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21세기가 시작될 무렵 ‘단결’이라는 격정적 물결이 미국을 휩쓸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래 처음으로 미국인들을 하나로 만들 만큼 위협적인 적이 등장했다. 그들은 건물 수위부터 최고 경영자(CEO)까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이겠다고 공언하면서 커터 칼로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렸다.1) 지하드 전사들 앞에서 공포에 질린 미국인들은 성조기로 온몸을 감쌌다. 스웨터와 티셔츠, 전사 도안(轉寫 圖案), 옷깃에 꽂는 핀은 물론이고 속옷과 목욕 가운에도 국기를 새겼다. 자동차 범퍼에는 “뭉치면 산다.”거나 “우리는 도망치지 않는다.”라는 스티커를 붙였다.
비유하자면 한동안 온천에 묵으면서 살을 뺀 햇병아리 여배우의 몸매처럼 얄팍한 연대감이었다. 그렇지만 재봉 분야 이외에 달리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수상한 사람을 보면 일단 신고하라.”는 되풀이되는 지시를, “뭔가를 보면 뭔가를 말하라.”는 뉴욕 교통당국의 수수께끼 같은 명령을 마음에 새겼다. 대통령이 쇼핑을 계속하라고 권하기에 힘닿는 한 열심히 물건을 샀다. 교통안전국(TSA)이 신발과 벨트 속까지 뒤질 때도, 정부가 인신보호법을 무시하고 기본적인 사생활을 침해할 때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조국’이라거나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나라’라는 관념에 우리를 동조하게끔 만들었던 그 힘은 테러리즘보다 더 강력하고 반역보다 심하게 분열을 초래하는 것에 의해 약화되었다. 1980년대에 시작되어 2000년대에 갑작스레 속도가 빨라진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딛고 선 땅이 흔들리며 미국의 지형이 바뀌었다. 부의 봉우리들은 점점 더 높이 솟아올라 구름을 뚫었고, 빈곤의 골짜기는 더욱 깊이 가라앉아 어둠에 묻혔다. 광활했던 중산층의 고원이 계속 침식돼 절벽에 튀어나온 바위 형상으로 쪼그라들자 추락 위기에 내몰린 사람들은 겁에 질린 채 절벽 가장자리에 매달려 버둥거렸다.
그것은 인간과 무관한, 지리적 힘에 의한 ‘변화’가 아니었다. 부시 행정부가 9.11 대책으로 항공 업계에 200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풀면서도 항공 산업에서 해고된 노동자 9만 명은 나 몰라라 했던 지난 2001년에 이미 인간이 개입한 냉혹한 손길이 감지되었다. 이어 부시는 또 다시 부의 상향 재분배를 교묘하게 꾀해 부유층의 세금을 깎아 주고, 부자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금융 지원 등 각종 사회복지 서비스와 프로그램을 감축했다. 입으로만 ‘기독교적 가치’를 요란스레 떠벌리는 정치 패거리들은 성서의 핵심 가르침을 아예 거꾸로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2004년에는 민주당 부통령 후보가 ‘두 개의 미국’이 존재한다고 선언할 지경에 이르렀다. 실은 ‘두 개’가 아니다. 20년 전에는 시장이 상류층과 저소득층, 삭스 백화점과 시어스 백화점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지금은 더 잘게 쪼개졌다. 연이어 밀려온 아웃소싱과 대량 해고의 물결에 떠밀린 중산층은 날로 상승하는 의료비, 연료비, 대학 등록금을 대기 위해 버둥거렸다. 이미 탈산업화에 희생된 전통적인 노동자 계층은 저임금 서비스 직종으로 내몰려 안전모를 벗고 대걸레를 손에 쥐었다. 빚을 갚기 위해 고금리 재대출 담보로 잡힌 집은 성인이 되어서도 독립하지 못한 자녀와 손자들로 북적거렸다. 일터에서는 작업 효율만 강조되고 임금은 오히려 떨어졌다. 의료보험료가 주택 대출금이나 집세보다 더 높아지자 보험을 포기하고 진통제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부자들도 갈라졌다. 이제 백만장자 정도는 부자 축에 끼지도 못한다. 미국 북동부 관광지인 낸터켓 섬의 낡은 여름 별장을 좋아하는 구식 부자들도 마찬가지다. 상류층은 고급 주방용품 매장인 윌리엄스-소노마에서 쇼핑하는 그저 그런 부자들과, 다른 사람을 시켜 쇼핑을 하는 초부유층으로 나뉘었다. 초부유층은 쇼핑뿐 아니라 자녀 양육, 계산서 지불, 고용인 관리, 파티 개최도 모두 남의 손을 빌려서 한다. 부의 정점에 선 그들은 로마제국 이래 유례가 없는 사치를 부렸다. 엄청난 연봉을 받으며 초부유층에 편입된 CEO, 헤지펀드 운영자, 금융인 들은 전용 제트기의 실내장식을 위해 전문가를 고용하고, 맨해튼의 알곤킨 호텔에서 1만 달러짜리 마티니를 마시고, 보드카 오줌을 누는 다비드 얼음 조각상을 세워 놓고 지중해의 사르디니아 섬에서 200만 달러를 들여 생일잔치를 벌였다.
