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인민, 담론장, 그리고 근대
사회학자의 역사 기행
그렇게 필자는 여행을 떠났다. 사회과학자나 역사학자에게 근대는 항상 궁금한 신천지다. 한국의 현대 사회를 결정짓는 무슨 일인가가 그때 일어났고, 나의 조부의 조부가 근세로부터 걸어 나와 당시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변화에 휩쓸렸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엿보려고 하는 호기심은 개화기 근대에 관한 수많은 연구들에 의해 그만 또 다른 낭패감으로 변하고 만다. 사료와 사실로 무장한 선수들이 각 영역별, 주제별로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각양각색의 물건을 파는 노점상들이 가득 찬 장시와 같다고 할까. 장을 돌아다니며 기웃거리고 먹고 마시고 물건을 흥정하는 것은 즐거운데, 파시 후에 찾아오는 막막함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온갖 물산이 집하되는 저 장시의 특징을 뭐라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고, 예를 들어 왜 어물전, 건어전은 없는 것인지, 다른 장시에 비해 가격이 싼지 비싼지를 누가 말해 주지도 않는다.
사학자들에게는 조금 불쾌한 말이겠지만, 한말 개화기 한국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선교사들의 여행기, 여러 목적으로 조선에 온 외국인들의 개략적 소개서들이다. ‘은둔의 나라’, ‘조용한 아침의 나라’, ‘금단의 나라’로 묘사되던 조선은 이들에게는 높은 문명을 간직한 채 늙어 가는, 앞으로 닥칠 어두운 운명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단단한 전통의 껍질 속에 안주해 있는 미몽의 나라였다. 한양에서 부산까지 여행한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 바라(Charles Louis Varat)는 덤불이 무성한 산길을 헤치고 논과 밭을 지나 남하했다. 가는 길에 호랑이 은신처를 발견했고 큰 칼을 쓰고 호송되는 죄인의 행렬을 목격했다. 스웨덴 기자 아손(W. Ason Grebst)은 1898년 독립 협회 군중대회가 열렸던 당시 남대문 성곽에 걸린 아이들의 시체를 목격해야 했다. 천연두로 죽은 시체였는데, 한양 도성인들은 그곳에 시체를 걸어 놓으면 마마 귀신이 길을 잃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린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비숍은 남한강 유역을 탐사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엽전으로 바꿀 수도 없었다. 배가 엽전 무게로 가라앉을 위험이 있었다. 이런 풍경들은 사회학자로 하여금 많은 질문들을 유발한다. 도대체 한말 조선에는 육운(陸運) 체계가 어떠했는가? 곡물과 주요 상품 유통 수단은 보부상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 그렇다면 조선 후기 도시 형성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당시 정치, 행정, 경제의 중심인 한양에는 개화된 사람과 주술 신앙에 젖은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는 뜻인데, 유교, 불교, 도교, 천주교, 기독교가 뒤섞인 사회에서 일반 서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전염병과 재앙이 닥칠 때 주로 주술 신앙에 매달렸던 조선인은 문명개화의 물결을 어떻게 감당했는가? 민중 사학의 성전(聖戰)인 동학 농민 전쟁에서 서울로 진격했던 동학군이 가슴에 붙였던 부적 ‘궁궁을을(弓弓乙乙)’은 ‘근대적 민중’의 상징인가 아닌가? 비숍의 지적처럼, 근대 경제의 상징인 화폐가 대량 유통되었고, 지방 장시에서 은과 바꿀 수 있었다면 한말 조선 경제는 근대적이었는가 아닌가? 질문이 꼬리를 문다.
근대 국가의 외양을 착실히 갖춰 갔던 대한 제국에 대한 평가도 고종의 개혁 정치의 성격을 둘러싸고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근대성의 기원에 합당하다는 입장과 아니라는 입장은 열띤 논쟁을 거치고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가설로 남아 있다. 필자가 이 논쟁에 뛰어들 능력은 없지만, 의문은 제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숍은 남한강변 어느 고을에서 거의 쓰러져 가는 남루한 관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여기 관리들은 이 낯선 이방인에게 통행세를 받고 싶어 안달이었다. 통행 허락 여부가 지방관의 자의적 권한에 달려 있었고, 그 관료적 검열 권한을 이용해 뇌물을 받고 싶어 했던 것이다. 고종의 개혁 정치는 이런 지방 관아에도 그 여파가 미쳤을까?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한 피나는 노력이 전국의 행정 체계에 스며들었을까? 대한 제국에 관한 연구들은 대체로 중앙 정치와 한양 중심의 변화에 시선을 집중시켜 근대성의 발화를 입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로서는 지방의 상황, 지방민의 처지와 인식이 그 개혁에 영향을 받고 있었는지가 더 궁금하다.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했던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와 릴리어스 언더우드(Lillias H. Underwood)는 1888년 북부 지방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평안도 어느 마을에서 도적 떼를 만나 혼쭐이 났다. 마을 한복판에서 그들 일행을 둘러싸고 위협을 가하는 도적들이 무서워 주민들도 공포에 떨었다. 언더우드는 소지한 권총을 발사해 군도를 잠시 물리쳤으며, 군도 우두머리와 모종의 협상을 한 끝에 관아가 있는 인근 마을로 밤새 피신할 수 있었다. 