다. 당장 수소문해서 황상의 『치원유고?園遺稿』 복사본을 손에 넣었다. 앞뒤 맥락을 알고 읽으니 더욱 뭉클했다. 이후 틈날 때마다 그의 글을 찾아 읽었다.
나는 지난 몇 해 동안 황상의 자취를 꼼꼼하게 추적해왔다. 2006년 가을, 주룩주룩 내리던 빗속에 강진군 대구면 백적동에 있는 일속산방 터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30년 전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로 폐교가 된 용운초등학교 터의 뒤편이었다. 덤불은 수십 년 인적이 그친 터라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다. 저수지의 벼랑길을 따라 아슬아슬 위태롭게 찾아간 집터에서 나는 망연해져서 한참을 서성였다. 먼 길에 길동무 삼아 함께 간 아들과 해 뉘엿한 저수지 수면 위로 돌멩이를 빗겨 던지며 물수제비뜨기 놀이를 했다. 이후 마음 한편에 늘 그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황상과 관련이 있는 필첩의 소장자를 물어물어 찾아가 그 생생한 묵흔과 마주했을 때는 감격을 가누지 못했다. 다산과 정학연, 그리고 추사 형제가 황상에게 준 여러 권의 친필첩을 보았다. 필치가 황홀했고, 내용이 눈물겨웠다. 자료가 나올 때마다 문집 내용과 맞춰보니 알 수 없던 여백이 하나둘씩 채워졌다. 다산과 황상의 아름다운 만남의 시작과 끝을 정리하는 일은 내 몫일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어찌하겠는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와버린 것을.
다산이 황상에게 준 이런저런 당부들은 읽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했다. 헤어진 지 18년 만에 사제가 감격적으로 재회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절로 흘렀다. 그의 자취를 찾아 헤매고, 그가 남긴 글을 모아 읽는 동안, 모호하고 뭉뚱그려졌던 풍경들이 점점 또렷한 영상으로 그려졌다.
황상은 자신의 시문을 모은 『치원유고』란 문집을 남겼다. 또 가까운 벗, 특히 다산의 아들 형제 등과 주고받은 수십 통의 편지를 모은 『치원처사사우왕복급수창록?園處士師友往復及酬唱錄』이 문집 속에 따로 실려 있다. 이밖에 다산이 평생 동안 황상에게 준 편지와 쪽지글을 모은 『서간첩』과,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이 그를 위해 써준 몇 종의 친필첩, 그의 도탑고 순수한 마음에 감동하여 다산 사후에 정씨와 황씨 두 집안이 길이 아름다운 우의를 이어가자며 정학연이 써준 『정황계첩丁黃契帖』 등이 따로 전한다. 황상이 스승 다산의 가르침에 따라 조성한 원림인 일속산방(一粟山房)은 유명한 화가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직접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 추사의 삼 형제가 황상을 위해 써준 필첩 『치원진완?園珍玩』도 소중하다. 이렇게 보니 다산과 황상에 관련된 자료가 뜻밖에 적지 않다. 황상의 문집은 지금까지 번역되지 않았고, 그 많은 필첩과 편지글도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다.
이 책에서 살핀 황상의 삶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어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지금의 눈으로가 아닌 당시의 시선에서 볼 때도 그랬다. 이름 없는 시골 아전의 아들이 멋진 스승과 만나 빚어낸 조화의 선율은 그때도 많은 사람을 열광케 했다. 더벅머리 소년이 스승이 내린 짧은 글 한 편에 고무되어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가는 과정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다. 이 책에서는 다산과 황상의 만남을 중심축에 놓고 앞쪽에는 다산의 강진 유배 생활을 배경에 두었다. 뒷부분에서는 정학연 형제 및 추사 형제와의 왕래 자취를 줄거리 위에 세워놓았다. 이를 통해 마치 인드라망처럼 종횡으로 교직된 한 필의 피륙을 짜볼 작정이었다.
사제의 정리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사람들은 아무도 스승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학생은 있어도 제자가 없다. 물질적 교환가치에 의한 거래만 남았다. 마음으로 오가던 사제의 도탑고 질박한 정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슬퍼한다. 이 글을 쓰는 까닭이다.
이 책은 인터넷 연재의 방식으로 1년간 집필되었다. 매주 40~50매 가량의 원고를 써나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을 통한 독자와의 교감도 전에 해보지 못한 신기한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귀한 자료를 제공해주어 이 책의 집필을 가능하게 해준 여러 소장자들께 감사드린다.