많은 사람들이 의혹을 품듯이, 소수가 막대한 부를 쌓아올리는 현상과 다수가 불안과 절망에 휩싸인 현상 사이에는 연관이 있다. 상류층이 사치를 부리는 데 사용되는 돈은 어딘가에서, 더 정확히는 ‘누군가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미국 내에서 새로운 유전이나 우라늄광이나 금광이 발견된 일도 없거니와 이라크 전쟁으로 이득을 본 것은 군수 계약자와 공급자들뿐인 만큼 그 돈은 다른 미국인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자본주의적 혁신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여력이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쥐어짜는 기술이었다. 노동자의 연금과 혜택을 빼앗아 기업 이익 부풀리기, 사기성이 농후한 대출 상품 팔기, 보험료를 올리는 한편 보험금 지급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가입 거부하기, 노동력을 감축해 주가 띄우기…. 심지어는 초과근무 수당을 주지 않으려 근무시간 기록을 조작하는 일까지 있었다.
개인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항상 제로섬 게임이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의 자본가들은 결코 성자가 아니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잘 살아야 집과 자동차와 식기세척기를 구입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상류층에게 부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두가 함께’라는 사회의 기풍이 어느새 ‘가질 수 있을 때 가져라’로 변질되었다. 환경이 파괴되고, 기반 시설이 무너지고, 공공 병원이 문을 닫고, 바자회 수입으로 학교를 꾸려 가고, 노동자들이 지쳐 쓰러진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보험료를 올리고, 임금을 깎고, 청구서에는 정체불명의 수수료를 계속 덧붙여라. 뒤에 처진 자들은 악마가 낚아채도록 내버려 두면 그만이다.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빈곤층이 마침내 소비를 중단하고 주택 대출금을 갚지 못하게 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들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최상류층이 신나게 부를 쌓아 가고 있을 때 나머지 우리는 어디에 있었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갈 때 무슨 생각을 했던가? 눈앞에 닥친 일에 정신이 쏠린 나머지 우리는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날아드는 청구서를 지불해야 했으며, 일자리를 지켜야 했고, 아이들과도 가끔은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러다 겨우 한숨 돌리고 공공 문제에 관심을 돌려 보면 들리는 이야기라고는 좌절과 고통을 안겨 주는 것뿐이었다.
군사 역사상 가장 비합리적인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이라크 전쟁을 보자. 우리를 공격한 것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이슬람 전사들이 주축이 된 무리였으나 미국은 그와 무관한 국가, 당시 중동에서 가장 세속화된 국가를 침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동상을 쓰러뜨리고 마을을 짓밟는 데 일시적으로 도취된 우리는 ‘우리의 군을 지지하기(Support Our Troops)’ 위해 모였다. 그러면서도 사실은 군의 어떤 행위를 지지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이라크 전쟁이 2002년 불거진 기업 스캔들2)로부터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이론도 있거니와, 혹시 그랬다 쳐도 이번에는 전쟁 자체로부터 눈길을 돌려놓을 것이 필요해졌다. 아부그라이브의 끔찍한 비밀이 폭로되었고 5년 동안 전쟁 비용으로 지출한 돈은 5860억 달러에 달했다. 4000명 이상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부랑자 국가(pariah nation) 취급을 받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중학교 생물 수업이나 성교육에나 어울리는 사안들이 중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줄기세포가 대표적인 예다. 이 조그마한 실체와 그보다 몸집이 약간 더 큰 사촌인 배아를 방어하는 데 정치적 경력이 걸려 있는 듯 너나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동성 결혼 또한 경제적 약탈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황당한 쟁점이었다. 한 개인의 결혼이 어째서 다른 사람의 결혼에 위협이 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동성 커플이 제단 위에서 포옹하는 장면으로부터 대중의 관심을 돌려놓을 다른 쟁점이 부각되지 못해 선거판은 부자 정당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동시에 결혼하지 않은 청년층에게는 기도 및 찬물 샤워와 함께 금욕이 강하게 권장되었다.