제물포에서는 청군과 일군이 세력을 과시했던 때였으며, 개항장을 통해 양물이 쏟아져 들어왔던 때이고, 갑오개혁이 진행되기 직전의 시기, 말하자면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 문명개화가 화두였던 시절이었다. 언더우드 부부의 신혼여행은 북부 지역에 교회 거점을 구축하고 독실한 신자들을 찾아 책임자로 임명하려는 선교 활동이 목적이었다. 언더우드 부부는 기독교 신자들의 신원과 지역 정보를 미리 접했을 것이지만, 그들이 방문한 마을에는 예외 없이 독실한 기독교 교인들이 넘쳐 났다. 평안도와 황해도 산간벽지에서 언더우드 부부 일행은 ‘하늘신’이 아니 ‘새로운 신’을 믿고자 하는 열렬한 신도들과 마주쳤다. 상층 계급은 물론 농민, 노동자, 상인, 부랑자에 이르기까지 상하 신분의 사람들이 기독교로 전향하는 것을 감격스럽게 바라봤던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10여 년 전에는 6대 천주교 교구장이었던 리델 주교가 서울의 감옥에 갇힌 채 잔인한 고문으로 죽어 가는 천주교도에게 성은의 축복을 내렸던 그런 조선이었다. 리델 주교는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하층민들이 서양의 낯선 종교에 귀의하며 스스로 순교의 길을 택하는 것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자의 나라에서 그것은 가히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때 향촌에는 농민들에게 유토피아 의식을 심어 주었던 동학이 전파되었으며, 급기야 그것은 유교를 대체한 서민 종교로 농민층에 급속히 파고들었다. 개혁 바람이 몰아치는 중앙 정치와 쇠락 일로에 있던 지방 관아, 문명개화와 접속한 도시와 중세 질서에 여전히 파묻힌 향촌, 동학도와 천주교도, 성리학적 우주관과 수많은 잡신, 외국인들이 진출한 개항장과 여전히 호환(虎患)과 괴질에 시달리는 벽촌 마을, 이런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성’이 개화기의 맨얼굴일 터이다.
그런데 개화기 연구들에서 이런 맨얼굴을, 개화기의 총체적 그림을 보여 주는 연구는 드물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적해 둬야겠다. 역사학 내부에서도 세분화된 전공 영역과 특정 주제에 매달리는 소재주의가 이런 경향을 낳았을 터이고, 오직 사료로 말한다는 역사학계의 준엄한 내규가 조각 그림이라도 정밀하게 보이겠다는 소박한 태도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소재별로 분절된 논문들, 주제별로 구획된 연구들, 그리고 영역 간 담론과 소통의 결핍이다. 경제사는 사회사를, 사회사는 정치사를, 정치사는 문화사를 외면한 채, 오직 한 단면의 진화 과정을 추적하는 것, 때로는 그 소재의 분석에서 얻은 작은 추론을 연장해 개화기 전체를 채색하는 모습이 개화기 연구의 지배적 경향이다. 통사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개화기 변동을 설명하는 거시 명제와 변인들의 정립, 각 분야의 연구를 가로지르는 인과 분석이 아쉽다는 말인데, 그런 유형의 연구는 잘 찾아볼 수 없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동학, 위정척사, 개화 담론이 엇갈리는 가운데, 농민은 수취 체제의 문란과 수령 이서 집단의 가렴주구로 황폐화된다. 유랑민과 화적이 들끓고, 하층민과 노비가 도시로 이주해 고공(雇工)이 된다. 신분 질서는 거의 붕괴된 것으로 묘사되고, 일·청·러의 각축전, 파벌 간 권력 투쟁이 조선의 쇠락을 재촉한다. 이런 파국적 상황을 배경에 깔고 나서 연구자들은 역사 발전의 동력을 건져 내야 한다는 비장한 사명감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동학 연구자들은 개화기를 동학난과 농민 전쟁으로 일관하고, 개화당 연구는 그 시대를 문명개화를 논하는 지식인 담론과 사회 운동으로 가득 채운다. 민란과 동학에서 민중 운동이, 개화 담론에서 민족주의가, 독립 협회로부터 자유주의가, 대한 제국에서 근대화 개혁이 발화되어 20세기 근대의 문을 각각 열어젖히는 것처럼 보인다. 체계적 역사 연구에는 계통(系統)과 회통(會統)이 중요하다는 신채호의 가르침을 씨줄과 날줄 삼아 명제를 이끌어 내는 연구자들은 별로 없다. 미시적 연구와 목적론적 연구가 개화기 근대에 관한 한국 사학의 연구 경향을 특징짓는 두 개의 조류다. 그것도 이론과 방법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료의 풍부함과 해석의 깊이, 연구자의 시선과 입장이 문제시될 뿐이다.
연구 주제와 구성: 근대의 기원과 인민
이제 이 책에 대해 말할 때가 되었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세 가지다. (1) 왜 ‘근대의 기원’을 인민과 결부시키는가?, (2) 인민을 결박시킨 조선의 통치 체계는 어떤 것이었나?, (3) 인민은 어떤 통로를 통해 그것에서 풀려났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은 ‘인민과 근대’, ‘조선의 통치 구조’, ‘국문 담론과 공론장’으로 각각 개념화된다.
인민과 근대
이 책은 ‘근대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연구’다. 한반도에서 발아된 ‘근대’는 ‘근대의 기원’을 갖고 있다. 그 근대는 일제 통치하에서 왜곡, 변형되고 해방 공간과 한국 전쟁을 거쳐 1960년대까지 긴 꼬리를 남긴 듯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1960년대 생활 양식과 사고방식에서 한말 개화기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 근대는 시간대를 거슬러 조선사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즉, 근대는 조선사의 심층 구조에서 ‘배태된’ 새로운 실체로서 한말 개화기에 발아했다가 일제 시대를 거쳐 1960년대까지 우리의 생활 양식을 지배했던 역사 변동의 특정한 속성이라고 볼 수 있다. 전기, 중세, 근대를 하나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려는 이 연구의 ‘연속론적 입장’은 근대를 중세, 또는 조선 초기와 단절적으로 규정하는 역사학계의 ‘단절론적 관점’과 구분된다.