문학동네의 강명효 실장과 강지혜 팀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든든한 동행이 되어주었다. 각별히 고마운 뜻을 전한다. 마치고 보니 중간 중간 미진한 부분이 눈에 거슬린다. 어렵사리 찾은 자료를 하나라도 더 소개하려는 욕심이 자꾸 앞섰다. 글이 다소 장황해진 연유다. 쓴 뒤에 새로운 자료가 나와 오류를 바로잡거나 보완한 것도 있다. 때로는 원본 자료의 오독으로 몇 꼭지의 내용을 고쳐야만 했다.
바라기는 이 글을 통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내 삶에서 그런 만남을 가지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를 헤아려보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만남을 반복한다. 그토록 좋고 간절했다가 끝에 가서 싸늘한 냉소로 남는 만남도 있고, 시큰둥한 듯 오래가는 은은한 만남도 있다. 나는 이 한 생을 살면서 어떤 만남을 가꾸어가야 할까?
이제 그들은 가고 남은 자취는 덤불 속에 묻히거나 수몰되고 없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조용히 말하련다. “이런 사람이 있었네”라고.
2011년 초겨울의 문턱 행당서실에서
정민 씀
첫번째 마디
아! 과골삼천
나를 알아주는 말이 아닐세
일흔여섯의 노인은 손에서 공부를 좀체 놓지 않았다. 다리 부러진 돋보기를 코끝에 비스듬히 걸치고 끊임없이 베껴 쓰고, 메모하고, 정리했다. 평생 그렇게 베낀 책이 키를 넘겼다.
― 어르신! 그 연세에 무슨 영화를 보시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만 하십니까? 이제 그만 쉬셔도 되잖아요. 바람도 좀 쐬시고요. 건강 다치실까 걱정입니다.
노인은 돋보기 너머로 눈길을 잠깐 주더니 다시 붓방아를 계속한다.
― 그만두세. 누가 말리겠나, 저 고집을. 황소고집일세, 황소고집! 저 나이에 내년에는 과거에라도 나가실 모양일세. 쯧쯧!
노인이 붓을 놓는다.
― 자네들! 거기 앉게. 날 위하는 말인 줄이야 왜 모르겠나만, 그런 말은 나를 알아주는 것이 아닐세. 내 스승이신 다산 선생님께서는 이곳 강진에 귀양 오셔서 스무 해를 계셨네. 그 긴 세월에 날마다 저술에만 몰두하시느라,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지. 열다섯 살 난 내게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리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네.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를 얻었느니라. 너도 이렇게 하거라.” 몸으로 가르치시고, 말씀으로 이르시던 그 가르침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고 귓가에 쟁쟁하다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이 지성스럽고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날로 나는 죽은 목숨일세. 자네들 다시는 그런 말 말게.
삐죽대던 입들이 쑥 들어갔다.
황상의 이 말은 『치원유고?園遺稿』에 실린 「회주 삼로에게 드림與?州三老」이란 편지에 적힌 한 대목을 대화투로 그대로 옮긴 것이다.
과골삼천(㎪骨三穿)!
처음 이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두 무릎을 방바닥에 딱 붙이고 공부에만 몰두하다보니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 추사가 먹을 갈아 벼루 여러 개를 밑창 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복사뼈에 세 번씩 구멍이 뚫렸다는 말은 여기서 처음 들었다.
“우리 선생님은 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 나도록 공부하고 또 공부하셨다. 내 복사뼈는 아직도 건재하다. 거기다 여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이것이 부끄럽다. 그래서 이 나이가 되어서도 공부를 그만 둘 수 없다. 그러니 말리지 마라.”
황상은 더도 덜도 말고 이런 사람이었다. 열다섯에 스승과 처음 만난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스승을 모셨다. 잠시의 흔들림도 없었다. 다산의 입장에서 황상 같은 제자는 참 성가신 존재였지 싶다. 무슨 말만 하면 그대로 따랐다. 평생을 지켰다. 바꾸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스승인들 지나가는 한마디라도 허투루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베끼고 또 베낀다
황상이 예순일곱 살 때 쓴 시가 『치원유고』에 남아 있다. 제목은 「육유 시의 초서를 마치고 감회를 읊다?陸詩了詠?」이다. 황상의 『치원유고』는 그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2008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다산학단 문헌집성』 9책 자료집을 펴내면서 그중 제5책에 이 책을 처음으로 영인해서 수록했다. 그는 평생 송나라 때 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시를 사숙했다. 이 또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일흔 가까운 노인이 1천 수가 넘는 육유의 시집을 또박또박 다 베껴 쓴 뒤, 감회를 누를 길 없어 지은 시다.