불법 이민 문제도 초점 흐리기에 즐겨 사용되는 재료다. 불법체류자들은 잔디를 깎고, 사무실을 청소하고, 육류를 포장하고, 가금류를 손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약을 운반하고, 사회보장 혜택을 갈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인 양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사회복지 축소로 높아진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만만한 표적이었다. 20년 전의 우익 선동가들은 사회복지 수혜자들을 꼴 보기 싫은 빈민층의 대표로 놓고 공격했고, 이제는 이민노동자들에게 희생양 역할을 떠안겼다. 두 경우의 전략은 동일하다. 빈곤층의 일부를 따로 지목해 적이란 딱지를 붙여, 경제 특권층에게 향할지도 모를 분노를 그쪽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민을 제한하자는 의견에 합당한 근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연금을 빼앗아 가고 수상쩍은 모기지 상품을 우리에게 판 것은 멕시코인들이 아니었다.
이런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눈이 흐려진 데는 2000년대에 유행한 주술적 사고의 영향도 있었다. 욕구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가지는 비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서점의 소설 매장은 수련 중인 어린 마법사 이야기로 뒤덮였다. 페미니즘 대신 공주 판타지를 받아들인 여성들이 화려한 결혼식을 통해 꿈을 실현하려 들면서 젊은 부부들은 미처 자동차 대출을 받기도 전에 파산 상태에 놓였다. 한편 신(神)은 우리의 당면한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서 존재하므로 ‘원하는 것을 콕 찍어 요구하라’는 식의 주술적 종파가 종교 집단 가운데 가장 빠르게 세를 넓혔다.
도대체 ‘경고 신호’가 얼마나 더 울려야 우리는 정신을 차리게 될까? 무너진 제방과 물에 잠긴 마을, 텅 빈 식료품 저장실, 통상적인 치료를 받지 못해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늘어나야 한단 말인가? 21세기도 10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 눈앞에는 문과 창을 판자로 막은 집들이 줄지어 늘어섰고, 깨진 꿈들이 쓰레기처럼 뒹구는 황량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평범한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이 나라에서는 약탈이 너무나 오래 지속되어 왔다. 약탈 뒤에 남은 것이나마 차지하기 위해 너무 많이 일하고 너무 많이 소비했던 평범한 사람들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 ‘미국’이라는 아름다운 관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부를 재분배하는 새로운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한쪽엔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고급 주택 단지, 다른 한쪽에는 트레일러 파크와 빈민가 다세대주택이 존재하는 분열이 지속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어느 한쪽에 속하게 될 때까지 구경만 하는 방법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때가 되면 세상이란 단어 앞에는 ‘예전’이라는 슬픈 수식어가 붙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가 단결을 위한 진정한 기반,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집단적 열망을 가슴속에서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우리가 노력한다면 미국의 잃어버린 영광을, 무질서하게 뻗어 나간 도시와 담장들이 세워지기 이전에 이 땅이 지녔던 아름다움과 한때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존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공통으로 직면한 위협이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외교정책이 키워 낸 적들뿐 아니라 기후 변화 및 물과 석유 공급 감소라는 전 지구적 과제가 우리를 일깨울 수도 있다. 나아가 우리의 단결과 연대감을 이 지구에 사는 인류 전체로 확산시키려는 자신감도 언젠가는 회복하기를 기대해 본다.
5장
암보다
무서운
의료 제도
거대한 내부의 적
머리를 숙이고 백기를 들어라. 제3제국, 일본제국, 소련, 마누엘 노리에가, 사담 후세인을 제압한 미국이 감히 맞설 수 없는 적을 만났다. 민간 의료보험 산업이 그것이다.