필자는 앞에서 역사학계의 두 가지 경향, 미시적 연구와 목적론적 연구의 한계를 언급했다. 미시적 연구 또는 소재주의는 특정 요인의 발아와 성장에 집착하고, 목적론적 연구는 질적으로 다양한 요소들의 복합체를 ‘근대 만들기’의 관점에서 어떤 하나의 색깔로 채색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모두 부분적 설득력을 인정할 수 있다. 이 연구는 그 두 가지 연구 경향으로부터 가능하면 멀리 떨어져 조선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자 했다. 총체적 조망, 모든 역사가들이 그것을 주문하지만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사료 발굴과 해석만으로도 벅찬 역사 연구에 총체적 조망을 주문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잔인한 일이다. 그러나 못할 것도 없다. 조선 사회를 유지했던 기본 골격은 무엇인가? 그 프레임이 주저앉거나 붕괴하면 새로운 시간대가 도래한다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조선 사회의 기본 골격(또는 지배 구조, governance structure)이 구축되는 정도로 보면, 점진적 상승 과정(전기), 정점에서의 강화 과정(중기), 하강 과정(후기)으로 그려 볼 수 있겠다. 이 연구가 규명하고자 하는 근대는 하강 과정과 역비례해서 그 경향성이 점차 짙어지는 어떤 속성이다. 왜냐하면 조선의 기본 골격은 봉건 통치, 그것도 유교적 이상 국가의 완성을 위한 설계도이기 때문이다. 이웃 나라 일본처럼 명치유신 같은 근대 혁명이 발생했더라면 유교적 이상 국가의 외양이 근대 국가로 전환할 수 있었을 터인데, 조선의 통치 구조는 일본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확고해서 지배 계급을 위시하여 누구도 봉건 국가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국가와 지배 계급이 한 몸이었기에 국가의 붕괴와 함께 지배 계급도 동시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 나라가 조선이었다.
기본 골격, 또는 지배 구조의 하강 과정은 인민 대중에게 비로소 역사와 접속하는 ‘기회의 창’을 열어 주었다. 19세기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열렸던 기회의 창을 통하여 인민들은 ‘역사의 객체’로부터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주체라고 해서 민중사관이 강조하듯 역사 발전의 동력을 뿜어냈다는 뜻은 아니다. 지배 구조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인민 대중이 통치 구조로부터 이탈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의미이고, 이것이 다시 지배 구조의 와해를 가속화시켰다. 유교적 통치 구조가 와해되고 균열된 그 시점에서 근대가 발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역사가들이 얘기하듯 어느 시점에서 근대가 발아되었다고 단정적으로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특정 소재에 집착한다면 그런 언명이 가능할 것이지만, 통치 구조는 여러 겹─적어도 삼중 구조─으로 되어 있기에 특정 시기에 봉건 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근대가 출범했다고 말하는 것은 연속론적 관점에서 보면 논리적 모순이다. 그럼에도, 통치의 삼중 구조가 동시적으로 약화되는 19세기를 전후하여 이런 경향이 짙어졌다는 관찰은 그런대로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이 연구는 바로 인민 대중의 역사적 위상 변화에 주목한다. 인민도 역사적 소재의 하나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겠으나, 역사학계의 근대 연구에서 인민에 주목하는 연구를 찾기 어렵다는 것은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가장 중요한 역사 동인이자 주체적 행위자로서의 인민은 계약 질서, 보부상과 장시, 상공업, 경영형 부농, 민국 이념, 민족, 실학 등과 같이 역사학자들이 주목하는 근대적 요소와는 질적으로 다른 소재이다. 간혹 민중을 전면에 배치하는 민중사학의 과감한 연구들이 있지만, 피지배 계급을 역사의 동력으로 배치해서 정치사, 왕조사 중심의 지배 계급적 시선을 뒤집어 보려는 가치 개입적 의도가 강했다. 민중 개념에는 연구자의 투쟁적 동력이 실리므로, 그것도 목적론적 연구의 혐의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인민 대중이 모두 착취와 억압의 장벽을 뚫고자 했던 능동적 주체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 대부분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이었으며, 생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굴종적 상황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인민 대중에게 어떤 기회의 창이 자연스럽게 열렸는가, 고된 노동과 일상사 가운데 한스럽게 읊조린 판소리 한 자락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떤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는가, 봉건적 통제력이 느슨해지자 그들에게 어떤 삶의 선택권이 주어졌는가를 우선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인민은 수동적, 능동적 창구를 통해 근대로 나온다. 근대적 요소를 찾고자 하는 ‘내재적 발전론’이 이런 인민의 위상 변화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회는 국가 및 지배 계급과 인민 대중으로 구성된다. 서양의 근대는 국가(왕족)와 귀족이라는 전통적 지배층에 대해 서민들로 구성된 시민 사회가 태동할 때 출현했다는 평범한 사실을 논외로 하고라도, ‘인민의 위상 변화’가 질적으로 새로운 시간대를 가져온다는 것은 동양에서도 적용되는 역사적 명제다. ‘시민 사회의 태동’은 서양과 동양에서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근대의 출발이다.