봄에는 『장자』를 등초하였고
가을엔 육유 시를 초록하누나.
천여 수를 손으로 써서 얻으니
침침해 눈이 온통 감길 것 같다.
예전에 20년간 공부할 적엔
비록 저승 간다 해도 따르려 했네.
못난 글씨 안목 없음 탄식하시니
잘못 써서 자주 눈살 찌푸리셨지.
조심조심 적과 맞선 듯한 뜻으로
진실되이 조정(朝廷) 의식 치르듯 했네.
이를 따라 경계로 삼을 만하니
평소에 바둑 둠은 싫어했다오.
편집을 다 마쳐야 시름 멎으니
뜻은 멀고 갈 길은 길기도 하다.
궁한 선비 썩은 뜻을 혼자 웃는데
아내는 진사 기약 비웃는구나.
젊은이는 개미 떼에 깜짝 놀라고
벗들은 시귀(蓍龜)인가 탄식하였네.
어떤 이는 쉬라고 권유하면서
골몰하여 피곤한 일 왜 하느냐고.
이 또한 깊은 사랑 맺힌 것이라
허깨비 몸 쇠함도 온통 몰랐지.
책 모양은 송곳 뚫어 한데 묶어서
찌를 꽂아 갑부에 포함시키네.
『치원총서』는 갑부와 을부가 있다.
파리 대가리만 한 글씨로 애를 쓰노니
흰머리는 짧아지고 성글어지네.
갑작스레 무덤으로 돌아간다면
버섯 지초 나온들 어이하리오.
한갓되이 눈물은 그치지 않고
게다가 허리병은 낫기 어려워.
올곧은 마음으로 나를 막으니
우직한 몸 누굴 향해 아첨하리오.
누워 보는 저녁엔 그 맛이 깊고
읊조리며 거닐 때엔 기쁨 넘친다.
전생의 학업이 안 끝났기에
능가로 다시 태어남 소원한다네.
지난 봄 내내 『장자』를 베껴 썼다. 그러고는 여름부터 육유의 시를 베끼기 시작해서 마침내 등서를 마쳤다. 스승 다산은 시를 배우려면 반드시 육유의 시를 섭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붓을 놓으니 눈이 침침해서 잘 떠지지 않는다. 예전 스승을 모시고 공부할 적엔 저승을 함께 가자 해도 따라갈 작정이었다. 베껴 쓰다가 오자라도 내면 선생님은 말없이 이마를 찌푸리셨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다음부터는 아예 내 앞에 무서운 적이 칼을 들고 내 목숨을 노린다는 생각으로 집중했다. 임금 앞에 서서 조정의 의식을 치르는 듯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제 베껴 쓰기를 마쳐 송곳을 꺼내 구멍을 뚫고 표지를 씌워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
아내는 진사 벼슬 하나도 못 할 거면서 그놈의 공부는 해서 무엇하느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젊은 친구들은 내가 쓴 개미같이 작은 글씨를 보고 깜짝 놀란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있는 책을 읽으면 되지 굳이 베낄 맛은 뭐냐며 퉁을 준다. 하지만 초서(?書) 공부는 우리 선생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공부법이다. 그대들은 잘 모른다. 이 공부 방법의 위력을. 누가 뭐라 하든 관 뚜껑에 못이 박힐 때까지 나는 베끼고 또 베낄 것이다. 말려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평생 베낀 책은 총서로 묶었다. 총서는 내용에 따라 갑부(甲部)와 을부(乙部)의 구분을 두었다. 차곡차곡 쌓이는 높이를 확인할 때마다 스승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스승께서는 벌써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나는 지금껏 스승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내 공부는 이승에서 끝날 공부가 아니다. 내세엔 승려로 태어나 승방(僧房)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며 또 한생을 살 것이다.
진심으로 스승을 섬긴 딱 한 사람
황상!
그는 다산이 가장 아낀 단 한 사람의 제자다. 다산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장악했다. 잘하면 속없이 칭찬하고, 못하면 매정스레 나무랐다. 다시 안 볼 것처럼 불벼락을 내렸다. 제자는 그것이 속 깊은 사랑인 줄 알아, 대뜸 잘못을 고쳤다. 더욱 분발하고 노력했다.