항복을 알리는 신호음이 곳곳에서 들린다. 저명한 진보 정치학자에게서도 그런 신호음을 들었다. 그가 장황하게 설명한 말을 요약하면, 민간 의료보험 산업의 규모를 감안할 때 단번에 국가 단일 보험 제도●로 이행하면 경제 전체에 파괴적인 영향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빈민 구호 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를 이끄는 한 시카고 여성에게서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민간 산업이 이렇게 커졌는데 어떻게 우리가 캐나다 방식으로 갈 수 있겠냐고 그녀는 반문했다.
그렇다. 미국의 민간 의료보험 산업이 거대한 것은 사실이다. 예산및정책우선순위센터(Center for Budget and Policy Priorities)의 레이턴 쿠에게 받은 자료를 보면 2007년 미국인들이 민영 의료보험료로 지출한 돈은 7760억 달러에 달한다. 또 보험사들은 보험금 지급 거절 업무에만 40만 명을 고용한 대규모 고용주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의사들은 보험회사와 싸우기 위해 원무실 인력을 늘린다. 개업의인 아툴 가완디는 『뉴요커』에 “병원이 하기에 따라 보험사의 지급 거절 비율을 이를테면 30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낮출 수 있다. 의사들은 그렇게 해서 돈을 번다.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보험사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 우리는 보험료를 내서 보험사와 의사들 간의 ‘전쟁’ 비용을 지불한다.
그런데도 민간 의료보험 산업이 새로운 고객을 찾는 데 혈안이 된 것을 보면 아직 충분히 거대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다른 산업과 달리 이 산업은 고객을 ‘거절’함으로써 성장한다. 카르티에나 렉서스, 노드스트롬 백화점은 고객이 아무리 초라하게 보여도 고객의 돈은 반긴다. 그러나 보험회사인 애트나는 그렇지 않다. 병력이 있으면 보험사는 가입을 받아 주지 않는다. 민영 의료보험은 결코 병에 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도 왜 위험 분담을 전제로 한 ‘보험’이란 단어를 쓰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건 보험이 아니라 강탈이다.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자. 미국에서는 의료보험료를 감당할 수 없거나 자격 요건이 안 되어 매년 1만8000명이 사망한다. 9.11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여섯 배에 달하는 수다. 의료보험 상실이 두려워 마음에 맞지 않는 직장에 매여 있는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사담 후세인은 1만8000명의 미국인을 죽이지 않았다. 소련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애국적 분노와 막대한 군비 지출로, 후세인의 경우엔 무장 침공으로 적을 제압했다. 그런데 왜 보험 산업 앞에서는 겁을 집어먹고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가?
내게 한 가지 계획이 있다. 첫째, 대형 보험사의 위치를 알아낸다. 대단한 첩보 활동은 필요치 않다. 구글이면 충분하다. 둘째, 그 보험사들의 방어 병력을 파악한다. 성난 고객들로부터 본사를 지키기 위해 상당수의 경비원들이 있겠지만 그 정도는 몇 개 여단만 동원하면 제압할 수 있다. 셋째, 보병대 공격에 이어 필요하면 공습도 고려한다.
“안 됩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고용된 보험금 지급 거절 인력 40만 명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이들을 위한 계획도 있다. ‘실업’이 대안이다. 그렇다고 쩨쩨하게 굴지는 말자. 일반적으로 국가 단일 보험 제도에서는 해고된 이후에도 계속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일자리를 잃은 보험사 임원들에게는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추천하고 싶다. 가정 간병인이 어떨까?
실제의 적과 가상의 적 양자를 상대로 무수히 싸우는 동안 우리를 지탱해 주었던, 전통을 자랑하는 ‘마초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의료보장 문제에서 이미 우리는 적의 정체를 밝혀냈다. 남은 것은 적을 쳐부수는 것뿐이다.
빈곤층에 바가지 씌우기
의료보험을 둘러싸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 가기만 한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싼 보험료, 의료보험 혜택 제공을 점점 꺼리는 고용주들, 보험사가 황송하게도 보험금을 지급해 주도록 계약된 의사를 찾는 일의 어려움 등등. 그나마 이건 보험에 가입된 운 좋은 사람들의 얘기다. 그래도 너무 어두운 면만 보지 말고 컵에 물이 아직 절반은 차 있다고 생각하자. 의료 비용과 소득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는 있으나 아직까지 아픈 게 불법은 아니니까.