민유방본(民有邦本)이라는 화려한 명분에도, 조선에서 인민은 오랫동안 통치 대상이자 역사의 객체였을 뿐이다. 수분공역(守分供役)을 다하는 것, 그것이 인민의 존재 이유였다. 지배 구조의 발전이 절정에 이르러 200년 정도 단단하게 유지되던 조선 중기까지 인민은 한 번도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가 없었다. 지배 계급이 구축한 유교적 이상 국가의 이념과 통치 구조가 인민들에게 정치적, 문화적 기회의 창을 열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대학자 정약용의 실학 체계는 유교적 이상 국가의 완성을 향한 재건축 설계도였는데, 여기에 간헐적으로 보이는 ‘인민의 진출’을 부분 허용하는 논리는 결국 지배 구조의 강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통치 구조가 약화된 틈새에 만들어진 ‘기회의 창’을 빠져나온 인민들은 문득 자유로움과 허허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수분공역을 부분적으로 면제받거나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독립하는 것만큼 두렵고 자유로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신분 질서의 와해와 도시 형성이 그런 이탈과 자립을 북돋워 주었다. 근대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러나 공동체의 일원에서 개인으로 변신하는 것은 전제 조건일 뿐 근대 사회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무엇인가 질적으로 새로운 인민의 특성, 봉건 체제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속성이 발현되어야 한다. 사회과학자들이 흔히 ‘사회(society)’라고 부르는 것, 이해관계로 엮여진 이익 사회(게젤샤프트)의 속성들이 집합적으로 발견되는 시점이 근대다. 그런 새로운 징후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면 앞서 소개한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1900년대 초 한양 시내를 산책하다가 신문을 읽어 주는 노인과 그 주변에서 나라 소식에 잔뜩 호기심을 갖고 경청하던 한 무리의 상인들을 보았다. 비숍은 1894년 한양 시내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군중, 오랑캐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저항 군중들을 목격했다. 그 행렬 속에서 비숍은 뭔지 모르게 불길한 근대의 징후를 읽어 냈다. 신문 읽어 주는 노인과 듣는 무리, 중세적 외양의 저항 군중, 1898년 독립 협회가 주최한 군중대회에 참여했던 인파는 분명 ‘중세적 인민’은 아니었다. 인민의 진화, 인민의 변모와 더불어 근대가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인민이 중세와 완전히 결별한 실체가 아니라 와해 일로에 있지만 봉건적 제도 틀 속에 놓여 있고, 이전 인민들이 남긴 전통의 유산 속에서 살아왔다는 점에서 ‘진화’다. 그런 의미에서 개화기 인민은 근세의 끝자락이자 새로운 시간대가 이어지는 지점에 놓인 그런 인민이다.
그 인민을 일단 ‘근대적 인민’으로 개념화하고자 하는 역사적 증거는 충분하다. 모든 인민이 다 그랬던 것도 아니고, 시민 사회의 속성을 충분히 갖추지도 않았지만, 봉건 체제로는 도저히 감당치 못하는 질적으로 새로운 조직이 태어난 시간대였기 때문이다. 자발적 결사체(voluntary association)가 그것을 입증한다. 자발적 결사체는 인민들이 자율적으로 모여 사적 이익을 자제하고 공적 명분과 공적 이익을 위해 헌신하고자 할 때 결성하는 조직이다. 조선 시대에 자발적 결사체에 버금가는 조직들이 존재했다. 향촌에 산재했던 동계(洞契), 송계(松契), 학계(學契) 등 촌계류(村契類)가 그것인데, 이들 전통적 계 조직은 사적 이익과 연관된 채 공동체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고, 조선 사회 전체의 보편적 이익과는 연관이 없었다. 그런데 1894년을 전후하여 생겨나기 시작한 자발적 결사체는 조선의 지배 구조와 지배 이념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자율적 조직이고, 사적 이해 관심과는 무관하게 국가적 차원의 공익과 명분에 기여하려는 목적을 향해 진군했다. 이런 조직을 스스로 결성하거나, 자율적 참여가 권장되는 사회는 분명 근대 사회임에 틀림없다. ‘사회’라는 근대적 개념이 도입되지도 생겨나지도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자발적 결사체가 결성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인민은 통치 대상으로서의 인민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인민, 즉 근대적 인민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 책의 주제 ‘근대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연구는 바로 인민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런 단계로 진화했는지를 규명하겠다는 의미이다. ‘진화’의 끝에 인민은 비로소 근대로 나왔다. 이 ‘근대적 인민이 탄생하는 과정’이 1권의 주제이고, 그 ‘인민이 시민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2권(근간)의 주제다.