세상에 그저 이루어지는 관계는 없다. 가는 정 오는 정이 켜켜이 쌓여 관계를 만들어간다. 진심과 성의라야지, 다른 꿍꿍이가 들어앉으면 중간에 틀어지고 만다. 다산이 강진 18년 유배 기간 동안 키운 제자는 수없이 많았다. 이들 중 끝까지 스승을 진심으로 한결같이 섬긴 제자는 황상 한 사람뿐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이 남긴 증언이 있다. 황상이 예순일곱이 되던 1854년, 두릉을 다니러 왔던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작별이 아쉬워 친필로 써준 글이다. 제목은 「일속산방으로 돌아가는 처사 황치원을 전송하는 서문送黃處士?園歸一粟山房序」이다. 앞쪽 절반만 읽어본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강진에 귀양 사신 것이 무릇 18년이다. 학업을 청한 자는 수십 명이었다. 혹은 7~8년 만에 돌아가고, 혹은 3~4년 만에 물러났다. 곁에서 과문(科文)과 팔고문(八股文)을 익힌 자가 있었고, 시와 고문을 섭렵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막판에는 창을 들고 방으로 뛰어들어와 욕하고 헐뜯으며 등 돌린 자도 있었다. 문하는 흩어져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유독 황군 제불(帝튩)만은 어렵게 지내시던 초년부터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시던 그날까지 시종일관 법도를 넘어섬 없이 자세에 조금의 차이가 없었다.
배움은 효성과 우애, 충성과 신의를 바탕으로 삼았다. 어버이를 섬김은 옛날의 효자 증자(曾子, 춘추시대의 유학자. 『효경』의 저자라고 전해짐)와 민자건(閔子騫,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는 그의 덕행과 효성을 칭찬하였다)과 같게 되기를 기약했고, 아우와 우애롭기는 복식(卜式, 한나라 때 재상. 농사를 짓다가 조정에 발탁되었다)과 음경(陰慶, 후한 사람. 우애로 이름 높았다)을 기준으로 삼았다. 벗과의 사귐은 거경(巨卿)과 원백(元伯, 범식范式과 장소張쌉의 자. 장소는 죽은 뒤 절친한 벗인 범식의 꿈에 나타나 조문 올 것을 청했다는 고사가 전한다)을 본받았다. 그런 까닭에 시골에서는 모두들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주역』에서 점괘가 변화하는 추이(推移)와 물상의 호체(互體), 『예기』에서 최적부(衰適負, 제사 복식의 형식을 일컫는 말)와 연미(燕尾, 상복 뒤에 제비 꼬리처럼 길게 늘인 것), 나무를 심고 원포(園圃)를 가꾸며 스스로 넉넉하게 지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또한 돌아가신 아버님께 가르침을 받은 바 있다. 깊은 산속에 집을 얽고, 경서를 읽는 여가에 시를 지어 즐거움으로 삼으며,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매번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기일에는 옷을 단정히 하고 북쪽을 향하여 곡을 했다. 나이가 일흔에 이르러서도 절 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천릿길에 발을 감싸고 아버님의 산소를 찾아온 것이 세 차례나 된다. 그 굳센 행실과 도타운 윤리가 어찌 혼탁한 세속에서 쉬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세상을 물러나 번민 없이 사슴과 멧돼지와 더불어 즐겨 노닐었으나, 장차 초목과 함께 썩고 말 터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정학연이 지켜본 황상의 인간됨이 이러했다. 글 앞쪽에서 제자들을 말한 내용 중에 “막판에는 창을 들고 방으로 뛰어들어와 욕하고 헐뜯으며 등 돌린 자도 있었다”라고 적은 대목이 목에 컥 걸린다. “부려만 먹고, 이용만 해먹고, 뒷배도 안 봐주고 해준 게 뭐 있느냐”며 악을 쓰며 씩씩대는 패악이 눈에 선하다. 다산의 제자들이 다 한결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차차 들여다보겠지만, 다산은 무척 깐깐한 스승이었다. 웬만해선 제자들이 견디기 힘들었다. 끝까지 묵묵히 견디고, 중간에 딴마음 먹지 않고 그 뜻을 받든 이는 황상 한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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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민
무궁무진한 한문학 자료를 탐사하며 살아 있는 유용한 정보를 발굴하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펴냈다.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 『다산의 재발견』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미쳐야 미친다』 등이 있다. 또 청언소품에 관심을 가져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다산어록청상』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옛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책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등의 수필집과 한시 속 신선 세계의 환상을 분석한 『초월의 상상』, 문학과 회화 속에 표상된 새의 의미를 찾아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모든 것을 담은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를 썼다. 아울러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 미학 산책』과 어린이들을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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