그러나 분위기가 뚜렷이 변하고 있다. 병원들은 궁핍한 환자로부터 밀린 치료비를 받아내기 위해 점점 더 가혹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당뇨병으로 샴페인-어버너의 칼 병원에 579달러를 빚진 정비공의 사례를 보도했다(보험 가입자 자격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일 때문에 법원 청문회에 출석하지 못해 체포당하자 보석금이 2500달러나 부과되었다. 이처럼 법원 출정일을 지키지 못해 체포당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병원들은 이를 ‘신체 압류’라는 기발한 명칭으로 부른다). 다시 한 번 컵에 물이 반은 남아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아직까지는 압류한 신체를 병원이 마음대로 장기이식에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비영리 자선단체라는 입장 탓에 그동안 병원은 그나마 관대한 채권자였다. 몇 년 동안 보험 없이 지낸 내 친구 한 명은 평생에 걸쳐 매달 25달러씩 갚기로 병원과 합의했다. 신체를 압류당할 걱정 없이 필요할 경우엔 치료를 받으면서 말이다. 지금은 더 이상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돈에 눈이 먼 이류 병원들만 경찰을 채권 회수인으로 활용하는 게 아니다. 예일-뉴헤이븐 병원 한 곳에서 3년 동안 받아 낸 체납 채무자에 대한 체포 영장만 65건이다. 만약 채무자가 병원 근무자라면 ‘압류’ 대상은 신체가 아니라 다른 것이 된다. 예일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찾아간 나는 접수계에 근무하는 타와나 마크스를 만났다. 마크스는 자기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병원에서 제공하는 의료보험으로는 치료비가 턱없이 모자랐다. 임금을 고용주인 병원에 압류당한 그녀는 20세기 초반의 컴퍼니 타운고용 등을 한 기업에 의존하는 도시을 연상시키는 채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병원들은 관행적으로 비보험 환자에게 보험 환자의 몇 배에 달하는 치료비를 청구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심화시킨다. 『포트로더데일 선-센티널』은 한 지역 병원이 보험 적용 환자에게는 6783달러인 맹장수술비를 비보험 환자에게 2만9000달러로 청구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LA 타임스』에 따르면, 영리 병원인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 체인에서 비보험 환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겨우 2퍼센트인데 반해 수익의 35퍼센트가 그들로부터 나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처럼 뻔뻔하게 바가지를 씌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형 보험사와 회원제 건강관리 단체 HMO는 병원과 협상해 고객이나 회원들에게 ‘할인’을 제공한다. 대신에 병원들은 비보험 환자에게는 마음대로 청구서를 발행한다. 병원 가운 사용료로 50달러를 청구한 사례도 있다.
1961년에 정신과 의사 토마스 사즈는 공식적으로 범죄나 죄악으로 분류된 행동, 예컨대 약물 중독이나 (당시의 기준에서) 성적 이상 행위를 ‘치료 대상’으로 보는 관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괴팍한 사즈는 이를 선하고 관대한 추세로 보지 않고 ‘치료 국가(therapeutic state)’의 손에 권한이 점차 집중되고 있다며 비판했다. 그의 지적이 지금은 얼마나 생경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범죄를 치료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병을 범죄시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본래 건강하고 원기 왕성했던 사람까지 포함해 거의 모든 사람이 의료-수형(受刑) 제도의 손아귀에 붙잡힐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일은 진료 기록에 기재될 만큼 중요한 병, 예를 들어 고혈압이나 당뇨병에 걸리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다음 단계로 당신은 직장을 잃고 의료보험을 상실한다. 혹은 수천 명의 프리랜서 작가들처럼(나처럼) 일자리는 있지만 보험 가입자 자격은 잃을지도 모른다(예전엔 프리랜서 작가들도 전국작가연맹을 통해 보험에 가입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험사가 연맹과의 계약을 거부했다). 새로운 보험사를 찾아보려 하겠지만 어디서도 당신을 고객으로 받아 주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기존 질병이 있는 처지가 아닌가? 그러다 그 병이 악화되거나 새로운 병을 앓게 되면 당신은 ‘자비 부담’ 환자로 병원을 찾아야 한다. 보험 환자보다 네 배나 많은 치료비를 내야 하는 당신은 지불 기일을 맞추지 못하게 되고, 요즘 병원들이 보이는 약탈적인 채권 회수 행태를 감안할 때 결국 감옥에 갇힐 가능성이 높다.