조선의 통치 구조
도대체 조선의 인민은 어떤 통치 구조를 통과했는가? 이 질문이 ‘근대에 이르는 과정’에 해당한다. 조선은 세계에서 흔치 않을 만큼 통치 구조가 단단한 국가였다. 중국과 일본을 이웃하고 외침을 수차례 받으면서 50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비밀이 그 속에 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지식 국가’였다. 성리학을 유일한 국가 학문으로 설정하고 모든 것을 성리학적 논리 체계로 구축했다. 성리학은 종교이자 통치 이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지식은 종교이고, 종교는 정치였다. 지식, 종교, 정치 간 선순환 구조를 사대부가 관할했다. 왕권은 선순환 사이클을 상징하는 최고의 권력이었지만, 항상 지식 권력을 장악했던 사대부 세력의 감시와 견제를 받아야 했다. 사대부는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책임졌고, 왕족과 귀족은 권력의 합리성과 정당성인 왕통(王統)을 책임졌다. 일종의 분리 통치 구조였지만, 도통과 왕통은 성리학의 가장 높은 명제인 도덕 정치라는 큰 틀 속에서 일치했다. 도덕 정치에서는 도통과 왕통의 위계가 인정되지 않는다. 천리(天理), 천도(天道)와의 일치라는 유교 정치에서 왕과 사대부는 분업 관계에 놓여 있다. 인민은 도통과 왕통의 분업 체계를 완성하는 또 하나의 객체이다. 민유방본은 분업 체계의 도덕성을 보완하고 뒷받침하는 가치 체계일 뿐 실제로 민유방본이 본격적으로 실현된 것은 아니다. 지식, 종교, 정치가 삼위일체를 이뤘다는 뜻에서 이슬람의 칼리프 체제만큼 정종일치(政宗一致)의 정도가 높은 사회가 조선이었다. 그런데, 칼리프 체제가 부족으로 갈라진 사회였던 데에 비해, 조선은 지식·종교·정치의 삼위일체를 강력한 관료제적 통제로 구축했으며, 학문적 일체감으로 뭉친 사대부 계급이 그 관료제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점에서 칼리프 체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다. 지식·종교·정치를 삼위일체로 묶어 주는 것은 궁극적 진리의 근원이자 그 자체 종교인 ‘하늘의 이치(天理)’에의 믿음이다. 이런 유교 국가에서 왕은 대사제, 사대부는 중사제, 민호의 가부장은 소사제였다. 비숍 여사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500년 도읍에 종교 시설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놀랐는데, 사실은 왕궁을 비롯한 십만 민가가 모두 하늘을 섬기는 종교 시설이었다는 점을 이해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식·종교·정치의 삼위일체를 관할하는 것은 성리학(性命義理之學)이었고, 그것의 종교적 구현체인 유교였다. 우주를 운영하는 궁극적 진리인 이(理)를 구현하는 가장 적합한 방식을 좇아 사회 집단을 조직하고,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악(惡), 허(虛), 사(邪)를 버리고 미(美), 실(實), 정(正)을 획득하도록 교화하는 것이 도덕 정치의 목표다. 조선은 성리학적 우주관을 ‘거룩한 천개’로 하고 이를 실현시키는 세 개의 통치 체제를 가동시켰다. 향촌 지배(정치), 종교, 교육(지식)으로 구성된 삼중 구조가 그것이다. 이 삼중 구조를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ISAs)라 불러도 무방하다. 이 삼중 구조가 인민을 어떻게 신분 질서와 직역에 포박시켰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조선사의 핵심이자, 인민 대중의 역사적 위상 변화를 분석하는 데에 필수적인 작업일 터이다. 이 삼중 구조의 통치 효율성은 그야말로 세계적 수준이었다. 기근, 한발, 천재지변, 외침 같은 급박한 상황이 효율성을 자주 훼손했지만, 그때마다 삼중 구조의 통제력을 복원시켜 유교 국가의 이상을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갔다. 지식은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었다. 15~16세기에 걸쳐 이뤄진 『성리대전』의 간행은 조선이 조선적 성리학의 골격을 세웠다는 의미이고, 국가 철학의 구심점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조선은 관학을 통해 국가 철학을 전국 향촌에 보급했으며, 사대부의 통치 이념과 학문을 재생산했다. 재지사족들은 향교(鄕校)와 사우(祠宇)를 설립하고, 후기에는 서원(書院)을 건립해서 지식 체계를 가다듬고 전파했다. 향교가 교육 기관이라면 사우는 종교적 의례를 집행하는 기관이다. 유교국가에서 지식생산은 정치와 종교기능을 동시에 갖는다. 그러므로 세계에서 가장 철저하게 시행된 과거 제도의 기능은 통치의 삼중 구조와 정확히 대응한다. 국가를 위해서는 관료를, 향촌 질서와 가문을 위해서는 종교 집정관을, 지식 생산과 논리 체계의 확립을 위해서는 지식인과 학자를 배출하는 공식 제도였다. 조선은 ‘사(士)’와 ‘대부(大夫)’의 나라, 학자와 관직 사이에 수시로 출입할 수 있는 통로가 항시적으로 열린 나라였으며, 이들이 중앙과 지방에서 도성민과 향촌민을 성리학적 우주관 내부로 교화시키는 유교적 종교 의례를 동시에 관장했다.
인민을 단단하게 포박하는 이 삼중 구조가 유지되는 한, 중세는 성공적으로 지속되고 근대는 오지 않는다. 신분 직역을 충실히 수행하는 통치 객체로서 인민의 지위가 전혀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국지적 민란이 발생하기도 했고, 임꺽정과 장길산 같은 군도가 출몰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탈이었지 인민 대중의 전면적 저항은 아니었다. 서양에서 인민 대중의 지위를 변화시키는 기제들, 예컨대 시장과 상공업의 발전은 관료제적 통제하에서 그 싹을 틔우지 못했다. 시장은 국가에 종속되었으며, 재산을 축적한 신향(新鄕) 세력도 19세기 중반에야 비로소 전통적인 향권(鄕權)에 맞설 정도가 되었다. 중세적 인민이 근대적 인민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은 이 삼중 구조의 통치 효율성이 쇠락했을 때이다.
성리학적 우주관과 조상 숭배를 통치 이념과 결부시킨 ‘종교적 의례’, 신분 직역과 부세 의무를 강제하는 ‘향촌 지배’, 지배 이념의 도덕과 윤리를 재생산하는 ‘교육’, 이 각각의 축이 약화되거나 붕괴된다면 인민은 더 이상 유교 국가에 안주하는 인민이 아닌 것이다.3 후기에 접어들면서 종교, 향촌 질서, 교육 체계의 정당성과 유효성이 점차 쇠락하자 유교적 통제 질서로부터 인민의 ‘자발적 외출’ 혹은 결박 해제 상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종교로서의 유교가 한계를 드러냈다. 유교는 내세관이 없는 현세 종교였다. 죽음을 부르는 천재지변과 전염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조선 인민들은 정부가 그토록 탄압해 마지않았던 불교와 주술 신앙을 그들의 내면세계로 암암리에 불러들였다. 언더우드 부부, 비숍, 그리고 당시 조선을 여행했던 많은 선교사와 저널리스트들이 흥미롭게 목격했던 것은 남루한 집 안에 곱게 모셔 둔 귀신 단자, 콜레라가 번진 마을 입구에 걸린 고양이 그림, 무엇보다 칼과 요령을 흔들며 작두 위에서 광란의 춤을 추는 무당들과 밤새도록 쿵쾅거려 잠을 설치게 하는 굿판이었다. 그런 가운데, 18세기 말에 유입된 천주교는 조선 인민의 비어 있는 내세관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급기야는 유교가 궁극적 진리의 발원자로서 섬겨 마지않은 천리(天理)를 ‘하늘의 주인(天主)’으로 대치시켰다. 정신과 마음의 최종 주체로서 유교적 천리가 천주교의 천주로 바뀌자 수많은 개종자들이 속출했던 것이다. 군주와 사대부, 재지 사족의 종교적 권위가 손상됨과 동시에 중앙 정부와 향촌에서는 관료제의 부패가 진전됐다. 정조 사후 중앙을 장악한 세도 정치는 지식과 권력의 선순환 사이클을 망가뜨렸으며, 향촌에서는 구향과 신향 간 치열한 향전이 일어났다. 지식 생산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관학 체계에 대응하는 평민들의 교육 기관인 서당이 번성해서 문자 해독력을 갖춘 인민, 즉 문해인민(文解人民, literate people)을 길러 냈는데, 이것이 국가와 지배 계급의 공식 이데올로기에 대해 달리 사고할 수 있는 비판적 인식 능력을 키워 주었다.
조선의 근대는 어떤 주체 세력의 기획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지배 계급은 19세기 후반까지 유교적 이상 국가라는 초기의 목표를 버리지 않았으며, 인민 대중 역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근대적 형태의 어떤 것도 기획하지 못했다. 기획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지식 국가의 근간인 통제의 삼중 구조가 약화되자 인민 대중은 얼떨결에 낯선 미지의 세계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시간대인 것만은 틀림없었으나 그것이 근대인지를 알 도리가 없었다. 인민을 포박하는 통치 구조의 전반적 양상과 촘촘히 짜인 지식·종교·정치의 상호 관계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이 책 1부의 과제다.
세계에서 유례없이 단단했던 조선의 통치 체계는 왜 약화되었고, 그래서 왜 인민들의 결박 상태가 이완되었는가? 약화와 이완이 조선 중세의 쇠락에 해당한다면, 인민의 이탈과 도전은 ‘근대의 도래’를 암시하는 징후다. 근대에 관한 역사학계의 연구는 중세적 제도의 모순을 설명하고 그것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새로운 요인’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수취 제도의 모순에 대한 민중의 반발, 신분 질서의 와해에 따른 봉건적 통제의 약화와 직업 분화, 상공업 발전에 의한 신흥 세력의 부상, 제국 열강의 침략에 대한 민족의식의 각성, 권력 독점에 대한 지식 계층의 반발과 국론 분열, 세도 정치에 의한 경향 분리와 관료제의 부패 등이 그것이다. 중세적 제도의 몰락으로 근대의 출현을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연속론적’이지만, 중세적 ‘발생 기원’을 설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단절론적’이다. 근대는 중세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간대이지만, 중세와 근대가 완전히 단절된 이종(異種)의 것이 아니라 중세적 제도에 이미 근대가 발아하고 있었다는 점, 근대의 기원은 중세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는 점, 그리하여 중세와 근대는 계보학적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중세는 근대의 산모이다. 근대는 중세를 부정하고 태어난 자식이나 부모를 기억하지 못하는 천애의 고아도 사생아도 아니다. 형질 변경이 일어날 수는 있다. 그러나 중세를 버린 채 새로운 근대를 상상할 수는 없다.
인민 대중을 중세로부터 근대로 날라다 준 비행체는 무엇인가? 인민은 그 강력한 통치 체계에 저항할 어떤 지식도 의지도 배양할 수 없었을 터인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통치 체계의 내벽을 허물도록 만들었는가? 중세가 허용했던 어떤 생활 양식과 제도가 인민 대중으로 하여금 그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도록 만들었는가? 근대의 기원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종교(의례), 교육, 향촌 지배라는 세 개의 영역에서 각각의 통치 효율성을 약화시키는 내적 요인들과 내적 모순들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음은 앞에서 지적하였다. 그 각종 모순들을 ‘기원’으로 설정하고, 그로부터 발생한 새로운 현상을 ‘근대’로 개념화하는 일반적 설명 방식에 필자는 조금 회의적이다. 아무리 탁월한 분석이라도 소재주의와 목적론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분야별, 영역별 연구가 대부분 그렇다. 너무나 익숙한,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인과 관계가 등장한다. 설득력이 있지만 부분적이다. 한 분야에서 밝혀진 원인(因)은 다른 분야에서는 문제도 되지 않으며, 한 분야에서 밝혀진 결과도 다른 분야에서는 ‘근대’로 등록되지도 않는다. 이를 인민 대중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인민의 얼굴은 실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민족주의에 경도된 인민, 상공업에 종사하는 인민, 향권에 도전하는 인민, 민란에 가담한 인민, 관료제를 비웃는 인민 등등. 개화기는 실제로 그런 인민들이 혼효되고 병존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혼효된 인민 상(像)에서 근대적 표정을 일일이 가려내는 일이 역사학자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혼효된 인민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것, 분절된 각 영역사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인과 요인을 찾아내는 것은 사회과학자의 몫이다. 그 인과는 이미 중세적 제도에 배태되어 있던 중추 신경으로서, 어떤 역사적 계기를 통과하면서 인민 대중이 스스로도 예상치 않았던 ‘뜻밖의 결과’를 낳은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언문(諺文)이고, 언문으로 이뤄진 국문 담론(國文談論)이다.