사회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질병과 범죄의 연관성을 주목해 왔으며 두 가지를 모두 일종의 ‘일탈’로 분류했다. 질병과 범죄에 적용되는 단어들에는 분명 유사한 면이 있다. ‘기존 질병(preexisting condition)’과 ‘전과(prior conviction)’가 그렇고, ‘의무 기록(record)’과 ‘사건(case)’이 그렇다. 예전에 나는 병원 검사에서 잠재적으로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병을 발견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의사는 기존 질병에 새로운 병이 덧붙어 의료 기록이 지저분해지면 곤란할 테니 약을 처방하지 않겠다고 했다.
의사가 베푼 그런 조그만 친절을 좋았던 옛날의 일로 회상할 날이 머지않았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애트나나 프루덴셜의 똑똑한 젊은 MBA 출신들은 병의 첫 징후를 보이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간단한 조치를 통해 엄청난 돈과 귀중한 의료 자원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치닫고 있을지 모른다. 진단과 입원, 채권 회수 시도 같은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병자를 바로 감옥으로 보내는 것이다. 앞으로는 순찰 중인 경관한테 기침이나 얼굴의 부기를 들키지 않도록 전전긍긍해야 할지도 모른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인 부모님 아래서 자란 내 어머니는 아이가 아픈 기색을 보이면 경멸과 조롱으로 대응하는 분이었으므로 나는 그런 사태에 대비가 되어 있다. 육체의 질병을 도덕적 실패로 여기게끔 키워졌기 때문에 발진이 생기거나 목이 따끔거리면 형무소에서 복역할 용의가 내 마음 깊은 곳 어디엔가 있다.
그러나 질병과 고통에는 주위의 다정한 반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대다수일 것이다. 그런 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물이 절반 차 있는 컵을 보여 드리겠다. 교도소에서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부실하긴 하지만 어쨌든 공짜다). 아동 성추행범, 도끼 살인자, 그리고 보험도 없는 주제에 아픈 뻔뻔한 악당 들에게도.
의료 서비스의 경제학
내 작은 세계를 뒤흔든 소식이 날아왔다. 우리 가족의 친구 하나가(로레인이라고 부르겠다) 병원의 집중치료실에 들어가 있으며 간신히 자력으로 숨을 쉬는 위급한 상태라는 얘기였다. 지난 몇 주 동안 “몸 상태가 100퍼센트는 아니야.”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상태에 놓일 징후는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뒤 그녀에게 유방암 4기 진단이 내려졌다. 이미 폐를 포함한 다른 장기로 암이 퍼진 상태라고 했다. 유방암의 ‘단계’에 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유방암에는 5기가 없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그런데 로레인은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녀의 말만 믿고 컨설팅 사업이 순조로운 줄로만 생각했다. 회계원으로 일했던 로레인은 40대 후반의 나이로는 괜찮은 직장을 찾을 수 없어 개인 사업을 했다. 그녀는 뉴스 중독자에 탐욕스런 독자였으며, 가치 있는 일에 뛰어들어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자원봉사자였다. 항상 몇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곤 했는데 어느 하나 소홀함 없이 열심히 했다.