주지하다시피,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시한 것은 성리학 경전의 내용을 백성들에게 보급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였다. 훈민정음은 한자의 발음 기호였다. 한자를 쉽게 읽는 방법을 창안한다면 무지한 백성들도 사서오경의 내용을 쉽게 익힐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훈민정음 창제 후 곧바로 사서오경 언해에 착수한 것은 통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 정치적 목적에서였다. 그 목적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문자 수단을 갖게 된 인민이 지배 계급과는 다른 인식 공간을 가꿔 가게 될 줄은 세종 자신도 예상치 못했다. 훈민정음은 민족어였다. 민족어는 보편 언어인 한문을 보좌했고 또 대립했다. 이 대립 관계 속에서 예기치 않은 씨앗이 싹텄다. 지배 계급의 세계관을 습득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비웃고 냉소하고 때로는 그것을 초월하는 인식 체계를 발아시켰다. 지배 계급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이른바 문헌 공동체가 느슨하게 형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고, 그 속에 근대의 씨앗이 배태되고 있었다. 인민들만의 국문 담론이 산발적으로 형성되었다. 그것에 노래를 실었고, 한을 풀었으며, 이야기를 만들어 유포시켰다. 상상적 담론 속에서 개인이 태어났다. 이 상상적 담론들은 유교적 통치 체계를 이루는 세 개의 축에 각각 달라붙어 밑동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중세의 완성을 위한 제도 또는 문물이 중세를 무너뜨리는 힘의 원천으로 기능한 것이다. 이 연구가 인민을 근대로 날라다 준 비행체로 국문 담론에 주목하는 방법론적 이유가 이것이며, 부제를 ‘공론장의 구조 변동’으로 붙인 배경이기도 하다.
공론장의 구조 변동-조선사에서 이런 연구가 가능한가? 조선사에 부르주아가 없다면, 인민의 진화양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근대라는 먼 미래에 시민이 ‘될’ 집단이며, 새로운 시간대 속에서 시민이 ‘된’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담론장(공론장)을 통해 근대로 나왔다. 인민은 진화한다.4 진화의 방향은 ‘통치의 객체’로부터 서서히 자리를 옮겨 독자적 주체성을 형성해 가는 쪽으로, 보호받아야 할 갓난아이 혹은 무지의 집단이라는 초기적 성격을 벗어나 현실의 모순을 깨닫고 극복할 수 있다는 앎과 신념을 획득하는 단계로 점차 나아갔다. 통치 체계를 이루는 세 개의 축을 약화시킨 추동력은 한 가지 공통 요인을 포함하고 있었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 특히 조선의 공식 문자인 한자가 아니라 한글 해독 능력을 갖춘 이른바 문해인민이 그것이다. 문해인민은 한자를 쓰는 지배층과 구별하여 한글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공유하는 기록 공동체다. 양반 사족들이 그들의 문자인 한자를 통해 소통하면서 그들의 ‘역사’를 써 나갔다면, 문해인민은 언문을 통하여 자신들의 현실을 돌아보고 독자적인 형상들을 만들어 갔다. 언문 독해 능력을 갖춘 문해인민의 존재가 중요해지는 이유는 조선의 정통 이념에 대한 긍정적 혹은 이단적 시선을 언문 소설, 교리서, 통문(通文) 등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생각을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마련된다는 것은 의사소통의 장(sphere of communication)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의사소통의 장은 개인적 삶의 울타리를 넘어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타인과 공유하게 만든다. 하버마스가 개념화한 ‘공론장(public sphere)’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겠으나,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교환하고 설득할 수 있는 기제, 타인의 낯선 생각을 접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은 사회 변혁에서 매우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문해인민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언문 소설을 서로 돌려 보고 같은 주제로 담화를 나눔으로써 알게 모르게 동의의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언문은 문해인민들에게 문헌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문자적 수단을 제공했다. 그것은 사대부의 세계관과는 다른 인식 공간이었는데, 그 속에서 ‘새로운 인민’은 싹을 틔우고 줄기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인민의 역할과 위상이 달라지는 것을 체제 변동이라 한다면, 체제 변동의 가능성은 바로 세 개의 축이 효율성을 소진하는 시점, 또는 세 개 중 어느 하나의 축이 붕괴되는 시점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언문의 체제 변동적 의미가 발견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언문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문해인민의 규모가 날로 증대함에 따라 언문 담론 또는 국문 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담론장이 형성되어 세 개의 통치 축을 약화시키기는 효과를 창출했다. 이 중심축의 약화는 관료들의 학정, 현실 변화에 신축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제도적 경직성 등이 주요 원인일 것이나,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 국문 담론이 지배층의 담론과 경쟁 관계를 유지하면서 장기적으로는 공식 이념을 약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하였다면 그런 명제가 성립될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한문 담론은 지배층의 공식적 담론으로 표현 양식, 의사소통과 전달 기제, 청중을 이미 갖췄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에 부합한다. 공론장은 공중(公衆, a public)으로 변한 사적 영역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 관심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성의 공적 사용’을 활용해 공적 권력에 대항하거나 논쟁을 요구하는 행위로부터 발생한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이 성립하려면 공중, 정보와 상품의 교환 기제, 봉건 권력에 대항하는 비판적 논리와 매체 등을 전제로 한다. 비록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과 재지 사족들은 상소(上疏)와 상언(上言) 제도를 통하여 국사(國事)와 공적 사건에 개입할 권한이 부여되어 있고, 그들의 붕당적 견해를 취합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기제인 서원과 鄕會(향회)를 배타적으로 운영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미 공중으로서 공론장을 형성했다고 보는 편이 적합하다. 구태여 명칭을 붙인다면 그것은 양반 공론장, 유자(儒者) 공론장, 사족 공론장 등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언문을 사용하는 문해인민의 관점에서 보자면 언문은 분산적, 산발적, 우연적 담론들로 이뤄졌을 뿐 ‘사족 공론장’처럼 의사소통의 기제, 서원, 향회, 사발통문과 같은 전달 매체, 문집, 서책 등을 향유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이성의 공적 사용’을 무기로 비판적 논리를 만들어 내는 공중으로 변할 통로와 기회가 평민과 천민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우연히 발화되고 우연히 표현 수단을 얻어 개념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크고 작은 언술 다발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담론이라 불러 마땅하다. 담론은 분산된 진술과 문장의 집합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맥락과 끊임없는 교호 작용을 통하여 설득력을 얻는다는 점에서 실천 개념과 닿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지배 담론이 권력을 강화해 가거나 정당성을 잃게 되는 다양한 모습을 포착하게 해 준다. 언문은 한문과 구별되는 사회적 상상을 인민에게 제공한다. 사회적 상상이란 문자 행위를 통해 얻게 되는 새로운 성찰이라고 한다면, 그 새로운 성찰 속에는 지배 권력의 허를 찌르고, 지배 이념의 논리를 뒤집고, 심지어는 지배 체제의 전복까지를 꿈꾸는 혁명적 이상이 싹트고 있었다. 이를 ‘사족 공론장’에 대한 ‘평민 담론장(plebeian public sphere)’이라 한다면, 이는 억압적 현실에 대한 개념 규정, 즉 저항적, 비판적 지식의 수원지였다. 통치 질서의 내부 균열이 발생하고 그것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국문 담론이 비판적 의식을 증대하면서 세 개의 축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징후가 어느 영역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각 영역에서 형성된 국문 담론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지배 담론과 갈등하고 대립했던 양상과 효과들을 가려내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통치 체제의 세 개의 축인 종교, 교육, 향촌 지배에 각각 대응하는 국문 담론을 ‘종교적 담론’, ‘문예적 담론’, ‘정치적 담론’으로 개념화하고, 이 각각의 담론이 전개된 역사적 양상과 지배 담론과의 대립 양상을 분석하는 것이 이 책 2부의 핵심 주제이다.
조선의 근대는 국문 담론이 한문 담론과, 평민 담론장이 양반 공론장과 각축을 이룰 만큼 성장한 그 단계에서 발현되었다. 종교적 담론, 문예적 담론, 정치적 담론이 지배 담론과 경쟁하면서 통치 체계의 세 개의 축을 내부로부터 서서히 무너뜨렸던 그 순간 말이다. 그때 지식 국가였던 조선은 지식과 정치의 분리 단계로 진입했고, 유교 국가의 틀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정조 이후 순조 시대부터 해체 속도는 매우 빨라졌으며, 그만큼 국가는 내외부의 변화에 대응할 수 없는 경직성의 공간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동학은 정치, 종교, 문예 담론이 결집하면서 폭발한 최대의 도전이었다. 문해인민의 관점에서 보자면 동학은 정치, 종교, 문예 담론에서 발전시킨 언문의 사회적 상상이 창출한 변동의 종합적 기폭제였다. 즉, 동학은 ‘언문 담론장’을 ‘평민 공론장’으로 확대 발전시키는 중대한 계기였다. 그러나 그 시도는 외세의 개입으로 좌초되면서 인민 대중은 곧이어 등장한 지식인 공론장, 즉 개화 관료, 유생, 유학생, 상업 부호들이 주축이 된 지식인 공론장으로 분산,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민은 신민, 국민, 동포, 민족 등의 새로운 개념으로 변환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변환이 조선에서 근대의 본격적 전개 과정일 것이다. 지식인들 중 평민 공론장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최초의 사람이 유길준이다. 그가 『서유견문』을 쓰기 전에 『대한문전』이라는 언문 문법서를 먼저 썼던 이유이다. 바로 이 평민 공론장과 그것에 의해 ‘시민으로 전환한 인민’에 ‘개화기 근대’의 요체가 숨어 있다.
(서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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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송호근
사회학자. 주요 저서로 1990년대 민주화와 노동문제를 분석한 『한국의 노동정치와 시장』(1991), 『열린 시장, 닫힌 정치』(1994), 『시장과 복지정치』(1997), 『한국의 노동복지』(1996), 『정치 없는 정치 시대』(1999), IMF 초기 외환위기를 맞는 사회학자의 비통한 심정을 담은 『또 하나의 기적을 향한 짧은 시련』(1998), 한국의 의료 분쟁과 제도적 모순을 분석한 『의사들도 할 말 있었다』(2001), 노무현정부의 등장배경과 통치양식을 분석한 『한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2003), 『한국,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2006)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04년 7월 이후 현재까지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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