그랬는데 휴대폰 요금과 집세 부담으로 몹시 힘들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몰랐지만 최근에 아파트에서 나와 자기가 활동하는 비영리단체 중 한 곳에서 제공하는 무료 숙소로 옮겼다고 했다. 그러니 300달러에 가까운 유방 엑스선 촬영 비용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의료 문제에 관한 논쟁은 로레인 같은 사람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유방암처럼 치료비가 많이 드는 ‘재난’에 대비해 각 개인이 보험에 가입해 두어야 하고, 유방 촬영 같은 사소한 비용으로 쓸 수 있도록 돈을 따로 모아 둔 세금 공제 저축 계좌도 갖고 있어야 한다. 의사를 만나고 치료받는 일상적인 문제에 ‘개인적 책임감’을 갖는다면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큰 곤란을 겪지 않을뿐더러(보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 말은 그렇다) 국가 전체의 의료 지출도 에볼라 열병 근절 같은 보람 있는 과제에 사용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최소한 클린턴 행정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의료 제도의 문제는 바로 우리 의료 소비자들로, 우리가 의료 서비스를 지나치게 소비하는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의 자기 부담률 및 그 밖의 현금 지불 경비를 높여서 비용에 대한 자각을 심어 주면 우리가 혈액 검사, MRI(자기공명영상장치), 전립선 검사와 같은 신나는 일들을 자제할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로레인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소비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불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으며 흥청댄 것이 아니라 4700만 다른 보험 미가입자들과 마찬가지로 전혀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녀의 문제였다. 처음 멍울을 알아챘을 때 로레인은 인근 병원을 찾아가 연좌 농성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개인적 책임감’ 탓에 그녀는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의료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에게는 그 ‘개인적 책임감’이라는 게 얼마나 적용되는가? 나도 보험에 가입해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내가 소비하는 의료 서비스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매년 유방 촬영과 자궁암 검사를 하는 건 원해서 그런 게 아니다. 의사가 눈물로 위협하는 바람에 뼈 스캔을 받은 적은 있지만, 대장 내시경 검사실에는 절대 내 발로 걸어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뮌하우젠 증후군병원 치료를 받으려고 계속 몸이 아픈 척하는 이상 상태을 앓는다면 모를까, 재미삼아 치료를 받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의료 서비스의 경제학과 예컨대 모조 보석의 경제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모조 보석은 우리 소비자들이 수요를 통제한다. 모조 보석에 돈을 펑펑 쓸 수도 있고 눈길조차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의료에서 우리가 어떤 서비스를 소비할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전문가들이다. 물론 의료 소비자들 또한 운동을 하고, 담배를 끊고, 스카이다이빙을 하거나 상어가 있는 곳에서 수영을 하는 위험한 일을 피하는 등 ‘개인적 책임감’을 가져야 할 부분이 있다. 올바르게 먹는 것도 거기에 속한다(올바르게 먹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호하다. 식습관에 대한 충고는 한 달이 멀다 하고 내용이 바뀌니까). 그러나 피를 뽑히고, 유방 촬영을 하느라 가슴이 짓이겨지고, 자궁 경부 세포를 긁어내는 불쾌한 경험의 빈도를 결정하는 것은 의사들이다.
만약에 의료 소비가 우리 자신의 통제하에 있다면, 나는 잘 아껴 두었다가 현명하게 사용하자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풍수해를 걱정해 집에 보험을 들어도 비와 바람을 통제할 수는 없듯 의료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사고를 당하거나 중병에 걸렸을 때 어떤 치료를 얼마만큼 받아야 할지에 대한 결정권은 다른 사람이 쥐고 있다. 우리가 보험이라는 형태로 위험을 분담하는 것은 그 위험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해야 되니까 착실히 돈을 모으라고 할 수는 없다.
전 국민 의료보험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는가? 로레인의 경우를 냉정하게 살펴보자. 만약 그녀가 일찍 진단을 받았더라면 집중치료실에서 빈곤층 의료보장 기금을 축내지 않고 유방 절제술과 화학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두려움에 떨며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지금쯤 밖에서 열심히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머리말 전문, 제5장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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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
있는 자, 가진 자, 배부른 자에겐 두려운 저격수. 없는 자, 못 가진 자, 배고픈 자에겐 든든한 지원군. 현장에 밀착한 글쓰기, 유머와 날카로운 비판이 어우러진 개성 넘치는 문체로 수많은 독자를 거느린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사회 운동가다. 1941년 미국 몬태나 주에서 태어났으며 록펠러 대학에서 세포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시 빈민의 건강권을 옹호하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다가 전업 작가로 나섰다. 20여 권의 책을 썼으며 『뉴욕 타임스』 『타임』 『하퍼스』 『네이션』 등 미국 주요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술 활동과 사회 참여가 조화를 이루는 보기 드문 작가로,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위한 조합 조직 ‘United Professionals’의 창설자이자 미국에서 가장 큰 사회주의 조직인 DSA(Democrtic Socialist of America)의 명예 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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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전미영
언론사와 기업에 근무한 뒤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다크 플랜』 『오일 카드』 『자기신뢰』 『사랑받지 못한 어글리』 『숏버스』 『긍정의 배신』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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